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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last modified: 2015-06-03 22:10:48 by Contributors



2003년 한국프로야구 홈런 신기록 (56호) 달성. 2014년 현재까지도 한국프로야구동양인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며,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야구에서도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깨뜨리기 이전까지 최다였다.


찰지구나 전광판에 깨알 김풍기가 보인다면 기분 탓이다.

352grando.jpg
[JPG image (251.01 KB)]

2013년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352호) 달성. 참고로 이 분2002년 한국시리즈 물론 2012년 한국시리즈 이어 이번에도 당했다.

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5 2,390 안타[1] 2012년

삼성 라이온즈 No.36
이승엽(李承燁)
생년월일 1976년 10월 11일
체격 183cm, 93kg
출신지 대구광역시
가족 1남 2녀 중 막내, 아내 이송정
출신학교 대구중앙초-경상중-경북고-대구대-성균관대 대학원(석사과정)
포지션 1루수, 좌익수[2], 지명타자[3]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95~2003)
치바 롯데 마린즈(2004~2005)
요미우리 자이언츠(2006~2010)
오릭스 버팔로즈 (2011)
삼성 라이온즈(2012~ )
국가대표 대한민국 U-20(1994)
대한민국(2000-2013)
등장곡 김진표 - 아직 못다한 이야기(Feat.BMK) [4]
응원가 (2012 ~ [5]) 천공의 성 라퓨타 OST - 君をのせて(너를 태우고)[6]
(2014 ~ ) 모자이크 - 자유시대 [7]
전용 응원 구호[8][9]

1997년 한국프로야구 MVP
구대성(한화 이글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1999년 한국프로야구 MVP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박경완(현대 유니콘스)
2001~2003년 한국프로야구 MVP
박경완(현대 유니콘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1997년 한국프로야구 홈런
박재홍(현대 유니콘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1999년 한국프로야구 홈런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박경완(현대 유니콘스)
2001~2003년 한국프로야구 홈런
박경완(현대 유니콘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박경완(SK 와이번스)

1997년 한국프로야구 타점
박재홍(현대 유니콘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1999년 한국프로야구 타점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박재홍(현대 유니콘스)
2002~2003년 한국프로야구 타점
타이론 우즈(두산 베어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이호준(SK 와이번스)

1997~2003년 한국프로야구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경기(현대 유니콘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양준혁(삼성 라이온즈)
2012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홍성흔(롯데 자이언츠)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이병규(LG 트윈스)
2014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이병규(LG 트윈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2012년 한국시리즈 MVP
오승환(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박한이(삼성 라이온즈)

2013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더비 우승자
김태균(한화 이글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김현수(두산 베어스)

신인왕 빼곤 다 해봤다![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6번(1995~2003, 2012~)
강춘경(1993~1994) 이승엽(1995~2003, 2012~) 현역

요미우리 자이언츠 제 70대 4번타자
쿠보 히로키(69대) 이승엽(70대) 오카 토모히로(71대)

보유 기록
56 홈런 단일시즌 최다 홈런
144 타점 단일시즌 최다 타점
356 루타 단일시즌 최다 루타
390 홈런 개인 통산 최다 홈런[11]

삼성 라이온즈 영구결번
No.36[12]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승엽

뜨거운 아시아의 대포에 뜨거운 혼을 담았다. 이 노래여 전해져라, 홈런 이승엽
(熱きアジアの大砲に 熱き魂を込めた この歌よ届け ホームラン李承燁)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응원가

당신(이승엽)은 나쁠 때도 좋을 때도 거인(요미우리)의 4번 타자입니다. 모두를 끌어가는 선수이니 괴로울 때도
분할 때도, 잘 되지 않을 때도 한 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두가 뒤에서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말을 걸어와 주세요. 당신은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간판 타자 아베 신노스케



Contents

1. 소개
2. 경력
2.1. 고교야구 시절
2.2. 한국프로야구 1기
2.3. 일본프로야구 시절
2.3.1.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2.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2.4. 한국프로야구 2기
2.4.1. 2012 시즌
2.4.2.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4.3. 2013 시즌
2.4.4. 2014 시즌
2.4.5. 2015 시즌
3. 스타일과 평가
4. 포지션
5. 야구 관련 커뮤니티의 빠들
6. 이야깃거리
6.1. 이승엽에게 당한 피해자(?)들
6.1.1. 이승엽의 기록에 의한 피해자
6.1.2. 이승엽에게 기록을 허용한 경우
6.1.3. 기타 피해자(?)
7. 연도별 주요 성적
8. 주요 기록
9. 수상 경력

1. 소개

국민타자國民打者
LION KING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홈런 타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홈런왕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아니 한국프로야구의 현재진행형 전설
시즌 1호의 사나이, 라지에타 파괴자
대한민국 국방부의 주적
한국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50홈런을 치고 그 해 MVP를 수상한 선수[13]

삼성 라이온즈야구 선수. 이만수 - 장종훈의 뒤를 잇는 역대급 장타자 라인의 계승자이다. 그리고 합법적 병역 브로커이기도 하다.

주로 알려진 별명은 라이온 킹[14]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소속되었을 당시 얻은 별명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본좌 라인 중 4대 본좌이며 장효조-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계보를 잇는 주축 선수 중 하나이다. 언론상에 주로 나오는 별명 겸 수식어는 국민타자이며 인터넷 상에선 합법적 병역 브로커오푼이, 그리고 일본에서 부르던 애칭이던 승짱, 국민적(敵) [15]등이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덕분에 Dcinside 야구 갤러리에서 '중요한 순간 꼭 2점을 뽑아준다'고 하여 '이점엽'이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하나씩 적어보자면,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괴물투수로 불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점 홈런을 날렸고,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또 다시 마쓰자카를 상대로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날렸다. 부산아시안게임은 잘 모르겠고, 2006년 1회 WBC 때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예선에서 8회에 결승 역전2 2점 홈런,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일본과의 준결승전 당시 8회에 결승 역전 2점 홈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1회에 선제 2점 홈런... 2와의 인연이 깊다. 본격 콩까는 이승엽 ㅋㄲㅈㅁ

또 다른 별명인 합법적 병역 브로커는 베이징 올림픽 이후에 붙은 별명이다. 이유는 지금까지 합법적으로 후배들에게 병역 면제 티켓을 쥐어준 것만 해도 엄청난 숫자에 이르기 때문.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6년 WBC 4강,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40명 정도의 선수들에게 병역면제 특혜를 선물로 주었다. 자신은 팔꿈치 수술로 면제가 되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여준다. 2012년 국내로 복귀한 이후에는 기존 일본쪽에서 불리던 국민적 타자라는 걸 변형하여, 잘할때부터 못할때까지 은하 - 세계 - 유라시아 - 아시아 - 국민 - 대구시민적 - 수성구민적 - 읍민적 - 면민적 - 가정적 - 개인적 - 분자적 - 원자적 - 나노적(...)[16] 타자로 다양하게 변화하며 불린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을 침몰시킨 장본인도 다름아닌 이승엽이였고, WBC에서 미국을 1회 초구 홈런으로 관광시킨 장본인도 이승엽이였다. 결국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구성된 미국에서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골라야 했던[17] 굴욕을 줬다. 일본에서 말하듯 정말 국민적인 타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칠고 터프한 스포츠 선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생활도 깔끔하고 신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다만 2000년에 풍파를 불러온 로야구선수협의회 사건 때 아무런 일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참여한 경력이 있어 이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깎이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승엽이 선수협 파동 당시 한국 나이로 불과 25세였고[18], 나이에 비해 한국 야구계에서 비중이 지나치게 무거웠던 관계로 당시 어린 이승엽이 옳은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나 당시 삼성의 리더를 맡고 있던 사람은 선수협 오적으로 유명한 김기태였고, 당시 양준혁과 주먹다짐까지 벌여가며 삼성 선수들을 선수협에서 발을 빼도록 주도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승엽의 참가는 무리였다는 점 때문에 비난 여론이 그리 많지는 않다.[19] 그리고 비난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정작 선수협 창립 당사자들이 이승엽을 옹호했었다는 점[20]을 감안하면 다소 무리가 있는 셈. 이 후 2001년에는 결국 단독으로 선수협에 가입했고[21] 그 후로도 선수협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가입 당시 기사# 1# 2# 3

2. 경력

이승엽의 커리어는 크게 대한민국 시절과 일본야구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에서는 레전드급, 일본에서는 두 해[22]를 제외하고 고난의 연속이라고 표현 가능.

2.1. 고교야구 시절


1992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이승엽은 1993년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12년만의 청룡기를 모교에 바치는데 일조했다.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활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다만 고3때는 팔꿈치 부상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2. 한국프로야구 1기

처음에는 한양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가계약되어 있었으나 수능에서 총점 40점 이하를 기록[23]하며 대학 진학 자격을 상실하여 자연스럽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된다. 이 당시 교육부의 규정에 따르면 체육특기자라 하더라도 수능시험 총점이 40점을 넘지 못하면 대학 입학이 불가능했다. 프로 입단을 위해 고의로 시험을 망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저 멀리에... 그러나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본인 입으로 사실임을 밝혔다. 정확히는 37.5점을 맞았다고.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는데 선배들이 술을 엄청나게 권하는 바람에 본인이 생각한 대학생활은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의로 시험을 망친 거라고...

