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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last modified: 2015-11-06 21:32:30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말
5. 평가
6. 관련 인물
6.1. 이괄군
6.2. 조정
6.3. 관군
7. 관련 링크
8. 관련 서브 컬쳐

1. 개요

1624년 1월(조선 인조 2년)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

조선 역사상 외세가 아닌 반란군이 한양을 점거한 유일무이한 난이기도 하다.

2. 배경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 문제로 일어난 반란으로, 이괄이 인조의 난 때 군사적으로 실질적인 지휘를 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던 김류 등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공신으로밖에 배정을 받지 못한 데다 한직인 한성판윤[1]으로 밀려나면서 불만이 쌓인 상황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평안병사)겸 부원수[2]로 임명하여 북방으로 파견된다. 이괄은 반정 당시에 벌벌 떨면서 집안에 머무르다가 성화를 못 이겨 나온 김류가 1등공신이 되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하며 싸운 자신은 2등공신이 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도 달래고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하여[3] 평안병사 벼슬을 주고 부원수로 삼아[4] 파견하였으나, 정작 이괄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이라 쓰고 좌천시켰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도 정적인 김류 등의 견제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무고를 받고 압송될 처지[5]에 놓인다. 당시 조선의 법으로 볼 때 이괄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괄의 군세가 무섭긴 무서웠고 주모자로 거론된 이들 중에 이괄과 정충신에 대해서는 체포하지 말라고 했으나 할거면 제대로 하지 이괄은 체포하지 말라면서 이괄의 아들은 체포하라고 했으니.. 어쨌거나 이괄은 금부도사에게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고 묻고는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치고 난을 일으키게 된다.

3. 전개

이에 이괄은 결국 먼저 선수를 쳐[6] 반란을 일으킨다.[7]이괄에게 병권을 줘어놓고도 병권을 쥔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고[8] 이때가 1월 24일.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김류의 주장대로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 등 35명을 처형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이때 이괄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한명련을 잡아 압송하였으나 이괄이 구출해내어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반면 기자헌, 한명련과 함께 이괄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산 안주목사 정충신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안주를 떠나 토벌군의 선봉에 섰다.

난 초기에는 변변한 활약이 없었다. 사실 변변한 명분조차 없이 그저 '임금님 옆 간신배'를 몰아내자는 식의 주먹구구식 명분이었으니 제대로 먹힐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괄이 택한 전략 자체가 전격전이었다. 실제 이괄군의 행로를 보면 토벌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회피했다. 행군은 철저하게 산속 오솔길만을 통해 이루어졌으며[9] 관군이 동원되어 빈 고을들을 빈집털이하여 쌀과 군수품을 노획하는 식으로 보급문제를 해결했다.

명분이 모자랐기 때문에 신속하게 한양을 털어먹으려 했지만, 정작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투항해버린데다가 한명련의 옛 부하들 역시 투항하는 바람에 이괄군이 불리했다. 그러나 장만이 자만하여 정찰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이괄군은 탐지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결국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후일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10] 그런데 뒤의 병크들을 보면 까일 만도 하다. 심지어 '애초에 네(장만)가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됐는데 지가 일을 키워놓고 공신이라니 아이고'라는 사관의 기록도 있다.

이때 마침 황해도 지방군이 총동원되어 장만의 토벌군과 앞뒤에서 협공을 가하려 했으나 이괄의 교란 작전에 말려들어 분산되었고 결국 각개격파의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토벌군의 선봉인 정충신군과 황주에서 교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황해도 지방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가 김효신이 투항했을 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이괄의 낚시질에 정충신이 말려들었을 때 소드 마스터들을 앞세워 기습하여 2월 4일 병력의 반을 잃고 패퇴했다.

이어 이괄은 예성강 상류인 마탄을 도하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바로 이 마탄에 황해도 지방군이 집결해 황해도 방어사 이중로의 지휘 하에 이괄군을 샌드위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이 황해도 지방군이 나름 훈련수준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이괄군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았던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경기도 지방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에 160리나 되는 거리를 강행군한 끝에 겨우 도착한 상황이라 상태는 완전히 메롱이었다.

