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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

last modified: 2015-03-11 17:26:14 by Contributors


전성기 시절의 이디 아민. 자 오늘은 어떤 걸 먹어볼까.[1]


Idi Amin Dada Oumee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오메 OME

1923년 5월 17일 ~ 2003년 8월 16일

목차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집권 이전
2.3. 집권 이후
2.4. 몰락과 최후
3. 일화
3.1. 인간백정
3.2. 식인 행위에 대한 부정
3.3. 기행(...)
4. 각종 매체에서
5. 그 외

1. 개요

우간다의 악명 높은 인간백정, 인간도살자. 일명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ver. 식인종.죄송합니다. 이오시프 스탈린님.숱한 고금의 독재자 중에서도 잔혹함과 엽기스러움에서 가히 그 짝을 찾기 힘든 자로 어느 정도인가 하면 70~80년대 내내 전세계 신문에 오르내릴 정도.

태어난 연도 같은 경우 제대로 된 출생 연도 기록이 없던 터라 제각각인데 1923, 1925, 1928년. 이렇게 세 개가 대립하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우간다 북서부의 서나일 아루아에서 소부족 카크 출신으로, 농부 아버지와 악령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치료하는 주술사 아내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공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실상 문맹이었다. 193cm의 거구로 권투 챔피언이기도 했다.

2.2. 집권 이전

1946년 영국 식민지군 부대인 '킹스 아프리칸 라이플스'의 제4부대에 입대하였다. 이전 자료나 일부 서술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말일 뿐 참전기록이 없다. 1946년에 최초입대가 맞다. 2차 대전에 참전했는데 입대년도가 1946년이라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영국군으로서 반영 민족운동 비밀결사 진압에 참여했고 1961년에는 육군 중위로 승진하였다. 1962년 우간다 독립 이후, 1964년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에 총리 밀턴 오보테를 도와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 데 동참한다. 쿠데타가 일어난 우간다에는 좌파정권이 들어섰고 1967년 아민은 군 통수권자가 되었으나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1971년 1월 25일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아민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한참 냉전 시절이라 서구 국가들은 우간다의 좌파 정권을 무너뜨린 이 쿠데타를 환영했다.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2.3. 집권 이후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대상은 주로 오보테를 지지했던 세력들이었다. 약 3,000여 명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살해당했고, 오보테를 지지하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이후 아민은 아프리카의 잔인한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국제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아민이 권좌에 있던 8년간 무려 30~50만에 이르는 우간다 국민들이 희생당했다고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민은 권력의 위임 없이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가장한 사실상 자신의 변덕에 맞춰서 국가를 통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 이스라엘 관계.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사이가 좋았다. 이스라엘을 우간다에 건국하려던 계획까지 있었던 만큼 실제로 우간다에서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유대인들도 제법 살던 적도 있었고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외교전을 치뤘고 그 과정에서 우간다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갑자기 70년대 이디 아민은 자신이 이슬람교 신도임을 선언했고 대 이스라엘 관계는 하루아침에 뒤집어졌다. 이제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으며 나치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972년에는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 특히 인도인들을 내쫓았다. 이들이 유태인과 더불어 영국 식민지 시절에 노동자로 와서 우간다 경제를 좌우했기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했다. 이때문에 우간다는 경제가 파탄났다. 그러나 서방을 향한 이런 막장 행각을 아프리카 민족주의로 착각하고 좋아했던 아프리카 주변 정권들 덕에 1975년 아민은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사실 이 시절 아프리카 대부분이 아민과 비슷한 독재 정권이었다. 착각한 게 아니라 유유상종이라고 자기들끼리 추켜세워준 것이다. 거기에 미국소련이 극심하게 대립하던 냉전 시절이라 자기들과 손만 잡는다면 독재든 대량학살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1976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에어 프랑스 여객기를 엔테베로 납치하는 데 관여했다. 이스라엘 본토에서 2,000km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이스라엘인들이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과 깡 그리고 미국을 통한 경제적 원조를 비롯해 여러모로 엄청나게 앞섰던 이스라엘 정부는 한밤중에 C-130 수송기에 나눠타고 엔테베 공항을 습격한다는 전무후무한 대담한 작전을 계획 실행했다.

