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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 개방

last modified: 2015-03-24 00:00:0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초기 인식
3. 인식의 변화
4. 개방
4.1. 영화
4.2. 게임
4.3. 음악
5. 개방 여파와 현황
5.1. 어린이 및 청소년


1. 개요

김대중 취임시기부터 4차에 걸친 일본의 대중문화(게임,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노래, 잡지 등...)의 수입을 허용한 사건.좌우가 인정하는 김대중 최고의 업적 국가기록원의 설명은 이곳을 참조.

2. 초기 인식

1998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 등 과거사 문제로 인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5년이나 되어서야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진행되었으며 국교 정상화는 이루어졌더라도 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나 학도병 및 강제 징집 출신 할아버지들도 발언권이 짙고 연령도 활동할 만한 정도였기에 일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도 높았던 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전체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서 반대가 심한 건 당연지사였다.[1]

그 일례로 광복회 등 호국보훈 단체와 순국선열 유족회 등 애국성향 단체에서 과거 35년간 한반도를 장악지배하여 우리 민족을 고압(苦壓)으로 몰아간 왜놈들의 저질적이고 침략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분야에 식민지를 만들어낼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반대했다. 거기에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해결되지 못한 마당에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우려가 있었는데, 일본에게 국가재정의 반(半)을 파탄시킬 정도로 돈을 퍼줄 대가가 있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당시는 일본어만 써도 매국노 취급하던 그런 시대였다

종교계의 반대도 심했는데 거리 곳곳마다 십자가가 흔했을 정도로 개신교 성향이 강했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신사 참배를 강요한 일 때문에 개신교에서 앞장서서 일본문화를 배척하는 편이었다. 특히 당시 '낮은울타리'같은 잡지에서는 대놓고 "일본 문화는 마귀적인 우상 숭배 문화이니 죽어도 들여올 수 없다."라는 논지의 글도 있었다. 또 성균관 등 유교 및 유림계도 반발하며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유교문화까지 탄압하며 말살하려고 했던 일본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군과 맞서싸웠던 조상들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비판하였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굉장히 일본에 비해서 폭력과 성적인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본래 성적인 것에 좀 더 관대했을 뿐 아니라 루팡 3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대중문화가 훨씬 일찍 시작되어 일반화 되어있었고[2], 한국에서 보기에는 저질 문화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일본문화는 저질 문화'라는 통념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일본 문화가 아니더라도 주로 수입의 중심인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도 한몫 했는데 1950년대부터 정부는 경무대 똥통사건을 계기로 하여 만화 검열제나 '만화는 불량배들이나 보는 것' 이라면서 만화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에는 어린이날에 일본 만화책을 '불량만화' 라면서 태우는 행사 같은 것이 있었고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주 문화산업으로 키워나가던 일본 문화 같은 걸 개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시의 만화, 특히 일본 만화가 주로 폭력에 포악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고 노출 장면도 잦다는 악평 때문에 이미 저질 문화로 인식되어 온 것도 더해졌다.

3. 인식의 변화

그러나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의 한편으로는 암암리에 일본 문화를 향유하던 계층도 있었다. 주로 돈이 있고 관련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상류층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박정희전 대통령도 사석에서는 일본 영화를 봤다고 하고 그의 딸 박근혜 또한 일본 만화를 즐겨봐서 그녀가 육영제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시절에 육영제단에서 만화 잡지 보물섬등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수의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세운상가, 용산 전자상가 등지에서 나도는 복제판 CD나 비디오등이 유통, 만화책도 해적판 만화책 등으로도 일본의 만화책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상기했듯이 상류층에서 이런 문화를 접하면서 1990년대 초중반 PC통신에서 오타쿠는 고급문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3]보다 일본, 미국에서 애니 수입하는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수입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하나둘씩 공중파에서 방영되기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합작애니메이션인 황금박쥐가 TBC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TBC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방영하기 시작했고 KBS와 MBC에서도 이를 따라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일본 애니메이션 이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뾰로롱 꼬마마녀같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한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방송사들이 왜색 분위기, 또는 일본어 서체가 있거나 일본적인 성격이 짙은 부분은 모두 삭제 및 영상편집기술이 빈약했던 당시에는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로 대충 수정하는 방법으로 배제, 지명같은건 도쿄→서울, 오사카→부산, 교토→경주 등으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하고 캐릭터 이름 역시 모두 한국식으로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보다는 한국식 이름으로 고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문화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별로 없었지만, 하여튼간에 일본 문화가 어느정도 친숙해지기 시작하는데 기여했다.

