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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last modified: 2015-08-08 00:52:15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원인
2.1. 통합 지휘체계의 부재
2.2. 문민통제의 부재
2.3. 지리적인 영향
3. 실황
3.1. 질투
3.2. 군 체계
3.3. 군 내부의 파벌과 거대한 독립조직
3.4. 따로따로 논 '합동'전투
3.5. 장비 개발
3.6. 보급 체계 분리
3.7. 정보의 비공유
4. 결과
5. 전후
6. 다른 나라는?
7. 기타


1. 개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 한국 속담

일본에는 해군과 육군이라는 두 국가가 존재한다. 그 둘의 관계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의 전투기 제작을 도왔던 독일인 기술자의 수기에서(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방영)

일본군육군해군이 서로 다른 나라처럼 싸워댄 현상. 모든 군대의 반면교사이자, 군의 부패와 세력화·파벌화가 심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자기들이 멸망시킨 모 나라중앙정치체계를 두고 "미개한 조센징들은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망했지"라고 비웃곤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은 그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분열을, 그것도 20세기에 대놓고 보여줬다. 왜란·호란 당시 조선의 지도부는 붕당 때문에 병크를 터트리긴 했어도 일본 육·해군만큼의 병크를 터뜨리지는 않았고 나름 일치단결했었다.

2. 원인

일본군 육군의 기원은 조슈 번(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 현 일대)의 타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기헤이타이(奇兵隊)이며, 일본군 해군의 기원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수군과 큐슈의 번 - 특히 사츠마 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 현 일대) - 소속의 수군이었다. 뿌리부터 이렇게 달랐다.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른 게 꼭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1] 유독 일본에서 이 경우가 부각되는 건 양군의 주축인 조슈 번과 사츠마 번이 군대가 생기기 전부터 앙숙이었기 때문. 두 번은 메이지 유신 때 동맹을 이뤄 막부를 타도하긴 했는데, 원래 조슈 번은 토막(討幕)을 기치로 내세웠으나, 사츠마 번은 공무합체(公武合体)와 토막이 혼재하여 시마즈 히사미츠(島津 久光)가 테라다야 사건(寺田屋事件)을 일으켜 토막파 번사들을 탄압하는 등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양번(兩藩)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계기는 쿠게(公家) 아네가코지 긴토모(姉小寺 公知) 암살 사건이었다. 긴토모가 암살된 자리에서 사츠마 번사이자 막말 4대 인참인 다나카 신베에(田中 新兵衛)의 검이 발견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신베에를 조사하였으나 신베에는 검을 빼앗은 후 그대로 할복자결한다. 진범을 잡기가 애매해진 조정에서는 사츠마의 교토 황거 수비자격을 박탈했고, 사츠마는 이를 조슈의 계략이라고 여겨 그대로 아이즈 번(会津藩, 지금의 후쿠시마 현 서부)·쿠와나 번(桑名藩, 지금의 미에 현 일대)과 손을 잡아 오히려 조슈 번을 황거에서 몰아낸다. 한편 코메이 덴노(孝明天皇)는 조정의 존왕양이 쿠게들을 몰아내기 위해 8월 18일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을 일으킨다.[2] 삽시간에 교토에서 밀려난 조슈 번은 금문의 변을 일으켜 코메이 덴노를 납치하려 했으나 오히려 사츠마·아이즈·쿠와나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다.[3] 이후 제1차 조슈 정토 때도 사츠마는 선봉에 서서 조슈를 공격하였다. 그러다 도사 번(土佐藩)의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에 나서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의 '막부토벌의 대호령' 등을 거치면서 사츠마는 재빨리 토막으로 전향하여 에도 막부 타도에 성공한다.
그러나 료마가 오미야 사건(近江屋事件)으로 암살되면서 조슈와 사츠마 사이는 다시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흔히 정한논쟁이라 불리는 메이지 6년의 정변(明治六年政変)도 조슈와 사츠마의 권력다툼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할 정도. 결국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에토 신페이(江藤 新平)·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 種臣) 등 정한파들이 패배하면서 권력은 급속도로 조슈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정한파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가의 난·신푸렌의 난·세이난 전쟁 등을 차례대로 일으키나 모두 진압당하고 만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조슈 출신 인사들은 육군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사츠마 출신들은 큰 타격을 입긴 했으나 아주 박멸된 것은 아니라서 사이고 츠구미치(西郷 従道)를 중심으로 해군을 장악한다.

이랬으니 육·해군이 따로따로 논 건 불 보듯 뻔했다. 육·해군에서 각각 조슈와 사츠마 출신들이 대부분의 고위직을 독점하였으며,[4] 고급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대학·해군대학이 생기고 나서야 특정 지역 출신의 승진 우대 관행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출신 번이 아닌, 육군과 해군 그 자체로서 대립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오히려 전보다 더 분리가 심해졌다는 견해도 있는데 워낙 시절이 어수선하고 나라 체계 전체를 새롭게 새우는 과정이 메이지 유신이었다보니, 초창기 양군 멤버들은 출신지는 달라도 인맥은 어느 정도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서로 인맥으로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이 생긴 뒤에는 아예 '학연' 단계에서 분리가 이루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을 맞댈 일이 없는 완전히 분리된 집단이 된 것이다.
여기에 육·해군은 서로와의 차별화를 명분으로 다른 용어를 썼다. 교육기관·총사령부·총사령관의 명칭을 육군은 육군사관학교·참모본부·참모총장, 해군은 해군병학교·군령부·군령부총장이라고 붙일 정도였다. 육군에서 덴고(点呼)[5]라고 하는 것을 해군에서는 준켄(巡検)[6][7]이라 불렀다. 심지어 '대장'이라는 단어를 한 쪽은 '다이쇼', 다른 한쪽은 '타이쇼'라 불렀다.

여기에 일본인 특유의 소집단주의와 관료주의가 결합하여 전체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자신의 조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도 컸다. 그 누가 일본인의 협동정신이 좋다고 했는가 이것은 비단 육·해군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업무가 조금이라도 겹치는 조직은 거의 다 대립관계에 있었다고 보면 된다. 헌병·경찰의 대립, 경찰에서는 일반경찰·특별고등경찰의 대립이 있었으며, 육군에서는 관동군·대본영의 대립(관동군은 덴노 직속이었기 때문에, 대본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병 병과기갑 병과의 대립[8]이 있었다. 해군에서도 연합함대[9]·군령부[10], 함대·육전대·항공대, 조약파[11]·함대파[12]가 서로 열심히 대립했다(…).

2.1. 통합 지휘체계의 부재

일본의 육해군은 군령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즉, 별개의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육군과 해군은 모두 참모본부(参謀本部)에서 군령을 담당했으나, 1888년 해군참모본부가 분리되고 1893년 해군참모본부가 해군군령부(軍令部)가 되면서 해군에 한정하여 평시 군령권을 가지게 된다. 1903년 부터는 전시 군령권도 독립적으로 가지게 된다. 군령부는 참모본부와 마찬가지로 덴노에게 직속되어 있고, 작전 계획을 보고 한 다음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일단 덴노 휘하의 어전 회의인 '대본영'에서 육해군의 작전을 총괄한다는 개념은 있었지만 원칙상 육해군의 작전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일본역사상 덴노가 절대권력을 휘두른 적은 거의 없고[13], 오히려 형식적으로 그 아래 있는 인물들이 신격화된 덴노를 호가호위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다보니 허수아비 덴노 아래 "섭정"이나 "쇼군", 또는 "수상", "", ""들이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인 수상이 손댈 수 없는 대본영이 육군과 해군의 각축장이 된 것은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군대는 어찌되었든 간에 모든 병력이 국가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그 목적에 맞게 행동을 하는 실행자 입장이다. 그런데 일본은 역사적으로 보면 무사 = 군인 계급인 사무라이가 짱먹는 봉건주의 국가에서 발전해왔다. 때문에 비록 현대화와 근대화의 탈은 썼지만, 일본 육군과 해군이 각각 자기들이 봉건영주인 듯 인식하고 있던 것이 문제. 이 둘을 위에서 통합 지휘, 조율하려니 위에서 설명한대로 육군과 해군끼리 싸우고, 각각 군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심지어 같은 부서 안에서도 싸우고 해서 말을 안 듣는 게 문제였다.

