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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모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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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국제정세 변화
2.2. 종교적 특징
3. 역사
3.1. 근대 이전
3.2. 현대
4. 현황
4.1. 서방세계의 이슬라모포비아
4.2. 제3세계의 이슬라모포비아
4.2.1. 스리랑카
4.2.2. 미얀마
4.2.3. 태국
5. 극복을 위한 노력
6. 한계
7. 관련 항목

Islamophobia.

1. 개요

이슬람 + 포보스(Phobos: 그리스어로 공포)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한국어로 풀이하면 '이슬람 공포증' 혹은 '이슬람 혐오증'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슬람 국가와 무슬림, 혹은 이슬람교 그 자체에 공포를 느끼거나 혐오감을 나타내는 행동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1996년 러니메이드 트러스트는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시각을 '열린 시각'과 '닫힌 시각'으로 구분했는데, 이중 아래와 같은 닫힌 시각이 현재의 이슬라모포비아와 합치된다.
  • 이슬람은 모노리스적 존재이며, 고정적이고 변화를 거부한다.
  • 이슬람은 다른 문화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 이슬람은 서구에 비해 열등하며, 야만하고, 문란하며, 원시적이다.
  • 이슬람은 폭력적이며,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며 테러를 옹호하고 문명의 충돌을 주도하고 있다.
  • 이슬람은 정치적, 군사적 우위를 얻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 이슬람은 서구의 무슬림에 대한 비판을 거부한다.
  • 이슬람에 대한 공격성이 무슬림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나 사회의 메인스트림에서 무슬림을 배제하면서 정당화된다.
  • 이슬람에 대한 적대가 당연시된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이슬라모포비아가 정확히 무엇인가, 인종차별, 반이슬람, 반무슬림, 반아랍인 등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단순한 인종주의에 불과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존재하며, 미국에서는 9.11 테러 등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보복심리, 유럽에서는 자국의 무슬림인구 증가에 따른 경계심리[1]라는 세 의견이 가장 강세이다.

학술적으로 어떤 정의가 내려지는지와 무관하게 이슬라모포비아는 근본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차별주의이므로 지양해야 함이 마땅하다. ECRI(유럽 인종주의 및 불관용 인권위원회)에서는 이슬라모포비아를 그 형태 및 강도와 무관하게 반인권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인권위에서도 2011년 ECRI의 2010년 연례보고를 인용, 유럽에서의 이슬라모포비아 증가 추세에 대해 경고하였다.

2. 배경

이슬라모포비아는 전세계적인 국제정세 변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 이슬람교 자체의 종교적인 특징 내지는 문제점을 그 원인으로 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또한 유태계 자본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계 및 영화계 등에서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일반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것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2] 거기에 2000년대 후반부터 세력을 키운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행동이 미디어의 발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도 결정적이다.

2.1. 국제정세 변화

  • 제1차 세계대전
    9.11 테러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의 성명에서 언급된 "80년간의 굴욕과 불명예"를 통해 현재 중동 문제의 시발점이 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맹군의 패전으로 인해 동맹군에 참가했던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영토의 대부분이 연합군에 편입되면서 서방세계가 무슬림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1916년 이크스 피코 협정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중동을 분할 통치하기로 밀약하였고, 영국이 유태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17년 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는 1915년 마흔 선언에서 전후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한 것을 어긴 것이다.

