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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last modified: 2015-03-26 14:17:28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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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작전명
Operation Detachment(분리 작전)
날짜
1945년 2월 19일 ~ 1945년 3월 26일
장소
일본 이오지마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미국 일본
지휘관 홀란드 스미스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병력 70,000명 22,060명
피해 규모 6,821명 전사
19,189명 부상
21,844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 사상자보다 많았던 유일한 전투.


Contents

1. 배경
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의 대비
2.2. 미군의 대비
3. 전투의 경과와 양측의 피해
4. 이야기거리


1. 배경

World War Two: Iwo Jima 1945 Part One
이오지마는 원래 별 볼일 없는 손바닥만 한 화산섬이었지만, 사이판 점령 이후 중부 태평양에서 미국해군이 진격하자 이에 일본군이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여, 일본 본토 폭격을 목적으로 이오지마를 지나가는 B-29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경보를 해줄 수도 있었으며, 또한 지리적으로 볼 때 일본 본토 바로 앞의 전진기지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고 미군도쿄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B-29 폭격기들을 위한 비상 활주로를 만들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섬이 필요했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이오지마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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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는 이전까지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육군 중장의 전술에 기인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이오지마 방어가 강요된 자살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희생을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쿠리바야시가 구상한 방어 전술은 장기 방어전을 통해 최대한 미군의 희생과 출혈을 강요하여 본토에 시간을 벌어주면서, 한 편으로는 일본 본토 상륙을 눈 앞에 둔 미군에게 이오지마에서 지옥을 보여줌으로써 상륙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주어 일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쿠리바야시는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엄격히 금지하고 가능한 오래 병력을 유지하면서 집요하게 전투를 지속하기 위한 지침들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숙지시켰다. 이오지마 전투에 대한 그의 구상들은 절반 정도는 유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불행히도 이오지마에서 학을 뗀 미국이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에서 한결 개운해지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쿠리바야시의 새로운 전술 탓에,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인 해안 상륙 시점부터 미군은 전혀 낯선 전황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때까지 일본군은 해안선 방어를 할 때 '군대는 상륙하는 그 시점에 가장 방어가 취약하다.'는 논리를 따라 상륙정이 다가오는 동안 해안선 가까이에 대기하다가 적군이 상륙하면 바로 그때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공수 양측의 물량과 화력이 어느 정도 비등하다는 전제가 있을 때의 얘기라는 것. 태평양 전역 곳곳에서 전력을 줄줄이 말아먹고 본토마저 위협받는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을 압도하는 물량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상륙하는 시점이 취약한 건 사실 맞는데, 미군은 이미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호되게 데인 이후로는 상륙에 앞서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함포를 이용한 상륙준비포격[1]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시킨 후에 상륙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일본군은 해안선에 올망졸망 모였다가 사이좋게 포탄밥이 될 뿐이었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이런 해안선 방어전술의 문제점을 곧바로 파악했다. 그는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신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지하터널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이 방어진지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2] 그리고 일본군의 고질병 반자이 어택을 금해 쓸데없이 나가 죽기보단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서 저항하도록 명령했다.[3] 그 결과 미군은 이오지마에서 이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쳐왔던 것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펠레리우 전투에서의 일본군도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군을 괴롭혔지만, 펠레리우 전투 자체가 워낙 유명하지 않다 보니 이 쪽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2. 미군의 대비

미군이 애를 먹은 전투에서 늘상 그래왔듯이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점령에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을 것으로 또다시 오판을 하고 말았다. 심지어 펠레리우 전투를 겪고 나서도!! 다른 일본군들 같이 이오지마의 일본군도 상륙시점에 총공격을 가하고 바로 그 저녁에 야음을 틈타 남은 병력을 모두 반자이 어택에 사용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것만 견뎌내면 남은 것은 미군의 일방적인 소탕만 남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해병대가 상륙할 때 일본군은 전혀 공격하지 않았고, 병사들이 다가올 반자이 어택에 대비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지하 벙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본군의 총공격은 다음날 홀랜드 스미스 장군과 미 해병대원들이 해안선에 모두 상륙하고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는 그때, 모든 병사들이 해안선에 모여 발이 푹푹 빠지는 화산재같은 모래에 발이 묶인 바로 그때 시작되었다. 미군 사상자의 대부분은 이때 나왔다고 알려져있다.