경상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청룡기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한 투수여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때에도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 좋은 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팀의 빈틈을 메꿔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의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군 면제를 받았던 상태였지만... 하지만 우용득[24]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는 이승엽에게 배팅 재능이 있음을 확인해[25] 스프링캠프에서 돌연 타자로 전향시켜, 1년간 타자로 기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여기에 우용득 감독은 한 수 더 떠 기존에 1루수였던 양준혁을 외야로 이동시키고 검증도 안 된 고졸 신인을 1루수[26]로 박았다. 1995년 데뷔 첫 시즌 타율 .285에 홈런 13개로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지만,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듬해인 1996년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는데, 백인천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해 주었고[27], 1년만 타자로 활약한다는 조건도 까먹고 1996년에 조정기를 보낸[28] 이승엽은 1997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장타에 눈을 떠 홈런 제조기로 명성을 높였으며, 이 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화려한 타선의 중심축에 서게 되었다. 참고로 이때까지 이승엽의 별명은 신해철이 이끈 밴드 N.EX.T의 노래인 '날아라 병아리'에서 나온 얄리 혹은 스나이퍼였다. 3할을 쳐내는 정교함과 필요할때 마다 나오는 클러치 능력등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 하지만 후술할 활약으로 라이온킹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이 별명은 사실상 묻히게 되었고 이후 스나이퍼의 칭호는 이 분이 가져가게 된다. 하지만 최훈은 스나이퍼의 기본은 목표를 보는거라면서 보는것 밖에 못하는 스나이퍼라고 카툰으로 디스했었다[29]

1997년 32개[30]
1998년 38개[31]
1999년 54개[32]
2000년 36개
2001년 39개
2002년 47개
2003년 56개[33]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의 홈런왕 신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1997년부터 일본 이적 직전인 2003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홈런 30개 이상을 쳐냈다. 1998년, 2000년을 제외하고 다섯 번의 홈런왕을 차지했다. 특히 1997년에는 앞선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삼성을 일약 포스트시즌에 복귀시킨 주역이 되었고,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특히 1999년 54개 홈런으로 1998년 당시 두산 용병이었던 타이론 우즈의 42개, 토종타자로서 장종훈이 세웠던 41개보다 무려 열 개 이상 많은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면서 그의 주가는 폭등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홈런왕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 1999년 5월이 특히 뜨거웠는데, 한 경기 홈런 3개를 밥먹듯 쳐내면서 순식간에 5월 말 합계 20개 중반대 홈런숫자를 기록했고, 8월 초에 장종훈과 우즈의 기록을 깨 버렸다. 그 해 왕정치의 기록을 깨뜨리고 60개 이상 칠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나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홈런 기록을 새로 써나가던 시절인 1999년과 2003 시즌 때 대구구장은 외야가 먼저 매진이 되고 사람이 더 많이 들어갔으며 잠자리채가 쫘악 깔려있었다. 특히 1999년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 홈 마지막 경기에서는 홈런성 타구가 한화의 용병 제이 데이비스에 의해 잡히자 팬들이 항의 차원에서 물병 등의 쓰레기를 투척하는 스킬을 시전했고 데이비스는 우산을 쓰고 외야에 서 있기도 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이미 홈런 54개를 친 상태여서 더했다.

그러나 외다리 타법의 약점이 드러나자 2000~01시즌에는 36개와 39개의 홈런을 기록했음에도 타율이 0.293, 0.279로 떨어지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에 이승엽은 타격폼 수정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고, 그 결과는 2002~03년에 보여준 엄청난 퍼포먼스였다. 2002년 0.323의 타율로 정확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홈런갯수도 47개로 늘리며 홈런왕 2연패에 성공했으며 2003년에는 0.301의 타율에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자 현재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인 56홈런, 한 시즌 최다타점인 144타점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심정수와 펼쳐진 불타는 홈런왕 라이벌리는 침체된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요소였으며, 이 둘은 2년 연속으로 3할-40홈런-100타점을 찍었다. 그러나 심정수는 세부 스탯에서 앞섬에도 홈런왕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콩라인이 되었고 이승엽은 홈런왕 2연패에 성공함으로서 승자로 기록될 수 있었다.

이승엽이 있던 시절 삼성은 굉장히 타고투저의 경향[34]이 강하여, 1997년 5월에는 대구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5:27이라는 역사적인 스코어를 포함하여 무려 3연전에서 49점을 내 LG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여기서 나온 논란이 부정배트 논란. 하지만 2001년 전까지는 혼자서 홈런을 치던 타자의 이미지가 강했다.[35] 그러다 2001년 마해영이 들어오고 2002년 양준혁이 돌아오면서 공포의 이마양 트리오 타선이 구축되었다. 이 3명은 2003년 합계 127홈런 356타점을 쳐내기도 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는 이승엽을 큰 무대에 강한 사나이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차전까지 20타수 2안타라는 극악의 부진에 시달리던 이승엽이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그를 믿고 계속 출전시키는 그답지 않은뚝심을 보였고, 결국 6차전에서 이승엽은 LG 구원투수 이상훈을 무너뜨리는 동점 3점홈런을 작렬시켜 우승으로 가는 발판을 놓았다.


동점 쓰리런 홈런 치고 홈에 들어온 이승엽.


그 뒤에 나온 마해영이 백투백 홈런으로 경기를 끝내 버린 후, 그는 눈물을 보였다...

마해영의 회고에 따르면 동점 쓰리런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와서 "형 제발 끝내줘"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마해영은 곧바로 한국시리즈 역사상 길이 남을 백투백 홈런으로 정말로 시리즈를 끝내버렸다!!!

여담으로 한창 홈런왕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도 '투수를 했으면 어떘을까'하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너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고 치켜세워주며 마음을 다잡아준 사람은 현 KIA 타이거즈 감독 김기태.

2.3. 일본프로야구 시절


한국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커리어 하이나 평타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있지만 그게 오래가지 못했고, 기복과 부침이 심한 시련의 시기. 그래도 일본시리즈 우승반지를 껴보는 기쁨을 누렸다.

2.3.1.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이승엽은 2003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의 거취에 많은 야구 팬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이미 이승엽은 오래 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고 있었고, 팬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인 그가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애틀 매리너스 등 다양한 구단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며 이승엽의 미국 진출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36]

그리고 2003년 12월 11일, 이승엽은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입단을 발표한다. 미국 출신인 바비 발렌타인 감독 밑에서 뛰면서 2년 후 다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겠다는 것.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승엽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9년 후, 2012년 힐링캠프에 출연해 이날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밝혔다.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 것이 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든 대구와 삼성 구단을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고. 이승엽 자신으로서는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한국 최고 타자의 미국행을 기대하던 많은 팬들은 이승엽의 일본 진출 소식을 듣자 큰 실망감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시즌 초반 4월에는 폭풍과 같은 활약을 보였고 시즌 1호 홈런은 역풍이 분다는 마린즈 스타디움 장외 구멍 사이로 뚫고 들어가 건너편 주차장 차 유리를 뚫고 들어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임팩트 있는 시작을 장식했다. 그러나 5월부터 이승엽의 약점을 간파한 일본 투수들의 집요한 공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 2군으로 떨어진다. 그와중에 기존 주전 1루수였던 후쿠우라와의 포지션 경쟁은 완패를 당하고, 좌익수로 완전히 전향하다시피했다. 시즌 후반 다시 올라왔지만 용병타자 치고는 평범한, 이승엽 스스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우여곡절 많은 이적 첫 해를 보낸다.

2004년 성적은 14홈런 50타점 타/출/장 .240/.328/.450 OPS.779

2005년은 마침 그 때 롯데 코치로 부임해 일본으로 건너온 김성근과 함께 어마어마한 훈련량으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범경기에서 20타수 1안타의 극도의 부진을 겪으며 개막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승엽이 이 때 얼마나 동계훈련을 많이 소화했던지 당시 팀의 주전 유격수였던 시오카가 그동안 이승엽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시범경기에서 좀 못쳤다고 기회를 안 주는건 말이 안된다는 식으로까지 얘기나 나올 정도였다. 역시 김성근

개막 후 열흘도 되지 않아 1군에 콜업되었으며 첫 경기에서 결승 3루타를 치고 시즌 첫 홈런을 세이부의 에이스 와쿠이에게 뽑아낸 것을 시작으로 잇달아 홈런과 안타를 터뜨리며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결국 홈런타자의 바로미터인 30홈런을 이 시즌에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유달리 데이터 야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좌투수에 약하다는 인식이 박혔던지 이승엽을 플래툰으로 돌려 버린다. 그럼에도 홈런 30개를 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 그러나 출루율이 .315로 그치는 등 생산성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승엽 골수팬들에게 이는 발렌타인과 롯데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롯데는 굉장히 변칙적인 라인업을 사용하던 팀이었고, 1루수 후쿠우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플래툰으로 돌려졌다. 플래툰은 기본에 타순도 엄청나게 변칙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당시 팀내 최고 타율이었던 이마에 토시아키가 8번타자로 기용되었다거나, 3-4-5 클린업트리오를 후쿠우라-사부로-사토자키를 넣고, 7-8-9번 타순을 셋 다 20홈런 이상의 장타자인 프랑코-이승엽-베니 용병 3인방으로 채워 클린업트리오를 두 개 운영하는 식이었다. 어쨌든 이 당시 롯데는 이런 변칙적인 라인업이 엄청나게 재미를 봐서 승패마진 +35의 84승 49패 3무의 엄청난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다. 자국선수들도 뻔질나게 플래툰으로 돌려지는데 이승엽만 특별 대우를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뿐더러, 심지어 당시 김성근은 아직 스윙이 베스트로 올라온 상황이 아니므로 현재의 이승엽에게는 플래툰이 더 좋을수도 있다는 말을 했던 적도 있다.[37] 실제로 이 시즌까지 이승엽의 대좌투수 타율은 2할 1푼대로 매우 좋지 않았으며, 발렌타인이 이승엽에게 아예 기회를 안줬다는 편견과는 달리 좌투수를 적지않게 상대한 편이었다. 좌완투수 상대시 주로 투스트라이크에서 바깥쪽으로 뚝 떨어지는 변화구에 헛스윙 심진을 당하기 일쑤였다.