물론 후방에는 재편성을 마친 정충신군[11]이 이괄군을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정작 당시는 한겨울인데다가 이괄군이 앞서 진격하면서 식량이 될만한 것은 모조리 불살랐고 게다가 배후에는 항상 복병을 두어 10리간의 간격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괄군의 진로가 험악한 산길이었기에 그 뒤를 그대로 뒤따르는 정충신군의 고생은 엄청났고 결국 지치고 굶주린 정충신군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2월 7일 마탄에서 토벌군은 이괄의 기습을 받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인조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때 토벌군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총지휘관인 이중로와 이성부가 전사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12] 그나마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평산부사 같은 경우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인뒤 피를 바르고 밑에 숨어 죽은척 해서 살아남았을 정도니 관군의 참상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必要韓紙?[13] 이괄은 이 때 토벌군의 지휘관급 장수 8명의 목을 베어 뒤늦게 도착한 정충신군에게 보내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이를 본 정충신이 "이거 이괄의 훼이크임 ㅇㅇ 잘 보니 다른 사람이네"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그나마 남은 방어선인 임진강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여기서도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즉 이괄군의 기동 능력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진강 하류에는 이귀, 상류에는 수원부사 이흥립, 그리고 임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인 청석령에는 이서를 배치한 것인데 막상 도하지점인 임진나루에는 파주목사 박효립이 지방 포졸도 아니고 민병대 수백(...)만 이끌고 방어선을 폈던 것이다.[14]

정작 이괄은 이를 신속한 기동으로 돌파했는데 일단 청석령에는 항왜군 수백을 보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마치 포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이서군을 묶어둔 후에 샛길로 지나쳤으며 임진나루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해 신속하게 나루터를 점령하고 강을 건넜다. 이너무나 신속한 나머지 이때 이귀는 임진강 하류 방어선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이흥립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여 통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인조는 급히 수원으로 피난하였으며 2월 10일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괄이 여기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정충신이 예언한대로[15] 왕인 인조를 붙잡는데 실패하자 추격할 생각은 안하고 한양에 머무른 것이다.[16] 그리곤 왕족인 흥안군 이제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당시 수도인 한양을 내어준 관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최고 지휘관인 장만이 군사를 물려 힘을 기른 다음 다시 싸우자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셈. 그러나 정충신이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 보니 적이 나오지 않을수 없고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 있으니 적을 이길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이에 남이흥이 동조하여 2월 10일 저녁 병사 2천명으로 야음을 틈타 안령을 점거하게 된다. 안령을 점거한 뒤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이상없다는 봉화를 올려 반란군을 안심시키는 바람에 2월 11일 아침이 되어서야 이괄은 안령이 점령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괄은 이괄 자신이 전격전을 선호하는 성격인 데다 관군이 무악재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농성전을 벌이면 한양의 민심이 이반할 수도 있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까지 겹쳐 농성을 포기하고 장만의 관군이 지원을 오기 전에 정충신과 직접 정면대결을 결심한다. 그리고 무악재를 점령한 관군의 병력이 적은 것을 확인한 이괄은 '저 정도 병력은 점심 먹기전에 처리 할수 있지'라고 생각해 방을 붙여 "조만간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자는 싸움 구경 하러 오라, 관군을 정ㅋ벅ㅋ하겠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고[17][18] 백성들은 또한 얼씨구나하고 싸움구경(…)을 갔다. 이리하여 이괄의 운명을 결정짓는 안현 전투는 2월 11일 아침[19] 수많은 백성들이 몰린 가운데 펼쳐지게 된다.이기는 사람 우리편!! 한국사 처음이자 마지막 무료 콜로세움 단체전