작전 과정에서 모두 5명이 사망했다. 일단 인질 3명이 오인사격에 사망했다. 돌입하면서 "엎드려!" 라고 영어히브리어로 외쳤다. 이 말을 알아듣느냐/못 알아듣느냐로 인질과 테러리스트를 구분했다고 보면 된다. 사망한 인질 3명은 불행히도 모두 비영어권 국가 태생의 유대인이어서 영어와 히브리어를 잘 몰라서 놀라 일어났다가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 또 인질 1명이 처형당했다. 75세 할머니로 지병 때문에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던 도중 구출 작전이 이디 아민에게 알려지자 처형당했다. 이스라엘군이 추격을 막기 위해 우간다 공군부대의 전투기를 11대나 박살냈기 때문에(그것도 이디 아민 본인으로 변장하고 공군부대에 들어가서) 아민이 완전히 빡 돈 것이다. 그리고 구출부대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가 작전 중 전사했다.현임 총리 벤야민 네타냐후의 형. MIT 출신이다. 그의 죽음을 기려 이 작전을 그의 영어식 이름인 조너선 작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5명을 제외한 전원을 무사히 구출해오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특수부대 작전에 한 획을 그은 엔테베 작전이다.

이때 처형당한 인질의 유족들이 이디 아민의 목에 거액을 걸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궁궐에서 대우받는 아민을 죽이는게 사실상 매우 어려운 데다가 성공하더라도 범죄자가 되므로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아민이 천수를 누리고 죽자 유족들은 기뻐하기는 커녕 원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종족주의를 내세워 아콜리, 랑고 등 다른 부족들을 박해했다. 덕분에 이슬람 교도라도 이들 부족들은 이디 아민을 증오하게 된다.

2.4. 몰락과 최후

1978년 군 내부의 반역 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이디 아민은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1일 되려 탄자니아군과 우간다 국민해방전선의 반격에 수도가 점령당했고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쳤다.

나중에는 이라크로 향했다가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내준 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아민은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3. 일화

3.1. 인간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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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물론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이디 아민 자신은 식인 행위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믿느냐 마느냐는 둘째 문제겠지만 전속 주방장이던 오톤데 오데라 (Otonde Odera)는 식인에 대하여 지금도 부정하고 있다. 자세한 건 밑에 서술. 다만 오데라도 그가 막장 폭군에 별별 짓을 저지른 것은 군말없이 사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1975년 한창 미쳐 돌아갔을 때의 이디 아민. 이 시절의 티팬티 입고 찍은 사진.

이디 아민 집권 중 저지른 엽기적이고 추악한 행각은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다. 자국민을 수도 없이 살해하고 탄압한 이디 아민은 기분에 따라 똑같은 죄라도 누구는 재판도 없이 무죄 석방시키고, 누구는 지독한 고통 속에 총살당하거나 쇠망치에 맞아 죽는 처벌을 내렸다. 특히 아민이 직접 고안한 고문들은 정말 악명 높았다. 남자의 경우 성기를 쇠꼬챙이로 찍거나 잘랐고, 여자의 경우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지독한 성고문을 당했으며, 젊은 여자는 처형 후 성기를 도려내 먹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 성직자들 앞에서 사람을 죽였어도 먹지는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결국 충실한 이슬람 신도가 아니라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직자들은 아민을 추방시키자고 건의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에 맞섰다는 점 하나로 편의를 봐주었다.

자신의 정적들의 목을 잘라 그 머리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그것을 보면서 희희낙락했으며 인육을 먹고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인육의 맛을 논하는 가히 악마적 행각을 벌였다.

또한 시체를 비료로 처리하는가 하면 강에 던져 악어에게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민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우간다의 악어들은 애써 사냥을 할 필요가 없어서 동물학자들이 경악할 정도로 게을러졌다고 한다. 그나마도 악어가 먹고도 썩어 남아돌 정도로 시체가 많아서 우간다-케냐 지방의 주요 댐인 날루발레 댐 관리요원들의 주 업무 중 하나가 상류에서 떠내려와 댐 수로를 막고 있는 시체 치우기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도소의 죄수들을 빽빽이 못이 박힌 마루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했고 밤이 되면 독방에 처넣었다. 한 죄수를 묶어놓고 다른 죄수로 하여금 그 머리를 망치로 때려 부수게 하는가 하면 며칠간 굶긴 그들에게 다른 죄수의 시체를 고기로 주기도 했다. 후술하겠지만 80년대 전기 영화에서 아주 리얼하게 나온다.

