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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last modified: 2015-04-14 23:12:42 by Contributors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린 부산진 전투)
임진왜란
날짜
1592년 ~ 1598년
장소
한반도 전 지역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대명제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선조
광해군
이순신
권율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시민
이억기
김덕령
정운
정발
송상현
나대용
이정암
권준
양호
이여송
유정
진린
기타 등등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카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모리 테루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간베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타치바나 무네시게
호소카와 타다오키
소 요시토시
안코쿠지 에케이
기타 등등
결과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조명연합군의 승리.
영향
조선은 대부분의 국토가 유린됨 전후복구에 집중
도요토미 가 몰락.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성립
명나라의 쇠락과 함께 후금의 흥기

Contents

1. 개요
2. 전쟁의 배경
2.1. 일본의 상황
2.2. 조선의 대응
2.3. 일본의 내부 사정
2.4. 일본군 병력 구성
3. 전쟁의 경과
3.1. 전쟁의 시작
3.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3.3. 반격의 시작
3.4. 명의 참전과 역할
3.5.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3.6. 교착 상황과 강화회담
3.7.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4. 임진왜란의 이해
5. 전후
6. 일본에서의 평가
7. 조선, , 일본의 전후 상황
7.1. 조선의 전후
7.2. 명과 일본
8. 이것저것
8.1. 임진왜란? 임진전쟁?
9. 관련 작품
10.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0.1. 조선측 주요인물
10.1.1. 조정
10.1.2. 정규군 지휘관
10.1.3. 의병장
10.2. 명측 주요인물
10.3. 일본측 주요인물
10.4. 전투 전개과정
10.5. 기타 전투
10.6. 기타


한자 : 壬辰倭亂
영어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
프랑스어 : Guerre Imjin
독일어 : Imjin-Krieg
러시아어 : Имдинская война
중국어 :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
일본어 :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토요타이코의 조선정벌)[1],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2]

壬辰倭亂, 丁酉再亂
임진왜란, 정유재란

1. 개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국제 전쟁.

일단 조선은 승전국이지만, 승리하고도 피해는 매우 컸다. 흔히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경계로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사에 중대한 분수령이며, 일본의 정권교체와 장기적으론 중국대륙의 왕조교체까지 동북아 삼국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조선 건국이 1392년이므로, 딱 조선 건국 200년 만인 1592년(조선 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일본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첫 번째 전쟁을 임진년에 일어난 난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이후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으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다시 재침을 시작.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크게 보면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일부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유재란까지 같이 다룬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ぶんろくのえき), 정유재란은 케이초의 역(慶長の役,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정벌 혹은 조선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닛뽄반자이틱하게는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로쿠, 케이초는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이다.

중국에서는 정식으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이라 하고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항왜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으로, 한국전쟁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조선[3]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 신종 만력제 당시 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나 Imjin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간혹 있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명나라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참전한 전쟁이기에 동아시아 대전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적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위키피디아 기준으로는 위의 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이란 표현과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에서 따온 '임진전쟁' 두 개가 이 전쟁을 나타내는 표제어로 사용되고 있다.

2. 전쟁의 배경

2.1. 일본의 상황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견의 여지가 많다. 사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바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와 일가친척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더울텐데?일본보단 추움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추울텐데?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진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여러번 언급을 했다고. 하지만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넘쳐나는 직업군인 등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를 외부로 돌릴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며, 도요토미의 개인적인 야욕만이 아닌 일본의 통일 직후라는 내부 상황이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백년 전에 있었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도 구도는 반대였지만 이 역시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쌓이고 쌓인 전력을 소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의 정치경제 질서의 기반이 되는 '토지'는 한정돼 있고 토지가 부족한 무사나 낭인들은 많은 상황에서, 외부 정복이란 선택지는 어떤 의미에선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이게 싫다면 에도 막부처럼 무사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한편 불만을 품은 낭인들의 반란을 그때그때 진압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 통일 후 과다한 자신감에 사로잡힌 히데요시는 내부적 해결 대신 외부 침공을 선택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인 선조 20년, 이 일본의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

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 라고 비웃었다거나,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 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도 임무 실패와 사신으로 머물면서 조선측에 유리한 정보를 은근슬쩍 언급한 것에 대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그 이전인 1587년에는 정규군이 탑승한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를 습격한 정해왜변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손죽도에 주둔하던 조선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정여립이 이끄는 대동계원에 의해 격퇴되었다.

어찌되었든,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1588년 10월과 1589년(선조 22)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하여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만남에서 쓰시마 도주는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한 뒤, 바닷길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도요토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였다. 종전 후 조일 외교관계를 완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소가 천사표라서(…) 그런 건 아니고, 쓰시마의 이익을 위해서란 점이 더 크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쓰시마 입장에선 양국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는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했다.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원정에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7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아 시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좀 과장해서 현대와 비교하자면 한일 회담에서 일본 총리가 자기 자식을 끌어안고서 한국 외교사절들과 만난 셈이다(...)

이 장면을 일본 사극 NHK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24화의 한 장면으로 봐보자.


일본측 인물들의 표정이 더 심각해진다(...) 참고로 동영상에서 보면 통신사중 한 명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백전하의 존안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황윤길로 추정된다. 대표로써 통신사로 가장 안쪽에 앉아있고 예를 표했기 때문. 가운데 앉은 사람은 사신 일행중 부사를 맡은 김성일로 추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올때 츠루마츠를 대동하고 오니 심히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애시당초 일본에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한 동인으로써의 특성도 나오고 서열상 두번째였기 때문이다. 파란옷은 서장관을 맡은 . 반대쪽 자리에 앉은 일본 사람들 중 왼쪽은 이시다 미츠나리, 중간에 두건을 쓴 사람이 바로 히데요시의 명참모였던 구로다 간베에다. 조선 사신들이 물러간 뒤 히데요시에게 너무 경솔하게 처신하셨다고 직언을 하지만... 오른쪽은 히데요시 누나 닛슈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 훗날 할복으로 사망한다. 조선 측 역관이 통역하는 게 아니라 일본 쪽에서 역관을 붙여 주었다? 어쩌면 조-일 외교를 담당했던 대마도 측 인사일지도 "아 관백님 제발 좀;;"

저 영상의 오줌 운운은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 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有頃 秀吉入內 在席者不動 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 小兒遺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不復再見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5]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도 직접 살펴 보자.

日本國關白 奉書朝鮮國王閤下 雁書薰讀 卷舒再三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吾國六十餘州 比年諸國分離 亂國綱 廢世禮 而不聽朝政 故予不勝感激 三四年之間 伐叛臣 討賊徒及異域遠島 悉歸掌握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竊諒余事蹟 鄙陋小臣也 雖然 余當托胎之時 慈母夢日輪入懷中 相士曰 日光所及 無不照臨 壯年必八表聞仁聲 四海蒙威名者 何其疑乎 依此奇異 作敵心 自然摧滅 戰必勝 攻必取 旣天下大治 撫育百姓 矜悶孤寡 故民富財足 土貢萬倍千古矣 本朝開闢以來 朝政盛事 洛陽壯麗 莫如此日也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人生一世 不滿百齡焉 鬱鬱久居此乎 不屑國家之遠 山河之隔 欲一超直入大明國 欲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 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者 在方寸中 貴國先驅入朝 依有遠慮無近憂者乎 遠方小島在海中者 後進輩不可作容許也 予入大明之日 將士卒望軍營 則彌可修隣盟
사람의 한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 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 方物如目錄領納 且至于管館 國政之輩 向日之輩皆改其人 當召分給 餘在別書 珍重保嗇 不宣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天正十八年庚寅仲冬日秀吉奉復書
천정(天正) 18년[6]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7]

쉽게 말해, 일본을 통일한 나는 킹왕짱. 중국도 정복하려는데 너네가 협조 좀 해야겠음. 편지랑 주는 거 잘 받았음.정도의 매우 거만한 답서였다는 얘기. 위의 번역도, 사실은 답신 내의 거만한 행간을 생각하면 아랫사람에게 반말투로 하대하는 쪽으로 읽는 게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합하' 같은 존칭어가 들어간 걸 보면 아랫사람이 적당히 경어조로 번역한 모양이다. 히데요시는 문맹이었으니까.

2.2. 조선의 대응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관리들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당시 선조 통치하의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중이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결국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옛날, 즉 최소 제6차 교육과정 이전 국사 시간에 역사 교사의 개인적 지식 또는 그 당시 학계의 다수설을 들었거나 국사를 수능 등의 이유로 대충 배웠다면 말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ㅡ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이 대화가 후에 김성일과 류성룡의 실책을 덮어주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병맛 찌질이로 까이고 이황의 제자 타이틀은 다른 애제자 류성룡에게 밀려 아는 사람도 없을 정도다. 수제자 문제는 훗날 후손들끼리 둘다 수제자라는 식으로 합의를 보았다나 뭐라나... 참고로 김성일이 선조 면전에서 "주상의 요즘 행동은 폭군 걸주와 같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임금께 직언할 정도의 임금을 우습게 아는 대쪽같은 신하였고 절대 찌질이가 아니고 변론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임금 면전에서 큰소리 친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세도정권의 세도가들이 임금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고 해서 그들이 대쪽같은 신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오판에 책임을 지고 일선에 나가 병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는데, 그나마 이렇게 잘못을 씻으려는 노력을 성실히 했기 때문에 후세에 좀 덜 까인다. 물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김성일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고 참형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병으로 죽었지만...