여하튼 그 해 롯데는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 상대는 한신 타이거스였는데, 이승엽은 시리즈 전체 홈런 3개를 치면서 한신을 떡실신시키며[38] 이마에의 미칠 듯한 안타에 좀 가려졌어도 지금까지도 한신의 악몽으로 기억되는 '33-4', 하얀 안개 사건의 대미를 홈런으로 장식하며 롯데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 중 하나가 된다. 뭐시여! 한신은 관계 없잖여!

2005년 성적은 30홈런 82타점 타/출/장 .260/.315/.551 OPS .866

2.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그러나 팀의 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듯, 시즌 종료 후 이승엽은 롯데와 재계약 협상을 하면서 계약서상에 수비보장을 명시해달라는 초유의 요구를 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시즌 이승엽은 지명타자를 무척 싫어했으며, 좌익수라도 계속해서 고정적으로 맡기를 원했으나 팀내 용병타자 셋이 모두 외야수였던 관계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돌아가면서 지명타자를 맡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롯데의 세토야마 대표는 금액은 이승엽이 원하는대로 맞춰줄 수 있지만 수비보장은 선수기용의 문제이고 감독의 권한이기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굉장한 난색을 표했고, 결국 롯데와의 협상은 결렬된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다시 한 번 꾀할 것 같았지만 정말 의외로 정작 선택한 곳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걱정과 우려를 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어쨌든 이승엽은 배수의 진을 치고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된다. 다음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계약기간은 1년으로 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반면 춘계 훈련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은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개막전에서 6타석 3타수 3안타 1홈런 3볼넷의 화끈한 성적을 보이면서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후 6월 초 무라타 슈이치를 제치고 홈런 1위로 올라서며, 9월 초까지 계속하여 리그 홈런 1위를 달린다. 그러나 8월 말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결국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 자리를 내주게 된다. 우즈가 미친듯이 후반기 몰아쳤기 때문에 이승엽의 몸이 정상이었더라도 홈런왕을 따낼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이 해 우즈와의 홈런왕 신경전은 또 다른 볼거리였고, 우즈도 이승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한 언동을 자주 보여 그런 논란을 더욱 불거지게 했다. 이후 2007년 말까지 우즈가 낫다 이승엽이 낫다 논쟁은 국내 일본야구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터지는 주제였다.

이 해, 정작 요미우리의 전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승엽 혼자서 열심히 홈런을 치면 뭘 하나... 투수들은 죄다 흔들렸고 야수진에서도 이승엽 외에 오카 토모히로, 아베 신노스케 정도를 빼고 나면 그렇게 인상적인 선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승엽과 함께 중심타선을 구축해줘야 할 타카하시 요시노부쿠보 히로키가 부상으로 골골거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2005년까지 감독하던 호리우치 츠네오가 팀을 대차게 말아먹고 다시 2006년에 하라 감독이 돌아와서 복구하던 과정이었다. 그 해 이승엽은 커리어 최고 성적을 찍었지만 반대로 팀은 사상 최초 2년연속 B클래스[39]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사실 그나마도 이승엽과 하라 다쓰노리 감독, 쓰미 테츠야 등의 활약이 좋아 이 정도로 선방한 것이었다.

2006년 성적은 41홈런 108타점 타/출/장 .323/.389/.615 OPS 1.003.[40] 이런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만큼 2006년 국내에서 이승엽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물론 성적 자체가 좋았던 이유도 있지만, '일본 무대, 그것도 일본 최고의 명문팀에서 4번타자로 맹활약을 펼치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는 점이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극일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이승엽과 요미우리는 4년 30억엔의 초대형 재계약을 맺는다. 당시 이승엽의 연봉은 약 6억 5천만엔으로 당시 리그 전체 1위였으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2위의 메가톤급 계약이었다.여러분 최고의 4번타자를 영입했습니다 이승엽 본인은 자신을 믿고 붙박이 4번타자로 지지해줬던 하라 감독에게 우승을 안겨주고 메이저리그로 가고 싶었다고 했지만 '일본 리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위해 거쳐가는 단계'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던 한국 팬들은 다소 허탈해했다. 2ch를 포함한 안티들은 메이저리그에 간다는 말은 순전히 떡밥에 불과했으며 자신의 몸값 높이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고 비난을 가하게 되었고, 일부 팬들도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 의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41]
2007시즌에는 전년도 활약을 뛰어넘는 괴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들에 차 있었고, 개막전부터 가볍게 홈런을 때려내면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듯 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 중간 2군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전년도에 비해 다운그레이드된 모습으로 결국 2할 7푼에 30홈런의 강타자 커트라인 수준의 활약을 보여준다. 시즌 최종 성적은 30홈런 74타점에 타/출/장 .274/.322/.501 OPS .823. 이 시즌에는 볼넷 38개를 골라내는 동안 119개나 되는 삼진을 당하면서 커리어 후반기의 고질적인 선구안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2008년 좀 더 좋아지지 않겠느냐라는 예상과는 달리 4월 1할 2푼 5리의 처참한 성적으로 2군으로 신속하게 내려갔으며 이후 전반기를 쉬다시피 한다. 슬슬 먹튀소리도 나오고 혐한들의 조롱은 극에 달했다. 일본의 안티 요미우리 진영에게도 이승엽의 부진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원로 노무라 카츠야는 "이승엽은 장식용 4번타자"라고 깠다.

7월 말 다시 복귀했으나 장타력이 되살아나지 않고 대타나 중간 교체가 많았으며 드문드문 나오는 등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장면이 많았다. 워낙 부진의 늪이 오래되자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차라리 다른 강타자를 넣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는 의견[42]들도 많았다. 하지만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만일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 낼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모두가 다 아는대로 그 예언은 적중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준결승 전까지 중국전 끝내기 안타를 빼고는 지독한 부진에 시달렸으나, 준결승 8회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려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고, 결승전에서 1회 쿠바 투수에게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을 쏘아 올려 대한민국 금메달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 때의 임팩트가 매우 컸기에 비교적 약효가 오래 간 까임방지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이승엽은 요미우리 복귀 직전 일본전 홈런에 대해서 '홈런을 쳐서 일본한테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다'라는 인터뷰를 공개적으로 했는데, 한국 내에서는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 '(일본 리그)팀 복귀를 의식하는 거냐', '이미 패배한 팀을 두 번 죽이는 말' 등의 부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 기사를 접한 2ch 등 일본 커뮤니티에서 '맞아,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었어'(...)라며 결승전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2ch는 강민호의 퇴장 빌미를 제공한 문제의 볼 판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연히 쿠바를 응원했다.

그러나 정작 리그로 복귀한 뒤의 현실은 시궁창. 일본시리즈에서 18타수 12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찍으면서 (이것은 일본시리즈 최다삼진 기록 역대 2위였다) 전혀 힘을 쓰지 못했고, 요미우리는 결국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라 감독은 이승엽이 끝내 한 건 해 줄 것이라면서 팬들은 물론 심지어 요미우리 출신 원로들까지 반대하는데도 최종 7차전까지 이승엽을 변함없이 주전으로 기용하는 의미를 보여줬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 구단주는 시리즈 종료 후 하라 감독에게 "이승엽을 왜 썼느냐"고 분노를 쏟아냈으며, 이승엽 본인도 귀국 후 “일본시리즈 패배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준비가 부족했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최악의 1년이었다. 응원해 주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밝혔다.
2008년 성적은 8홈런 27타점 타/출/장 .248/.324/.431 OPS .755. 시즌 전체적으로는 45경기 출장에 그쳤다.

2009년 제2회 WBC 불참을 선언하면서 시즌 성적에 집중하겠다고 공언한 뒤, 3월 시범경기에서 홈런 8개를 치면서 팬들의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하라 감독은 3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4번 알렉스 라미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을 무한경쟁 체제로 운용하겠다고 발표했다.

2009시즌이 시작되면서 4월 초 부진에 빠졌고 하라 감독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이승엽을 붙박이 주전 자리에서 신속하게 제외시키며 플래툰 체제에 편입시킨다. 그간 이승엽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여왔던 하라 감독의 선택이었기에 이 선택은 국내 이승엽 팬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는데, 이승엽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하라 감독의 변심(?)에 서운함을 표시했으나, 하라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간 기다려 준것만으로도 보살이라며 충분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5월 초 다시 대폭발하여 1할 대 타율을 잠시나마 3할 이상으로 높여 놓는 등 맹활약하면서 다시 주전으로 꾸준히 나오려는 찰나, 이승엽 데이를 기점으로 31타수 무안타의 부진에 빠지고, 감독은 그를 다시 플래툰으로 돌린다. 이후 잠시 살아나는가 했더니 다시 36타수 무안타의 극악의 부진에 빠져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7월 초 하라 감독은 '무기한 2군 강등'을 선언하고 이승엽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 이후 다시 못 올라오고 77경기 출장에 머무르며 16홈런 36타점 타/출/장 .229/.327/.484 OPS .811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커리어 최초로 2년 연속 규정타석 달성에 실패했다.

이후 포스트 시즌에는 1군등록에 성공하고 플래툰 방식으로 선발과 대타를 오가며 뛰었으나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는 여전히 부진했고 일본시리즈에서는 초반에 홈런도 치는 등 조금 나아졌으나 막판가서는 또 그냥 그랬다. 일본시리즈 성적은 12타수 3안타, 그리고 6경기중 고작 2경기 선발출장에 그치는 등 팀의 주요전력에서는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래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커리어 두 번째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획득.

