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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last modified: 2015-04-08 20:44:28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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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의 모습.

이 항목은 264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너무한 거 아니냐

참혹한 시대 속에서도 초인적 의지를 잃지 않은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년 4월 4일 ~ 1944년 1월 16일). 대한민국의 저항시인.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 5월 18일(음 4.4)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연보

어린 시절 조부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별세하던 무렵 보문의숙(도산공립보통학교로 바뀜)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의 창작 활동에서 한학의 흔적을 보인다.[1]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 이육사의 이름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2] 출옥한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1933년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곤강(尹崑崗) ·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둘째동생 이원창이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1968년에는 안동시에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2004년에 이육사 문학관이 세워졌고, 안동시에서는 안동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했다.

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만 17번) 채워진 덕분인지 그는 윤동주와 함께 항시인으로서 평가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그의 시를 평가하자면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40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동생인 이원조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한다. 물론 박헌영과 더불어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이 있지만 1955년경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육사도 해방 이후까지 살았으면 말로가 편치 않을 듯. 이육사 생전에 작품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이원조가 광복 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청포도>, <꽃>이 있다. 의열단에 가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도산서원 근처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 가면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씨(1941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운이 좋아야 한다. 문학관 뒤편에 사신다. 2013년 11월 3일 안동대학교 선비캠프에서 도산서원 방문 뒤인 다음날 이육사문학관 관람과 더불어 이분을 만나서 인생 및 이육사의 딸이라는 위치 등등 여러 이야기를 강연하셨다.정작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절반이 잠잔 게 문제지만(...) 2007년부터 이육사문학관에 오셔서 살기 시작하셨다고.

1980년대 TV 문학관 KBS 특집극 저항 문인 시리즈 3부작[3]에서 방영된바 있다.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을 열연한 김흥기 씨의 투사적인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

2011년, 8.15를 맞이하여 이 분을 소재로 한 특집극이 방영되었다. 제목은 "절정". 주연은 이 분김동산. 배우들의 호연과 세련된 연출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2년, 어떤 회사에서 이 분에 대한 뮤지컬을 제작했는데, 드라마와는 달리 매우 질이 낮아 흥행에 실패하였다. 이곳에서 제작했던 알라딘은 회당 4천 9백만 원이 들었고 뮤지컬 이육사는 회당 1억이 넘게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이육사 시인이 알라딘에게 밀리다니. 알고보니 어떤 회사의 사장님과 오누이 하는 어떤 분이 입찰 한 달 전에 회사를 설립하고 그분이 혼자서 회사대표, 예술 총감독, 여자주인공을 다해 드셨다고 하더라..... 그리고 노조에 의해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에서 고인드립급의 장면 그리고 여자 주인공의 랄 한 가창력, 말도 안 되는 개그와 내용으로 이육사 시인을 폄훼했다고 폭풍 까이고 있다. 또한 그 회사의 파업과 함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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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청포도>에서 마지막 연에서 '아이야'라는 구절과 같은 것.
  • [2] 하지만 이건 어떤 강사가 이육사의 호를 잘 외우게 하려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외워!"라고 알려줬다는 설도 있다. 즉 확실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수인번호가 264번이어서 ‘이육사’라고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 [3] 1부는 이상화 편으로 백윤식이 열연했고 2부는 윤동주 편으로 송승환이 열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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