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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중화민국 역대 총통
대행 6대, 7대 8대, 9대
옌자간 장징궈 리덩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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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經國(장경국) / Chiang Ching-kuo

蔣經國(장경국/ 간체 표기는 蒋经国). 중국 국민당중화민국의 정치인으로, 제6~7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Contents

1. 생애
2. 가족관계
3. 평가

1. 생애

장제스의 장남으로, 장제스의 첫 아내인 마오푸메이 사이에서 장 성 펑화 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장제스는 14세 때 다섯살 연상인 마오푸메이와 결혼했는데 자신이 억지로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혼 후 두달 정도는 부부 사이가 좋았으나, 장제스의 어머니인 왕차이위[1]가 아들에게 못된 영향을 준다고 며느리를 꾸짖었고 이후 마오푸메이는 남편과 감히 얘기조차 나누지 못했다. 결국 부부 관계는 파탄이 났고 장제스는 아내를 버리고 곳곳의 학당을 전전한다.
일본 군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도일했다가[2]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없단 사실에 절망하고 돌아와선 아내를 구타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상하이로 이동했는데, 왕차이위가 마오푸메이를 데리고 아들의 뒤를 쫓아와서 점쟁이가 마오푸메이가 낳을 아들이 고관대작에 오를 것이라는 점괘를 내렸다면서 며느리와 동침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점쟁이같은 미신을 믿냐고 그 말을 비웃었지만, 왕차이위가 만약 며느리와 동침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동침했는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장징궈다. 파란만장한 출생과정은 둘째치고 점쟁이 말이 맞았다? 아버지인 장제스 버프로 고관대작에 오른게 함정


아직 장제스가 친소 성향이었을 때 아버지를 졸라서 소련에 건너간 경력이 있었다. 장제스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장제스의 두번째 부인이자 장징궈보다 네살 연상인 천제루가 간청하여 유학을 허락해줬다. 거기서 장징궈는 잘 나갔고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장제스가 소련과 관계를 끊자 장제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장제스의 성향 때문에 부자 관계는 최악이었는데 장제스는 6년 쯤 자신의 아들을 못 보자 자신이 못난 아비였다고 몹시 괴로워하면서 관계가 회복됐다. 소련은 1931년 쑹칭링을 통해서 장징궈와 상하이에서 체포된 폴란드 공산주의자 스파이를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장제스는 국가의 이익을 사사로운 정으로 망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장징궈는 오래 소련에 남았고 심지어 소련 여자1935년 결혼했으며 한 때 트로츠키주의자이기까지 했다. 이 시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직접 강권하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고 소련공산당에 가입했지만, 훗날 그는 이를 부인했다. 1937년 귀국했는데, 사실 훨씬 일찍 귀국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1924년 4월 12일 일으킨 상하이 쿠데타를 반대해서 남아있던 처지였다. 여담으로 이 때 덩샤오핑을 만나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덩샤오핑과 형 아우하며 지냈는데 훗날 그 둘의 위치와 지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공내전상하이에서 부패 척결과 화폐개혁 등을 통해서 중국 국민당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새어머니인 쑹메이링의 반대.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국민당의 핵심 인사이자 부정부패의 중심인 4대가족의 핵심 일원이었다(…). 부정부패를 쓸어버리려면 당장 4대가족부터 소탕해야 되니... 이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3]

이후 중화민국 정부의 요직을 거쳤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1972년부터는 중화민국 행정원장(=수상)직을 맡았으며, 1975년 아버지의 사망 후에는 부총통 옌자간(嚴家淦)이 총통이 되었다가 1978년부터 1988년에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 총통으로 재직했다. 그가 행정원장에 오르기 직전인 1971년, 중화민국UN에서 전 중국의 대표 자격 및 안보리 상임이사직을 박탈당한다. UN 원년 멤버의 강퇴(...). 그 자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고스란히 승계했다.좋은 NTR이다 결국 중화민국미승인국의 처지가 되어버려, 올림픽 등 체육종목에서조차 국명을 쓰지 못하고 중화 타이베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출전하게 되는 등 안습한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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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행정원장 시절. 젊었을 때의 깐죽이(...)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중후한 인상으로 탈바꿈했다.

2대 세습을 한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생전에도, 사후에도 부정부패와 대만 출신들의 차별을 줄이는 데 많은 노력을 펴서 나름대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독재자의 자식이라도 어느 누구와는 달랐다. 하긴 그래서 대만이 망하지 않았겠지. 게다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승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권력 세습을 원치 않아서 1984년 제헌절 기념 축사에서 "내 후계자는 헌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내 가족들중에 어느 누구도 정권을 잡을 일은 없으며 군부 역시 마찬가지다."라는 선언을 했으며 이는 사망 후에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 양반과는 진짜 다르다.

