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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2TV의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의 여주인공은 이순신(최고다 이순신)으로
忠武公 李舜臣
이순신, 장우성 作, 1953년 | |||
성명 | 이순신(李舜臣) | ||
출생 | 1545년 음력 3월 8일 (율리우스력 4월 18일)[1] | ||
사망 | 1598년 음력 11월 19일 (그레고리오력 12월 16일)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서울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 ||
국적 | 조선 | ||
본관 | 덕수 이씨 | ||
시호 | 충무(忠武) | ||
자 | 여해(汝諧) | ||
호 | 기계(器溪), 덕암(德巖) | ||
평가 | 성웅(聖雄) | ||
비고 | 사후 영의정 추존 |
必生卽死必死卽生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ㅡ 명량해전을 앞두고 휘하 병사들과 무관들에게.
Contents
1. 소개 ¶
(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행[8][9] 정헌대부[10]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兼 三道水軍統制使)
시[11] 충무공이순신
(諡 忠武公李舜臣)
2. 이순신의 말 ¶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19]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 명량 해전을 개시하면서
此讎若除 死即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마라.
─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3. 그의 얼굴 ¶
정형모, 1978년. |
경상남도 통영시 제승당에 있는 구군복 차림의 영정.하지만 밑에서 언급하듯이 실제얼굴은 아니며 상상에 의해 그려진 영정. |
충청남도 아산시 신정호에 있는 동상. 1999년에 탄신 400주년 기념을 위해 세워졌다.[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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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사거리(광화문)에 있는 동상. 1968년에 세워졌다.[21][22] |
이밖에도 현충사에 있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사모관대 차림의 영정과 광화문 광장에 있는 동상이 그의 이미지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其言論術智 固是撥亂之才 而容不豐厚 相又褰唇 私心以爲非福將也
그 언론과 지모는 실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생김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않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있는 장수가 아닌 듯했다.
─ 고상안의 태촌집
公長軀精勇 赤髭髥膽氣人也
공은 체구가 크고 용맹이 뛰어나며 붉은 수염에 담력 있는 사람이었다.
─ 윤휴의 백호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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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의 영정,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
고상안과 같은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이순신의 얼굴은 지금의 표준 영정과는 다소 거리가 멀고, 오히려 무장에 더 적합한 얼굴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 위의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 영정의 경우에는 제3공화국때 주로 그려진 영정과 달리 무장의 이미지가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증정 중등조선역자에 등장한 이순신 초상 |
2013년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자에서 이순신의 생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초상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잘 살펴보면 눈썹이나 눈매, 수염등, 전반적인 스타일이 완전한 무골로 묘사한 이 항목 위쪽의 영정과 꽤나 일치한다. 이 눈썹과 수염, 눈매는 좀 후에 그려진 영정들과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긴 막강한 군법을 통해 병졸을 다스렸던 인물이 인자한 인상이면 좀 이상하다. (...)
지금까지 이순신과 거북선이 우리 화폐에 나온 것은 10차례(지폐·동전 포함)나 된다. 1970년 발행한 첫 기념주화에도 이순신(100원화)과 거북선(5000원화)이 각각 등장한다.
보통 일반인들#은 1973년에 나온 500원 지폐가 처음인 줄 알고 박정희대통령의 배경으로 등장한 줄 알고 있지만, 보는 바와 같이 1953년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인으로서의 대중성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이고 1958년 위인으로 처음 등장한것도 이승만 대통령 때로 지금 화폐의 다른 위인들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할 수 있다.##
4.1. 태어나기 이전 ¶
4.2. 임진왜란 전야까지 ¶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기사
사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이순신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
4.3. 임진년의 맹활약 ¶
4.4. 계사년 이후 ¶
4.5. 어이없는 파직 ¶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1596)과 정유(1597)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는 단순히 선조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했다고 보기엔 심한 언행을 한 것이 사실이다.[45]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기사를 참조하면, 윤두수는 평소에도 원균을 단순히 두둔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금에 둘도 없는 명장 이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평양성 지킨다고 호언장담하다가 털리질 않나(...), 제멋대로 장문포 해전을 기획하여 다 말아먹질 않나, 조정에서 이순신을 못마땅 해하는 선조에게 편승하여, 전시에는 지휘관을 바꾸면 안 되나 이순신은 반드시 체직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결국 이 사람도 칠천량 해전의 직접적인 주역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46]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칠천량 해전 이후의 언행인데, 선조실록에 의하면 칠천량 해전 이후 비보를 접한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건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 수군의 대병력에 각개격파 당하자는 소리나 진배 없다. 임란 초기에 조선 육군이 탈탈 털린 원인을 생각하면 이 사람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사람의 주장대로 했다면 조선 수군의 재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서해와 제해권을 장악한 왜 수군은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아주 빠르게 진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4.6. 전설이 되다 ¶
- 우선 왜군 함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난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한편 31척을 격침하였다는 기록에 대해, 확실하게 격파된 배의 숫자만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100여척을 격파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이 낮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선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 모두 31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후방에 있었을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주살한 일이 100여척 격파의 근거로 들어지기도 하지만,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선봉에 선 장수이고, 애초에 일본 수군이 함대를 펼칠 때 지휘관이 후방에 위치한다는 것은 일반론에서 의거한 것으로, 검증된 사항이 아니다. 특히 세키부네로 구성된 함대 중 31척을 격파했다는 내용은 당시 일본 수군 전체의 1/4이 수장되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당연히 절대 적은 전과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교차검증의 기본적인 의미조차 모르는 주장이다. 자세한 건 명량 해전 참고. 게다가 100척 격파의 근거는 '구루치마 미치후사 주살'이 아니라, <고산공실록>에서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위기에 빠졌으나, 다카도라 부하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벗어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군감이 선봉에 선 함대도 있는가? 군감은 정치장교가 아니다.
