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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산성 전투

last modified: 2015-03-14 11:28:08 by Contributors

(ɔ) Bub's from
몽고의 1차 침입때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에서 벌어진 전투를 찾는다면 제1차 자모산성 전투로.
(ɔ) Bub's from
몽고의 3차침입때 자모산성에서 벌어진 전투는 제2차 자모산성 전투로.

Contents

1. 소개
2. 전투


1. 소개

조선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 흔히 김화 전투, 김화 백전대첩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고종 재위시기인 몽골군의 1차 침입 당시 춘명이 맞서 싸우고, 3차 침입 때 최경후, 김지저, 김명회 등이 맞서싸운 자모산성과 성 이름이 똑같다(...)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벌어졌지만 이는 위에 언급된 평안남도에 위치한 성이 아닌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음내리에 위치한 동명(同名)의 산성에서 벌어진 전투다.[1]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병마사 유림이 김화의 자산(慈山)에서 호군을 맞서 싸웠다."라는 기록과 국어대사전에는 "관찰사 홍명구가 김화의 자모산성에서 적을 맞서 싸웠다."라고 표기되었다.

2. 전투

병자호란당시 남한산성에서 짱박혀 다구리 당하던 인조를 지원하기 위해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사 유림(柳琳)이 평안도 근왕군 5천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들은 평양을 출발해 1637년 1월, 김화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유림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김화의 자모산성으로 들어가 싸우자고 이야기 했으나 홍명구[2]는 이를 거절하고 현재의 김화읍 생창리 탑골의 개활지에 주둔했다.[3] 유림은 휘하의 3천명을 이끌고 홍명구 진영과 인접한 잦나무가 빽빽한 백수봉과 백전 능선에 진을 구축하고 청군과 싸웠는데 청군 6천의 파상공세에 홍명구의 병력들은 몰살당하고 홍명구도 전사했다. 하지만 유림군은 전장을 관망하기만 했다.

이어 청군은 유림이 주둔하고 있는 진영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치열하게 싸워 4차례나 계속된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 적장을 사살하는 등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대승에도 불구하고 탄약 등이 부족해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유림은 총포에다 화승의 길이를 다르게해 잣나무에 걸어두고 밤새도록 총포 울움소리가 들리게해 적의 추적을 따돌렸다. 그리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나설때 쯤에는 이미 삼전도의 치욕이 치러지고 있는 마당이었다. 유림은 가평에서 항복 소식을 듣고 교지에 따라 다시 평안도로 복귀했다. 그러나 사헌부는 3년 뒤 유림을 탄핵하는 등 평가는 각박했다.

인조는 홍명구의 장렬한 전사를 높게 평가했으며 효종 9년, 홍명구는 충렬공으로 봉해졌다. 반면 유림은 그로부터 140년 뒤인 정조 20년에 와서야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다만 이를 자모산성 전투라고 부르기는 애매한게 정작 유림의 병력 3천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은 자모산성의 맞은 편 능선에서 싸웠다. 자모산성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것. 자모산성 코앞에서 싸웠으니 자모산성 전투라고 불러도 상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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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성재산성(城齋山城)이라고도 불리운다.자세한 내용은 여기
  • [2] 홍명구는 정묘호란때 종사관으로서 평안감사인 윤훤에게 평양에서 철수해서 전열가다듬자고 건의를 올렸다가 본인은 파직되고 윤훤은 처형된 일이 있었다.
  • [3] 연려실기술 등을 보면 이외에도 홍명구와 유림의 갈등이 많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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