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이란-이라크 전쟁

last modified: 2015-04-14 15:30:1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개전 (1980년 9월), 이라크의 기습
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
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4.2. 국제적 여파
4.3. 한국에 미친 영향
4.4. 대중 문화


iran-iraq.jpg
[JPG image (30.52 KB)]


1. 개요

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8년여에 걸쳐 80년대를 관통하며 이란이라크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UN의 중재로 휴전이라는 형태로 끝났고 이후 걸프전이라크전을 거쳐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지금도 그 영향은 아랍권의 불씨로 남아있다. 말이야 좋아 8년여지 8년동안 소강상태 없이 전쟁이 전면적으로 계속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다.[1]

2. 배경

이란과 이라크는 비록 오랜 앙숙으로써 군사정치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나 모두 소규모 국경분쟁에 지나지 않았고 70년대 후반에는 사트 알 아랍 수로를 비롯한 국경문제에 합의를 도출하고 군사정치적 충돌을 일단락함으로써 (1975년 조약) 우호적인 관계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었다.

그러나 호메이니란 이슬람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모조리 뒤집어졌다.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은 사담 후세인의 경제발전과 이라크 국가주의 교육의 실시로 종파별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는데 호메이니가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에게 반란을 촉구하며 아랍 전체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고자 하는 공작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아파 소수국민과 순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유혈사태가 발발하고,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지역에서도 소요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란은 사트 알 아랍 수로를 비롯한 군사정치적 합의를 모조리 깨고 일방적인 주장을 계속하였다.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아파 준동을 극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배경에는 이란이 있다고 보았고 이란을 격파하면 시아파 준동을 막고 군사정치적 위협을 배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사담 후세인은 근대국가 이라크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쿠르드족, 수니파, 시아파라는 국내 갈등을 통합해 이라크 국민으로써 자신에게 복종하는 의식을 재편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오랜 숙원을 망가트리는 호메이니의 준동을 간과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이란 내부의 문제도 전쟁 발발에 한몫을 하였는데, 이란은 팔라비 왕의 시절 친미,친서방 국가로써 중동 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부는 국내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모조리 숙청함과 동시에 군부 내의 미국 유학장교, 첨단 미제무기 조종사들을 모두 친미세력으로 보고 숙청해버렸다. 프랑스 혁명이냐 그 공백을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명수비대로 채워버리면서 자연히 이란의 군사적 자질은 심각한 저하를 겪게 되었다.

더불어 사담 후세인은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속전속결로 크게 이긴 이스라엘군의 전략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이라크의 국력이 이란보다 뒤떨어지지만, 이러한 이란의 군사적 문제점과 전성기를 달리던 당시 이라크의 군사 수준을 고려하면 전격전을 통해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면서 이란이 자연히 협상 테이블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시아파 준동의 배경인 이란의 위협을 소멸시키고 대국인 이란과의 장기전이라는 위험요소를 떠안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사담 후세인은 비슷한 입장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의 아랍국가들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으며, 이러한 배경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란-이라크전의 개전을 결정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왕조 하나가 무너진 혁명에 긴장 탄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차관만으로 모자라서 수제 무기를 사다가 이라크에 대여해 주어서 이란을 박살내려고 노력했다. 당시 이라크가 아랍 연합 가맹국들에 빌린 돈만 당시 돈으로도 무려 1,000억 달러를 넘었다. 이집트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무슬림 간의 불필요한 전쟁이라 비난하면서도 후세인에게 무기를 대주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사이가 틀어진 이라크와의 관계 회복을 노린 것이었다. 오로지 시리아와 리비아만이 이란을 지지했지만 아랍 국가들이 이란을 회치기 위해 적극적 지원을 한 반면 이들은 사우디 등과 깊은 관계가 있어서 전쟁의 확대에 반대하는 등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아랍 연맹은 이란산 석유를 대량 수입하던 일본을 위협하여 이란 석유를 더 이상 사지 못하게 했고 국제연합에 이란 제재안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3. 경과