일본정부나 뜻있는 군인사들도 이런 삽질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고, 덴노 대신 실질적으로 대본영을 지휘할 수 있는 수장을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대본영 총장과 부총장을 만들어 육해군이 교대로 맡는 방안이 있었으나, 이것도 각각 상대편이 자신을 지휘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양측의 반대가 심해 이뤄질 수 없었다.

2.2. 문민통제의 부재

이 구조는 일본의 전통이 크게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체계에서 본떠온 측면도 만만치 않다. 프로이센 군대 역시 프로이센 왕(뒤의 독일 제국 황제)에게만 책임을 지고, 의회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절대주의 군국주의 국가 체계였으며, 독일 제국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반영되었다. 아무튼 전근대 시대에는 군주가 직접적으로 군대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이러한 체계는 전근대 시대에는 군주의 전권을 확대하여 중앙집권과 국가의 전권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각국이 군대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선진 열강국에서 군대의 규모는 거대해지고 복잡성과 전문성은 고도로 발전하였다. 이로서 군대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관료제 조직이 되었으며, 전근대 시대와는 달리 군주가 마음대로 군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군을 견제할 수 있는 정부 관료제나 의회 민주제의 발달은 이에 발맞추지 못했고, 군은 오히려 정부나 의회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 군주를 이용하게 된다.

정부,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고 군주에게 충성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군이 정부와 의회의 간섭을 바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를 얻은 것이다. 군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만 '군주에게 충성과 목숨을 바쳐서 싸우는 진정한 신하'이며, 정부 관료들은 그저 잡다한 사무처리를 하라고 고용된 나약한 책상물림일 뿐이고 의회의 정치가들은 그저 무지랭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민주주의랍시고 권력을 잡은 무뢰배들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충성스럽고 용맹한 신하인 '군대'를 전적으로 보조하는 존재일 뿐, 감히 군대를 통제할 권리는 없게 된다. 따라서 통제할 모든 책임은 군주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황제이니 하는 거창한 직함과 권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현실에서는 군주단 한 명의 개인(거기에 기껏해야 소수의 측근이 더해지는 정도)에 불과하다. 군주라고 하는 개인의 능력은 군대라고 하는 거대하고 조직화된 집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고, 실질적으로는 단지 전통적인 권위를 갖추고 있다는 것만이 군주가 군대에게 우월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군주가 결국 개인일 뿐이이므로 혼자 힘으로 몇십, 몇백만명의 조직적인 활동을 당해내지 못하는건 당연한 이치이다. 군대는 마음만 먹으면 군주에게 가는 모든 정보를 통제하여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다.

프로이센 군국주의 체계의 군대는 사실상 군주를 군대의 꼭두각시 장식품으로 만들 수 있으며, 군대 자체가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어 제멋대로 굴 수 있게 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고삐 풀린 맹견 꼴이 된 군부는 명목상 의회와 민간 정부의 통솔을 받게 된 시점에서도 그 통제를 따르려 들 리가 없다. 이는 실제 독일 역사에서도 생생하게 증명되었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역시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이 개전한 시점에서 실권을 군부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 제국이 해체되면서 프로이센 군국주의는 독일에서는 약화되었다. 하지만 약화된 상황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 행정부는 각지의 (우파)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당시 독일군을 장악하고 있는 한스 폰 젝트에게 진압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만 했을 정도로 군부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다. 군부는 대중적 지지를 받던 히틀러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마음에 안들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끝내고 권위적인 통치체제로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오히려 히틀러에게 역관광을 당하고 끌려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히틀러조차 군부 고위층을 함부로 숙청하지 못했고 그들을 바꿔야 했을때면 실권은 없애도 겉으로는 진급시키고 대우를 유지시키는 식으로 돌려서 해야했을 정도로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군부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경계'의 수준일 뿐, 원가 히틀러가 독재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기 때문에 군이 히틀러의 통제를 벗어나서 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어려웠다.

일본에는 독일에서 이식된 군국주의가 오히려 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강화한 후, 일본식 봉건제 전통[14]와 결합하여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각군이 아무리 심각하게 반목한 다른 나라 군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합의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정치'가 '군'에 우선되는 문민통제가 있었기 때문인데 일본은 군이 정치에 우선하는 상태가 지속되다보니 이렇게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서 2차 세계대전의 미국과 영국 등은 대통령/수상, 의회 등에서 적절하게 조율이 가능했고, 소련은 스탈린 마음에 안 들면 누구도 목숨보전 하기 힘들 시기였다. 좋건 싫건 스탈린 앞에서는 모두가 위 아 더 월드 심지어 육군, 해군, 공군, 무장친위대가 따로 놀던 독일조차도 아돌프 히틀러가 작정하면 교통정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이전부터 군이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내각은 '현임 무관'이 취임해야 하는 장관을 물리는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냥 총리대신을 다짜고짜 죽여버리는(…) 방법으로 처리했으며, 정부의 허가없이 자기들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정도로 정부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나 내각이 군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할리가 없다. 즉, 유독 일본만 저 모양이었던 셈. 역시 덴노는 허수아비

실제로 덴노에게도 군에서는 제대로 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쇼와 덴노 히로히토는 직속부하인 시종무관들을 각지에 보내서 직접 상황을 알아보고서야 본토결전이 벌어지면 일본이 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정도는 변명 스럽기도 하지만.

패배하면 나라가 끝장날 상황에서도 자기네 전공 세우자고 다른 나라에 전쟁을 일으키는 꼴이니,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할 자국민 보호는 커녕 1억 총 옥쇄 같은 헛소리를 한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상식적으로 보면 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라 일본인들이 전국시대부터 시작해서 서남전쟁에 이르기까지 하도 서로 치고 박기만 해서 사람목숨이 파리목숨으로 보이는 인명 경시에다가 전쟁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막장스러운 행보를 걷게 되지 않았냐는 추측까지 나올 지경이다.(...) 이게 제일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군령권 만이 아니라 군정권 역시 분리되어서 육군성해군성이 따로 있었다. 이것 자체는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이 대부분 공유했던 체계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부서는 별도로 있어도 내각이 육해군을 통합적으로 규율할 수 있었지만, 일본 제국의 경우에는 군의 독립성이 강해서 내각이 문민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핬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육해군이 따로따로 군벌화 되는 토양이 조성되었다.

여담으로 흔히들 정치불신이 심해지면, '국회의원이 하는게 머있냐 숫자 줄여라. 의원 보좌관도 다 없애라. 국회 축소해라. 기성정당 다 필요없다 무조건 무소속'같은 주장들이 난무하고 또 이런걸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대중정서에 영합하는 정치인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정말 근시안적인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본문의 서술처럼 개인(혹은 소수)의 능력과 시간은 수십, 수백만의 조직화된 집단에 비해 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과 수백명의 국회의원들이 100만명이 넘는 공무원을 통제,견제 해야하는 상황에서 의원숫자를 줄이고, 보좌관을 줄이고, 국회 조직을 축소하는 것은 그만큼 국회의원의 눈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이다. 그나마 국회의원들은 선거 때문에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견제의 시선에서 벗어난 공무원들은...안봐도 뻔한 것이다.

