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이자성

last modified: 2015-04-01 21:29:3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고려의 무인
1.1. 벼슬에 오르기까지
1.2. 여몽전쟁
1.2.1. 1차 침입
1.2.2. 이통의 봉기
1.2.3. 충주 관노 2차 반란
1.2.4. 용문창 습격사건
1.2.5. 동경의 난
1.3. 이후
2. 명나라의 반란군 수장
2.1. 개요
2.2. 생애
2.2.1. 천하를 뒤엎다
2.2.2. 허무한 몰락
2.2.3. 평가
2.2.4. 기타
3. 2에서 이름을 따온 신세계(영화)의 등장인물


1. 고려의 무인

李子晟
?~1251

본격 반란 진압왕.(...) 여몽전쟁 당시 전투보다 반란진압 경험이 더 많다. 공교롭게도 2번 항목의 인물은 반란군 대장이다.

1.1. 벼슬에 오르기까지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아버지인 병부상서 이공정(李公靖)[1]과 함께 무신정권 당시 무신 관료로 출세한다. 성품이 곧고 용감했으며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여몽전쟁 이전의 기록은 거의 없고 "여러 차례 종군하고 공을 세우고 거듭 승진해 상장군이 되었다.(屢從軍有功 累遷上將軍)"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1.2.1. 1차 침입

여몽전쟁에서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군+남로군 2만 명이 개성을 향해 내려오자 고종은 그에게 고려 3군을 지휘하도록 명했고 이에 채송년 등과 함께 9월 13일 동선역에 도착해 진을 쌓게 했다. 13일 야간의 몽고군의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화살에 맞는 등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2.2. 이통의 봉기

1232년, 2차 침입때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자 이를 반대하는 이통(李通)의 봉기[2]가 개성에서 일어났다. 고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자성과 조염경, 최근등을 보내 이들을 토벌케 했다. 이자성이 이끌던 진압군은 승천부(昇天府)[3]의 동교(東郊)에서 첫번째 교전을 벌였는데 이에 승리하였다.

별장(別將) 이보(李甫)와 정복수(鄭福綏)에게 야별초(夜別抄)를 주어 개성에 먼저 가 성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이보가 개성에 도착해 관군을 무찌르고 온 거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무식한 문지기가 문을 열어줬다.올ㅋ. 이보와 정복수가 들어가 문지기를 죽이고 이통의 집으로 가 이통을 잡아 죽였다.

잠깐... 몽골이 쳐들어 왔는데 치라는 몽골군은 안치고.

1.2.3. 충주 관노 2차 반란

1232년 승려 우본(牛本)이 일으킨 충주 관노의 2차 반란[4]이 일어나자 왕은 이자성을 또다시 3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토벌을 명했다. 이자성이 이끌던 3군이 달천(達川)에 도달하자 노비의 병사 몇 명이 강 건너편에서 "우리가 주도자 모가지를 딴 후 항복할게요."라고 하자 이자성이 "그렇게만 하면 너네 살려줌"이라고 했다.

얼마후 그들은 성에 들어가 우본의 목을 따왔고 관군은 이틈을타 성을 차지해 잔당들을 모두 처형했다.

1.2.4. 용문창 습격사건

1233년, 4월. 군량의 비축과 공급을 맡고 있던 용문창(龍門倉)을 거복(居卜)과 왕심(往心)이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초적들을 이끌고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 밖에 위치한 용문창을 습격해 곡식을 약탈했는데 왕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자성에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삼고 이를 토벌토록 했다.

다만 이때 거복과 왕심이 습격한 것은 정부의 탓이 더 큰데,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굶어가는 상황에 닥치자 이를 나눠주기 위해 습격한 것이었다. 이를 진압하던 이자성의 입장도 답답했을 듯. 최씨정권 개새끼!

1.2.5. 동경의 난

1233년, 경주에서 그 지역 사람인 최산(崔山)과 이유(李儒)가 경주의 토호세력과 농민군을 합친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반정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원인은 최씨정권이래 경주의 지역의 세가 약해졌고 강화천도 이후 남쪽 지역의 농민들에 대한 과도한 조세 수취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도 님비현상이 있다.