  • 냉전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중동의 각국은 미국과 소련이 서로 친미/친소 정권을 심으려 하는 정치적 영토싸움 대상이 되었다. 친소 진영은 사회적 유물론에 입각, 집권 성향에 따라 종교를 탄압하거나 적어도 권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오히려 원리주의자들을 무신론에 맞서 싸우는 숭고한 종교인으로 포장하고 지원했다.[3]
    파키스탄에서는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 친소 성향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1977년 실각시키고 1979년 사형시켰다. 이로 인해 우파 이슬람 정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키스탄 인민당이 추진하던 사회적, 경제적 개혁은 무산되었고, 그 결과 현재 파키스탄은 거의 무정부 상태로 탈레반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인 팔라비 왕조의 전제군주제를 탈피하려 노력한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 지원을 통해 실각시켰고, 이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팔라비에게 갖은 지원을 하였으나 결국 반미성향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였다. 그 뒤 미국은 이란 견제를 위해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그 지원을 받은 사담 후세인은 이후 중동 정세를 크게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 냉전체제 종식
    자유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진영 논리가 소련의 붕괴로 무의미해지면서 진영간의 벽이 허물어진 대신, 개별 국가 또는 지역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세계 정치 흐름이 변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이 발생하였고, 미국이 걸프 전쟁에 참전하면서 이를 "이슬람에 대한 전쟁 선포"로 해석한 이슬람 극단주의의 주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테러와의 전쟁
    이러한 미국과 이슬람 사이의 갈등은 9.11 테러로 폭발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테러"라는 개념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의 이슬람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을 공산주의 이후의 주적으로 삼기 위해 뉴스, 영화 등의 매체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과도하게 부각시켰고,[4] 일반인의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대부분은 이와 같이 미국의 필요에 의해 생산된 정보들에 기반한다.[5]

  • 유럽 이민 급증
    한편 유럽에서는 냉전체제 종식으로 인해 구 소련의 제어에서 벗어난 동유럽 및 중동에서 서유럽으로 이민이 급증하였고, 연이은 내전과 대테러 전쟁이 이를 가속시켰다.[6] 이 과정에서 다수의 이민자들이 특정 지역에 밀집하여 거주하면서 이슬람 문화를 지역 사회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7] 이에 대해 기존 지역민들이 반발함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각국에서 벌어졌다. 각국은 이민법 개정 등을 통해 기존 국민과 이민자 사이의 갈등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8]

2.2. 종교적 특징

어느 종교에나 존재할 수 있으나, 특히 이슬람권의 경우 정도가 극심하여 세계적 문제가 되고있는 광신도의 행동, 또 이슬람의 이름으로 종교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장 폭력 집단으로 말미암은 문제들은 이 항목에 기재하지 않고 이슬람 극단주의를 참고한다.

  • 정교 일치
    이슬람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이 그대로 실생활을 다스리는 법 중에서도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존재한다. 즉 과거에도 현재에도 세속적 인권보다 전근대적이고 반인권적인 종교 규범이 우선하는 정교일치 성향이 대단히 심한 종교라는 것. 다른 종교는 경전을 어겨도 처벌받지는 않으나 이슬람에서는 경전을 어기는 것이 현대에도 상당수 지역에서 엄청난 권위를 갖는 샤리아법에 의거해 실질적 처벌이나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타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9]

  • 전근대적 인권 의식
    이슬람 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 등의 세 가지의 불평등을 경전 상에서 공인하고 있으며, 이 중 불신자의 경우는 개종을 통해 극복 가능한 관계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슬람교가 모든 종교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전파된 원동력은 "신자에게는 법적 혜택을, 불신자에게는 법적 불이익을" 줌으로써 피정복민들의 자발적인 개종을 유도했던 것이었다.[10] 하지만 이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규정이며 오늘날의 완전한 개인의 종교 선택의 자유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이 부분에서 이슬람혐오주의가 이슬람을 비난하는 가장 큰 논지가 이슬람을 버리고 타종교로 개종하는 이른바 배교행위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보복이 따라온다는 점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남녀차별 및 그에 기반한 명예살인 등의 비인도적인 범죄이다. 하지만 여성 인권 문제가 대두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초중반에 불과했고, 세속국가인 터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인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도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20세기 말부터 21세기까지는 이슬람권 세속주의의 후퇴와 함께 계속해서 여성 인권이 실질적으로 악화되어 국제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이슬람 자체의 개선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슬람계 이민자 여성에 대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여 계몽하는 등 서방세계의 도움도 필요하다 할 수 있다.