- 또한 133척이라는 것도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내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라는 난중일기의 구절로 보아 이순신이 일단 적 함대와 접선하자마자 직접 교전에 들어간 것만 센 것일 확률이 높으며, 난중일기에는 명량해협에 접근한 왜선 숫자를 제대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온다'고만 했을 뿐, 선조실록에서도 130척은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온 것을 센 숫자라고 나와있지 전체 척수는 나와있지 않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왜선 전체의 숫자를 정확히 가늠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 한편으로, 교차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수군을 토대로 60x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수군이 과연 수부같은 비전투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 역사스페셜에서는 명량의 좁은 해역과 급한 조류를 이용, 명량쪽에 배의 이동을 묶어두는 함정을 설치해 적의 연쇄충돌과 행동불능 상태를 이용한 뒤에 포격으로 쓸었다고도 하는 거 같지만, 그건 이 믿기지 않는 전적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이끌려 오히려 단견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우선 당시 왜군의 대선단을 빈약한 쇠사슬 같은 것으로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목선이라고 해도 화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탑승자들의 수를 더하면 수백톤에 달하는 무게인데다, 이정도의 무게를 가진 움직이는 물체를 저지할 쇠사슬을 만드는건 현대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53][54] 그리고 그런 데에 쓸 쇠사슬이 있었다면 차라리 화살이나 포환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는 게 정설. 이 철쇄설이 기록된 "호남절의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철쇄설을 믿으려면 김억추가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해버렸다(...)는 기록도 믿어야한다. 더구나 이 책이 나온 건 1907년. 그런데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인데, 이를 통해 이전부터 철쇄설이 해당 지방에 돌았던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일본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정한역일한사적에도 일본군의 명량 패전원인은 이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된 이유로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일부 시중 책이나 인터넷 문서 중에 '철쇄를 만들 철이 있었으면 그 철로 대포를 만들었겠지! 기록에도 이순신이 철이 부족해 아우성이시잖아!'하는 글이나 주장이 있으면 살포시 씹어버리자.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쇠붙이는 동철, 즉 구리다.@
사실 철쇄는 수로 차단용이 아니라 항만 방어용으로 널리 쓰이던 것이다. 당장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모두 항만 입구에 철쇄가 설치돼 있었고, 이중 전라좌수영 철쇄는 설치 포인트가 현재도 사적지로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용도로 널리 쓰여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도 투르크 함대를 막기 위해 철쇄를 설치하자 메메드 2세가 함대를 통째로 육로 운송하는 것으로 대응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보통 부표와 부표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적에게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안 걸린다. 애초에 접근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이다. 이런 항만방어용 철쇄가 우수영에도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우수영은 명량해협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우수영 수비용 철쇄가 울돌목 차단용 철쇄로 오인된 것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해석과 연계해서 명량해전 자체의 결전장이 해협 한가운데가 아니라 우수영 앞바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이 견해는 이민웅 교수(해군사관학교 교수로 현역 해군 중령)의 저서 임진왜란 해전사(2004)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다. 사실은 애초에 관심 가진 학자도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이 지지를 못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울돌목이 지닌 최소한의 지형상의 유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그나마 소수로 길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우수영 앞바다는 그런 이점도 없는 허허벌판이라서 이런 곳에서 싸웠다가는 수적열세로 인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공깽한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과 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
혹시 진짜로 무슨 능력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 이항복, <백사집>
- 그러나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위치 때문에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가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을 선조가 붙인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
그리고 이러한 독재정권의 필요에 의한 선전이 말 그대로 세계대전을 치룬 을지문덕
물론 후세의 독재정권이 그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와는 별개로 이순신의 역사적 공적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이순신은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영웅으로써 그 이미지가 독재정권에 의해 이용된 것이므로, '조작된 영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시대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도 있다. (이게 한두번이 아니다. 임란 직후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 돈을 모아서 공적비를 세운 것부터 시작해 통영 백성들이 돈을 모아 사당을 세우기도 했고, 아예 통영 쪽으로 임관한 현감이 자비를 털어 공적비를 세운 것까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사당과 공적비는 10개 이상이며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있다.) 순조 시대까지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4.7. 사후 조선에서의 평가 ¶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도 있었으며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중략)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후략)
ㅡ 《조선왕조실록》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
상께서 말씀하셨다."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ㅡ 《승정원일기》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후략)
ㅡ 이항복,《충민사기》
수군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ㅡ 《달천몽유록》, 1600년경 쓰여진 소설.[61]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ㅡ 류성룡,《징비록》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62]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분뿐이다.
ㅡ 김육,『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거인(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 서평(李西平: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ㅡ 윤휴,《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63]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ㅡ 효종,《조선왕조실록》효종 11년/1659년 윤 3월 30일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ㅡ 숙종 《현충사 제문》
이순신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아놔 이순신은 했는데 왜 너님은 못함?
ㅡ 영조,《조선왕조실록》영조 20년/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근데 이건 박문수가 무능한 게 아니라 이순신이라서 가능한 것 같은데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그러니까 제 잘못이 아니라고요
ㅡ 박문수,《조선왕조실록》영조 26년/1750년 7월 3일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승사록》[64]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ㅡ 정조,《홍재전서》[65]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문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이렇듯 이순신은 사후에 이미 조선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왕이나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인물들에게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고 있었다.
ㅡ 정약용,《경세유표》
5. 이순신 연표 ¶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기재되어 있다. |
- 1545년(1세)
- 1565년(21세) : 20살이 되는 해에 결혼.
- 1573년(29세)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해서 탈락.
- 1576년(32세)
- 2월 :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 12월 :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햐다.
- 2월 :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 1579년(35세)
- 2월 : 종8품 한성 훈련원 봉사로 배직.
- 10월 : 충청도 병마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병영으로 가다.
- 2월 : 종8품 한성 훈련원 봉사로 배직.
- 1580년(36세)
- 둘째형이었던 이요신이 죽었다.
- 7월 : 전라좌수영 관내 발포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로 전근.
- 둘째형이었던 이요신이 죽었다.
- 1582년(38세)
- 1월 : 군기경차관[66]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부당한 보고를 올려 발포수군만호직에서 파직했다.
- 5월 : 종8품 훈련원봉사로 복직되었다.
- 1월 : 군기경차관[66]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부당한 보고를 올려 발포수군만호직에서 파직했다.
- 1583년(39세)
- 7월 :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8월 :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 10월 : 경원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 11월 15일 :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7월 :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1584년(40세)
- 1월 :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 1월 :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 1586년(42세) :
- 1월 : 시복시 주부(종8품)가 되었다.
- 2월 :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임명 되었다.
- 8월 :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게 되었다.
- 1월 : 시복시 주부(종8품)가 되었다.
- 1587년(43세)
- 1588년(44세)
- 1월 :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었다.
- 6월 : 아산으로 내려가다.
- 1월 :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었다.
- 1589년(45세)
- 1590년(46세)
- 7월 :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관원의 반대[69]로 개정되었다.
- 8월 : 정2품 평안도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관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었다.
- 7월 :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관원의 반대[69]로 개정되었다.
- 1591년(47세)
- 1592년(48세)
- 4월 12일 : 거북선 건조를 완료하다.
- 4월 13일 :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 5월 4일 : 전라좌수군의 1차 출동.
- 5월 7일 :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이끌다.
- 5월 8일 : 적진포 해전을 승리로 이끌다.
- 5월 29일 : 전라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해전을 승리로 이끌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 6월 2일 : 당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5일 :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7일 :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6일 : 전라좌수군의 3차 출동.
- 7월 8일 :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10일 :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8월 24일 :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 8월 29일 : 장림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1일 :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4월 12일 : 거북선 건조를 완료하다.
- 1593년(49세)
- 1594년(50세)
- 1597년(53세)
- 2월 6일 :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2월 10일 :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 통제사직에서 해임되다.
- 2월 26일 : 후임 삼도 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 3월 4일 : 감옥에 투옥되다.
- 4월 1일 : 옥중생활을 마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 4월 11일 : 어머니가 별세하다.
- 4월 13일 :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 7월 23일 :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 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8일 : 배설로 부터 12척의 전선을 인계받다.
- 8월 28일 : 어란진에서 8척의 왜선과 조우, 교전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 배설이 도주하다.
- 9월 15일 :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받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9월 16일 : 13척의 전선과 일부 어선을 동원해 울돌목에서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 2월 6일 :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1598년(54세)
- 1604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 1643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93년
- 영의정으로 추증되다.
- 영의정으로 추증되다.
