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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균

last modified: 2015-04-13 15:21:10 by Contributors


이름 임호균
생년월일 1956년 3월 26일
출신지 인천광역시
학력 창영초-인천남중-인천고-동아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1차 지명
소속팀 삼미 슈퍼스타즈(1983)
롯데 자이언츠(1984~1986)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1987~1990)
지도자 경력 LG 트윈스 투수코치(1994~1995)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1996~1998)

한국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현역시절 미남형의 외모로 여성팬들의 인기가 높아 별명이 제비였다.

플레이 스타일은 변화구와 제구력 위주의 기교파 타입으로 컨트롤 아티스트로 불릴 정도로 훌륭한 제구력을 자랑했다.[1]



1. 아마시절

창영초-인천남중을 거쳐 인천고에 입학했다. 1974년 한해동안 노히트 노런을 두번 달성하는 괴력[2]을 발휘하며 야구계를 뒤흔들었지만, 정작 학교는 우승권과 다소 거리가 있었다(...).[3]

고교 졸업 후 집안 사정으로 인해 1년간 실업야구 철도청 팀에서 뛴 후 부산의 동아대로 진학했다. 1978년 연세대와의 대통령기 대학야구 대회 준결승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상대 선발인 최동원과 무려 연장 18회를 완투하는[4] 혈투를 벌였다. 결국 김봉연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고 패했지만, 그가 전국구 에이스로 발돋움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 대표로 선발되어 한국 야구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 제패라는 쾌거을 달성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고,[5] 대학 졸업후 한국전력 소속으로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방어율 0이란 뛰어난 기록으로 한국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2. 프로시절

2.1. 삼미 슈퍼스타즈


제비족은 아닙니다

1983년 계약금 2천만원, 연봉 2천 4백만원의 당시로선 초특급 대우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였고, 그 해 일본에서 건너온 장명부와 원투펀치를 이루며 12승 15패 평균자책 3.03의 호성적을 거두며 비록 한국시리즈 진출과 연은 없었지만 지난해 압도적인 최하위팀을 돌풍의 주역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특유의 카리스마와 인품으로 삼미 투수들의 리더 노릇을 하는 임호균의 보스기질을 못마땅해하던 장명부가 구단 고위층에 "임호균을 보냅시다 임호균은 나의 원수임호균을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뗑깡요청했고, 결국 구단은 장명부의 손을 들어주며 임호균은 1983년 11월 우경하, 박정후, 김정수, 권두조와의 1:4 트레이드[6]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자신의 트레이드 소식을 TV 뉴스로 알게 된 임호균은 격분하여 연습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던 삼미의 김현철 구단주를 찾아가 무엄하게 "내가 왜 트레이드 되어야 하느냐?" 하고 따졌는데, 정작 김회장도 임호균의 트레이드 사실을 TV를 보고서 깨달은 상태였다. 체념한 임호균은 "어떤 선수가 삼미라는 팀을 진심으로 원하고 자랑스러워 했는지 나중에 톡톡히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2.2. 롯데 자이언츠


롯데 유니폼을 입은 임호균.

롯데의 일원이 된 임호균은 최동원이란 또다른 최고의 에이스와 원투펀치를 이루며 1984년 시즌에 10승[7] 9패 평균자책 2.95를 기록하며 롯데를 그해 후기리그 우승과[8] 한국시리즈 진출로 이끌었다. 그리고 롯데는 한국시리즈 제패의 기염을 토했다. 그해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최동원의 살신성인이 큰 주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선발과 중간을 가리지 않고 3경기(2차전 구원, 4차전 선발, 6차전 선발)에 등판하여 호투한 임호균도 우승의 공로자 중 한사람이었다. 특히 팀이 벼랑 끝에 몰렸던 6차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4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하며 팀의 리드를 이끌던 상황에서 1이닝만 더 던지면 승리투수 요건이 성립될 상황이었지만, 스스로 마운드를 최동원에게 넘기고 내려와 버렸다. 승리를 굳히려면 자신보다는 최동원이 더 믿음직스러울 것이라고 강병철 감독에게 건의했고, 강병철 감독과 최동원이 이에 동의한 것이었다.

2.3.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이후 2시즌을 더 뛴 임호균은 1987년 청보 핀토스와의 5:3 트레이드[9]로 고향팀에 돌아왔고 그해 9승 10패 평균자책 3.78로 팀의 에이스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8월 2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 등판하여 달랑 73개의 투구수로 역대 최소투구 완봉승 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이 큰 화제였다. 물론 이 기록은 지금도 안깨지고 있다(...). 깰 수 있을까?

