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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last modified: 2015-03-15 05:34:01 by Contributors

(ɔ) Jagello from
대한제국 교과서 수록 삽화

현재 을지문덕 영정

乙支文德

(? ~ ?) 이모티콘 아님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사람.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천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 신채호

Contents

1. 개요
2. 출신에 대하여
3. 여수전쟁(麗隨戰爭)
3.1. 1차 여수전쟁
3.2. 2차 여수전쟁
3.2.1. 수양제의 야욕
3.2.2. 유례 없는 준비
3.2.3. 수나라의 침공
3.2.4. 평양성 직공
3.2.5. 적진을 정탐하다
3.2.6. 유인술
3.2.7. 살수대첩
3.2.8. 수나라의 철군
3.2.9. 전투 분석
4. 전후의 삶
5. 평가
5.1. 김부식의 평가
5.2. 신채호의 평가
5.3. 안창호의 평가
6. 그 외에
6.1. 정체에 대한 논란
6.2. 이름에 대한 논란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고구려 영양왕 대에 활약했던 전쟁영웅으로 고구려-수 전쟁 당시에 고구려를 침략해온 수양제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불세출의 명장으로 유명하다.

당시 수나라[1]는 지금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었는데, 이런 수나라가 자존심을 걸고 전투병만 113만 명에 전쟁을 도운 자까지 합하면 300만 명 가까이 되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초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는 세계대전 말고는 역사상 최대의 병력이 동원된 전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수와 고구려 두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문명대전이었는데, 을지문덕장군은 이런 거대한 회전(會戰, pitched battle)에서 대승을 거둬 고구려는 물론 한반도를 벼랑 끝에서 구하는 전쟁영웅이 된다. 그 후 오랜 전란을 끝내고 통일한 거대한 수제국은 서서히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다...

참고로 중국에서도 굴욕적인 역사로 아는지 조선 초기에 명나라 사신 축맹이 조선의 집정대신인 조준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자, 조준이 시조로 살수대첩을 언급하며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고 비꼬자 축맹은 불쾌한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2. 출신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을지문덕장군을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의 인물이라고 기록하였다. 즉, 이 기록이 맞다면 을지문덕장군은 평양 출생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을지문덕장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을지문덕의 출생지와 가문의 계보 등이 불확실해서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서>에 기록될만큼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장군의 선대 계보 및 이후 행적이 기록에 없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역사서야 전해진 것이 없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중국의 사서를 검토해 봐야 하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이 일부러 을지문덕이란 인물을 배제시킨 것은 아닐테고, 또한 수양제가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양제는 이미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장군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이처럼 간략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중국인 입장에서 굳이 수치스런 패배를 안겨준 적장을 높이 평가할 이유도 없었고, 이민족의 영웅에 대해 자세히 기록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을지문덕장군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그의 출생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이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1979년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는 전해종 박사 화갑기념논총에서 을지문덕장군의 가계가 이주민 계통의 귀화 가문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약간의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을지문덕의 성씨인 을지(乙支)가 선비(鮮卑) 귀족의 성씨 가운데 하나인 울지(尉遲)와 음가가 비슷한데서 그가 귀화인이거나 귀화인의 자손일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울지씨는 본래 선비 탁발 부와 함께 북위를 건설하는데 공헌한 울지부의 성씨이다. 실제로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울지 성씨를 가진 이들의 활약은 작지 않았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 사서에 울지씨는 울지강(尉遲鋼)과 울지형(尉遲逈) 등 여럿이 보이는데, 을지문덕의 집안인 울지씨 가문은 580년에 수문제 양견이 찬탈을 꾀할 당시에 울지씨 출신의 울지형이 이를 막다가 죽자 화를 피하기 위해 고구려로 망명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룡은 을지와 울지의 발음이 비슷한 점, 자치통감 고이 8권의 주석에 을지문덕을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도 표기하기도 한다고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으며,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에 고대 한국어에서 존칭사로 쓰이는 지(支)를 붙여 을지문덕의 이름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한 편이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 홍양호은 자신의 저서인 해동명장전에서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한다. 다만 홍양호가 해동명장전을 쓴 시기는 삼국사기가 편찬된지 한참 후인 조선 후기였으며, 참고한 자료가 쓰여있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평양 일대에 전해지던 을지문덕에 대한 전설을 옮겨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명나라 장일규가 찬(撰)한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확언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본기에도 을지문덕을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대신이란 관직명은 아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 관을 썼다.”라고 하였다. 이 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귀족 계급의 관모는 소골(蘇骨)에서 발전한 관모로서, 왕(王)과 대신(大臣) 그리고 신(臣) 등 계급간의 구별을 좀더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을지문덕의 관직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대신이라 했으니 고위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3. 여수전쟁(麗隨戰爭)

수문제는 598년에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고구려를 장차 중국을 위협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주시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는 곧 양국간에 신경전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고구려와 수, 양국은 서로에게 재차 사신을 보내어 지리지형을 살피고 동태를 파악하는 등 첩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3.1. 1차 여수전쟁

수문제는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에게 30만 대군을 통솔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진격하여 요동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수문제는 고구려의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시가 음력 6월. 이제 슬슬 한여름에 접어들게 되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수나라 육군은 장마 때문에 보급의 수송에 어려움을 느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발생했다. 또 수군을 이끌던 주라후(周羅睺)는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가다가 때마침 태풍이 불어 바닷길을 통해 요동으로 오던 수나라 군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2]

수군은 어찌어찌 요수(遼水)에 도착했지만 이미 기진맥진했고, 육군의 열악함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음력 9월이 될 무렵 군사들을 이끌던 양량과 왕세적은 견디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럴만도 한것이 기록으로 보면 당시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이었다. 게다가 고구려의 영양왕이 그 무렵 스스로 자신을 요동 분토(糞土)의 신하 운운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표문을 보내자, 수문제도 망한 원정이지만 체면은 그럭저럭 차릴 수 있어 퇴각하였다.