거기에 금지에도 불구하고 방송 포맷이나 만화 캐릭터, 작품[4], J-POP 등에 대해서 표절이 대단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학습 만화의 대표주자중 한명인 이원복조차도 초기작에서 츠바 테츠야의 작품들을 표절했다. 결국 무조건적인 차단은 오히려 음성적인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법칙에 따라 개방의 필요성도 요구되기 시작한다.[5]

이렇게 상반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노태우 대통령 때에 일종의 여론 떠보기를 시도하면서 문화 개방이 처음으로 수면위로 부상한다. 이런 언론 떠보기는 연이은 일본의 망언과 상기한대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태평양 전쟁 유족회 같은 각종 단체들의 반대, 그리고 평소 표절을 하던 작가, 대표적으로 배금택이나 이로마같은 인물들의 거센 반대까지 합쳐져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이들은 노태우 대통령 때 문학작품의 해적판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던 베른 협약 가입을 추구하자 베른 협약 가입은 출판 창작의 자유를 제한한다라면서 반정부 투쟁을 하기도 했다.

1996년까지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1998년 일 어업협정 파기 문제로 국민들간의 반일(反日) 감정이 짙었으나, 결국 1998년 10월 20일, 양국 합의하에 1차 개방이 되면서 만화와 4대 국제 영화제 수상 영화를 시작으로 일본문화를 공식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4. 개방

1차 개방으로 영화, 비디오, 만화를 우선 개방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합의를 거쳐서 조금씩 더 유입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한일간에 마찰이 발생하면 개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와 당시 수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로 인해 개방이 전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에 맞춰서 애국 및 호국단체 등에서는 일본 저질문화 퇴출운동 및 대국민 서명운동을 통해서 일본 문화 전면개방 및 수입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4.1. 영화

영화의 경우 이름있는 국제대회 수상작을 우선적으로 개방했는데, 그 첫번째 작품이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두번째 작품이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였다. 이후 하나 둘 씩 일본 영화가 국내에 소개되고 있으나 이렇다할 히트작은 없는 편. 일본 영화 항목 참조. 둘 다 보드게임 이름이다

4.2. 게임

아케이드 게임업계와 함께 일본 게임업계의 주류산업을 담당했던 비디오 게임업계는 '수입선다변화품목'의 규제때문에 일본게임의 제대로된 게임의 수입이 힘든 상태였다. 수입선다변화품목은 외국과의 경쟁시 한국이 극도적으로 불리할수밖에 없는 산업분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에 해당되는 분야의 외국산 수입을 규제하는것과 비슷한데, 한국에서의 수입선다면화품목 관련 법규가 실질적으로는 대일수입규제책의 일종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그래서 일제 자동차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일본제 공산품 역시 수입규제 대상이었다. 물론 수입규제대상에 일제만 있는것도 아니었으며 그때 한국경제가 수출액 10억 달러,1000억 달러 달성한게 나랏경사 취급받던 수출에 목을 멘 개도국이었다는것도 감안해야한다.

하여튼 이 때문에 80년대와 90년대에도 일본제 게임기(3~4세대 콘솔)가 몇몇은 정식 계약으로 우리나라에 정발되었지만 상당수는 북미판 기계를 우회수입하는것에 가까웠다.[6] 이러한 배경 탓에 전부터 일제 게임을 직접적으로 구하는것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 1995년, 음비법(음반 및 비디오 법에 관한 제정)이 제정됨에 따라 우리나라 비디오게임 업계사상 최악의 흑역사의 시대를 맞이하게된다.