3. 역사

3.1. 근대 이전

이슬라모포비아라는 용어는 심리학의 발전과 민족주의의 대두 이후인 1918년에 생긴 것이지만 개념 자체는 역사상에서 여러 가지 유례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이슬라모포비아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 "한 손엔 칼, 한 손엔 쿠란"인데, 이는 이슬람의 전파가 전쟁을 통한 정복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속설이다. 즉, 이슬람 제국이 세력을 키울 때마다 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첫 유럽 진출은 우마미야 왕조 시대로, 771년 스페인을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까지 쳐들어가 유럽을 위협했다. 이 때 진출한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무려 8세기 후인 1492년이며, 이슬람 지배의 흔적은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1096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어 1099년 일시적으로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이슬람으로부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듯 했으나, 아유브 왕조가 일어나 1187년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였고 이교도들의 성지순례를 금지하였다. 당시 예루살렘 함락 위기가 감돌던 1145년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까지 유럽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또 훗날 오스만 제국이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발칸반도 일대를 점령하여 유럽에게 공포를 안겨줄 때도 이슬라모포비아는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전에는 오히려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보다 전근대적이었다. 중세 카톨릭의 종교적 정체성은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강력한 것이어서 성서 이외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등의 문물이 이슬람 문화권으로 피난, 아바스 왕조에서 자연과학 등 각종 문명 및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종교적 배타성에 있어서도 동시대 기독교 세계에 비해 이슬람이 훨씬 관용적이었다. 스페인의 경우 레콘기스타가 종료된 1492년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한 것을 비롯, 중세의 기독교 계열 국가에서는 대부분 이교도 내지는 기독교 내 다른 종파가 국토 내 일부 지역에서 자치권을 갖고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1] 반면 오스만 제국의 경우 인구 분포를 보면 오히려 기독교인이 거의 절반을 차지할만큼 많았고, 동유럽 대부분에서 정세 및 집권 세력 성향에 따라 간혹 핍박은 했을지언정 정교회가 유지되었다. 이슬람과 타 종교의 공존 흔적은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레반트 지역 기독교 등으로 남아 있다.

3.2. 현대

현대의 이슬라모포비아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동맹군의 패전으로 인해 동맹군에 참가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토의 대부분이 연합군에 편입되면서 다수의 이슬람 교도들이 연합군 국민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산업 혁명 등을 거쳐 근대화한 사고방식을 갖게 된 유럽인들과의 가치관 차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였다.

이후 일부 국가들의 우경화 및 배타적 민족주의로 인해 유럽으로의 이민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이은 식민지들의 독립 과정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인 혼혈들의 이민을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배경에는 산업화로 인해 필요한 노동력을 확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며, 식민지가 없었던 독일의 경우도 초청노동자라는 개념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유치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으로의 이민은 점차 줄어든다.

1990년 이후 냉전체제 종식과, 국지전 및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으로 인해 다시 유럽으로의 이민이 증가하였으며, 특히 중동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일상적 만행과 각종 테러의 위협이 이러한 이슬람 이민자들을 서방세계에서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4. 현황

2007년부터 2011년까지에 걸쳐 진행된 각종 갤럽 설문조사 결과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확인되었다.

  • "서방세계가 무슬림 사회를 존중하는가"라는 질문에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많았다. 단 독일의 경우 예외적으로 2008년 조사 결과에 비해 2011년 조사결과 9%정도 긍정적 답변이 감소하였다.

  • "서방세계와 무슬림 사이의 긴장은 어떤 요인으로 인해 초래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남아프리카에서는 종교적 문제라는 답변이, 유럽에서는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으며, 중동 및 북아프리카, 북미, 아시아에서는 두 답변이 비슷한 비율로 나왔다. 정치적 이해관계는 상황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이 있지만 종교 및 문화적 문제는 변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큰 우려 요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 2009년 스위스에서 가결된 이슬람식 첨탑 건축 금지 법안과 관련하여, 대다수의 스위스 국민들은 종교적 자유가 중요함에 동의하면서도, 응답자의 약 2/3은 "해당 법안으로 인해 스위스 내의 무슬림이 차별받는다고 생각할까"라는 질문에 부정하였고, 응답자 대다수가 첨탑 금지 법안이 무슬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스위스의 국제적 위상을 격하시키지 않는다고 답했다.