이 1차 전쟁 당시에 고구려의 장수 강이식이 활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이 "임유관 대첩"을 지휘한 장수가 바로 강이식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전투 자체도 실제로 그런게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더구나 강이식의 경우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 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않으며, 신채호의 저서인 조선상고사에 올라와 있는 기록마저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올라와 있는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여 하여 실제에 의문이 있다. 다만 강씨 족보에는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임유관 대첩은 물론 태풍 이야기도 중국측에서는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중국측에서 하도 심하게 털려 천재지변 탓을 하며 기록에서 삭제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더한 패배였던 살수대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먼저 천재지변으로 당했음에도 장수를 벌했다는게 모순된다면서, 고구려가 수나라 군대를 힘대결로 이겼는데도 그걸 의도적으로 축소시키려고 태풍과 전염병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왜곡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가 선제공격으로 수나라를 도발한 이유가 태풍과 전염병으로 대군을 부리기 어려울 여름철에 공격하게끔 함정을 판 것이라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3.2. 2차 여수전쟁

3.2.1. 수양제의 야욕

수문제는 패전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후로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을 일체 중단시켰다. 전쟁 후에 문제는 고구려를 대하는 것을 전쟁 이전에 하듯이 했고, 영양왕도 해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3]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604년, 수나라에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명군으로 이름난 수문제가 사망하고, 양광이 새로운 수나라의 군주로 등극하게 된 것. 그가 바로 수양제다.[4]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패기와 야심이 남달랐던 수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万里长城)을 보수했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한다. 대운하는 사실 수문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스케일이 커진 것은 바로 수양제 덕분이다. 또한 양제는 고구려를 치기전의 사전작업으로 친히 원정을 떠나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이렇게 정복사업에 성공한 양제가 선제였던 문제 때부터 눈엣가시같았던 고구려를 그냥 놔둘리 만무하였다.

이런 양광의 과시욕과 통일된 초강대국의 출현에 고구려는 극히 긴장하였다. 양광의 정복사업이 한창 성과를 보이던 어느 해에 창국(高昌國)의 왕과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모두 친히 입조해 공물을 바쳤다. 호사스럽고 허세를 좋아하는 수양제는 이때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입조를 거절한 것은 물론이고 수나라가 보기에 불경스러운 전쟁 대비 등의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고구려가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607년에 고구려의 사신은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양제가 계민 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다. 앞서보듯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 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힘을 몹시 두려워했기에 차마 숨길 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양제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수나라의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수양제에게 이런 말을 간한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漢)·(晉) 때에 모두 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가 출동했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이에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 우홍(牛弘)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涿郡=베이징)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는 날에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가서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에 하는 최후통첩으로, 실질적인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었다.

3.2.2. 유례 없는 준비

대업(大業) 7년인 611년 2월에 수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에 원정을 위해 북상했다. 수양제는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양쯔강에서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간 다음,에,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하북의 탁군에 도착하였다.[5] 수양제는 입조를 하지 않으면 탁군에 오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이는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수양제는 백성들을 징발하여 몇개월만에 수백척의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군수물품을 긁어 모으고 차차 군비를 키워나가 무려 113만이라는 전무후무의 대군을 만들어 내었다. 이걸 군수, 예비, 보급까지 다 더해서 113만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경우도 있는데전 동원병력이 100만이 넘는 게 왜 평가절하가 되는 지는 넘어가자, 당장 삼국사기에 의하면 113만은 전투병력의 숫자고, 보급부대는 그 2배라고 되어 있다. 물론 너무나 엄청난 숫자라서 믿기 어렵겠지만, 분명히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기사) #

그러니까 '총 동원인원은 300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각각 숫자가 1만2천(기병 4천, 보병 8천으로 편대장 4명(혹은 8명) 존재)이상, 4만 이하인 군만 40군이요, 왕의 호위군만 10만 가까이 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식량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각의 병사들에게 군수물품과 군량미를 제공하여 군장으로 차고 다니게 했는데, 혁신적인 보급 방법이라기보다는 숫자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게 맞다.[6]

그런 수나라 군대가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 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드디어 군량을 수송했다.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에 큰 식량창고군이 있어 그곳에서 배를 이용해 탁군으로 실어 날랐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천리 였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소동이었다. 육로로 가는 병대들은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의 상황을 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고, 썩은 내가 거리에 진동하여 천하가 소동했다.

군대만이 아니었다.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가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은 멀고 험했으며, 두 사람이 쌀 석 섬을 날랐는데 그것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 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불법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다. 심지어 민가에서는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612년 음력 1월, 수양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총공격을 명했다.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 와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漢)과 (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이거 본인 사망 플래그 아닌가?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닦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 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이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 (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 (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 候城)· 제해(提奚)·답돈 (踏頓)·숙신·갈석 (碣石)·동이 (東▣)·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 에 모두 집결하라.─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3.2.3. 수나라의 침공

이리하여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잠입할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도 세웠다.

