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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 공습

last modified: 2015-03-27 12:08:35 by Contributors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에 관한 항목.

Contents

1. 1944년 이전
2. 1944년
2.1. 인도-중국 작전
2.2. 마리아나 제도 작전
3. 1945년
3.1. 커티스 르메이의 등장
3.2. 제8공군의 폭격
3.3. 전투기들의 폭격
4. 일본군의 대응
5. 결과
6. 여담
6.1. 다음에 폭격할 곳은 여기다
6.2. Operation Starvation - 또 하나의 악몽
6.3. 교토는 왜 안 때렸습니까?
6.4. 히로시마는 왜 안 때렸습니까?
6.5. 사할린은 왜 안 때렸습니까?
6.6. 영국군의 공습 참가
6.7. 한반도 공격
6.8. 굳이 도시를 때릴 필요가 있었을까?

1. 1944년 이전

역사적인 첫 일본 본토 공습은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 감행되었다. 다만 둘리틀 공습은 해당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보복 차원으로 무리하게 감행된, 정치적이고 선전 목적의 작전이었다.

둘리틀 공습으로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대도시에 폭탄 몇 발을 투하하긴 했지만 당연히 몇 발의 폭탄으로는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다만, 진주만 기습 직후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낮아진 미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고 일본에게는 신국불멸의 허상을 깨트리며[1] 위협을 주었다.

1943년 중반,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 키스가 섬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쿠릴 열도 북단의 몇몇 섬들에 B-24 폭격기와 일부 항모 함재기를 동원해 공습을 가해 군사시설을 파괴했다. 일단은 이 작전도 일본 본토 공습의 범주에 포함되는데, 일본 본토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지만 어쨌든 쿠릴 열도는 일본제국령 남사할린인 가라후토청 관할인데 가라후토가 1943년 4월 1일부로 내지로 편입되었기 때문.(…)[2]

사실 1943년까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공격을 가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나마 일본과 가까운 미국 영토 중 이크 섬, , 필리핀은 모조리 1941년~1942년 초기에 걸친 남방작전의 여파로 상실된 상태였다. 기지를 제공할 수 있는 동맹국 중 중국은 일본과 가까운 해안지방을 모조리 상실한 상태였고, 소련은 대독전에서의 동맹국일 뿐이지 대일전에서는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당시까지만 해도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1944년 들어 급변한다. 마침내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 1944년

2.1. 인도-중국 작전

문제는 기존 폭격기보다 성능이 좋은 B-29가 실전배치되기는 하였으나 그 당시 기술력으로는 미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하는 일까지는 이루어낼 수 없었다. B-29의 항속거리가 길긴 했으나 태평양을 가로지를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미국으로서는 B-29를 발진시키기 위한 전진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1944년 6~7월에 걸쳐 예정된 마리아나 제도 공략을 끝낸 후 이곳을 B-29의 기지로 삼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플랜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미 초도양산된 B-29들이 놀고만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높으신 분들은 B-29를 일본 본토 공격이 아니더라도 다른 용도로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제20폭격사령부 산하 4개 비행단이 1944년 봄부터 인도에 전개,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태국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태국은 버마 주둔 일본군으로 향하는 모든 보급선이 이어지는 요충지였던데다가, 때마침 일본군이 버마에서 임팔로 대규모 공세를 단행했기에 영국군을 지원하는 측면에서 방콕에 공습을 가하였다.

한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하루속히 일본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길 원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B-29를 중국 내륙에서 출격시킨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육군항공대 주류는 이와 같은 구상에 가능은 하지만 효율이 낮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강행하면서 버로우탔다.(…) 장개석 역시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서 무언가 기여를 해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흔쾌히 이 제안을 수락하였고, 1944년 6월까지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하는 수고 끝에 인도에 있던 B-29 비행단 4개가 모두 중국 내륙으로 옮기게 된다.

마침내 1944년 6월 15일, B-29에 의한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58폭격비행단 소속 B-29 75기가 투입되어 큐슈의 야와타 제철소를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1944년 말엽에 이르기까지 규슈 일대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그러나 배치된 폭격기의 수량이 적었고, 주 기지인 청두에서 목표인 일본 열도까지 항속거리가 아슬아슬하여 큐슈정도만이 겨우 폭격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고고도 정밀폭격에 중점을 두다보니 생각만큼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배치된 B-29기들은 초도양산분으로서 아직까지 기체 곳곳에서 여러가지 잔고장이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대륙타통작전으로 일본군이 한때나마 중국 내륙 깊숙히까지 진격, B-29 비행장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1945년 1월 6일 마지막 출격을 끝으로 마테호른 작전은 중지, 중국에 전개된 기체들은 모두 마리아나 제도로 이동 배치된다.

한편, 당시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은 전후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 공산당 세력하의 중국 북부에 B-29 기지를 유치하고 이를 토대로 만주의 일본 주요 산업시설을 폭격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미국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상태였고 또 이 제의가 들어온 시점에 이미 마리아나 제도 탈환이 완료되었기에 마오쩌둥의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2. 마리아나 제도 작전

사이판 전투를 통해 일본제국 본토 폭격을 위한 전진기지가 확보되자 미국은 즉시 공장에서 막 뽑아낸 B-29들을 사이판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전투가 채 종료되기도 전에 미군은 공병대를 투입하여 B-29용 비행장과 정비소를 건설하고 있었고, 이렇게 건설된 활주로로 B-29들이 하나둘씩 착륙하기 시작했다. 사이판은 어디까지나 Main Base 역할이었지, 로타나 티니언, 괌 등 탈환된 다른 섬에도 B-29를 위한 예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나중에는 사이판 섬 비행장에 착륙하려 보니 이륙하는 폭격기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섬의 비행장에 착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정도.