  • 하지만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5개 차별 금지 행동의 중요성 중 "무슬림 상징에 대한 훼손 금지"에 대해 약 80%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변하여, 약 60%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변한 다른 행동들인 동등한 대우, 미디어에서의 정확한 묘사 등에 비해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중동 지역의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서방세계의 무슬림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했고, 중동 이외의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미국, 프랑스, 영국, 중국 등에서 무슬림이 차별받느냐는 질문에 대해 약 1/4의 응답자가,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약 1/3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 미국에서 절반 이상이 "미국인이 무슬림 미국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응답하였고, 특히 유태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경우 각각 66%, 60%로 편견을 더 높게 체감하고 있다. 미국 내 무슬림 중 48%가 인종차별이나 종교차별을 경험하였다고 응답하여 타 종교의 20~30%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4.1. 서방세계의 이슬라모포비아

  • 프랑스
    2005년 파리 모스크에서, 2009년 카스트르 모스크에서 반달리즘이 행해졌다. 2008년 아라스 지방에서 무슬림 무덤을 훼손하고 돼지머리를 묘비에 다는 범죄가 자행되었다. 2010년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승용차 내부 및 모스크에서 예배시 외에는 무슬림 여성의 니캅 착용이 금지되었다. 르 몽드지 조사 결과 무작위 설문 응답자의 74%가 이슬람을 참아줄 수 없다는 결과까지 나오고 있고, 이에 힘입어 우경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2015년 1월,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사건으로 인해 마린 르펜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등#, 프랑스 내에서 이슬람의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 독일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벌어진 보스포러스 연쇄살인사건 수사결과 범행 대상 명단에 하원의원 2명과 터키-이슬람 대표자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2009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재판에서 히잡을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받았던 인신모독을 증언하기 위해 참석한 이집트 여성이 법정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다. 드레스덴에서는 또한 PEGIDA라는 불법이민 및 이슬람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는데, 시위 군중에 네오나치로 알려진 인물들도 다수 포착되었다. 하지만 시위 자체에는 독일 국민 49%가 이에 공감하고 그 중 30%가 지지한다고 응답하였고, 메르켈 총리는 제노사이드화를 우려하였다.# 처음에 PEGIDA 자신들은 네오 나치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단순 반이슬람주의를 주장했으나, 이들이 꼬이면서 점점 제노포비아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안티파와 적대하고 말았다.

  • 영국
    2005년 벌어진 런던 자폭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으로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다. 2006년 프레스톤의 자미아 마스지드 모스크를 백인 젊은이들이 벽돌로 공격하는 과정에서 무슬림 청소년 1명을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2007년 런던 중앙 모스크의 성직자를 대상으로 한 연쇄폭행사건이 있었고, 이집트 축구선수인 미도를 상대로 반무슬림 구호를 외친 뉴캐슬 유나이티드 훌리건 두 명이 체포되었다. 2009년 이슬람 릴리프의 글래스고우 지부가 방화로 크게 손상을 입었고, 그린위치 이슬람 센터에도 방화 공격이 있었다. 2011년 북웨일즈 플린트셔 지방에서 모스크 건설 계획 발표 직후 관련 기관에 방화 공격이 있었다.

  • 구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내전에서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이 정교회 신도가 대다수인 세르비아계에 의해 대량학살당해, 사망 추정자 20만명에 5만여명의 여성이 강간당했고 220만명 난민이 발생했다. 서방세계에서는 이를 인종분쟁으로 해석하고자 하나 포차 지역 모스크 전부를 포함한 대다수의 모스크가 완전히 파괴되거나 손상된 것을 통해 그 배경이 종교분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코소보 전쟁은 알바니아계 무슬림의 자치권을 세르비아계가 일방적으로 박탈함에 따라 일어난 해방전쟁으로, 역시 다수의 알바니아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 이스라엘
    이슬람 대 비이슬람 분쟁의 근원으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 이슬람 진영의 테러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 이슬라모포비아도 크다. 2005년 팔레스타인과 적대적 관계 종결을 선언한 후에도 2006년 하마스가 집권하자 적대행위를 계속하고 있으며,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민간인 사상자를 내고 있다. 특히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을 통해 이슬라모포비아가 극에 달하면 사람이 아닌 악마가 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단 이쪽은 이슬라모포비아가 원인이라기보다는 원래 적대 세력 자체를 미리 눌러서 세력 확장을 막는 예방전쟁에 가깝다는 평가도 많다.