612년 음력 2월에 수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돌이였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를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이 공병 작업은 차질을 빚는데, 첫번째 시도때는 부교를 세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고 이로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의 대표적인 맹장인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과 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고, 하조는 이틀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수나라 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만, 좀 처럼 함락이 되지 않았다[7]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했고,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상당히 강한 저항을 했고, 전쟁 내내 3개월간 수양제의 공격을 버텨냈다. 흔히들 요동성이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의외로 요동성은 평야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한다. 요동성은 지금의 심양 언저리에 있는데,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벽의 흔적이 남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요동성 무덤의 벽화를 보면 이중성이었음은 확인이 된다. 이 요동성이 양제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비하며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이후에 여수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00만 정도면 당시 중국 인구의 5~7.7%에 해당한다고 한다. 정확한 규모는 추산하기 어렵지만 전투병이 113만이고 보급대는 그 배라고 했다. 그러나 보급대는 상시 전투병과 함께하진 않으므로, 저 두 배라는 보급대를 연인원으로 보면 지속적인 원정 인원은 200만 정도로 잡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청년층의 남자라는 것이다. 그들만으로 전 인구의 5~7.7%를 동원했으니, 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그 유명한 우중문 별동대가 구성되는 것이다. 요동성이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다급해진 수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위시한 35만의 별동대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방비도 철저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고구려의 계략이 제대로 먹혀 들었던 전투가 바로 요동성 공방전이다.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 군에게 항복의사를 타진했는데, 최고통수권자인 수양제가 친정을 와있는 상황이란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연히 일선 부대 지휘관에서 황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데는 시간이 소요되고, 또 황제가 신료들과 의논하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하든지 아님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든지 등의 결정이 내려져서, 다시 일선 부대 지휘관까지 명령이 전달되는데 병사는 또 오죽이나 많나 시간이 소요되는 등 매번 시간이 깨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이 불가피했고, 고구려 군은 그 시간 동안 요동성 방어를 철저히 하는 효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원인의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양제인데, 그는 장수들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 때에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성 내에 알렸다. 그러다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때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수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번 연속으로 했다.이젠 역사로도 콩을 깔수 있다 수나라 군대가 병신집단이 아닌 이상 고구려군이 장난질 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하는 적군은 대국의 아량으로 받아 줘야 한다는"는 대국다운(?) 논리로 이 장난질을 받아줬던 것이다. 물론 그 허세질의 대가는 고스란히 자기들이 뒤집어 썼다.

이쯤 되면 관대한 황제부심이 넘치는 양제 입장에서도 빡칠 수 밖에 없었다. [8] 6월 무렵이 되어도 여전히 수나라 백만대군은 요동성 앞에 모여있기만 할 뿐이었고, 단 한명의 군사도 넘어가지 못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다.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서울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이 잃었다고 한다. 사실 너님이 제일 문제인데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수양제의 병크와 고구려군의 분전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답답했던 수양제는 요동성과 방어선을 구축한 인근의 다른 성들을 건드려보지만, 요동성과 같은 전술을 썼는지 어쨌는지 효과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자 수양제는 가공할 양의 물량으로 큰 도박을 걸게 된다.

3.2.4. 평양성 직공

수양제는 요동 일대의 고구려 요새들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본래의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음을 알고, 육군 대장 좌우익대장군인 우문술(宇文述),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9개 군 35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성 직공을 명령한다. 각지의 방어선을 우회하고 평양 일대에서 수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공략하여,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요동에서의 장기간의 공방전으로 인해 요동성 앞에 단순히 모여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나라 육군 역시 어느정도 피로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진군이 문제였다.

수양제는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 등을 지급하여 별동대를 꾸렸다. 문제는 앞서말한 보급체계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한 백일분의 추가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함으로써 병사들의 피로가 더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추가 식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을 가다가 이를 버리는 병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문제를 알아차린 지휘부가 버리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자 이번에는 을 파고 그곳에 보급품들을 묻어버렸다. 짬밥 좋은 수나라군 하지만 버리면 또 굶게 되니, 별동대는 길의 절반 정도 온 상태에서 식량이 떨어질 판이 되어 대강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지쳐 죽기 vs 굶어 죽기

이때 고구려의 대신(大臣)[9]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 군대와 맞서게 되었는데, 을지문덕장군은 일부러 성중의 곡식을 감추고 우물을 메워서 수나라 군대의 기갈과 굶주림을 부추겨 사기를 떨어뜨리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을지문덕장군에게 적의 상황을 정탐하고 오라는 왕명을 내렸다. 그래서 을지문덕장군은 명을 받들어 수군의 진지로 들어갈 계략을 짜내게 되었다.

