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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

last modified: 2015-04-14 11:10:39 by Contributors


중종때 제작된 보루각자격루(報漏閣自擊漏). 국보 제 229호

자격루
自擊漏

본격 시계판 도미노

Contents

1. 설명
2. 제작된 자격루
2.1. 세종 당시 제작된 물시계
2.2. 중종때 제작된 자격루
3. 기타
4. 등장 매체


1. 설명

물시계의 일종. 물시계의 최종 보스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다.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물시계는 1398년(태조 7년)에 제작된 경루(更漏). 이 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해서 종을 쳐서 밤시간을 알렸다.[1]

하지만 이것은 세종 때 궁궐에서 쓰고 있던 물시계인 경점지기[2]는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지켜보아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만약 착오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 세종이 장영실, 김실등에게 지시하여 2년여의 노력끝에 1434년(세종 15년) 6월에 완성,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루각에 설치 되었다. 물을 끌어올리는 기관 뿐 아니라 알아서 시간이 되면 인형이 움직이고 북이 울리는 구조로 된 당시로선 획기적인 자동 시보 장치였다.

그해 7월 1일을 기해 조선왕조의 표준시계로 사용되었으나 자격루가 제작된지 21년 만인 1455년 (단종 3년) 2월 자동시보장치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장영실이 죽어 고장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없었던 게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되고[3], 그 후 14년 만인 1469(예종 1년) 10월에 다시 가동되었다. 이후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자격루가 창덕궁에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 후 성종 대에 이르러 자격 장치에 의한 시보와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100년 만인 1534년 (중종 29년)년에 새 자격루를 만드는 작업이 착수되어 중종 31년(1536)에 장인 박세룡(朴世龍)에 의해 완성된다. 여러대에 걸쳐 개보수가 되었으나 전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사라졌으며 남아 있는 자격루는 중종때 제작된 자격루 단 1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일제 개객기들

2. 제작된 자격루

2.1. 세종 당시 제작된 물시계


세종실록에 기록된 자격루의 모습이다. 세종실록 7월 1일기사

파수호(播水壺·물통)는 4개인데 크고 작기가 차이가 있다. 수수호(受水壺·물받이통)은 2개로 물을 갈 때에 번갈아 가며 쓰는데 길이가 11척 2촌, 둘레의 지름이 1척 8촌이다. 살은 2개인데 길이가 10척 2촌이다. 그리고 면은 12시로 나누고 시마다 팔각으로 나누었는데 초정여분(初正餘分)은 합해 100각이 되며 각은 12분으로 만들었다. 밤에 쓰는 살은 전에는 24개였는데 갈아 쓰기가 번거로워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하여 주야분(晝夜分)의 오르고 내리는 비율을 2개의 절기로 묶어 한 살에 해당하게 함으로써 모두 12개의 살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을 맡은 목인(木人)을 만들어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도록 하였다.

그 구조법은 집 3동을 짓고 동쪽 칸에 2층으로 자리를 만들어 위층에 삼신(三神)을 세웠는데, 하나는 점명고(點鳴鼓)를 맡는다. 중층의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고 바퀴 둘레에 12신(十二神)을 배치하였는데 각각 철사로 줄기를 만들어서 상하로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신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패(時牌)를 잡고 있어서 서로 번갈아 시간을 알린다. (중략)파수호로부터 새어 나오는 물이 수수호로 흘러 들어가면 떠 있는 살대가 점차로 떠오른다.

시각에 따라 왼쪽 구리판 구멍의 장치를 튕기면 그 장치가 열리면서 큰 구슬이 떨어진다. 그것이 굴러서 자리 아래에 걸린 짧은 통으로 굴러 들어가는데 이것이 떨어지면서 장치의 숟가락을 움직이게 하면, 이 장치의 다른 끝이 통 속에서 올라와 시(時)를 맡은 신(神)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이 울리게 한다. (중략) 모든 기계는 모두 속에 감추어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보이는 것은 관(冠)과 대(帶)를 갖춘 목인(木人)뿐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항아리에 물이차서 흘러내리면 살대가 점점 떠오르고 그게 구슬들을 움직이게 해서 그 구슬이 인형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이 울리게 하는 방식.