  • 노르웨이
    2011년 7월 오슬로 정부청사에서 폭탄테러, 우퇴위아 섬에서 총기난사로 각각 8명, 69명이 사망하였다. 이는 동일범이 집권당인 노동당을 노린 범행이었고, "다문화 지지세력으로부터 노르웨이를 구하기 위한 자기 방어"라고 주장하였다.[12] 한편 범인의 신원이 파악되기 전까지 언론은 이를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보도했으나, 정작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범행으로 밝혀지자 침묵했다.[13] 2015년 3월 노르웨이 진보당은 모스크들을 교외로 이전하는 캠페인을 추진하였다.[14]

4.2. 제3세계의 이슬라모포비아

의외로 놓치기 쉬운 사실인데, 이슬라모포비아는 절대로 서구만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니다. 제3세계 - 주로 이슬람권과 인접한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필리핀, 나이지리아, 남수단,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동티모르 등지 - 에서도 이슬라모포비아가 존재하며 특히 인도나 태국, 미얀마처럼 다신교가 강세인 나라들의 경우 역사적 트라우마를 변명거리 삼아 이슬람 소수민족이나 소수 지역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런 제3세계 역시 세계와 단절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서 벌어지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의 타 종교 집단에 대한 박해 뉴스는 들어오고, 국내에서 소수의 통제받지 않는 이슬람 신자들의 악랄한 만행이 때때로 벌어지기도 한다.(이슬람 극단주의 항목 참조.) 이런 경우에 일반 주민들이나 타 종교를 믿는 주민들이 가지는 반발심리와 불안심리가 매우 격렬하게 확산되는데 이 역시 쉽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비이슬람 종교 신자들의 상당수가 서구와는 비교도 안되는 극렬 반이슬람, 이슬라모포비아 성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인권 의식이 전반적으로 낮다보니 이슬람 혐오가 서구와는 달리 조금도 관용의식을 가지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서 서구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테러를 일으키면 이슬람교도들은 눈총을 받고, 몇몇 혐오범죄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역시 잘못된 행동이지만 제3세계의 이슬라모포비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제3세계에서 이슬람교가 소수인 국가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주도한 테러가 일어나서 몇명이 죽으면 당장 비 이슬람 집단도 폭동을 일으켜서 이슬람교도 거주지로 쳐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집이고 가게고 가리지 않고 때려부수고, 그야말로 이슬람교 신도들을 철저하게 짓밟아버린다. 그야말로 한 대 때리고 100대 맞는 꼴.

그리고 경찰 같은 공권력에서도 애초에 이슬람교 집단을 좋게 보지 않고 사회 불만을 이쪽으로 돌릴 수 있다보니 이런 폭동이 일어나도 제대로 법적 처분을 내리는 일은 없다. 그래서 백배로 보복당한 이슬람교 집단 역시 증오가 강화되는 악순환이 나타나게 된다.

4.2.1. 스리랑카

스리랑카에서는 소수파인 무슬림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2012년 4월 20일 스리랑카 중부 도시 담불라(Dambulla)에서 약 8천명이 넘는 불교 승려들과 불교도들이 불교 성지 위에 이슬람 성원과 힌두 사원이 세워졌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이슬람 성원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난동을 부리다 정부 관리가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자 해산했다. 물론 이슬람 말고도 힌두교도 그렇게 보고[15] 불교 성지라는 점으로 그렇긴 하지만.
이에 대하여 비난하던 이슬람 단체에 스리랑카 여론이 "그러는 네놈들 이슬람 나라에서는 다른 소수종교를 대관절 어찌 대했냐?[16]"라고 차디차게 본 것도 저런 무슬림들의 이미지가 하도 쌓이고 쌓여서 저절로 불러온 것.

사실 스리랑카에 대대로 살아온 무슬림들은 억울하고 환장할 따름인데, 그동안 스리랑카의 소수 무슬림들은 대대로 살아오면서 잘 공존해왔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절의 불상에 우상숭배라고 테러를 가하는 등 민폐를 끼치면서 반발을 일으킨 것은 최근 들어서 파키스탄이나 아랍권에서 온 극단주의자들이다. 그래서 기존 스리랑카 무슬림들은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에서 맞서 반대 시위를 벌이며 타국 이슬람의 극단주의를 비판하는 등 노력도 하고 있고, 심지어 극단주의자들의 발광 시위에 이러한 스리랑카 무슬림 시위대가 들이닥쳐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싸늘한 다수 여론의 이슬람 혐오는 깊어진 다음이다.