일본 폭격을 맡은 제21폭격기사령부는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돌입했다. 먼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전, 개구리 작전으로 건너뛴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 점령하 섬들을 대상으로 연습에 가까운 폭격을 시작했고, 11월 1일에는 B-29 편대가 도쿄 상공에 출현, 주요 타겟들의 항공사진을 촬영한 뒤 돌아갔다.

사이판에서 발진한 B-29의 첫 일본 폭격은 11월 24일에 시작되었다. 도쿄 외곽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을 주요 타겟으로 한 폭격은, 중국에서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이라 할 수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제트기류의 방해와 함께 정밀폭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3] 목표에의 명중률이 지극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1기의 B-29가 투입된 이 공습에서 손실은 단 1기에 그칠 정도로 일본군의 방공망은 B-29를 격추시킬 수단이 없었고 이후 B-29는 일본 본토 상공을 제집 드나들듯 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21폭격기사령부는 줄기차게 무사시노 공장 및 나카지마 항공기엔진 공장 등 주요 타겟을 폭격하는 한편 나고야 등지로 폭격의 대상을 확대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나마 공장이 파괴될까봐 우려한 일본이 생산 시설을 분산시키도록 하여 생산 효율이 떨어지는 효과는 있었지만 미군이 원했던 비행기 생산의 완전 중단은 달성하지 못했다. (United States Stategic Bombing Survey, 1946, p. 84)

그리고 찾아온 1945년, 일본 본토 공습에 또 다른 획기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3. 1945년

3.1. 커티스 르메이의 등장

1945년 1월, 유럽전선에서 중국의 제20폭격기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토 폭격의 최적임자로 거론되어 몇 달만에 다시 제21폭격기사령관이 된 사람이 있었다. 머나먼 석기시대로부터 수십만년을 타임슬립 미 육군항공대 소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었다.

부임 직후 르메이는 기존의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분석한 결과 "고고도 정밀폭격 꺼져!"라는 결론을 내린다. 르메이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 아무리 최신예 정밀폭격용 관측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밀폭격의 명중률은 저고도 폭격보다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본군 방공망이 도달할 수 없는 안전고도에서의 폭격시에는 제트기류로 인해 안 그래도 떨어지는 명중률이 개판난다.
  • 주요 전략타겟 몇 개만 부순들 큰 효과 없다. 전쟁 수행 능력을 꺾으려면 공장 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전쟁 수행원까지 제거해야 한다. 소위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라는 말이 이것이다. 하늘에서 아무리 폭탄을 쏟아부어도 민간인들을 동원해서 수리하고 악착같이 공장에서 군수품을 하나라도 더 뽑아내는 판국에는 폭격이 효과를 보기 힘들다.
  • 적 해군이 사실상 전멸한 지금, 우리 해군 항모함재기들이 적극적으로 호위로 붙을 수 있다. 덤으로, 이오 섬의 비행장을 확보하였으니 여기서 발진하는 장거리 호위전투기들로 B-29를 호위하여 안전고도 훨씬 아래로 폭격할 수 있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고도 정밀폭격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대규모의 폭격기를 저고도로 진입시켜 도시에 네이팜탄 도배를 해버리는, 말 그대로 도시 지우기였다. 기체 및 파일럿의 피해가 급증할 것이 명백했으나 어쨌든 르메이는 일본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이었고, 독일에서 나름 성과를 거둔 적도 있었기에 르메이의 의견이 먹힐 수 있었다. 르메이도 무작정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양반은 아니어서, 일본군 야간 방공전 능력은 형편없고 그나마 있는 방공무기도 고공으로 조준하고 있으니 저공 목표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할 것이다는 이유를 들며 첫 대공습을 야간에 실시하기로 했다.[4]

그리고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탐판을 도쿄 시가지에 뿌려댔다.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당시 도쿄의 건물 중 25%에 달하는 수치였다.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도쿄 대공습 이후에도 도쿄는 4월 초 및 5월 중순, 8월 초에도 수십여 기의 B-29로부터 집중폭격을 받았다.

도쿄 대공습이 일본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해당 항목 참조. 그런 심리적 영향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미군도 도쿄 대공습의 성과에 크게 환호했는데 격추 14기에 손상 42기라는 생각보다 경미한 피해에다가, 항공정찰 사진 판독 결과 말 그대로 도쿄가 잿더미석기시대로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원찮은 공습과 달리 이제서야 제대로 된 피해를 주었다고 미군은 인식한 것이다.

도쿄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르메이는 일본측이 정신차리고 방공망을 재조정하기 전에 재빨리 타격할 계획을 세운다.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나고야 공습은 폭격을 가한 범위가 도쿄보다 광범위한 덕에 피해는 적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고 실제로는 5.3km2에 해당하는 도시 면적이 소각되었고 더군다나 폭격기 피해가 전무했다. 도쿄 대공습 이후 3월의 전략폭격은 다음과 같다.

  • 3월 9~10일 도쿄 : 279기 투입. 사망자 8~10만. 건물 267,000여 채 파괴. 도시면적 41㎢ 전소.
  • 3월 11일 나고야 : 310기 투입. 도시면적 5.3 ㎢ 전소.
  • 3월 13~14일 오사카 : 274기 투입. 도시면적 21 ㎢ 전소. 사망자 4000여 명, 행방불명자 500여명
  • 3월 16~17일 고베 : 331기 투입. 도시면적 18 ㎢. 사망자 8천. 이재민 65만여 명.
  • 3월 18~19일 나고야 2차 : 도시면적 7.6 ㎢ 전소.