3.2.5. 적진을 정탐하다

놀랍게도 을지문덕장군은 스스로 항복의 사절로 위장하여, 수나라 군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직접 염탐을 하고 돌아왔다. 당시 수나라 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우중문 앞에 나타난 을지문덕장군은 항복의 뜻을 밝혔다. 고구려에서 이름난 장수였던 을지문덕이 갑자기 적진에 나타나 항복을 청하니 수군 지휘관들 사이에 이를 두고 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신이 직접 정탐이나 하러 적진으로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서로 의사가 타진되었던 상태로 보인다. 수양제가 을지문덕장군이나 영양왕 둘 중 하나라도 오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한 것을 보면, 둘 중의 한 명이 수의 진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요동성에서 하도 속다보니 진짜 항복할 생각이 있으면,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장군이 직접 찾아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을지문덕장군이 찾아간 것은 정탐이라기보다는 시간끌기 용도로 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고, 정탐이라는 것은 중국측의 변명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수나라 군의 지휘관이었던 우중문은 이전에 수양제로부터 "만일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게 되면 반드시 그를 사로잡으라."라는 밀명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을지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서우승 벼슬을 지내던 유사룡이라는 사람이 이를 만류하였다.[10] 결국 우중문은 유사룡의 말을 믿고는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을지문덕이 떠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속은 것을 직감한 우중문은 급히 사람을 보내서 을지문덕에게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호랑이굴을 빠져나온 을지문덕이 돌아갈리가 만무했다(...).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압록수를 건너 돌아가 버렸다. 을지문덕은 그저 지략 하나로 수군을 엿먹이고 기만한 것도 모자라 적진을 샅샅히 정탐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3.2.6. 유인술

을지문덕장군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돌아간 후에 전혀 소식을 전해오지 않자, 우중문은 그제서야 속은 것을 눈치채고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 우문술은 이미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갔으니, 싸워도 이기기 힘들것이라 반대하며 급기야 철군까지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우중문은 정예 병력을 이끌고 달아난 을지문덕을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그래도 신중론을 펴며 반대하자, 우중문은 벌컥 화를 내며 우문술을 꾸짖었다. 우중문은 이미 수양제로부터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받았던 바가 있어서 우문술은 결국 우중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사망이 보이는 추격이 벌어졌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하지만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 군의 진영을 정탐하면서, 수나라 군사들이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장군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싸울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나는 척 하며 먼 길로 유인하였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다. 여기서 지휘한 것은 우문술로 보이는데, 퇴각을 주장하던 그도 계속되는 승리에 생각이 적잖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우문술도 지금은 보급문제니 뭐니 문제가 많지만, 어떻게든 평양성에 도착하면 보급물자를 충분하게 가진 수군과 합류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 문제들도 다 해결될 거라고 믿게 된 모양이다. 문제는 이 지연전술의 효과다. 이 지연전술 끝에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의 수군이 조급해진 것이다. 30만의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5만의 전투병력을 가진 수군이 독자적으로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수나라의 수군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 물론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가 지휘하는 병력이 대기중이었지만, 수나라의 수군은 여기서 고건무의 저항을 격파하고 상륙에 성공했다. 고건무의 저항을 격파하자 흥분한 내호아는 육군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는 부장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만의 병력으로 평양성 직공에 나섰고 이제 고구려군의 낚시가 시작됐다. 평양성은 외성-중성-내성-북성의 4중 구조인데,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적을 외성 안으로 유인했다. 기록에 따르면 외성의 빈 절 안에 병력을 매복시켜뒀다고 한다. 내호아는 공성전도 치르지 않고 성으로 들어서자, 이성을 상실했는지 어쨌는지 전투가 종결되지 않았음에도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때부터 고구려군의 낚시가 시작됐다. 이 타이밍을 노려 절에 매복했던 고구려군이 등장했고, 왕제 고건무는 500명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다.[11]

<수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원(高元)의 아우 건무(建武)가 결사대死士 5백 명을 모아서 요격(邀擊)하였다.

고건무의 500명이 4만을 격파한 것이라서 믿기엔 어렵지만, 다른 기록도 아니고 패전국인 <수서>에 나온 기록이라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대단한 승리인 것 같다. 살수대첩이 워낙에 엄청난 승리라서 그렇지, 훗날 영류왕이 되는 고건무의 승리도 경이로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정도는 아닐 것이며, 다소 과장도 좀 섞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말로 과장이 좀 있다 하더라도, 무지하게 후덜덜한 승리임에는 틀림없다! 여하튼 내호아는 겨우 탈출하였고, 4만의 병력이 거의 전멸했다. 내호아는 바로 대동강 하구로 후퇴했고,[12] 이후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다.

수나라 수군의 패퇴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상기했듯 30만 수나라의 별동대는 이제 수나라의 수군이 가진 보급물자와 병력 보충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수나라의 육군은 끝까지 수나라의 수군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물자보충이 되지 않는 한 수나라 별동대의 피로와 물자부족은 해결할 수 없었다. 만약 수나라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해서, 보급 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수나라와는 달리 전력의 제한이 있는 고구려로서는 망했어요를 외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때, 이 내호아의 수군을 격파한 전투는 살수 대첩과 비교하면 그 규모는 작았으나, 그야말로 전쟁의 국면을 바꾼 전투였다.

한편 우중문의 별동대는 마침내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불과 30리 떨어진 곳 까지 진격하여 에 진영을 쳤다. 수군은 마침내 적국인 고구려의 도읍 앞까지 당도하여 승리를 눈 앞에 둔 듯 하여 기고만장했지만, 막상 평양성 근교에 도착하자 만나기로 했던 수나라 수군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이 지친 병사들로는 무엇을 할 도리가 방법이 없었다.