영상물의 법의 개정으로 정품도 불법으로 간주되어 정품조차 불법이 되어버리는 웃지못할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경찰이 오면 정품인데도 마약을 거래하듯이 눈치보며 거래를 해야 했고, 용산의 보따리상들이 주도하는 정품 블랙마켓시장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정품조차 경찰이 단속하니 어차피 불법복제도 같은 불법이니 복제본을 쓰자는 논리가 통용되어 정품시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남아있는 정품도 슈퍼 패미컴의 파이널 판타지 6가 20만원, 레이 스테이션파이널 판타지 7이 27만에 유통되는 시대가 온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 2000년 6월 27일, 3차 개방에서 게임의 개방도 통과되면서 정식으로 게임이 유통되면서 변화가 오게 된다. 이때는 일본어로 된 게임은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 2003년 9월 16일 4차 개방에서 완전 개방되면서 정식으로 일본어로 된 게임이 발매되기 시작된다.[7] 개방 직후에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강희원 대리는 “3차 개방 때 일본어로 제작된 게임 소프트웨어 수입이 허용되지 않아 유럽과 미국 지사를 통해 영문판을 우회공급해 왔다”며 “게임 시장이 개방되면 일본에서 새 게임을 출시한 후 한국 상륙까지 3개월 가까이 벌어지던 시차가 줄어들고, 한글판 게임의 동시 제작도 가능해지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기대를 내비췄다. 이렇듯 업계도 개방에 호응하면서 일본어 음성/자막 게임이 활발히 수입되면서 비디오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오타쿠들은 일본어를 공부하게 되고...

아케이드 게임의 경우에는 BEMANI 시리즈를 언급할 수 있는데, 국내 수입 초기에는 아래에 서술될 음악 부분의 개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의상으로 일본어 보컬곡은 삭제되고 미디음으로 대체되었다. 게임에 따라서 곡이 아예 삭제되거나(ex: Ultimate power, DM Powerful MIX, ありがとね。) 또는 보컬만 삭제되거나(ex: 正論, 시리토리, 밤비나, 愛のしるし, MISS YOU 등) 영어보컬판이 있는 경우 그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ex: Luv to me) 현재는 개방 단계가 바뀌어서 일어 보컬곡도 무사히 수록.

4.3. 음악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락카페, 러장, 스코장 같은 곳에서 암암리에 뮤직비디오나 음악감상이 이뤄졌고, 역시 어둠의 경로(빽판과 불법복제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서 일본 뮤지션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1988 서울 올림픽녀대(...)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이 게스트로 공연하긴 했으나 일본 뮤지션의 음반발매나 공연은 전무했다. 그런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일본뮤지선이 '합법적으로' 공연한 적은 있었는데, 바로 티스퀘어카시오페아처럼 연주밴드들이 에 정식 공연을 갖었다(티스퀘어는 1994년, 카시오페아는 1996년). 한편으로는 (씁쓸한 일이지만) 티스퀘어나 카시오페아처럼 국내 공연 초연 이전에 이미 국내방송사에서 BGM으로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알게 모르게 이런 노래들도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개방 이후로도 영향을 줘서 초기에 연주밴드 음악이 많이 알려지게되는 계기가 됬다.

2차 개방에서 처음으로 2천석 이하의 소규모 공연이 허가되었으며, 3차개방에서 좌석 제한이 철폐, 4차 개방에서 음악 매체의 판매가 허락되었다. 다만 여전히 공중파에서 일본어로 가창된 음악을 송출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이전 버전에선 금지 상태라고 서술했지만, 어디까지나 J-pop 의 인기와 관심도가 낮아 잘 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지 타블로가 꿈꾸라에서 m-flo의 노래를 선곡하는 등, 엄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어로 가창된 유명 J-pop 곡들이 송출되고 있다.) 신해철이 과거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일본 노래를 틀었다가 경고를 먹기도 했다. 다만 일본 음악이라 하더라도 일본어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나 영어로만 부른 곡들은 문제없이 나오고 있다,[8] 국내 방송에서 수많은 일본 덕후 음악이 BGM으로 삽입되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도 전에 SBS에서 카드캡터 체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준 적이 있다. 카드캡터 체리 3기가 인기리에 무사히 종영되고, 마지막에 엔딩곡이 흘러나오는데, 원작과 동일하게 platina 3기 오프닝 일본어 원곡 앞부분이 약 10초정도 그대로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등 PC통신 애니메이션관련 동호회에서는 난리가 아니었다...