이 당쟁조차 발전적인 토론이 아닌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표면 상의 언쟁이었을 뿐, 사실 동인이나 서인이나 앞으로에 대한 대책은 제대로 세우지도 않았다고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결과로는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하고서 일반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다. 다만 이것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다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는 왜란(전쟁)이 아닌 대규모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수준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 조선 정부는 이미 일본의 침략 준비를 알고 있었고, 그 이전부터 급박하게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당장에 두번째로 함락된 성인 동래성 부사 송상현은 부임하자 재빨리 만반의 준비를 위해 동래성 주변의 숲에 매복할 작전을 준비하든 등 일본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인해전술로 인해 머리좋게 작전을 짜도 소용이 없었지만(...).

선조에 의한 이순신의 10계급 특진 사건도 이 사건 이전이다(1590년~91년 2월). 물론 이순신의 경력을 보면 오를 수 없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부임을 하기도 전에 윗자리로 승진하는 식으로 몇달만에 10품이나 올랐다. 해자를 파고 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했는데 너무 가혹하게 전쟁준비를 한다고 각지에서 상소가 빗발치는 등 사실 민심이 흉흉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터진 정여립의 난과 축옥사 등으로 인해 당시 조선은 여러모로 민심이 악화된 상황이였다. 실제로 통신사의 일원인 허성도 귀국 직후 정여립의 도당으로 연루되어 압송되는 참사도 벌어졌다.

더욱이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은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적잖이 확충해 백성들의 불만을 크게 샀다. 김수는 아예 '전쟁광' 소리까지 들으며 탄핵받았다. 놀랍게도 선조 또한 방군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다만 확신을 가진 전면적 체계적 대책 마련까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예언가 남사고가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을 해서 뭔가 오긴 온다는 건 예상했다. 이긍익의《연려실기술》을 보면 당시 분위기는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몇몇 명문가의 자제들이 술판을 벌여놓고 해괴한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췄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또한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능)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는 기록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반적인 노략질 수준에 그칠 거라고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침략 대비를 했다하더라도 그 규모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까지의 일본의 공격은 몇백, 몇천 정도의 소규모 왜구들이 해안 지방을 노략질한 것 뿐이었는데 한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나라vs.나라 규모로 조선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할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이전 일본의 중앙정부는 전군을 끌어모아 타국을 칠 정도의 중앙집권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임란 이전의 일본의 침략은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점령전이 아닌 지방영주 등이 후원하는 소규모 침탈전 뿐이었다. 규모가 많다 하더라도 최대 2만.

하지만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전면적인 침략전이 가능했다. 실제 임란에서 히데요시는 2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한다. 하지만 봉건제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원력도 한계선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완전히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조선 출병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병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국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남겨둬야 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거나, 국내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병력도 포함했다면 그 규모가 20만을 족히 넘길 수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실제로 유성룡의 동년친구였던 이로라는 사람은 조정의 전쟁 대비로 성을 보강하는 데 민폐가 심하다고 했다. 실제 성을 보강한다는 것은 건축 기술이 떨어지는 그 당시에는 큰 민폐였다. 왜냐면 성을 보강한다고 농사도 못짓는데다 보강에 동원된 농민들과 소가 지쳐 죽거나 사고로 죽는 것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니 성의 보강이 백성들 입장에선 보통 민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유성룡에게 서신으로 성을 쌓는 게 좋은 방도는 아니라고 서신으로 보냈다. 이를 두고 유성룡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략을 해왔는데, 고작 개천 가지고 안심하다니 어리석은 생각이다."라고 징비록에 써놓았다.

이렇듯 식자층 다수가 군비 확장에 극렬 반대했다. 아마 조선이 대비를 안하다 털렸다는 설은 조선은 무조건 무능하다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 대비를 안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름 대비를 하고도 결과적으로 초반에 털렸으니 어쩌면 더 무능하고 한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실록에는 단 1 줄로, 나중에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 이거 달랑 한 줄이다. 게다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후대의 이이의 제자들이 제기한 설이었다. 더욱이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10만 이상의 군대를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조선이 정규군만 16만 이상을 동원한 걸보면 10만 양병설은 어째 이상하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2.3. 일본의 내부 사정

한편,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는 하나 그 가능성에 의문을 표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도 회의적으로 보았다. 히데요시는 늙은 모친에게 유광점퍼 하나 준비하셔야죠올해 가을은 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북경의 겨울 추위를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알았다면 파워 귀싸대기가 날아갔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실제로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대표적인 히데요시에게 적대할 가능성이 높은 무장은 아예 병력을 보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에서 입은 타격은 나중에 히데요시파가 도쿠가와파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억지로 참전시키려 했다면 일본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났을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애초에 실패와 패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 성공하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예 일본 본토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다못해 조선만이라도 정복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건 그 고지를 눈앞에 두고 방심에 의하여 실패해버렸다는 것. 만약 일본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승전한 후에, 짧은 정비를 마치고 그대로 북상하여 제해권을 확보해두기라도 했었다면 아무리 이순신이라 한들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을 것이고[8],그러니까 선조는 등신 조선은 그대로 GG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즉, 메이저리그의 명언인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가 실현된 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진압[9]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략을 획책했던것.

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10]

아래 편제를 보면 서일본 내의 주요 무장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하지만 개중에도 참전했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서일본에서 주요무장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다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그러나 동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11], 난부 노부나오[12] 등은 이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있다. 모가미 요시아키[13]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14]는 병 때문에 빠졌고 왜란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15]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16]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 신분 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카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카다케 전투로 처음 다이묘로 임명될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었고, 임진왜란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이다. 즉 1,2,3,5군 대장은 일본내에서는 네임드 무장이라고 할수 없는 무명의 젊은 장수들이다. 심지어 우키다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 버프로 십대중반의 어린 나이로 8군 대장이자 총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는 조선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을 대표하는 장군 정도로 착각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종의 외교사절인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너가 히데요시를 죽이고 왕을 하라!"라고 설득하게 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천황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하자 사명대사가 "히데요시가 왕이 아닌감? 천황은 또 뭐요?"라고 하는 촌극이 일어났다.[17]

2.4. 일본군 병력 구성

  • 제1군 - 큐슈 서부 세력, 18,700명 (선봉 겸 평안도 침략)[18]
  • 제2군 - 큐슈 중부 세력, 22,800명 (선봉 겸 함경도 침략)
  • 제3군 - 큐슈 동부 세력, 11,000명 (황해도 일대 침략)
  • 제4군 - 큐슈 남부 세력, 17,000명 (강원도 일대 침략)
    • 모리 요시나리(2,000명)
    • 시마즈 요시히로(10,000명)
    • 아키즈키 다네나가(1,000명)
    • 이토 스케타카(1,000명)
    • 다카하시 누로(1,000명)
    • 다카하시 모토타네
    • 시마즈 다다토요

  • 제5군 - 시코쿠 세력, 24,700명 (충청도 일대 침략)
  • 제6군 - 큐슈 북쪽 세력, 15,700명(전라도 일대 침략)
  • 제7군 - 주코쿠 서쪽 세력, 30,000명 (경상도 일대 침략,일종의 후방 예비대,보급대 성격이 강했다.)
    • 리 데루모토
    • 리 히데모토

  • 제8군 - 주코쿠 동쪽 세력, 10,000명(명목상의 총사령관)
  • 제9군 - 간사이 세력, 11,500명
  • 수군 9,450명
  • 부교(奉行,히데요시에 의해 군 전체를 감독하고 비상시에 의견을 조율,보고하는 군감직을 맡음.)
  • 기타 참전 인원
    • 구로다 요시타카[22]
    • 사노 요시나가
    • 카가와 히데마사
    • 미야베 나가후사
    • 난조 모토키요
    • 이나바 사다미치
    • 메이 고레노리
    • 키노시타 시게카타
    • 사이무라 마사히로
    • 아카시 노리자네
    • 벳쇼 요시하루
    • 가키야 츠네후사

후속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9군의 지역을 보면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만 참전했다. 동부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16군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전쟁의 경과

3.1. 전쟁의 시작

결국 일본은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이 비변사를 세우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대비책이 없진 않았으나 전쟁을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만큼 대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봐도 꽤나 큰 규모의 병력이 지상이 아닌 해상 수송을 통해 올거라고는 아무도 예측 못했을것이다. 그리고 조선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경상도 선비가 한양 과거 보러 가듯이
중부내륙고속도로[23]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700척 18,700명(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일본군의 침공을 미리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동래부산진에서의 전투는 나름대로 치열했고, 송상현의 경우 그의 죽음에 일본군이 예의를 갖출 정도였다.[24]

그러나 동래부산진이 붕괴되고 난 뒤 경상좌수사 박홍이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군은 말 그대로 도미노 무너지듯이 패퇴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한양을 향해 레이스를 벌이기 시작했다. 선봉장인 고니시와 가토의 경쟁이 치열했으며, 이 라이벌 구도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이어진다. 제장들은 고니시와 가토가 조선에서 자기들끼리 전투를 치를 것을 우려하여 그 둘이 같이 선봉을 서는 것을 반대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둘 중 1등한 한 명에게만 포상을 준다는 조건을 걸어 오히려 초고속 정복을 노리고 같이 선봉장을 세운 것이다.

