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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last modified: 2014-11-18 15:56:49 by Contributors

乙巳士禍

조선 시대의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명종 1년이던 1545년,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충돌로 소윤이 승리하여 대윤일파가 모조리 숙청된 사화(士禍).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을 비롯한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사림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서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재위 8개월 만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수렴청정하게 되니 전세는 역전하였고, 이를 계기로 문정왕후의 남동생이었던 윤원형이 득세하여 윤임 일파를 제거하였다. 이 시점에서 훈구파는 대윤, 소윤 양 파로 나뉘어 그 속성이 변한 상태였고 을사사화를 계기로 소윤 계통이 외척 세력(척신)으로 자리잡아 사실상 훈구파의 개념은 소멸하였다.(그러나 훈구파에서 두가지 파벌이 있다.세조 등극에 공헌한 정난 공신들과 그들의 파벌인 구공신(정난공신)파 이후 이징옥,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운 신공신와 그들의 파벌인 신공신파 둘로 나뉘는데 구공신파는 갑자사화때 거의 전멸했다.중종이후의 훈구파들은 거의 신공신파에 해당된다)

구도는 대략 예조참의 윤원형을 위시로 지중추부사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대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이었다.[1]

한편으로 그나마 정계에 올라와 있던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였던 언적 계통의 사림파 또한 이에 휘말려 정계에서 쫓겨났고, 선조 대에는 이 시기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부활하여 척신 세력의 깔끔한 숙청을 주장하는 파벌과 척신 세력과 함께 살아남아 온건한 대응을 주장하는 파벌이 생겨났다. 이는 이조 전랑 문제를 계기로 생겨난 동인과 서인의 기초가 된다.

사실 4대 사화라고 하지만, 다른 사화들에 비해서는 이 사화의 규모는 매우 작다. 도리어 피바람은 이듬해 1월 이임, 나숙, 권벌 등 윤임을 두둔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고 2월 이중열, 성자택, 김저 등이 윤임과 한패라는 이유로 처형되기 시작함에 따라 시작되었고 그해 9월 재역 벽서 사건이 터졌으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홍윤의 옥사가 터지는데 이게 그 유명한 충청도가 청홍도가 된 사건. 이홍윤의 옥사는 죽은 사람만 서른명이 넘었고 양재역 벽서 사건도 조정의 거물들이 대거 유배되는 등 규모 자체는 엄청났다. (이언적 계통도 을사사화때는 사실 윤임을 몰아내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수행했다가 양재역 사건에서 삭직된다.) 그렇기에 을사사화 자체도 그 후 6년간의 "소윤의 잔혹시대"를 상징하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야한다.

을사사화의 피해자 중에는 이황 일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황의 형인 이해는 윤임 일파로 몰려서 갑산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으로 죽었고, 이황 본인도 홍문관 전한(典翰)에서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했으나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이후 선조가 즉위하면서 이준경의 주도로 양재역 벽서 사건과 이홍윤 옥사 등의 피해자들을 신원하게 된다. 당시 을사사화로 공신이 된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는데, 이준경은 이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했으나[2] 이이에게 면전에서 디스당하는 통에 논의가 경직되었고, 대간에서 7개월동안 물고 늘어졌지만 결국 위훈삭제에 실패했다.
을사사화의 위훈삭제는 인종 비 인성왕후의 승하 직전에야 결론짓게 된다. 인성왕후는 을사위훈의 문제를 평생 마음의 부담으로 생각했는데[3] 죽기 직전 선조가 위훈 삭제가 어렵겠다고 아뢰자 "감히 쉽게 고치겠습니까, 감히 그럴 수 없지요"하고 부르짖었다. 이후 선조가 건물을 나가자마자 안에서 인성왕후의 통곡소리가 들려 선조가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녹이나 받아 먹으며 살았으면 편안히 한 세월 보냈을 텐데 어쩌다 왕이 되어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면할 수가 없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인성왕후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선조가 급히 위훈삭제를 약속했고, 인성왕후는 그제야 편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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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담으로 예조판서는 윤원형이 즉시 먹었다.
  • [2] 이준경은 위훈삭제의 역풍이라고 할 수 있는 기묘사화를 10대 후반에 직접 목격했다.
  • [3] 중종의 적자요 인종의 동생인, 당연히 정통후계자일 수 밖에 없는 명종을 즉위시킨 공이 있다고 하면 누군가는 '정통후계자' 명종의 즉위를 막았다는 뜻이 된다. 임금의 사망 후에 후계가 불분명하면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은 대비가 될 중전이므로 감히 거론할 수는 없어도 원종공신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중전이었던 인성왕후에게도 혐의점이 있다는 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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