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이병도

last modified: 2015-08-30 03:11:12 by Contributors


李丙燾 1896.09.20~1989.08.14

Contents

1. 개요
2. 일생
3. 평가
4. 기타

1. 개요

한국의 실증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호는 두계(斗溪).

2. 일생

용인 태생으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다. 이 때 그를 지도한 교수는 일본 실증사학의 대부 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로, 문헌비판과 언어학적 고증을 중시하는 쓰다의 태도는 이병도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 외에 도쿄대에 있었던 사학자 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게도 자주 가르침을 청하러 간 것은 유명한 일인데, 이병도 본인은 이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이 두 학자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1]

그의 졸업논문은 고구려의 대, 전쟁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으며, 학위를 마친 뒤에는 한국에 돌아와 중앙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의 산하기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중 하나였던 《조선사》편찬에 참가하여 수사관보로 재직했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마니시 류(今西龍)와의 불화로 사임하고 보수가 없는 촉탁으로서 조선사 편찬 사업 종료까지 일하였다. 이후 그가 한국 고대사학계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측면 중 하나는 바로 이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가하면서 각종 사료에 손댈 수 있었던 점에 있다 하겠다.

해방 이후 그의 학술적 업적은 고대사와 유교 사상사에 집중되었는데, 일반에 알려진 연구업적은 주로 고대사에 대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며,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이기백, 노태돈과 같이 오늘날 한국 국사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자들을 제자로서 배출하였다.

윗 문단의 내용에는 오류가 있는데, 먼저 서울대학교 창립 당시에는 국사학과가 아니라 사학과가 설치되었다. 서울대 사학과가 현재처럼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로 분리된 것은 1969년이다. 이병도는 사학과 교수였지 국사학과의 교수로 재직한 적은 없다. 또한 이병도는 이미 해방 당시에 50세였고, 1961년에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1949년생인 노태돈 교수가 이병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노태돈 교수를 가르친 학자는 이병도가 아니라 깁철준 교수이다.


1980년대까지는 특별한 일 없이 나름대로 권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는데, 승국 등의 재야사학자들이 자기네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로 그의 존재를 들어서, 그 이후로 이병도는 사악한 민사학의 괴수로서 대중 일부에게 낙인찍히고 말았다. 심지어 말년에는 이병도를 사칭해서 회개하고 단군을 인정했다는 식의 책이 나오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기구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이병도 본인은 그런 적 없다[2].

죽기 직전까지도 꾸준히 글을 쓰고 연구를 하던 중에 1989년에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죽기 불과 4달전에는 '올해의 고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의 손자인 이장무는 서울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3]

3. 평가

일본 사학계의 설에 질질 끌려가던 한국 사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거두로는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한국 기성 사학의 대부이자 거두 - 덕분에 더욱 비난받은 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병도 이후 사학계가 이병도의 학설을 종교교리처럼 떠받든 일은 전혀 없다.[4] 학술적으로는 상당히 비판받은 부분도 많다.

특히 그가 일제시대 이래 계속 주장해 온 진한 = 한강유역설은 무리한 점이 많아 살아 생전에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 받지 못했다. 고대사 연구에서 지나치게 음상사(音相似)에 의존한 연구 결과들도 비판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 백제의 도성을 둘러싼 몽촌토성 vs 풍납토성 논쟁에서 이병도는 풍납토성이 위치한 풍납리(風納里)를 '바람들이'로 뜻을 풀어서 바람들이→바람드리→배암드리와 같은 음운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면서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 유적이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유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후 고고학 조사 결과 나온 유물의 수와 토성의 규모는 풍납토성몽촌토성을 가볍게 발라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주장은 폐기당한 상태이다.

그리고 《역주 삼국사기》와 《역주 삼국유사》에서 보여 준 오역들과 70 ~ 80년대 사육신 논쟁에서 보여 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때문에 부산대 이재호 교수에게 엄청나게 비판 받은 적도 있다.[5] 물론 이런 비판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진 정당한 비판이니 억지로 점철된 환빠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게다가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꾸준한 비판을 받은것과 별개로, 이병도가 민사학자라는 비판이 있다. 근래에는 재야사학이라 자칭하는 환빠 들의 비판으로 치부되는데, 실제로 이 비판을 시작한건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이다.

