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러시아 혁명기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극히 꺼려(이는 트로츠키와 매우 대조적이다.) 눈에 안띄는 인사였던데다가, 러시아어에도 서툴렀기 때문에, 말많고 논쟁을 즐겨하던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조용한 사람", "말 없는 사람"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랬기 때문에 10월 혁명 이전에 그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훗날 그의 가장 큰 정적이 되는 트로츠키조차도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눌함의 아래 이글이글 불타는 권력의지가 숨겨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어눌함은 다른 혁명가들이 그를 과소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그는 경계를 받지 않고 수월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10일>에서도 겨우 두번 이름만 언급될 정도이다. 이에 반해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에프는 거의 매장마다 언급되는데,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트로츠키가 더 많이 나왔다고 이걸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한다. 참고로 이 책은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준 책이다! 어쨌든 스탈린은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원체부터 일덕후였기 때문에 막후에서는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지만... 애초에 레닌에게 인정 받은게 말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 비해 말 수 적고 과묵하며 근면성실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록 중 상당수는 나중에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의 공개적인 디스의 영향이기도 했다. 트로츠키가 한 일에 비해서 스탈린은 정말로 피래미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가 늘 주장했고 그가 쓴 스탈린 전기처럼
잉여인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스탈린. 괜히 레닌이 말년에 서기장을 준게 아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잡고
적백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는 한다.
사실 적군의 평균이 막장이라서 더 돋보임 그는 내전 초기에 남부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백군의 반격으로 볼가강 인근의 차리친, 후의 스탈린그라드가 될 도시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심어둔 구 제정 출신 장교들과 불화를 빚었고, 몇몇을 경질시키고 체포한 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모스크바의 트로츠키는 이런 스탈린의 행동에 격노하였고, 스탈린-보로실로프 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이 문제를
레닌에게 직접 가져가기에 이른다. 레닌은 스탈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보로실로프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트로츠키의 불만을 잠재웠다.
거기에 갓 건국되어 영토욕에 불타는
폴란드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탄 소련을 침공해온
소련-폴란드 전쟁 때, 그는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서 직접 전선을 지휘하다가 폴란드군에게 역관광당해 대패했고, 이 때문에 소련측에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측으로 흐른다. 이때,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졌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스탈린은 처형과 암살로 복수하였다.
이후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 문제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다른 혁명가들은 그를 거의 경계하지 않았다. 제도적으로 당에서 가장 높은 서기장직까지 별 반대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실질적인 최고지휘자였던 레닌은 1919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단 스탈린은 이 때 소수민족을 너무 억압해서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아마도 당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레닌이 유일하게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보고 스탈린 지휘하의 당의 미래를 예측한 사람인 것 같다.
예지력 대장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써놨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제2의
나폴레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당내 유력주자들의 견제를 받았고, 스탈린이 사임하면 그에게 총서기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이 후에 스탈린의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
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
스탈린에게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이 아니고서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 장점이 없는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 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할 정도.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란 인상을 주었다.
당시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피폐했던 소련인들은 다수가 타국의 혁명에 간섭하려던 트로츠키 노선보다는 다른 나라 일에는 일단 거리를 두면서 소련의 독자발전을 구상한 스탈린 노선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가 주장한 국제주의는 너무나 공상주의적이었고 자칫했다간 서방 각국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탈린의 "밥먹고 합시다" 노선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트로츠키가 하필 스탈린의 음험한 권력욕이나 잔인한 노선을 비판하며 후계자 지명을 하지 않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레닌의 서찰을 공개하지 않았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 독재국가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절대 스탈린을 후계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스탈린이나 스탈린 편을 드는 혁명동지들을 물리적으로 말살할 기회를 잡지 않았고, 그 사이 여기저기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나 레프 카메네프 등의 여러 인물들에게 손을 뻗친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트로츠키를 조지려고 마각을 드러낸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하필
사냥 나갔다가 앓아누웠다. 몸져누운 트로츠키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트로츠키를 극좌 모험주의자로 낙인찍을 수 있었다.
권력항쟁 과정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지만 교활하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세계 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바보스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의 동맹 지노비에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물론 지노비에프도 후에 숙청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하기도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하며 근본적으로 부정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오히려 트로츠키를 암살한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지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지노비에프-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하나, 지노비에프나 카메네프는 스탈린보다 훨씬 혁명가적 커리어가 높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만만히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즉 이들은 자신의 유일지배체제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다시 이번에는 떠오르는 우익반대파의 니콜라이 부하린과 손을 잡고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권력에서 몰아내었다.
이후에 트로츠키가 자신을 우익적이라고 디스질하면서 사용했던 논리를 그대로 부하린에게 적용해서 비판을 가했고, 부하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당내의 유일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투쟁과정에서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과소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