3.1. 개전 (1980년 9월), 이라크의 기습

전쟁은 9월 23일 이라크 측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11일 전까지만 해도 "이란의 파괴나 점령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가 1980년 9월 17일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고 9월 22일부터는 바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표면적 목적은 1950년대부터 영유권 분쟁을 계속해온 샤트알아랍 강의 회복. 여기에 회교 원리주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를 필두로 한 아랍 제국(諸國)의 이해 관계, 그동안 이라크의 전략적 위치를 위협하는 팔레비 왕정의 붕괴 이후 페르시아 만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자 싶었던 후세인의 야심, 아랍에서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던 소련, 소련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던 중국, 미국의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광분하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들의 욕심까지 얽혀들면서 국제적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된다. 말이야 좋지 사실은 중국과 북한을 빼곤 이란 편이 없어서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서방국가들은 이라크의 민간인 학살과 화학무기 사용도 묵인했다.

이라크는 전쟁을 시작한 지 불과 닷새만인 9월 28일에 돌연 휴전협정을 제의했지만 이란은 10월 5일에 일언지하에 거부했고 이에 이라크 군대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전쟁 초반, 이슬람 혁명 이후 샤에게 충성하던 군부에 대해 45만 대군 중 25만 대군을 없애버리는 초대규모 숙청[2]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던 이란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전쟁은 일방적으로 끝나리라 예상되었다. 특히 이란은 알토란 같은 항공전력을 조종사가 없어서 놀릴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순식간에 호람샤르, 수산게르드와 아바단을 비롯해서 이란의 주요 공업도시들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

그러나 이라크군 또한 이란군의 약화만을 믿고 즉흥적으로 시작한 싸움이었기에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도 1980년 말부터 바로 말이다. 사담은 애초에 "히트 앤드 런"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전쟁 발발 직후 이루어진 유엔 안보리의 중재를 바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개전 당시부터 애시당초 이란의 인구와 국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휴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전쟁에서 승리. 이라크를 굴복시키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상황이었다. 사담은 전쟁을 1년 이상 길어지는건 생각도 안해봤는데 말이다.

심지어 전쟁 발발 한달만인 1980년 10월, 전략요충지이자 석유산업의 중심지인 아바단을 둘러싼 아바단 공방전에서 이라크군은 전차 600대, 병력 2만을 동원하고도 5천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반격에 패주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당하는걸 후세인이 꺼려했기 때문인데, 도리어 그 때문에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발목만 안 잡혔을 뿐.

호메이니는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이라크를 보고 11월부터 바로 반격에 나섰다. 호메이니는 금지되었던 팔라비 왕조국가(國歌)까지 다시 허용하면서 애국심과 단결을 고취시켰고 여기에 사상문제로 수감되거나 퇴출당했던 구 왕조시대 군인들이 이란군에 복귀하면서 팔라비 왕조 시대에 쌓아두었던 서방제 무기들이 제 성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이라크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이란은 서방의 경제제제로 가동률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렇다 해도 견실한 국력과 인구구조, 기술력, 경제력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결국 팔레비 왕조를 타도했던 혁명세력의 광신적 투지와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던 국력의 차이가 전쟁을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다. 특히 국가를 다시 허용한 것이 의외의 전과를 올렸는데 호메이니의 정부보단 차라리 사담 후세인이 낫다고 전장보단 감옥에 있길 고집하던 공군 조종사들이 대거 군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후 전쟁은 이란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1982년 5월에는 대반격 속에 이란군이 1만명이나 되는 이라크군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이라크 군에 비해 열세인 지상전에 비해 제공권은 이란 공군이 확고하게 잡아서 개전 초기에는 이라크 공군이 이란 영공으로 침투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이란 공군이 바그다드를 포함하여 이라크을 공습하였고 1981년 4월 3일에는 747 공중 지휘기, 707 공중 급유기와 F-4, F-14를 이용하여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하여 이라크 국경을 돌아 시리아 국경과 인접한 이라크 공군의 H-3 비행장을 공습하여 30~50의 전투기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1981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스라엘 공군의 이라크 오시라크의 타무즈 원자로 폭격사건에 놀란 후세인이 공군 주력을 빼서 이스라엘 국경 방어에 돌리는 바람에 이라크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여하튼 전황은 이라크군이 이란군의 주요 루트를 점거하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빠진다.

