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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last modified: 2015-03-14 00:15:54 by Contributors


李方子, 1901.11.04 - 1989.04.30.

Contents

1. 소개
2. 결혼 비화
3. 광복 이후
4. 사망
5. 평가
6. 관련 작품

1. 소개

결혼 전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여왕[1]. 가톨릭 세례명은 마리아.

일본 황족으로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대한제국의 황족이 되었다. 일본 황족은 본래 성씨가 없는데,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부부가 동성을 쓰게 되어있는 일본의 민법에 따라 '이(李)' 씨 성이 되었다. 그래서 영친왕비 이씨(英親王妃 李氏)라고도 불린다.

2. 결혼 비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녀는 일본 황족들로 구성된 일본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2]의 일원으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3][4]의 2녀 중 장녀이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조카딸이며, 아키히토 덴노의 어머니 고준황후(나가코)의 사촌 언니이기도 하다.[5]

어머니 이츠코(伊都子) 비는 외교관[6]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7][8]와 후처 히로하시 나가코(廣橋榮子)의 차녀로, 이방자 여사의 여동생 노리코(規子) 여왕(1907~1985)은 훗날 어머니 이츠코의 외가인 히로하시 가문으로 시집가서 3남 2녀를 낳았다.[9]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 일본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어느새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로도 언급되더니, 불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황실에 의해 영친왕약혼하게 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20년에 결혼했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제는 황실전범의 내용을 고쳐 "황족 여자에 한해 왕공족과 결혼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다른 한쪽인 영친왕의 경우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영친왕이 일본인과 강제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고종엄귀비는 영친왕을 민갑완과 약혼시키고서 서둘러 혼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중단된 상태에서, 일제는 이 약혼을 깨버렸다. 둘을 파혼시키기 위해 일제는 정말 추악한 짓거리를 저질렀는데, 민 씨 집안에 핍박을 가한 것은 물론이고 황실에 보낸 혼수품을 강탈했으며,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도 독살했다. 이후에 일본인 형사의 손에 끌려가 중국으로 강제출국을 당해 어렵게 살았으며, 당시 관습상 황실과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은 다른 곳에 시집갈 수도 없었다.

조선 측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진행한 결혼이라는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조선의 황족과 일본의 황족이 결혼한 것은 최초였기 때문에, 당시 주위에서도 둘의 결혼 생활을 꽤 걱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방자 여사의 사촌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10]는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했다.

"단정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때때로 대기실[11]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만져주었던 이방자 님, 아직 어렸던 나는 아름답다고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겨우 5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는 꽤나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이방자 님을 매우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자 님이 이은 전하와 결혼할 당시 나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하고 교토부립 제1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므로 더욱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만 이방자 님이 이국 분과 결혼해서 여러 가지로 고생이 많을 것이라고 까닭 없이 추측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둘의 관계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제의 악랄함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이방자 여사가 임신하자, 그녀가 불임이라고 보고했던 의사들은 전원 할복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한 불임설을 알고 있었던 이방자 여사는, 일본 정부 측이 조선 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자신을 영친왕과 결혼시킨 거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신이 영친왕과 결혼한다고 결정되었을 때 아버지 모리마사가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혼내주겠다고 분노했다고 언급한 것 등을 보자면, 애시당초 불임 운운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던 신체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어른의 사정인 냄새가 짙다. 게다가 이방자 여사의 의심과 달리 일본 쪽에서 정말 불임이라서 황태자비 후보였던 마사코 여왕을 영친왕과 결혼시켰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황태자비 후보 관련은 소문이었을 뿐으로, 진짜 논의된 건 그보다 2년 뒤인 1918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이방자 여사는 이미 영친왕과 약혼한 상태라 당연히 황태자비 후보가 아니었다. 또한 1916년 당시 일본 정부가 염두에 둔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들은 전원 일본 황족이었으며, 마사코 여왕은 그 중 1명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진[12]이구 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녀가 불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불임설은 70년대 까지도 세간의 구설수에 올랐고, 심지어 낙선재로 이방자 여사를 취재하러 간 기자가 당사자 앞에서 그것을 대놓고 물어보는 역시 이 나라의 기레기! 실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 질문에 이방자 여사는 상당한 불쾌감을 나타냈으며, 아직까지도 이런 소문이 돈다는 걸 언짢아했다고 한다. 아니 사실 누가 안 불쾌하겠느냐만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애초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긴다 하여 일본에게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들 사이에서 아들이 생긴다면 조선왕실 후계자의 외가가 일본왕실이 되고, 조선왕실과 일본왕실은 혈연관계로 얽히게 된다. 이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일본 당국에게 나름대로 득이 된다.[13] 실제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 자체가 일왕실과 조선왕실의 내선일체를 노리고 일제 당국에 의해 기획된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영친왕의 배우자감을 일부러 일본 왕실 가문 사람으로 고른 것이기도 하다. 일본이 양 왕실의 피를 섞는 짓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의 동생 푸제에게 하기도 했다.[14] 바로 외가로부터 일본 왕실의 혈통을 받은 사가 히로를 푸제에게 시집 보낸 것. 청나라 왕조를 일본인으로써 이어나갈 발상하에 이뤄진 결혼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결혼도 유사한 발상으로 성립된 것일 수 있다.