4.2.2. 미얀마

미얀마의 경우, 소수의 이슬람 교도인 '로힝야 족'을 대놓고 차별하고 있다. 군부 독재 때도 그랬지만 민주화 이후로는 폭발적으로 반 이슬람 감정이 증가하여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다. 미얀마 정부는 70만~80만에 달하는 로힝야 족을 '불법체류자' 취급을 하여 미얀마 국적도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미얀마 정부가 이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로힝야 족은 영국 통치 시절에 노동력으로 미얀마로 이주[17]방글라데시 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로힝야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미얀마에 이주해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로힝야는 영국의 역자로 취급되어 로힝야에 대한 주류 버마 족의 감정은 매우 좋지 않고, 애초에 국민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던 것이다.영국이 나쁘네

물론 박해에 견디지 못한 로힝야 족이 자신들과 동족인 방글라데시로 도망치기도 하지만 방글라데시라고 이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방글라데시가 인구 부족 국가이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모르지만, 안 그래도 영토에 비해서 인구밀도가 엄청나게 높아 인구에 발목이 잡힌 데다가, 경제도 안 좋아서 수십년째 빈곤국에 머물러 있는지라 도저히 로힝야 족 난민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한 마디로 제 코가 석자인 상황.

게다가 로힝야 족이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하지만 그건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기도 전의 이야기라서 백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남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너네는 미얀마 국민"이라면서 들여보내지 않고 쫓아내 버리므로 로힝야 족은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사이에서 머무를 곳이 없는 신세다. 단, 방글라데시는 나라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주변국과 적대시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은 생각해야 한다.

이슬람 극단주의, 높은 출산율로 많은 아이들을 낳아서 이슬람 세상을 만들고 불교는 우상숭배라고 박살낼 것이라는 소문은 민주화가 된 지 얼마 안된 미얀마[18]에 굉장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미얀마 내에서 각종 미디어로 재생산 되면서 이슬람교도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식이 완전히 뿌리박혀버렸다.

자비평화를 모토로 삼는 불교 승려들이 대놓고 언론에 나와서 "이슬람을 때려잡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달라이 라마와 대한불교 계종 등에서도 폭력을 선동하는 미얀마 불교의 모습에 우려를 표시했다. 물론 미얀마 불교는 여전히 "이슬람교가 들어오면 불교는 다 파괴되고 우린 다 죽거나 개종당한다."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의 바미얀 석불 파괴 등의 사건을 인용하여 공포를 전파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로힝야족 자체가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고려할 때 미얀마 불교도들이 이슬라모포비아는 그냥 간판이고 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로힝야족을 추방하려 하는 게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하며, 다른 측에서는 종전 카렌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반란 명목으로 학살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굳건한 군부의 지배력 및 내부 불안을 이슬람 탓으로 돌려 민주화 흐름 속에서도 군부의 경제적, 정치적 입지 및 언론이나 종교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분석하기도 한다.

4.2.3. 태국

태국도 갈등이 심한데, 여긴 원래 이슬람이 다수이던 여러 작은 나라를 강제로 병합하면서 갈등이 깊다.

말레이시아 국경에 있는 빠타니·얄라·나라티왓 주는 거의 95% 이상이 무슬림이었으나, 태국이 강제로 차지한 게 고작 100년 남짓이었다. 태국은 무슬림에 대한 차별정책을 강화하고 1920~30년대에 군대를 주둔시켜 모스크를 강제로 절로 개조하면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차별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데 인구 80% 이상이 무슬림인 이 곳은 공무원 90% 이상이 불교도이며 공립학교 또한 불상을 두고 불교 교육만 배우게 한다. 무슬림 다수는 실업자라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린다. 이런 이들의 불교에 대한 증오는 깊어져가고 결국 과격 이슬람 세력이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면서 헬게이트가 열려버렸다. 주둔 태국군이 무슬림을 재판도 없이 참수하지 않나, 그 보복으로 역시 대다수 불자 민간인을 참수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으며, 2014년 10월 관공서에서 폭탄이 터져 소방차 및 시청이 파괴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태국 측은 이 모든 게 말레이시아 탓이라고 반발하며 두 나라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국경과 접한 가운데 이 3개주가 말레이시아와 마주보고 있으며, 여기서 분리독립하는 이들이 차라리 말레이시아의 주가 되는게 낫다고 선언까지 하고 있기 때문.