6. 이순신의 전투 목록 ¶
출전 | 년도 | 날짜 (음력) | 해전 | 아군 피해 | 성과 |
1차 출전 | 1592년 (선조 24년)[70] | 5월 7일 | 옥포 해전 (玉浦海戰) | 1명 부상[71] | 적선 26척 격침 |
합포 해전 (合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 |||
5월 8일 |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11척 격침[72] | ||
| | ||||
2차 출전 | 5월 29일 | 사천 해전 (泗川海戰) | 2명 부상[73] |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 |
6월 2일 | 당포 해전 (唐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 ||
6월 5일 |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 알 수 없음 | 적선 26척 격침 적지휘관 전멸 | ||
6월 7일 | 율포 해전 (栗浦海戰) | 알 수 없음[74] |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 | ||||
3차 출전[75] | 7월 8일 |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 19명 전사, 116명 부상 |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76] | |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명 전사 | ||
| | ||||
4차 출전[77] |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6척 격침 | |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5척 격침 | ||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5척 격침 | |||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8척 격침 | |||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9척 격침 | |||
초량목 해전 | 피해 없음 | 적선 4척 격침 | |||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 6명 전사,[78]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 적선 128척 격침, 3800여명 전사[79] | |||
| | ||||
5차 출전 | 1593년 (선조 25년) | 2월 10일 ~ 3월 6일 | 웅포 해전 (熊浦海戰)[80] | 협선 4척 전복 |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 ||||
6차 출전 | 5월 2일 |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 | 피해 없음 | 추가바람 | |
| 1594년 (선조 26년) | | |||
7차 출전 | 3월 4일 |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 | ||||
8차 출전 | 9월 29일 |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 피해 없음 | 적선 2척 격침 | |
10월 1일 |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 피해 없음 | 피해 없음 | ||
10월 4일 |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 피해 없음 | 피해 없음 | ||
| | ||||
9차 출전 | 1597년 (선조 30년) | 2월 10일 | 부산포 전투 | 피해 없음 | 알 수 없음 |
| | ||||
- | 8월 27일 | 어란포해전 (於蘭浦海戰) | 불명 | 불명[81] | |
9월 16일 | 명량 해전 (鳴梁海戰) | 2명 전사로 기록 나머지 불명 |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 ||
1598년 (선조 31년) |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 30여 명 추정[82] | 적선 50여척 격침[83] | |
9월 20일 ~ 10월 7일 | 장도 해전/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84] | 조선수군 130여명 사상,[85] 명나라 전선 30여선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000여명 전사 | 적선 30여척 격침, 11척 나포, 3000여명 사상 | ||
11월 19일 | 노량 해전 (露梁海戰) | 조선수군 10명 전사,[86] 300여명 부상 명 수군 500여명 사상 | 적선 200여척 격침, 100여척 나포, 150여척 반파,[87] 2만 ~ 3만명의 사상사(추정치) |
7. 사망에 관한 논란 ¶
여기서 집중적으로 면사첩이 나타난 선조 실록의 12건의 기록을 확인해보자. 면사첩을 처음 가져와서 배포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황응양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독자적으로 조선에서 면사첩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인조 시기인데, 인조시기의 경우 면사첩이 발급된 이유가 이괄의 난이 직접적이기 때문에 임진, 정유년 경우와 동일시 할 수 없다.
8. 이순신의 전술 ¶
- 솔선수범과 공정한 신상필벌을 바탕으로한 부하들의 신뢰[95]
- 규정에 철저한 엄격한 군율
- 실전을 가정한 철저한 훈련
- 정보수집과 정찰의 중시
-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사상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상황과 지형으로 이끌어 싸운다는 상대방 스스로 하여금 스무집을 제하고 두는 바둑요, 차,포에 마까지 떼게하고 두는 장기이다.
9. 이순신의 인격 ¶
小有違令 卽當軍律 소유위령 즉당군율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명량 해전을 앞두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대의 무인답게 활쏘기를 즐기셨다. 난중일기에는 대개 15발중 10~11발 정도 명중했다고 한다.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은 후속작 왜란종결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의 무예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32살 무과시험 합격 했어도 그렇게 뛰어난 성적이 아니었고 중간성적으로 합격했다고 함 지금이야 이 정도 기록이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때는
10. 능력에 대한 저평가와 반박 ¶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탄도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때 사거리는 152m, 10도 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시 계산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시 대장군전 비행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이야기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고도 자체가 50~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차이는 사거리 50m 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 일 때는 그 절반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 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 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의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박혜일 교수는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총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길 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출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는 사각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무기 운용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않는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박혜일 교수는 이렇게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 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무기 운용상의 제약점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시에 하향사각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사격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거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선군의 화포에 몆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 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몆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노를 저어서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
물론 상기한 설명은 선상에서 화포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위의 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대포는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 행진과 별 관계 없다'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상에서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순신의 전투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대포의 화력이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유리했으며, 이를 이용한 것이 이순신의 전술에 핵심 중 하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대포가 있으니까 이긴 것이고 이순신의 존재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오류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 하나를 이미 알고 있다.)
애초에 임진왜란의 해상전은 동아시아의 해상전이 함포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하고 실전에서 응용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극대화 하였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순신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화포는 거들 뿐이었다. 결코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졸라 짱쎈 조선 화포가 크아아아하고 울부짖자 일본 전선들이 터져나간 것이 아니다.
② 왜선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날래고 또 수가 많았다. 판옥선은 무겁고 둔중하다. 이것은 조금만 잘못하다 보면 금방 거리가 좁혀진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적을 분산시키고 적의 접근을 막으며, 반대로 우위에 설 수 있는 경우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승전으로 꼽히는 한산도 해전의 경우도 틀어박힌 적을 유인해 쌍학익진으로 적을 단숨에 격멸한 것이다.
③ 왜선에 타는 조총수 및 보병들은 대부분 아시가루로, 조선과 비슷하게 농민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100년이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경험을 많이 쌓은 역전의 숙련병들인데 반해, 조선 수군의 병졸들은 태반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농민 출신들이었다. 2번 항목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거나 군율이 흐트러져서 접근을 허용하면 그건 아주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조선군이 백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건 아닌데, 백병전으로 이행하면 순식간에 전투력이나 사기 면에서 밀리며 패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④ 이순신에게 보급이 끊기기 전의 왜군들은 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출병했으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정으로부터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 조선 수군은 군자금, 군량, 화약, 금속, 배를 수리할 목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109][110]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공물을 보내야 했는데, 심지어 공문서 쓸 종이조차 없어서 이순신이 지원해주는 상황이었음에도 조정에서는 늘 공물이 부족하다고 닦달했다(...).[111]
전쟁 수행 중에 군량이 필수 인데 한산도 진영을 잡을 때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지에 농사를 하도록 조선조정에 건의까지도 하였다. 결국은 어렵사리 한산도 군량 생산 승인을 얻었다. 백성들은 이순신 옆에 붙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고 백성들은 편히 농사를 짓고 그런 군량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⑤ 정보전과 탐색전도 항상 철저히 하여 단 한 차례도 왜군의 기습이나 야습을 허용하지 않았고, 항상 왜군이 어설프게 야습을 시도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⑥ 일본도 전란 중반으로 밀폐형 층루선과 대조총을 일부 투입하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애당초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선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안정감이 있는 함선이 아닌데다 선상 백병전을 선호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포계통 무기를 조선군처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이 화포를 사용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군의 제일 큰 화약병기는 오오츠츠(大筒)라고 하는, 단순히 구경을 늘린 화승총이었다. 그나마도 위력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고 화약 소모가 많은 등의 문제로 널리 사용된 건 아닌 걸로 추정된다. 이런 대구경 조총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등의 공식기록을 사실상 찾을수 없기 때문이며, 칠천량 해전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도 일본측 기록에 '판옥선 한척에 대해 서너척의 배로 포위하고 선상백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 사실상 제대로 된 화포가 실전에서 선을 보인 것은 오사카 성 전투 당시.
