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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last modified: 2015-04-07 17:10:51 by Contributors


오오 국민 가수의 위엄
엘레지의 여왕


대표곡으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있다. 한국 가요계의 레전드라 하면 남자가수는 조용필. 여성가수는 이미자 혹은 티 김을 꼽는다. 조용필이 락부터 트로트까지 사실상 모든 장르에 손을 댔고, 패티 김이 고급스러운 스탠다드 팝에 특화된 가수라면 이미자는 한국 트로트의 끝판왕.

시대가 시대인 만큼(한국형 트로트가 완성되기 전) 일본 엔카 스타일의 곡 분위기와 창법으로 인해 왜색 논란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당하기도 했다.[1]

조선일보 송의달 산업부 차장의 장모인데, 송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검소하고 자식들을 잘 챙기는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밤새 공연을 해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식들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걸 보면 레알 장한 어머니이자 대인배. 사위가 본 장모

이런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이미자 이미지의 원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이다. 전쟁의 상처를 서서히 회복해가던 전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화려하고 도회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의 가수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패티 김으로 대표되는 그 여가수들 가운데서 이미자는 고향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연상시켰다. 그녀와 대비되는 패티 김은 서구풍의 가곡이나 스탠더드 팝 같은 우아한 곡들을 불렀고, 이와 대비되게 서구적으로 편곡한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신민요 가수들도 있었지만 이미자는 사실 대중들에게 훨씬 친숙한 일본풍 엘레지로 대중들의 마음을 달래왔다.

불미스럽게도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가수 정재은을 절대 친딸로 대우하지 않고 멀리하는 모순적인 면모도 있다. 정재은은 누가 봐도 이미지와 똑 닮은 얼굴로 2살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친어머니 이미자를 단 3번 만났다고 했는데, 가정사가 복잡하다고만 할 뿐 정확한 단절의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 일화는 일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합치되는 듯한 면도 있다.[2][3] 여담으로 전남편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2011년 12월 25일 MBC 창사 50주년 콘서트 <이미자와 친구들>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석했는데, 이 콘서트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단원을 격려하기 위한 자선콘서트이다. 특히 그녀는 출연료를 세네갈에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기부해 수술에 보탰다고. 이 콘서트에서 그녀는 직접 아이유에게 마이크를 건넸고, 아이유는 그녀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 을 불렀다.

여담으로 이미자 사후에 성대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이미 개런티를 지불했다는 '사후 성대 기증설' 이 떠돌아다닌다. 당연히 거짓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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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금 듣기에는 별 차이를 못 느낄 수도 있으나,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들이 5음 음계 중심, 7·5조 가사의 폭스트롯이라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똑같다. 왜색이기는 하나, 사실 60년대 당시 장년층 이상에게는 젊은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향수로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2]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미자의 아버지, 즉 정재은의 외할아버지가 정재은을 1969년에 데려와 이미자와 만났고, 이 때 이미자가 같이 살겠느냐고 물었으나 정재은이 어머니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아버지에게는 저 뿐이니 전 아버지와 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미자가 정재은을 멀리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정재은이 1964년생으로 1969년이면 고작 6살의 정재은이 저런 말을 했으리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고 오히려 1964년, 즉 정재은이 태어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부모님이 이혼한 뒤 아버지와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낯설어서 아버지와 산다고 했을 가능성은 있다.
  • [3] 이미자의 재혼은 1970년으로, 이미자 입장에서도 이혼과 핏덩이 딸과의 이별이 원했던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개인사적으로도 재혼 전의 이미자는 돈도 벌고 성공도 했으나 노래들이 줄줄이 방송금지곡이 되고 이혼을 한다던가(1964년의 일), 1966년에야 자신의 생모와 만난다던가 하는 파란만장한 일들이 있었다.(아버지가 일제시대 징용을 당하는 바람에 먹고 살기 어려워지자 생모가 이미자만 외갓집으로 보냈다.)
  • [4] "사후 성대 기증설"은 사실 순화된 표현. 속설로 돌아다니는 말은 이런 식이다. "이미자가 일본에 자기 목을 팔았는데, 그래서 이미자가 죽으면 시체를 어떻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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