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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사고

last modified: 2015-03-08 20:33:40 by Contributors

이리역 폭발사고 혹은 폭발사건

주의 : 사건 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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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사건의 경위
3. 사건의 여파
4. 사고, 그 이후

1. 개요


폭발사고 이전의 이리역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경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 폭발사고.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2. 사건의 경위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한화그룹의 전신 기업인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는 당시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폭발사고를 냈다.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켜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안전수칙을 무시한 일개 개인의 단순과실사고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총체적 난국 수준인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였다.

  • 철도역의 화차 배정 직원들이 급행료를 챙기느라 화약을 실은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대기시켰다. 원칙상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는데, 고작 뇌물 한두푼을 얻어내기 위해 막아세워둔 것.

  • 이렇게 길어지는 대기시간에 열받은 호송원이 술을 먹고 열차 화물칸에 기어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열차 화물칸에는 폭발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문자 그대로 화약고 안에서 불을 붙인 것.

  • 불이 옮겨붙은 상황에서 깨어난 호송원이 침낭으로 불을 끄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불이 더 크게 번졌다. 이는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처럼 유사시 사용할 제대로 된 소화기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화약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안 철도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는 못했다. 역내에도 제대로 된 소화기구가 없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앞장서서 도망쳤을 뿐 대피명령을 내리는 등 제대로 된 대처를 하거나 최소한 위험을 주위에 제대로 알리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

3. 사건의 여파


폭발사고로 이리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중상 및 경상자가 1,158명에 달하였으며, 1,647세대의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최악의 참사였다.

중요시설물의 피해도 컸다. 익산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중이던 117 량의 기관차, 객화차 등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 채가 완파, 1,288 채가 반파되었다. 이리 출신의 모 학원 수학선생의 진술에 따르면, 이리중학교 유리창도 사고의 여파로 많이 깨졌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위치해 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로 신축 이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본래 자리에 남성맨션을 지었다.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4km 이내의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 황등, 삼기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백리 밖 전주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이때 폭발로 인한 파편이 당시 춘포면까지 날아갔다는 말이 있다. 현재 익산역에서 춘포까지 직선거리가 7km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그 폭발력이 어마어마했음을 알수 있다.

이 때 이리 시민들은 이리역이 북한군의 공습으로 폭발한 줄 알고 오히려 서울에 있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리에 주재하고 있던 기자 한 사람은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는 말을 외쳤다고.

4. 사고, 그 이후


사고로 인해 이리역은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으며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리하면 이리역 폭발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익산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버렸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로운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예를 들자면 익산우체국은 그 명칭을 구 이리우체국에 넘겨주고 함열우체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라든지(현재는 익산함열우체국), 현재는 없어진 익산등기소는 이름을 이리등기소에 넘겨주고 북익산등기소로 바뀌었다든지). 이리시와 익산군은 94년 1차 시, 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는 바람에 무산된 적이 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모씨는 사고 직후 도망쳤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건 경위 및 판결 내용은 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법원은 신 모씨에게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를 인정하였는데, 형법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유일하게 거론되는 폭발물파열죄에 관한 판례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리 시민들은 신 모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중인 신 모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여기엔 이리 시민들의 인간적인 면모라며 옹호하는 시각과, 환경만 개선되면 사상사고가 일어나도 환영을 한다는 지역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후자의 이유는 폭발사고 이전의 이리역 주변은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해 있어 그 몰골이 한마디로 "마경" 그 자체였는데, 폭발사고를 계기로 역 주변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말끔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홍등가에 거주하던 매춘부들의 인명 피해도 매우 컸다고.

불행중 다행이라면 다행인것은 사고 시각 당시 승객 600여명이 타고 있었던 열차가 부용역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간에 이리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관사가 폐색 진입시 통표를 잊어먹는 바람에 부용역에 정차했고, 통표회수 누락을 무전 보고하던중 이름을 알수 없는 한 승무원이 해당 열차에 이리역으로 들어오면 안된다는 무전을 보내 더 큰 피해를 막을수 있었다고 한다.(안타깝게도 그 승무원은 사망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천만 다행으로 화재가 일어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 열차가 정차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대피시켰다. 만일 열차가 구내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날 뻔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와 창인주공아파트가 지어졌다. 이 중, 모현주공 1차는재개발공사로 인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도 재개발 승인이 난 상태.


이리역 앞 삼남극장

한편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공연을 시작한지 약 15분 만에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폭발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 때 같이 있던 故 이주일 씨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이리 시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다. 원광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원광의료원이 개설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인데다가 이리 시내가 아수라장이었으므로 사건 이후 군산으로 이동하여 군산도립병원(현 군산의료원)에서 1차 치료를 받고[1]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이 때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있던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내었고, 그로 인해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당시 대통령 박정희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옛날 가수라서 감이 안 잡히겠지만,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의 '국민 가수'급이었다. 하춘화는 6살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이미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때였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 정밀 진단한 결과 오히려 이주일은 부상이 더 심각했다고 한다. 당장 두개골 함몰로 인해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써 유명세를 타게 되어,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TV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후 이 경기를 중계하던 KBS에서는 자막으로 이리역 폭발사고를 속보로 알렸다. 그리고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학생의 아버지가 축구중계를 보고 공부하라고 권유하여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한다. 만약 그 학생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사고 이후에 이리역 주변의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집 근처에서 목걸이나 반지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문제는 보물이 아니라 사람 팔다리를 찾는 애들도 있었다고.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2008년 개봉했다. 참고로 재난 영화는 아니다. 작중 주인공의 출생 직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설정' 정도. 가을로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다뤄지는 것보다도 더 적게 다루는 수준.

대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동네 어르신들이 진두지휘를 하고 청년들이 군말 없이 따르며 각 가정에서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사회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었다고 한다. 05년 재해가 도저히 수습이 안 되고 몇 년 동안이나 무정부 상태로 흘러간 동네도 있는 것에 비하면 양반. 뭐 뉴올리언스는 워낙 데미지가 큰 탓도 있지만.

임시 대피소 건설을 위해 군은 물론이고,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징발하여 전기 공사 등을 시켰다고 한다.

이리역 사고 27년 후, 북한에서도 유사한 참사가 일어났다. 2004년 4월 22일 일어난 룡천역 폭발사고다.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로 찻길 옆동네의 1부가 있다.

과거 MBC 프로그램 타임머신 122회에서도 이 사건을 방영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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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때도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하춘화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도립병원으로 몰려들어서 의사들이 제대로 진료를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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