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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last modified: 2015-02-26 23:38:34 by Contributors


張作霖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陸海軍陸海空) 시절의 모습. 왼쪽은 여섯째 아들 장학준, 오른쪽은 다섯째 아들 장학삼.

천군벌 대표
1대 장쭤린 2대 장쉐량

중화민국 역대 총통
유균(顧維鈞) 장쭤린 북양군벌 정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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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873년년 3월 19일 ~ 1928년 6월 4일 (54세)
북양정부 원수 임기 1927년 6월18일 ~ 1928년 6월 2일 (350일)
출생 봉천성(奉天省)[1] 해성현(海城縣)
최종 직위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
우정(雨亭)

Contents

1. 개요
2. 밑바닥 시절
2.1. 출생
2.2. 떠돌이 생활
2.3. 마적
3. 출세 가도
3.1. 공직자 전환
3.2. 러일전쟁
3.3. 두립삼 토벌
3.4. 신해혁명
3.5. 혁명 당원 장용 살해
4. 천하를 노리다
4.1. 군벌의 중심세력이 되다
4.2. 제 1차 봉직전쟁 그리고 패배
4.3. 와신상담 끝에 정점에 서다
4.4. 장제스의 북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다
5. 여담

1. 개요

중국 군벌 시대, 가장 대표적인 군벌 중 하나이자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던 군벌. 한국어로는 장작림이라고 발음된다.

그는 미천한 지위부터 시작해서 무려 80만의 병력을 지니는 중국 최강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만주 동삼성과 북경을 비롯하여 남경까지 거대한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장제스 도래 이전 군벌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힘을 보인 북양 대군벌 시대의 최종격인 인물.

장작림은 비록 정통은 아니지만 북양 군벌의 후계자 중 한명으로서 구시대 군벌로서는 오를 수 있는 최종적인 위치까지 올랐다. 심지어 조금만 운이 따라주었다면 중국 통일도 가능했을 정도. 그러나 새로운 이념과 민족적인 혁명정신이라는 무기가 있는 장제스의 북벌군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장악하기 이전, 만주 동삼성을 장악하여 그 지역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장작림과 봉천 군벌이 그 지역에 세력을 잡으면서 여러가지 면에서 동삼성의 현대화는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소위 삼시협약(三矢協約)이라고도 하는 미쓰야 협정으로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고, 그전에 군벌 시대 자체가 중국 현대사 중에서도 인지도가 매우 얕고 다루는 비중도 적어 중국 내에서도 이 사람의 제대로 된 행적을 아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중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신해혁명으로 인한 청조 멸망과, 장제스의 도래 이후 중국 공산당의 처절한 투쟁 정도라 그 가운데는 텅 비어있는 느낌.

장작림의 생애를 살펴보면 주요한 사건들이 신해혁명 이후부터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면적인 대결 이전이라, 사실상 장작림에 대해 짚고 넘어간다면 그 가운데의 군벌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2. 밑바닥 시절

2.1. 출생

"스스로" 취임했던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에 오를때,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 장공행장' 에서는 장작림의 기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공의 이름은 작림이고, 자는 우정이다. 봉천 해성인이며 원적은 산동이고 집안은 번성했다. 청 도광 초에 해성으로 이주했다. 조부대에 농업을 일으켜 소봉(관직 없는 명예직)의 칭호를 받았다."

독군서(督軍署) 참모장 장식의(臧式毅)가 서명하고, 이하 8명의 처장들이 서명한, 장작림 신도비(神道碑)에는 또 다른 소리가 쓰여져 있다.

"공의 이름은 작림이고, 자는 우정이다. 선조는 직예(直隸 : 하북)인이며, 청조 말에 봉천 해성으로 이주했다."