⑦ 아무리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 개전 초기에 이순신이 있던 전라좌수영에 비해서 큰 덩치를 자랑하던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든 무기를 없애 버린 것이라든지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온갖 노력으로 간신히 마련한 조선 수군을 한큐에 말아 먹어버린 궁극의 팀킬을 자행한 것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게 무기의 차이로 조선군이 이겼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군은 상술했듯이 병사들의 낮은 숙련도와 사기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능력으로 커버했기에 이길 수 있었고, 실제로 칠천량의 조선군은 원균 같은 무능한 자가 지휘관이 되자 그런 우수한 무기체계와 승전 경험을 마치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11. 그밖의 이야깃거리 ¶
- 만약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한국인이 누구이든간에 "이순신"이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김타카니랑 원균빠돌이들 빼고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위인으로서 이순신의 위치는 독보적인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는 반드시 거론되며,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으로는 세종대왕과 함게 늘 1위를 다투고 있다.
-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역사상 위인들은 후대의 연구로 드러난 크고 작은 오점[112]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순신의 경우는 인지도 때문에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는데도[113]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는데도 발견된 오점이라고 해봐야 '부하들의 군기에 대해서 처벌이 엄격했다'밖에 없고 이마저도 당시의 기강이 허술[114]하고 엉망인 시대적인 요건이나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하면 오점이 아니라 전쟁이 없는 평시였어도 당연한 조치다. 현대에도 전쟁중에 탈영하거나 민간인을 약탈한다거나 하는 것은 최고 사형까지 갈 정도로 큰 죄이다.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해군의 다짐
- 당연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 엄청나게 좋아하는 위인이다. 훈련병들은 기본적으로 정훈으로 이순신에 대해서 배우며 훈련병용 교재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다. 해군의 다짐 또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로 시작하며 군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자존심의 대상이다.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에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수가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 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고해군부심 쩐다명색이 충무공 리더쉽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시간에 날조된 징키스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는 수준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적도 있는데 명랑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무장으로 승자총통을 쓰는 발로 만든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있다지만 충무공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인물 이순신이나 조선수군사를 연구하는데는 쥐뿔도 관심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 밀덕들은 충무공이라는 상징성 강한 명칭은 구축함에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항공모함은 무리겠지만 이후의 이지스함에다 쓸 수도 있었는데 좀 참지...' 정도의 뉘앙스. 이지스함은 결국 세종대왕급으로 진수되었고, 이중 3번함에 이순신의 조력자였던 류성룡의 이름을 딴 '서애 류성룡'이 붙여졌다. 뭐 이순신 장군 성격이라면 구축함이라도 불만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하지만 원균함이 생기면 어떨까?
- 해군이나 해군 출신자 등 일부에서 해군의 장성 계급 호칭인 제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공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에서 올렸으니 그럴 듯할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의 고급 지휘관들은 육해군을 오가는 경우가 많았고, 이순신도 커리어를 육상에서 시작했다. 게다가 당대 명나라 육군을 이끈 이여송이 제독이고 수군을 이끈 진린은 도독이었다(이여송이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제독검"이 <무예도보통지>에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식 호칭으로 과거의 사람을 부르는 것은 좀 생각해 봐야 할 듯. 그러나 '장군'이라는 호칭도 당시에는 안쓰였다는 것은 마찬가지. 장군이라는 호칭 자체는 당시에 당연히 존재한 호칭이었지만 수군절도사급에게 장군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결례였고 그보다는 낮은 직급의 장수에게 쓰는 호칭이었다.[115] 그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호칭할 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장군'의 호칭이 아닌, '통상', 혹은 '통상대감', '통제사또', '영공' '이공' 등으로 불렀다.
- 특히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前 대통령이 많이 존경했다고 한다.[116] 그 존경 덕에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가 크고 아름답게 증축되었고,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현재 사용되는 원화 중에 100원 주화의 앞면[117]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전에도 구 500원권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다. 숫제 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의 거리였던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가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디스당하기도 하는데, 박정희 이전에도 전국에는 크고작은 이순신 사당이 있었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 또 효종,숙종,영조대에 이순신에 대한 추숭사업이 여러번 진행되었고, 숙종 대에는 현충사를 확장하고 거기에 숙종이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정조 대에는 충무공 전서를 내는 등 조선왕조 후반기 동안 꾸준히 추숭사업이 이뤄졌다.
- 무속 신앙에서는 용장군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참조. 용장군이라는 것은 흔히 물에서 싸우던 무인들을 영령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 무당의 신앙은 무당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충무공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은 존재한다.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이순신을 신으로 섬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수의 '영당풍어굿'. 풍어굿은 원래 물고기가 잘 잡히게 하기를 기원하는 굿인데, 여수의 '영당'이라는 곳은 충무공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물론 이 사당에 모셔진 신은 충무공 뿐만 아니라 최영, 정운 등도 모셔져 있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속이나 민간신앙에서 충무공이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여수의 영당은 여수시 남산동 어항단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해서 이 굿을 보는 것도 좋을 듯. 전통적으로 매해 정월 대보름에 이틀에 걸쳐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지역행사처럼 벌인다. 이 굿을 하다 보면 무당이 "여수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에 나갈 적에 빈 배로~ 올 적에 만선하야~"라고 외친다.
- 풍어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청어 잡이에 열중했다. 한산도에 개간한 둔전만으로는 병사들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청어잡이로 군량을 때우려 했던 셈.[118]
-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파마머리 독재자가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민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즉각 평가절하되었다.
그러면서 자기네 돼지 3부자는 신격화에 그 잘나신 동지들은 숙청이라니 과연 인지부조화의 극치 뽀글이 클라스!여담이지만,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아가는 김에 묘소가 현충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문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충사와 이순신의 묘소는 떨어져 있다. 현충사는 아산 염치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 이순신의 업적이나 가지고 있는 비중만 보면 임진왜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며 근래 들어 임진왜란의 다른 전투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에는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은 이순신이 벌인 전투들의 일대기와 몇몇 유명한 육전들을 다루는 수준에서 머무를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책들은 이순신이 반드시 언급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경우 아예 주인공급의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 수많은 업적으로 한산도 대첩 축제 등 그와 관련된 축제를 여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여수엔 이순신대교로 불리는 다리가 있는데 그 유래는 그 다리의 길이가 1545m로 1545년생이신 이순신의 생년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 현대에는 무략이나 전술, 충심 만이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쉽과 철저한 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 역사상의 Bad Ass들을 소개하는 사이트에서[119] 이순신을 Bad Ass한 제독으로 소개하고 있다.