침공지역을 방어하던 조선군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상부에 자세한 보고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침공이 시작된 후 나흘 뒤에나 소식이 서울에 알려졌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사시 비상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기상조건의 악화 때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날씨가 흐린 날 봉화를 피우는 실험을 했는데, 기록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도 불을 지핀 건지 어쩐 건지 알 수가 없었다.[25]

조선초기에 조선군의 방위체제는 관체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제승방략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진관체제는 각 지역을 분할해서 소규모 부대가 방위를 담당하는 체제로 빈틈없이 방어가 가능하고 여러 겹의 방어선이 구축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대규모 적에게는 각개격파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제승방략체제는 각지의 예비대가 전시에 하나의 전략거점으로 집결하고 이를 지휘할 사령관이 이 집결된 대군을 지휘하는 형태라서 전면전에 강하지만, 이 병력이 괴멸되거나 적이 예비대가 집결하기 전에 고속돌파를 시도하여 성공하면 후방이 바로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제승방략의 이 단점은 임진왜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실제로 초기에 대구에 수만의 방략군이 매뉴얼대로 집결했으나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내습,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와해되었다. 이일 또한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기도 전에 일본군과 맞닥드리게 된다. 이일이 자신이 지휘할 부대를 접수하기 위해 데리고 갔던 장기군관들 중 상당수가 탈영할 정도였다.

후에 명군의 도산전투의 과정을 관찰한 조선의 이시언이 후퇴하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군 도망치듯이 한다."라고 자조적으로 뇌까렸던 것처럼, 조선군은 훈련도도 사기도 형편 없이 낮아 전국시대를 거치며 경험치가 쌓일대로 쌓인 일본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만 조선을 무조건 폄하할수 없는게, 조선은 그야 말로 200년간 전쟁이 없었고 일본은 100년 동안 치고 박고 싸운 전국시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전란 종식의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조선을 더욱 폄하하는 요인이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기마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기병전술로 장창병과 궁병, 총병 위주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26]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북로남왜의 변으로 왜구들과 지긋지긋하게 부대낀 경험을 바탕으로 척계광이 개발한 대보병전술인 강전법을 채택하고 있었다.[27] 이후 조선은 대보병전술인 절강전법을 받아들이고 훈련하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3.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하는 상황이 되자 조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시급함을 깨닫게 된다.

신립이 이끌었던 북 기병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모조리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8]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조총을 잘 쏠 수 있는 것인가?[29][30]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기병 8천여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과 합한 1만 6천의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다, 기병은 급조해서 만들어지는 병종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만 조선전기 중앙군이란 것이 이 수준임을 생각하면 중앙군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닌 오합지졸일 가능성이 크다.

신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

신립의 공격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1, 2, 3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대패했으며, 일본측 기록에서는 수급 3천개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신립이 북방에서 이끌던 정예병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 부족과 이원화된 지휘체계의 혼돈속에서 임진강 전투에서 대부분 소실당하고 만다. 다행히 전부는 아니었고 남아 있던 조선 기병들은 정기룡 등의 지휘를 받으며 대규모는 아니지만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31]

이런 저런 와중에, 동원 가능한 조선 전투병은 대부분 와해되고 나머지는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상황이 되어 결국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택한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최단시간내에 한양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선조를 잡지 못한지라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했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근거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있어서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여담으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의 전쟁은 영주(성주)는 끝까지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면 할복하면서 전쟁이 끝나고, 주민들은 새로운 성주에게 군말없이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성주라는 놈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 반면 그 밑의 백성들은 새로운 성주를 죽이려고 덤볐다.[32][33] 무조건 한양을 점령해서 조선 국왕만 잡으면 전쟁 끝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지역은 제쳐두고 경부가도로만 달려온 일본군은 조선과 일본의 이런 현저히 다른 사고방식에 굉장히 황당해 했다.[34]

3.3. 반격의 시작

그러나 전라도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 곽재우, 김덕령,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발히 일어나고[35]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는 일본군의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던 해군을 이순신 장군이 번번히 격퇴하자 전황은 고착된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래에서 설명할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의 활약으로 육로에서 전라도를 잘 버텨냈기 때문에 수군기지도 운용 가능했던 것.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36]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국경인은 전라도 전주 출신으로 질투심이 강하고 상관을 모함한 것이 탄로나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당했다가 유배가 풀려 고을 아전 노릇을 하고 있었음으로 부하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순전한 임해군의 탓이 아니기는 하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형상을 보인다.[37]

왕이 몽진하자 도성에 분노한 민중이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방화의 주체를 간민과 난민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은 장예원[38]에서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한다.[39]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가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가서 요청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오니깐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걸로 의심한 명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사실상 오지말란 소리다)하고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뜻을 단념했다. 꼴 좋다.

이 때 여진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40]여러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임란 당시 동북아의 외교적 중심국가이자 최강국은 명실상부히 명이었고 명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는 하나 그리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누르하치의 원병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심받기 좋은 일이었기에[41] 고려하기 힘든 정치적 모험이었을 것이다.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왕자들을 맞이하는데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같은 조선인의 배반으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외교적으로 약점 잡혔지만 꼴 좋다. 2 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의 맛보기(?) 차원에서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까지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했지만[42], 그 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 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3.4. 명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43]

제1차 조승훈의 5천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최신 대포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1.27)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 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명나라와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1593.5.18)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특별한 케이스인 벽제관 전투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고 명군이 못 싸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상대가 명군이라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44]

결론적으로 명군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냈으며, 7년동안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수 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커 역할을 수행한 셈이고, 조선의 수군, 근왕병, 의병이 딜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숫적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45]

3.5.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이처럼 참전한 만큼의 몫을 톡톡히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46]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47]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애초에 명은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닌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48] 그러나 이러한 명의 병참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9] 즉, 명은 자국 내에서 하던것처럼 은으로 병참을 할 수 없다. 조선에는 그게 가능할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 이에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왜냐면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협조하는 상인들도 이제까지 하던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했다.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체계 하에서 평안도는 열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의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 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50]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51]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결국 현지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상국이란 이유에서 자존심까지 매우 강했다. 이러니 약탈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옆집에 일손을 도우러 갔는데, 친구는 가난해서 돈이 없고, 직접 들고가기엔 도시락이 무겁고, 현금을 가져가서 사먹으려 했더니 시골이라 사먹을 곳이 없는 것이다. 결국 옆에 친구 도시락을 뻇어먹게된 상황이다.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52]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53]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그나마 군기가 살아있던 남병은 약탈이 덜한데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이 부분은 징비록에서도 수시로 드러나고 있다. 불랑기와 각종 화전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여송이 '핑계를 대' 전투를 회피했다는 징비록의 서술과는 달리, 벽제관 전투 이후 명군은 조선의 보급 문제로 군마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천필을 잃음으로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북군의 핵심은 다름아닌 기병대였는데 말이다! 또한 이여송은 요동에 배치된 송응창의 증원 요청에 대한 본국의 답변도 기다릴 필요가 있었고, 더군다나 조선군의 잘못된 정보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적이 있었던데다가 조선측에서의 병량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태업을 한게 아니라 사정이 있던 것이고, 오히려 류성룡의 비판이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심각한 수준의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일본군이나 마찬가지였다.[54]

3.6. 교착 상황과 강화회담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이 일본군을 격파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냄으로써 전라도 방어선을 지켜내자, 일본군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들어져 물러나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이다.[55] 주로 조선군은 진주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56] 9만 명이 넘는 적[57]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등이 어이없게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58]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59]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60] 그러나 평화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17만 5천의 군사는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요구 사항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히데요시는,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사실상 일본의 승전을 의미하는 거나 진배없는 협상이다. 히데요시가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만 이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것, 특히 굵은 글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에 얼마나 허황된 망상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나라의 조건은,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61]


심유경은 일본의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더군다나 이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알았다가는 명나라가 어떤 패닉 상태에 빠질 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측의 반전파와 협의해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다.
고니시 등은 이를 다시 한 번 '일본측의 요구를 적극수용'하는 것으로 위조해 도요토미의 허락을 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나, 어찌된 일인지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가[62]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분노했고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597) 정유년, 일본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63]

3.7.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정유재란에서 일본은 총병력 14만(특히 수군이 강화되었다)의 군세로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항목과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한 달만에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 <정유재란 당시의 군편성>
    •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 제2군 가토 키요마사 10,000명
    •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13,300명
    •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11,100명
    • 제8군 모리 히데모토,우키타 히데이에 40,000명

이 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코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일본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삼천오백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백성들에게 미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전리품의 목적 외에도 그만큼 일본 서부도 인구가 많이 줄었기 때문.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오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를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사천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이다. 이 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64]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65]

당시 종군승이었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러니까 그놈의 보급만 잘 된다면.