아민에게는 40명 정도의 자식들이 있었고 6-7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그 중의 3명은 곧바로 싫증이 나서 이혼했다. 이혼한 아내 중 하나였던 케이는 이혼할 당시 아민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혼한 후에 아민 몰래 낙태를 해버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민은 불같이 화를 내며 케이는 물론이고 수술을 한 의사까지 살해했고 케이의 시체의 팔다리를 절단해 바꾸어 붙인 뒤 헤어진 아내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는 아민의 친척들에게도 행한 짓이다. 자신의 숙모가 식탁 위에서 이런 상태가 되어있는 참상을 목격한 아민의 가까운 친척은 공포를 느끼고 그날로 우간다를 탈출했다.

그리고 주술에 취해 자신의 열 살 난 아들까지 살해해서 아이의 심장을 꺼내 먹은 전적도 있다. 그야말로 패륜.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보복을 한답시고 빅토리아 호수 옆에 이프타운이라는 이름의 폭격장을 만든 적이 있다.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의(1975.7.28~8.1) 당시 벌어진 일인데 이때 폭격이 실패하자 해당 부대 지휘관을 그 폭격장에 묶어놓고(...) 재폭격을 실시했다. 이때는 명중(...)했다. 이에 감명받았는지는 몰라도(...) 북한에서도 비슷한 처형법을 도입했다. 일명 박격포 처형!다만 이는 낭설에 가깝기 때문에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공개처형의 주요목적인 전시효과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3.2. 식인 행위에 대한 부정

물론 당사자 아민이야 죽을때까지 식인에 대하여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다른 증인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1971~1978년까지 이디 아민 전속 주방장이던 오톤데 오데라는 식인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케냐에서 태어나 우간다로 가 영국인 성공회 목사에게 조리를 배워 우간다 호텔 주방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던 오데라는 우간다 독립 이후로 케냐인 추방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던 이디 아민 군대 주방일을 돕게되면서 이 인연으로 아민의 전속 주방장이 되었다. 오데라의 증언에 의하면 아민은 대식가에 온갖 산해진미 및 별별 기행을 하던 이지만 식인에 대해선 극도로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식인을 하느냐 내가 사람고기를 준비했다느니 온갖 모욕적인 소문이 있다고 분노했다. 그는 주방장으로 일하던 7년동안 아민에 대한 식인에 대하여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물론 오데라가 아민에게 엄청난 월급이나 보너스, 벤츠 차량, 으리으리한 집같은 후한 대우를 받아가며 아내도 여럿 두며 잘 살기도 했지만 더불어 목숨 걸고 일해야했다고 한다. 하루는 주방에 있는데 무장 친위대원들이 총기 들고 주방으로 난입하여 자신이나 주방 보조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어안이벙벙한 오데라에게 아민은 무척 화를 내며 아들이 오늘 저녁을 먹고 배 아퍼하며 병원으로 갔다고 일갈했다. 만약에 독이 검출되면 네놈들은 아주 잔혹하게 죽을 각오를 하라고 으르렁거려서 다들 덜덜 떨기만 했다고. 물론 의사에게 아들이 과식 때문에 배탈난 것뿐이란 진단을 받자 미안하다면서 씨익 웃어줬다고 한다. 그 뒤론 음식 재료에 대하여 사전 점검은 다들 그야말로 완벽하게 매달리며 주방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케냐와 영토 및 여러 갈등이 빚어지면서 케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데라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케냐로 쫓겨났다. 케냐인 아내 1사람만 같이 추방 당했고 그 뒤로 30년 넘은 지금도 우간다에 가보질 못해 다른 아내나 재산에 대하여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데라는 케냐로 추방 당하면서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빈털터리로 쫓겨났고 케냐에선 오데라가 가진 음식솜씨가 통하지 않아(주로 백인층 요리) 운전기사로 일하고 아내는 가정부로 일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러다 보니 아민에 대하여 찬양할 생각은 없으며 거짓으로 식인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외신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다만 아민이 워낙에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사람을 마구 죽인 건 사실이었으며 죽인 사람을 악어밥으로 던졌다는 이야길 친위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항목에 나온 뱀이나 온갖 괴식을 즐긴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오데라는 90년대에 자신에게 외신 기자들이 찾아와 아민의 식인에 대한 걸 물어봤을때 대체 뭔 소리하는지 몰라 멍 때렸고 그때서야 식인 장면을 넣은 아민에 대한 영화를 보고 저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고 격분했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그가 식인했다는 걸 내가 왜 부정하겠느냐? 그걸 증언하는 걸로 돈을 벌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내가 아민을 감쌀 것 같느냐? 내가 인육 요리를 준비해서 그걸 탓할까봐 감춘다? 만약 아민이 식인요리를 즐겼다면 나에게도 가차없이 만들라고 지시할 자였다. 뱀이나 별별 동물 생식을 준비하라고 하여 다 준비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식인 요리 준비를 거부한다? 그렇게 수틀리면 나도 얼마든지 죽일 아민이었다. 추방 당하기 전 나도 교도소에 몇 달 동안 갇혔을 때 이제 나도 죽는구나 모든 걸 포기했지만 아민이 그동안 먹은 요리들이 워낙 맛있어서 살려준다며 맨 몸으로 풀어준 것뿐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판단은 알아서 하자.

