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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

last modified: 2014-05-01 12:38:31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그의 유년기 및 교육
3. 프랑스 대혁명
4. 프랑스 혁명전쟁
5. 제정시대 전쟁
6. 왕정복고 그리고 백일천하
7. 그의 정치 인생 : 나폴레옹파에서 자유주의자로의 전환
8. 그의 생애의 종말
9. 나폴레옹의 의견

1. 개요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1770년 7월 22일 생-스베르 (랑드)에서 태어나 1832년 6월 1일 콜레라에 걸려 죽은 프랑스의 장군인데,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군대와 제정시대의 군대, 특히 방데 내전과 스페인 전쟁에서 경력을 쌓았다.

2. 그의 유년기 및 교육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그의 아버지 피에르 조제프 라마르크(1733-1802)는 고등법원의 변호사, 생-스베르 지방재판소 검사장 등을 지냈다.
그는 생-스베르의 쟈코뱅 중학교에 보내졌는데, 그의 아저씨들 중 한명인 장 자크 라마르크(1737-1809)가 닥스의 중신학교 교장에 이어 교구 주교 총대리가 되기 전에 그 중학교의 교장신부였다. 이후 1791년에 그 아저씨는 서약하기를 거부하여 공포정치 기간 중에 처형당하게 된다.
장 막시밀리앙은 그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공부를 했다.

3. 프랑스 대혁명

1789년의 삼부회에 평민층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그의 아버지 피에르 조제프 라마르크(1733-1802)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 서약을 한 후 입헌의회에 참여를 하였다.
19살이 된 젊은 장 막시밀리앙은 1790년 3월부터 태어난 도시를 떠나 파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며, 특히 샤프탈, 라 아르프, 샹포르 를 비롯한 여러사람들의 강의를 들으며 학업을 마치게 된다. 그는 수도의 정치생활에 열광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792년에는 단순한 병사로서 군에 입대를 한다. 얼마 되지 않아서, 마라의 넋을 모실 기념비 건축을 위해 제단의 대리석을 떼어내며 바브레 성당을 약탈하는 대대의 선봉에 서 있는 그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1793년 초에 그는 랑드 의용군 제 4대대에 소속된다.

4. 프랑스 혁명전쟁

1793년 4월 3일 중위로 임명된 그는 같은 해 5월 13일, 서부 피레네군 라 투르 도베르뉴 휘하의 그 유명한 '지옥의 종대대형' 에서 척탄병 중대장이 된다.그는 지옥의 종대에서, 특히 1794년 7월 24일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1700명이 방어하고 있던 온다리비아 광장을 포위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낸다.
공화력(=혁명력) 2년 열월(=11월) 21일, 그는 대대장으로 승진하여 라인 사단에서 복무한다. 그는 엥겐(1800.5.3), 메시키르히(1800.6.5), 호치스타트(1800.6.19), 호엔린덴(1800.12.3) 등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호엔린덴 전투에서는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음으로써 모로 장군의 천거에 의해 1801년 2월 여단장의 견장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친수받게 된다.