무엇이 옳을지 모른 일이나, 보통 장작림을 하북성 원적으로 본다. 장학량(張學良)의 경우 원적지를 하북성 대성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작림의 선조 장영귀(张永貴)는 먹고 살기 위해 봉천의 동북 지역까지 와서 농지를 개간해서 농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장발(张發) 대에 와서 소봉 칭호를 받아 집안이 제법 볼만해졌다. 장발은 아들 4형제를 두었고, 셋째가 바로 장작림의 아버지 장유재(张有財)가 된다. 장발이 죽자 형제들은 재산을 나누어 가져, 장유재는 약간의 돈을 가지고 분가하여 장작림이 태어난 마을로 왔고, 잡화점 가게를 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장유재는 근면 성실쪽 과는 거리가 먼, 노는 줄 밖에 모르는 한량이었던것. 잡화점은 보잘것이 없었고 수입은 더 별볼일 없었다. 결국 잡화점은 망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한데, 장유재는 재기할 생각은 않고 노름에만 빠져 지냈다. 노름 빚은 쌓이고, 갚을 길은 없고, 결국 장유재는 빚쟁이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 당시 장작림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고, 집안은 망해서 돈도 없고 가난하여 공부를 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요행하게 마음씨가 곧고 바른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사숙(私塾)[2]의 선생님이던 양경진(楊景鎭)의 덕택이었다. 이치가 그리 된 바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한참 수업에 열중하던 양경진은 문득 밖에서 어떤 아이 하나가 몰래 자신의 강의를 주섬주섬 엿듣고 있는 것을 창밖으로 보았다. 아이가 장작림 임에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호기심이 생긴 양경진은 아이를 불러 이것저것 물었다.

"너는 어째서 내 수업을 엿듣고 있는 것이냐?"

"제 이름은 장작림이옵고 공부는 하고 싶은데, 집이 가난해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여기에 와 몰래 선생님 말씀을 엿들었습니다."

"아, 네 마음이 참 가상하구나!"



학구열에 감동한 양경진은 장이 돈 문제에 구여받지 않고 수업을 할 수 있게 무료로 학교에 다니도록 했고, 직접 책과 공책을 사주기까지 했다. 장작림은 기초적인 공부를 하여 읽고 쓰는 문제와 기본적인 교양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배우지 못해 무뢰배들이 많은 중국 천하에서, 약간이나마 바른 몸가짐 등을 배운 장의 태도를 높게 여기고 그를 중용하던 사람들이 훗날 꽤 있었기 때문이다.

장은 이때의 고마움이 참으로 뼈에 사무쳐 나중에 육군 27사 사단장이 되었을때, 옛 정을 잊지 않고 양 선생님을 몸소 심양(瀋陽)으로 불러 집 안에 사숙관을 열게 해주었다. 다름 아닌 장학량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술회했다.

양선생님의 도움으로 학업에 열중하던 장이었지만 무너진 집안 가세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기에, 장의 어머니 왕(王) 씨는 4남매를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다. 장에게는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하지만 외할머니 집도 가난 하기는 매한가지였고, 입만 다섯개가 늘었음으로 집안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일 수 밖에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장은 이곳에 계속 있으면 희망 없이 나이만 먹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세상에 몸을 던진 것이다.

2.2. 떠돌이 생활

무협지 식으로 말한다면 장이 강호에 출사할 무렵, 청나라는 숫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복싱 선수와 같았고 열강은 마음 놓고 중국 강산을 때어먹으며 유린하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가 150만 제곱 킬로미터를 분할해버렸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신감을 크게 얻어 중국 동북 지역에 눈을 번뜩거리고 있던것. 이런 상황에도 탐관오리들은 자신들의 배 불리는데나 열성이어서 백성들은 집을 버리고 산림으로 모여들었고, 말을 타고 마적이 되어 노략질을 해대었다.

집을 버리고 뛰쳐나온 장은 이런저런 일을 하며 식사를 해결하면서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마차를 부리는 점포에 들어가 잡일을 하기도 했고, 나귀에게 약을 주고 고쳐 수의사(獸醫師)가 되기도 했다. 대군벌과 수의사는 그다지 접점이 없는 이름이지만 장은 뜻밖에도 수의사의 일에 재미를 느꼈고, 적성에 맞아 크게 만족했다. 장은 동물의 병을 치료하는 점포를 차려서 생업을 꾸리려고 했으나 운세가 따라주지 않아 누명을 쓰고 매를 맞는등 고생을 하며 전전했다.