3. 광복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친왕을 따라 호적상 재일한국인이 된다[15].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친정 나시모토 일가의 도움을 토대로 어렵게 살아가다가, 결국 남편을 따라 1957년에 일본 국적을 얻었다.

그러다 영친왕덕혜옹주의 상황을 알게 된 박정희 대통령이 두 사람의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한다. 1963년에 드디어 이방자 여사는 한국 국적을 얻고 남편 영친왕과 함께 한국에서 살게 된다. 한국에서는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면서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등 각종 사회봉사 활동 등을 펼쳤다.[16]

노후에 자개공작 등을 배우고 스스로 만든 장신구들을 팔며, 노동의 즐거움과 스스로 삶을 영위할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하여 큰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4. 사망

시누이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후,1989년 4월 30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정맥류로 별세했다.[17] 주변인들은 행여나 시누이의 죽음을 알고 병세가 악화되지는 않을까 염려해 이방자 여사에게 덕혜옹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사후 남편 영친왕이 안장된 영원(英園)에 합장되었고,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라는 사시(私諡)[18]를 받아 남편과 함께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다. 어디까지나 우연이지만, 이때까지 영녕전의 제실 공간은 딱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배향될 공간만 비어 있었다고 한다. 사후 의민황태자비장의위원회에서 '의민황태자비장의록'을 발간했는데,[19] 나중에 회은황세손 이구의 장례식 때 참고되었다.

사망하기 전 투병 생활을 할 때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 한국 주재 일본인 기업가들의 부인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어떤 요리를 해드리면 좋을까요?" 라고 그녀들이 물었다. 이방자 여사는 "어렸을 때 먹었던 이런이런 요리들이 참 맛있었지요" 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요리들은 일본에서 난다 긴다 하는 부유층 사모님이었던 그 부인들에게조차 생소한 요리여서, 그 부인들이 "역시 황족 출신은 다르다!!" 며 감탄했다고. 사실 남 부러울 것 없는 대기업 부유층인 재벌 가문이라 해도, 일본 황족의 콧대높은 기준에서는 "평민 주제에" 취급을 받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방자 여사의 생전 모습을 알고 싶다면 당시 뉴스데스크 보도를 참고하자. 참고로 본 뉴스의 앵커는 손석희 JTBC 사장이였다.

5. 평가

일본 황족 출신이고, 한국어는 사망할 때까지도 서투른 편이라서 대부분의 대화도 일본어로 했다. 그러나 국적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이제는 한국인입니다"라고 잘라 말할 만큼 한국인으로서 살려고 했던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평가가 굉장히 긍정적이다. 비슷한 사례의 인물로 만주국 황제인 푸이의 남동생 푸제에게 시집간 사가 히로가 있다. 이를 두고 "일본가장 못난 사람일본의 황후로 삼고, 진짜 황후감인 사람들은 한국(이방자)과 중국(사가 히로)으로 시집보냈다!!"라고 말할 정도. 을 조선에, 을 중국에 내다 버리고 를 자기네들이 가진 일본 덴노 일가의 위엄[20]

실제로 나가코 황후의 악명은 드높았다(…) 황족으로서의 프라이드 때문인지 평민 출신[21]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큰며느리인 미치코 황태자비를 모진 시집살이로 괴롭혔고, 2000년 6월 16일 사망할 때까지도 나가코 태후미치코 황후를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결국 미치코 황후는 스트레스로 우울증실어증까지 걸렸을 정도.

참고로 나가코 황후와 함께 미치코 황태자비를 괴롭히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이방자 여사의 이모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22] 이방자 여사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도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의 혼약 발표 때 일기에 "일본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라고 쓴 건 나름 유명하다. 그런데 지금 미치코 황후가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래서 시집살이 호되게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무섭다는 거다.