그러나 1987년을 정점으로 임호균은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태평양 돌핀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에도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한 채 1989년 시즌 종료 후 정리대상에 올라 그와 구단이 대립했다. 임호균 본인은 이미 자신이 더 이상 프로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마음을 정리한 것으로 보였지만 당시 감독이던 김성근은 그의 경험과 노련미를 살려야 한다며 "내년에 임호균이 5승을 못거두면 옷벗는다"면서 임호균의 잔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자 구단에서 선발 5승 이라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하면서 이른바 임호균 각서파동이 터졌고, 이에 감정이 상한 김성근은 결국 1990년 시즌 내내 일부러 임호균을 선발로 한 경기도 등판시키지 않았다.[10]
이 임호균 각서사건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된다. [전설을 찾아 임호균, “김성근 감독 5승 각서 원하지 않았다” 下 ] 본인의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이 임호균은 이미 은퇴를 결심한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이 임호균 선수를 붙잡은 것이다. 사실상 김성근 감독의 언플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성근은 태평양을 떠났고, 임호균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11]

8시즌 동안 849이닝, 44승 56패 3세이브, 평균자책 3.32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3. 은퇴 이후


토론토 블루제이스 코치연수 시절의 임호균(좌)

은퇴 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코치연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임호균은 신바람 야구로 상징되는 1994년 LG 트윈스 우승 당시 투수코치로 기여했고, 이후 방송사 해설위원, 야구교실 운영 등으로 야구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1998년 삼성 라이온즈 투수 코치를 끝으로 돌연 미국으로 떠나 마이애미의 세인트토머스 대학에 스포츠마케팅 전공으로 입학하여 학업의 길에 들어섰다. 참고로 삼성 코치 시절 그가 발굴한 선수가 정현욱 이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만학도가 된 임호균은 노력 끝에 2010년 5월 세인트토머스대학 스포츠마케팅 및 매니지먼트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의 요청으로 일시 귀국하여 산하 마케팅 회사인 KBOP의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으로 돌아와 "임호균 베이스볼 아카데미&클리닉" 을 운영 중이며, 가끔 언론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듯 하다. 2012년 부터는 허구연씨가 주도하는 다문화가정과 새터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고양시 무지개 리틀야구단의 코치로 참여중이고 채널A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중계 때 인천고 출신으로서 편파중계 해설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 관련 기사
[전설을 찾아 ‘컨트롤 아티스트’ 임호균, “최동원과의 18회 연장, 못잊어 ” 上]
[전설을 찾아 임호균, “김성근 감독 5승 각서 원하지 않았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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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홈플레이트 위에 담뱃불을 붙인 담배를 올려놨는데 그걸 맞췄다는 임호균의 컨트롤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
  • [2] 당대 최강인 대구상고휘문고를 상대로 거둔 것이다.
  • [3] 김진영이 활약하던 1950~60년대 초반의 인천고는 전국 최강이었지만 이후 1989년 까지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 [4] 연장 14회 0-0 상황에서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잔여이닝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말 그대로 1박 2일 동안 던진 셈(...).
  • [5] 그때의 활약으로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았다.
  • [6]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일대 다자간 트레이드였다.
  • [7] 이중 3승은 친정팀 삼미를 상대로 거두었다. 장명부와 연장 10회까지 맞대결하여 완투승을 거두는 등 자신을 버린 삼미에 대한 복수는 톡톡히 한 셈. 오죽 서운했으면 장명부를 완투 접전끝에 물리친 그날 경기 후 야구장에 와 있던 삼미 사장에게 자신을 왜 버렸냐는 듯한 손짓을 하기도 했다고.
  • [8] 사실 삼성의 져주기 버프를 입은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 [9] 롯데에서는 양상문, 이진우, 배경환, 김진근을, 청보는 정구선, 정성만, 우경하를 내놓았다.
  • [10] 중간계투로 7경기 등판, 승패없이 평균자책 4.60의 성적만 남겼다.
  • [11] 임호균을 선발로 한 경기도 내놓지 않으며 5승 각서를 쓴건 결국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한 꼼수라는 소문이 당시 팽배하였고 떠난지 3일만에 삼성 감독으로 가는 야릇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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