일단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
오히려 그는 신라 백제의 건국연대를 내려 주장하는 일본인 사학자의 주장에 반발하여 건국 연대를 신라의 경우 내물왕으로 백제의 경우 고이왕으로 주장하여 백여년 이상 끌어올리는 등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들을 내세웠다는 주장.[6] 이렇듯이 해방 이후의 이병도에게서 일본 식민사학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없다.

반면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선동조론은 받아들이되, 이등 신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은 식민지 시절의 지식인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고, 위만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만주국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라고 일축한다. 다만 아래의 이완용 관련 사례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사학의 경우는 이병도의 개인사를 가지고 비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 역사학에서의 이병도 비판은 백남운이 월북한[7] 한국전 시기 이후로는 정체되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그분들이 그리 말했다는 식으로나 강의에서 언급된다.

여하간 한국 근대 사학을 연구한 최초의 비(非)일본인 사학자로, 한국사학계의 대부라 할 만한 인물이다. 한국사학계의 서울대학교 카르텔을 형성하고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있지만[8], 이병도를 제외하고는 현대 한국 사학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학의 성립에 큰 공을 세웠으며 개인적 주관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객관적 사료만을 바탕으로 저술한 그의 저서들을 누구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기타

그냥 본관과 성씨만 같은[9] 매국노 이완용의 관을 사비로 사서 불태워 버린 사람이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어차피 조리돌림 당할 관을 자기 손으로 태워서 아예 없애는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터넷에선 이병도와 이완용이 친척이라는 낭설이 나도나, 이미 이병도의 후손인 이장무가 이완용과 이병도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사실 이병도가 이완용 후손이라고 쓰는 사람들도 제대로 안알아보고 쓰는게, 어떤 곳에선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선 조카라고 한다. 게다가 진짜 친인척이라고 한들 어쩔건데?연좌제냐 연좌제는 아니겠지만 사실이라면 역사왜곡의 가능성이 있겠지

해방 이후 친일 문제의 역사학적 평가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사학자(+ 사회주의 사학자)들과 대립한 덕분에 진단학회가 폭삭 무너진 경우도 있어서[10]

유명한 후손으로서, 손자인 고고학자 건무(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전 문화재청장), 전 서울대 총장 장무, 사위인 한국추상화가 욱진이 있다. 그런데 장욱진은 현 기흥구 마북동에 위치하는 교동에 고택을 짓고, 용인에서 여생을 보내는데, 교동이란 단어 자체가 향교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는 용어이다.[11] 거기에 향교는 오늘날 공립중고등학교와 같은 위치로 지방을 관리하는 행정기관 가까이 위치하였기에 용인이 1914년 이전에는 구성에 용인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에 이병도 집안이 용인, 그것도 교동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장욱진이 처가를 물러받아 살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성 일대에 문중 땅도 좀 있기도 하고... 자식농사를 제법 잘 지은 셈인데, 환빠들은 또 국립박물관장과 서울대 총장을 친일파 후손이 한다는 병크들을 마음껏 유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윤치영 집안과 3중 사돈을 맺고 있기도 하다.

선사 편수회에서 일한 것 때문에 치암 석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12] 사전에 등재된 그의 활동 내역은 1925년 8월에서 1927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일했으며, 그 이후 1938년 6월까지 촉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또 청구학회 활동 경력도 문제가 되었다. 다만 이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학회에 소속되어 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증언에 의하면 이름뿐인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진척되지 않은지라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13]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에 따르면, 이병도는 교사생활 중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로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하였고,무급으로 근무한 것과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사편수회나 청구학회가 한국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왜곡시킨 연구를 주도했던 단체라는 점과, 그 소속 기간이 상당히 장기간에 달한다는 점에서 100% 친일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한 판단은 지금으로서는 각자의 몫이며, 앞으로 더 연구가 진척되어야 확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참고 사이트 사실 환빠들이 너무나 이병도를 사실 이상으로 폄하하며 비난한 탓에 이제는 오히려 이병도에 대해 '친일파' 라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환빠로 여겨져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병도를 지금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소극적 친일은 했었으나, 한국 현대 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민족 사학자'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족으로, 흔히 웹 상에서 볼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지 않은 사실과 친일인명사전 등재 여부가 혼동된 결과로 추측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이병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담으로 이글루스 역사 밸리환까들 중엔 그의 호를 따서 두계 마왕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직접적으로 까는 건 아니고, 환빠들이 억지를 부리며 이병도를 폄하하는 모습을 풍자하기 위한 것.