2.3. 지리적인 영향

일본 육군은 창설과 발전 과정에서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같은 대륙 국가 군대를 많이 참고했는데, 전통적으로 이런 대륙 국가 군대에서 군의 주축은 육군이고, 해군은 전통적으로 일종의 보조군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일본은 지리적으로 섬나라에 속하는 나라였고 섬나라 대부분은 육군보다는 해군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육지와 국경을 마주하지 않고 해상경계를 통해서 국경을 마주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해군의 중요성이 매우 컸고,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육군이 203고지 등의 삽질을 거듭하고 있던 러일전쟁에서 쓰시마 해전으로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낸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국군 또한 섬나라 군대인 관계로 한때는 2위와 3위를 합쳐도 못따라오는 세계 1위 규모의 해군을 운영하였고 육군은 소수정예 위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대륙과 달리 제국주의 시대부터 해군이 해외의 육지를 향해 육군을 포탄처럼 발사하는 개념으로 통합 운용되어 왔기 때문에 육해군의 대립보다는 긴밀한 협조가 전통으로 굳어질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의 이런 내실을 보지 못하고 단지 외면적인 부분만을 그대로 복사해온 것이 근대 일본 해군이므로, 프랑스군이나 독일군을 복사치기한 일본 육군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육군과 해군이 서로 자신만이 군의 주체라고 여기고 상대를 보조 수단으로 여기는데 제대로 협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3. 실황

3.1. 질투

해군이 객관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태평양 전쟁 개전을 적극 지지한 이유도, 중일전쟁 이래 화려하게 언론에 주목받는 육군을 질투해서라고 한다. 명목은 자원 확보였지만, 육군만 전선에서 화려하게 승전보를 올리는걸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해군이 가진 전투기와 함선은 기껏해야 중국 근처 해변에서나 활약할 수 있었지만, 육군이 점점 해군이 개입할 수 없는 내륙에서도 전공을 세우고 발언권과 세력을 늘려가는 꼴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가망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태평양 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석유이긴 하다.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쓸만한 유전이 없는 상황에서 금수조치가 이뤄지자 동남아에 있던 유전이 탐나기 시작했고 태클 걸 미국에게 선빵 때려서 태클 못 걸게 만든다고 전쟁을 일으킨 게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문제는 그 석유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일본 해군이었다는 점이고, 결론은 자기가 필요하니 이유를 붙여서 국가를 막장으로 이끈 셈이다.

다른 이유로는 국내외적인 압박에서 오는 총체적 난국을 들기도 한다. 중국과 전쟁을 시작한 이래에 전선은 늘어지고 불황은 계속되었으며 이 와중에 미국과 영국은 중국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이 승천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승차해서 상황을 타개한다고 하는, 작은 문제를 더 큰 문제로 만든 다음에 (...) 풀어버리는 병맛나는 해결책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독일이 소련을 밀어서 영국과 미국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 이게 병신같지만 말이 되는 것이 사실 함대 결전에서 백번 이긴다고 해도 일본에겐 다음 계획이란 것이 없었다. 일본이 태평양과 동남아를 장악하고 인도로 쇄도한다고 쳐도 미국은 그 자체 만으로도 대단한 나라였다. 동남아 자원 줄이 끊기면서 미국이 일시적으로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뭔가가 부족한 일본이나 독일에 비할바는 아니었고 일본만의 힘으로는 동부 해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력이 나약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전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해상에서 봉쇄당하니까 백기투항을 하는 미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와중에 미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며 압박을 하자 해군이 미국에 개전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해군 역시 개전론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물론 해군 내에도 3국 동맹 찬성자들이나 개전론자들도 많았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육군이 ' 만약 육군이 본토로 돌아간다면 너희도 안전하진 못할거다 ' 라는 식으로 해군을 협박했다는 말도 있다. 이런 압박 속에서 결국 해군은 자기 자존심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개전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 예산은 먹을대로 먹는데 미국하고는 안싸우는 겁쟁이 해군 ' 이라는 비난을 피하고 ' 독일의 세계 지배에 일본도 한몫을 따내야한다 ' 는 계산 아래에서 미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군령부 생존자들의 전후 반성회에서 나왔으며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국내 정치를 위해서 말도 안되는 도박에 나라 전체를 내던진 것이다.

이런 질투는 고질적인 것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해군이 제로센 전투기 및 에이스들의 전과를 언론자료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비밀주의를 엄수하던 육군도 이에 질세라 방향을 180도로 바꿔 자신들의 하야부사 전투기와 에이스들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질투는 허위 전과보고로도 이어졌으며, 레이테 만 해전 직전에 해군은 대만 근해에서 미국의 기동함대를 격멸하고 항공모함 수 척을 격침했다고 뻥튀기 발표를 했다.[15]

문제는 후에 정찰로 이것이 과장된 전과임을 알았는데도, 육군에 창피하여 알리지 못했다. 육군은 적의 기동함대가 격멸되었다는 가정하에 필리핀 방어계획을 세웠으며, 결과는 미군이 필리핀에서 사실상의 무혈입성을 달성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반전된 결정적 계기인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상이자 육군상을 겸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해군 군령부로부터 굉장히 축소된 피해 보고를 받고 그대로 히로히토에게 상주했다. 그런데 해군에게 따로 보고를 받은 덴노가 말하는 수치와 도조 히데키가 보고받은 수치가 달라 그제서야 얼마나 큰 피해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본 패전은 개전부터 예정되었다능

3.2. 군 체계

양측을 최종적으로 지휘하는 합동 사령부는 끝끝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서로 다른 전쟁을 수행한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본영이라는게 있기는 했지만 합동사령부 개념은 아니다.