이 때 벌어진 세기의 전투가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명량 해전.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그대로 후퇴.

그 이후로 전쟁은 대치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66]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노량 해전과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한 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안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종결됐다

4. 임진왜란의 이해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1.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하며, 그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군사력 역시 통합체제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영주와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했으며, 협력과 협조보다는 서로 반목하는데 더 능했을 정도다. 그로 인해 조선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그리고 일본은 이 짓거리를 400년 후다시 거하게 벌이고 망한다(...). 아마 일본의 징크스인 듯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결국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가토 기요마사 등은 서군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이유로 동군에 참가. 실제 서군의 대장은 흔히 알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다. 그러나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인 이유는 모리 데루모토는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기 때문. 자세한 내막은 관련 인물들을 볼 것).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이후 벌어질 파워 싸움을 예측하고 전 병력을 물린 덕에 조선은 살아난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살을 깎아먹은 탓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2.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동원해 이후 멸망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 멸망까지는 몇십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물론 수많은 원인 중에 하나이긴 하다.
  • '''만력 3대정이라고 해서, 당시 명나라가 치렀던 3개의 큰 전쟁이 있었고, 명나라가 조선에만 군사를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기에 커다란 전쟁 3개가 겹치고 줄줄히 출현한 암군들의 막장 행보로 명나라가 심각한 재정문제를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

3. 의병이라고 불리는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입안, 실시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오해. 의병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정부의 명령을 받아 활동했고, 전쟁 초기의 혼란기가 지나간 뒤에는 사실상 관군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상당수의 의병군은 전쟁 초기에 흩어진 관군 병졸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기반을 쌓은데다가, 관에서 식량, 무기, 때로는 병력을 지원했기 때문에 사실상 준(準) 관군으로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의병을 일으킨 주체도 의병이 아닌 지방에 있던 전현직 관리와 토호들이었으며 이는 민중 봉기의 측면보다는 기득권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용감하고 굳센 의병이라는 널리 퍼진 통념과도 달리 전쟁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부가 주도했다고는 해도 가장 치열했던 호남과 영남 전투에서는 의병들이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많은 활약을 보였는데,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 징병제였기 때문에 의병이 된 사람들은 징집되면 어차피 관군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의병부대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선조가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주고 각 의병부대의 지휘권을 인정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정식 공채로 관직에 있던 무관들과 전란 중에 무공으로 관직을 받은 의병장 출신 무관들의 알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첨예화되어 폭발한 것이 김덕령 사건.

실제로 부원수 신각은 신립이 패하는 와중에도 홀로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를 격퇴하기도 했다. 그런데 도원수 김명원이 자신이 도주한 것을 오히려 신각에게 뒤집어 씌워 참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각이 참수된 후에 신각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참수를 너무 빨리 집행했다는 것 자체가 선조의 병크다. 그때 장계와 같이 딸려 도착한 일본군 병력들의 수급만 뻘쭘해졌다. 김명원은 그렇게 말아 먹어도 냅두더니...[67]

사실 임진왜란때 정부측(특히 선조)에서 하도 잘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던지라 왜란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매우 나쁘다. 심지어 이순신 관련 교육만화만 보면 류성룡은 왠지 이순신 장군과 친한데 들러리, 윤두수는 지 친척 승진시키려고 잘싸우는 사람 잡아먹으려는 찌질이 정도로 표현되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저 두사람은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비참할 정도로 무능하거나 탁상공론만 했던 인물들은 절대로 아니다. 정유재란 당시에 거병한 의병은 임진왜란 당시에 거병한 의병의 규모와 비교해 처참할 정도로 적다. 이는 싸울만한 나이의 남정네들은 이미 다 전장터에 나와있었고, 전쟁이 지구전화되자 조정에서는 오히려 일부 군대를 해산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4. 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은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임진왜란이 주는 교훈은 정말 간단하다. 전쟁의 위협은 언제든지 존재하며, 따라서 평화를 위해서는 그걸 지킬 수 있는 힘과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5. 전후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 침략군을 모조리 몰아냈으니까. 일본이 이 전쟁으로 획득한 땅이 1평이라도 있어야 일본의 승리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 전쟁으로 조선에게 빼앗은 땅 따위 일절 없다.

의외로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패배했다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전쟁에서 입은 피해는 피해고, 승리는 승리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서부전선이 펼쳐졌고 프랑스는 젊은이들이 씨가 마를 정도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가 패배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중일전쟁 역시 중화민국군이 이리저리 쫒겨다니면서 대량의 인명 피해를 입는 등 엄청나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일본 본토에는 피해도 못 줬지만 결과적으로 중화민국의 승리로 끝났다. 더구나 왜란의 전투 범위는 개전 초 1~2년을 제외하고는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각 전투도 이곳에서 벌어진 국지전에 그쳤다. 일본군은 전쟁 초기 이후 남원 이북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조선의 물적·인적 손실이 더 컸다느니,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못 받았다느니, 일본의 땅을 빼앗지 못했다느니 별별 이유를 들며 조선이 임진왜란에 사실상 졌다고 아득바득 우기는 사람조선까들을 의외로 꽤 볼 수 있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여수전쟁과 1차 여당전쟁은 고구려가 수·당나라에게 진 전쟁이 된다. 이 전쟁에서 중국 세력에 못지않게 고구려가 입은 군사적 피해 또한 만만찮았으며, 특히 잇따른 침범에 대응하고자 거듭 벌인 청야전은 국토를 황폐하게 하여 결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단지 중국 세력의 침입을 물리쳤을 뿐, 그로 인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땅은 1cm도 없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으로부터 침략으로 인한 사죄 보상을 받았나, 사과를 받았나... 오히려 여수전쟁 승리 기념물을 허물라는 당나라의 강압적 요구에 굴복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와는 달리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300년 넘게 나라를 유지했으며, 일본으로부터 사과 및 포로 송환도 이루어 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여수전쟁·1차 여당전쟁에서 졌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면서 정작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졌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이 역시 조선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하지만 피해는 당연히 전장이 된 조선이 가장 컸고, 이후 조선은 인구수와 농지가 대폭 감소한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 중국, 소련도 마찬가지. 그런데 조선의 경우 농지가 무려 66%나 감소했으니 상당히 치명적이다. 이 전쟁 최대의 수혜자는 어부지리를 얻은 훗날 청나라가 되는 후금의 누르하치와 도요토미 정권을 없애고 260년의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20세기까지도 조선시대를 임란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누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의 한국사학계는 사림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던 16~17세기를 하나의 시기로 간주, 조선 시대를 전/후기의 양분하기보다는 전/중/후기로 나누어 보는 시기구분론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이 중기에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중심으로 조선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누는 대신 관학파/사림파/일당독재의 3단계로 구분하는 구분법을 주장하였고, 현재 국사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의한 전체적인 국력소모도 명과 조선에 비교해서 적은 편이고, 그냥 히데요시 집권기의 분탕질 정도로 생각하기에 임진왜란, 그러니깐 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이순신만 짧게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삽질이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다만 조선 입장에서는 전후에 10만여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약탈된 문화재도 상당수 있어서 간단히 넘어가기가 어렵다.

일본이 끌고 간 포로들 중에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덕분에 일본의 도자기 공업이 급성장하여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했으며, 유럽과 아라비아에서 큰 위세를 떨쳤다. 곧바로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면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전란으로 혼란한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체 공급처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여기에 일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확실히 이득을 봤다. 돈도 벌고 혹도 떼고. [68]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국제 전쟁.