머지않아 그 모두가 을지문덕의 속임수였음이 드러났다. 비록 수군이 평양성 앞까지 왔다고는 하지만, 이미 수나라 군대는 이미 굶주림과 쉴 틈도 없이 계속된 전투와 강행군으로 인하여 지쳐 있어서 더이상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한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보급은 그야말로 바닥이 나서, 식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에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은 수군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견고한 요새였기 때문에 수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된 우중문과 우문술은 적의 도읍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우중문과 내호아가 서로 연락하려고 하긴 했겠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13]

3.2.7. 살수대첩

을지문덕은 평양성의 거의 앞까지 당도한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던 우중문에게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라는 시를 지어서 보냈다.[14]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언뜻 보면 띄워주는 것 같으나, 그 내용은 철저한 조롱이다.

여기에 을지문덕장군은 '군사를 돌려보내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라는 거짓 항복 문서를 우중문에게 보냈다. 이미 번번히 을지문덕에게 속아넘어간 우문술과 우중문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에 넘어갈리가 만무했겠지만, 이미 군사들이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라 더이상 싸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에 수나라 별동대와 합류하여 평양성을 협공하기로 하였던 수군대장 내호아가 홀로 평양성 외곽을 공격했다가 고건무의 계략에 넘어가 박살이 나는 바람에 작전에도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고구려 측에서도 "우리가 이렇게 명분까지 줬으니까 빨랑 집에나 가지?" 하고 반 협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우문술도 우중문도 여기서 더는 얻을것이 없다고 판단, 퇴각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우문술과 우중문은 일단은 영양왕과 을지문덕이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면서 서둘러 철군하였다. 수군은 후퇴하면서 행군대형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방진을 치면서 이동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공격을 염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을지문덕장군은 철군하는 수군을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을지문덕장군은 방진을 갖추고 퇴각하는 수군을 쫓아가서 사면에서 습격하며 괴롭혔다. 그리고 마침내 수나라 군이 살수에 당도하여 강을 반쯤 건넜을 때에,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모든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이에 급기야 수나라의 장수였던 신세웅이 전사하였고, 살아남은 수나라 군은 장수와 병졸을 가리지않고 하루에 450여 리를 달아났다고 한다. 수나라 지휘관 왕인공(王仁恭)만이 최후의 부대로 남아 고구려군을 물리쳐 다른 부대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결국 수나라 군은 살수에서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처음 요수를 건너온 수군은 33만 5천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살아서 요동성까지 돌아온 수군은 고작 2천 7백여 명에 불과하였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이다.

흔히 살수대첩이 수공으로 수군을 무찌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근거가 약하다. 살수대첩 당시 수공설은 1차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고, 세간에 잘 알려진 '수공으로 수나라 박☆살!'이라는 얘기가 근대 이후에나 나온 이야기로 진짜가 아니라는 견해가 많다.[15][16]

3.2.8. 수나라의 철군

살수대첩의 참변을 접하여 크게 진노한 수양제는 패전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조리 삭탈관직한 후에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죄수 취급을 하며 수나라로 압송하였다.[17]

특히, 수나라 진영에 거짓 항복을 한 후에 염탐을 하고 돌아간 을지문덕을 그냥 놔주게 만든 주범인 유사룡은 극형을 면치 못하였으며 결국 참수당하였다. 다만 우문술의 부장이었던 설세웅 만큼은 살수대첩 후에 뒤를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워 이긴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물지 않고 오히려 승진하였다.

이렇게 수양제는 고구려에 원정을 온지 8개월만에 참혹한 패배를 당한 후에 고국 수나라로 귀환하니, 2차 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수나라 군대는 요수 서쪽에서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뿐, 그 외에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야말로 대패였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였던 것이다.

수양제는 이후 3차, 4차 침공을 계속했으나 결국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무리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수나라는 결국 국력이 고갈되어 당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모두가 잘 알다시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3.2.9. 전투 분석

우중문이나 우문술이나 크게 눈에 띌만한 전략, 전술적 오류를 저지른 적은 없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요동-압록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여 평양에 육박하여 수군에게서 보급을 받고, 평양을 공격하려는 전략을 짰고, 일단 수의 별동대는 전투없이 성공적으로 요동-압록 방어선을 돌파했다[18]. 일단 평양 인근까지 육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위풍당당하게 고구려군을 물리치면서(라고 생각하면서) 도착해보니, 보급을 맡았던 그놈의 수군이 쫄딱 망해버린 것이다. 별동대가 도착하길 기다렸으면 되는데, 무리하게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말아먹은 내호아의 과오가 더 크긴 하다.

물론 살수대첩의 의미는 내호아의 수군 격퇴시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30만 별동대 자체만 해도 당시 을지문덕의 군대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군세였다. 그래서 만약 별동대가 파견되기 이전에 내호아의 수군이 격멸당했다면, 이는 보급이 끊긴 적군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유인작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호아의 수군 패배 시점이 별동대 파견 이후의 시점이라거나 혹은 수군이 잔존해 있었다면[19], 고구려군이 잦은 교전을 펼친 것은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여 군량 보급이 이뤄지기 전에 수나라 군대의 전진을 지연시켜 되돌려보내려는 의도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어찌되었건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기 전 수의 수군은 물러났고, 별동대는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고립되었다가 후퇴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별동대를 괴롭혔고, 결국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다다르자 고구려군은 전력을 다해서 총공격을 가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던 시점에서 고구려군이 맹공을 가했고, 수의 군대도 이를 예견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후위를 맡아 방진을 치고 저항하였지만 지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후위의 붕괴에 동요한 30만 대군이 연쇄적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왕인공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000명 중 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2,700명도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하루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쳐 왔다는 사서의 기록을 볼때 갑옷이고 창검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친 오합지졸 패장병 수준. 특히 수나라의 제8군은 지휘관 신세웅을 포함하여 단 1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4. 전후의 삶

여수전쟁 이후에 을지문덕장군께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으니, 그저 안습하다. 그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기록을 탓하자(...).