-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그의 저서인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라 쓴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쫓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ㅡ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pp. 66-67.[120]
- 이순신의 필체가 담긴 친필 편지 원본이 발견됐다.관련 기사
-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남은 문헌은 난중일기, 충무공전서, 난중잡록, 충무공행록, 통제사이충무공유사, 충무공행장, 충무공시장, 명량대첩비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있다.
- 이순신 장군의 13대 종손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신문 기사가 발견되었다. #
- 2013년에 난중일기에서 삼국지연의를 인용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청성잡기》에서는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피해 은거한 도우(道友, 도 닦는 벗)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몰랐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알고 있어서 큰 일이 있을 때면 매번 그와 상의하였다. 왜구가 침입하자 공은 사자를 통해 편지를 전하여 나랏일을 함께 도모하자고 부탁했다.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으니 다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되기도.
삼국지를 세번 읽은자와 상대하지 말라.
11.1. 이순신의 장검에 얽힌 이야기 ¶
이순신 장검 - 보물 제326호 |
이순신의 검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약 2m에 가까운 크고 아름다운 길이 때문에, 오래전 부터 이순신의 키는 2m 50cm(...) 내외가 될 것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갑옷을 통한 추정과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의 평균적인 키가 164라는 결론이 나와서 실제로 키가 그렇게까지 컸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170cm 전후의 키로 보는 중.
참고로 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이견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11.2. 일본에서의 이순신 ¶

이순신은 Sun-죄를 혼자 타고 Hulu 도둑을 부러 Cholla에 군인의 문제의 병사 해군 Jiedushi는 tortoiseshell의 배를 만들어 타다오 크라운 닭고기 숲
李舜臣單騎にして胡虜の賊兵を破る。和兵の至るに及んで全羅水軍節度使となる。龜甲船を造る。忠勇鷄林に冠たり。[124]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125]에 으뜸이었다.일본이 잘못했네ㅡㅡ

Throughout history there have been few generals accomplished at the tactics of frontal attack, sudden attack, concentration and dilation. Napoleon, who mastered the art of conquering the part with the whole, can be held to have been such a general, and among admirals, two further tactical geniuses may be named: in the East, Yi Sun-sin of Korea, and in the West, Horatio Nelson of England. Undoubtedly, Yi is a supreme naval commander even on the basis of the limited literature of the Seven-Year War, and despite the fact that his bravery and brilliance are not known to the West, since he had the misfortune to be born in Joseon Dynasty. Anyone who can be compared to Yi should be better than Michiel de Ruyter from Netherlands. Nelson is far behind Yi in terms of personal character and integrity. Yi was the inventor of the covered warship known as the turtle ship. He was a truly great commander and a master of the naval tactics of three hundred years ago.(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몇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서 태어났기에 서양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상급의 지휘관이다. 누구든 이순신과 비교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de Ruyter)보다는 뛰어나야한다. 호레이쇼 넬슨은 인간성과 성실성 측면에서 이순신만 못하다.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뚜껑 덮힌 배를 발명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A Military History of the Empire (Japanese: 帝國國防史論), p. 399, by Admiral Tetsutaro Sato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군 해군사관생도들이 방문했는데, 한 후보생이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장군을 가장 존경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11.2.1.1. 일본 ¶
-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등 전과의 폄하.
- 일본 우익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 일본 우익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 노량 해전에서는 마치 이순신이 전쟁 범죄라도 저지른 듯이 퇴각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추격하다가 역관광 당했다. 식으로 써 놨으며, 조선군이 괴멸당하고 일본군이 전력을 온존하여 승전한 것처럼 써 놨다.
- 도요토미, 도쿠가와 양대 세력이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둘 다 시마즈를 분쇄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참전 이후 천하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몇천도 안되는 병사 밖에는 동원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해전의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 노량해전이 종전 전에 벌어진 엄연한 전투행위라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노량해전은 조명연합군의 마지막 대공세였던 사로병진 작전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사천의 왜성을 바다에서 포위하다가 응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벌어졌으므로, 위와 같은 시각은 당시 전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도요토미, 도쿠가와 양대 세력이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둘 다 시마즈를 분쇄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참전 이후 천하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몇천도 안되는 병사 밖에는 동원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해전의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 조선과 일본의 기록들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태도.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 측 사료는 군충장과 진지표, 전황보고서 등 신뢰도가 높은 1차 사료들을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수치적인 면에 있어서, 총 참전 인원 십수명 수준의 전투에서도 보고를 위한 군충장을 작성했던 전국시대의 특성상 부대배치와 병력 현황, 일본군의 병력 흐름 등을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일본군 장수들의 가문 기록은 조선의 족보 기록과 비슷하게 가문의 공은 부풀리고, 피해를 축소하여 명예를 치장하는 면이 있어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예컨데 있지도 않았던 명군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과 마찬가지로 당대인이 남긴 1차 사료이며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기록의 신뢰도만 따지면 조선측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130] 또한 조선측 기록, 일본측의 행정문서와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다.
-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일본 극우세력이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새 역사교과서에서는 일부러 이순신을 뺐다. 기존 대부분의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이순신의 초상까지 실려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부 사용자들도 이순신 항목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순신/일본어 위키백과에서의 왜곡을 볼 것.
11.2.1.2. 한국 ¶
- [1]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2년년에 개력했으므로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에는 아직 서양에서도 그레고리우스력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4월 28일이다. 참고할 기사는 #
- [2]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1번째기사].
- [3] 사후에 추증한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
- [4]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 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받은 사람은 딱 세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
- [5] 정 1품의 품계.
- [6]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 [7]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 [8] 이하는 전사 직전의 관직.
- [9] 조선의 관직에서 '행'은, 실제 받은 품계보다 낮은 직위에 임명될 경우에 붙는 설명이다. 정헌대부는 정2품 품계인데, 삼도수군통제사는 신설 직후는 정3품, 정식 직책이 된 이후에도 종2품이었다.
- [10] 정 2품의 문반 품계. 조선이 무반을 천시한 것은 여기서도 알 수 있는데, 이순신에게 무반의 품계인 '장군'을 주지 못하고 문반 품계인 '대부'를 준 이유도,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11] 시호.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
- [12] 그가 지휘한 첫 해전인 옥포 해전부터 마지막으로 지휘한 노량 해전까지 총 28회의 해전의 전적은 28전 28승 무 0패. 다만, 사로 병진 작전 중에 육군의 비협조로 공자로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정도는 있다. 물론 이 때는 수군이 주력이 아니고 육군이 주력이어서 그런 것. 이는 인류 전쟁사를 통틀어도 거의 유일무이, 전무후무하다시피 한 전적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23전 23승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에게 이순신이 몇 번 이겼냐고 묻는다면 23전 23승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13] 병법에서 말하는 명장은 크게 2가지 유형이 있는데 1번째 유형은 철저한 준비로 전황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이기는 싸움만을 하는 명장 2번째 유형은 상대적인 열세에서 우세한 적과 싸워 이기는 명장이다. 전통적인 병법서에서는 2번째 유형보다 1번째 유형을 더 높게 쳐주는데 충무공 이순신은 전형적인 1번 유형의 명장이면서도(대표적인 것이 한산도 대첩 육상전에서도 구사하기 힘든 거짓후퇴 및 유인, 매복을 위시한 포위섬멸전을 육상보다 최소 수배는 더 구사하기 힘든 해전에서 완벽하게 구사했다.) 명량 해전을 통해 2번째 유형의 명장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 [14] 1931년 이윤재작인 <성웅이순신>이란 전기작품에서 처음 이순신을 성웅으로 칭함
- [15] 조선국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명국 정1품 도독을 함께 지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국군해군참모총장에 미군원수를 함께 지낸 셈이다.