조선은 "쇄환사"라하여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 출신 토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민족에 대한 병합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도공들 중에서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써,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급'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 씨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상황을 맞이했어도 너무 세월이 흐른 탓에 차별은 커녕 그 지역 장인이자 유지로 굳어진 상태라서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 관동 대지진 당시 일부 폭도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도공 후손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가 동네 주민들한테 몰매를 맞기도 했다. 역관광

하지만 좋은 취급은 도공 같은 특수 기술자들한테 한정될 뿐, 그 이외의 조선인들이 받은 대우는 당연히 좋지 못했다. 일본이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판 조선인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특히나 당시 최고의 해상 네트웍으로 리즈시절을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에 따라서는 팔려간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일본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동아시아의 노비는 일종의 소작인같은 개념으로 결혼, 출산, 일부 재산소유가 허용되는 지위였지만, 서양에서의 노예는 그냥 물건 취급받아 결혼과 출산은 물론 어떠한 인간관계도 허락되지 않았고 그냥 죽도록 일시키다 그냥 죽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랬고.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상기했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무역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임진왜란을 전후했던 때였다. 특히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 유럽, 남미 등으로 팔려나갔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항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까를레티가 1701년 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소설가 오세영 씨가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다).

6.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에도 시대에 유학이 번성하면서 징비록도 일본에 건너갔는데[69]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순신과 히데요시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임진왜란을 히데요시와 이순신의 전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며 그를 높게 보든 낮춰서 보든간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 사실상 이순신 외에는 명과 싸우러 가서 명의 원군과 싸웠다는 서술이 많다. 조선군이 명의 지휘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지나치리만큼 무시하는 것. 당장 전국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명과 싸우러 간다고 하지 조선과 싸우러 간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사실 한국에서는 주로 외국을 까는 경향이 심해서 그렇지 명군은 원나라 수도까지 불태우고 몽골족 대부분을 학살한 전력이 있다. 물론 잘 연구한 서적들에서는 오류가 보이긴 해도 전쟁 양상을 잘 그려내긴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렇게 유명한 전국시대에서 임진왜란은 흑역사급으로 취급받는다. 기껏 얘기를 할 경우에 하는 말은 '필요 없는 전쟁이었다' 정도. 창작물에서도 "히데요시가 명을 치려다가 조선과 전쟁을 했다. 근데 졌다. 끝" 정도. 이해가 가긴 하는 게 조금만 잘못해도 한국에서 크게 욕을 들을 수 있으니 의도적으로 빼는 것도 있을 것이고[70] 크고 아름다운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자세하게 하기도 힘들었을 듯. 최소한 미화는 하지 않으니 다행이긴 하다. 가토가 호랑이 잡았다, 고바야가와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조졌다, 시마즈가 사천에서 명군을 조졌다, 노량해전에서 시마즈가 이순신을 저격했다 정도.

7. 조선, , 일본의 전후 상황

7.1. 조선의 전후

육상에서는 독소전쟁이, 해상에서는 태평양 전쟁이 400년 앞서 조선에서 열렸다고 보면 된다. 왜란이 일어난지 7년 동안 조선은 전국을 다 합쳐서 막대한 인명피해와 물자피해 등을 보았으며 전쟁동안 일본군들이 상륙하여 전국 각지를 공격하며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키고 양민들도 학살하였으며 농토와 농촌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어서 임금의 수라상에 쌀밥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쓰라린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거 참전을 하였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처녀와 부녀자들도 잇딴 피해를 입었고 여자들은 일본군이 자신을 노렸을 때 성추행 성폭행 임신까지 당하는 등 정신적인 피해도 입었다.

이러한 전쟁 범죄의 책임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에게도 있는데, 조선군 역시 종종 민간인들의 물자를 털어먹었고 개중에는 조직적인 약탈도 있었다. 명군도 마찬가지. 명군은 남해 지역의 민간인들을 일본군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조선 도적들은 이때다 싶어 힘없는 다른 조선인들을 유린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나서 가장 핍박받는건 민간인들이다.

문화재도 대거 피해를 입어서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방화로 없어졌고[71] 그 밖에 일부 사찰과 가옥들도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 중 일부 문화재는 일본군이 약탈하여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버렸고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농업 및 산업의 기반도 대거 파괴가 되어서 농어촌은 농사를 짓지도 못하거나 출항을 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쇠붙이도 모두 무기 및 무장용으로 소모되어 버리는 바람에 남아있는 것도 없었다.[72]

전후 조선 사회는 이를 계기로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조선의 정치세력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이 팽배해졌으며, 이는 전쟁으로 인한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조선후기의 사회 막장테크를 만드는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농지와 같은 기존 산업시설의 붕괴도 후기에 갖은 폐단을 낳게 한 원인이 되었다.

보통 전쟁, 특히 방어전의 경우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이미 정유재란 이전에 김덕령 등의 일부 무장들이 선조의 권력욕과 의심에 휘말려서 숙청당했고 이순신, 권율 등 주요 무장들은 전사하거나 전쟁 이후 곧 자연사하였다. 또한 곽재우처럼 정계 진출을 하지 않고 재야에 은둔하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문치(文治)를 원칙으로 하여 군인들의 정권 장악을 터부시하는 조선의 정치 문화와, 선조와 측근들의 행위를 보고 정치 자체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7.2. 명과 일본

명나라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73] 조선과 왜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왕조가 성립되어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국 왕조 말기의 전형적인 국내의 농민 반란이 겹쳐서 일어나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군에게 북경이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였으며, 연달아 일어난 후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하지만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라는 직접적 인과관계는 많은 과장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이미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는데 만력제가 얼마나 막장 황제였냐 하면 후한영제(靈帝)에 비견되는 암군이였다. 따라서 이 당시 명나라는 후한말에 비견될 정도로 이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일본은 7년에 걸쳐 침략을 반복했으나 당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다만 전반적인 인구 피해는 큰 편은 아니었고[74] 오히려 학자와 기술자 납치, 불상과 서적 등 문화재 약탈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손해가 맞아서 침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75]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물학적 수명도 끝나버렸고,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면서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의 모든 잘못은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후 조선과 외교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조선 왕릉을 도굴한 범인을 넘겨주거나,[76] 붙잡아온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주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은 화해하고 양국 간의 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8. 이것저것

  • 일본군의 1군부터 9군까지, 사단장급 인물중에 죽은 사람은 거제도에서 병사한 하시바 히데카츠[77][78]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79] 물론 일본군의 사단장급 인물 중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인물들이 있긴 했다. 행주 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 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 급인 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다이묘급들까지 쳐주자면 6인 정도가 사망했다.[80]

  • 노량 해전이나 시마즈 요시히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시마즈는 노량 해전에서 동원한 500여척 가운데 200여척이 침몰되고, 150여척이 대파, 100여척이 조명 연합 수군에 나포되고 살아 돌아간 건 1/10정도인 50여척인 수준에서도 부하들을 물에 처박으며 도주에 성공했으며, 이외에도 이순신에게 처발린 수 많은 일본 수군 무장들 또한 휘하 함대가 궤멸되더라도 대부분 목숨을 건지는데는 성공한다.

  • 이렇게 일본 영주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무사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영주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고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 흔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3대 대첩으로 권율의 행주 대첩, 김시민제1차 진주성 전투, 이순신한산도 해전을 뽑는다. 일본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수적인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그 외에도 한국사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히는 원균칠천량 해전도 임진왜란에서 벌어졌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목사 이경록[81]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대한 지원을 건의했지만,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 언어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쯤해서 유입되었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82]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아이를 줏어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리아 오다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천주교를 교육받으며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다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다는 이를 거부하고 끝가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다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다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임진왜란 당시이다. 당시 포르투갈어 pão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때 조선군에 흑인 군인이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뭔가 강력해 보이는 흑인의 외모와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것을 참전시킨 것.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다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83] 국가 권력자가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 정도로 인식한 모양.

  • 이 전쟁으로 인하여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였다.

  • 디씨 합필겔에 필수요소와 합성되어 패러디 되었다.#

  •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저작을 여러권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어느 책도 임진왜란을 잘했다고 한 책이 없으며 언제나 무익하고 허무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적어도 한줄은 있고 비중이 높아지면 적의 장군이 아니라 "주인공"http://blog.naver.com/halmi/40011769894.

  • 도요토미 히데요시빠와 논쟁이 붙을 경우 임진왜란만 거론해도 한방에 데꿀멍시킬 수가 있다. 그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 전체에서 최악으로 삽질한 행동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태합입지전만 해도 임진왜란은 그냥 넘겨버리거나 조선이나 명을 공격하려 하면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본이 갈갈이 찢어진다. 심지어는 일본 고전문학에선 사악한 텐구가 히데요시에 빙의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병크중의 병크로 여겨진다.

  • 워해머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미니어쳐 게임중 하나인 '워해머 히스토리컬' 시리즈 종족 중에 사무라이 시리즈가 있는데, 그 사무라이의 적 테마인 '일본과 그 적들'에서 등장하게 된 진영중의 하나가 흥미롭게도 '조선군'이다. 제작자는 모델러로 유명한 앨런 페리가 맡았다. 보통 사극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포졸 복장의 안습한 조선군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마침 한국의 미니어쳐 게임 플레이어 한 명이 그 소식을 듣고 모델을 보고서는 조언을 하며 여러가지 자료를 제작자들에게 넘겨 주며 이글루스에서도 이슈화 되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완성품이 등장했다. 자칫 알려지지 못할 뻔한 이야기였지만, 좋게 되어가는 듯해서 다행. 주소는 여기.