이괄의 군대는 북방에서 조련된 군대라 조선군의 정예였고,[20] 관군은 이에 비해 급조된 병력인 데다 무악재에 자리잡은 병력은 2천밖에 안되는 등 전력이 딸렸기에 선천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무악재의 토벌군도 궤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관군을 이끈 정충신의 진지가 상당히 견고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해서 이괄군은 진격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점심먹기전에 끝내겠다던 이괄의 생각과는 달리 전투는 4시간 가량 지속되었고 만만치않은 피해를 입게 된다.[21]

여기에 하필 이괄의 진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어 이괄의 군대는 돌풍으로 인한 먼지와 고춧가루[22]시야가 확보되지 못해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 와중에 이괄의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기우는데다 부장인 한명련이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고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아죽게 되자 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이괄의 깃발이 쓰러지고 명련은 죽었다!! 너네들은 졌다!! 이괄이 도망친다!!라고 외쳤고 눈이 보이지 않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헐 우리가 정말로 졌나?하면서 이속오라 사기가 꺾여 이괄 등 지휘관들의 명령도 씹어버리고 전부 도망가 와해되고 만다(…). 사실 숫자, 숙련도 등 절대적으로 우세한 이괄 쪽이 더 공세를 퍼부었으면 정충신의 군대는 패하고 후속부대를 이끄는 도원수 장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관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역전승이었다.[23]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양 주민들은 이괄군이 패배하는 것을 보자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잠가버렸고,[24] 그리하여 이괄군은 한성을 뺑돌아 남대문으로 겨우 입성하나 이젠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성에서 물러나게 된다.[25]

이괄은 결국 패배했고 사기가 오른 관군이 추격하러 했으나 남이흥과 정충신이 궁지에 몰린 적은 쫓으면 안된다고 극구 말리며 이괄의 목은 앉아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관군은 추격을 멈춘다.[26]

4. 결말

결국 이괄은 예상대로 경기도 광주에서 도주 중 밤중에 잠을 자다가 부하장수이던 기익헌, 이수백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둘은 참수 대신 유배로 용서받았는데 기익헌은 유배가 풀린 뒤로 하위이긴 하지만 군관으로 평생을 잘 살다가 별 일없이 살다간 반면, 이수백은 유배로 풀려난지 몇 해 안 있어[27] 마탄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로와 박영신의 아들들인 이문웅, 이문위 형제와 박지영, 박지원, 박지번 형제에게 대낮에 끔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마탄 전투 막바지에 관군에 8대장의 목을 베어 보내게 한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었다고 한다.[28] 이들 형제는 이수백의 목을 잘라 대궐을 찾아가 자수하는데[29] 이에 대한 처벌을 놓고 비록 역적이었다곤 하나 이미 왕이 용서를 해주었는데도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수백은 수절하는 과부를 모욕하고 겁탈한다든지 거리에서 행패를 부려 민심도 나빴고 정작 이수백이 5명에게 끔살당하자 주위 반응은 '고놈 당해도 싸다'라는 분위기라서 안습... 삼정승은 이수백이 역적이라는 점과 효도라는 가치관을 들어 용서해줄것을 청했으나 임금인 인조는 법 기강확립을 들어 처벌할것을 명했다. 다만 부친들이 충신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이씨 형제는 전라도 익산, 전주에, 박씨 형제는 경상도 창평, 의성에 유배보내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이괄의 난 이후 북방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명련의 아들인 한윤 등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훗날의 청나라)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겨서(…) 결국 조선은 호란을 겪게 되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군이 거의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30] 청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다. 게다가 청나라로 도망친 이들이 한성까지 가는 길 안내를 해주는 바람에 청군은 그 이전의 어떤 보다 빠르게 내려와 왕을 붙잡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리고 허수아비로 왕위에 며칠 올랐던 흥안군 이제는 대역죄로 심기원에게 참수[31]당하는데 흥안군이 참수당할 때 억울하다고 외치며 심기원에게 "네놈도 억울한 대역죄로 죽을 것이다!"라고 저주했다는 야사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야사는 야사일 뿐, 사실 이괄의 난 초기에 흥안군이 이괄과 내통했으니 남쪽으로 멀리 보내라는 기록도 있고 흥안군은 인조를 호종하다가 중간에 달아나 한강까지 도로 건너서 이괄과 합류한다. 억울한 죽음이 아닌 것. 그런지 200여년 뒤인 고종 초기(1871년)에 복권되었다가 30년 뒤인 1900년에 도로 복권이 취소된다.
한편 심기원은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세우는 역모를 모의하다가 소현세자가 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곤 인조와 소현세자를 모두 몰아내는 역모를 꾀하다 들켜서 능지처참 당하고 만다. 그리고 또 7년 뒤 심기원 처형에 관여한 김자점도 아들들과 난을 꾸미다가 들키는 바람에 일가와 함께 처형당한다.