또다시 왕은 이자성을 파견,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성(永州城)[5]에서 진을 치고 적을 맞이했는데 적들은 이자성의 군사들이 밤낮을 안 가리고 와서 지쳤을 것으로 판단해 피로한 틈을 타 공격하려고 영주의 남쪽에 집결했다. 관군 한 명이 성에 올라가 살펴본 후 이자성에게 "우리 X 빠지게 와서 애들 지쳐있고 쟤들은 쌩쌩하니 싸우면 우리 못 이김요. 좀 쉬다 싸우면 안 될까요?"라고 하자 이자성이 "행군하고 잠깐 쉰다고 너네 피로감이 사라지디? 오히려 빡세게 굴려야 한다."며 문을 열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결과 적을 대파해 시체가 수십 리에 걸쳐 널리게 되었고, 최산 등 수십 명을 처형한 후 "협박받고 참가한 사람들에겐 죄를 묻지 말아라"는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1.3. 이후

子晟自平東京後 將士日集其門 恐爲權貴所忌 謝疾杜門 人稱知幾。
동경을 평정한 뒤로 장사들이 날마다 자신의 집으로 모여들자 이자성은 권귀(權貴)들로부터 시기를 받을까 우려하여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니 사람들이 앞을 내다볼 줄 안다고 칭찬하였다. - 《고려사》이자성 열전
 
동경을 평정한 후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지만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웃대가리들이 해코지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예 나가질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반란진압 최종병기는 고종 38년인 1251년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다 죽었고 왕이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2. 명나라의 반란군 수장

2.1. 개요

중국 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반란군 수장. 별명은 틈왕(闖王). 중국에서는 그의 성을 합쳐 이틈왕(李闖王)이라고 부른다. 틈이란 문 사이로 말이 뛰쳐나온다는 뜻으로 거칠고 용맹하다는 의미다.

장헌충과 함께 명말 민란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자성의 난으로 대순국을 세워 중원과 하북을 함락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청나라와 청에 투항한 오삼계의 반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도적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마오쩌둥조차도 이자성을 존경했고, 소설가 야오쉐인으로 하여금 대하소설 '이자성'을 집필하게 했을 정도다.

2.2. 생애

2.2.1. 천하를 뒤엎다

섬서 출신으로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글도 배울 수 있었지만 집안이 몰락하고 명나라 조정에서 운영하는 역관[6]으로 들어가 역부로 일했으나, 조정에서 심각한 재정난 때문에 경비를 절감하고자 역관들을 대거 폐쇄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고 쫓겨났다.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명나라는 반란에 휩싸인다.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역부들이 생계를 위해 약탈을 일삼았고, 그 중에 이자성도 끼어 있었기 때문. 이자성은 실업자가 된후 입대하지만 당시 쇠약해진 명의 재정으로는 청과 대치하고 있는 국경을 지원하는 게 고작이라 후방지역에 있던 이자성의 부대에는 봉급은 둘째고 식량도 나오지를 않았다. 이런 현상은 일반적이었고 병사들은 탈영하거나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상당수가 반군에 합류하게 된다. 이자성도 이런 과정을 거쳐 반란군이던 틈왕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가고 고영상이 죽고 그 세력을 이어 받는다. 틈왕이라고 불린 것도 고영상의 세력을 이어받았기 때문

관군에게 몇 번 패전하기도 했으나, 때마침 명나라에는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수백만에 달하는 굶주린 난민들이 각지를 떠돌던 상황이었고 이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계속 불려 나갔다.

이자성 군은 엄격한 군율로 이름이 높았으며, 거의 도적 떼와 다름없던 다른 반란군과 확실히 차별되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명나라가 만주 등지에서 새로 일어난 나라와의 전쟁에 전력하는 사이, 힘을 길러 낙양 등 화북 지방을 점령해 나갔고, 마침내 1644년 1월 서안[7]에서 왕으로 즉위하고 대순(大順)이라는 정권을 세우기에 이른다.

2.2.2. 허무한 몰락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같은 해 3월 17일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살하여 명은 사실상 멸망했으나, 북경에 들어간 뒤부터 병사들의 기강이 풀어져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청군을 막는 최전방 요새인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장수 오삼계는 청의 실력자 도르곤에게 항복하여 청군과 함께 이자성을 공격하려 내려왔다. 이 때, 오삼계가 거느리고 있던 부대는 명나라에서 최고의 정예 병력.

일편석에서 벌어진 오삼계+청군과의 일전에서 이제까지 무적의 위세를 자랑하던 이자성의 대순군은 철저하게 참패했고, 이자성은 북경으로 돌아와 성 안에 남아 있는 황금을 모두 긁어 모아서 떠났다. 도망치기 전에 칭제를 해 황제가 되었지만, 이미 패하고 있는데 의미는(...)