원칙상으로는 덴노가 양군을 통제하는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일왕은 법률상으로는 절대적인 권리가 보장되나 정치적 관례상 자리에 앉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따로 놀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덴노는 허수아비 게다가 설령 개입한다고 해도 일국의 국가원수만이 각군의 대립을 통제할 수 있다면 엄청나게 비효율적인데다 중재에 막대한 시간이 소모되면서 동시에 통수권자의 피로도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나마 히틀러는 개입이라도 했지, 히로히토는 그러지도 못해서…. 현실적으로 제 아무리 영명한 군주이건 독재자이건 해도, 근대화된 국가기관 같은 거대한 조직 사이의 대립을 '일개 개인'의 능력 만으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나마 손을 쓰고 다녔다는 히틀러 역시, 대개의 사안들은 회의를 하여 합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흥적으로 처리하고 다녔는데 이 과정에서 하부 조직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충돌과 비효율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16] 그나마 개입했다고 하는 것도 이렇게 개판인데, 일본군처럼 아예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막장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더욱 안 좋은 점은 전체적인 작전을 망쳐도 자군의 손해를 극히 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육군이 주축이 된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군은 자신들의 함정과 전투기를 아끼기 위해 육군을 지원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빛나는 전공이라고 할 수 없는 수송선단보다는 적의 전투함만을 추격하여 섬멸하는데만 주력하면서 한동안 일본군이 제해권을 장악했음에도 과달카날에서 벌어지는 지상전에는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1936년의 2.26 사건때 육군 제1근위사단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군이 해군 출신 정치가들을 마구 암살하자 [17], 해군 수뇌부는 쿠데타군의 정확한 소속도 모른 채 이것이 육군의 조직적인 음모라고 생각하고 도쿄의 육군 주둔지에 무차별 함포사격을 가하고, 해병대격인 육전대를 동원하여 도쿄에서 화려한 시가전을 벌이려고 했다. 물론 이 쿠데타는 히로히토 덴노가 추인을 거부하여 실패로 끝나고, 육군과 해군이 시가전을 벌이는 막장사태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또 1939년에도 3국 동맹을 맺으려는 육군 친독파와 이에 반대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쓰미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의 이른바 해군 3인방으로 대표되는 해군 친영미파가 대립했다. 물론 해군 내에도 미국과 한판 붙자는 간이 부은 반영미파가 우글거렸지만, 육군의 동맹 추진파들이 어쨌든 같은 해군인 3인방을 계속 협박하자 지금은 동맹을 반대하는 게 낫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 때 육군은 대놓고 해군성 바로 앞에서 시가전 훈련을 하고, 해군도 질세라 해군성 건물 안에 병기, 탄약, 식량을 비축한 것은 물론, 전기가 끊길 것에 대비한 자가발전장치에 심지어 물이 끊길 것에 대비한 우물과 푸세식 변소(...)까지 파서 해군성에 근무하는 3천 명 전원이 농성전 준비에 들어가는 또 한번의 희대의 병림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는 할힌골 전투가 한창이던 위기상황이었는데도 이런 집안싸움에나 골몰하는 추태의 극치를 보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과 해군이 가지고 있는 항공대들을 통합해서 공군이라는 제 3의 조직을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양 군 모두 항공대라는 자신의 기득권의 일부를 떼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다, 신설 조직인 공군의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려 싸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이 아닌 육/해군 항공대 형태로 전쟁을 수행한 국가가 적지 않았고, 항공대의 운영을 둘러싼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어느 정도 존재한 국가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처럼 처음부터 통합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인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공군이 아닌 항공대 조직으로 전쟁을 수행한 국가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사실상 항공대 자체가 반쯤 독립해서 사실상 공군으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군부터가 항공대 체제로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수행하던 도중 목표 설정의 문제로 육군항공대의 티스 르 메이 아놀드가 해군의 어니스트 킹 제독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 육군과 육군항공대는 미 해군과 해병대의 관계처럼 반 독립상태였으며, 사령관이나 참모, 인사권도 거의 독립상태였기 때문에, 2차대전시 미 육군항공대는 거의 공군으로 독립해 싸웠다고 봐도 될 정도다. 이때문에 '육군항공대(Army Air Force)에서 Army만 빼내면 바로 공군(Air Force)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18] 그리고 종전 후 2년만인 1947년에 공군으로 독립하였으니 사실상 항공대가 아니라 공군이었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는 서로 별개의 조직으로 남았으며, 크게는 항공전 전략 구상부터 작게는 항공기 개발 및 배치까지 따로 수행했다. 이에 대해선 후술하도록 한다.

3.3. 군 내부의 파벌과 거대한 독립조직

이렇게 육군과 해군간의 대립이 심각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육군과 해군은 각각 내부에 파벌 및 거대한 독립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에서의 암투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일단 파벌은 육군과 해군 모두 크게 2개로 나뉜다. 일본 육군은 황도파(덴노 친정을 지지)와 통제파(내각에 의한 통제를 지지)이 있고, 일본 해군은 조약파(연합국과의 조약을 우선시한 파벌)와 함대파 (조약파에 대비되는 강경파)가 있다. 이들 파벌은 서로 수시로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 파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수의 장교와 장성들이 강제로 퇴역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나는 부작용을 초래했으며, 앞서 언급한 2.26 사건5.15 사건도 파벌간의 다툼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군 내부의 거대조직은 육군과 해군 모두 1개씩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육군은 관동군, 일본 해군은 연합함대가 있다.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는 하위조직인데, 덴노 직속이라는 점을 내세워서 상부의 말을 안듣는 것은 기본인데다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통제가 불가능했다. 당장 관동군은 만주사변할힌골 전투를 제멋대로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연합함대는 거의 모든 해군의 함선을 통제하기 때문에 사실상 해군의 수장이 해군대신, 군령부총장, 연합함대사령장관의 3인이 되어서 배가 산으로 가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물론 연합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일 권한이 있으므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군령부총장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계획 및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내부에서도 개싸움이 벌어지는 판에 외부와의 협력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딱 도둑놈 심뽀다. 당장 외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본 육군이나 해군에 소속된 사람 중 누구와 교섭할 것인가부터가 큰 난관에 봉착한다. 그 이유는 재수없으면 교섭 당사자가 파벌싸움이나 거대조직간의 싸움에 휘말려서 실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동안 교섭해왔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반대파가 그 동안 있던 모든 합의를 180도로 돌려버리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3.4. 따로따로 논 '합동'전투

이런 병폐는 바로 육군과 해군의 각개합동전투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들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협동은커녕 육군용과 해군용의 작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 과달카날 전투에서 육군은 해군이 수송선을 격침시켜 미군의 보급을 끊어 육전이 유리하도록 해주길 바랐으나, 해군은 이런 것은 아랑곳 않고 적의 전투함만을 쫓아다녔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하여 한동안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정작 과달카날에서 벌어지는 지상전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전세가 기울면서 해군은 섬에 주둔한 육군 보급을 위해 보낸 구축함이 자꾸 격침되자, 육군측에 "너희땜에 우리 함정만 축나잖아. 우리한테 민폐끼치지 말고 이런 건 너희가 해라!" 했고, 결국 육군측은 육군용 잠수함 제작이라는 짓을 벌인다.

  •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있었는데, 육군은 제한된 일본군의 항공전력으로는 미군을 싣고온 수송선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 해군은 항공모함을 우선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결론이 안 나자 육군은 수송선을, 해군은 항공모함을 따로따로 공격하기로 했다. 이런 병크에 수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미군에 열세였던 일본군 육해공 항공부대는 각개격파 당한다.

  •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해군은 비행장이 훗날의 반격작전에 꼭 필요하니 보존하기를 바랐고, 수비를 맡은 육군은 이것이 미군에게 넘어가면 오히려 역이용당할 수 있으니 파괴하려고 했다.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반격을 위해 해군이 고집을 부려서 비행장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행장을 상시 사용할 수 있게 유지하려고 노동력을 동원한 결과 방어진지 구축에도 모자란 인원이 비행장을 수리하는 개뻘짓을 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상륙 하루만에 일본군이 보존한 비행장을 쉽게 점령한 후 약간의 개보수를 한 다음에 이곳에 육상기와 함재기들을 수용해서 좀더 효율적으로 공중지원을 할 수 있었다. 당장 항공모함보다 지상 비행장이 이착륙이 훨씬 편리한데다가, 이렇게 하면 항공모함은 위험하게 섬 근처의 해역에 못박히지 않고 함재기를 추가 보충하거나 다른 곳을 지원하려고 쉽게 이동할 수 있어서 잠수함등의 기습을 당할 확률이 줄어든다.

    이런 상황은 일본군의 지휘관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현지 최고지휘관인 우시지마 미츠루(牛島滿) 중장이 대본영에 악을 써서 간신히 이제까지 복구해온 비행장을 다시 개박살내놓는 삽질을 하는 우여곡절끝에 이런 문제를 줄일 수 있었지만, 이오지마 수비를 맡았던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날릴 비행기 한 대도 없는데 이렇게 해서 병신짓해서 적 좋은 일만 시켜줬군."이라고 한탄했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육군을 맡은 쿠리바야시 중장과 해군을 맡은 이치마루 리노스케 소장의 불화가 묘사된다. 이런 상황은 이오지마에서만 특정한 게 아니라 일본 육해군의 합동작전시 일반적인 것이었다.