불과 10일만에 일본의 주요도시 4개가 지도에서 지워지는 수준의 처참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습 직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당당하게 폭격 경고문을 돌린 다음 그동안의 전과를 분석하며 추가 작전을 준비했다. 경고문에 대한 내용은 아래 항목 참고.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면서 카미카제 공격을 막아 달라는 해군의 요청으로 큐슈의 활주로 폭격작전에 끌려가면서 약 1달간 개점휴업(…)했다. 게다가 마침 5회에 걸친 대규모 폭격 작전으로 인해 소이탄의 재고도 거의 다 떨어져 이를 보충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완전히 전략폭격을 멈춘건 아니어서 르메이는 소규모의 B-29를 꾸준히 도쿄 등으로 보냈는데 이때는 폭격기 소티 부족으로 인해 부득이 정밀폭격을 해야 했다. 그래도 가끔 여유가 될때마다 100기 이상의 B-29를 동원했는데 특히 4월 15일에는 303기의 B-29를 투입해 도쿄 인근의 도시들-가와사키, 요코하마, 시즈오카-에 불벼락을 내렸다.

4월 동안에는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일본의 항만도시에 만 2천여개의 기뢰도 부설하였다. 그 결과 종전 직전까지 기뢰에만 백만톤이 넘어가는 수송선단이 침몰당하고, 기뢰를 피하려다 잠수함에 당해버린 배도 부지기수였다. 원자재 수입량은 80% 이상 감소하였다. 이는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 군수 산업의 목에 올가미를 조여버린 조치였다. 또한, 외부 점령지로부터의 식량 수입도 덩달아 감소하면서 일본 내 식량난이 크게 심각해졌다. 상세한 건 상기 링크 및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방된 5월 중순 이후 르메이는 다시 전략폭격에 나섰고 6월 초까지 주요 대도시를 초토화켰다. 5월 23~25일에 걸친 대공습에서 도쿄는 500기가 넘는 B-29의 융단폭격을 받았고, 5월 29일에는 519기의 B-29가 요코하마를 폭격했다. 폭격된 도시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 이미 일본 주요 대도시는 빠진 곳 없이 모조리 폭격을 받아서 2차, 3차에 걸쳐 폭격을 받는 지경이었다. 특히 5월 공습서부터는 이오지마에서 출격한 P-51 머스탱이 100기 이상 동행하면서 폭격기들을 호위했다.

6월 초가 되면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때릴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6월 중순, 사이판에서 헨리 아놀드와 만난 르메이는 협의 끝에 대도시는 그만. 이제 중소도시를 폭격한다!큰게 없으면 작은 걸 때리면 되지!는 합의를 한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6월 19일 후쿠오카, 시즈오카, 도요하시를 시작으로 6월 28일, 모지, 나베오카, 오카야마, 사세보가 7월 1일에는 구마모토, 구레, 시모노세키, 우베가 폭격당했다. 7월 3일에는 히메지, 고치, 타카마츠, 토쿠시마가 7월 6일에 아카시, 치바, 고후, 시미즈가 당했고, 7월 9일에는 기후, 사카이, 센다이, 와카야마가, 7월 12일에는 이치노미야, 쓰루가, 우츠노미야, 우와지마 등등. 너무 많아서 폭격된 도시를 옮겨 적으면 내용이 지나치게 길어질 정도.

언급된 도시만 봐도 규슈 남단의 오이타에서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모조리 공격받았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와 당시 가라후토라 불리던 일본령 남사할린 정도였다. 대신 홋카이도는 아래 따로 서술할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폭격을 받았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도 부산이나 원산, 함흥 등에 소규모의 폭격을 받은 걸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런 전략폭격과는 별개로 6월 하순 사이판에 전개한 315 폭격비행대는 역시 B-29를 기종으로 쓰고 있었으나 당시 미국의 모든 기술력이 결집된 최첨단 정밀폭격기기를 갖추고서 야간폭격에 돌입, 일본 전국에 산재한 주요 정유시설을 정밀폭격하였다. 그러나 워낙 르메이의 초토화 폭격의 인상이 강해 전쟁중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에는 분석해 보니 정제할 기름도 거의 없는 곳에 폭격했다[5]고 하여 묻혔다. 안습.(…)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역시 B-29에 의해 이루어졌다.

3.2. 제8공군의 폭격

유럽 전역에서 폭격임무를 담당하던 제8공군은 독일의 항복 직후 재배치되어 1945년 7월 16일부터 오키나와에 전개되어 일본 폭격에 가세했다. 독일을 상대하던 미군의 주력부대가 태평양으로 재배치되는 첫 단계였다. 미국 : 국력의 90%로 상대하던 독일이 GG쳤으니 이제부터 국력의 100%로 일본을 상대해드리죠

오키나와에 전개된 제8공군은 주로 규슈 일대에서의 제공권 제압에 나서면서 소규모 폭격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몰락 작전을 전후로 B-17 및 B-24 폭격기를 대대적으로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조기 항복하면서 약 1달여의 짧은 태평양 전쟁 참전을 끝냈다.