다만 비판도 존재한다. 피로 얼룩진 결혼 과정이 결국은 대한제국 황족의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요소가 존재했기 때문. 이 설에 따르면, 시집가기 전 친정아버지 모리마사 왕이 그녀를 앉혀놓고 "남편을 잘 감시하라"며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 외에 대한민국 정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서 활동하게 되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받은 자금을 자신의 자선활동에만 썼다는 사실이 황손 이석이 쓴 서적에서 나왔다고 한다.[23]

참고로 창덕궁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이 선생 몰래 담배를 피우고는 꽁초를 창덕궁 안에 던져 처리하곤 했다는데, 이방자 여사께선 이 모습을 보실 때마다 어디서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냐며 역정을 내시곤 했다고 한다.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말자(...).

6. 관련 작품

일본에서는 그녀의 생애가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 : 朝鮮王朝最後の皇太子と方子妃の物語)>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하였다. 칸노 미호가 이방자 여사 역할을 맡았으며 영친왕역은 오카다 준이치가 맡았다.배우 생김새로만 따지면 의친왕에 더 어울리는데 영친왕과의 첫만남 같은 것은 다소 각색이 많이 들어갔지만 참고할 만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MBC에서 촬영협조를 받아 한국 궁내 묘사 등이 어색하지 않고 한국 궁녀나 순종 등의 엑스트라는 한국인 배우가 맡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연출상 장점이다. 또한 한국 측에서 촬영 협조를 받았기에 역사적 서술에서 일제강점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의 타이틀에도 언급되는 주 소재가 부부애인 만큼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 중 껄쩍지근한 면, 특히 일본에게 불리한 측면은 언급 없이 넘어가는 부분도 있다. 이방자 여사에 앞서 이미 영친왕과 약혼한 상태였던 민갑완의 존재를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건너뛴다던가… 그리고 경제사정으로 상당히 고생했던 일본 패망 이후의 삶 전까지의 내용만 다루고 있다. 신적강하 이후로 조선왕족이라 철저히 외면받고 심지어 경제난으로 고생하며 살던 저택[24]까지 팔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좀 그렇다. 또한 역설적으로 이방자 여사는 전후, 특히 아들 이구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던 기간을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로 꼽기도 했기에 이 시기가 내용에서 빠졌다는 점이 좀 아쉽다.