여기서 한밤중 3경(三更)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리면, 그 소리를 들은 경복궁 정문의 문지기들은 다시 문루 위에 있던 북을 세 번 쳤다. 그리고 그 소리가 종각의 북 치는 사람 귀에 들어가 다시 종각에 북을 세 번 울려주어 서울 시내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영실은 이것을 제작하고 의 신분에서 호군으로 신분격상되었다.

42.jpg
[JPG image (88.91 KB)]

아마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제 크기의 복원품을 볼 수 있다.

2.2. 중종때 제작된 자격루

호(漏壺)의 법에는 파수호가 세 개 있는데 그 크기가 각각 다르다. 가장 큰 것은 허리둘레가 12척이니 즉 옛 야천지(夜天池)이고 그 다음 것은 옛 일천지(日天池)이고 가장 작은 항아리가 옛 평호(平壺)이다. 수수통(受水筒)이 두 개 있는데 지름이 모두 1척 2촌이고 높이가 모두 6척 8촌으로 밤과 낮에 번갈아 쓰며 이것이 옛 만수호(萬水壺)이다.
전이 24개 있는데 24기(氣)에 준하고 길이는 각각 6척 2촌이다. 수시력(授時曆)의 옛 법은 낮과 밤을 100각으로 하였으나 지금의 시헌신법(時憲新法)의 전분(箭分)은 9육각, 각 분(刻分)을 15분으로 하여 모두 12시로 하고 한 시를 팔각으로 하였다. 얇은 구리판을 붙여서 부구(浮龜)를 만들어 크기를 수수통의 속둘레와 같게 하였는데 등에는 장방형(長方形)의 구멍이 있으며 전을 이 구멍에 꽂아 놓고 거북을 통 속에 넣었다. 통 속에 물이 고이면 거북이 뜨고 거북이 뜨면 전이 올라온다.
- 국조력상고(國朝曆象考)


세종때 제작된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가 수명이 다해 시간이 잘 맞지 않게되자 1534년(중종 29년)년에 박세룡에게 제작을 명하여 3년만인 1536년(중종 31년)에 완성된다.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 때 만들어진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듬새가 훌륭하여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우리나라의 매우 귀중한 과학문화재이다.

제일큰 그릇에는 제작연대가 새겨져 있고[4] 두개의 누기(기둥모양의 그릇)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都提調
領議政 金謹忠
右議政 金安老
提調
右贊成 柳溥
工曹參判 崔世鄭
都廳
右通禮 朴翰
司僕寺正 李雲穡
司憲府執義 安法□
掌 金逐里
都造官
掌樂院主簿 蔡□□
天文學敎授 辛輔商
昭格署參奉 姜永世
天文隸習官 印光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자격루는 보루각 자격루라고 불리우며 현재 국보 제 229호로 지정되어 있다.

3. 기타

특이하게 51년마다 개,보수가 이루어 졌다. 명종 5년(1550) -> 선조 34년(1601) -> 효종 3년(1652) 순으로 이루어 졌다.

2015년 4월 12일에 대구 엑스코에서 열렸던 '제7차 세계 물포럼' 개막식 퍼포먼스에서 자격루가 등장했었는데 세계 각국 정상들과 박 대통령 앞에서 자격루(모조품) 자체가 넘어지고 말았다. 이에 당시 행사장 무대에 경호원들이 올라오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고...

4. 등장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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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종을 치던 종루(鐘樓)가 있던 곳이 바로 종로이다.
  • [2]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5경으로 했는데 각 경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긴 겨울의 밤에 있어서 각 경과 짧은 여름밤의 각 경의 시간 길이가 달랐다.
  • [3] 1454년 10월에 같이 제작에 참여했던 김실이 사망해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4] 가정병신유월일조(嘉靖丙申六月日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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