2010시즌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1루수 이동으로 인해 사실상 주전자리에서 밀리고, 대수비나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기복있는 플레이로 인해 가끔씩 주전으로 나오기도 한다. 2010년 5월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에서 "6억엔짜리 번트"라고 까였다(...)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벤치의 지시였는지는 모르겠지만.[43]

결국 계속된 타격부진으로 2010년 6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돌았다. 장훈의 말에 따르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할 수도 있다고 했고 한쪽에서는 한국에서 이승엽을 받아주지 않는 분위기라서 은퇴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후 9월초에 잠시 1군에 올라왔다가 3경기에서 5타석 서고 포풍 강등. 9월 말에 다시 1군 등록으로 대타 및 대수비 요원으로 나왔으나, 홈런은 커녕 안타 한 개도 추가 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10년 시즌 성적은 커리어 사상 최악인 5홈런 13타점 타/출/장 .163/.280/.337 OPS.617. (56경기 출장.) 그리고 BB/K 수치가 0.5에도 못미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결국 요미우리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은 요미우리 시절의 이승엽에 대해 분노에 찬 한줄평을 남겼다. "4년 계약에 거액까지 지불했는데 X같은 활약밖에 못했다.(4年契約で大金払って、クソの役にも立たなかったってのもいる)"

2.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했다. 본인은 일본프로야구에서 계속 플레이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44][45] 요미우리 시절에 비하면 많이 삭감된 연봉으로 뛰게 되었다. 영입에 흥미를 보인 구단은 대규모 보강으로 현질을 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알렉스 카브레라와의 재계약이 불투명해서 대체로 싼 1루수 자원을 찾고있는 오릭스 버팔로즈가 꼽혔으며,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뛰게 되었다. 1억 엔도 못넘는 싼값에 계약할 것으로 점쳐졌었으나 의외로 1억 5천만 엔에 인센티브 포함이라는 준대박 계약. 물론 요미우리 시절 받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3년간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대박이라는 평. 등번호는 3번으로 확정되었다. 이승엽이 한 자리 수의 등번호를 다는 것은 처음일 듯.

2011년 4월 13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8회말에 쐐기를 박는 큼지막한 쓰리런을 날렸다. 해설이 백인천이었어야 하는데#

그와중에 대선배이자 자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장훈 선생을 디스하는 발언을 했다. 장훈 선생이 자신을 5천만엔짜리 선수라고 평한것이 너무나 기분 나빴다고 대놓고 디스했는데 정작 장훈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연봉이 5천만엔 정도라면 이승엽을 원하는 팀이 2팀 정도 있다며 한국 복귀도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승엽의 짬밥을 보나 2011 시즌 오릭스와의 계약 내용으로 보나 별로 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5월 7일,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2군에 내려갔다가 보름만에 올라왔다. 여러모로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5월 22일 1군에 복귀한 이후부턴 맹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해줄 몫은 해줬다.

2군 가기 전 0.145 1HR 5RBI 2루타 3개 장타율 0.241 출루율 0.214 OPS 0.455
1군 복귀 후 0.232 6HR 15RBI 2루타 10개 장타율 0.451 출루율 0.305 OPS 0.689
(7월 26일 기준)
에서 보다시피 비율 스탯이 크게 향상됨을 알 수 있다. 1군 복귀 후의 비율 스탯은 요코하마의 4번 타자 무라타 슈이치나 소프트뱅크의 베테랑 내야수(하락세지만 한때 40홈런을 쳐냈다) 고쿠보 히로키와 비슷한 정도. 무라타에 비해 홈런과 타점이 절반인 건 넘어가자

홈런수로만 치면 2011년 퍼시픽리그 외국인 타자중 3위일 정도다. 1위는 같은팀의 아롬 발디리스 (2011년 10월 15일 기준으로 아롬 발디리스 14개 & 이승엽 11개) 2011년 WBC에 적응하게 한답시고 거지같은 반발력을 가진 데드볼을 공인구로 쓰는탓에 전체적으로 타자들의 성적이 대폭 다운된 점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파워쪽에서는 확실하게 살아났다고 해도 될듯.

2011년 9월 20일, 13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부터 이 기세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승엽의 기량이 죽지 않았다는 반증.

그리고 10월 4일, CS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세이부와의 원정 경기에서 세이부의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를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뽑아냈다!! 짱 쓰리런
그리고 이 홈런이 결승점이 되며 CS 진출에 한 발 앞서게 되었다.마지막에 삼진 2개 먹은 건 빼자

그러나 그 다음 날인 10월 5일. 세이부 선발 투수 호아시 가즈유키에게 전날 3번째,마지막 타선 포함, 5연타석 삼진이라는 굴욕과 동시에 4타수 무안타로 그치고 말았다.

10월의 부진으로 한동안 선발라인업에서 빠져있던 10월 14일, 니혼햄과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15호 홈런을 때려냈다. 10월 18일에는 CS 진출권이 달린 시즌 최종전에서 4타수 무안타 3삼진 무안타로 삽질을 해버렸다. 결국 팀도 패배하고 CS 진출 실패, 본인은 타율 딱 2할을 마크했다.

2011년 최종성적은 15홈런 51타점 타/출/장 .205/.267/.385 OPS .652. 덤으로 32볼넷을 얻는 동안 자그마치 121삼진을 당하는 (안 좋은 의미로) 엄청난 BB/K를 기록하고 말았다. 2011년 이승엽의 성적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규정타석도 못 채웠는데 삼진은 리그 5위.

2011년 10월 19일, 이승엽이 국내 복귀를 결정했다는 기사가 떴다. 2012년 시즌부터는 다시 국내에서 이승엽을 볼 수 있을 듯.그런데 친정 팀으로 복귀하면 응원가가 문제잖아 다 필요없어 전용구호 하나면 되는데

10월 21일, 자신의 일본 무대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자신이 가진 실력과 노력을 전부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다고...
후에 일본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멘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래에 서술한 스타일에 나와있듯, 이승엽의 경기 내적인 멘탈은 약한 편이다.

여담으로, 일본 생활을 하며 후쿠오카 돔에서는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고, 만루홈런은 삼성 복귀 이듬해 기록하였다.

2.4. 한국프로야구 2기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옵션 3억을 포함한 총액 11억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그리고 연초부터 팬들에게 빅재미를 선사해주었다.이승엽이 이 링크를 좋아합니다![46]

2012년 복귀 첫해 시범경기 성적이 타율 0.429 2홈런 7타점으로 거포에서 이똑딱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아주 긍정적인 성적이라 수많은 영양사들과 삼성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는 중.

2.4.1. 2012 시즌

전성기 시절의 무시무시했던 폭발적인 홈런, 타점 생산과 엄청난 포스는 많이 사라졌으나, 전체적으로 팀 타선의 중심과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는데, 홈런왕, 정규시즌 MVP, 한국시리즈 MVP, 골든글러브를 받으신 한국인 선수 중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흠좀무.[47]

그리고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하면서 양준혁, 한대화와 함께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8회) 타이의 영예를 안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2.4.2.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타이중 참사를 일으킨 대표팀에서 그나마 몇 없는 자기 역할을 한 야수였다. 홈런은 없었어도 2루타 세 번은 모두 필요한 타이밍에 터져서 왜 자신이 국민타자인지를 증명했다. 1루수 3명 중 제일 나았다는 평. 아직도 어르신이 먼저 나서야겠냐 이대호는 수비 불안을 좀 보여서 까이기는 했지만 이대호도 자기 역할을 충분히 했다. 문제는 이승엽의 새까만 후배였던 김상수......

2.4.3. 2013 시즌

해당 항목 참조.

10년 연속 100안타, 9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고,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때린 선수가 되었지만[48]...

냉정히 말하자면 신인 시절을 제외하고 국내 무대에서 쓴 이승엽의 커리어 로우 시즌. 두 번째 소포모어 징크스

2.4.4. 2014 시즌

국민타자의 완벽한 부활, 이승엽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40-40클럽[49]

복귀 첫 시즌을 상회하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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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 형님도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이가 들어(...) 샴페인을 못 따 무차별 세례를 받고 있는 이승엽

시즌 종료 후, 9번째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KBO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2.4.5. 2015 시즌

개인통산 400홈런, 개인통산 3300루타, 한일통산 600홈런
또 하나의 전설을 써내려갈 것인가?이미 전설이잖아 근데
해당 항목으로

3. 스타일과 평가


상대가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예상하고 해당 코스로 휘두르는 게스 히터.

다른 거포 스타일의 타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스윙도 간결하지만, 일단 배트에 맞은 공은 확실히 멀리 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승엽의 타격기술에 대해 분석한 기사도 많은데, 공통적인 내용이라면 힘보다는 기술로 넘긴다는 것이다. 즉 배팅 포인트시 공의 중간에서 약간 아랫부분을 쳐서 멀리 넘기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또한 유연성이 좋아서 컨디션이 좋을때는 어떤 자세에서도 거의 교과서 적인 스윙으로 배트를 컨트롤한다.