  • 미군이 공격한 일본군의 각 거점에는 공식적인 통합지휘관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계급과 상관없이 육군은 해군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고, 해군도 육군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서 미군이 기록해놓은 일본군의 각 거점의 지휘관은 실제로는 그 지역의 육군 지휘하는 지휘관이거나 해군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그 중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통합지휘관으로 본 셈이다. 그래서 간혹 육군과 해군이 비슷한 병력을 가지거나, 육군 병력이 많지만 해군 병력도 만만치 않은 숫자가 있을 경우(물론 반대도 성립한다) 같을 때는 양군의 고급 지휘관을 몽땅 통합지휘관으로 병기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예를 들어 사이판 전투의 실질적인 통합지휘관은 사이토 요시츠쿠 육군 중장이지만, 그 지역의 해군 근거지대를 지휘하는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도 동격의 지휘관으로 병기하고 있다.

    이는 거점 방어작전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는데, 육군의 경우 해당 거점내에 근거지대 등의 이름을 가지고 최소 수백 명, 많으면 1만 명 이상의 병력과 육전용 장비를 갖춘 해군 병력을 통솔할 수 없었다. 잘 해봐야, 일본 육군 지휘관이 권유를 하면 해군 근거지대 지휘관이 동의해서 따라 주는 수준이다. 가뜩이나 병력으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이렇게 따로 노는 병력이 생기면 방어작전을 하기 힘들다. 물론 해군의 경우에도 해군 육전대를 주축으로 한 근거지에 육군 파견병력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직접 지휘를 못하니 그냥 덤 앤 더머다.
    물론 이걸 극복하려고 덴노의 칙명이나 대본영의 명령이 내려와서 형식적인 통합지휘관을 임명할 때가 많았으나, 그건 그거고 현지에서 따로 노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가장 육군과 해군의 방어작전 협동이 좋았던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장기간의 방어전 끝에 패색이 짙어지자, 아직 1만 명 정도의 병력을 가진 해군측이 육군을 따라 최종방어거점으로 가지 않고 자신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해군진지에서 싸우다 죽겠다는 말을 꺼냈으며, 이를 육군 지휘관이 인정해 주었다.
    이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장기간 해군 육상병력이 육군 말을 들어주었으니, 최소한 자기 진지에서 죽겠다는 해군의 말을 거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협력이 좋은 곳이 이럴 정도니 나머지는 안 봐도 비디오인 상황이었다.

3.5. 장비 개발

전투기나 전차까지는 몰라도, 심지어 자잘한 장비조차도 똑같은 걸 서로 따로 개발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군의 무기체계참조.

일본 본토 방어나 해외 작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항공기를 예로 들자면, 비록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서로 작전 환경이 다르니 다른 전투기가 필요할 수 있었겠으나 실제로는 거의 비슷비슷한 성능의 기종을 따로 개발해서 쓰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예로 해군 전투기 제로센과 육군 항공대 전투기 하야부사는 모양이나 성능이 거의 판박이다. 비록 제로기는 좁은 항공모함내에 탑재하기 위해 '날개 접기'가 필요했고 이착함 공간이 좁다는 점은 있었겠으나, 그 날개 접기가 항공모함 엘레베이터 크기를 넘지 말라고 날개 끝만 살짝 접히는(...) 정도였고, 후기형에서는 그나마도 생산성을 위해서 접는 것을 포기해서 하야부사와 크게 다른 게 없다. 적국인 미국에서는 내륙에서 교전한 하야부사도 그냥 제로센으로 보고됐을 정도로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폭격기도 육군과 해군이 따로따로 개발하는 촌극을 보였다. 심지어 항공모함에서 운용이 불가능하므로 육군이나 해군이나 지상의 비행장에서만 운용이 가능한 중(中)폭격기 이상의 거대한 물건도 전부 따로따로 개발했다.

일본 육군ki21 97식 폭격기, ki49 100식 폭격기, ki67 4식 폭격기
일본 해군G2H 95식 폭격기, G3M 96식 폭격기, G4M, G5N 신잔, G6M, G7M 타이잔, G8N 렌잔, G10N 후가쿠

왜 이런 상황이 나왔나 하면 육군에서는 수뇌부가 폭격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고, 해군은 이런 상황을 못 참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만든 것도 있지만. 교리 자체도 함상 항공기로 교란하고, 멀리있는 육상기지에서 날아오른 항공기들이 폭격을 가한다는 아웃 레인지 교리 때문에 해군이 육군보다 폭격기를 많이 연구하고 많이 만든 까닭이다. 하지만 아웃 레인지는 제대로 된 항공기와 인력, 그리고 정찰 및 작전수립등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나 가능한 작전이지 이미 그 당시의 일본군 상황에서는 작전 자체부터 글러먹은 전략이고 말도 안되는 교리때문에 전투기나 공격기, 폭격기 대부분이 항속거리를 늘리려고 종이장갑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해군 폭격기는 항속거리라도 길었지, 육군 폭격기는 종이장갑과 빈약한 방어화력에 항속거리도 그렇게까지 길지도 않았으니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결과는 둘 다 자원은 자원대로 낭비하고, 몇발만 맞아도 불타는 일본기 전설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항공기용 무장의 경우에는 육해군의 차이가 거의 날 수 없는 종류라서 미군은 육군 해군 차이 없이 M2 중기관총과 50구경 탄약으로 통일하는 판에 일본 육군과 해군은 50구경급 중기관총이나 20mm급 기관포 등을 모조리 따로따로 개발하는 추태를 저질렀다. 그것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게다가 탄약도 호환되지 않는다. 똑같은 7.7mm 총탄인데, 육군 것과 해군 것은 규격이 달라서 호환되지 않는다. 이뭐병. 그런가 하면 공수부대도 해군 공수부대와 육군 공수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 불화는 육군 항공모함특종선 병형육군 잠수정삼식잠항수송정이 나올 때쯤 백미를 이룬다. 일본 육군이 일본 해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자체적인 잠수 수송선을 제작하여 실제로 배치하기까지 했던 것(…). 이 무슨 팩토리에서 배틀크루져 나오는 소리야 차라리 배틀크루져라도 나오면 좋을텐데 카카루만도 못한게 나왔다.

최종적으로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조차도 육군의 2호연구와 해군의 F연구로 각각 진행되다가 기초연구도 끝나지 않은 상태로 종전크리를 먹었다.

3.6. 보급 체계 분리

그나마 당시 기술로 어쩔 수 없이 육군과 해군이 다른 장비를 쓰는 것은 이해하더라도, 최소한도로 서로 보급물자와 전략 물자 정도는 공유가 가능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기와 그 탄약 등의 보급체계를 스스로 어지럽히기도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경이 다른 탄약과 각군에 따로 생긴 공수부대 등이 마찬가지.