5. 극복을 위한 노력

비이슬람 진영에서 경계하고 배척해야 할 것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지 이슬람 교도 전체 또는 이슬람 문화 자체가 아니다. 이슬람계 출신이면서도 다른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그저 문제아들과 같은 민족, 같은 종교라는 것만을 이유로 무조건적인 차별을 일삼으면 오히려 멀쩡하던 이들도 반발심리로 진짜 문제아들인 극단주의자들에게 가담할 수 있다. 실제로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지하드, 즉 이슬람 대 반이슬람의 전쟁이라고 정당화하여 이슬람 사회 내에서 지지를 얻고 있으며, 이슬람에 대한 비이슬람 진영의 차별이 늘어날수록 일반 이슬람 교도들이 극단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자발적인 지하드 가담이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무력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비이슬람 진영에서 이슬람에 대한 열린 시각을 넓혀 일반 이슬람 교도들이 비이슬람 진영과의 전쟁상태가 아니라고 스스로 느끼고 극단주의를 이슬람 내에서 배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슬람은 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전쟁상태가 아니라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일반 이슬람 교도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는 이슬람 대 비이슬람 사이의 평화 증진에 도움이 된다.

  • 오타와 총기난사 사건 직후 이슬람 혐오자들이 모스크에 낙서를 하는 등의 비이성적 행위를 했지만 이후 지역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모스크의 낙서를 지우고 "이곳이 너희 집이다"라는 문구를 달아주었다.#

  • 시드니 인질극 사건의 여파로 호주 내에서 이슬람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자, 호주인들 사이에서 이슬람 행인, 특히 히잡을 착용한 여성들이 린치 당하지 않도록 동행하자는 #illridewithyou 운동이 전개되었다.# 토니 애벗 총리 역시 "IRA가 종교적인 의도로 테러를 한다고 해서 교황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며 이번 사건과 이슬람교와의 선을 그었다.#

  • 프랑스에서도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사건의 여파로 국민전선 등의 극우 활동가들이 이슬라모포비아 활동을 재개하고 있으나 르펜과 극우파들이 추모시위에 초대받지 못하는 등, 이슬람 그 자체를 적대시하려는 시도와 거리를 두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 역시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6. 한계

문제는 국제정세와 관련된 복잡한 문제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 가능성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스라엘-미국-이슬람 세계와의 이해관계와 증오의 연쇄 문제다. 단순히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라고 쉽게 단정지을 문제가 아니다.