노리고 치는 스타일이지만 공갈포는 아니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타율이 3할을 넘는다. 통산 홈런 10위권 중에 타율이 3할을 넘는 것은 이승엽, 양준혁, 김동주 뿐. 양준혁과 김동주는 홈런타자보단 교타자로 분류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승엽의 3할은 대단한 성적이다. 힘으로 넘기는 타자들이 빗맞춰도 넘겨버리는 능력이 있다면 이승엽은 공의 중심을 때리는 능력 자체가 좋기 때문에 안타나 2루타도 많이 양산을 해낸다. 이에 관해서 정리해놓은 글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공이 왔을 경우 대처력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때문에 변화구 대응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고, 정말 어이없게 벗어나는 공을 스윙하여 스트라이크 판정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직구에 대한 대응력이 낮아지자 일본프로야구에서 분석된 뒤로는 별로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일본 언사이클로피디아에서는 이승엽을 타석에서 춤추는 선수(...)로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삼진이 많은 선수. 다만, 1999, 2002, 2003년에 BB/K가 1 근처로 가거나 1을 뛰어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볼넷이 삼진보다 적다. 이승엽정도의 홈런 타자라면 선구안이 좀 안 좋아도 투수들의 견제 때문에 그만큼 볼넷을 많이 얻어내기 마련인데 삼진 수가 확실히 지나치게 많다. 여기서 견제란 고의사구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어지간히 영점 잘 잡힌 투수가 아닌 이상 다소의 실투가 나와도 가운데로 몰릴 위험이 없는 스트존에서 먼 곳에 던져서 '헛스윙 해주면 좋고 아니면 그냥 볼' 식의 승부를 말한다. 문제는 이승엽의 경우는 이거에 제법 잘 낚여서 배트가 나가버리는 바람에 볼넷이 적고 삼진이 많은 타입이다.

특히 종변화구에 약한 모습을 보이며, 이따금씩 몸쪽공을 잡아당겨서 큰 타구를 만들어내서 많이 가려지는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몸쪽 공에 약하다. 때문에 대 이승엽 투구패턴은 몸쪽 몇개 보여주고 바깥쪽 변화구, 혹은 종변화구로 승부가 거의 정석.

또한 기복이 심하다. 이것은 일본프로야구는 물론 한국프로야구에 있었을 때도 언급되었던 문제점. 즉 타격 감각이 올라왔을 때는 한 경기 2~3개 홈런을 연달아 치면서 홈런 개수를 급격히 늘리는 재주가 뛰어나나, 부진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삼진머신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월별 성적 뽑아보면 한 시즌내에서 좋을때와 안좋을때의 월별 성적이 3할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등 컨디션과 멘탈에 좀 지나치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경향이 있다.

2006년까지만 해도 직구에 대한 대응력이 매우 뛰어났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변화구는 괜찮으나 빠른공 상대타율이 점점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노쇠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요미우리로 옮겨 온 이후 근력 향상을 위해 근육질로 몸을 키우고 유연성을 외면한 것[50]이 역으로 배트스피드 저하와 부상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한때 기승을 부렸던 특정 악질빠들은 이승엽이 유인구보다는 정면승부가 많은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오히려 대활약을 했을 거라고 주장하는데 야구의 시작이 어떤 리그인지를 생각하면 신뢰할 만한 주장은 못 된다.

이렇듯 생각보다 약점이 많은 선수. 이 때문에 일본프로야구에선 분석 + 노쇠화 + 멘탈 문제가 겹쳐 한국프로야구에 비해 많은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좋지 않다는 일본프로야구 성적을 합쳐 계산해본다면 타율, 출루율, 볼넷을 제외한 스탯에서 양준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51]

또한 외국에서 통하지 않는 타자라고 폄하하기에는 국제대회 성적이 지나치게 좋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시작해 국가대표에 꾸준히 뽑혔고, 현재까지 국제대회 통산 홈런 1위는 그의 몫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가장 좋았던 06년을 제외하고는 소속리그에서 타격 스탯이 비율, 누적 공히 홈런을 제외하고는 순위권에 들어간 적이 거의(07년 장타율 리그 9위) 없다. 그 홈런 수도 8년간 159개로 연평균 20개에 가깝지만, 홈런 숫자만 많을 뿐 OPS를 비롯한 비율 스텟은 10위권 안에 들어간 적이 없는 전형적인 공갈포 스타일이었다. 사실 위에 나온 몸쪽공과 바깥쪽 변화구, 횡변화구에 약점이 있다는 내용은 일본 리그에 간 바로 다음해인 05년에 일반인 대상으로 발행하는 스카우팅 리포트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구단 스코어러가 분석한 내용도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공개 되는 서적에 실릴 정도로 약점이 명백하였으나 결국 이를 일본 생활 8년내내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은 단 한번도 팀내 최고연봉자 자리에서 내려온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돈값 한 시즌은 06년뿐이다. 홈런 잘 나오기로 유명한 도쿄돔을 홈구장으로 쓴 것을 감안할 때 요미우리 시절의 활약은 홈런 숫자만으로 가늠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환경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나마 1년이라도 활약한게 어디냐, 국내 타자중엔 그런 사람 없었다 라는 논리가 실제로 가능했지만 이대호라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부상이 없는한 풀타임 4번타자로 꾸준한 활약이 보증된 타자가 등장하면서 이 논리도 성립될 수 없게 되었다.

종합적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하였고, 일본 리그에서는 장타력과 수비력 수비의 사람 에 강점이 있는 공갈포형 타자의 기록을 남겼다.

일반적인 거포 이미지(힘은 좋지만 발은 느린 근육돼지똥차라든지)와는 달리 주루능력도 수준급이다. 컨디션 관리와 부상 방지 등의 이유로라기보단 그냥 넘겨버리면 되니까 도루 횟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주루사가 적고 허를 찌르는 도루도 한 번씩 하는 편.

4. 포지션

잘 언급이 안 되는 부분이긴 하나 수비 실력은 1루수 중에서 초특급 수준. KBO는 말할 것도 없고 NPB에서도 1루 수비 실력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인정 받았는데, 센트럴리그 연속 무실책 기록(1,225이닝)을 가지고 있다. 1루 수비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볼 수 있는 포구나 번트 수비시 숏 바운드 처리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1루 선상수비도 아주 좋다. 다만 왼손잡이 1루수답게 1-2루간 수비는 가끔씩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창 요미우리에서 삽 푸고 있을 때 이승엽이 나오면 '오늘은 수비 위주 라인업'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할 정도.

기본은 1루수지만 커리어동안 딱 2년간 좌익수를 본 적이 있다.

한국 시절에는 1996시즌으로, 당시 전 해의 신인왕 이동수가 부상 이후 복귀하였는데, 원래 3루수였지만 수비가 불안하였다. 고로 1루로 전향을 꾀하였고 이승엽은 1루에서 밀려나 좌익수비를 보았다. [52] 이 때 양준혁도 이승엽과 이동수 때문에 좌익수로 밀려났던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치바 롯데 소속이었던 2005시즌에 좌익수로 기용된 적이 있다. 당시 치바 롯데의 1루수는 1루 전문 스페셜리스트이자 팀의 최고 인기선수였던 후쿠우라 카즈야였는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기도 힘든 게 1년차 이승엽이 워낙 성적이 안 좋았던 반면 후쿠우라는 워낙 수비가 좋은 선수였던데다 그 시점에서 4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타격도 빼어난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승엽은 입단 첫 해부터 주로 지명타자로 나왔는데, 지명타자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좌익수 경험을 살려 이듬해인 2005시즌에는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2012년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해서 지명타자로 많이 나오고 있다. 1루수로도 나오지만 지명타자 빈도가 더 많다. 그러나 2012년에는 웬 모험꾼이 최악의 부진을 겪는 바람에 시즌 중반에 1루수를 본의 아니게 다시 봤지만...[53] 2013년에는 그 모험꾼이 각성한 덕분에 지명타자 출장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5. 야구 관련 커뮤니티의 빠들

이승엽을 지나치게 흠모하여 상태가 안 좋아진 자들을 "승빠"라고 지칭한다. 박찬호의 광팬이었던 박빠에 비해 그 수는 적었으나 질적으로 크게 차이는 없다. 보통 성씨+빠로 원래는 이빠가 되어야 하겠지만, 일본에서 이승엽의 애칭이 짱이기 때문에 승빠로 되었다.

다만 승빠의 특징이라면 일본프로야구선수 이승엽만을 사모했다는 데 있다. 그 근거로 그가 일본에 진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2006년에 대폭 그 수가 늘어났다가, 일본활동을 마감한 2011년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거의 끊어졌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극일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을 격파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이승엽을 추종했으므로 그 원인이 사라진 한국복귀 후 그들이 사라진 것은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2006~2011년 사이 이들 이승엽 광팬(승빠)들의 모습은 대충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의 눈에 비치는 일본야구 동료들은 오로지 이승엽 세 글자를 빛나게 해 주기 위한 조연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했으며,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54] 2007년부터 이승엽의 성적은 아름다운 2군행 하향세로 돌아서는데 이 때부터 평범한 팬들과는 달리 승빠로 분류될 수 있는 극단주의자들이 걸러져 나오기 시작한다.

6. 이야깃거리

  • 개그맨 김제동과 과거 대구구장 장내 아나운서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서 유명 스포츠 선수인 자신의 결혼식 사회를 수 많은 연예인들을 다 뒤로 밀어버리고 당시 듣보잡이던 김제동에게 부탁 할 정도였다. 김제동은 이것을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고마워하며 자신의 결혼식 사회를 꼭 이승엽에게 맡길 것이라고 했다. 근데 2015년 03월까지도 김제동은 결혼 못하고 있다. 다만, 워낙 방송에서 김제동이 이승엽과의 친분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김제동이 이승엽 이야기를 하면 또 이승엽 팔이 하네라고 악플이 달릴 정도로 여론이 좋지 않았고 때문에 김제동이 이승엽을 언급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다만 이 친분 덕에 201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직후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이승엽을 섭외할 수 있었다.

  • 홈런을 치면 라지에타가 터지고 백인천매우 좋아한다 카더라(...)