    현재는 쌍검기마병(앨런 페리는 '쌍검기마병을 실제 편제에 포함한 군대가 있었다니 하악하악'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면서 크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쌍검이 조선 기병의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궁병, 신기전(화거라는 이름으로 등장), 심지어 의병이나 승병 등 질 좋은 주석 모델이 계속 출시 중. 최고의 모델러 중 한 사람인 페리가 만든 만큼 퀄리티가 하늘을 찌른다.

    한국에선 홍대의 오크타운에서 구매할 수 있다. 진열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카운터에 문의할 것.

  • 또다른 보드게임으로 일본의 워게임 전문잡지 게임저널 31호로 일본 아마존에 재고가 있으니 일본어가 가능하고 이 게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구입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4만원 가까운 가격은 부담스럽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ゲームジャーナル31号'으로 검색하면 구성 및 다양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31호 다운로드 주소가 있긴 하나 잡지를 구매해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플레이해본 일본인들에 따르면 일본군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고. 초반에 쾌진격을 하지만 역사대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안도로 튀고... 바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이 2중, 3중으로 포위되버리는데다 일정턴이 지나면 명군이 인해전술을 벌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각개격파 당하기 일쑤라고. 의병의 봉기를 막겠다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 대한 점령전을 실시하려 해도 벙력이 부족해서 불가능. 여기에 이순신이 보급로를 끊어버리기 때문에 일본군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 박앵귀 작가의 신작 게임인 십귀의 연에서도 일부 거론된다.

  •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이 나는 시점으로 표현한다/ 본작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많이 띄워주는 편이라 임진왜란을 보고 이에야스가 "저 인간이 미친거 아닌가?"하고 히데요시를 까는 모습을 보여준다.

  • 왜란 시기에는 의병들 못지 않게 승병들도 많이 활약하곤 했다. 그 공헌이 너무 지대한 나머지 억불 국가인 조선의 사신들 조차 이들 승려들을 까는 글을 거의 찾기 드물었고 오히려 무신들이나 비불교도[84]들을 디스하는 글들이 적지 않았다.[85] 특히 사명대사같은 경우는 일본인들이 중과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외교관으로 활동한 정황이 적지 않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줬다고 했다. 이 외에도 전공에 대한 대가로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로 임진왜란은 조선 불교가 그나마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 볼 수 있다.

8.1. 임진왜란? 임진전쟁?

2011년 9월말에 인터넷 상에서는 임진왜란을 2012년부터 교과서에 임진전쟁으로 바꿔서 서술한다는 소식이 알려져서 논란이 일었다.

사실 이것은 2011년 입학한 고교 1학년생이 배우는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부터 신설되는 "동아시아사" 과목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라는 취지로 한일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논리가 있었고, 여기에 기존 교과서에서 '일왕'으로 표기한 것을 '천황'으로 고친 것 등이 합쳐져 반일감정이 강한 인터넷 상에서는 까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학술적으로는 현행 명칭보다 새로운 교과서 쪽이 더 정확하고, 근대 이전에 발생한 전쟁의 명칭을 정하는 일에 침략국의 도덕적 책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이 교과서가 기존의 국사를 당장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논쟁은 너무 과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교과목이 나온것이지 국사를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로 대체한것도 아닌데다가, 동아시아사는 통사로서 전 시대를 다루기 보다는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라고 언급해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인터넷에서의 임진전쟁에 반대하는 의견 중 일부는 포인트를 잘못 잡고 있는데, 임진전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을 친일파, 나아가 뉴라이트라는 표현을 쓰며 이명박 정부의 하수인 격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전쟁을 주장하는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대운하 반대 교수에 이름을 올렸으며 # 2009년 사학자 시국선언에도 참여하였을 정도#로 親정권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1987년 5월에도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9. 관련 작품

  • 임진록 - 항목 참조.

  • 척전
  • 박종화의 임진왜란
    역사소설가 박종화의 대하소설. 고전소설 느낌이 강하게 난다. 소설속 역사관은 완전히 옛날 역사관으로 대인배에 성인군자급으로 나오는 선조, 붕당이 나라를 망쳤다는 통설, 막강한 명군, 허접 관군과 막강 의병 등 지금 보면 압박적인 사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소설이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박종화 특유의 필력에 녹아들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김성한의 <7년전쟁>
    '바비도'의 저자로 유명한 김성한의 대하소설. 1980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연재했으며 1992년에 <임진왜란>을 제목으로 하여 7권 완결로 출판되었다. 작가가 작가인지라 상당히 퀄리티가 높고 외교전에 관한 분량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심유경, 나이토 조안(소설에선 조선측에서 부르던 별명인 소서비로 등장), 윤두수, 윤근수 형제 등 외교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챕터가 상당히 많다. 옛날 소설판에는 일본측 인물들이 풍신수길, 소서행장 등 한국 한자음으로 불렀는데, 재출간판에서는 일본 발음에 기초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으로 적고 괄호 안에 한자음을 표기했다. 당시 소설치고 흔치 않게 선조의 의심병과 찌질함, 원균의 미련하고 탐욕스러움도 제대로 묘사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평가가 후한 편이다. 2012년 8월, 7년전쟁이라는 원래 연재시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 달과 칼
    성원의 대하소설. '백성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이란 주제로 쓴 소설로 미시사적 측면에서 본 임진왜란이라는 좋은 평가도 있으나 너무 백성의 입장만 강조한 나머지 많이 노력한 높으신 분들의 업적은 대부분 무시하는 기본적인 사실왜곡이 적지 않으며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 평!(平)
    방기혁의 역사소설. 특이하게 임진왜란 종전 후 몇 백년 뒤 저승에서 염라대왕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처럼 임진왜란에 관련된 인물들을 처벌 및 진상을 규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작가가 전공이 사학이 아닌 탓에 고증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사실이 심심찮게 나온다. 일단 제목인 平부터, 조선에서 히데요시의 이름을 평수길이라고 쓴 데서 착안했는데, 작가는 平이 이라씨를 나타내는 글자인 줄 전혀 모르고 十八의 파자, 그러니까 히데요시를 욕하는 뜻으로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86] 또한 작가가 나이 지긋한 탓에 왜장들의 이름이 소서행장, 가등청정 이런 식으로 나와 읽는데 애로사항이 많다. 이 소설의 진주인공계월향. 그녀의 로맨스가 반을 이룬다.

  • 김경진의 임진왜란
    밀덕후 계층에게 유명한 작가들인 김경진, 병도의 공동저작.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원균옹호론과 고증 오류에 강력히 반발해서 쓴 소설. 위의 소설들과 달리 밀리터리 소설가들답게 강력한 고증과 전투신을 극대화한 소설이다. 다만 명량 해전 부분은 전작 <격류>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비판도 있다.

  • 칼의 노래
    소설가 김훈의 작품. 2000년대 한국문학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애초에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 중에 하나로 알려졌지만, 사실 큰 관련은 없고 저자는 자기 작품은 빼놓으라고 방송사에 거세게 항의했다. 다만 주연 김명민은 이 작품을 정독하고 연기에 반영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조일전쟁
    재미교포 작가인 백지원이 낸 인문 교양 서적. 그러나 저자가 전작 왕을 참하라에서 드러냈던 극렬 조선까 시각을 그대로 가져온데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세계 최강의 육군이라고 지나친 과장을 하는 바람에 수많은 역덕후들로부터 무수히 까였다. 1쇄분에서는 이미 2005년에 반환된 관대첩비가 아직도 일본에 있는 줄 알고 정치인들은 이런거나 돌려받지 뭐하고 있냐고 했다가 누군가에게 지적받았는지 2쇄분에서는 부랴부랴 고쳤다. 또한, 임진왜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 떡 하니 들어가 있는 황당함은...



  • 왜란종결자
    이우혁판타지소설. 이순신 약골설의 원인이기도 하다. 항목 참고.

  • 초와 갈대
    고우영 화백의 만화.
    전쟁 당시 산에 숨어 지낸 마을 사람들과 도래인 후손인 왜장이 나오는 이야기.
  • 불멸
    김탁환의 장편 소설. 이문열처럼 작품 작성 능력은 출중하지만, 원균을 이순신의 반대편에 위치한 명장이라며 무리수를 두면서 띄우다 보니 전반적으로 등장인물에 대한 설정이나 서술이 반대급부로 낮아지고 말았다. 작가가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비난을 받았고, 작가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지은 다른 소설들이 대부분 호평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로서의 명성과 역량까지 저평가받게 만든 괴작.

  •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
    2013년 9월 2일부터 MBC 표준FM에서 방영중인 라디오 드라마. 자세한 내용은 배한성의 고전열전 항목 참조.