3.3. 전투기들의 폭격

P-51로 대표되는 장거리 전투기가 배치되고, 일본과 가까운 도서지역들이 미군에게 점령되면서 미 육군항공대 전투기들도 일본 폭격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들의 임무는 B-29의 호위였으나 1945년 5월이 지나면 폭격기들에 도전할 일본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들 전투기들도 로켓발사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소규모 공습에 나섰다.

공군 전투기들은 주로 일본군 소규모 비행장과,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주요 공장들, 철도역 등을 타겟으로 폭격에 나섰으며 가끔 움직이는 연안 수송선이나 기관차들은 제일 먼저 공격받았다.

한편, 육군과는 별개로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도 일본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7월 14일, 항모 함재기들이 도호쿠 일대를 폭격한 걸 시작으로 7월 15일에는 그동안 폭격에서 제외된 홋카이도가 항모 함재기 공습을 받았다. 이후 항모기동부대는 일본 동해안을 따라 움직이며 보름여동안 일본의 주요 항구도시를 타격했다. 그중 백미는 구레 군항 공습.

4. 일본군의 대응

그런 거 없다. 농담이 아니라, 당시 미국이 쏟아붓는 공격에 그냥 맞기만 했다. 사실 뭘 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1944년 후반기의 정밀폭격시에는 대본영이제 미국이 본토로 폭격을 퍼붓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대응에 나서며 요격기 부대를 배치하고, 해안을 따라 레이더인가 싶은 레이더를 설치하며 소형선들을 바다로 내보내 폭격기들을 사전에 탐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라도 했다. 그러나 미군들이 더욱 가까이 접근하고, 전술을 바꿔서 초토화폭격에 나서면서 대응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일이 이렇게 된데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 열악한 조기 경보능력
B-29들이 중국에서 날아들던 당시만해도 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먼저 폭격편대를 감지하고 본토에 연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나 제도가 미군 손에 떨어지면서 사정이 급변한다.

일단 지리적 특성을 보자면 서유럽 점령지를 적진과 자국 본토 사이에 두고 있던 독일과 달리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와 일본 본토 사이에는 이오지마 및 인근 오가사와라 제도를 빼면 이렇다할 점령지가 없었다. 점령지는 곧 레이더와 비행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땅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미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셈. 그나마도 이오지마 전투의 패배로 이오지마를 상실하면서 일본은 중요하고도 유일한 조기경보기지를 잃어버렸다.
얼핏 보면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영국의 경우 자국의 남부지역이 서유럽의 독일군 점령지역과 자국 중부지역의 주요 도시 및 공업지대 사이의 완충지 및 조기경보기지 역할을 나름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 기간 내내 조기 경보의 이점을 잃지 않았지만, 일본의 주요 도시 와 공업지역들은 죄다 태평양과 바로 인접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리적 핸디캡 만으로 설명하기엔 일본군 스스로의 능력 자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조기 경보장비인 레이더 부터가 참전국 중 최악이었다. 일본의 레이더들은 동시기 타국들이 보유한 레이더들에 비해 탐지거리, 정확도, 신뢰성 모두 뒤떨어졌다. 나름대로 이를 보완하겠다고 군용 청음기를 도쿄 인근에 집중 배치했으나 결과는 뭐…

이오지마가 사라지고 본토의 감지 수단이 열악한 상황에서, 일본 해군이 이오지마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 해군이란 존재는 허울만 남은 상태였고, 탐지용으로 내보낸 소형선박들은 목표로 할만한 대형선이 없으니 어선이나 격침시키고 있던 미군 잠수함들에게 열심히 사냥당하고 있었다. 더 뒤로 가면 격침시킬 어선마저도 없었는지 때릴 목표가 없어 화난 잠수한 승조원 중 자원한 몇몇이 연안에 상륙하여 폭탄을 설치하고 돌아오는 짓도 했다.

더군다나 일본 관료제의 경직성 때문에 공습 경보와 요격 명령의 전파 속도마저 지극히 느렸다. 십중 팔구는 B-29들이 이미 목표 상공에 도달할 때가 다 되어서야 발령되었다.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일본 서부, 중남부가 이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도쿄도 포함. 그나마도 이건 아직 이오지마가 미군 손에 떨어지기 전의 이야기이다. 이오지마가 점령된 뒤에는...

질도 떨어지는 와중에 남쪽에서 먼저 피켓 역할을 해줄 기지들을 상실함으로써 질도 양도 없어진 일본군은 그냥 망했어요.

한마디로 요약해서 당시 일본의 조기경보능력은 장비와 체계 모두 당시 주요 참전국들 중에서는 최악이었다.

  • 전투기들의 우울
탐지는 멸망 수준 이었으나 요격은 더 심각했다.

인도/중국에서 B-29가 출격하던 시기에는 B-29를 이용한 폭격 전술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데다 B-29 배치 초기의 각종 문제점들, 그리고 작전 거리상의 이유로 인한 작전고도의 문제가 겹치면서 일본 전투기들도 나름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B-29가 출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전투기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B-29가 높이 올라가 있을 적에는 일본군 기체는 거기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거나 어찌어찌 올라가 봤자 그 고도에서 B-29들을 쫓아가지 못했다. 전쟁 초부터 사용한 일본군의 주력기종들은 애초부터 고고도 작전은 생각도 않고 만들었기에 억지로 올라가다가 엔진이 퍼져버리고는 고도를 잃기 십상이었다. 전쟁 후반기에 나온 기체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나, 구형 기종보다는 비행 능력이 좋아서 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B-29 요격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고고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뿐이지, 올라가서 정상적인 전투기동을 할 수는 없었다. 이는 공기가 희박한 고고도에서 엔진의 성능을 유지할 수 있는 과급기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고, 그나마 배치된 것들도 성능이 떨어진데서 기인한다.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매달렸으나, 기본적인 공업능력과 기술, 그리고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미군의 공습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실패했다. 전쟁 중에 노획한 P-38에 장착된 것을 카피한 조잡한 수준의 과급기를 소수의 기체에 시험해 보는게 당시 일본이 발휘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능력이었다.