  • 이승엽은 간첩도 안다.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는 인물이라는 의미로 쓰는말이긴 한데 문제는 진짜 간첩이 본인 입으로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간첩이니 맞는소리긴 한데... 그래서 한동안 개그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해당기사

  • 2013년 6월 23일 LG 트윈스전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시타를 맡았는데 그 이유는 암에 걸린 아버지가 이승엽의 팬이라며 이승엽 선수가 시타를 맡고 자신 아버지가 시구를 하게 해달라고 사연을 보낸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였다. 이날만큼은 승빠, 승까 구분없이 모두 포풍감동이라며 이승엽을 칭찬했다. 해당영상

  • 2012 시즌 후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아내 이송정과 함께 게스트로 출현했다. 때마침 힐링캠프 MC가 김제동이어서 섭외에 흔쾌히 응한 듯.

  • 라이센스 문제로 이승엽의 본명을 야구게임들이 못쓰고 있다. 때문에 장남식, 이태산때 처럼 간혹 본명대신 게임내에서 쓰이는 이름이 별명대신 불리고 있다. 이런 이름중 가장 유명한건 이영웅과 이국민. 누가봐도 국민타자 또는 국민영웅에서 따온 이름인듯 하다. 그러다가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2014년 4월 10일, 마구마구에서는 4월 16일 업데이트로 이승엽 선수카드가 본명으로 전환되었다.

  • 1999년 이승엽이 당시 한국타자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하자 이승엽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이때 이승엽이 양준혁은 이미 타격기술이 최정상에 오른 선배인데도 한밤중에 타격연습을 했다는 일화를 말하며 자신이 가장 많이 본받은 선수로 양준혁을 뽑았다. 당시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 방송을 보던 양준혁은 자신의 유니폼을 입은 대역배우가 한밤중에 배트를 휘두르며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놀랐다가 이 후 이어진 이승엽의 인터뷰를 보며 상당히 뿌듯해했다고 한다.

  • 직 비디오에 출연한적이 있는데 그 노래도 여러모로 레전드(...). 문제의 노래가 바로 거리의 시인들이다.

  • 2014년 5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누워있던 도중 병실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가족들이 티비로 야구 중계를 보고 있던 도중 이승엽 선수의 홈런 소식을 전하던 캐스터의 홈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례적으로 대표이사가 와서 이재용 부회장의 감사인사를 구단측에 전했다.해당 기사 덧붙히자면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두사람 다 야구광이다. 이재용 항목 참고.

  • 프로 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교과서에 실리게 됬다. 진로와 직업이라는 교과서로 오랜 기간 다양한 연령층의 팬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이승엽 선수의 인터뷰를 통해 프로야구 선수의 삶과 직업으로서의 모습 등 정보를 제공하고자 기획했다고 한다.[55]


후에 이 기적(?)을 두고 각종 드립들이 성행했는데 그 중의 백미는 승청가. 출처는 여기. 또한 대내외적으로 국민OO라는 별명이 많이 쓰이는 만큼 국민화타(...), 국민 제세동기라는 별명도 생겼다.

  • 2014년 8월 24일 베이브 루스의 예고홈런에 맞먹는 예고홈런이 나왔다. 베이브 루스의 예고 홈런은 기자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지만 이쪽은 진짜 해당 기사 이날 경기 전 자신을 만나길 소원하던 시각장애 학생 공민서 군에게 큰 선물을 선사했다. 이승엽은 경기 전 이날 시구자로 나선 공민서 군의 시구 도우미로 나섰다. 이후 사인을 해주는 등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공민서 군은 이승엽에게 "이날 경기에서 꼭 홈런을 쳐달라"고 부탁했고 이승엽은 그 약속을 지키며 공민서 군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 이번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종목에서 해설자로 발탁되었다!! 선수시절의 경험담를 잘 엮어 좋은 입담를 보여줄 수 있을지 벌써 뭇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6.1. 이승엽에게 당한 피해자(?)들

이승엽의 경우 유독 매스컴과 팬들의 관심이 뜨거운 선수다 보니 반대급부로 이승엽에게 기록을 허용한 선수가 지나치게 과장되서 부풀려지거나, 반대로 이승엽 때문에 기록을 폄하 당하는 등 본의 아니게 피해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하는 그 피해자 명단

6.1.1. 이승엽의 기록에 의한 피해자

  • 양준혁 : 양준혁 본인이 공공연히 언급했듯이 양준혁은 이승엽에게 밀려 단 한번도 MVP홈런왕을 차지하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다른 비율 스탯에서 항상 1, 2위를 오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에 비해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이는 본인에게 콤플렉스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인지 본인의 선수 시절을 회상할때는 자주 본인이 2인자 였음을 언급한다.
  • 심정수 : 양준혁보다 더 심한 케이스. 현대 유니콘스시절 이승엽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지만 하필이면 현대는 연고지 이전등의 문제로 인기가 없었던 데다[56] 이승엽의 인기가 워낙 높다보니 매스컴에서도 심정수에게 큰 주목을 하지 않았던 것.[57] 이 때문에 사실상 매스컴의 비호를 거의 받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58]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역 당시에는 이승엽에 비해 상당한 저평가를 받았었으며, 은퇴 이 후에는 이 기록마저도 약물 빨이라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2003년에 친 홈런 53개는 2014년까지도 깨지지 않은 역대 단일 시즌 홈런 3위[59]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이승엽의 56홈런과 같은 해에 세워진 기록이라 50홈런 치고도 MVP를 타지 못했다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 박병호 : 이 쪽은 국거박악질 팬들과 기레기들의 비교질 때문에 저평가를 받은 케이스. 오죽 했으면 이승엽이 2014년 목동구장에서 본인도 홈런은 1개 밖에 못쳤다며, 박병호보다 목동에서 홈런갯수가 적은 사람들은 비난할 자격이 없다라고 일갈하기도 했었다. 자세한건 목동드립 항목 참고.
  • 이종범 : 이 쪽은 팬덤간의 감정싸움과 지역드립 때문에 피해자가 된 케이스. 원래 시초는 양준혁과의 비교 드립이었는데 이게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이라는 말 때문에 이승엽한테 까지 번진 케이스. 양준혁과 마찬가지로 두 선수는 애초에 포지션과 스타일이 전혀 다르며, 수행한 역할도 달라 직접 비교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부 팬들의 맹목적인 각 선수에 대한 추종과 이에 대한 비난이 지역드립으로 번지면서 양측 모두 피해자가 되었다. 다만 타격 부문에서는 도루를 제외한 전 부문에서 이승엽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 최형우 : 이 쪽은 당시 삼성의 특수성 때문에 평가절하 당한 케이스. 기본 30, 40 홈런을 때려내던 이승엽이 일본에 진출한 이 후, 전통적인 삼성의 팀컬러인 공격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팬들에게 선동열이 무리하게 불펜야구를 시도하며 팬덤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최형우가 미래의 4번타자로 낙점받자 선동열에 대한 삼성 팬덤의 반감과 기존 클린업 트리오에 대한 향수가 맞물려 이승엽에 비해 임펙트가 떨어진다, 정작 경기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는 삽질하다 경기가 기운 이 후에나 잘쳐서 스탯관리질을 한다, 잘쳐봐야 20홈런 밖에 못친다라는 등[60]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게 되버렸다. 이 비난은 2011년 이대호를 제치고 홈런, 타점, 장타율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나서야 간신히 수그러 들게 된다.

6.1.2. 이승엽에게 기록을 허용한 경우

  • 이정민 : 널리 알려졌듯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아시아 신기록이었던 56호 홈런의 희생양이 되는 바람에[61] 한동안 허용투수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었다. 이 당시 이승엽의 홈런이 워낙 큰 이슈다 보니 이정민이 홈런을 맞는 영상은 당시 수없이 재생되었고, 이 후에도 이승엽의 기록이 갱신될 가능성이 희박한지라 당분간 자료화면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예정(...)
  • 윤희상 : 양준혁이 기존에 세웠던 351호를 갱신하는 이승엽의 KBO 통산 352호 홈런을 맞으면서 역시 피해자가 되버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윤희상의 경우에는 이정민과 달리 기존에도 인지도가 어느정도 있는 선수였고, 이 후에도 좋은 활약을 보인데다, 56호 홈런에 비해 팬들이나 언론의 관심도도 비교적 적었던지라 아예 허용투수가 선수 본인의 이미지가 되버린 이정민 만큼의 피해를 보진 않았다.

6.1.3. 기타 피해자(?)