그 외에도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 기간에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유전을 각각 따로따로 배정받아서, 각자 자기가 보유한 정유시설로 직접 정유해서 사용했다. 더 웃긴 것은 해군이 배정받은 유전은 상당수가 시설이 파괴돼서 복구할 때까지 사실상 채유 및 정유가 불가능해서 석유가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측에서는 전혀 도와줄 생각도 없었고…. 태평양 전쟁의 그 극심한 석유부족 속에서도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도입한 이유는, 같이 쓰게 하면 분명히 배분문제로 인해 큰 싸움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에게는 이 방법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별의별 기름(정어리 기름, 송근유 등. 심지어는 귤껍질 기름도 모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불량물들을 받아먹은 기계들의 성능이 어땠을지는... 항목 참조.)까지 다 짜내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참고로, 독일도 보급물자에 한해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었는데, 육해공군이 각자 자기들만의 공장을 가지고 물자를 생산했다. 예를 들어 해군 베어링 공장이 폭격을 맞으면 해군은 베어링이 모자라 고생하지만 육군은 베어링이 남아 돈다던지, 반대로 육군이 타이어 공장을 폭격 맞으면 육군은 타이어가 모자라지만 해군은 타이어가 있는 식이었다. 독일도 여기에 문제를 느끼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했으며, 최소한 무기의 탄환이나 규격 등은 통일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도 저런 문제는 많았다. 예를 들어 독일 해군의 Mk.303 30mm 기관포를 둘러싼 육군과 공군, 해군간의 알력과 모자란 원자재를 가지고 각군이 싸우다 못해 슈페어가 겨우겨우 중재를 했었고. 미군도 역시 해군과 육군의 건함과 운용교리 충돌도 있었다. 육군은 수송선, 상륙선을 늘리고 상륙지에 대한 함포사격을 더 화끈하게 해줄 것을 원했지만. 해군은 당연히 fuck↗ you↘!

하지만 이런 마찰이 있었음에도 다른 나라는 다들 중재자나 중재기관이 있어서 완만하게 협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거 없다.

3.7. 정보의 비공유

육군의 작전은 해군이 몰랐으며, 육군 역시 진주만 공격을 해군에 심어둔 스파이에게 들어서 알았다고 하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심지어는 전쟁선포 권한조차 육군과 해군에 독자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즉, 정부와 해군이 모르는 상태에서 육군 혼자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단 이야기.

과달카날은 태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해군의 영역이었고, 실제로 육군은 그 섬에 미군이 상륙하고서야 그런 섬이 있었는지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위에 예로 든 레이테 해전에서 육해군은 서로가 수집한 정보를 상대방에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이런 건 단순히 작전 정보만이 아니었다. 독도/역사 문서에서 보이듯 1905년 이전까지만 해도 육군성은 독도를 '마츠시마'라고 불렀지만 해군성은 독도를 '리안코루도 열암'이라 부르고 '마츠시마'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905년이면 아주 초장인데, 초장부터 이랬으니 답이 없다.

4. 결과

이러한 문제는 제대로 된 자원이 부족하고, 모든 물건을 바다를 통해 선박으로 수송해야 하는 섬나라가 전쟁하는 데는 당연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군비가 2배로 들어가기 때문에 자원도 2배로 들어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전쟁 재정의 압박이 심해져서 제대로 된 장비 지급조차도 되지 못하고 전투력 증강을 위해 다시 따로따로 무기를 개발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극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육군도, 해군도 모두 사이좋게 해산당함으로서 이 대립은 일단 종결했지만…….

5. 전후

전후에 육군이 일으킨 병크가 하도 크다보니, 일본 밀덕계에서는 해군을 과도하게 좋게 보는 풍조가 일어났다. 해군선옥론 참조. 하지만 해군도 사실 오십보백보 수준이었다.

이렇게 창설 초기 때부터 유구한 전통을 가진 대립은 패전 후에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현재진행형인데, 먼저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립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19], 지금도 일본의 '육상자위대와 일본 경찰'간의 사이도 안 좋고,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의 사이 역시 안 좋다. 여기에 항공자위대[20]까지 추가시킨다면...이쯤되면 차라리 일본군 시절이 더 낫다. 이건 뭐 5개 집단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형국이다. 한국 입장에선 일본군이 단결보다는 서로 대립하는 게 낫다.

그나마 보급과 장비표준은 같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지만 사실 서방세계 표준인 NATO 표준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것일 뿐이지 스스로의 의지라고 보긴 어려웠다. 실제로 일본의 어떤 군사잡지에서 폭로한 군사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만약 NATO 표준대신에 일본 특유의 독자규격 노선으로 걸어 갈 경우에 당장 미네베아 PM-9에 쓰이는 권총탄과 89식 소총에 쓰는 소총탄 부터 최소 5가지 이상으로 갈라져 따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있다.(...) 5가지로 갈라질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앞서 서술한 '육자대, 경찰, 해자대, 해상보안청, 항자대' 5개의 군사조직이 각자 규격을 따로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뭐병 레알 갈라파고스 돋네 다만 하도 예산 압박이 심해지다보니 최근에는 해자대와 해상보안청이 공동으로 함정을 설계, 발주하는 등의 움직임도 나타나고는 있다.[21]

6. 다른 나라는?

사실 이런 군 간의 대립이나 암투는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다. 관료 조직이라는 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면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원래 목표보다는 조직 그 자체의 유지를 우선해서 추구하게 되므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 일본군과 다른 점은 이런 대립을 조율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느냐 없느냐는 점과 어느 정도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느냐이다. 일본은 조율이 불가능했을 뿐더러, 육군과 해군이 다른 전략목표를 갖고 있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전체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군의 이익만을 고집하지 않고 타군에게 양보한다는 점도 일본군과는 다르다. 일본군은 타군과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적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았다(…).

일본에서 이 상황의 원인은 '문민통제'라는 좀 더 큰 문제로 올라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가 군(軍)을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조직 간의 분열을 통합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근대화 시작시기에 프로이센을 본받아 '덴노절대국가'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군대를 조직할 때 덴노에게 독자적인 통수권을 부여하여 군을 덴노에 직결시켜놓고, 내각과 정부와는 독립된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내각과 정부에서 군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초창기 일본의 정치가들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군의 고위 간부들도 이러한 정치가들과 파벌 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런 구조 덕에 비공식적인 절차로나마 '조율'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공식적인 라인은 군에서 이전의 정계 '파벌'의 일원이었던 간부들이 은퇴하고, 사관학교를 통해 독점적으로 육성되는 인력으로 이루어진 독립성 강한 조직으로 변하면서 소멸해버렸다.

아무튼 내각과 정부에서는 예산 권한 등을 이용하여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시도……했지만 군에서는 짜증나게 구는 수상은 암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육군대신, 해군대신을 오로지 현역 중장, 대장만이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해서, 민간인 출신 총리를 가지고 놀았다. 총리가 자기들 요구를 안들어주면, 현역 장성들이 일치단결해서 대신 자리를 거부하고, 빈 자리 못채우고 내각은 자동붕괴...

결국 군부의 입맛에 맞는 수상들만 나오다가 나중에는 아예 육군과 해군의 현역 대장이 수상에 취임한다. 대표적인게 육군 대장 도조 히데키. 따라서 무소불위의 조직이 돼버린 군이 거기다가 또 2개의 조직으로 나눠져 있다 한들 정부에서는 제어할 방법이 없게된 것이다.

즉, 군이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군이 정부를 협박하고 강압하며 그 내부에서는 또 다시 여러개의 독자적인 권한과 독단적인 성향을 가진 조직이 판을 치는, 군벌 연합체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조직이 되버렸다.

현대 각 국 군대의 경우를 비교하면, 어딜봐도 일본군 같은 곳은 없다. 당장 옆나라인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군육방부라고 불릴만큼 육군의 힘이 세기 때문에 육군 장성수만 수백 명이 되어 국방부를 채울 정도라 공군, 해군, 해병대가 목소리를 내기 힘들 정도다. 물론 이 경우는 육군이 너무 과도한 기득권을 가진 게 문제이긴 하지만 유사시 통합지휘 자체는 별 문제없이 이루어진다.