5. 개방 여파와 현황

1998년 개방을 전후로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의 영향과 중복되면서 일본 문화 콘텐츠가 대중적인 컨텐츠가 되었고, 오덕이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하면서 대중적인 컨텐츠중 하나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개방정책이 나왔을 때는 일본 문화에 의해 국내 문화가 잠식될거라는 우려섞인 반대도 상당히 많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만화 시장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니아 시장 이상으로는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 일본 대중문화(드라마, 대중가요, 영화 등)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오히려 2000년대 중반 들어 한류가 불기시작하더니 급기야 20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오히려 한국 가수들이 일본가서 히트치고 있는 실정. 이는 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봐도 자국 대중매체의 점유율이 높은 편에 속하는 국가인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만 애니메이션 분야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에 자생적인 시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꼴이니 영향이 없지 않았다.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이어온 탄압과 투자지원제도의 미비[9]로 기반이 매우 부실한 있었던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일본문화에 완전히 잠식되어서 뽀롱뽀롱 뽀로로같은 아동 대상 컨텐츠를 제외하고는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됬다. 결국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만화 시장의 경우는 약간 다른데, 초창기 아이큐 점프나 챔프같은 잡지가 창간될 시기만 하더라도,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같은 대형 일본 만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한국 작가들의 만화로 채워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잡지 대부분을 일본 만화가 잠식하던 때가 아니었다. 국산 만화가 무너지게된 계기는 대여점이 생겨나면서부터였는데, 그전까지 일반적으로 만화책은 사서 본다는 인식에서, 대여점에서 100원~300원 사이의 저렴한 값으로 빌려본다는 인식으로 바뀌면서 급격히 기반이 주저앉게 된 것이다. 이후 광랜이 보급되고 퍼져나간 불법 스캔본 또한 국내만화시장을 무너뜨리는데 단단히 한몫하게 된다. 상세한 사항은 추가바람.

만화와 애니메이션 업계를 제외한 나머지 업계에서는 일본문화 개방으로 노골적인 표절 대신에 포맷이나 아이디어를 돈 주고 사오는 일이 정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적판 만화책이나 복제 비디오 등이 사라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보였다.

2004년 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로 개방에 전진은 없는 상황. 5차 개방에 대한 논의가 2011년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하여 벌어졌으나 유야무야되었다. 2012년 들어선 한국이 문화적 컨텐츠에서 상당한 발전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관계로 별로 신경 안 쓴다.

2015년까지 한일양국의 정세는 냉랭하지만 문화를 통해 상당부분 교류가 있었다. 한국의 뮤지션이나 아이돌이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하거나 TV출연으로 인기를 얻어 화제가 되었으며, 이에 미치진 못하지만 한국 현지에서도 일본가수의 내한공연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선 케이블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을 정식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되었고 콘솔게임 시장에서도 상당부분 한글화를 통한 정식발매가 이뤄진데다 모바일을 통한 온라인 게임의 서비스까지 가능해졌다.
그 외에 양국의 문학작품들이 출간되어 작가들의 낭독회나 강연을 통한 교류도 넓어지는 실정이다.

5.1. 어린이 및 청소년

사실상 일본문화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의 주 소비층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및 청소년들은 1980년 이후에 태어나게 되었던 이들을 시작으로 태어나자마자 선대 세대들보다 먼저 어린시절부터 일본과 일본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던 편이었고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청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2000년대 온라인 문화의 급속적인 발달로 그 동안 TV에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되어 나왔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렸을 때부터 봤던 선대 세대들과는 달리 이후 세대들은 TV뿐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 결과 고질적인 불법 업로드 및 다운로드 유행토렌트 등의 등장으로 이 때를 계기로 이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한국 성우 까대기(더빙까) 현상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 문화개방 이전만 했어도 지금같이 컴퓨터가 아닌 TV로만 볼 수 있었고 TV로 봐도 대부분 한국 성우진의 육성녹음으로 나오고 한국적 분위기로 대폭 수정한 개정판으로 애니메이션을 봤던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보면 이번 문화개방이 사실상 그 동안 나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이라 알고 있던 작품들이 사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오해를 풀어내게 된 계기도 되었지만 대신 철부지 일부 청소년들의 더빙까가 극성을 부리고 성우진들이 명예훼손을 당하게 되는 계기를 방도하게 되었다는 단점도 가졌다.[10]