호람샤르 시는 이란과 이라크가 몇번이나 번갈아 점령하는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 네번째로 호람샤르 시를 점령했다가 다시 빼앗긴 이라크는 평화회담을 제안했고 이라크의 물주인 사우디아라비아도 파괴된 호람샤르 시를 비롯한 이란의 폐허를 재건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구슬렸지만 이란은 완강했다. 이란은 카르빌라를 비롯한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들을 죄다 점령하기 전까진 '거짓된 평화'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때 안먹었더니 이슬람 국가놈들이 다 때려부수고 있긴 하다

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그러나 팔레비 왕조의 서방제 무기들도 지속적인 관리가 힘들어지자 지속적으로 도태되기 시작했다. 치프틴 전차의 업그레이드형이었던 전차가 스펙상 모든 면에서 열세이던 T-62와 각각 250대씩 펼친 대규모 기갑전에서 무참하게 참패하거나 [3] F-14 톰캣 7대[4]MiG-21미라지에 의해 손실 되는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5] 그 밖에도 이 전쟁에선 이란의 AH-1J 코브라 헬기가 이라크의 MiG-21한대를 격추시켰다거나, 이라크의 하인드 헬기가 이란의 F-4E 팬텀을 격추시켰다거나 하는 괴이한 기록들이 많다. 심지어 이란군이 피닉스 미사일 한 발로 이라크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두 나라 모두 항공전력까지 총동원한 총력전을 장기간 수행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공군은 꼭 필요할 때만 출격시키고, 지상전력도 보병 위주로만 굴리면서 전쟁은 전장에서 비행기를 찾아보기 힘든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케케묵은 인해전술까지 동원되는 상황이 되었다.[6] 본래대로라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 이란이 쉽게 이라크를 제압해야 정상이지만 아랍권 국가들이 필사적으로 이라크를 지원했기에 결국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을 반복하는 교착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란의 반격으로 이라크는 점령지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자국 영토까지 뺏기는 수모를 겪었으며 기세등등해진 이란은 후세인 정권 축출을 외치며 이라크의 석유 파이프 라인과 항구를 봉쇄한다.

다급해진 이라크는 독가스를 사용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스커드 미사일로 민간인 지역을 공격했다. 이란도 그 보복으로 중국과 북한제 스커드를 수입해 이라크를 향해 쏴대기 시작했다.[7]

또한 전쟁은 이에는 이, 에는 피를 부르는 보복전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유전들이 우선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러다 상대방 항구를 출발하는 조선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공격을 받았고 1984년에 들어서는 공격은 주변국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기뢰까지 닥치는대로 뿌려대는 통에 페르시아 만은 물반 기뢰반이 되어갔다. 이에 미 해군함대가 해로 수호를 명목으로 페르시아 만에 고정 배치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빈센스호 사건 같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