  • 카와시마 료 : 그란도시즌을 헌납한 투수. 시즌중의 평범한 피홈런 하나에 영원히 고통받는 안습한 피해자.
  • 조인성 : 2002년 한국시리즈에 이어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홈런을 허용할 당시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특히 이 홈런의 경우 전자는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를 견인하는 홈런이었다는 점, 후자는 이승엽이 한국 복귀 이 후 무려 10년만에 한국시리즈에 나서서 홈런을 때려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조인성과 이승엽을 엮는 드립이 인기를 끌었었다. 상바깥, 중바깥, 하바깥. 절정의 삼단바깥양반
  • 이와세 히토키: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하필이면 준결승전에서 이승엽에게 승부의 향방을 가름짓는 결정적인 홈런을 허용하는 바람에 국내에서는 한국의 승리를 견인한 열사 李와세로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세한건 항목 참고.
  • 인지도에서 밀려버린 다른 동명이인들
  • 이송정 : 힐링캠프에서 밝힌바에 따르면 이승엽이 본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전제로 이송정에게 청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엽의 행선지는 다들 알다시피(...)사기 결혼
  • 선동열 : 이승엽에게 와도 자리없다는 독설을 했는데[62], 정작 이승엽은 복귀 후 나이에 맞지않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반면에, 이 시기에 감독으로 선임한 선동열이 타어강과 함께 기아를 웃음후보에 올려놓아서 KIA 타이거즈를 망치면서, 이 발언이 재조명 받아 이승엽이 좋은 성적을 낼때마다 까이게 되었다. 이쪽은 정확하게 말하면 피해자가 된 가해자 내지는 자업자득
  • 와카미 겐신 : 2005년 5월 20일의 주니치 드래곤스 : 지바 롯데 마린스(교류전)전에서 8회 도중까지 퍼펙트 게임 페이스로 호투를 펼치는 중 이승엽을 상대로 3B1S까지 몰리게된다. 안타를 맞느니 볼을 던지고 노히트 노런을 노릴 수도 있었지만 가와카미는 이미 노히트 노런 기록을 보유해서인지 퍼펙트 게임을 목적으로 스트라이크 승부를 했다가 홈런을 맞았다(해당 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W6EptpKggX4). 구단의 첫 퍼펙트 게임 달성은 놓쳤지만 피안타는 위의 홈런 하나뿐이며 사사구 없이 완투 승리를 거뒀고, 동시에 선발 멤버 전원으로부터 탈삼진을 기록할 정도의 보기 드문 기록을 달성했다.[63] 하지만 퍼펙트 기록을 저지 당한 것이 무척 아쉬웠는지 이승엽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고 만난 경기에서 복수성 볼을 던졌지만 또 홈런을 맞았다(해당 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Tqfrk6g96rg).

7. 연도별 주요 성적

  • 타자 기록 아니 이게 무슨 사람의 기록인가 싶다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1995 삼성 라이온즈 121 365 .285 104 29
(2위)
1 13 73 55 0 .458 .354
1996 122 459 .303 139 32
(2위)
6
(2위)
9 76
(3위)
57 4 .477 .345
1997 126 517 .329
(2위)
170
(1위)
37
(1위)
3 32
(1위)
114
(1위)
96
(3위)
5 .598
(4위)
.391
1998 126 477 .306 146
(3위)
32
(3위)
2 38
(2위)
102
(2위)
100
(1위)
0 .621
(1위)
.404
(3위)
1999 132 486 .323 157 33
(5위)
2 54
(1위)
123
(1위)
128
(1위)
10 .733
(1위)
.458
(1위)
2000 125 454 .293 133 33
(2위)
0 36
(4위)
95 108
(1위)
4 .604
(5위)
.404
2001 127 463 .276 128 31
(3위)
2 39
(1위)
95 101
(2위)
4 .605
(2위)
.412
2002 133 511[64] .323
(3위)
165
(2위)
42
(1위)
2 47
(1위)
126
(1위)
123
(1위)
1 .689
(1위)
.436
(2위)
2003 131 479 .301 144 23 0 56
(1위)
144
(1위)
115
(1위)
7 .699
(2위)
.428
(3위)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2004 치바 롯데 마린즈 100 333 .240 80 20 4 14 50 50 1 .450 .328
2005 117 408 .260 106 25 2 30 82 64 5 .551 .315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2006 요미우리 자이언츠 143 524 .323 169 30 0 41 108 101 5 .615 .389
2007 137 541 .274 148 29 2 30 74 84 4 .501 .322
2008 45 153 .248 38 4 0 8 27 21 1 .431 .324
2009 77 223 .229 51 9 0 16 36 33 1 .484 .327
2010 56 92 .163 15 1 0 5 11 13 1 .337 .280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2011 오릭스 버팔로즈 122 394 .205 79 20 0 15 51 28 0 .365 .257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2012 삼성 라이온즈 126 488 .307 150
(4위)
28 2 21
(5위)
85
(5위)
84
(3위)
6 .502 .384
2013 111 443 .253 112 24 0 13 69 62 3 .395 .298
2014 127 506 .308 156 30 0 32
(4위)
101
(5위)
83 5 .557 .358
KBO 통산
(12시즌)
1507 5648 .302 1704 374
(3위)
20 390
(1위)
1203
(2위)
1112
(3위)
49 .582
(1위)
.394
NPB 통산
(8시즌)
797 2668 .257 686 138 8 159 439 394 18 .494 .324
KBO, NPB 합계
(20시즌)
2304 8316 .287 2390 512 28 549 1642 1506 67 .553 추가바람


역대수상
년도 수상내용
1997년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1998년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1999년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2000년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2001년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2002년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2003년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부분 수상
2012년 골든글러브 지명타자부분 수상
2014년 골든글러브 지명타자부분 수상

개인기록
기록 기록내용
단일 시즌 최다 홈런 56개
단일 시즌 최다 타점 144타점
최연소 통산 100 홈런 만 22세 8개월 17일
최연소 통산 200 홈런 만 24세 10개월 3일
최연소 통산 300 홈런 만 26세 10개월 4일
최단 경기 통산 300 홈런 1075경기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 갱신 36세 10개월 2일[65]


8. 주요 기록

1999년
  •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 홈런
    • 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 기존 - 한화 장종훈, 23세 5개월

2001년
  • 대구 한화전, 최연소 통산 200 홈런
    • 만 24세 10개월 3일, 상대 투수 8회 김정수, 기존 - 한화 장종훈, 28세 4개월

2003년
  • 대구 SK전, 세계최연소/최단 경기 통산 300 홈런
    • 만 26세 10개월 4일/1075경기, 상대 투수 8회 김원형, 기존 - 한화 장종훈, 32세 5개월 26일, 1565경기
  • 한 시즌 최다 홈런 한국 최고기록(56개)
2006년
  • 8월 1일 일본 도쿄돔 한신전, 한/일 통산 400 홈런 달성
2012년
  • 5월 8일 사직 롯데전 한/일 통산 2,000안타 달성[66]
  • 7월 29일 목동 넥센전 한/일 통산 500 홈런 달성
2013년
  • 6월 14일 최연소/최단기간 개인 통산 350호 홈런
    • 만 36세 11개월 27일/1320경기, 상대투수 5회 찰리 쉬렉, 기존 - 삼성 양준혁, 40세 1개월 18일, 2057경기
  • 6월 20일 개인 통산 최다 홈런(352개)
2015년
  • 6월 3일, KBO사상 첫 400호 홈런

9. 수상 경력

KBO
  • MVP(1997, 1999, 2001~2003)
  • 한국시리즈 MVP(2012)
  • 홈런왕(1997, 1999, 2001~2003)
  • 타점왕(1997, 1999, 2002~2003)
  • 골든글러브상(1997~2003, 2012, 2014)
  •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2013)