게다가 국민당 이외의 정당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인 민주진보당 창당을 사실상 묵인하는가 하면[4] 1949년 선포된 계엄령을 무려 38년만인 1987년 7월 전격적으로 해제했다.[5] 그래서 대만 독립주의자들도 40년에 가까운 계엄령을 발동한 장제스는 비난해도, 계엄령을 해제한 그 아들 장징궈는 욕을 덜 하는 편이다.

1978년 간선제로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당선되어 마침내 대권을 잡았고 1984년에 재선에 성공했으나 6년 재선 임기를 2년 정도 남겨둔 1988년 1월에 서거했다.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살긴 했지 헌법에 따라 부총통이었던 리덩후이가 취임하여 1990년 총통 선거에서 이겼고 1996년 최초의 직선제 선거에서도 이겼다. 그러나 알고보니 독립주의자였다.

1979년 중국이 신년 교서를 통해 무역, 우편, 여행 등의 3개 교류를 전면 실시하자는 이른바 '3통'(三通) 제의를 하자,[6] 공식적으로는 본토의 중국 공산정부와 접촉, 협상, 담판을 거부한다는 '3불'(三不) 정책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선친인 장제스의 무력에 의한 본토수복이 비현실적임을 반영하여 '삼민주의를 통한 중국 통일'이라는, 일종의 평화적 통일 노선을 제시했다. 아울러 옛 국민당 군인들이 본토의 가족,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이산가족 상봉, 즉 '탐친'(探親)을 허가했고, 학문이나 예술 등 비정치 분야의 중국 인사들이 대만을 방문하는 것도 용인했다. 이 점에서 장징궈 시대는 초보적이나마 양안 관계의 개선이 모색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덩샤오핑과는 한 때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막역한 사이였기에 각기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의 실권을 각각 잡았을 당시 싱가포르리콴유 총리를 통한 막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1979년 1월 전격적으로 양안 교류 확대를 선언하고 장징궈가 몇년 뒤 민주진보당 창당을 사실상 묵인한 것과 계엄령을 해제하여 대만의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 서로 연관성이 있었던 것.[7] 그래서 1988년 1월 장징궈가 사망하자 이를 전해들은 덩샤오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장징궈가) 너무 일찍 죽었다. 계속 살아있었다면 3차 국공합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


1988년 타계한 후 부친인 장제스가 안치된 타오위안 현 지후(慈湖)에서 1km 정도 떨어진 따쉬(大溪)에 안정되었다. 장제스처럼 지하 매장이 아닌 지상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고, 묘소 형태도 장제스의 것과 대동소이할 지경.[8] 장제스야 본토 수복 후 고향으로 이장시켜 달라고 유언했으니 그렇다고 쳐도, 생전에 "40년 동안 대만에 살았으니, 나도 이젠 대만인이다"라고 말했던 장징궈까지 굳이 같은 방식으로 안치해야 했는지는 의문이 들 수 도 있는 대목. 물론 그 역시 근본적으론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되, 그 '중국'은 바로 공산중국이 아닌 중화민국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2. 가족관계


장징궈의 가족


가족관계가 복잡하다. 본처 장팡량(蔣方良, Фаіна Іпацьеўна Вахрава, Фаина Ипатьевна Вахрева)[9]은 소련(벨라루스) 여자로 장징궈가 총통이 된 후 영부인이 되었고 아들도 장샤오원(蔣孝文), 장샤오우(蔣孝武), 장샤오융(蔣孝勇) 딸 장샤오장(蔣孝章) 등 3남 1녀를 두었고 내연녀 장야뤄(章亞若)에게서 쌍둥이 아들 둘을 보았는데, 본처 장팡량의 반대로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고 성은 외가의 성을 따랐다. 호적상으로도 외삼촌과 외숙모가 부모로 등재되어 있었다.

쌍둥이 형인 장샤오옌(蔣孝嚴)은 팡량이 죽은지 2년 뒤인 2006년에야 본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동생 장샤오츠(章孝慈)는 이미 90년대 중반에 사망하여 아버지의 성을 회복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자녀 즉, 장징궈의 손자녀들은 본성을 회복했다). 장징궈가 3대까지 세습을 하지 않고 그친 건 이런 가정환경 탓도 있다는 말도 있다.

2014년 현재 장징궈의 자녀 중 생존자는 장샤오장과 장샤오옌 뿐이다. 장샤오옌은 행정원 부원장과 외교부 장관을 지내는 등 어느 정도 정치계에서 활동하였다. 오히려 정실부인 자녀보다 잘나간 셈.

