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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last modified: 2015-03-13 20:12:07 by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1.1. 개요
1.2. 생애와 사망
1.3. 조선 최고의 천재 중 한 사람
1.4. 붕당 정치에 휘말리다
1.5.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
1.6. 경장론자
1.7. 성리학의 완성
1.8. 고향 및 출생지에 관한 정체성
1.9. 트리비아
2. 춘추말기의 사상가로 전해지는 노자의 본명
3. 오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4. Drakedog의 길드 'EE(Evil Empire)'의 구호
5. 井伊, 일본의 성씨
5.1. 실존인물
5.2. 가상인물
6. Yee Yee(..)

1.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youlgok.jpg
[JPG image (54.42 KB)]


李珥
호는 율곡(栗谷).
1536~1584.


1.1. 개요

현모양처로 유명한 신사임당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걸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본명은 외쳐이이(李珥), 호는 율곡(栗谷).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 신사임당의 초상이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에 쓰이면서, 이 모자는 한국 최초의 모자 지폐 인물이 되었다. 붕당정치에서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물론 생전에 그의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그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1.2. 생애와 사망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1]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외가인 강릉을 떠나 본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자랐으며 154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의 제자로 공부하게 되었다.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게 되었고 22세 때 성주목사의 딸인 부인 노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으며 정6품 호조, 예조와 이조 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치고 14대 왕 선조 재위 1년에 의 사신으로 방문을 하였다.

1581년 임진왜란이 올 것을 예지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동인파의 탄핵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했다가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가 1584년 49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에서 운명(殞命)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 법원읍 자운서원에 있으며 율곡과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사임당, 그리고 부인 노씨가 한 곳에 안장되었다.

1.3. 조선 최고의 천재 중 한 사람

과거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렸다. 파워 9반수생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진사과(소과) 초시→생원과/진사과 복시→문과(대과) 초시→문과 복시→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율곡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시험인 별시[2]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고시의 1, 2,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이상의 대업적이다.[3]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율곡이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생원과 초시 : 29세
생원과 복시 : 29세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진사과 복시 :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하고 합격) 그때 장원한 사람은 대체 누구냐
대과 초시 : 29세
대과 복시 : 29세
대과 전시 : 29세
특별시 : 23세

율곡이 장원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것은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다. 율곡은 24세에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율곡을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책을 볼 때 무려 10줄한 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4][5] 그런데 사실 율곡이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는 학습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뛰어난 사상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성리학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빼어난 통찰력으로 심화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율곡처럼 뛰어난 학습능력을 지닌 이는 조선시대에도 의외로 좀 있다. 하지만 율곡처럼 학문으로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는 극히 드물다. 이 점이 율곡이 그들과 다른 점이다. 최소한 희대의 천재라면, 율곡정도의 업적은 남겨야지.. 공부 좀 잘 한다고 천재라니..어이상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십만양병설의 진위 문제와 함께 서인의 거두로서 이이의 신격화 작업의 일부였다는 점을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러번 과거를 응시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이 많이 존재한다.

아명은 현룡, 혹은 견룡. 어린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절에서 머리 깎고 수양했던 적도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를 공부했다고 한다. 삭발까지 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6] 그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고 감탄해했다고. 그 뒤 우연히 다시 읽은 유교서적을 읽고 하산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집중 타깃이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쓰고있는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중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오는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왕따를 당했다고 하고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식례도 심하게 당했는지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다만 면식례는 원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다. 심지어는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 급제하고 치른 면식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었다(!).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면 당시 일반 가문출신인 이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심했을 것이다.

화담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7]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에 의해 크게 떠받들어졌으며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그런데 그의 이론은 현대의 평범한 학생과 시민들에게는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기 힘들다. 덕분에 이황과 더불어 전국의 윤리를 택한 문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지탄의 대상(…).[8]

1.4. 붕당 정치에 휘말리다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키며[9]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였다. 이 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2년)에 있었던 을해당론 (乙亥黨論).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보내버린 것.

그러나 극단적인 무리 가운데 끼이면 결국 중간층은 탄압을 받는 법.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고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해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립이었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아이러니를 만들기도 한다. 실제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사실 심의겸은 학파를 형성하지 못했고, 이이가 보호를 해주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심의겸은 김효원에 대립되어서 동서분당의 원인으로 언급될 뿐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다. 이건 김효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서경덕,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유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인 동인들에게는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인 반면 훈구들의 우호적인 기존 사림들에게는 이에 맞설만한 사상체계를 이룩한 거유가 없었던 서인들은 환호하며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재 등 이이는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29세로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장원 자리 노리고 과거 판에 뛰어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단적으로 이이는 진사과 초시와 복시에만 2번이나 응시했다.)그야말로 양민학살하는 수준(...),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는 삼사의 탄핵사유를 만들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이이는 실록을 보면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선조 초년에 관직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이 기록을 살펴보면 이황, 이언적, 권벌, 이준경, 기대승이 두루 다 까였다.모두까기인형 특히 기대승,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는데 특히 이준경은 을사위훈 삭제 문제로 대립하여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대놓고 까버렸다. 자신을 추천한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깠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황의 학문은 다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이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가 김성일이 발끈해서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말할 수 있겟습니까?"라고 반박하기도 했고, 이황의 또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게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 조선 모슨 벼슬아치들의 말살을 목표로 저랬을지도 모른다.