르메이의 등장과 함깨 B-29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전투기로 폭격기를 요격해볼 시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작전고도가 낮았던 일본기들에게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조건이었다. 따라서, 일단 예상 진로에 대기했다가 줄줄이 일격 후 이탈하는 형태로 요격을 시도했다. 그나마 이 전술이 가능한 기종은 전쟁 후반기에 나온 일부에 불과했고, 이오지마를 잃고 난 뒤에는 이것조차도 수행하기가 어려워졌다. 오는걸 미리 알아야 먼저 올라가 있던가 말던가 하지... 때문에, 이런 시도 자체의 성공률마저 매우 떨어졌다.

간신히 접근에 성공한다 해도 폭격기의 자체 방어 체계에 당해서 격추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화력 부족 때문이었다. 비행성능 뿐만이 아니라 내구성도 우수했던 B-29를 상대로는 7.7mm 기총은 당연히 무용지물이었고, 12.7~13mm 기총이나 심지어는 해군의 구형 20mm 기관포로도 좀처럼 효과가 없었다. 이 기관포는 제로센에 장착된 것으로 스위스제 기관포의 카피였다. 근거리에서의 위력은 좋았으나, 탄도가 부정확하여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탄착군이 흩어지고 명중률과 위력이 크게 떨어져서 탄 소모가 많아지는 바람에, 유효탄을 내기도 전에 탄을 다 소모하는 일이 많았다. 바꿔 말하자면 B-29에 제대로 유효탄을 내려면 B-29의 방어화망 안으로 바득바득 들어가야만 한다는 얘기. 이들이 상대해야 했던 폭격기의 방어화력에 대해서는 B-29항목을 참고. 괜히 요새가 아니다.

그래서, 일본 육군은 독일로부터 마우저사제 20mm 기관포를 수입하고,[6] 일본 해군은 기존의 20mm기관포를 개량하고, 30mm 기관포도 얹어봤지만 이래저래 역부족이었다.

무장 자체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그걸 운용하는 기체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제로나 하야부사 같은 초기 주력기들은 애초에 허약체질인지라 이런 대형 무장을 운용하기가 매우 힘들었고, 후반기에 등장한 기체들은 전쟁 후반들어서 열악해진 본토의 공업능력 덕분에 성능은 고사하고 신뢰성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제해권을 잃어버리면서 남방 점령지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이 급감하는 바람에 기체 생산에 필요한 재료가 부실해진데다, 인력관리 개념은 엿바꿔 먹은 당시 일본의 높으신 분들 덕에 생산을 책임질 숙련공들이 일선의 총알받이로 사라지면서 기체의 완성도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일선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신형기종보다는 구형기종을 선호하고, 같은 기종이라면 최신 생산분을 외면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7] 그나마 신뢰성을 인정 받는 기종들은 전쟁 초기에 제작된 구형기들 뿐이었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들을 요격에 동원하기엔 그 능력이 낙제점이었다.

비행기를 돌릴 연료도 위와 같은 이유로 엔진이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기준으로 집어넣는 실정이다보니 그나마 몇 없던 멀쩡한 기체들마저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송탄유라고 해서 소나무에서 추출한 기름을 넣기까지 했는데 엔진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이 때문에 아예 전투기의 무장과 장갑을 떼어내 버리고 B-29에 직접 충돌하는 카미카제 전술이 도입되기도 했다.[8] 미군 함정을 상대하는 것처럼 '작전 투입=무조건 인원 손실'같은 무자비한 조건은 아니었고, 기본적으로는 조종사의 생환을 전제(동체 충돌 후 낙하산으로 탈출)로 하는 것이었지만, 일단 기체는 100% 손실이었고, 인원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9]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투기만 이런 판이 아니라 이들을 조종할 조종사도 멀쩡하지 않았다. 이 때쯤 일본의 조종사 양성능력은 일선의 수요를 충족하기엔 이미 한계를 넘어간 상황이었다. 한정된 양성기관으로 수요를 충족하려다보니 조종사 양성에 들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와 비례하여 새로 배출되는 조종사들의 기량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동시기 미군 조종사들과 비교하면 일본군은 연습생 수준이었다.

이렇게 B-29만으로도 피똥을 싸던 일본군에게 재앙이 닥쳤으니, 이오지마를 점령한 미군이 이곳을 기지로 하여 P-51,P-47을 호위 전투기로 딸려보내기 시작[10]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조종사들이 폭격기를 요격하기는 커녕, 호위기도 못 뚫고 죽어나갔고 겨우 호위망을 뚫고 폭격기에 접근한다고 한들 B-29가 워낙 사기맷집에다가 자체적인 방어무장이 워낙 충실해서 폭격기 잡으려다 오히려 요격기가 격추되기 쉬웠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 쯤에 이르면 전투기 부대들은 아예 B-29 요격에 사실상 손을 놓아버린다. 일본 전투기들의 씨가 말라 버렸고, 그나마 남은 것은 본토 결전에 대비한 비축물자로 남겨뒀기 때문이다.