- [16] 형제들의 이름도 유가에서 숭상하는 전설상의 임금들의 신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큰 형은 이희신(李羲臣), 작은 형은 이요신(李堯臣), 아우는 이우신(李禹臣)이다.
- [17] 하늘이 보낸 인물에 선조(...)가 들어가기도 하고,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선조는 임진왜란 전만 해도 이순신의 후원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했을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도 선조가 강하게 고집한 결과이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의심이 본격화 된 것은 이몽학의 난 이후이다.
- [18] 게다가 이순신은 식량, 병력등의 중앙정부의 지원은 단 한번도 받지 않고 군대를 운용했으며, 오히려 전국이 털리는 바람에 종이마저 부족한 중앙정부에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한산도 일대에 둔전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 했으며, 청어를 잡아 이를 군비로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모든이들이 기피하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을 벗고 뛰어다녀 강제징집(...)을 시전해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적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번 뿐이었다.(반대로 원균에게는 5천명의 병력을 지원해주기 까지 했다. 물론 그 결과는...)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자급자족해가며 자체 보급을 했고 그 보급한 병력으로 일본군을 캐발랐다는 소리.
- [19]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 [20] 문화관광부로부터 표준 동상으로 인정받았으며, 높이 8.45m의 단일 동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 [21] 2008년경에 한 번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 [22]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1989년 노래 <장군의 동상>은 바로 이 동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다.
- [23] 그의 초상을 본 가토 기요마사가 참으로 장군의 용모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 [24] 1952년 진해 북원로타리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이다. 동상제막에 이승만대통령과 정부주요인사도 참여하였다. 이 동상에 제를 드리는 것이 계기가 되어 진해군항제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 이것과 더불어 1953년 통영 남망산 동상과 1955년 부산 용두산공원 동상이 이미 광화문 동상보다 10여년 일찍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25] 이와 함께 이순신이 중인출신임에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낭설도 같이 퍼졌는데 이순신의 본가인 덕수 이씨는 엄연한 양반가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역시 양반이 맞다.
- [26] 율곡 이이와의 일화 한 가지. 이이가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중, 어느 날 율곡이 "거 우리 친척 중에 이순신이라고 똘똘한 놈이 있다며? 함 보자 그래"라고 말을 전했는데, 이순신은 "율곡 선생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될 것 같다."라면서 "인사권을 가지신 동안엔 만나지 않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27]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
- [28] 사실 위작이라기 보다는 칭기즈 칸이 이랬으니 절망하지 말아라라는 의도로 만들어졌는데 어쩌다 보니 실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되었다. 처음 이걸 지은 사람도 나중에 이게 돌고 돌아서 누가 실제 어록이라며 퍼와서 소개해주는 바람에 황당해했다고 한다.
- [29] 성웅의 부인답게 방씨부인도 굉장히 당차고 슬기로운 성격이였다. 가장 잘 알려진 얘기로 부인이 어릴적 밤중에 도둑이 집에 들자 명궁인 아버지 방진이 활로 응사했다. 허나 도적들은 이미 내통자가 있어 화살을 미리 치운 후 였다. 거기다가 밤중이라 시야가 좁아져 속수무책이던 상황. 그때 아직 어린 방씨가 화살은 아직 많이 있다며 한 무더기의 화살을 가져왔고 그 얘기를 듣자 도적들은 지레 놀라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화살이 아니라 여인들이 베를 짤때 쓰는 대나무였다.
- [30] 병과에서 4등을 했다. 한편 이 4년간의 공백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박중훈이 이순신으로 분한 천군이다.
- [31] 발포진의 관사에 수령이 오래 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 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다고 제지한 일.
- [32]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가 불법점거하여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추후 통일이 되면 영토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곳.
- [33] 백의종군 자체는 보직해임 정도의 형벌로 장군을 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니다.
- [34] 참고로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도 녹둔도 전투가 있다.
- [35] 토벌군은 전사자 없이 여진족 전투원 380명을 죽이고 여진 가옥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
- [36]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이 파트에서 좌수사에 원균을 먼저 꽂았는데 신하들이 반대해서 선조가 "콜~."하는 게 나온다.
- [37] 조선 수군은 고을마다 배의 정수가 정해져 있었다. 평시에 편제를 벗어난 함선은 철저한 관료제 사회이자 군사반란으로 건국된 조선의 성격상 엄격하게 금했다. 어쩌면 거북선은 그 정수를 벗어난 일종의 비인가 장비였을 수도 있으나 거북선 건조시에 전라감영에서 군관 등이 파견된 것으로 미루어 상부의 허가 내지는 묵인 정도는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말 그대로 전력의 강화임과 동시에 어쩌면 불법이었을 수도 있는 셈. 실제로 임란 전에 정수 외의 배를 건조해서 전투부대에 운용하다가 파직된 수군 장수도 있었다.
- [38] 육-수군을 통틀은 최초의 승전은, 임진강변에서 부원수 신각의 군대가 왜군을 무찌른 전투가 있다. 단, 전투 직후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확인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신각은 이기고도 적전도주 죄목으로 참형당한다.
- [39] 사실 이 때문에 조선은 하다못해 세금과 진상품도 조운선을 통해 수로로 조달했다.
- [4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기타지마 만지 저/경인문화사/2008 ,『이순신과 히데요시』 가다노 쓰기오 저/우석출판사/1999
- [41]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냈다고 한다. 고니시와 가토는 앙숙.
- [42] 참고로 비슷한 상황에서 원균은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칠천량 해전 항목 참조.
- [43] 이순신이 백의종군 시작 후 불과 6개월 뒤에 명량 해전이 일어났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명량해전 초반에는 완전히 통제사 무쌍 급으로 이순신의 배 혼자서 다 싸웠다.
- [44] 다만 역모 사건과 관련되었거나 기사환국에서 오두인, 박태보 등을 문초할 때처럼 왕권과 관련된 죄목이 명백할 경우엔 죽을 수 있을만큼 강한 고신이 가해질 수도 있으나, 전후사정을 봤을 때, 이순신에게 강한 고문이 가해졌다기 보담은 남이의 옥사에서처럼 사실관계를 우선 밝히는 양상의 고신이 가해졌을 것이다. 또는 이순신에 대한 분위기가 선조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 [45] 하지만 윤두수가 세운 작전에 대해 선조는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 경우가 꽤 있다. 그리고 대개는 선조의 시각이 맞았다.
- [46] 게다가 윤두수가 원균이 이순신에게 무례하게 한 것에 대해 애기했는데, 그 내용이 원균이 자기 친척인데 이순신이 원균의 후배여서 원균이 질투심에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윤두수 스스로가 원균을 변명한답시고 오히려 더 졸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물론 선조는 이것을 알지 못햇다. - [47] 주력 전선 판옥선과 소수의 거북선, 후선과 협선 및 척후선 포함
- [48] 조선 수군의 주임무는 일본의 해적을 감시하고 임진왜란의 경우와 같이 일본의 정규군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해상전력 대부분을 충청, 전라, 경상의 세도에 집중시켜 놓았다. 다른 지역 해상전력의 경우 수군절도사 직위를 해당지역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할 정도로 유명무실했다.