  • 문명 5/시나리오 사무라이의 한국침략 시나리오
    여기선 병자호란까지 합쳐졌다. 한국, 일본, 중국, 만주로 싸워야하는 시나리오. 한국, 중국은 도시를 모두 수복해야 하고 일본과 만주는 서울과 베이징을 먹어야 한다.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전투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3편까지는 이순신의 능력치도 낮게 평가되어 있고 해전도 명량 해전 하나만 기록되어 있는 등 고증이 부실하지만 3편의 확장팩 Divine Wind부터는 이순신의 능력치가 상향되고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대부분의 전투가 기록되고 이순신과 선조의 능력치가 재평가되는 등 고증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보인다.

10.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0.1. 조선측 주요인물

10.1.2. 정규군 지휘관

10.1.3. 의병장

10.4. 전투 전개과정

10.5. 기타 전투

10.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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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서 豊太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뜻한다.
  • [2] 일부 사람들이 일본에서의 표현을 보고 役은 별로 대단치 않은 국지전등을 의미하는거라서 일본에서 일부러 임진왜란을 비하 내지는 격하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오히려 한국이다. 한국에서 쓰는 명칭인 임진왜란 자체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이라는 의미이고 이는 동원된 군인만 수십 수백만에 이르는 국제전쟁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정작 일본에서 쓰이는 役은 임진왜란과 같이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된 전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필이면 1910년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이 "분로쿠 케이쵸의 역" 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네 영토가 된 땅을 자기네 선조가 정벌했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물론 나중에 쫓겨나지만.
  • [3] 여기서의 조선은 북한이다. 북한의 공식 국명은 지금도 '조선'이다.
  • [4] 참고로 이 장면에서 조선 측 신하들의 의상은 KBS에서 협찬해줬다고 한다.
  • [5]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참고로 위의 기록은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도 보인다.
  • [6] 1590년. 당시 일본의 연호
  • [7]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8] 근데 칠천량 해전 이후에 제해권을 장악하지 않은 것을 비단 방심이라고만 하기도 뭐하다. 누가봐도 말도 안되는 전투에서 조선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매번 자기들 작전에 발목을 잡아대던 이순신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 나름대로 한번 묵사발 내줄 생각이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러니까 그냥 이순신이 사기다
  • [9] 당시 난부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의 후계자리를 놓고 양자인 난부 노부나오와 사위인 코노헤 마사자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명 코노헤의 난
  • [10]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진주박물관, 장원철-오만 역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
  • [11] 고바야카와 다가카케가 1597년 사망하고 5대로가 되었다.
  • [12] 이전 글에는 난부 시게나오라고 되어 있으나 이 사람은 17세기 사람이다.
  • [13] 하시바 히데아키라고도 불린다.
  • [14] 가모 히데아키의 아버지다.
  • [15] 도쿠가와 직할령은 말 그대로 직할령 400만 석,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의 300만 석으로 총 700만 석이었으나 그 밑의 다이묘들은 끽해야 초슈, 사쓰마, 마에다, 다테가문 정도를 제하면 몇 십만 석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 [1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4석 가량에 더해 광산, 무역 수입을 얻었다. 5대로 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능가하는 석고를 보유했으며, 5대로를 포함해 어지간한 메이저 다이묘들은 100만 석 이상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 [17] 조선 조정 자체는 천황제와 쇼군 또는 관백과의 관계 그리고 각 영주(조선에선 이를 거추, 즉 큰추장이라고 불렀으며 대표적 거추는 오우치씨지만 이 당시엔 이미 몰락했다)와 쇼군 또는 관백과의 관계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를 참람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사명대사는 국제관계에 대하여 잘 모르는 중이기에 이러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서 이런 오해를 할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
  • [18]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 [19]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여기에 쓰시마 도미중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사람 56명, 쓰시마에 살던 조선인 5명을 통역으로 종군 시켰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5만을 겨우 웃돈다. 소 대신 무네라고도 읽는다. 그래서 무네 요시토모라고도 한다.
  • [20] 당시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않던 (앙숙 수준이였다.) 가토를 2군으로 보냄으로써 서로 경쟁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21] 부교로 끝난게 아니라 실제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게 행주대첩.
  • [22]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 [23] 실제로 영남대로 루트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장 단시간에 접근할 수 있는 길목으로 조선시대에는 영남지방~한양간 주 이동루트로 사용되었다. 현 중부내륙고속도로나 중부내륙선 철도 또한 이를 염두에 두고 건설되거나 건설되는 중.
  • [24] 심지어 정발은 죽은 뒤 일본인들이 '흑의장군'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한편 송상현은 피하라는 일본군의 권유에도 분전끝에 전사, 배꼽 밑에 콩알만한 검은 점으로 시신을 확인, 고니시는 송상현을 죽인 병사의 목을 베었다. 또, 고향으로 시신 운구시 일본군이 길을 비켜주었다.
  • [25] 사실 이때가 아니더라도 조선의 봉화 체계는 외침시에 제대로 작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조선 정부가 무능한 탓이라기보다는 봉수제 자체의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 중간에 하나만 땡땡이를 쳐도 말짱 도루묵이니.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18&id=421
  • [26]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기병을 양성하고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중국보다 빈약한 경제력을 가진데다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조선으로선 무리였다.요즘도 돈 없다고 기계화보병이고 나발이고 알보병 끌고 행군하긴 하지만 북방기마민족인 여진족을 상대하는데 기병을 양성한것도 조선이 총력전으로 가서 국가안의 모든 말을 긁어모아서 양성한 것이다. 이것도 잠깐이지만. 그래서 평상시의 조선군은 보병중심이었다.
  • [27] 그리고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군의 주축은 바로 왜구와 싸움에 익숙한 남방군이었다. 물론 왜구와 일본 정규군은 달랐다.
  • [28] 탄금대vs조령 논쟁은 전쟁직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 [29] 일단 당시에 조총의 내수성을 높이기 위해, 조총의 점화구에 작은 우산을 달아 어느 정도 비를 막는 기술이 일본에 있긴 했다. 문제는 해봤자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 [30]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일본 아시가루들이 주 무기로 장창(長柄槍, '나가에야리'라고 읽는다. 무려 6m를 넘기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장창이었다)을 사용한 방진(야리부스마槍衾라고 불렸다)을 형성하여 싸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총이 무용지물이 되더라도 비 오는 날 진창을 달리는 기병대가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다(다만, 일본의 장창전술은 대기병용으로 등장한 다른 문화권의 장창과는 조금 다른 탄생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창 방진 자체의 대기병 전투력이 없어지는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일본군이 조총만 가득 들고 온건 아니니까.
  • [31] 그러나 정기룡의 전공은 지나친 미화가 있기에 그의 행장에만 기록된 바 근거가 부족하다. 정기룡 항목 참조. 게다가 여진을 상대했던 함경도 병력 등은 잔존한 모양이나 후에 진군한 가토의 군대에게 괴멸당한다. 특히 해정창 전투 같은 경우는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을 이용해 함북 기병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 전투 이후 조선은 기병을 운용하기 힘들어졌다. 이건 임진왜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 [32] 단, 선조가 까여야 하는 이유는 몽진(도망) 간 것 자체가 아니라 몽진 간 후 왕 노릇을 제대로 안한 것 때문이다. 일본 전국시대 영주들이야 패배하면 도망칠 곳도 없으니 싸운 것이었고.
  • [33] 또한 조선왕조가 직전제의 근본적인 문제와 방납의 폐단, 요역과 연분 9등법의 문제로 인해 백성들이 착취당하고 핍박받긴 했었으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잘 할려고 했다가 문제가 생긴 것인데다가 그래도 어느정도 개념이라도 가졌던 반면, 일본 쪽은 자국도 아니고 반란도가 높은 외국에서 그것도 곱게 정복한 것이 아닌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이를 시행하려 했으니 당장의 생존마저 보장이 안되는 데 순순히 있을 리가 있나(...)
  • [34] 선조가 달아났다는 보고를 들은 히데요시가 "항복하면 조선영주를 시키려고 했는데..."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과 조선의 통치방식 차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 [35]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의 이해'에 기술.
  • [36] 취미삼아 양민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으로 껍데기는 왕자인데 내용물은 김길태이니 누가 좋아하겠나.
  • [37] 여러 번 양위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
  • [38] 누구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
  • [39] 이 부분은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 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물론 아직 사실로 검증되지 않은 기록이다.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 [40]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가토의 부대는 이미 여진족들의 땅까지 노리고 있었고,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만주에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 조선과 힘을 합쳐 그들을 미리 저지하는게 더 실리적이였을 것이다. 이 당시 누르하치의 세력은 일본군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상당하기도 했고.
  • [41] 조선은 이시기 일본과 밀약을 맺고 명을 치려 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었다. 이로인해 원병 요청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42] 이 당시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질린 함경도의 조선인들도 일본편이 되어서(...) 함께 침공했다고 한다.
  • [43] 더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조선까지의 거리 때문에 식량운반의 문제도 있고 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강화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일본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셈. 지켜보는 선조만 답답할 뿐.