  • 존재감 'Zero', 대공포
비행기로 폭격을 막는것이 불가능하다면 대공포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대공포는 더욱 막장이었다.
전쟁 당시 일본은 '신주불멸'[11] 운운하며 본토의 대공화기 개발과 배치를 등한시한 탓에 B-29가 들이닥치던 시점에서 B-29에 대해 유효한 대구경 대공화기는 소수의 독일제 대공포의 복제품들 뿐이었다. 나머지는 소/중구경 화기들 뿐이었으나 고고도의 B-29들을 상대로 이들에게 뭔가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였고,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계속된 공습에 차츰 소모되어 갔고, 전쟁 말기의 미군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를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사실 일본 본토의 방공능력이 얼마나 능력 이하였는지는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있다. 커티스 르메이가 중국 전선에 있을 당시 특기인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을 시전하여 만주에 있는 일본군의 방공망 한가운데를 날아보았다. 그랬더니 요격기는 B-29의 순항고도에 미치지도 못했고 대공포도 르메이의 기체에 한발 명중했지만 기체 손상이 없다시피했다. 만주는 관동군의 본거지인지라 그 전략적 중요도가 상당히 큰데도 이런 판이었던 거다. 훗날 마리아나 제도에 날아온 르메이가 폭격 전술을 과감하게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폭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5. 결과

필리핀 탈환 이후 일본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으나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은 전쟁의 끝을 최소 1년 이상 앞당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남방 점령지와 본토과 유리되자 온갖 똥철을 긁어모으고 비축자원을 쏟아부으며 발악에 나섰지만 대규모 폭격으로 산업시설을 모조리 날려먹었다. 그리고 산업시설에서 일할 노동자들 다수가 죽거나 다치고, 생존자들도 겁에 질려 시골로 피난길에 떠났다.

이처럼 폭격받은 주요 도시 시민들은 이 전쟁은 뭔 짓을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처절히 깨달았다.[12] 일본군은 본토와 국민들을 지켜내지도 못했고, 오히려 황거가 폭격받음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13] 항복방속 당시 군부나 일반 국민들이나 큰 반발 없이 항복을 받아들인 것도 계속된 전략폭격에 따른 패배감에 기인한 것이다.

6. 여담

6.1. 다음에 폭격할 곳은 여기다

유럽에서의 경험에 따라, 미군은 일본에서의 시가전도 가급적 회피하려고 했던 미군 측은 '공업지대 겸 일본 본토에서의 일본 제국 육군의 군사적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도시 리스트를 정해놓고서, 그 리스트에 따라 하나씩 도시를 소거해 나갔다. 데스노트가 따로 없네 그리고 그 리스트를 전단으로 만들어서 일본 본토에 뿌리기까지 했다.희망 고문

이러한 전단살포가 일본인의 전쟁수행의지에 준 타격은 엄청난 것이어서, 전쟁 후 연합군의 조사에 따르면 군수품을 납품하던 어느 기업가는 연합군 조사관에게 "당당하게 폭격할 곳을 지정하고 그걸 실행하는 미군에게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자각해야 했다. 덤으로 만일 폭격이 가해질 경우 입을 피해를 생각해서 공장의 중요한 공작기계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고 생산이 중단되고 생산효율도 저하되었다"고 진술했다.

또 그 와중에 일본 측의 방어태세에 혼란을 초래하기 위해 그중 어디부터 폭격할지까지 적어놓지는 않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한마디로, 어디 어디를 작살낼건데 어디부터 작살날지는 내 맘대로라는 것이다. 대상 도시의 거주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러시안 룰렛보다 더한 공포의 랜덤빵이었다. 그래서 몇몇 대도시가 폭격을 맞으면서 일부 도시는 시민들이 시골로 이주해나가는 바람에 실제 폭격 당시 거주하는 시민이 거의 없는 유령 도시일 정도였다고. 덕분에 일본 전체의 공업생산량은 40% 이하로 떨어졌다.

6.2. Operation Starvation - 또 하나의 악몽

Operation Starvation, 즉 기아 작전은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의 해안을 기뢰로 도배해서 일본의 해상 수송망을 마비시키는 작전이었다. 해당 작전을 벌이던 당시 미군이 노렸던 해상 수송이란 한반도 및 중국으로 부터의 물자 수입선과 일본 본토 내해의 해상운송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기뢰전은 직접적인 폭격에 비해 눈에 보이는 효과는 작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오히려 더욱 뛰어났다.
일본 본토와 동남아 점령지 사이의 수송은 이미 1944년에 절단나 버렸기 때문에, 1945년 들어서 외부로부터의 물자, 그 중에서도 점령지에서 수탈한 식량의 수입은 중국과 한반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본토 내에서의 물류 이동도 상당 비중을 해상 운송이 차지한다. 이 작전으로 인해 일본과 해외와의 해상 수송 및 연안 해운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것들을 막아버리는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부산항천항 등 주요 항구들이 기뢰로 폐쇄되고, 경부 축선과 호남 축선이 고속도로, 철도 할 것 없이 죄다 끊긴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모든 자원 수급이 한계에 다다른 일본에겐 또다른 치명타였다.

Operation Starvation은 도시 폭격과는 별개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해안가에 시체들이 가득하다는 흉흉한 얘기가 나돌았다. 그 시체들이 무엇에 당한 건지는 뻔할 뻔자다. 한편, 전쟁 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 노년층들은 이 시기를 '소카이(疏開)'라고 부르며 치를 떤다. 폭격을 피해서 낯선 곳에 온 것도 모자라서 먹을 것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당연지사. 절대적인 식량의 양 자체가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있는 식량도 해운이 마비되면서 제대로 운송하지 못해 식량 공급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일본 해상자위대의 소해 전력은 미국과 함께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는 말이 있는데 루머에 가깝다. 자위대의 전력은 냉전 시기에 미국 측의 의도적인 능력 몰아주기며. 자위대의 대잠 전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6.3. 교토는 왜 안 때렸습니까?