달아나는 사이, 그를 따르던 부하들도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고, 이자성은 구궁산(九宮山)에서 최후를 맞는다.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농민들에게 피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45년 6월,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러나 그의 시체는 끝까지 발견되지 않아 무사히 탈출해 승려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2.3. 평가


베이징 교외의 이자성 동상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가히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슈퍼스타 취급을 받는 인물.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에 반감을 가진 중국의 한족 민족주의, 청나라 관점의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명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 의식, 마지막으로 중국 공산당마오쩌뚱게릴라 빨치산 선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황건적의 난을 황건기의로 높여 부르고, 태평천국이 중국 근현대의 그 많은 사건중에 유독 연구가 활발하며, 실질적인 군사적 업적은 없는 모문룡이 재평가 받는것도 다 사회주의 국가라 농민반란에 맹목적으로 우호적인 중국의 성향과 마오쩌뚱이 개인적인 취향 탓이 크다.

이자성은 여러 측면에서 평가해 볼 때, 중국 역사상 흔히 일어났던 민간 반란과 비교해 볼 때 특출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자성이 사회 주류에서 밀려난 재야 출신의 지식인이긴 하지만 사실 역사상 반란의 주도 세력 대부분은 홍수전, 황소, 홍경래, 장각, 이몽학 등 지배계급 출신 혹은 이에 근접한 기반, 지식, 세력을 갖고 있었으나 지배층에서 밀려난 비주류 집단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반란자'들 가운데서는 수준이 상당히 낮다고 볼 수 있다. 이자성은 강대하게 발흥하는 만주족청나라라는 거대한 적을 앞두고 숭정제만 물리치면 뭐든지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이 전혀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지도자였다. 만주족과 청나라를 앞에 두고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이자성 같은 인물이 앞뒤 가리지 않고 그저 막무가내로 국가를 뒤흔들어버린 탓에 명나라는 개박살 나고 한족은 재앙적인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국가 지도자로서 이자성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금을 없애겠다'는 턱없는 헛된 공약만 내걸었다가 결국 에 빠졌다는 점에서, "어떤 국가를 세우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국가 비전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암울한 지도자였다. 결국 이자성의 통치능력은 도적떼 두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 관한 자료는 명청 교체기의 혼란 탓에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하여 신화화되고 윤색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2.2.4. 기타


여담으로 이자성은 조선의 역사에도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줬는데, 이자성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기 때문. 이 시기에 이자성과 지방의 각종 도적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임진왜란때 처럼 조선에 원군을 보내지 못했으며[8], 결국 강화도가 함락당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히자 인조는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으며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지 않고 명나라가 계속 청나라에 집중할수 있었다면 청나라는 섣불리 조선 침략에 10만대군의 올인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했다가 명나라가 이 기회를 놎치지 않고 뒤통수를 치면 본국이 위험할테니. 사실 정묘호란도 이 때문에 청나라가 3만명이라는 적은 군대로 잠시 쳐들어갔다가 급히 돌아왔었던 것이고, 이자성이 없었다면 청이 침략했어도 정묘호란당시 정도의 규모의 군대밖에 보내지 못했을 것이고, 적어도 삼전도의 굴욕까지는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넷에서 출판된 <중국 도적 황제의 역사>에서 이자성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한국 영화 신세계(영화)에서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정재가 연기를 했다.)가 나온다. 내용도 비슷하다.

3. 2에서 이름을 따온 신세계(영화)의 등장인물

이자성(신세계)을 참고할 것.
----
  • [1] 혹은 李公正이라 한다.
  • [2] 어사대의 조예 이통이 최이의 독단적인 강화 천도에 반발해 경기지역의 몰락 농민들과 개경의 노비들을 모아 일으킨 반란. 이들은 개성을 지키기 위해 경기지역의 초적(도적)떼와 승려들과 연합해 3군을 조작했다.
  • [3] 지금의 개성 직할시 개풍군
  • [4] 1차 반란이 일어나 진압했으나 개성으로의 천도가 일어나자 이에 대해 반발로 또다시 일어났다.
  • [5] 지금의 경북 영천
  • [6] 오늘날의 우체국과 운송 배달 업체와 비슷하다.
  • [7] 의 수도인 장안
  • [8] 그나마 명맥상 산둥반도에서 강화도의 수비를 도울 약간의 수병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 마저 풍랑 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결국 조선은 강화도의 수비를 김경징에게 홀로 맏겨야 했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01 21:29:33
Processing time 0.2383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