또한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했다가 그 제자이자 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10]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거의 혐오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여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다.

어찌됐든 간에 붕당정치의 최후의 승리자는 이이가 되었다.

1.5.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은 뒤, 이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11].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 십만양병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6조는 있으나 10만이라는 구체적 숫자의 언급은 전혀 없다. 십만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신격화하기 위해 짜맞춘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우선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6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10만이라는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 당시의 수많은 유사한 의견들과 같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봉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실록과 이후의 글들은 모두 이 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봉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그 시기에는 율곡이 상소를 올린 기록 자체가 없으니 그나마 비슷한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작위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김장생의 율곡행장에 영향을 받은 책은 역시 서인인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유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등이다[12].

다만 유몽인은 북인이었고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수가 없는 것[13]인데, 사실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이야기는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문성으로 된 것은 개찬자의 과잉충성 아니면 무식탄로급.

그리고 그때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간과한 주장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 세제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개혁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싸움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문제다. 그리고 분야는 다르지만 서양에서도 yee런 추종세력이 생기고있다.

1.6. 경장론자

이이의 저서인 성학집요를 보면 왕조의 변천사를 창업 - 수성 - 경장의 3가지로 분류했다. 창업은 요, 순, 탕, 무의 덕을 갖추고 개혁해야 할 시대를 만나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해야 하므로 논할 필요가 없고, 수성은 성왕과 현명한 재상이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다스릴 수 있는 도구를 모두 갖추고 예약을 훌륭하게 하면,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이걸 따르기만 할 뿐이라고 하였다. 경장은 나라가 세워진지 오래되면 초기에 새웠던 정책과 제도가 본래의 뜻을 잃고 폐단이 발생하게 되므로, 밝은 임금과 총명한 신하가 나라의 뼈대를 다시 세우고 묵은 폐단을 고쳐서 공적은 선열에 빛나게 하고 사업은 후손이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수성은 중간쯤 가는 평범한 임금 (中主)과 자리만 채우는 무능한 신하 (具臣)라 할지라도 할 수 있지만, 경장은 높은 견해와 빼어난 재주가 필요하므로 더 어렵다고 적고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무너지려고 하는 집을 가진 집주인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쓸 재목을 구하려 것이라는 예시를 들어 경장을 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이는 당대의 조선이 창업과 수성을 지나 경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정, 군정, 환곡, 공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책을 내놓았다. 훗날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대공수미법 [14]이 대표적인 예.

1.7. 성리학의 완성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킨다. 성리학을 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15]. 둘이 이기론을 만들었고 이후의 조선 모든 붕당은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과거에서 성리학을 토대로 한 답변을 정답으로 쳤지만 양명학등 다른 학문도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다면 정답으로 친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로 간주되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의 학문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나 이후 붕당이 변질되면서 당파싸움이 격해지는 한계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이 둘이 바라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을 주창한 두웨이밍 교수는 한국의 1천원 지폐와 5천원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유학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링크

1.8. 고향 및 출생지에 관한 정체성

흔히 세간에서는 율곡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율곡이 강릉 오죽헌에서 사임당 신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율곡의 본가는 강릉이 아닌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강릉은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태어났던 고향이었으며 율곡에게는 어머니의 친정, 즉 외가가 있던 곳으로 사임당 신씨는 율곡이 태어나기 전에 친정에 와서 이 곳에서 율곡을 출산하였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고려 때의 풍습인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혼인 후 남편이 부인의 친정에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서 성장하면 남편의 친가로 옮겨 살았다. 현대에 익숙한, 혼인 후 여성이 시가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친영례(親迎禮)는 17세기 이후에나 자리잡았다.

율곡은 6살 때 가서야 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랐고 이후 파주에서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사망하게 되었으며 그의 묘소도 파주 자운산 근처에 있다. 그의 아호인 율곡도 실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에서 본딴 것인데 알밤이 자라고 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한편 율곡이 정착한 곳은 처가가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이다. 수백년간 후손들이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소련군정하에서 사유재산 몰수가 한창 이루어지던 1947년에 14대 종손이 월남한다.