교토가 제외됐던 이유는 대외적으로는 문화재 보호 차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다른 의견도 있었다. 일단 문화재 보호 차원이었다는 이유의 실제 언급은 원자폭탄 표적선정 위원회의 1945년 5월 30일 회의. 맨해튼 계획 책임자 그로브스 장군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당시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은 당대 미국인 중에선 보기 드물게 일본 경험이 꽤 많은 사람이었고(젊을 적 신혼 여행지가 교토...), 특히 교토의 학구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때문에 핵폭격 표적 관련 논의 현장에서도 아름다운 교토를 파괴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이 일본인들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나마 문화인인 교토 시민들이 아니면 핵폭격의 의미조차 못 깨달을 거다라고 반론할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교토가 핵폭격 대상에서 벗어난 건 스팀슨 개인의 강력한 독단 탓이었다. 그는 교토를 지키기 위해, "맨해튼 계획에서 내가 최고 책임자였던 일은 아직 없지만, 이 일만은 내가 결정권자다. 당신들은 내게 보고서만 가지고 오면 된다."라고 말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이후 투하 직전까지 그로브스와 거의 매일같이 교토 핵폭격 문제로 싸움을 거듭했다. 그래서 훗날 쿄토부지사와 쿄토시 시장이 스팀슨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참배를 올렸다 한다.

그와 아울러 교토가 폭격에서 제외된 다른 이유로는 우선 덴노를 죽이면 일본의 항복이 무산되어 본토 상륙시에 입을 피해를 우려한 것이 있다. 미군이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은 이오지마 전투에서 커다란 손실을 입고, 일본 문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검토한 이후라는 주장이 있으나, 당시 텐노는 도쿄에 살고 있었다는 반론이 있다. 게다가 도쿄 대공습에서 덴노의 황거(皇居)도 불 타 올랐다. 노리고 폭격한 것은 아니지만 주위가 다 불바다인데 황거만 무사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다 타지는 않았지만, 하필이면 타버린 건물들의 대부분이 에도 시대 정이대장군(쇼군)의 궁정건물들이어서 일본무가궁정건축 및 예술연구에 꽤 타격을 주었다. 또한 교토에 있던 구 황거는 오히려 황거라서 폭격을 맞았다(…). 빈집털이

이외에도 교토에 폭격할만한 산업시설이 많지 않아서 순위가 밀렸다는 관측도 있다.

다만, 교토에 대한 폭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45년 1월 16일, 3월 19일, 4월 16일, 5월 11일, 6월 26일의 공습이 대표적. 총 폭격 회수는 20회가 넘으며, 이중 5월 11일에는 교토 어소, 즉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곳도 폭격해 버렸다. 또한 교토대 이화학 연구소는 당시 일본 원자폭탄 개발계획의 중추 중 하나였으며 해군의 직접자금지원을 받아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대의 사이클로트론(입자 가속기)이 건설중이던 곳이었고, 당연히 폭격을 받았다. 5월 11일 공습을 제외하면 전부 저런 대학 연구소를 노린 폭격이었다. 교토가 도쿄 이상으로 당시 일본의 학문 및 과학기술의 중추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며, 이 문제 때문에 커티스 르메이는 교토야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6.4. 히로시마는 왜 안 때렸습니까?

최초에는 히로시마, 나가사키도 이 폭격 리스트에 있었지만, 핵무기 개발이 완료됨에 따라 제2안으로서의 핵무기 투하 목표지점이 되면서 소이탄 세례를 면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거주민들 중 상당수는 다른 도시가 두세번 폭격 당할 동안 한번도 공격받지 않은 것에 의아해하며, 불길한 소문이 돌아서 적지 않은 거주민들이 시골로 이사갔다고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핵 떨어졌을 때 피해입은 사람이 얼마 안 된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운명의 그 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다.

이는 미군측이 일본의 핵무장을 확신했고, 일본측이 미군이 제시한 무조건 항복안을 받아들이기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측은 '천황제'와 '전쟁전 식민지의 유지' 등등의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일견 어이없긴 하지만, 21세기의 관점에서 볼때, 일본은 그 당시에 항복조건으로 내세운 것들을 대부분 획득했다. 영토는 미군이 점령한건 대부분 돌려받았고, 러시아(홋카이도 이북의 열도), 한반도, 대만 등의 '식민지'나 만주국 등 사실상 일본이 지배한 괴뢰국만 상실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오가사와라(=이오지마), 오키나와, 홋카이도 등이 식민지가 아니었느냐는 지적이 있긴 한데 당시 일본은 법적으로 이들 지역을 식민지가 아닌 '내지'의 일부로서 관리했다.

6.5. 사할린은 왜 안 때렸습니까?

당시 일본의 내지였던 가라후토(現 사할린)에는 폭격이 없었다. 그 덕분에 미군 공습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5개월 뒤에 찾아온 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6. 영국군의 공습 참가

영국 역시 독일 항복 이후 유럽의 중폭격기들을 오키나와로 재배치하여 '타이거 부대'로 이름 붙이고 일본 본토 폭격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항복이 조금만 늦었어도 B-29 못지않은 괴물 랭커스터가 일본의 그나마 남은 도시들을 블록버스터로 블록버스터하게 날려 버렸을 터였다.

