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7월 27일~1916년 11월 1일.
그러나 일본 유학 시절 우수한 성적을 기록해 러일전쟁 일본 해군의 한국어 통역관으로 종군하면서부터 출세길이 열린다. 전쟁 이 후 일본 통감부의 추천으로 실세 이완용과 인연을 맺어 종전 후 이완용의 통역관으로 들어간 것.
이 후 이완용의 추천으로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을 맡게 되었고, 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신소설 집필에 들어간다. 만세보에 〈모란봉〉 등 친일 소설을 연재하고, 1908년에는 원각사라는 서양식 신파극 극장을 만들어 친일 희곡 〈은세계〉를 상영한다. 이 공(?) 때문인지 한일합방 이 후 총독부로부터 성균관 대사성직에 임명되어서 죽기 전까지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친일에 물들지 않은 비슷한 시기의 신소설가 이해조 선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언어 강의 때 이 사람의 작품이 나오면 항상 "친일파이긴 하지만, 개화의식을 고취시킨…" 이라는 평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미 80~90년대 교과서에서부터 친일파이니까 개화의식을 고취한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아니 그러자면 이광수는? 이런 반론도 많았으며 이해조를 재평가하자는 말도 많았다.
작품 내적으로 주인공의 미국 유학 부분은 "화성돈(워싱턴의 음역)에서 선진 사상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한 마디로 대충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이해조의 작품을 비롯해 당시 신소설 대부분의 작품에서 유학가는 장면은 이런 식으로 묘사된다[1] 당시 유학이란 개념은 선진국에 갔으니 당연히 선진문물을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지극히 단편적인 사고였고, 따라서 유학해서 배우는 신학문의 실체와 그 구체적인 실천 과정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당시 집필을 하던 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신소설에서의 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수사적 장치처럼 행위의 구조 속에 끼워넣은 것이다[2].
이인직이 친일파 중에서도 자발적이고 악질 친일파라고 해서 그가 신소설이란 장르의 선구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혈의 누」는 1906년 6월에 발표됐으며 이는 최초의 신소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