을지문덕장군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을지문덕장군이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여당전쟁 당시의 대단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안시성주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그래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안시성주보다는 좀 사정이 낫다

다만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자 을지문덕은 신라설인귀거란으로 망명했다는 설화는 있다. 물론 설화는 설화일뿐....

5. 평가

을지문덕은 누가 보아도 패색(敗色)이 짙은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불세출의 전쟁영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이다. 이래도 잘 감이 안 온다면, 현대 한국미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한국의 어느 장군이 미군 중에서도 최정예로서 선별된 미군들을 맞아 싸워서는, 그저 막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전멸시켰다고 생각해 보라.이건 정신승리용 싸구려 전쟁 소설에서조차도 볼 수가 없는 일이다! 역시 픽션은 현실을 당해낼 수 없는 건가 사실 이런 비유조차도 부족한 감이 있는 게, 당시 수나라가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가지는 위상은 현대 미국 이상이었고,[20] 동 시대 다른 지역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21] 이 나라가 괜히 천자를 운운하는 천조국이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은 그런 나라의 군대 중에서도 최정예로서 선별된 군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건 뭐라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몇 번이고 찬탄 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딱히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 군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혈혈단신 적진에 들어가 정찰을 하고 나오는 간떨리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오는 강심장인데다가,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적을 무찌를줄도 알았다. 거기에다가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서 수나라 군을 농락할정도의 문장력도 지니고 있었으니, 희대의 먼치킨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5.1. 김부식의 평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도 을지문덕 열전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엄청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김유신 다음 열전이 바로 을지문덕의 열전이다. 그러나 분량 차이는 세 권의 분량을 독식하고 있는 김유신 열전에 비해 너무 소략하다. 안습.

을지문덕은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짓고 해석할 수 있었다.

양제가 요동의 전쟁에서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대단했다.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를 막아냈다. 스스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나라 군대를 거의 섬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22]에서는“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그 어찌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5.2. 신채호의 평가

단재의『을지문덕전』은 “땅의 넓이는 그 십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여 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가지였다”면서 을지문덕을 자주의식(自主意識)의 상징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천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칭송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체(國體)를 보존할 수 없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왕조 시대의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신채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이란 역사인물은 민족자존(民族自存)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5.3. 안창호의 평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을지문덕전』의 서문(序文)에서 “내가 해외 각국을 여행해보니, 그 나라 영웅이 칼을 휘두른 곳에서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고, 그 영웅이 피를 흘린 곳에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춤을 추는데, 몸이 있는 자는 그 몸을 영웅에게 바치고, 재주가 있는 자는 그 재주를 영웅에게 바치며, 학문이 있는 자는 그 학문을 영웅에게 바쳐서 한 나라 전체가 영웅을 부르면서 같이 나아가기 때문에 영웅이 배출되어, 워싱턴 이후에도 허다(許多)한 워싱턴이 나왔고, 나폴레옹 이후에도 허다한 나폴레옹이 나왔던 것이다”고 했다. 이는 을지문덕을 본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그와 같은 영웅들이 많이 나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안창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장군은 모든 이가 표상으로 삼아야 할 영웅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6. 그 외에

을지문덕의 이름이 크게 유행세를 타면서 한국에서도 을지문덕의 이름을 기리게 되었다.

무공훈장 중 하나인 지무공훈장은 바로 을지문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

대한민국 해군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2번함(DDH-972)의 함명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을지문덕함이라 명명되었다.

서울의 번화가인 을지로의 이름 역시 을지문덕에게서 따온 이름이다.[23]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합동 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을지문덕이 유래이다. 또한 제12보병사단의 부대 이름도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을지부대라 불린다.

한편 살수대첩의 무대가 되었던 청천강이 자리잡은 평안남도 안주시에는 을지문덕이 수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곱 명의 승려들로 하여금 거친 살수를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승려들이 먼저 강을 건너자 수군들이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급히 살수를 건너다가 을지문덕의 계략에 휘말려 몰살당했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목숨을 걸고 수군을 살수로 유인한 승려들을 기리기 위해 그 지방 사람들이 청천강 근처에 칠불사(七佛寺)라는 절을 세우고 그 곳에 일곱 승려의 상을 세웠다고도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6.1. 정체에 대한 논란

한편 을지문덕은 그 엄청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출생과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무하여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24] 한마디로 어느날 갑자기 수와의 전쟁에 나타나 수군을 끔살시키고 전쟁 종결 뒤엔 다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국내에는 을지문덕에 대한 독자적인 전기조차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긴 하지만 《수서》의 우중문 우문술전과 《자치통감》의 관련 내용을 조합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도대체 누구였을까?[25]