이란내 반이슬람 인사들에게 선전활동을 펼쳐 팔레비 출신 이란 파일럿들을 항공기 8대와 함께 투항시킨다. 반면 이란은 쿠르드족의 독립을 제시하였으며, 격분한 후세인은 1987년 사촌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시켜 화학무기로 수천명의 쿠르드족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50만명을 강제수용소에 수감시기도 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다룬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종전 이후에 이 사건을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부통령 타리크가 "국제연합에서 우리가 쿠르드족을 학살한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고 넌지시 경고하자 알리 하산 알 마지드[8]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전쟁 중에 뭘 바란 거요? 우리가 놈들에게 꽃이라도 보내줄 줄 알았나?"라고 코웃음을 친다. 물론 안 보내준 대가로 20여년 뒤 셋 모두 교수대로 끌려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시 이라크군은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각종 잡다한(EE9, PT-76[9]) 기갑장비들을 모아 초유의 반격을 성공시키며 여러 영토를 탈환하고 다시 이란의 주요 요충지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때 활약한 군이 후에 이라크의 화국 수비대가 되어 후세인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라크나 이란이나 국력의 피폐를 감출 수 없었고, 천문학적 전비에 이라크 측 스폰서인 사우디와 쿠웨이트마저 발을 빼는 상황이 오게된다. 국력이 압도적이던 이란 측은 이제 승리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씨구나 하며 좋아했지만 쪽박을 차게 된 후세인은 약이 오른 나머지 사우디와 외교 단절까지 해버렸다.

후세인은 1988년 2월 "도시전쟁작전"으로 스커드B 미사일 폭격(2개월 동안 150회)에 테헤란 등을 쑥밭으로 만들고 1988년 5월 이란에 다시 쳐들어가는 등 마지막 발악으로 이란군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국제적 고립 상황에서 이라크 정복은 일단 어렵고 나중에 다시 추진하자고 판단한 이란측이 결국 협상에 동의하면서 UN이 개입한 협상을 통해 전쟁은 종결되었다.

8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정규군, 시민군, 민간인을 합쳐 이란 측이 30만~80만, 이라크 측이 20만~50만 정도로 추정된다. 군병력만 따져도 이란 25만. 이라크 10만이 희생되었다. 부상자는 최소 100만 이상, 최대 200여 만 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것이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 각각 5,000억$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어 한동안 경제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는 이후 쿠웨이트 침공에 따른 걸프전과 이라크전, 그 이후의 대혼란 속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했고 이란 역시 전쟁 피해를 복구하긴 했으나 정권 자체의 한계로 인한 국제 제재 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이 전쟁에서 막대한 돈을 전비로 낭비한 사담 후세인은 막판에 전비를 끊고 이라크에 꾸준히 딴지를 놓던 쿠웨이트를 침공하게 되고 걸프전의 계기가 되었다. 한때 사담의 비공식 후원자였던 미국이 걸프전과 이라크전으로 이라크를 무너뜨리고 후세인을 사형시킨 것이 지금 보면 아이러니. 한편 이란은 이후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채 전쟁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으나 정권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하지 않은데다 핵개발까지 추진하면서[10] 국제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진국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란은 당시 아르메니아인 부유층들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군비로 썼기에 아르메니아계는 이후에 이란에서 더 큰 신앙의 자유 및 여러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이전과 달리 자국 내 소수 종교인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어느 정도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완화하여 국민여론을 달래는 등 최소한의 개혁도 수행하였다.

4.2. 국제적 여파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라크에 원자로를 시작으로 전투기, 헬리콥터, 미사일, 자주포 등 소련 다음으로 많은 양의 무기를 팔아먹어[11] 피묻은 돈과 석유로 배를 불렸으면서도 나중에 악역은 미국에게 떠맡길 수 있었기에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 손꼽힌다. 당장 이탈리아만 봐도 돈도 받았으면서 전쟁을 핑계로 이라크에서 주문한 호위함 5대를 인도하지 않고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영국도 페니실린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는데, 이라크의 부정부패로 유통기한이 지난 페니실린을 수입해 수십명이나 죽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격분한 후세인은 1982년 3월 각료회의 도중 보건장관 리야드 이브라힘을 옆방으로 불러내어 직접 총살하였다.

또한, 국내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미국1984년까지 사실상 이란-이라크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레바논에서 쌍코피가 터진 판(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폭파사건)에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는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이란에 약점 잡힌 상태이기도 한 탓에 겨우 애꿏은 그레나다에게나 화풀이할 정도였고, 사실 레이건은 호메이니보다는 리비아카다피를 더욱 미워했다.