사단법인 모 단체에서 전국 학교를 돌면서 환단고기를 참된 역사라고하며
최태영을 두둔하고 이병도 박사를 식민사학의 거두, 이완용의 조카라는 되도않는 강의를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도 아니고 친척이라 보기도 힘들다.

1956년에 김창룡이 암살당하자 그의 묘비명을 이병도가 썼는데 거기에는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개였다가 건국 이후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개가 되었고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주도한 김창룡을 비판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호국의 영웅으로 찬양하고 미화했다. 이병도가 김창룡의 생애를 몰라서 그랬을리는 없고 아마 같은 친일파로서 김창룡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
  • [1] 그런데 하필 이 두 사람 모두 식민사관 쪽에도 큰 영향을 미친 학자라서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누명을 씌우는데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 [2] 출전은 태영 박사의 인간 단군을 찾아서라는 회고록이다. 일단 이 책 자체가 회고록이다보니 최태영 박사의 자뻑이 심한데다가 환독까지 가미된 책이라 신빙성은 적다. 그리고 아래 설명되어 있듯 이병도는 군 신화의 내용 일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반응이나 추상화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으나 단군을 부정한 적이 없다. 이미 1956년에 쓴 국사대관, 그 당시 그가 작성한 교과서에서는 단군을 이미 긍정하고 있다.
  • [3] 다만 2006년 취임 당시에 이병도를 친일파나 식민사학자로 몰아서 모함하는 반대 세력 때문에 큰 곤혹을 치르어야 했다.
  • [4] 이미 이병도 생전에도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이병도 자신이 '요즘엔 이기백 등 내 제자들이 내 학설을 잘 따르려 들지 않아(...)'라고 섭섭해한 적도 있다.
  • [5] 아이러니하지만, 한문으로 된 고전을 해석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은 현대 한국이 아닌,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역사학의 거장이라는 백남운도 정인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전을 오역했다고 할 정도이니.
  • [6] 여기서 말하는 건국연대는 왕 중심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보인다. 백제 같은 경우 고이왕 대에 율령이 반포되었을 정도였다.
  • [7] 사회주의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인보의 납북도 친우였던 백남운이 주도하였으나, 정인보는 전쟁기의 납북으로 인한 여독으로 과로사하였다고 전해진다.
  • [8] 그래서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이들 주류 사학자를 서울대 학파라고 지칭한다. 학자들 본인은 강단 사학이나 서울대 학파라고 자칭하지는 않는다.
  • [9] 실제로 30촌 이상 차이난다.무슨 사돈의 팔촌도 아니고
  • [10] 단 정치적 상황으로 봐서는 실증 사학이 사정이 나았다. 민족주의 사학자는 독립 운동과 직접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신채호, 박은식 등은 안정적인 학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저서 몇 권만을 남긴 채 사망하였고 일제의 직접적인 역사학적 공격 대상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학계에서 신채호는 사상 문제로 반 매장 상태였고, 안재홍이나 인보 등은 납북당했다. 사회주의 사학 또한 광복 이후 남한에서 된서리를 맞았고, 백남운석형이 월북하면서 남한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다(물론 북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연구 성과를 낸 바 있으나 사상색이 섞이지 않는 것이 사실상 힘든 상황이고 남한에는 더더욱 전해지기 어려웠다).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학이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이런 학자들이 살아있었다면 역사학의 방향은 훨씬 다양해지지 않았을까.
  • [11] 다만, 용인항교는 법정동인 언남동에 위치해 있다. 과거 용인군청이자 現 구성동사무소 뒤편에 위치.
  • [12] 친일인명사전 2권 876~877P
  • [13]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한 명인 이병도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 연속심포지엄 「일본에 있어 조선연구의 축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 6 회,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을 중심으로>(32P), 조선연구월보 14, 일본조선연구소,1963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8-30 03:11:12
Processing time 0.1729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