그래도 귀족연립정권 체제 내에서 한 나라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을 갖출 정도였으면, 당시 귀족 내부에서도 최고위 직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수양제가 수하 장수들에게 을지문덕을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을 내린 걸 보면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문제는 왜 이 정도의 인물에 대해 생몰년도는 커녕 당대 인물들을 언급할 때 대부분 적시하는 출생지마저 기록이 없냐는 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을지문덕이 전쟁 당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이 정말 한미했거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는 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상당수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위의 타국, 타민족 출신이라는 설과 일부 통하는 점이 있다. 대귀족 가문들이 언제나 득세하고 관직을 차지하던 당대 고구려에서 관리가 출신 '부(部)'를 표기하지 않는 것도, 생몰년도도 기록되지 않은 것도 집안 배경이 워낙 없었던 탓이라는 것. 집안 대대로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그 출신과 연고지에 대해 상당 부분 추적이 가능한 연개소문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26]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어떻게 귀족이 아니면 대접 못받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지위에 올랐는가? 이에 대해서는 평원왕대부터 고구려 왕들이 추진한 신진세력 등용 정책 덕분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한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혜자가 바로 온달.[27] 그러나 이 설 또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록이 없는 걸 어쩌리.(...)

6.2. 이름에 대한 논란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성으로 여겨지는 을지(乙支)는 논란이 좀 있다. 乙(을)은 고대어에서 '이리'라고 읽혔으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28] 그리고 支(지)는 관직명인 대막리지(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29],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30]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31]

그러므로 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존칭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도 사실은 성이 을(乙)씨이고 지(支)만 존칭접미사라는 설도 있다.[32]

支(지)의 발음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 자음이 c 혹은 ch로서 당시의 자음에는 없던 발음이라 ㄱ, ㅅ, ㄷ 등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그래서 을지의 원래 발음은 '이리기' 혹은 '이리시'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는 젊고 야심있는 장군으로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먼치킨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비록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략과 무력 등 모든 면에서 극중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도 최강을 달리는 흉악한 인물. 심지어 삼한지의 진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유신도 을지문덕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작중에서는 살수대첩에서 수군을 무찌르고 심지어 중원까지 평정할 원대한 꿈을 세우나 너무 큰 전공을 세운 나머지 영류왕에게 찍혀서 장군직에서 반강제로 쫓겨나 이후로 초야에서 살게 되었다고 묘사된다. 이후로 아직 어린 시절의 연개소문과 만나 그를 제자로 삼고 중국땅을 여행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을지문덕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실로 허구적인 묘사이다.[33]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삼국기에서는 백발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선인과 같은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연개소문이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먼 모습.[34] 배우는 원로배우 김길호.[35]