이 사건으로 추관 사고가 불타 전란 이후 복원한 조선왕조실록 5질 중 1질이 소실된다. 이후 조선 멸망까지 춘추관 사고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5. 평가

조선 역사상 비록 실패했던 반란이었지만, 조선이 청나라에 침공당했다는 걸 감안하면 조선을 뒤집은 것이라고 볼수있다. 북한에서는 이괄을 홍경래와 동급으로 존경하다고도 한다.

난 당시 선봉에선 항왜들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하자 동래에서 인 1천명을 용병으로 사용하자라는 건의가 있자 너무 정신없던 나머지 다들 좋다고 했으나 이원익이 "천명보다 많이 보내면 어쩔 것이며 그 왜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당시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다급해 했으며, 이 항왜들은 악재(안현)에서 섬멸당했다. 안현에서 살아남아 이괄과 함께 도망치던 항왜들은 왜관이 있는 경상도 쪽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같은 항왜 출신 장수 김충선...망했어요 당시 김충선은 대구 우륵동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전란의 화가 미칠것을 두려워한 경상감사의 명을 받아 자신을 따르는 항왜 25명과 조선인 포수 17명을 데리고 52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격전을 벌여 서아지를 비롯한 항왜들의 목을 베어 난을 마무리 짓는다. 다만 같은 항왜들을 처벌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충선은 상으로 받은 벼슬과 토지를 극구 사양했고 억지로 떠받은 서아지의 토지조차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쓰게 했다.[32] 그리고 이걸로 끝이 아닌게 이로부터 13년 후 김충선은 남들 은퇴할 나이에 다시 한번 전쟁에 참가한다. 노익장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게 아닌가 싶다. 조선의 흔한 노인학대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같은 야사를 다룬 서적에는 이괄의 평이 극과 극. 너무 악역같이 나온 장면도 많다. 가령 인조반정 직후 인조가 용상에 앉기 머뭇거리자뭐가 두려울게 있겠냐면서 자기가 용상에 털썩 주저앉아 어그로를 산다거나,벼슬에 불만이라는 점과 무작정 왕을 추대하고 군림했다든지 백성들이 이괄의 횡포가 싫어 한양 문을 열지 않았다고 나온다.[33] 하지만 작가의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괄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인정하며 무인임에도 시와 글짓기에 능하며,왕이 되기전 인조의 성품을 테스트 하는 등 복합적인 인물로 나온다. 대체로 이괄이 악역이 된 계기를 만든 김류가 나쁜 놈이라는 분위기.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안하무인으로 나온다.