3. 전투의 경과와 양측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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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의 인적 물적 손실이 얼마나 막대했던지, 개전 첫날에만 미 해병대 2,500여명이 전사 및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당시 전황보고를 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쪽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21,000명의 이오지마 수비대 중 살아남은 사람은 1/10에도 못 미쳤고, 그나마도 태반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로 학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미 해병대가 철저하게 일본군 수비대를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동굴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공병대가 TNT로 동굴 내부를 싹 쓸어버리거나 불도저로 동굴을 메워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이런 지옥을 겪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고, 이미 잔혹한 풍경에 넌더리가 났기에 포로 학살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처음에는 누구도 이런 지옥도가 펼쳐질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심지어 해군 수병들과 해병대원들은 "1주일 만에 끝나겠지? 저런 별볼일 없는 섬 따위... 일본 애들도 얼마 못 버틸테고 말이야." 하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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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비대는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으며, 미 태평양 함대는 함포, 함재기 공습을 총동원해 몇 달씩이나 이오지마를 두들겨서 섬의 모습이 연기에 감싸여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8인치 함포에서 20mm 기관포까지 모두 동원해 섬이 박살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부어댔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실 이오지마로 배치받은 것도 "포로는 없다. 모두 싸우다가 죽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일본군도 악착같이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러나 누가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을까.

여기에 상륙부대 지휘부는 원활한 상륙작전을 위해 해군에게 7일간의 상륙준비포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해군은 전함의 주포탄 적재량 문제로 인해 난색을 표하였고, 이로 인해 함대사령부와 상륙부대 지휘부가 서로 떽떽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4] 결국 상륙준비포격은 3일 남짓 이루어졌고 그대로 상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상륙부대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도 있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이 지하터널을 워낙 잘 구축해서 별 효력이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는 전투는 끔찍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미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는 최초로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피해가 컸던 전투였다. 물론 미군의 인명피해는 부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는 기존까지 미군이 겪지 못한 뼈아픈 참사였다. 물론 일본군 자체는 전 병력이 전사하다시피하여 사실상 궤멸했지만. 전병력 11만명 중 미군의 전사자는 6,821명, 부상은 19,189명에 실종이 494명이었다. 일본군은 21,000명 가운데 216명만 남고 전원 전사.

이 전투에서 뜨거운 맛을 본 미군은 연이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상륙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자 방어 시설이 잘 되어 있을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히로시마원자폭탄을 떨어트리는 결정을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4. 이야기거리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총 27명의 사람들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해병대 23명, 해군 4명에게 수여되었으며 이 중 13명은 사후 추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틀어 해병대에서 수여받은 명예 훈장이 82명인데 약 28%의 비율이다. 심지어 전사자들 중에는 더 퍼시픽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존 바실론 중사처럼 이전에 명예 훈장을 받고 다시 실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 그만큼 이오지마 전투가 매우 격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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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 쯤 본 기억이 있을 사진이다.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다. 왼쪽부터 아이라 헤이즈, 프랭클린 사우슬리, 존 브래들리, 할론 블럭, 뒤에 잘 보이지 않는 두명은 마이클 스트랭크, 렌 개그넌. 이후 마이클 스트랭크, 프랭클린 사우슬리, 할론 블럭은 이오지마 전투 중 전사한다. 원 제목은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통칭 '아버지의 깃발'.
원래는 더 작은 깃발을 먼저 세웠지만, 사진에 찍힌 것은 후에 좀 더 폼나게 더 큰 깃발을 세우는 장면이다. 맨 처음 새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는데 해병대 대대장은 이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자!"라고 해서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 조 로젠탈이 찍은 이 사진은 퓰리처 상을 받았다. 사족이지만, 로젠탈이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깃발 세우는 연출을 반복시켰다는 카더라 통신이 우리나라에서 꽤나 나돌았다. 지금은 사진을 찍을 때 같은 곳을 촬영한 영상이 있고 회고록과 증언 등이 나와 사라진 상태.
여담으로 맨 오른쪽 할론 블럭의 어머니는 미국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해병대원을 자신의 아들로 한눈에 바로 알아봤다고 한다. 정부에서 초기 발표시 다른 사람으로 발표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18개월 후 의회조사 결과 할론 블럭 본인으로 밝혀졌다.

위 사진의 주인공들이다.

마이크 스트랭크
1919년생, 체코 출신. 해병대 보병중사.
1945년 3월 1일 이오지마에서 박격포 포격을 맞고 전사.