5. 제정시대 전쟁

그는 이어서 제정군대의 여러 전투에 참가하는데, 특히 두각을 나타낸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오제로 원수의 제 7군단 예하의 여단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세나 원수와 함께 '대육군'을 떠나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따라 이태리로 가게 되며, 가에타 포위공격에 참가한다. 나폴리의 왕이 된 조제프는 1807년 12월 6일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를 소장의 계급을 주어 자신의 참모장으로 임명한다.
베르그와 클레베의 대공인 뮈라 원수가 나폴리 왕국에서 그의 동서의 왕위를 계승했을 때,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1808년 12월 18일 카프리 섬을 탈취하는 임무를 맡는데,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감시자가 될 허드슨 로의 지휘하에 있던 그 섬의 영국군 수비대는 프랑스 군대의 존재를 우습게 보고 있었는 바 -- 영국의 국기를 왕궁의 창문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 임무는 용기와 대담성과 지혜를 필요로하는 것으로, 제정 전쟁의 가장 빛나는 무훈들 중의 하나로 여겨졌었다. 그 천연적인 지형으로 인하여 그 섬은 난공불락으로 보였는데 ; 섬을 둘러싸고 있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포병으로 강력하게 무장된 적의 방어 때문에, 수많은 수비대가 쏘아대는 사격을 받으면서 기어올라가지 않고서는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라마르크는 어떤 경우에도 후퇴하지 못하도록 사다리와 배들을 제거하도록 하고 부하들의 선두에서 등반공격을 시도하였는데 ; 그래서 프랑스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자리에서 대량살상을 당하거나 혹은 이겨내는 것 밖에는 없었으며, 그래서 여러번의 시도 끝에 총검을 영국군 수비대에 찔러 넣어 적에게 보급창고와 탄약과 정비창 등을 프랑스군에 넘기고 항복을 강요하는 데 성공하였다. 라마르크 장군은 적군의 용기를 존중하여 무기도 소지품도 없이 섬을 떠나는 영국군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였다.
라마르크 장군은 나폴리 왕국을 떠나, 1809년부터 자신의 사단과 함께 이태리 북부의 외젠 드 보아르네 공이 지휘하는 군에 합류한다. 그는 레이바흐를 공격하여 4000명의 포로와 65문의 대포를 노획하였으며, 이어 로바우에서 대육군에 합류하여 바그람 전투에 혁혁하게 참가는데, 그 전투의 포화 속에서 그가 탄 말들이 죽어 네 마리를 바꿔 타야 했다.
그는 1810년 6월 4일 발급된 면허장에 의해서 제국의 남작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스페인 사태 때문에 프랑스군이 동원되자,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다시 조제프 왕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며, 그리하여 1812년 2월 8일 자신의 사단과 함께 알타푸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6. 왕정복고 그리고 백일천하

1차 왕정복고 때에 라마르크 장군은 별다른 열정 없이 부르봉 왕조에 가담하지만, 그러나 황제의 사람됨에 매혹된 그는 백일천하 동안에 황제를 따라 방데 지방을 평정하는 임무를 맡는데, 방데 지방은 황제가 엘바섬으로부터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때부터 다시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었다. 라마르크 장군은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완수하고 폭도들을 무장해제시켰는데, 폭도들의 수뇌부가 숄레 평화조약에 서명을 한 후 그에게 <프랑스를 분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 열강들의 모든 시도를 막기 위해 프랑스군으로서 그의 휘하에서> 복무하겠다고 제안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라마르크 장군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제국의 몰락과 함께 끝이 난다. 2차 왕정복고 하에서 추방을 당한 그는, 1818년 10월 20일의 왕령이 있고 나서야 프랑스에 다시 돌아온다. 휴직 상태로 있던 그는 1830년 6월 30일 샤를르 10세에 의해 퇴직 처분을 받는다. 과거 그의 군복무 업적에 대한 보답으로, 아니 어쩌면 그에 더하여 왕정복고 시대의 권력에 대한 그의 항거에 대한 보답으로, 프랑스의 새 왕이 된 루이-필리프는 1830년 8월 21일 그를 레지옹도뇌르 최고 십자훈장의 훈위로 승격시켰다.