  • [44] 특히 형편없이 급조된 조선 기병과는 달리 북방의 기마민족인 만주족, 몽골족과의 전투로 단련된 명나라의 기병대는 보병 중심의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 [45] 사실 그 이전부터 숫적으로 몇 만은 족히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는 굳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전투 의욕을 보인 시점은 정유재란 때다.
  • [46] 그런데 사실 조선이 명군에게 입힌 피해는 더욱 컸다, 대표적 사례로 군마 절반이 일본군과 싸우기 전에 조선에서 받은 보급품 문제로 죽는다. 당시 중국 병법에 의하면 기병은 보병 10명 취급을 받았으니...
  • [47] 사실 이런 명군의 민폐는 현대 이전 군대에서 흔한 일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만 해도 유럽에서도 자국 병사들을 적국 병사들만큼이나 두려워한 일은 흔했다
  • [48] 출처 :「쾌락의 혼돈」, 티머시 브룩 저,「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오금성 저
  • [49] 이는 명의 영향도 상당히 있다. 명은 주변국들에게서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스페인(필리핀을 통해 접촉)과 일본처럼 막대한 은을 산출하는 국가가 아니라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 후기 화폐경제때도 은이 아닌 다른것을 화폐로 삼은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 [50] 조선 북방에서 사용한 조운선인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크기는 컸지만, 조선 북부지역에서 걷은 세곡은 모두 함흥 별굴까지만 갔고 한양까지 가지 않았다. 당연히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 해상운송의 발전이 그만큼 떨어질 수 밖에 없다.
  • [51] 출처 :「다시보는 임진전쟁사」, etc.
  • [52] 명군 참장 낙성지 등이 은광개발을 건의했으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은 금은을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 데 국가부담이 매우 커서 세종 때 완화되기 전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란 이후 명의 사신들은 무지막지하게 한국의 귀금속을 뇌물로 긁어갔다. 호란 이후 청나라도 귀금속을 좀 요구했지만, 임란 이후 명이 긁어간 수준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 [53] 출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교수 저
  • [54] 군대 수발하다 지친 백성들이 "어찌하여 왜군이 이르지않아 우리를 이리 힘들게 하는가?" 하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
  • [55] 김시민이 이미 전사한 줄을 모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은 꼭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런데 당시 진주목사인 찌질이 예원이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잡혀 죽자 다테 마사무네는 그 목을 베어다가 김시민의 목이라고 소개하며 히데요시에게 갖다 줬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서예원이 명장은 아니어도 용맹한 장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즉 위에 적은 것처럼 겁쟁이에 찌질이라 울보불고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는 것. 진주성으로 부임하기 전에 몇차례 전공을 세웠다던가 2차 진주성 싸움에 앞서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해)온 가족을 진주성으로 불렀단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데 이건 천일의 후손과 예원의 후손들이 서로자기 조상 자랑하고 상대방 조상 욕하는 내용이라 진실은 알 수 없다. 좀 더 연구가 되면 확실한 결론이 나올 듯하다.
  • [56] 진주성 방어에 나선 병력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고 있다. 입성자와 전사자 관련기록을 비교대조해 보면 입성해 방어전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없는 부대가 전사자 수효에 다수 포함되고 막 그렇다.
  • [57] 진주성 공격 시기의 일본 육군은 초기 병력의 40% 가까이를 상실해 약 10만여 정도 남긴 했는데 이때 참전 영주들 관련 기록을 보면 영지에 충원병력 보내라고 막 닦달하고 있어서 총 규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
  • [58] 일본의 '회본태합기'에는 비가 올 때 귀갑차를 사용해 성에 접근해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고 있다.
  • [59] 조선시대 사료나 하멜표류기들을 보면, 향토방위는 승병들의 고유의무였다. 추측건데 징병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남정네들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때 남자들이 믿고 마을을 맡기기에는 승병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마찬가지로 보부상들은 전시에는 척후병으로 징집되도록 되어 있었다.
  • [60] 의병과 수군을 합치면 17만 5천이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력은 정규군이었다. 의병은 보조적 역할을 맡다가 결국 정규군에 편입되었는데, 병농일치 징병제 국가인 조선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단 조선 후기부터는 모병제였다.
  • [61]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오히려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 사과를 딱히 이에야스가 평화주의자라서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 [62] 대개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문맹이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한 고니시는 사전에 심유경과 짜고 사이쇼 죠타이를 시켜 위조된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 참고로 이 사람이 게임 임진록2에 일본 영웅으로 등장하는 그 '세이쇼오'다. 이 인간은 진구황후 전설에 푹 빠져 산 인간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을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한데, 고니시가 무슨 생각으로 이 인간을 믿은 건지 이해불가이다.
  • [63] 심유경은 이후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린다. 고니시도 개죽음 당할 뻔 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 [64] 양호가 서울을 떠나자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선조가 가서 붙잡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건 피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양호는 서울을 무조건 지키겠다며 확실하게 약속하기도 하는 등 개판이다.
  • [65] 히데요시의 명령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굳이 한양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한양공격을 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 [66] 엄밀히 말하자면 패한 건 아니다. 울산성 함락 및 전멸의 위기 직전에 일본의 구원군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전하긴 했어도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 구원군이 좀만 늦었으면 가토 기요마사 포함 울산성의 일본군이 모두 전멸했겠지만.
  • [67] 하지만 김명원은 이 덕분에 찍혀서 도원수를 계속하지 못하고 권율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권율의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교체된 것이기도 하지만 연패에 패배 책임을 떠넘기는 장수를 두둔할 정도로 선조가 멍청하진 않았다.
  • [68] 이점에서 임진왜란을 노동력 획득을 위한 '노예 전쟁' 혹은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면서 일본의 승리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쟁의 주체인 도요토미 측은 그 수혜를 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다지 잘 맞아떨어지는 해석은 아니다.
  • [69] 숙종 때 일본에 통신사의 일행으로 간 신유한의 '해유록'에서 신유한은 징비록이나 강항의 간양록같은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 책들이 일본에 출판된 것을 보고 국가 기밀이 담긴 책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걸 보니 우리나라의 기강이 말이 아니다라고 한탄하였다.
  • [70] 모토미야 히로시의 만화 '일기당천 노부나가'에서는 세계를 정복하면서 조선만은 쏙 빼버렸다. 아예 언급을 안한 것도 아니고, 세계 각지의 첩보를 듣는 장면에서 조선을 까면서 "철포병 20만 앞세워서 두 달이면 되겠군"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었는데도 그렇다. 이렇게 문제되는 부분은 아예 덮어두고 얘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 [71] 분노한 백성들이 노비 문서와 함께 태웠다는 설도 전하나, 위의 주석 23번에서 볼 수 있듯이 속설일 뿐이다. 창덕궁, 창경궁 등 다른 궁궐들도 없어졌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
  • [72] 전쟁 직후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등의 천재가 겹쳐 조선이 임란 직전의 경제 규모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영조 때 가서였다.눙물
  • [73] 실제로 명은 이후 재조지은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명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명군이 조선을 구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라 틀린 주장도 아니었다.
  • [74] 애시당초 일본이 조선 침략에 동원한 병력의 상당수는 도요토미 파 군대이자 본래 오다군에서 소모품 취급받던 잡병이 대다수였고 정예는 드물어 일본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다.
  • [75] 단 피해를 입은 것은 도요토미파였고,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그다지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 [76] 사실 범인이 아니라 그냥 시체 구해서 보냈다는 설도 있다.
  • [77]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 [78] 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
  • [79]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행주 대첩에서 권율인지 아니면 그 휘하의 병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한 쪽 눈을 저격 당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왜냐하면 안구는 시신경이 잔뜩 몰려있는 곳으로 여기에 화살이나 총알같은 물체가 박히거나 관통하는 경우 대개 그 자리에서 쇼크로 즉사하기 쉽다.
  • [80] 그중 전사자는 명량에서 죽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수원에서 매사냥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죽은 카가와 히데마사 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병사(病死).
  • [81]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인 녹둔도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고 백의종군 또한 함께 했다.
  • [82]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 또한 많다. 일부 책에서 인선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가'''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 [83] 조선왕조 실록 선조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 [84] 실록에서는 육식자라고 나왔다.
  • [85]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특히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왜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도 실었다.
  • [86] 또한 거제도에서 병사한 왜장(일본 장수)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를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동명이인과 오인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전쟁에 참여한 하시바는 히데요시 누나의 아들. 우에노 쥬리가 주연한 고우 공주의 남편이기도 했다.
  • [87] 당시 도원수는 권율의 전임자인 김명원. 신각이 김명원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후에 김명원이 경질되고 대신 권율이 도원수 자리에 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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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4 23: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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