1.9. 트리비아

KDX-III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2번함인 DDG 992의 함명은 그의 이름을 따 율곡이이함으로 명명되었다. 22사단은 원래 '뇌종부대' 였지만 이후 부대명을 변경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공모했는데, 22가 이이'로도 읽을수 있으니까 '율곡'으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율곡부대'가 되었다.

여담으로, 민담중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의 밤일에 대해 비교를 해놓은 것이 있다. 어느날, 율곡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의 밤일을 엿보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대학자였다는 율곡 선생은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점잖은 빠르기로 조용히 일을 한 회 치르고 바로 잠들었다 한다.

율곡의 제자들은 라이벌이었던 퇴계의 제자들을 만나서, "실로 우리 선생께서는 방사조차 거유(巨儒) 답게 하신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약이 오른 퇴계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께서 율곡에게 점잖음으로 처지실리가 있겠느냐."며 자기네도 스승의 밤일을 훔쳐보기로 결의했다. 그러고는 즉각 계획을 실천했는데, 뜻밖에 퇴계는 보기드문 체위로 격렬하게 몇번이고 일을 치렀다고 한다. 제자들이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스승에게 전말을 고하고 그 까닭을 따졌더니, 퇴계는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참고로 율곡은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는 사람인데 비해, 퇴계는 감정 이상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또한 일단 이이와 이황은 한세대 정도 다른 시대의 인물이라는걸 감안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는 힘들다.사실이라면 나이도 지긋한 이황 선생이 저렇게 할 정도라면 진짜 괴물 그러나, 실제로도 퇴계는 후손이 있어 퇴계의 종손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세계에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반면, 율곡은 적자를 낳지 못했다.[16] 이를 생각하면 진실일지도...

한편 정치에 있어서는 서인쪽이 압도적으로 앞서서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은 조선시대 후기 붕당 정치사를 주도하게 된다. 이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묘에 배향된 18인을 의미하는 동국 18현이다. 동국 18현은 고려시대에 헌액된 최치원, 설총,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또는 안유)가 종사 되었고, 조선시대에 정몽주, 여창, 김굉필, 조광조, 인후, 언적, 이황,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 종사되었다. 이중에서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과 조헌(덤으로 성혼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이 둘은 김집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이의 사위이고, 김집의 제자가 박세채이다. 즉 이이의 후대로는 이이의 문열이 아니면 아무도 문묘 배향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대승, 서경덕, 안국, 조식 등의 굵직한 인물들의 명단은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그 위세를 알만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율곡 이이는 또 한 번 부상되는데, 바로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전면에 들고 나왔던 율곡사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그야말로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고, 교과서에도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율곡사업은 율곡 비리사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덕수 이씨 문중은 비리 사업에 율곡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조상 이름 더럽힌다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물론 비리사업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런 적 없었다.

민간설화 중에 젊은 시절의 이이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천년묵은 구미호에게 홀렸다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 "주변 충고 더럽게 안듣는 찌질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 안듣고 멋대로 굴어서 자기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럿 피보게 만든다.[17]#

다른 민간 설화 중 도밤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이이가 어린 시절 한 지나가던 스님이 이이를 보곤 "아깝다. 이 아이는 커서 큰 인물이 되겠지만 10살이 되는 해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대책을 물어보자 스님은 "뒷동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원수는 그대로 행했다. 이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승려로 변신한 호랑이가 이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이원수는 지나가던 스님이 말해준 데로 밤나무 100그루를 이미 심었다고 하자 호랑이는 직접 밤나무를 세더니, 1그루가 말라 죽었으니 데려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너도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말해 호랑이는 도망쳤다는 이야기.

또한 가장 유명한 얘기로 파주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율곡은 화석정이란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이때 율곡은 비싼 송진과 기름으로 정자를 수시로 발랐는데(또는 잘 타는 나무로 정자를 지었다고)당시 사람들은 율곡이 사치한다고 비웃었다. 율곡 사후 터진 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파주 나루터에서 불이 꺼져 배가 안 보이자 애를 태우게 된다. 이 와중에 생전 율곡과 친했던 도승지 이항복이 이를 기억해내 정자에 불을 지르자 송진을 먹인 덕에 잘 탔고 멀리서도 비출 정도였다. 그 덕에 빈 배를 발견해 선조는 무사히 피난을 갔고, 모두 율곡의 혜안에 감탄했다는 얘기다.

2. 춘추말기의 사상가로 전해지는 노자의 본명

역사책 사기에서는 초나라 출신으로, 주에서 도서관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공자의 스승이었다고도 전한다. 자세한 사항은 노자 항목 참조.