  • 아랍권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지하드 상태로 보고 있으며,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중동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중동에서의 두 세력의 존재 자체가 화해할수 없는 문제라고 간주하고 있다.
  • 이스라엘의 경우 본래 단순히 유태인 거주구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세속 국가를 지향했지만 아랍측의 선제공격으로 인한 전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9] 즉 지금의 상황은 이슬람측이 먼저 유태인을 배제하기 위해 벌인 일이며 현재 이스라엘의 대응은 이에 대한 '대응'임을 주장한다.
  • 미국의 경우 이스라엘과 아랍의 왕족들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보복테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는 것이 미국 이슬람포비아의 주류이며 실제로도 911 테러에 의해 고조된 반이슬람주의는 테러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가 ISIL의 등장으로 다시금 여론의 50% 이상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이슬람 극단주의가 서구를 위협하는 이상 반이슬람주의는 당연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을 하려면 이슬람-이스라엘-미국 3자가 풀어야 되겠지만, 각자의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라 현재로서는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종교적인 견해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기독교야 '같은 유일신교'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타협과 화해할 수 있는 요소를 찾기도 하지만, 불교,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 문제는 정말 풀기 어렵다. 이슬람교는 불교, 힌두교를 우상숭배를 하는 종교로 보고 철저하게 박해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도저히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 불교의 경우 당장 눈에 보이는 불상 문제를 제외하고 최대한 원시불교적인 교리로 간다고 해도, 이슬람 측에서는 불교가 인간의 가르침 만을 숭배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장애는 다른 종에 대한 경계 및 배척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동물적인 본능이라는 점이다. 이는 비이슬람 세속 사회에 융화하기를 꺼려하는 무슬림만의 책임은 아니다. 양쪽 모두 문화적으로 100% 융화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서로 인정할 필요가 있으며, 어디까지나 법률에 의거하여 위법적인 행위를 한 경우에 대해서만 처벌하는 법치주의적 원리를 엄정하게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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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프레드 할리데이 교수는 러니메이드 트러스트를 비판하면서 이슬라모포비아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그 신도들에 대한 공격이 아닌 정치적 이슬람, 즉 이슬람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이슬람은 폭력적이건 아니건간에 기존에 존재하던 서구식 사회체제를 전복시키고 이슬람 질서를 세우려 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 [2] http://abbc.net/islam/english/index_media.htm
  • [3] 람보 3에서 공산정권에 맞서 싸우는 무자히딘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 [4] 아랍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1921년부터 시초를 찾을 수 있어 이슬라모포비아라는 용어의 기원과 일치하며, 3B - 테러리스트(bomber), 졸부(billionaire), 윤락녀(belly dancer)로 대변되는 부정적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는 분석이 있다. 한편 9/11 사태 이후로는 반대로 무슬림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 [5] 날조된 거짓정보라는 의미가 아니며, 무슬림 진영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통제하지 못해 국제사회에 무수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과거 냉전 시기 공산주의의 부정적 측면 역시 많은 부분 실재했다. 중요한 것은 편중된 정보에 의해 "이슬람이 무조건 나쁘네"라는 결론으로 유도되지 않도록 개개인이 각 사안마다 중립적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다.
  • [6] 각국 총 인구 기준 이슬람 교도 비중은 영국 4.4%, 프랑스 5~10%, 독일 1.9% 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프랑스의 경우 제대로 된 인구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단, 독일의 경우는 이전 조사 결과인 5.9%에서 급감했는데, 이는 독일 내 이슬라모포비아 현상의 증가로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의 종교를 솔직하게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7] 이 요구는 작게는 히잡착용이나 할랄푸드 영업허용 등과 같이 논란의 여지는 있어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부터 샤리아법 도입 및 종교경찰활동이나 이슬람 거주구 에미레이트 분리독립 등과 같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 다양하다. 어느 선까지를 요구하고 받아들일지에 대해 이슬람과 비이슬람 사이에 국제적이고 명시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 [8] 이러한 이민자들에 의한 문제는 이슬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민자들은 서로 모여 살기 때문에 게토가 형성되며, 선진국의 경우 이민자들은 기존 국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수준을 가지기 때문에 빈민가 형태로 나타나 주변 지역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 [9] 유교나 타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경전에 명시된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법적 처벌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러한 법적 처벌이나 삶의 제약의 정도가 세속화 추세나 정교분리에 따라 이슬람권과 달리 현저히 감소했다. 더욱이 유교를 종교로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10] 이슬람이 타 종교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쿠란의 "불신자들의 목을 쳐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전쟁 중에 국한된 것이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불신자인 피정복민(딤미)에게는 "이슬람이 보호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소위 인두세라 불리는 "지즈야"라는 세금을 징수하였을 뿐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 초기에는 세금도 비잔티움 제국에 비해 적은 액수였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와 유대교도들은 세금만 내면 종교의 자유를 누렸던 것으로 평가된다.
  • [1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나 베네치아 공화국 등의 예외가 존재하긴 한다.
  • [12]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65631
  • [13]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764
  • [14] http://rt.com/op-edge/237113-norway-progress-party-islam-mosques/
  • [15] 여긴 스리랑카 내전으로 힌두교 믿는 타밀족이랑 장기간 전쟁을 벌여 그렇긴 하지만.
  • [16] 당장 바미얀 석불 사태나 방글라데시의 힌두교 신자들이 무슬림들에게 얼마나 박해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 [17] 인도와 미얀마는 모두 영국 식민지였다.
  • [18] 하지만 미얀마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아직도 군부의 힘이 엄청나서 불안정한 민주화이긴 하다.
  • [19] 실제로 현재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형성한 두가지 중요한 원인이 제1차 중동전쟁과 제2차 인티파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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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9-11 22: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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