3.3. 기행(...)

살아있는 독사를 잡아 그 자리에서 를 쳐 외교 사절에게 권했고, 각료회의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장관이 있으면 즉석에서 뺨을 때리는가 하면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다리 밑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했고,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내기도 했다. 흑인, 백인 여성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즐겼으며 모든 공문서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 앞에는 각하, 원수,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속 모든 물고기들의 신,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 라는 긴 수식어를 붙이게 했다.

또한 농담을 즐겨 아민이 한 농담은 나라 이곳저곳에서 유행어처럼 입에 오르내렸다. 이웃나라인 탄자니아의 대통령이 아민의 정책을 비난하자 마치 상심한 듯 천연덕스럽게 "나는 탄자니아 대통령을 너무 사랑한다. 그가 여자였더라면 흰 머리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려 했을 것" 이라며 조롱했고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담은 전보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아민의 농담들 속에는 때때로 매우 진지한 면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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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66.72 KB)]

아즈모단 나는 왕이다 가마를 들고가는 백인 사업가들.

한술 더 떠서 아프리카 통일기구 수뇌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자신이 백인들을 굴복시켰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간다 내에 있던 백인 사업가 여섯 명을 잡아다가 노예로서 자신의 가마를 들게 하기도 했다. 당시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과 스웨덴 국적의 사업가들로, 아민이 우간다 내의 그들의 사업권을 몰수하겠다는 위협으로 자신의 가마를 들고 양산을 받쳐들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언론들의 취재에 응할 때는 당시 사건에 대해 "나는 백인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을 뿐" 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고. 변명도 핑계도 좀 그럴싸하게 대던가 여하튼 이 사건은 지금도 이디 아민 하면 거론되는 꽤나 유명한 기행 중 하나인듯하다. 출처1출처2출처3 위 사진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들이 반대로 당하는 것이라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자랑거리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단교했을 때에는 자기 집 뒤뜰에 언덕을 만들어 골란 고원(...) 이라 이름 붙인 뒤 병사들에게 점령하라고 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4. 각종 매체에서


故 조지프 올리타(Joseph Olita. 1944~2014. 케냐 출신 배우, 2014년 6월 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남)의 이디 아민. 싱크로 120%


이디 아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엔 1980년작인 《이디 아민》이 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상영했고 비디오로도 나왔다. 고기(!)를 손으로 집어먹는 포스터와 영화 광고 어구가 진짜 흠좀무이다. 포스터를 장식하는 고기는 영화를 보면 인육이다. 반대자의 검시현장에 나와서 저 고기를 처묵처묵한다.

그리고 2006년작 포리스트 휘터커 주연의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The Last King Of Scotland)이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휘터커의 광기 어린 연기를 보면 이디 아민이 어떤 종자(...)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이 엉뚱하게 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이냐 하면 이디 아민이 평소에 스코틀랜드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을 잉글랜드로부터 우간다를 지켜냈다고 자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작 스코틀랜드는 지금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있다. 머잖아 분리 독립할지도 모르지만

물론 휘터커의 이디 아민 연기도 훌륭하고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도 수작이기는 하나 사진으로 보다시피 80년작의 이디 아민을 맡은 조지프 올리타의 외모가 더 흡사하며 내용 면으로도 더 디테일하게 다뤘다. 구할 수 있다면 꼭 보기 바란다. 단 국내 비디오에서는 인육 취식이나 반대자 머리 냉동실에 넣어두기나 독사 회 쳐먹기 등등 삭제가 꽤 많다.