- [49] 배설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배설 항목 참조.
- [50] 배설은 도망갔고, 김억추는 명량 해전 이후 육진으로 전근 가버렸다. 그 이후 임명된 수사들(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은 전부터 이순신 휘하에 있던 부장들이라 지휘체계에 큰 혼선이 오지는 않았다.
- [51] 원문은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 [52]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척이든 300여척이든 500여척이든 우르르 밀고오는 상황이고, 이걸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0여척에 불과했다. 이런 급박 + OTL 상황에서 누가 되든 일일이 적함이 몇척이나 되는지 편하게 세고 있을 수가 있나--;;
- [53] 다만 쇠사슬이 아닌 현수교 지탱등에 쓰이는 강철 케이블이라면 가능한데, 손가락 두께의 특수강 수천가닥을 꼬아서 만드는 이 케이블 기술은 1900년대 초에나 등장했다(...). 진짜 쇠사슬로 왜군 함선을 막았다면 통제사또께서 어디서 외계인 고문을 하신 걸지도...
- [54] 비슷한 예로 중국 삼국시대 말 오가 망할 때 장강을 타고 상류에서 내려오는 서진 군대를 양자강에 쇠사슬을 쳐서 막아보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는 기름 먹인 뗏목을 잔뜩 떠내려보낸 뒤, 거기에 불을 붙여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고 한다. 물론 쇠사슬이 저 정도 불에 녹아버릴 리는 없지만,(철쇄 중간의 부표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고작 뗏목의 질량낙하에 뚫렸다고 한다면 철쇄의 효력은 그저 안습일 따름(...).
- [55] 일본에선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 지휘관인 진주목사 김시민을 모티브로 한 '목사'라는 괴물을 만들기도 했다.
- [56] 소설가 김경진은 자신의 소설 임진왜란에서 직산전투는 단순한 양군 충돌에 불과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 직산전투는 도합 1만에 달하는 양군 병력이 6차례에 걸쳐 충돌한 상당히 큰 전투로 일본군은 선빵을 날린데다 지원군으로 기병대까지 투입하고도 명군을 이기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직산 전투로 인한 일본 측의 사상자는 전무했고 일본군의 전력도 거의 온전이 보전한 채로 전투가 끝났기 때문에 사실상 직산 전투의 의의라고 해봐야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 막은 것에 불과하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일본군을 밀어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
- [57] 실로 대단한 일인데, 중국어에서 야(예)는 대충 '아버지'등의 뜻이 있고, 노야(라오예)는 '나리, 마님'이란 뜻이 있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으로 대국에서 지원을 온 천병의 수장이 소국의 수군 장수를 나리라고 높여 불렀단 뜻이다.
- [58] 알기 쉽게 설명하면 4성 장군인 미군 해군참모총장이 2성 장군인 대한민국 1함대 제독을 오히려 상관처럼 예우하며 말을 할 때 'Sir'를 붙였다는 얘기다.
- [59] 특히 2005년도 영화 '천군'에서는 북한 장교로 분한 김승우가 극중 대사로 "그건 남조선에서 만들어진 영웅 아닌가." 라고 대사를 친다... 그런데 북한의 해군 최고위 무공훈장 이름이 이순신훈장인데?!
- [60] 이 부분은 덕수이씨 전체가 아니라 충무공파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율곡 계열인 문성공파는 반대로 문과에만 줄줄이 급제 했다. 이는 덕수 이씨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성공파 중심의 문골세력과 충무공파 중심의 무골세력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 [61]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
- [62] 장순과 허원은 모두 당나라 안사의 난 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함께 수양성을 지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안록산이 이끄는 반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모두 충절을 지켰던 인물로 칭송받았으며 도교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 [63] 윤휴 이복 형의 장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백호전서를 읽어보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이순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64] 계미사행의 수행원으로 승사록은 사행을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이다.
- [65]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이순신 팬질(…)의 양대 산맥. 홍재전서나 실록 곳곳에서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침이 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 [66] 일종의 임시 검열관
- [67]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
- [68]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만호 이대원 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 [69]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수 없다.
- [70] 1592년 한해 전사자는 총 39명이고 부상자 162명이다. - 1967년, 이형석자 임진전란사 부표 1701~1706쪽.
- [71] 임진장토 만력 20년. 1592년 5월 10일 계본.
- [72] 적선이 모두 격침되었다.
- [73]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군관 나대용.
- [74] 2차 출전 모든 전투 총합해서 전사 11명, 부상 47명
- [75] 7월 6일 출전.
- [76] 할복 자살했다.
- [77] 8월 24일 출전.
- [78] 녹도만호 정운 포함.
- [79] 함선이 128척이나 날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수가 의외로 적은데, 당시 일본군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육상 진지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도 더 많은 수의 적함을 날려버리는데 작전 목표를 두었다.
- [80] 총 5번의 교전이 있었는데 이를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
- [81] 양 측다 교전이 아닌 탐색전 형식이라 사실상 피해가 양측다 없었다. 참고로 이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모두가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 [82] 출처는 위키피디아. 16,607명 전사라는 말이 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다. 이정도 피해면 조명연합군은 전멸당한 거다. 그러나 절이도 해전이 저렇게 대규모 해전이 아니라는 가설이 더 설득력있다. 적선 50여척을 격파했다는 식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50년 뒤에 작성되었고, 이분의 행록에서 절이도 해전에 대해 취급했으나 소규모 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 [83] 舜臣自領水軍 突入賊中 發火砲 燒五十餘隻 賊逐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 [84] 이순신의 단독 작전이 아닌 명나라군과의 연합 전투다.
- [85] 이 때 조선군의 피해는 이순신이 반대했지만 명나라 수군의 무리한 단독 작전으로 왜군에게 쫒기자 어쩔 수 없이 도와주었고 그 때문에 입은 피해다.
- [86]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박동룡, 흥양 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 포함.
- [87] 기록들에 따라 다른데 확실한 건 300~500여척의 전선 중 50여척만 살아 돌아갔다는 것이다.
- [88] 다만, 세간에서 인간 이순신을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에 무작정 죽기 무서워서 자살한 척 했다는 설보다는, 전란을 끝내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전란을 길게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남쪽바다에 뭍어버린 자신에 대한 속죄로 적탄에 스스로 맞은 것처럼 묘사한다. 중요한 대사는 바로 이 바다는,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물론 이게 자살설이 아귀가 들어 맞는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후술.
- [89] 실제로 명군의 주력 전선인 호선과 사선은 그 크기가 일본측 전선인 세키부네보다도 작은 배라 화포조차 제대로 탑재되지 않는 막장 전선이다.
- [90] 이우각이 쓴 통곡, 이순신 실록에서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 [91] 다만 순조 19년 승정원 일기에서 다시 면사첩이 언급되기는 한다.