6. 관련 인물

6.1. 이괄군

  • 이괄 - 주모자. 항목 참조.
  • 김효신 - 후발대로 남겨두었으나 관군에 투항. 투항한 후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며 전투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오히려 장만이 이를 위장투항으로 의심하여 전투에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역모에 가담했다는 비난과 질책, 그리고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 한명련 - 김류의 모함으로 이괄과 함께 엮여들어간 인물. 호송 중에 이괄에게 구호를 받아서 반란에 동참한다. 한성 전투 도중에 부상을 받고 사망한 걸로 알려지면서, 관군의 기적적인 역전승의 원인이 되었다.
  • 기익헌, 이수백 - 부장들. 패주한 이괄의 목을 베어 바친다. 위 항목에서 소개한대로, 이수백은 그야말로 인간쓰레기(…)
  • 한윤(항목없음). - 한명련의 아들. 패잔병들을 이끌고 청으로 도망가서 호란을 일으키는 원흉 중 하나가 되었다.

6.2. 조정

  • 인조 [34]
  • 김류 - 가장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 항목 참조. 딱 삼국지의 양의 같은 인물[35]
  • 장만 - 도원수. 관군 총지휘관. 문인 출신. 행적을 보면 딱히 유능한 군인은 아니었지만, 반정공신이었기에, 인조의 마음에 들어서 당시 조선의 군사활동을 총괄한 인물. 관서에 이괄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바로 장만. 하지만 조기에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하고, 이어서 벌어진 정묘호란-병자호란까지의 병크로 이어지는 행보를 보였다. 당연히 역사가들의 평가는 박하다. 당대의 굵직한 사건에서 고위직에 있었을 데도 불구하고, 대중에서의 인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36]
    다만 완전히 무능하다고 평가하기만은 애매한 것이, 최소 이괄의 난 과정에서는 자기 한계를 알고 처신했다는 점이다. 애초 이괄에게 주전력을 맡긴 것도 그렇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병력을 전부 정충신에게 맡겨 실전을 치루게 하고, 자신은 후방에서 예비전력을 편성하고 보급품을 마련하여 바로바로 정충신에게 보내주었다. 때문에 이때 장만을 가리켜 도원수는 군사없는 장수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황주에서 정충신이 패전하고 조정에서 정충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자 오히려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정충신을 감싸고 계속 이괄군 추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딱 자기 한계만큼 일 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여담으로, 2014년 1월 12일 진품명품에서 후손이 인조반정 공신교서과 영정을 가지고 나왔다. 감정가 5천만원 후손이라는 분은 자신의 조상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출연했다고 하여, 스스로 적어낸 감정가는 조상의 유물이므로 감히 가격을 적을 수 없다고 0원이라고 선언하셨다. 근데 조상님 평가는 좀...
  • 이원익 - 당시 영의정. 일명 오리정승으로 유명한 그 분. 이괄의 난에서는 김류에게 홀라당 넘어간 인조의 명령으로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숙청했다. 그 외에 별다른 비중은 없지만, 조선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재상 중 하나. 임진왜란류성룡과 함께 이순신을 옹호한 인물이며(후에 선조에게 숙청당해 류성룡조차 변호하지 못할 당시에는 정탁과 함께 이순신을 변호했다), 쿠테타를 일으킨 인조 세력에게조차 필요한 인재로서 평가받은 내정의 1인자이다. 당연히 남인이라 말년에는 밀려나고 오리곡에서 여생을 보냈다. 아아 내정계의 노인학대..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흥안군 - 인조가 수원으로 도망갈 때, 이괄이 왕으로 옹립했으며 자신도 응했다는 혐의를 받아서 처형크리. 쓸데없이 이괄 때문에 죽었다