할론 블럭
1924년생 텍사스 출신
1945년 3월 1일 마이크 스트랭크가 전사하자 분대지휘을 맡지만 그 역시 스트랭크가 전사한 지 수 시간만에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

프랭클린 수슬리

1925년생 켄터키 출신
1945년 3월 21일 이오지마에서 전사.

아이라 헤이즈
1923년생 애리조나 출신. 피마 인디언 출신으로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전사한 군인들이라 말했다고 한다. "45명의 소대원 중 단지 5명만이 살아남고, 250명 중대원 중 27명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영웅이겠는가?" 또한, 그는 저 깃발이 꽂힌 날 상륙했으므로 역사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몰라도 전투에 영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국채 판매고를 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더 안습인 것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으나. 그 대신 군복을 입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 이 이야기를 2013년 6월 23일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1955년 애리조나에서 알콜 중독으로 사망.

렌 개그넌
중대 전령으로 저 사진에 나오는 깃발을 산 정상까지 가지고 올라간 인물이다.
1925년 뉴햄프셔 출신.
1979년 사망.

존 브래들리
해군 의무하사. 자신들이 영웅이라는 사람들 말에 그는 "우리들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지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깃발 게양자들 중 가장 오래, 가장 좋게 최후를 맞은 인물.
1923년 위스콘신 출신.
1994년 사망.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에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고,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이 병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국채 판매의 광고판으로 써먹으려 했으나,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앞서 말한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대원들만 본국으로 송환됐다.

여기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은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모두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오지마가 점령됨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습할 B-29의 최전방 기지이자 피격기, 혹은 재보급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를 얻게 되었고, 점령 이후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을 가하게 된다. 미군의 이오지마섬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오지마 점령 이후 오키나와 공략전 전진기지의 획득과 함께 기존에 티니안이나 사이판에서 B-29 폭격기의 항속거리 문제로 인한 폭장량의 제한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손실되는 B-29 폭격기나 승무원의 희생이 줄어들게 되었고[5],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기의 공습을 경고해줄 수 있는 경보망이 무너져버려 본토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특히나 피격 및 기체 고장으로 불시착하는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 섬 덕분에 구원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섬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다만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이라고 해서 전사한 해병대원들보다 목숨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은 아니므로,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의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필수적인 전략 거점이라는 점도 있고 본토 상륙에 교두보이자 진격할 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점령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강하다. 처음부터 핵을 쏘지 않는 한 통상작전으로는 반드시 공략해야 했을 것이다.

전투의 처절함 때문에 흔히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가공 매체의 주요 무대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전쟁 영화에 비해서 더더욱 반전 성향이 강한 작품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소설 아버지의 깃발과, 쿠리바야시 장군이 집으로 보낸 편지를 묶어서 쓴 책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그리고 소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기반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 영화와 동시에 찍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등.


한편 이 전투의 처절함에 빗대어 이글루스이오공감을 이오지마라 부른다. 물론 이쪽은 비꼬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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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위엄 쩌는 파괴력으로 탱크와 비행기 잘 잡아먹기로 유명하던 독일의 88mm 포도 인치로 환산하면 3.46인치 정도 된다. 이 전함들이 구식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식하게 9문 12문씩 탑재하고 다니는 12~16인치 대구경포의 파괴력은 지상공격용으론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155mm(6인치 좀 넘는다.) 곡사포의 살상반경이 50m 정도인데, 그 포탄 8개 부피를 차지하는 전함 주포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가령 미국의 전함 테네시의 14인치 함포의 별명은 '수영장 제조기'였다. 한 번 쏠 때 마다 수영장만한 웅덩이가 파이니까(...) 게다가 대공용 부포로 5인치(127mm)를 달았다.
  • [2] 물론 화산섬이라 유황가스가 많아 한팀당 10명이 십여분 간격으로 뛰어들어가 공사를 하고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해야돼서 전투 당시 원래 계획의 80% 정도 완성되었다.
  • [3] 이런 전술은 후일 오키나와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 [4] 아버지의 깃발에서 통신기를 들고 포격 더 안 해주면 해군 너님들도 어디 못가고 여기 발 묶인다면서 떽떽거리던 장면이 이 부분이다.
  • [5]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미군이 이오지마 섬을 함락한 직후, 곧 엔진이 파손된 B-29 폭격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간신히 착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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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6 1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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