NPB
  •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2005)
  • 월간MVP(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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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KBO 1,704 + NPB 686
  • [2] 1995, 2005 시즌 한정.
  • [3] 2012년 삼성 복귀 이후부터. 다만 이호준, 홍성흔 처럼 완전 풀타임 지명타자는 아니고, 1루수로도 가끔 출장하는 정도.
  • [4] 2003년, 홈런 신기록을 세울때 쓰였던 테마송이었으나, 2014시즌 말에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 [5] 새로운 응원가가 생겼는데 어째서인지 공식 홈페이지에는 너를 태우고 버젼과 자유시대 버젼이 모두 올라와 있다. 두 응원가를 모두 쓰는듯 하다.
  • [6] 아~ 이승엽 삼성의 이승엽~ 아~ 이승엽 전설이 되어라~이미 전설인데? 팬 공모로 만들어진 응원가. 고려대학교의 응원가 '들어라 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도 같은 노래를 쓴다.
  • [7] 삼성 이승엽 삼성 이승엽 날려버려 날려버려 이승엽~(x2) 난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홈런 난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Hey(x2)
  • [8] (둥둥) 이! (둥둥) 승! (둥둥) 엽! (둥둥) 홈런!. 앞의 응원가가 나오기 전에 타석에 서면 응원단장 주도로 실시한다. 현역 중에서는 LG이병규와 함께 유이한 전용 응원구호 보유 선수(더 있으면 추가바람). 실제로 들어보면 그 위엄이 대단하다. 평상시 누구때문에 조용하기로 유명한 삼성팬들의 데시벨이 이때만큼은 정말 대기권을 돌파할 기세로 올라간다.
  • [9] 과거에는 양준혁도 응원가가 아닌 전용구호로 응원을 했었다. 다만 이승엽과는 달리 전주가 구호 사이에 들어가는 방식.
  • [10] 이승엽은 1995년도에 데뷔했지만 이때 신인왕은 1992년에 데뷔한 이동수가 탔다!
  • [11] 그리고 이 기록은 현재 진행형이다.
  • [12] 해외 진출을 선언한 2003년에 구단 측에서 이승엽의 번호를 결번 할 것이라 못박았으며, 2012년 복귀하면서 결번이 해제되긴 했지만 구단에서 은퇴하면 즉시 영구결번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사실상 영구 결번이 예약 된 셈. 현재는 돌 던지는 후배가 이 과정을 밟고 있다.
  • [13] 2003년의 심정수는 53홈런을 쳤으나 같은 해 56홈런을 친 이승엽에 밀렸고, 2014년 박병호는 52홈런을 달성했으나 같은 팀어떤 교수가 사상 최초로 200안타를 달성하는 바람에 수상하지 못했다.
  • [14] 라이온 킹 별명의 원조는 박충식. 다만 이승엽에게 이 별명이 붙은 건 처음으로 홈런왕을 차지한 1997년 이후.
  • [15] 야갤에서는 여기서 파생해 읍민타자, 읍민적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 [16] 사실 이건 2ch 유저의 글이 원본이다. 최근엔 더 작아져서 힉스적 까지도 내려간다(...) 잘하면 갤럭시타자가 되기도.
  • [17] 하지만 이후 타석에 들어선 최희섭이 쓰리런 홈런을 날려버렸다. 이거최? 아니지
  • [18] 다만 그보다 불과 한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김재현, 심정수 등이 선수협에 참가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 [19] 실제로 선수협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삼성 구단에서는 그 당시 이미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이승엽에게 갖은 회유책을 썼으며 이승엽 본인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르겠다"라고 선배 선수들에게 울면서 통화했다는 기록도 있다.
  • [20] 절친한 선후배 관계였던 양준혁의 옹호야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그 강병규조차도 이승엽에게 선수협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비난도 한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 [21] 다만 이 당시에는 이승엽이 사실상 삼성 구단과 짜고 가입한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지만 선수협은 이 후 이승엽을 얼굴 마담으로서 활용했었고, 앞서도 말했듯 선수협 당사자들은 이 당시의 이승엽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 [22] 한 해는 당연히 2006년이고, 나머지 하나는 2005년 또는 2007년. 2005년을 굳이 넣은 이유는 커리어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기 때문에 넣었다.
  • [23] 이 당시 수능 총점은 200점.
  • [24] 이승엽뿐만 아니라 투수 유망주였던 이대호를 타자로 전향시킨 것도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의 작품이다. 이대호도 어깨 부상이 있었다.
  • [25] 사실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던 청룡기 결승전에서는 결승홈런도 쳤었고, 1994년 세계청소년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로만 활약해 홈런상과 득점상을 수상한 바 있다.
  • [26]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했던 이동수가 1루수로 나올 때는 좌익수를 보기도 했다. 또는 양준혁이 좌익수를 서기도 했다.
  • [27] 이것 하나만으로도 백인천 감독은 삼성에서 아주 큰 일을 해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백인천이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야구로 먹고 사는 것의 팔할은 이승엽 덕분이다. 백인천이 이승엽이 홈런칠 때 괜히 요시 그란도시즌이라 외치는 게 아니다
  • [28] 홈런은 9개였지만, 대신 커리어 처음으로 3할을 쳤다.
  • [29] 2012 스카우팅 리포트에 수록된 카툰으로 물론 2011년 모습 한정. 오히려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장성호가 엘지를 저격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었다. 이 와중에 쥐훈인증
  • [30] 이 해 홈런왕을 처음으로 차지했다. 2위는 30개를 기록한 이종범. 이하 굵은 글씨는 홈런왕을 의미한다.
  • [31] 이 해 타이론 우즈가 기존 장종훈의 시즌 41홈런을 경신하여 42개를 쳤다.
  • [32] 타이론 우즈의 KBO 홈런 신기록을 바로 이듬해에 경신.
  • [33] 이른바 "아시아 홈런 신기록". 자신의 KBO 신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움. 이미 전반기 끝나갈 시점에 홈런 40개를 돌파했었다. 다만 2013년에 NPB블라디미르 발렌틴이 57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 타이틀은 발렌틴에게로 넘어갔고 아시아 최초로 60홈런을 돌파하면서 시즌을 마감하였다.
  • [34] 대신 마운드가 약해서, 2001년까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없었을 정도. 특히 1999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때 자기도 홈런을 치며 활약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동갑내기(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빠른 1976년생이므로 1년 선배) 임창용불을 지르면서...
  • [35] 그렇다고 타자가 없던 것도 아닌게 1997년엔 양준혁(30홈런), 신동주(21홈런)가 버티고있었고, 1998년에도 여전히 양준혁이 27홈런을 치면서 뒤를 받쳤다. 1999년, 2000년엔 찰스 스미스(40홈런), 김기태 등이 중심에서 버텼고
  • [36] 2002년에는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로 7경기 11타수 3안타 2홈런 5타점을 기록했고, 2003년 시즌 전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초청을 심정수와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현재의 마이애미 말린스) 받아 주로 후반이닝 대수비로 투입되어 10경기 10타수 2안타 2홈런 3타점을 기록했었다. 그리고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이승엽에 대한 관심은 끊어졌다.
  • [37] 하지만 김성근의 이 발언을 이승엽 본인은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5052681898 #
  • [38] 이후 요미우리로 이적한 후에도 유난히 한신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6년 커리어 하이때는 물론이거니와 2008년 요미우리가 한신과의 13게임 승차를 뒤집고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 중간에 만난 한신전에서 결승타를 치는 등.
  • [39] 2005년에 5위로 B클래스 찍고 가을야구 실패. 2006년에는 4위를 찍었다.
  • [40] 그런데 2006년의 세부스탯을 보면 BABIP가 무려 .351이나 된다.(일본 통산 BABIP .288) 즉, 운이 기형적으로 따라준 전형적인 플루크 시즌이라는 것.
  • [41] 4년 계약이 끝나면 이승엽은 30대 중반에 접어들게 된다. 나이도 나이지만 기복과 멘탈 약점이 뚜렷한 30대 중반의 선수를 메이저리그에서 영입할 이유가 현실적으로 없기도 하다.
  • [42] 특히 이 때 김별명이 최종 후보인선에서 탈락을 해 버렸다. 성적이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특히 김태균 넣으라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래도 김태균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으로 이미 군 면제를 받아서 망정이지...
  • [43] 여담이지만 잘 나가던 2006시즌에 뜬금없이 기습번트 안타를 성공시킨 적이 있었는데, 이 때는 '승짱은 번트도 잘 댄다'며 찬양받았다(...).
  • [44] 사실 삼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와도 자리없다라고 한 당시 삼성 감독 때문에 갈 엄두가 안났다고 한다. 와도 자리가 없다고 하신 분이 만에 하나라도 한 시즌이라도 일찍 물러났거나, 양준혁이 2010년에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2011년에 이승엽 - 양준혁 체제를 삼성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45] 더군다나 선동열의 이 발언도 순화된 버전이라는 점. 당시 선 감독의 반응은 왜 온대요? 걔 여기 와도 자리가 없어요. 식이었다고.
  • [46] 사실 저건 일종의 낚시이다. 저 글에 있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바로 자기 담벼락에 링크되는 종류인데 그 말인즉슨 일단 저건 눌러봤단 소리.송정아 이거봐
  • [47] 외국인 선수까지 포함하면 타이론 우즈도 있다.
  • [48] 그동안 친 352개의 홈런 비거리는 무려 41.225km라고 한다. 이승엽 마라톤은 어디까지?
  • [49] 8월 21일 "7~8년만 젊었어도 병호와 해볼만 했을텐데..."라는 기사에 "아이고 성님 욕심도 많으요 ㅠㅠ 이러다 나이 40에 40홈런 날리시는거 아니우?"라는 덧글이 올라오자 달린 반응 중 하나(...)
  • [50] 역시 FA로 거인으로 온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겪었던 테크트리이다.
  • [51] 기존에는 안타가 양준혁을 못 넘는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승엽은 2014년 시즌 중에 이미 한일통산 2360안타를 넘었다.
  • [52] 1995시즌만 놓고보면 이동수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인데, 95년 이동수는 22홈런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승엽은 13홈런.
  • [53] 이 상황에서 1루 백업으로 선택된 선수가 강봉규. 딱 기대치만큼의 1루 수비를 보여주긴 했다.
  • [54] 이 때문에 이승엽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베 신노스케가 많은 호감을 얻었다.
  • [55]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3014250&redirect=false&redirect=true
  • [56] 오죽 했으면 2003년, 이승엽과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며 각종 스탯에서 무쌍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전에 팬 투표로 못뽑혀 감독 추천 선수로 참가하는 굴욕을 겪었었다.
  • [57] 사실 지금의 심정수에 대한 평가도 현역 시절보다 오히려 은퇴 이후에 더 좋아졌다고 봐야 한다. 현역 시절에는 이승엽에 묻혔다가 오히려 은퇴하면서 당시의 기록들이 재발굴 되고 재평가 되었기 때문.
  • [58] 오죽하면 은퇴 직전 도박 사건이 터졌을때 심정수가 범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 해명기사를 제대로 쓰는 기자조차 없었다.
  • [59] 사실 1,2위 기록이 모두 이승엽의 03년도 56호, 99년도 54호라 개인으로 따지면 2위
  • [60] 이 부분에 있어서는 최형우가 특히 억울한데, 최형우가 활약한 시기에는 2009년을 제외하고는 KBO 전체적으로 투고타저의 영향이 심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 때문에 최형우가 20개 정도의 홈런을 때렸다고는 하지만 정작 리그 전체로 보면 2008년에는 5위, 2009년에는 공동 11위, 2010년에는 공동 6위에 해당할 정도로 좋은 성적이었다. 이승엽처럼 압도적인 1위를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를 심하게 당한 셈.
  • [61] 하필이면 이날 이정민은 프로 데뷔 첫 승을 거뒀었다. 때문에 첫 승에 대해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축하 대신 이승엽의 들러리로 한동안 언론매체에 의해 격하당해야 했다는 점은 그야말로 비극이라 볼 수밖에..
  • [62] 이 발언을 접한 이재용 부회장은 대노하여 해넘기기 전 직접 경질해버렸다! 삼성그룹은 이재용부회장부터 오푼이빠돌이다!
  • [63] 출처 : 위키백과 가와카미 겐신 항목(http://ko.wikipedia.org/wiki/가와카미_겐신)
  • [64] 이해 KBO 최다 타석인 607타석에 들어섰다.
  • [65] 352호로 갱신, 이후 이승엽이 치는 모든 홈런은 한국 프로야구 최다 홈런
  • [66] 기록의 50%이상을 KBO에서 기록한 선수기준으로 네번째. 현재 국내 최고기록은 양준혁의 2318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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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6-03 22: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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