- [92] 울산성 전투 당시 가토 기요마사를 효유하기 위해 면사첩이 보내졌는데, 당시 면사첩을 보낸 것은 명나라 경리 야불수가 직접 영기와 상공기, 면사첩 등을 함께 사람을 시켜보냈다. 그리고 선조 26년에 황응양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면사첩(免死帖)을 가져와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면사첩의 배포 자체는 조선군이 독단으로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 [93] 이 때문에 선조가 면사첩을 보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임진~정유년 당시 현장 지휘관으로써 면사첩을 받은 장수는 오직 이순신 한명 뿐이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94] 이를 두고, 일부 서적에서는 평소에 항상 입버릇처럼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순신에게 면사첩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종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 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 [95] 어떤 의미로는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른 해전은 군율이나 사전 준비등의 다른 요소들로 가려질 수 있지만 명량 해전은 이를 빼놓고는 설명할수가 없다.
- [96] 수적으로 불리했던 이 해전들 중 옥포해전은 기습으로, 한산도 해전은 유인후 포위... 전술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시작한 해전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 저 명량해전조차 좁은 물길과 빠른 유속으로 유명한 명량을 끼고 싸웠을 정도로 이순신의 전략적 식견은 대단했다. 물론 최근의 연구자료에서는 명량의 물결이 오히려 전투 초반에 조선군의 기동을 방해했다고는 하지만, 명량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아예 싸울 수조차 없었다.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입장에서 포위를 피하고 그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형과 환경의 제약은 그 수가 많은 쪽에 더욱 불리하기 때문이다.
- [97]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 우수영 모두 합쳐 함선이 최대 50척에 불과했는데 반해, 경상우수영은 단독으로 최소 75척~최대 100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는 경상도가 일본에 접해있는 최전선이기 때문.
- [98] 유성룡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파직될 떄 선조에게 이순신은 저와 동향 사람인데 강직하여 직무에 맞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라고 하기도 햇다.
- [99]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
- [100] 이에 대해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씨가 사위를 박대함으로서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의 표시를 보냈다는 해석이다.
- [101]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 [102]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 [103]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이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슬픔도 있었겠지만 이면이 이순신 본인을 가장 많이 닮아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라는 점 떄문이기도 했다.
- [104] 한국 군형법 기준 탈영: 제27조(지휘관의 수소 이탈) 지휘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수소를 이탈하거나 배치구역에 임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2. 전시, 사변 시 또는 계엄지역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 물자횡령: 제75조(군용물 등 범죄에 대한 형의 가중) ① 총포, 탄약, 폭발물, 차량, 장구, 기재, 식량, 피복 또는 그 밖에 군용에 공하는 물건 또는 군의 재산상 이익에 관하여 「형법」 제2편제38장부터 제41장까지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1. 총포, 탄약 또는 폭발물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그 밖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 적전도주: 제30조(군무 이탈) ① 군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부대 또는 직무를 이탈한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적전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 [105] 예를들어 원균을 비판할때 자주 나오는 친인척 입시하의 부정시험 같은건 당시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 [106] 현대의 학자들은 만성위염 또는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 [107] 의외의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난중일기에서 누가 오면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온다.
부하나 동료 아무개가 술 먹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다. - [108]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활쏘기를 얼마나 했는지를 '활 ~순(巡)을 쏘았다'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1순(巡)'은 한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화살 다섯 개를 쏘는 것을 의미한다. '5순'을 쏘면 화살 25개를 쏜 것이고, '10순'을 쏘면 화살 50개를 쏜 것이다. 이순신은 활쏘기를 하면 대개 10순을 쏘곤 했다.
- [109] 실제로 난중일기에 병사들이 상륙해서 배 만들 목재를 조달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 [110] 이 행위는 왜군들도 자주 했다. 전장에서 자원을 모아서 무기를 만들어 싸우는, RTS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임진왜란 때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엄연히 보급로가 시원찮아 보급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지, 국가에서 보급을 안해 줬던 게 아니다.
- [111] 불멸의 이순신에도 이를 묘사했다. 극중 군졸인 대만이 도성으로 보내는 공물을 보면서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이거 그냥 확 불질러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자 영갑이 '누가 아니래냐. 총알에 화포에 피해가면서 전쟁하는 놈들, 애쓴다고 곡물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둔전소에서 곡식 나오는 족족 도성으로 보내라, 명나라 놈들한테 보내라, 참말로(...)'라 대답한다. 그에 호응하는 군졸들이나 백성들은 덤. 실제로도 수군 간부/병사들이나 백성들 할 것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 [112]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거나 등등. 심지어는 세종대왕만 해도 장영실에 대한 석연찮은 숙청이라든지, 화폐 사용을 무리하게 정착시키려다 많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일이나, 팔만대장경을 왜나라에 주려고 한 일, 백성들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면서 본인은 매 끼니 고기를 먹었다는 등의 자잘한 오점이 있다.
- [113] 사실 그렇지도 않다.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 연구해서 박사 학위받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전반 혹은 선조시기 정치사와 연관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쉽센터를 만든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받은 케이스다.
- [114] 얼마나 허술했는지 장부상 오차에 화살이나 군량 정도가 아니라 군함!!이 비는 수영도 있었다!!
- [115]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이 자신을 장군이라고 부른 부하에게 개념없다면서 화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고증이 잘 된 장면.
- [116] 또한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
- [117] 상식적으로는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
- [118] 임진왜란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명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 [119] 아예 책으로도 나왔다. 여기에는 김유신도 소개되어 있다.
- [120] 무슨 문헌을 참고하고 썼는지, 계속 'Yi-sun'이라고 이순신 장군을 호칭한다.
- [121] 하지만 팽배수나 등패수 역시 방패 안에 표창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투척한 뒤에 전방에서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한다.
- [122] 당파로 적의 창을 잡으면 장창병들이 찌르는 방식
- [123] 특히 마상무예에서 검을 쓰는 것은 기예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무예도 보통지 참조.
- [124] 원 한문 텍스트 옆의 일본어 구두 표시(한국의 구결에 해당됨)까지 옮겨 일본어 어순으로 재배열한 것.
- [125]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링크된 루리웹 댓글 중에 '계림은 조선을 낮춰 부른 말이다'란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다발을 그냥 고려자기라고 불렀다.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애초에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일본은 조선의 국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온 외교관이 국서에 고려라는 말을 썼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고 쫓겨난 적도 있다.
- [126] 김시덕, <그림이 된 임진왜란>
- [127] 다른 유명한 일화로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도고 제독에 관한 이런 일화들의 원전은 川田功이 쓴『砲弾を潜りて』(博文館、1925年)이며, 이 책은 전기소설이다.
- [128]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개의 서적에서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사료로써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모양.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이 실려있다는 『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는 서적도 일본과 중국의 국교회복 서명운동의 실시를 위함과 동시에 한일회담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 서적인 듯하며, 그리 신뢰할 수는 없는 서적이라는 모양이다(#).
- [129] 이런 정서는 오늘날 일본 문화 컨텐츠에서도 은근히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 캐릭터가 '내가 제일 잘났다!'고 날뛰는 모습은 별로 좋게 보지 않고, 어떤 역사상의 인물이나 같은 분야의 선배격인 인물을 '룰 모델'로 삼고 거의 광빠(…) 적으로 추종하며 그 사람을 본받아 정진하는 태도를 더욱 좋게 본다.
- [130] 예컨데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입장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있고 교차검증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