그러다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압박으로 소련의 원조가 줄어들자 후세인은 미국에 러브콜을 보냈고 때마침 이란-콘트라 사건이 뽀록나 눈에 뵈는 것이 없던 레이건 행정부는 옳다구나 싶어서 이란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 지원을 시작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보통 석유 가격이 올라가고, 전쟁 초기에는 이란/이라크의 공급 중단이 영향을 끼쳤으나, 주변 OPEC 국가들의 공급여력이 충분하여 폭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석유를 헐값에 팔아 유가가 오히려 하락하였다. 이는 두 나라 재정 악화에 더욱 영향을 미쳤고 특히 상대적으로 국력이 견실했던 이란보다는 이라크의 타격이 더 컸다. 또한 상대 국가의 유전을 전략적으로 파괴함에 따라 해양 석유 오염도 심각했다.

4.3. 한국에 미친 영향

전쟁 당시 한국은 교전 지역에서 아래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
  • 1982년 8월 9일 이란 호메이니 항에서 화물을 내려놓고 출항하던 삼보 베너 호가 이라크군의 포격과 함포사격에 침몰, 9명의 선원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다.
  • 1984년 7월 1일 같은 장소에서 입항하던 원진 호가 이라크군 공습을 받아 침몰하였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같은 해 9월 16일에는 쿠웨이트를 출발한 유조선 로열 콜롬보 호가 스틱스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불발이라 함교에 미그기 만한 불발탄이 박힌 채로 국내 귀환하였다.
  • 1988년 7월 1일에는 이란 캉간에서 가스정유소를 건설하던 한국 대림산업 공사현장이 이라크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한국인 근로자 1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의 대책을 펼쳤지만 애시당초 전쟁중인 국가에서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라는 결론만 얻었을 뿐이다.

당시 한국은 친미국가 중 군수용품을 이란에 판매한 유일한 국가였기에, 이 전쟁으로 인해 이란과 한국간의 관계는 오히려 돈독해졌다. (참고로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미국과 관계가 나빠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당시 김포국제공항항기인 이란 항공 보잉 747 카고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부품(주로 F-4 팬텀 부품)을 담고 이란으로 돌아갔다. 이 때아닌 중계 무역으로 나름 짭짤하게 돈도 만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아무래도 이란이나 이라크 모두 손 대기 껄끄러운 미국의 방조 탓도 있었겠지만, 가장 확실한 배경은 북한이 이란에 무기 판매를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가로막기 위해 청와대가 나선 것이었다.[12] 당시 팔아먹은 무기가 꽤 많았는데 2011년에는 이란이 KH-179 155mm 견인포로 차륜형 자주포를 만든것까지 확인되었다.

전쟁 중 다른 국가의 건설회사들은 안전에 대한 우려로 모조리 철수하는 상황에서 국내 건설회사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텼으며, 그 결과 1988년 위에 기록한 공습에 의해 인명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완수함으로써 한민족의 독한 성실한 이미지를 중동 지역에 각인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제5공화국 초기의 경제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1979년 일어난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은 커다란 경제 위기에 봉착했고, 1979년~1981년의 커다란 정치적 변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란에 대한 군수품 판매대금을 이용한 경제발전으로의 극복(?)과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란-이라크전으로 잡을 수 있었다. 전쟁 당시의 우호적 관계 덕분에 이란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좋은 편이어서, 호메이니가 치를 떠는 왕조 시대에 명명된 테헤란의 울로는 이슬람 공화국인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라크에게 적대적 입장을 취했냐면 그것도 아닌게, 전쟁 와중에도 한국과 이라크 간의 교역은 정상적으로 지속해 나갔다. 전쟁 와중인 1982년에 방콕, 쿠웨이트를 경유하는 바그다드-김포 노선을 대한항공에서 취항했고, 바스라에서 현대건설 직원들이 말 그대로 공사 현장에 포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가 대피한 사례까지 있었다.