6.3. 관군

  • 정충신 - 이괄의 난에서 관군 측의 진 주인공(…). 이름이 스포일러 모함을 받고 친구에게 엮여들어갈 뻔 했으나, 관군으로 참전하여 반역자를 끈질기게 추적하며 막아서고 끝끝내 패퇴시킨 인물. 하지만 이괄의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그런 등장인물이 있었지" 정도로 묻혀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지못미 범생 다만, 기록을 보면 이쪽이야말로 진정한 군인.
    진지하게 따지면, 이괄 즉, 반란수괴보다 재평가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37] 군사 능력으로 따져보아도, 처음부터 정예군을 이끌었던 이괄을 넘어서는 전략을 보여준다.[38][39] 이괄의 난 자체가 이괄 vs 정충신이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한다. 각 상황에서 예언자 수준의 기록을 남긴, 실질적으로 이괄보다도 아까운 인재는 이쪽이다. 고령,질병,정치적 요인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것이 아쉬운 인물. 장만과 관군은? 기타 NPC지 뭘[40]
  • 남이흥 - 정충신과 함께 안령 전투에서 활약한 무관. 관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안타깝게도 정묘호란 때 전사하여, 충장공 칭호를 받는다. 제법 뛰어난 군인이었거나 도성에서도 이쁨을 받았던 모양.
  • 김충선 - 네임드 항왜출신 명장. 대구 지방에 은거하여 잘 살고 있었으나, 이괄의 패잔병 토벌에 나서서 항왜들을 썰어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참전한다. 어째 능력자들은 죄다 노인학대에다 자기 파벌을 죽여야했다 지못미 인조 개X끼해봐
  • 이중로, 이성부, 이확 - 마탄 전투에서 대패. 앞의 두 명은 사망. 이확은 말의 피를 바르고 생존. 참고로 이중로는 사격술이 뛰어나 마탄 전투에서 이괄군 군관 7명을 조총으로 저격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 박효립 - 임진강에서 이괄군을 만났으나, 도하를 막지 않고 도망친 죄로 참수.[41]
  • 임회 - 패주하던 이괄을 막다가 역습으로 사망. 안습