미군의 경우는 예산배분에서는 미국 국방비의 60%를 해군이 가져가는 해방부 등의 차이가 있으나 육해공과 해병대가 역할상 거의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22], 각군의 대립이 한국보다는 심하다. 하지만 오늘날 미군은 합참이나 국방부의 통제 능력도 있고, 전쟁을 워낙 많이 하다보니 서로 합동작전에도 이골이 날만큼 경험이 쌓여 있다. 미국도 국방부가 처음 생기던 시절엔 좀 헤매서 제독들의 반란 같이 미 해군미 공군이 대립하는 일도 있긴 했지만 유야무야 잘 넘어갔다.

게다가 군수와 보급 차원에서도 필요하면 육해공군이 비슷한 장비를 쓰거나, 필요하면 직접 군수시장이나 민간 업체에서 장비를 구입할 만큼 융통성 있게 돌아가는 것도 사실. F-4 전투기를 공군과 해군에서 같이 사용한 사례나, 미 공군, 해병대, 해군이 같이 JSF(F-35)를 같이 투자하고 개발하고 있는 것도 그런 사례다. 물론 이 경우는 한 전투기에 사공이 너무 많이 올라타서(…)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고 있긴 하지만…. 미군도 사람들이 있는 곳인 이상 서로 기득권을 지키려다가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 적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2차대전이 끝나고서는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이 "솔직히 2차대전만큼 큰 전쟁을 또 할 일은 없을거고 해군이 할 일도 공군이 죄다 폭격해버리면 끝이잖아. 그러니까 해병대고 해군이고 그딴거 필요 없음" 같은 망언을 해버리는 등 항공모함 건조계획을 개발살내고 해군을 축소하려 들자 전임 해군장관이자 통합 국방부의 초대 장관이었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제임스 포레스탈이 자살하고, 제독들도 빡쳐서 오늘날 제독들의 반란이라고 회자되는 초유의 항명사태를 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각 군이 자군의 로켓을 독자개발하느라 자원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소련이 먼저 스푸트니크를 쏠 시간을 벌거나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나가는 동안 성과가 없었던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각군의 독자 개발을 중지시키고, 민간 기관인 NASA를 통해 통합 추진하면서 오히려 인간을 달에 보내는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키는 걸 보면, 뭘로 보나 이쪽도 일본군보다는 낫다.

그나마 내분이 심한 나치 독일도 일본군보다는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나치당의 제2인자 헤르만 괴링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육해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군 총사령관 레더 대제독은 사임하면서 히틀러에게 "괴링의 손으로부터 해군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남을 지경이다.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공군이 지휘해야 한다고 괴링이 고집해서 그라프 체펠린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유명한 일화.[23] 또한 공군은 "공수부대"뿐만 아니라 육군에게서 전차 등의 장비를 뺏어와서 창설한 공군 야전사단까지 거느리고 육군의 영역을 크게 침범했다. 또한 다른 타군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꺼리는건 독일 공군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포위된 6군에 공중수송작전이 실시되자 육군 보급장교가 보급품을 체크하는 것을 공군이 거부하여, 안그래도 부족한 수송품중에 쓸데없는 장비[24]하는 짓거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반목이 심해보이던 나치 독일도 일단 대전 초반부, 폴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를 거의 전광석화와 같이 함락시킬 때는 육군과 공군이 서로 협조를 잘 했고, 독소전쟁도 초반에는 크렘린 궁전이 보일 정도로 진격이 가능했었다. 스탈린그라드 이전에 이미 소규모의 고립된 육군이 공군의 공중 지원으로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다. 뻘짓 전투 아르덴 대공세에서도 공군이 보텐플라테 작전을 수행하여 육군의 진격을 돕기도 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정보 전달을 제대로 안 해서 1/4이 자국의 대공포화에 털리기는 했지만…. 이 외에도 켈베로스 작전에서는 해군과 공군간에 서로 연락장교를 파견하는 등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서 프랑스에 있던 함대를 영국 해군과 공군의 앞마당인 도버 해협을 지나 무사히 북해로 이동시켰다.

정리하자면 최상부에서는 예산배분, 지휘권 등을 가지고 대립하지만, 일선에서는 별 문제없이 서로 협력했다.

심지어 하인리히 히믈러가 지휘하는 무장 친위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프트바페나 무장친위대조차 어쨌든 지상전을 수행할 때는 육군의 집단군에 소속되어 육군 지휘관의 명령을 들으며 전쟁을 수행하였고, 심지어 이탈리아 북부 방위에서는 공군의 알베르트 케셀링 대장이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자 휘하 육군부대는 두말없이 그의 지휘를 따라 성공적으로 연합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으니 육해군이 아예 따로 논 일본군과는 천지차이다.

그리고 위의 독일군을 상대한 소련군은, 다 필요 없고 스탈린으로 대동단결이었다. 국내에 번역된 《세계사 최대의 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을 보면 주코프가 병맛 명령을 하달하자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님 그건 좀 아닌 듯" 하며 논박를 시도하나 스탈린의 명령이라는 한마디에 모든 논의는 종결, 바로 실행된다. 철남 앞에선 모두 위 아 더 소비에트! 불만이 있다고 수상을 암살하는 일본하고는 매우 대조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평소 대립이 심한 병과, 혹은 끼리도 공통의 적을 만나면 승리,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서 서로 손잡고 협력하게 되는데 반해 일본군은 전시에서마저도 반목해대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일삼았으며, 그냥 적군도 아니고 미군과 같은 강적을 상대하면서도 과감하게 승리를 헌납하고 생존을 포기하며(...) 미국에 승리를 안겨주고 일본의 자멸을 초래했다.

즉 이런 대립이 일본군처럼 막장으로 치달은 나라는 아예 없다.

7. 기타

이 대립은 코에이의 시뮬레이션 게임 제독의 결단 시리즈에서 "육군으로서는 해군의 제안을 반대한다"(陸軍としては海軍の提案に反対である)라는 육군측의 대사로 표현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해군의 제안을 시도때도없이 반대해서 전쟁을 패망으로 이끄는 위험요소로 묘사되어 있다. 해당 게임을 플레이해본 유저들이라면 이가 박박 갈릴 정도로 유명한데, 이게 얼마나 악명높냐하면 육군으로 검색하면 자동완성에 바로 올라올 정도로 메이저하다.

한참 후에 등장한 소셜 게임 함대 컬렉션이 유행하면서 사용 빈도가 더 메이저해졌다. 주로 쓰레에서 어떤 의견에 대해 딴죽을 거는 용도로 쓰인다. 한편, 바리에이션으로 반대어인 "육군으로선 해군의 제안에 찬성한다(陸軍としては海軍の提案に賛成である])" 라는 태그가 있으며 어떤 의견에 대해 찬성하는데 사용하는게 보통이지만, pixiv에서는 칸무스들의 (신사적인) 야짤에 대한 태그로서 사용되고 있다(…)[25]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에서도 비중있게 다루는 요소인데, 원작의 경우 해군이 아군의 조력자라 육군의 병크를 부각하는 면이 강했다면, 애니판의 경우 해군과도 대립하게 만들어놓아 해군도 육군과 거기서 거기인 수준의 존재로 까고 있다.