이외에 영국 태평양함대는 미군과 더불어 전쟁말기에 공습에 참가했다. 그 예로 구레 군항 공습. 또한 가미가제 공격에 장갑항모와 함재기 일부가 손상을 입기도 했다.

6.7. 한반도 공격

위에 잠시 언급했지만 일본 본토는 아니지만 일본 본토와 가장 가까운 식민지인 한반도에도 소규모 공습이 있었다. 물론 커티스 르메이가 고안한, 도시에 대한 저고도 융단폭격은 아니었고 원산, 함흥, 부산 등에 있는 산업시설, 군사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이나 소규모의 기뢰 살포 작전을 시행했다. 또한 중국을 기지로 한 폭격기대가 일본 본토로 향할 때 한반도를 통과하면서 조선 주둔군의 대공포나 항공대가 폭격기대를 추격한 사례도 있으나 폭격기대가 격추된 사례는 전무하다. 당시 일반 시민들 중엔 이런 소규모 폭격과 일본으로부터 들은 대규모 폭격에 대한 소문 때문에 미군이 한반도 또한 폭격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국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미군이 우리를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라며 안심시켰다고.

6.8. 굳이 도시를 때릴 필요가 있었을까?

전후에 발간된 전략폭격분석보고서(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에서는 대도시에 가해진 소이탄 폭격이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미 원자재가 모자라서 공장을 최대 효율로 제대로 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장을 파괴해도 효과는 제한적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제안한 최적의 공격 방식은 일본의 철도망 중 다리와 철도 허브를 비롯한 취약 지점을 폭격해서 철도망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산지가 많은 일본은 자동차 도로망이 열악하여 철도를 통해 대부분의 물자를 수송하고 있으니, 잠수함과 기뢰로 해상 수송 라인을 막아버린 뒤 철도를 없애버리면 규슈와 홋카이도에서 더 이상 석탄을 캐오지 못하는 본토는 완전히 마비되고 각 도시는 철도 없이 고립되어 전쟁 수행 능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Ibid., p. 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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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신깨서 지켜주는 일본 운운하는 것.
  • [2] 같은 이유로 역시 본토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벌어진 이오지마 전투도 일본 본토에서의 첫 지상전투로 기록된다.
  • [3] 당시 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인 핸셀 소장(Haywood S. Hansell)의 방침이었다. 유럽에서는 전략 폭격을 통해 독일의 항공기 생산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등 커티스 르메이에 맞먹는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일본에서는 자신의 정밀 폭격에 대한 집착이 제트기류에 좌절되어 그닥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교리 자체는 미공군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서 종전 후 핸셀은 정밀 폭격 무기의 개발을 감독하다가 공군사관학교에서 정밀 폭격 교리를 가르쳤다. 핸셀이 원했던 수준의 정밀성은 걸프 전쟁 때에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 [4] 1945년 기준으로 야간방공전 능력이 가장 탁월한 나라는 주야 가릴것없이 신나게 두들겨맞고 있던 독일이었고, 그 다음이 독일의 야간 공습에 시달렸던 영국이었다.
  • [5] 이미 1944년 이후 남방 점령지와의 해운이 완전히 끊겨서 일본의 석유 수급은 0에 가까웠다.
  • [6] 그러나 도입수량이 많지 않아서 종전 즈음에는 남아난게 없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한 일본의 가상전기나 자위물에 자주 등장하는 "마우저포"가 바로 이 녀석이다.
  • [7]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분명 같은 기종인데 일렬로 주기하고 보니 치수가 제각각이라던가, 편대비행을 하는데 각 기체별 순항속도가 들쑥날쑥해서 편대 유지조차 어려웠다던가 하는 등 이 당시 지급받은 기체들에 대한 불신이 드러나는 대목이 적지 않다.
  • [8] 이와 관련해서 '진천제공대'가 유명하지만, '진천제공대' 자체가 카미카제 비행대인 것은 아니다.
  • [9] 이런 예는 사실 전쟁 말기 독일에서도 있었다. '엘베 특별공격대'라는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일본과는 달리 투입한 자원 대비 효율이 나쁘다는 이유로 1회성에 그쳤다. 다만 일부 요격 특화 부대의 경우 최악의 경우에 한해 동체 충돌을 권고하기도 했다.
  • [10] 덤으로 이오지마는 점령 이후, B-29들의 비상 착륙지가 되면서 승무원들의 생환율이 높아졌다.
  • [11] 쉽게 말해서 '일본은 신의 나라이므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란 정신승리.
  • [12] 왜 도시 한정이냐면, 미군의 폭격을 받지 못한 외딴 동네에서는 항복 이후에도 싸울 수 있는데 왜 항복하나효! 하는 분위기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 대표적으로 1945년 8월 하순에 있었던 마츠에 소요 사건이 있다. 이처럼 전쟁의 참화를 느끼지 못하는 쪽은 아무리 전세가 불리해져도 항복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일본의 특징이다. 군부도 마찬가지인데, 본토의 일본군은 대부분 항복의 불가피함을 인정한 반면, 남방 점령지의 일본군 지휘관들은 아직 부대도 멀쩡하고 싸울 수 있는데 왜 항복하냐는 반응이었다.
  • [13] 황거 폭격은 우연이었고, 미국은 발악하는 일본을 괜히 자극할까 황거 폭격을 금지했다. 결국 덴노는 일본군이 아니라 미군이 지켜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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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7 12: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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