또한 그 동안 미국 문화의 지나친 병폐 등으로 찌들었던 선대시절 청소년 세대들과는 달리 저 때까지는 미국과 서구문화에 밀려서 그 동안 한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였던 일본의 문화가 1990년대에 태어난 청소년들을 계기로 점차 일본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선대 청소년들이 미국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구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하였다면 요즘 청소년들은 일본문화 개방 및 온라인 문화의 발달로 그 동안 한국에서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본문화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증가하게 되었고 온라인에서 일본여행 등을 다녀왔던 후기 등만 봐도 대부분 청소년들이 댓글을 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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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같은 맥락에서, 일본 수입차 역시 한국시장에서는 거의 판매고를 올리지 못했다.
  • [2] 물론 일본내에서도 이러한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대해 심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애시당초 일본의 방송국들 대다수가 민영방송인지라 시청률에 대해 민감할수밖에 없어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강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민영방송이 신문사와 겸업을 하고있어서 이러한 심의강화 움직임에 대해 대응하기 쉬웠다. 거기에다가 이러한 심의 움직임에 대해 문화계 내부의 반발도 강해서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흐지부지되었다. 다만 90년대 이후로부터는 범죄관련 사건 사고가 이슈화되면서 조금씩 심의가 강화되어가는 형편이다.
  • [3] 애니메이션 산업이 인력집약적인 특성이 강하다보니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제작비용이 많이 들어갔고 애니메이션 방영시간대의 광고료도 비싸지않아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방송사 입장에선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 별다른 매력을 느끼기엔 힘들었다.
  • [4] 심지어 70년대 당시의 초거대 만화출판사인 합동출판사에서 표절을 강요해서 상당수 작가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표절작으로 그려내야 했다는 후문도 있다.
  • [5] 한국에서 포르노가 불법인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오죽하면 불법자료가 많고 검색하기 쉬운 곳에선 국내에 저작권이 있는 물건은 검색이 금지된 경우도 많고 저작권 자료라는 명목으로 요금도 비싸지만, 포르노는 검색도 쉽고 저작권도 없어서 싸게 받을 수 있다.
  • [6] 자세히 아시는분 수정바람
  • [7] 사실 개방 이전에도 일본어로된 게임이 정식으로 유통된 적이 있었다. 삼성전자에서 유통했던 파이널 판타지 7 PC판이 그것인데, 일본어로 된 간판이 나오는 문제로 제작사에 수정을 요청하였지만 그래픽수정으로 인해 게임이 망가진다는 이유하나로 거부하자 고심 끝에 영상물 등급 위원회에서는 발매허가를 하였다. 자막이 아니라 게임 내 간판이 그런거라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잘 안보인다.
  • [8] 대표적인 케이스가 블리치의 4기 오프닝이지만 투니버스판 2기 오프닝으로 쓰인 'Tonight, Tonight, Tonight'.
  • [9] 문민정부 들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지원하긴 했으나 심사지원 기준 미비로 얼음별 모험을 제외하면 거의 망하다 시피했고 이후에도 지원제도는 이어져가고 있으나 아직까지 갈길이 멀다. TV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2000년 이전에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어린이 시간대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방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일단 애니메이션 제작이 그리 수지타산에 맞지는 않았던 것도 있고 더군다나 방송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을 강제법안하는 법안이 마련되지 않아서 반영이 되지 못했다가 2000년에 들어서야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적용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지상파 애니메이션의 시청률 하락으로 인한 시간대 앞당기기와 케이블 애니메이션 채널에서의 국산 애니메이션 작품 홀대(주로 아동용)로 인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 [10] 이것은 사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폐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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