또 다른 예로는, 라이트 노벨 9S에서 유산 대책 조직 ADEM에서 직속부대 LC(레거시 카운터)부대를 만들 때, 어느 쪽이 관할할지 방위청과 경찰청이 경쟁했고, 대립하는 사이를 틈타 ADEM의 수장 다테 신지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조직으로 LC부대를 창설했다. 그 덕분에 ADEM은 국내에도 적이 쫙 깔렸다고 한다... 그리고, 작중에 나온 바에 따르면 일본 경찰청이 특수부대, 특수기동부대(SAT)와 특수조사부대(SIT)를 만들고, 자위대에 훈련을 맡기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기초 체력 부족. 상식적으로 특수부대를 만들고자 했는데 기초체력이 부족한 자들을 뽑을 리 있겠는가? 국가기관간에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 그 결과 경찰청은 SAT과 SIT의 훈련을 외국의 특수부대에, 영국의 SAS나 미국의 FBI, SWAT에 맡겼다.
또한, 해상보안청 특수경비대(SST)는 미국 특수부대 SEALS에게 노하우를 배웠고, 해상자위대 특별경비대(SBU)는 SEALS에게 거절당해 영국 해병대(SBS)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어째 5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변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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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례로 대한민국 육군대한민국 해군의 기원은 각각 국방경비대와 해방병단(海防兵團)으로 따로 결성되었으며, 1946년에 이르러서야 조선해안경비대조선경비대의 일원이 되는 식으로 대충 교통정리가 되었다. 국방부 산하의 육군과 해군으로 출범한 건 1948년 9월 5일이었고.
  • [2] 코메이 덴노는 양이론자였지만 또한 좌막론자에 가까웠다. 애당초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교토로 불러들인 게 이 사람.
  • [3] 이때 사츠마의 선봉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 [4] 예외적으로 러일전쟁 당시 총사령관인 육군 원수 오야마 이와오(大山 巌)는 사츠마 출신이었다.
  • [5] 대한민국 국군이 채택한 그 용어 맞다.
  • [6] 대한민국 해병대 예비역들이 극렬하게 폐지에 반대한 그 용어 맞다.
  • [7] 이렇게 보면 한국에서 해병대가 육군에게 느끼는 컴플렉스 비슷한 것도 일부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 뿌리를 둔 것 같지만 해병대는 육·공군은 물론 모군(母軍)인 해군과도 다 사이가 안 좋다(…). 미합중국 해병대미합중국 육군과 사이가 마냥 좋은 건 아니고…….
  • [8] 치하도 원래 대구경 포를 탑재할 수 있게 대형 차체로 설계하려 했으나, 전차가 단독으로 싸워 전공을 독식할 것을 반대한 보병 장교들의 질투와 간섭으로 보병을 지원하는 수준으로 재설계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 [9] 웃기게도 연합함대 기함의 명칭은 조슈 번 서부의 옛 지명인 나가토 국(長門国)에서 따온 나가토(長門)였다.
  • [10] 그나마 얘네는 좀 나았다. 연합함대는 관동군에 비해 멋대로 날뛰지는 않았고, 비교적 군령부와 상의를 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는 오히려 군령부 총장이 자기네 라인인 나구모 주이치를 불러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지시와는 별개로 다른 사항을 지시하는 등 명령 체계가 망가진 폐해를 묘사하고 있다.
  • [11]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지지하는 파벌
  • [12] 그 두 조약을 반대하는 파벌
  • [13] 메이지 덴노(주로 말년)와 쇼와 덴노 정도라면 평화헌법 이전까지는 제법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신일본 정계에서 덴노만이 할 수 있는 수단도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 [14] 예를 들어서 허수아비나 바지사장으로 전락한 덴노와 실권을 쥐고있는 쇼군/수상 또는 현역 대장이라던지, 육군과 해군이 서로 봉건영주인 것처럼 인식하는 문제라던지... 결국 이 문제는 근대화를 위해 시행한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봉건제 전통을 해결하지 못한 탓이 컸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나오게 된 것이다.
  • [15] 이런 뻥튀기 발표로 웃음거리가 된 경우가 있다. 대만 인근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카미카제공격으로 미 제3함대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여러 척의 군함을 격침하였다"고 거짓발표를 하자, 홀시 제독은 즉시 니미츠 제독에게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공격하기 위해 정해진 위치로 퇴각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일부는 도쿄 로즈가 발표했다고 하는데, 정확히 아시는 위키니트의 수정을 바람.
  • [16] 이런 점 때분에 현대 국가에서 시스템에 의한 법치가 아니라 특정개인(+측근,실세 집단)의 인치는 필연적으로 비효율로 흐를 수 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언론과 의회를 통한 여론 수렴, 이해당사자간의 대화과 합의의 과정(한마디로 정치)없이 통치자의 말 한마디에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하니 화끈하고 능력있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뒤에 보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있기 마련이다. 소수집단의 제한적인 능력으로 거대한 사회를 관리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점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합의의 과정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이해당사자들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이 점점 쌓여가기 마련이며, 여론 수렴없이 속전속결로 처리하니 문제가 생겼을때 그 책임은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통치자만 부담을 안게 되고 일반 국민들은 모두 나몰라라 하기 때문이다. 처리과정에 자기들은 아무것도 한게 없으니까
  • [17] 이때 해군 대장출신으로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죽었다. 일본 해군은 육군처럼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 퇴역군인출신 정치인은 대부분 해군 출신이다. 제대하고 취직하면 되거든?
  • [18] 지금은 육항대가 Aviation이지만 이때는 AAF 였다.
  • [19] 특히 육상자위대가 해상자위대에게 '사츠마 번' 무리들이라며 들먹이는데 육자대가 구 일본군 육군의 잔재와 결별하고 어느정도 개선한 반면, 해상자위대는 구 일본군 해군의 전통부터 똥군기 까지 계승했고(실제로 구 일본 해군의 기지였던 구레나 요코스카등의 부대는 창립연도를 구 일본 해군으로 잡는다.) 심지어는 사츠마 번에 대한 역사까지 옹호하는 지라 저렇게 비꼬는 지도 모른다.
  • [20] 항공자위대 내부에서 해군 항공대육군 항공대 출신들이 항공막료장 헤게모니를 두고 각축을 벌였다. 다만 일본 해상자위대의 항공병력이 규모가 큰 덕분에 해군 항공대의 상당수는 그쪽으로 흘러갔고 결국 항공자위대에서 세력을 잡은 건 육군 항공대 출신들이었다.
  • [21] 즉 이건 공장이 발달하면서 단일모델양산이 훨씬 쉬워져서 그런거지 기술력이 일본군시절일때였다면 그대로 따랐을 가능성도 있다.
  • [22] 해안경비대의 경우는 좀 다르다. 소속부터가 국방부가 아니라 국토안보부 소속이고 대통령령이 떨어지면 즉시 해군 1함대가 되는지라. 하지만 해안경비대도 세계 7위급 해군이라는게 함정
  • [23] 괴링이 사사건건 딴지거느라 늦어진 이유도 있지만,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졸렬함에 매우 빡친 히틀러가 직접 그라프 제펠린 건조중지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95% 정도에서 건조를 정지하였다. 뭃론 영국에 비한다면 매우 빈약한 독일 수상함대의 상태에선 이정도의 활동도 제법 용한 셈이다. '적을 얼마나 깨부쉈느냐' 만큼 '작전을 마치고 살아남았냐'도 중요하기 때문인데, 함선은 전차나 항공기보다도 시간과 자원, 인력이 상당히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잃어버릴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노르웨이 공략때 영국해군이 냉큼 달려든 점이나, 독일해군의 거함들 한두척이 떴다 싶으면 그의 배에 상응하는 숫자로 몰려드는데 소극적으로 활동할 수 밖에.
  • [24] 예를 들어 6군에 전혀 필요없는 콘돔(?!)이 비행기 가득 실려오기도 했다 Ang? 하라 이거지
  • [25] 덤으로 현재 함대 컬렉션에선 위에 나온 육군 항공모함육군 잠수함 모두 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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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8-08 00: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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