이후 사극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이정길씨가 맡았는데, 초반부의 수나라 파트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를 박살냈다(...). 여기서도 살수대첩이 무슨 수공으로 수나라 군대를 쓸어버린 것 처럼 묘사되었는데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살수대첩 당시에 수공으로 수군을 물리쳤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이후 당나라와의 화친 정책을 펴던 영류왕에게 화친 정책을 펴지 말 것을 간언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분사(忿死)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진명의 소설 살수에서는 김진명의 소설이 다 그렇듯 환빠사상 충만하고 애국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지덕체를 모두 갖추고 있는 먼치킨으로 등장한다. 결말 부분에서는 살수에서 죽은 적군들을 위해 산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며 살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을지문덕의 사망년도 미상을 해결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모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살수가 무협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웹게임인 콜로니 오브 워에서 69레벨의 HCS 시리즈 기체중 하나로 염동기체이다. 건곤감리코어 구현이 완료된 무휼을 토대로 강화된 기체들이며 그중 이름을 따와 문덕이며 3기체중 가동률이 가장 긴편으로 대략 3시간이나된다.[36] 대신 마의 구간 후반기 기체인만큼 강력한 무장들이 있으며 공유도 가능하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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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수나라의 국력 자체는 대단히 막강하였다. 애초에 수양제가 그렇게 해먹을 수 있는 것도 워낙 나라의 저력이 컷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훗날 당태종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인 당고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수를 뛰어넘지 못했다. 괜히 당시 최강대국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 [2] 다만 수서의 기록에는 수군이 바람을 맞았다는 기록이 없다.
  • [3] 이는 수서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600년 1월 한 해 밖에 확인이 되지 않는다.
  • [4] 양광이 아버지와 형(父兄)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라는 기록은 수서 자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갖은 위선과 모략으로 형의 자리를 뺏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5] 이때 선발된 사람 3천여 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둘은 죽었다고 하였다.
  • [6] 다만 오히려 실전에서는 독이 되었다. 병사 한명에게 너무나 무거운 군장을 지운 탓에 병사들이 진군하다가 탈진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심지어는 군수물품을 버리면서 진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7] 심지어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은 가끔씩 야전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 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 [8] 그간의 정복사업이 쉬웠던 탓도 있다. 이동식 궁궐을 짓는다든지 하는 위엄찬 방식으로 여러 국가들의 항복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구려 정벌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고구려의 완전한 멸망인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했다.
  • [9] 을지문덕이 정확히 어떤 벼슬을 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나 수서에 고구려의 대신이었다고 기록되어있는 점을 봐서는 상당한 고관직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10] 아무래도 정말로 항복하기 위해 온 사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 [11] 다만 삼국사기등에서 영류왕이 이를 무찔렀는 지에 대한 여부는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 없다. 영류왕이 언급되는것은 수서 열전의 내호아 편이다.
  • [12] 그나마 진격을 반대했던 주법상이 하구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추격해오던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 [13] 비록 삼국사기나 중국 측 기록에서 집적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병사들이 너무 지친 탓'에 더이상 싸우지 못하니 철군했다는 기록을 보면 수나라 군의 지휘관들도 더이상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14] 참고로 이 시는 국문학사적으로는 고구려 때 지은 시조로, 국사학적으로는 저 시 안에 도교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중요시한다. 알아두면 손해볼 것은 없다. 하지만 살수 수공설처럼 후세의 가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 [15] 애초에 당시에 수만명의 인명을 단순간에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물을 가두어놓는 댐을 짓는 일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실제로 수공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수군의 걸음을 늦추는 수준에 그쳤을 확률이 높다.
  • [16] 나중에 고려사에서 여요전쟁 때 흥화진 전투(귀주 대첩이라고 가끔 오인되는 전투이다.)에서는 강감찬이 수공했다는 이야기는 나오는데, 강물이 얼어서 잠시동안 물을 흘려 거란군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며 사람 쓸어내릴 정도의 격렬한 수공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발목 정도 물만 되도 사람들 충분히 넘어진다. 귀주대첩 항목 참조.
  • [17] 이때 내호아와 우문술은 서민으로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었으나, 당시 수나라 군대의 주요 장수들이었다. 때문에 훗날 고구려와의 전쟁이 재발하였을때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
  • [18] 기록에 따르면 갑자기 대군이 우르르 모든 중요 연결로로 일시에 몰려나오니까 본래 한 루트로만 수군이 오면 측면을 치려고 했던 고구려군이 각자 현 위치에 고착되어버렸다고... 6.25전쟁 당시 중공군이 쓴 전법하고 똑같다.
  • [19] 내호아의 부관 주아상이 어떻게든 수군을 추스르긴 했다.
  • [20]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나라들이 미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책봉을 받지는 않는다. 조공-책봉 관계라는 동아시아 특유의 국제 질서는 1차적으로 당시 중국 왕조들의 세계구급으로 압도적인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프트파워든 하드파워든 말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중원 왕조들, 특히 수나라를 비롯한 통일 왕조들은, 이 둘 다가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강했다.
  • [21] 더군다나 당시 수나라 주변의 다른 세력들은 수나라 앞에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 [22] 춘추좌씨전을 이르는 말.
  • [23] <del>구한말 이 일대에 중국 상인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해방 이후 중국의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거리 이름을 명명했다</del> 라고 이전 버전 문서에 적혀 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은 '코가네마치(황금정:黃金町)'이었는데 이 거리는 <strong>일본인들의 중심가</strong>였다. 정확히는 현재의 을지로, 명동(메이지쵸), 충무로(혼마치)를 중심으로 19세기말부터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특히 혼마치는 온통 전깃불로 장식되어 도쿄보다 더 화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을지로와 충무로는 일본인들의 기를 누르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인과는 관련이 없다. 참고로 중국인들 거류지는 현재의 소공동과 북창동 일대로, 옛 중국대사관과 현재 중화요릿집이 많이 남아 있는 그 동네부터 플라자호텔까지의 부분이다. 현재의 플라자호텔은 3공 당시 화교탄압정책의 일환으로 <del>화교에게 사기(?)를 치는 박통의 위엄</del> 화교 상인들로부터 헐값에 부지를 인수해서 지어진 건물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인들의 세를 누르기 위해(경성부(시청)에서 군사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차이나타운의 한가운데를 뚝 잘라 길을 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한국은행 옆 소공로이며, 당시에는 하세가와쵸라고 불렀다.
  • [24] 출생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명장전에서 그의 출생지가 평양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이는 모두 한참 후대인 조선 시대의 기록이라 신빙성이 거의 없다.
  • [25] 이 때문에 선비족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나왔다. 선비족의 성 중에서 '을지'와 발음이 비슷한 '울지(尉遲, '위'지가 아니다!)'가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당태종이 가장 신임하던 장수(당태종의 쿠데타인 '현무문의 변'에서 선봉을 맡았다)의 이름이 울지덕(尉遲敬德)으로 을지문덕과 유사하니 친척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럴지도 모른다 정도의 가설이며, 이름의 유사성 이외에 특별한 근거는 없다.
  • [26] 다만 연개소문 또한 고조부 이상으로 올라가면 그리 대단한 가문이 아닌, 어떤 의미에서는 신진 세력이었다는 추정도 있다.
  • [27] 즉 어디 듣보잡(...)인 '바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고 실력으로써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출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물론 온달 또한 설화와는 달리 실제로는 귀족이었다고도 해서 단정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온달의 출신성분이 낮았다고 보는 견해에서도 그가 생판 평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 [28] 현대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 등의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 [29] 한자로는 태대형(太大兄).
  • [30] 한자로는 대모달(大模達).
  • [31] 이름 끝에 존칭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백제, 신라의 기록에도 자주 나온다. 주로 支(지)나 知(지)로 음차되어 있다. 물론 당시에도 '지'라고 읽혔을 가능성은 낮다.
  • [32] 동시대에 을(乙)씨가 있긴 있었다. 또, 동시대까지는 아니지만 같은 고구려의 잘 알려진 국상 을파소도 있고... 이 분은 삼국사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乙이라는 성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 [33] 그러나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은지라 작가가 고충한 흔적도 꽤 보인다.
  • [34] 애초에 연개소문과 을지문덕이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
  • [35] 1983년에 방송한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최영장군으로 나오셨다.
  • [36] 김유신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계백장군 모티브인 계백에 비하면 운행시간은 그나마 양심적인 기체
  • [37]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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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5 05: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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