영친왕 역을 맡은 오카다 준이치의 한국어가 엄청나게 어눌한데, 정작 영친왕은 일제 패망 때까지도 평상시에는 제대로 된 일본어를 쓰다가도 조선 사람들과 있으면 완벽한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아쉽다면 아쉬운 점. 영친왕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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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본 황실의 지위 중 하나. 덴노의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이라 하고, 증손녀부터는 '여왕(女王)'이라 한다. 현행 황실전범(1947년) 제정 이전에는 고손녀까지를 '내친왕', 5대째 손녀부터를 '여왕'이라고 했다.
  • [2] 세습친왕가란, 덴노의 직계 자손으로부터는 촌수가 많이 차이나지만 전통적으로 친왕 작위를 유지하며 세습하는, 일종의 일왕가의 방계 집안.
  • [3] 모리마사는 사실 메이지 덴노의 4촌이었던 세습친왕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와 일종의 시녀에 해당하는 '뇨보(女房)'였던 하라다 미쓰코(原田光枝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나시모토노미야 집안에 양자로 입적되어 대를 이었다.
  • [4]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는 일본 황족 중 유일하게 전범으로써 극동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유는 당시 이세신궁의 신주였기 때문. 이세신궁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토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이므로, 국가신토에 대한 처벌을 이유로 상징적으로 기소·처벌된 것이다. 실제로 스가루 형무소에서 고작 6개월의 형기를 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후 신적강하와 더불어 도둑질을 당해(…) 비교적 궁핍한 처지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한다
  • [5] 이방자 여사는 1984년 경향신문에 기고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사촌 여동생 나가코 황후에 대하여 "여성으로서 마음씨가 곱고, 우아하고, 총명하며, 노래를 잘 불렀다."라고 회고했다.
  • [6] 나오히로는 이탈리아 로마에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있을 때 이츠코를 낳았다. '이츠코'라는 이름도 '이탈리아(伊)의 수도(都)에서 태어난 아이(子)'라는 의미라고 한다.
  • [7] 나베시마 가문은 히젠국(國) 사가 번의 번주 집안으로,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임진왜란 당시 2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참전했다. 휘하라곤 하지만 출정 당시 가토의 본진보다도 병력이 많았다. 조선의 원쑤 전쟁 중 임해군순화군을 사로잡은 적도 있다.(사실 조선 주민들이 떠넘긴 거지만(…) 해당항목 참조) 정유재란 때엔 4진으로 왔고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연합군에 의해 울산성에서 꼼짝없이 고립되었던 굶어 죽어가던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다. 나오시게는 왜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들었고, 이후 사가성을 짓는 등 집안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그의 아들이 사가 번의 번주가 되었다
  • [8] 이방자 여사의 외조부인 나베시마 나오히로는 사가 번의 11대 번주였으며, 게다가 사가번이 속한 히젠 지역이 사쓰마, 조슈, 도사와 더불어 토막운동의 중심지였던 고로, 나오시게 본인도 무진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화족제도가 생기자 후작의 작위를 받는다. 전후 메이지 정부에도 참여했고 영국 유학 이후엔 외교관을 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방자 여사의 모친인 이츠코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 [9] 원래는 친척 뻘 되는(촌수로 따지면 아버지 쪽 6촌이 된다) 방계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山階宮武彦王, 1898~1987)와 결혼(다케히코 왕에게는 재혼) 할 예정이었으나, 그의 정신병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참고로 다케히코 왕은 역시 방계황족인 1922년 가야노미야 사키코(賀陽宮佐紀子)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관동대지진 때 임신한 상태에서 건물의 붕괴로 사망한 뒤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31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최종 계급은 해군 소좌), 1947년 신적강하 시 평민으로 격하되어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1987년 8월 사망하였다. 일본/왕실에도 나오지만 이로써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은 단절(덧붙여, 전전 후작의 직위를 받고 신적강하 한 동생 요시마로(芳麿, 1900~1989)도 자식은 없었지만 여동생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 [10] 나가코 황후의 친여동생 중 한 명. 전일본불교부인연맹에서 이방자 여사와 같이 활동하는 등, 여러 차례 교류를 했다고 한다.
  • [11] 가쿠슈인은 황족과 화족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였으므로, 학생들은 등하교 때마다 시종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시종들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중간 중간 쉬는 시간마다 잔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 [12] 첫째 아들로, 태어난 지 7개월 후 조선에 왔다가 죽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린 나이에 갑작스런 여행이 병으로 연결되어 죽은 것으로 추정. 하지만 독살당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독살설에서는 범인이 조선 황실의 대를 끊으려는 일본 군부 강경파라는 설과, 조선 황실의 적장손이 일본인 혼혈이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조선 황실 내부 소행설로 갈리고 있다. 참고로 무덤은 청량리 옛 홍릉 자리에 있는 영휘원. 할머니인 엄귀비의 묘인 숭인원 옆에 있다. 원래 왕실에서 돌이 지나기 전에 죽은 아이는 장례를 치루지 않았다는데, 이때는 순종의 배려로 장례를 치루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는 생전에 첫 아들의 죽음을 가장 마음 아파했다고.
  • [13] 게다가 한일합방(경술국치)의 조건 중 하나가 일왕실에 조선왕실이 편입되는 것이었다. 일본 당국으로서는 양 왕실의 합치를 혈통적으로 승화시키는 행위에 굳이 어깃장을 놓을 필요가 없다. 명목상 조선왕족이 일왕족으로 편입되었다곤 하나 대부분의 조선왕족은 일본왕족과 혈연관계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 [14] 푸이는 동성애가 의심되는 인물이었다. 남색을 즐겼다는 주장도 있고, 어쨌든 이성관계를 어려워했다. 실제로 푸이는 청나라, 만주국은 물론 국민당이 국부천대하고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이후에도 살았을 정도로 장수했지만 끝내 자식은 없었다.
  • [15] 이때 이름도 한국식으로 고쳤는데 '마사코(方子)'의 한국어 발음인 '방자' 로 고쳤다.
  • [16] 후술하는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에서는, 남편인 영친왕의 유지를 받든 것이라고 소개된다.
  • [17] 이 시기 언론에서는 덕혜옹주도 그렇고 이방자 여사도 그렇고 '영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18] 사적인 시호. 영친왕과 이방자는 대한제국 황실이 없어진 뒤에 사망했으므로 공적인 시호를 받을 수 없다. 이 사시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것이다.
  • [19] 대한민국 수립 이후 순정효황후 윤씨와 영친왕의 장례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장례는 기록으로 남지 않은 상태이다.
  • [20] 당연하지만 덴노 일가를 신성시하는 일본인들 앞에서 이런 소리 대놓고 하지 말자(…). 어그로꾼 취급 당한다.
  • [21] 말이 평민이지, 재벌인 닛신(日淸) 제분 회장의 딸이다! 게다가 외가는 옛 화족 가문.
  • [22]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냈으며, 쇼와 덴노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雍仁) 친왕의 장모. 옛 황족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1959년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 반대운동의 중심에 섰다. 결혼이 무사히(?) 이루어진 후로도 미치코 황태자비를 괴롭혔으며, 죽을 때까지 미치코 황태자비를 미워했다.
  • [23] 물론 이석의 주장은 약간 가려서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자세한 이유는 항목 참조.
  • [24] 메이지 덴노영친왕에게 하사한 땅에 지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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