3. 오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4. Drakedog의 길드 'EE(Evil Empire)'의 구호

일을 저지른 후 EE! 라고 외친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도둑들이 물건을 훔쳐가고 그곳에 자신의 표식을 남기는 행위와 일맥상통며, EE길드원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존재할 것이다.

위의 이이 때문에 율곡EE! 라고 변형되기도 한다.

참고로 율곡 이이의 아명 중 하나는 견룡. 예아!! EE!!


바리에이션으로 EE!!=22!!=李李!!

6. Yee Yee(..)

딩고 픽처스가 낳은 희대의 명대사(..) Yee로 항목이 만들어져있지만 Yee Yee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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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흔히 율곡의 고향이 강릉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율곡의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라는 곳에 있었다.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율곡에게는 외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이의 아호인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
  • [2]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에 학문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대성했다고 보는 장년의 율곡선생 입장에서는 그 글을 과연 세간의 평가처럼 스스로 높이 평가했을지 의문이다. 청년의 율곡과 장년의 율곡의 학문 차이는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3] 모 언론사에서는 단순히 이이의 이러한 과거 성적을 근거로 그가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칼럼을 내기도 하였는데 하지만 이 칼럼은 유독 시험 성적에 집착하는 현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반영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주장대로라면 현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는 고승덕이라는 주장도 성립되며, 퇴계나 다산은 천재가 아니다. 어이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 [4] 이게 뭐가 대단하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는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한 번에 1줄 읽는 것도 힘들어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책을 읽는 게 어려웠다.
  • [5] 생각해보라. 2000년대 초반 한국으로 치자면, 영어 전문 서적 독해할 때 수십줄을 동시에 읽고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6] 이걸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 [7]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된다.
  • [8] 본 위키 유교 항목에 적당히 설명이 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조선의 유교 항목과 명청시대 심학과 리학의 비교 부분을 더불어 읽어 보시라. 비록 정확한 내용은 되지 못하지만 뜬금없이 윤리 교과서를 읽어서 우격다짐으로 뇌에 집어넣는 것보다야.
  • [9]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는 분열된 사림들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론과 양비론을 들고 나왔는데,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 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또 한마디를 하였다
  • [10] 서경덕을 지나치게 도에 치우쳤다고 비판했다. 다만 서경덕의 우의정 추증을 찬성한 것도 이이였다.
  • [11]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계열은 말 그대로 아작난다.
  • [12] 진짜 엽기는 율곡 이이의 진짜 문집인 율곡전서에는 십만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있단 것이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
  • [13]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수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양병설이 등장하고 유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 [14] 현물로 거둬들이는 공물을 대신하여 쌀로 걷는 제도. 조광조가 먼저 주장한 바 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 [15] 중국에서 성리학은 수많은 학문체제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성리학은 조선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기대승과 이황의 4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으로 변화해 갔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이와 이황에 의해서였다.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성리학의 완성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성리학과는 또 다른 학문으로 변했다고 봐야 하는지도 의문스럽다.
  • [16] 자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처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지만 부첩 경주 이씨에게서 이남 일녀를 보았으며 이중 서녀는 율곡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에게 시집을 갔다. 서장자인 경림에게 대를 잇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면도 보였는데 위에 언급되는 후손들은 그렇게 해서 근근히 이어진 것이다. 불천위 제사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
  • [17] 이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율곡이 젊은 시절 금강산에 가서 수도하던 중에 일이다. 어느 날 자신을 누가 애타게 부르자 달려가보니 큰 잉어(또는 자라)가 어부의 그물에 잡혀있었다. 측은하게 여겨 어부에 사정해 그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얼마 후 율곡은 금강산 주막의 노파로부터 금강산에 혼자 사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율곡은 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유혹을 받는다. 아무래도 이 처녀가 노파가 말한 여인같아 자리를 피한 후 노파에게 일러바친다. 그녀는 처녀가 천년 묵은 구미호니 접근하지 말라며 퇴치할 방법을 여럿 내주지만 그때마다 처녀의 유혹과 충동에 사로잡혀 실패,마지막으로 노파가 이전에 살려준 물고기에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해준다. 알고보니 물고기는 용왕의 아들로,율곡에게 목숨을 구해져 은혜를 갚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용왕의 도움을 받아 용궁의 병사로 구미호를 퇴치하려하지만 노파가 말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이것도 실패,결국 마지막 수로 율곡은 용왕을 통해 상제에 건의해 간신히 구미호를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얘기를 보면 알겠지만 진작에 퇴치할 수 있었는데 율곡이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여럿 그르치는 바람에.....여담으로 주막의 노파는 원래 금강산의 산신령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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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3 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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