7. 그의 정치 인생 : 나폴레옹파에서 자유주의자로의 전환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또한 저술가 겸 하원의원이었는데 왕정복고 정부에 대한 야당 자유당이었다.
벨기에에 이어 네덜란드에서의 망명기간 동안, 그는 오시안,제임스 맥퍼슨 등의 시를 운문으로 옮기며 문학에 몰두하였는데, 그것을 훗날 그의 가문에서 책으로 펴내게 된다. 서문에서 그는 칼레도니아인들의 풍습을 묘사하면서 그들의 문학을 분석하였는데, 오시안의 다섯개 시를 번역함으로써 높은 소양과 잘 계발된 낭만주의적 기질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 토르콰토 타소,존 밀턴, 그리고 또 볼테르 등과 비교를 하면서, 라마르크는 또한 자신이 정통하고 있는 호머와도 대조를 한다.
루이 필리프 1세가 권좌에 오르자 프랑스로 돌아온 라마르크 장군은 농업에 열중하는데, 그리하여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번 재산을 활용하여 농가와 제분기와 여러 종류의 땅들을 구매하면서, 스스로 말했듯이, 농사를 짓는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랑드 지방의 척박한 땅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마음먹는다. 중농주의자들을 따르는 훌륭한 신봉자로서 그는 토질 개량과 윤작을 권장하고, 옥수수 재배에 선택의 여지를 줌으로써 농민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랑드지방 영농협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받은 그는 1827년 7월 8일 그 협회에 입회를 하며, 입회연설에서 자신이 해 온 노력과 농학 분야에서 자신이 시도해 본 것들을 설명한다. 그와 병행하여, 또 잘잘못을 떠나, 즉각적인 부(富)를 생산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멸시하며 완고하게 혐오하던 그가 그 시대의 공업 유산계급을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자신의 성찰의 범위를 넓혀, 피에몽 피레네 지역과 가론 강 상류 및 아두르 강 유역을 이루고 있는 땅들을 어느정도 개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아두르 강과 나란히 흐르는 항행운하의 잇점들" 에 관한 논문을 1825년에 발표한다. 물론 그것은 실질적인 실현이 없는 단순한 지적 공론에 불과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을 외부지역, 더 나아가 바욘 항을 통해 외국과의 자유교역 경제로 개방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고찰과 함께, 이 논문은, 라마르크가 여러 해 동안 활발하게 참전했던 스페인 전쟁에서 제기된 제 문제점들을 고려하여, 군사적 전략적 측면의 속셈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1815년 이래로 군사 지휘권 없이 생-스베르에 은둔한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강요된 무기력 상태로부터의 일종의 배출구를 그 정치활동에서 발견하게 된다. 망명으로부터 돌아온 이래, 자기가 보기에는 품위없는 평화론자라고 비난하던 부르봉 왕가의 장손 가계에 일관되게 반대하면서, 또한 로마의 왕의 이름으로 복고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왔던 나폴레옹 제국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에서 그는 1820년부터 자신의 연고지에서 선거에 출마하지만 처음에는 생-스베르 선거구에서든 몽-드-마르상 선거구에서든 오직 실패만을 맛보게 된다. 1828년 7월 몽-드-마르상의 전임 시장이던 뒤 리옹 후작이 죽고 나서야, 그는 1828년 12월 23일 보궐선거에서 푸아페레 드 세르 남작을 누르고 하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 1830년 5월 16일 폴리냐크 내각이 의회를 해산한 후, 그는 6월 23일 몽-드-마르상 선거구에서 오세 남작을 누르고 재선되었다.
그는 7월 왕정에 가담하는데, 프랑스의 위대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는 평화론을 여전히 개탄하면서도 그는 7월 왕정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체제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자 원했다. 비록 그가 의회에서는 계속 좌파에 속해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란 구체제에 향수를 느끼는 극우파들과 1793녕을 원하는 극좌파들 모두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도파의 한 사람이었다.

8. 그의 생애의 종말

라마르크는 1832년 6월 1일 콜레라로 죽는다.
그의 장례식은 1832년 공화주의자들의 폭동(빅토르 위고[1]레미제라블의 한 부분의 배경으로 사용됨)의 구실이 되었는데, 그 폭동은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다.
사실 라마르크는, 한편으로는 노병으로서, 그리고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출신의 신조가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약속 때문에 민중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행동능력 때문에 존경을[2] 받았는데 : 그는 인민좌파의 의원이면서 공화주의 거두들 중의 한명이었다[3].
그래서 공화파 당원들은 정통 왕조파들이 이 열성적인 공화주의자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는 바 : 그들은 그 예우를 회유의 한 형태라고 간주했다. 그 폭동의 규모는 너무나도 커서, 루이 필리프는 심지어 파리를 떠날 생각까지도 했었다.
확실히 명암의 대비를 이룬 생애였지만 어쨌든 그 생애가 시작된 그곳, 즉 자신의 소유였던 샬로스의 땅 위에 세워진 에이레-몽퀴브의 가족 성당에서 그 생애의 여정을 끝맺는 야릇한 결말이었다.

9. 나폴레옹의 의견

<높의 지위에 올라야 했을 것 같았던 장군들은 제라르, 클로셀, 푸아, 라마르크 등이었다. 그들은 나의 새로운 원수들이었다.>

<방데 반란의 막바지 무렵,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내가 보낸 라마르크 장군은 그곳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들을 넘어서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라마르크로써는 그것이 사태의 진상을 몰라서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승리자의 괴퍅함이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그는 지금 망명 상태에 있으니 : 서른 여덟명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건 바로 굴복시키는 것 보다 쫓아 내버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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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브로슈는 공화주의자 폭동 와중에 샹브르리 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부근에서 죽는다.
  • [2] 유니버살리스 백과사전의 "7월 왕정" 항목에서 라마르크는 "인민좌파 의원"으로 분류되고 있다.
  • [3] 유니버살리스 백과사전의 "클루아트르 생-메리" 항목에서 라마르크는 "공화파 지도자"로 분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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