장제스의 유일한 친자이지만 일설에 따르면 그는 장제스의 친자가 아니라 마오푸메이가 주워온 자식이란 소문이 있는데 이는 장제스의 양자로 알려져 있던 차남 장웨이궈의 증언을 기초로 한다. 장웨이궈는 말년에 장제스는 이미 어릴 적에 고환에 화상을 입는 소동 끝에 고자가 되었다고 주장했고 장징궈는 양자라고 했는데 신빙성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장제스의 두번쨰 부인 천제루의 회고록에는 장제스가 성기능을 상실한 것이 그가 서른이 좀 넘었던 시점이라고 확인하고 있다.[10]

그의 이복동생인 장웨이궈는 장제스의 의형제이자 혁명 동지인 다이지타오(대계도)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던 시점까진 장제스의 친자로 못박혀 있었다. 하지만 대륙 시절부터 장웨이궈는 사실 다이지타오의 아들이란 소문이 있었고 이에 충격받은 장웨이궈가 다이지타오에게 사실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다이지타오는 네가 나를 닮았느냐 장제스를 닮았느냐?라고 묻고 장웨이궈가 장제스를 닮았다고 하자 그럼 누가 네 아비인지는 확실하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국부천대 당시에 다이지타오는 자결했고 장웨이궈는 대만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는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차남인데도 불구하고 출세운이 없었고[11] 장제스와 혈액형도 달랐으며 실력자인 쑹메이링과의 연줄도 의도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해서 사실 장씨가 아니라 대씨다 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소문은 장제스 사망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결국 장웨이궈 본인이 장위국보도란 책을 내놓아 자신이 다이지타오의 아들이라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알려진 바로는 공처가 다이지타오가 일본에서 바람을 펴서 애를 얻자 아내에게 맞아죽을까봐 벌벌 떨었고 이에 장제스가 맡아주었단 건데... 장제스와 다이지타오 본인들이 워낙 강하게 부정을 하고 갔는데다가 그 일본 여자와의 관계가 복잡해서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유전자 검사하면 안되나?

3. 평가

대만에서는 물론이고 대륙, 즉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평가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한때 소련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데다 이후 국공내전 등으로 공산당과 대립할 때도, 아버지인 장제스처럼 강경 일변도의 성향만 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 또한 집권기에 양안관계 개선에도 꽤 노력을 기울인 편이다.

중국의 건국 60주년 기념 영화인 《건국대업》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배우인 이 열연했는데, 상하이로 가서 마피아를 잡아 부패한 재정을 해결하여 막장 상황에 처한 국민당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역사와 동일하게 현실은 시궁창. 상하이 암흑가의 보스인 두월생에게 "저희 같은 잔챙이가 아니라 4대 가문놈들을 족치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입니다."란 충고까지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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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서 이름을 딴 차이위 훈장이 있다. 자국 또는 우방국 국가원수에게만 줄 수 있는 훈장인데, 천수이볜도 받은 적이 있다. 이름도 안 바꾸고 그대로 받았다.
  • [2] 당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가 일본제국이었으니... 결국 장제스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중국인으로서 입학하게 된다.
  • [3] 장징궈가 집권하자마자 쑹메이링은 미국으로 도주이주한다.
  • [4] 국민당 내의 몇몇 강경파 인사들은 강제로 해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발했으나 장징궈가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 [5] 1달전인 1987년 6월, 한국에선 6월항쟁이 있었다. 당시 UN 축출로 숱하게 단교당한 중화민국에게 대한민국은 마지막 남은 외교상 최후의 대국이었다. 민주화 여파도 계엄령을 해제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 [6] 이 제의는 29년 후 마잉주가 대만 총통으로 취임한 2008년 말에 실현되었다.
  • [7] 즉 덩샤오핑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상호간의 교류를 강조하자 장징궈 역시 대만의 민주화를 통해 차후 통일 문제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 [8] 두 부자의 묘는 모두 '능침'(陵寢: 영어로는 영묘를 뜻하는 Mausoleum으로 번역)이라고 불린다. '릉'이 황제의 무덤에 붙여지는 것을 생각할 때, 장씨 부자 총통의 권력을 반영하는 대목.
  • [9] 팡량이라는 중국식 이름은 장징궈의 생모인 마오푸메이가 지어줬다고 한다. 원래 장제스가 지어준 이름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바꿨다고 한다.
  • [10] 이유는 성병에 걸려서 고환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
  • [11] 원로들이 장웨이궈를 위해 사퇴까지 하면서 자리를 마련해줘서 겨우 승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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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13: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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