80년대판은 그때 당한(!) 사람들이 자문에 참여했고 학자 중 하나는 본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아민 역의 올리타는 케냐 출신인데 나중에 덴절 워싱턴이 나온 다른 영화 《미시시피 마살라》(1991)에서도 이디 아민으로 잠깐 출연한다.

이디 아민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아민의 진솔한 이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 감독이 몇 군데 페이크임을 넣어두었다. 이를테면 아민이 자신은 민주적으로 통치한다고 자랑하는 장면 뒤에 의문사나 의회 해산에 대한 기록 영상을 넣는다든가. 그래서 판본을 두 가지 만들었고 이 중 아민에게 유리한 판본 우간다에서 상영했다. 아민에게 걸려서 원판은 서구에서도 자진해서 극장에서 내려갔다. 감독이 원판을 극장에서 내린 과정도 걸출한데 우간다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억류한 후 감독에게 전화를 강제로 걸게 하여 극장에서 영화를 내리게 했다. 당연히 감독은 인질들의 안전 때문에 영화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간다판 영화는 아민의 선전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아민이 퇴임한 후 원판 영화가 공개되었다.

5. 그 외

이디 아민이 살아있던 시절 우간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행해지던 신고식 행사가 바로 큰소리로 "이디 아민 죽어라!"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민이 대표팀 내에 끄나풀을 심어뒀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시절이라 정말 많은 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아민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우간다로 귀국하는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세베니 대통령이 "이디 아민은 범죄자이다. 돌아오면 우간다에서 가장 큰 감옥이 있는 곳인 루지라로 보낼 수밖에 없다" 고 못을 박아 아민은 돌아올 수 없었다. 아민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망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전 우간다 국민이 기뻐했으며 몇날 며칠을 축제로 보냈다.

이후 밝혀진 의학 보고서에 따르면 이디 아민은 장기간의 매독 감염으로 가벼운 조울증에 걸린 상태였고 그로 인해 격렬하고 상반되는 감정과 발작, 편집증,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매독 감염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이상은 정신분열증보다 매독으로 인한 치매로 분류한다. 이 차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은 절망적일 정도로 상당한 차이이다. 정신분열증은 약으로 증상을 크게 완화할 수 있지만, 현대 의학에서 치매는 아직도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실례로 치매 환자가 아이를 삶아죽여 국으로 만드는 예를 보면 이 인간도 치매에 걸린 게 맞긴 맞는 듯. 하지만 이런 악독한 독재자 밑에서도 혜택을 누린 몇몇 이슬람 교도들은 함께 모여 아민의 기념관을 세우는 것을 의논했으나 자금 지원을 부탁한 아랍 국가들에게는 죄다 거절당했다.

더욱이 우간다 안의 이슬람 교도 모두가 이디 아민을 지지한 게 아니다. 아민의 식인 행위에 기겁한 보수적 율법학자들이나 진보적 이슬람 교도들은 '이것은 이슬람교도의 망신거리가 아니냐'면서 아민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결국 우간다를 떠나서 아랍 각지에서 아민의 행위는 이슬람의 망신이라고 열심히 주장하면서 아랍 국가들이 아민을 다시 보게 된다.

이디 아민의 몰락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디 아민의 망명을 받아준 건 그가 이스라엘과 맞섰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불만이 적지 않았다. 바로 금지된 사람고기를 먹어 쿠란을 모독한 자를 왜 받아주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디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치스럽게 살기는 했으나 일절 초청 자리는 제외되었다. 어느 왕족은 외출 도중 아민과 만나자 불쾌한 얼굴로 인사도 안 받아주고 가던 길을 갔다. 그 왕족은 "나를 보고 잡아먹고 싶어할지도 모르잖아?" 라면서 아예 식인귀로 여겼다고. 이에 이디 아민은 과장되었다고 반론하기도 했으나 그 명성은 여기서도 알아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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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디 아민의 괴식에 대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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