북한은 이 전쟁 때 이란을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서 이를 계기로 북한 - 이란관계가 긴밀해지게 된 계기가 된 반면 1968년부터 북한과 단독수교를 맺어왔던 이라크는 북한이 적대국인 이란을 지원하였다는 이유를 들어서 1980년 북한과 단교하였다.

4.4. 대중 문화

팝 메탈 밴드인 화이트 라이온은 이 전쟁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When the Children Cry라는 곡을 발표하여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기도 했다. 팝 메탈 및 LA 메탈이 항상 놀자판이고 사회적인 성찰이 없다는 의견에 반론으로 제시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
  • [1] 다만 상대편의 전쟁 수행 기반에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중한 지휘관들이 주도하는 전선 공방전이 장기화되고, 양측이 모두 어느 정도의 경제 규모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렇게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장 한국전쟁도 초반 11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2년 2개월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 [2] 설상가상으로 여러 장군들은 앉아서 죽느니 싸우다 죽는게 낫다고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호메이니는 장군들뿐만 아니라 장교, 서방제 무기를 점검하던 엔지니어들까지 모조리 감옥에 처넣었다.
  • [3] T-62들이 습지에서 훨씬 우세한 험지주파능력을 이용해 접근전을 벌였다고한다.
  • [4] 이라크 주장으론 10대가 넘는다지만 특유의 뻥카는 어딜가나 있으니…. 이란 공군의 F-14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44대가 작전 가능한 상태로 남았는데 초기 작전 가능 기체가 60대라는 걸 생각하면 손실된 16대가 부품 부족에 의한 비전투 손실 및 동류전환이 아닌 전부 격추되었다고 해도 교전비율은 1대 10이다. 이라크 공군의 주장 수준이면 1대 22~3 이며 이란 공군의 공식 주장인 격추 및 추락 3대라고 가정하면 1대 50의 비율이다.
  • [5] 물론 이란은 개전 2일만에 F-14로 12기를 격추하였으며 이라크 항공기들의 이란 영공 침입 시도 자체를 막아버림과 동시에 이란 공군의 이라크 공습 작전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F-14 전투기 운용이 어려워지면서(그 유명한 미군도 정비 등의 어려움을 이유로 F-18로 대체했다) 20~30대 만이 작전 가능 상태가 되자 이란의 핵심 시설을 방어 하는 임무로 전환되었다. 그럼에도 F-14는 전쟁 기간 동안 160대의 이라크 전투기를 격추하였고 이라크 공군은 초기 F-14에 의한 혹독한 피해로 F-14가 등장만 해도 이라크 조종사들은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가기 일쑤였기에 이라크 공군은 F-14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 [6] 심지어 이란은 고아들이나 정치범 수용자, 그 식구들까지 지뢰 제거에 썼다. 이라크도 쿠르드족 포로들이나 정치범을 똑같이 써먹었기에 둘 다 국제적으로 욕 먹었다.
  • [7] 이 와중에 북한은 이란과 비밀리에 군사관계를 맺고 이란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라크군이 날린 미사일의 잔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에 그토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스커드 C형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 [8] 그 유명한 케미컬 알리.
  • [9] 이 장비는 돈 없이 신용거래로 사온 것이라 전후 이라크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라크가 나중에 쿠웨이트를 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10] 다만 북한처럼 핵 선제타격 권리니 핵탄두 소형화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이용을 내세운다. 괜히 드러내놓고 추진해봐야 미국이 전면 개입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11] 대표적으로 쉬페르 에탕다르 전폭기와 엑조세 미사일. 후세인은 중동전쟁 경험으로 소련제 항공기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 이전부터 비행기들만큼은 유럽제를 사들였다. 분노한 이란은 프랑스가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할 경우 서방국가 원유 수송로의 중추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라크는 이란의 항만 지역에 기뢰를 부설했다고 발표했다. 위에서 언급된 기뢰가 이때 나온 이야기다.
  • [12]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은 제 3세계에 대한 외교 경쟁 또한 치열하게 전개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4 15:30:13
Processing time 0.1595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