8. 관련 서브 컬쳐

네이버 웹툰에서 고일권이 연재하는 만화. 이괄의 난이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미칠듯한 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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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2품 당상관 반열로 대감으로도 불릴 수 있는 품계로,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지금이야 대권까지 바라볼 수도 있는 요직이지만, 당시는 며칠마다 사람이 바뀌는 한직이었다.
  • [2] 조선군의 부사령관. 한국군으로 치면 합참차장 정도
  • [3] 실록에 의하면 "인조 : 도원수(장만), 중원(명나라)과 힘을 합쳐 적(청나라)을 물리치려면 병사가 얼마나 필요함? / 장만 : 10만은 있어야죠 / 인조 : 10만은 너무 많은데? / 장만 : 못해도 5만은 있어야 함. 그리고 부원수 자리 비었는데 이괄이나 이서중에 보내주셈" 이라는 기사가 있다.
  • [4] 병권을 쥐어 준 걸 보면(현대 한국군에 대응하면 1야전군 사령관 겸 참부의장으로 임명한 격) 정치적 의도보다는 현실적 대응이 앞선 셈.
  • [5] 이게 좀 말이 안되는 게 이괄의 아들은 당시 나이 스물도 안되었다…. 이런 애송이 장교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게 엉터리임에도 김류가 모함한 게 컸다. 다만 이괄의 아들은 주모자가 아니라 단순 가담자라고 분류되긴 했다.
  • [6] 이괄의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죽임.
  • [7] 이괄이 난을 결심한 데에는 평소 자신을 후원하던 이귀의 갑작스런 배신(?)도 한 몫을 했다. 왕인 인조가 '나의 이괄은 그러지 않아'라고 비호했으나 끝까지 이괄을 잡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이귀였다. 사실 이귀는 자신의 문집인 묵재일기에서조차 '김류와 이괄의 뿌리깊은 불화가 결국 이괄이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며 안타깝다라는 기록까지 남길 정도로 이괄을 후원하고 비호했다. 그런데 이때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이괄의 아들의 아들뿐 아니라 이괄도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오히려 김류증거도 없이 이괄을 잡을 수 있냐고 말렸다. 이때 이귀는 김류가 이괄과 내통했기에 감싸고 도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뭔가 이름이 바뀐듯하지만 분명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 [8] 반정공신이 반란을 일으킬거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는 이괄을 평안도로 유배 파견보낼 때 신임하는 신하에 대한 예우로 이괄의 마차 수레를 손수 밀어주기까지 했다. 요즘으로 치면 창단 멤버가 뒤통수를 친 셈. 그러나 금부도사 보냈다는 거 자체가 고문으로 나온 억지 자백도 증거로 인정하는 조선의 옥사 풍토상 이괄 너를 죽이겠다라고 충분히 읽힐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징옥의 사례처럼 궁지로 몰린 북방의 장수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예상을 해야 했다.
  • [9] 나중에 정충신이 황주 전투에서 한번 호되게 당한 후로 이괄 놓치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다가 이괄군의 진격로 뒤를 그대로 따라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이 말 그대로 절벽을 타고 벼랑에 매달리는 엄청난 악조건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토벌군은 전부 녹다운되어 정작 마탄 전투 때는 지쳐 헤롱대다가 제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괄군은 엄청난 강행군을 무리없이 소화할 정도의 강병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10] 덕분에 이괄의 난 직후 장만은 형식상 잠깐 백의종군 하기도 한다.
  • [11]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앞서 말한 이괄군 투항자들까지 그대로 뽑아 올렸다.
  • [12] 강에 빠져죽은 자가 매우 많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한다.
  • [13] 이 패전으로 이확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하게 된다. 그리고 호란이 끝나고 청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원수인 청 황제한테 절하고 왔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훗날 해명이 될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안습.
  • [14] 당연하게도 박효립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으며 박효립 본인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 [15] 정충신은 장만에게 이괄이 바로 추격하여 어가를 사로잡는다면 상책이고, 가덕도에 주둔중인 모문룡과 합류한다면 중책이며, 한양에 머무른다면 하책이라고 하였다.
  • [16] 사실 이괄은 인조 자체에는 별 반감이 없었다고 한다. 그 밑의 일부 신하들이 죽도록 싫었을 뿐이지...
  • [17] 백성들 앞에서 관군을 격파하는 홍보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자충수가 되었지만..
  • [18] 그나마 서자에, 조카를 죽였다는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광해군도 장난아니게 왕권이 약했는데 그걸 또 몰아내는 쿠데타로 정권 잡은 인조나, 듣보잡왕자로 있다가 갑툭튀한 흥안군이나 그들의 권위를 도저히 왕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본격 스포츠
  • [19] 묘시 : 5시 ~ 7시 사이
  • [20] 평안도 최정예 병사 1만2천 명과 임진왜란 당시 귀순한 항왜 출신 조총수 및 검객 1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기록을 보면 이괄의 기마병은 대여진족 기병이라 편곤의 길이가 조선군 표준보다 훨씬 길어 기병전에서 우월한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 [21] 게다가 정충신이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곁에서 행주대첩을 경험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산악 방어전은 정충신에게 유리했다고 볼수 있다. 이후의 진행도 행주대첩과 흡사하고.. 산악전의 스페셜리스트? 정충신, 행주대첩 항목 참조
  • [22] 관군이 이괄군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뿌렸다.
  • [23] 실록에서도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표현하고 승장인 정충신조차 이렇게 말했을 정도니..
  • [24] 좀 심해보이지만 이괄 일당과 한편으로 취급돼서 반역죄로 연좌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관군이 한양에 입성한 후에 무고하게 처형당한 사람도 있다.
  • [25] 이후 한양에서는 이괄은 꽹괄이고 장만은 볼만했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이괄이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꽹과리를 쳤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라는 다른 어원도 있다.
  • [26] 이게 옳은 판단이었던 게 이괄을 막던 부사 임회는 이괄에게 목숨을 잃었다. 여담으로 임회는 송강 정철의 사위.
  • [27] 실록에 의하면 이괄의 난이 끝난지 10년 후.
  • [28] 이 형제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영화같은 일까지 벌였는데 어엿한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비로 위장하여 가짜 노비문서까지 만들었으며 이수백의 이웃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심지어는 이수백의 집 여종과 위장결혼까지 하여 이수백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 [29]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고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도 같은 시대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엄격한 편이었다
  • [30] 여진족을 막아야 할 관서 지역의 기병 상당수가 이 난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안습.
  • [31] 사실 흥안군을 참수할 때 인조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인조한테 왕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왕족을 참수한 죄로 역으로 심기원이 코렁탕 하옥당한다.
  • [32] 서아지와 김충선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직접 목을 베었으니..
  • [33] 이괄이 한양에 도달할 당시에 백성들이 반군을 죄다 반겼다고 한다. 다만, 관군에게 패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아마도 권세가들이 주축이 돼서) 도망 못가게 한양성문을 잠가버렸다고.
  • [34] 까야 제 맛인 인조이긴 하지만, 사실 인조도 이괄의 난에 있어서만큼은 할만큼 했다. 문제는 그가 중용한 신하들의 수준이 그 모양이라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괄의 난 자체가 인조반정의 뒤치닥거리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본인 문제도 아예 없다고 하긴 힘들다.
  • [35] 다만 김류 혼자만의 실책으로 보긴 힘들다. 이괄의 난 자체가 쿠데타 세력인 서인들이 권력을 강화하는 수순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일어난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적인 과실을 따진다면 10 중에 4~5는 가져갈 인물. 이괄, 장만, 인조가 나머지 3, 2, 1씩을 가져가면 되려나
  • [36] 인조반정-정묘호란-병자호란까지 트리플 크라운 걸친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고위공직자인데도 인지도가 바닥이다. 그의 무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인조 및 그의 후손들이 지배한 조선의 정치망조 덕분에, 각종 전공을 주워먹고 공신 대접을 받은 인물이다. 결국 대차게 까이고 백의종군했으나, 이후에도 같은 짓을 반복한다. 숨겨진 먹튀.
  • [37] 군인으로서의 능력 뿐만 아니라, 당시 정세를 평가한 식견도 뛰어났다. 하지만 역도인 이괄과의 친분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좁았고, 이후에 인조를 등에 업고 조선후기까지 망조주축이 되는 서인 세력의 눈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말년에 팽당하고 지방을 떠돌다 병자호란 이전에 병사. 여러모로 아까운 인재. 개념인이라서 인조에게 이쁨받지 못했다
  • [38] 훨씬 약하고 수효도 적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친구를 추격하여 승리한다. 물론 병력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초전에선 패배했으나, 애초에 관서의 1만 2천 정예군을 이끌던 이괄을 패잔병 및 항복한 병사 수백명으로 추격하여 끝끝내 승리를 거둔 뚝심과 전략은 이괄 개인보다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파비우스의 승리.
  • [39] 사실은 임진왜란 때의 행주대첩에서도 권율을 따라서 전공을 세운 베테랑이다! 더욱이 왜란 당시에는 천민이었는데, 거듭된 전공으로 무관까지 승진하는 사극 주인공급 인생을 살았다(…). 이괄을 패퇴시킨 안령 전투에서도 그렇지만, 적을 도발하여 끌어들인 다음 격퇴하는 모습은 산악방어의 스폐셜리스트가 따로 없었다.
  • [40] 농담이 아닌게 정충신처럼 개념있는 베테랑 군인의 활약을 빼면, 도원수 장만과 관군은 뒷북만 치거나 식물인간 수준의 행보를 보였다(…). 이는 정묘호란병자호란 때도 훌륭하게 재현된다. 그런거 재현하고 그러지 마라 이괄의 난 자체도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본대는 이괄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 [41] 다만, 애초에 관군을 잘못 배치해서 박효립은 졸렬한 수준의 속오군 민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군법을 어기고 도망친 죄도 크지만, 하필이면 그쪽으로 정예병을 이끄는 이괄이 도착해버린 것도 문제. 이괄이 운이 좋았던 건지 군권을 가진 장만을 까야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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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06 21: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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