바로 이때가 갑오전쟁, 바로 청일전쟁이 발발한 시기이다. 오갈데도 없는 장은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군대에 뛰어들었다. 전황은 심기일전하고 이 날만을 기다려온 일본에게 유리하여, 청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지리멸렬하게 당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일본군의 제3사단장 가쓰라 타로(かつらたろう)는 12월 13일 해성을 함락했다. 해성은 봉천과 요녕 반도의 가운데 있어 양쪽에 위압을 가 할 수 있고,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도 뚫려 있어 만약 베이징까지 진격하고자 한다면 실로 요지였다. 다만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부담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성은, 다름아닌 장작림의 본거지였다.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 운동을 겪은 75세의 노장 송경(宋慶)을 기용했다. 그는 여순에 주둔하는 의군(毅军)을 이끌고 요동으로 급히 내달렸다. 바로 이 의군에 장작림이 끼어든 것이다. 장은 수의사 일에 흥미를 느꼈다고 언급했듯이, 동물을 좋아했고 말을 잘 다루어 기병으로 종군했고, 말을 다루는 솜씨가 나쁘지 않아 초장(哨長 : 한 초의 우두머리. 보통 1초는 백여명 가까이)으로 발탁되기까지 하는등 괜찮은 면모를 보였다.

노장 송경은 열심히 싸웠고, 나름대로 성과도 내었다. 하지만 곧 전쟁이 끝나 장은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둥벌거숭이로 지낼때보다야 그럭저럭 여유가 생겨 1895년에는 21세 나이로 결혼도 하게 된다. 지주 집안의 둘째 딸 조춘계와 결혼한 것이다. 고향에서 나름대로 한가하게 지내던 장이었지만 그는 무미건조한 생활에는 쉽게 실증을 내던 사람이었고, 다른 일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2.3. 마적


청일전쟁 후 만주 지방은 몇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첫째는 해산된 군인들인데, 한번 전쟁을 경험한 인물들이 시골로 가서 한가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시골로 가더라도 가난하여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끼리끼리 뭉쳐 다니게 되었고, 두번째로 거지들이 들판에 넘쳐났다. 세번째로 이를 관리해야할 관부는 썩을때로 썩어 치안은 엉망이었고 마적(馬賊)들이 도처에 횡행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무법천지가 되어가는데, 나라는 자신들을 지켜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 사람들은 자체적인 치안 확보를 위해 스스로 무장 조직을 만들어 적을 막아세웠다. 그러한 조직을 대단(大團)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마적도 마적 나름이라, 마구 약탈하고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는 못된 비적(匪賊)들이 있는가 하면, 대단을 이루어 호방한 행동을 하고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춰 비적들을 막아 세우는 마적들도 있었다. 장작림은 전자가 될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자가 되려고 하였다.

1900년. 장작림은 장인 어른인 지주 조점원(赵占元)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 조씨 집안의 조가묘(赵家廟)로 힘쎈 청년들을 불러 모았고, 20여명이 되자 장은 그들 사이에서 소두목 노릇을 하며 인근 몇 개 마을의 치안을 책임진다고 나섰다. 일종의 나와바리인 셈인데, 장작림은 자신의 나와바리에서 규칙과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치안을 유지해 나가, 이 지역에서는 비적들이 출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이 일을 잘 한다고 칭찬했다.

장의 명성은 이 마을 저 마을 퍼져나갔다. 더불어서 그에게 몰려드는 청년들과 보호를 부탁하는 마을도 늘어나, 그는 20여개 마을을 관할하는 큰 대단이 되었다.

그 조가묘의 서북쪽에는 또다른 큰 대단이 있었는데, 단주의 이름은 김수산(金壽山)이라는 양반이었다. 김수산 역시 떠도는 건달들을 불러 모아 100여명의 대단을 조직했는데, 문제는 그는 행실이 비적이나 다를 바 없는 못된 작자였다는 것이다. 감수산은 자신의 나와바리에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며 그 흉악한 일이 비적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보민(保民)을 해야할 마적 대단이 되려 해민(害民)을 자행하는 기막힌 일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참다 못해 장작림을 찾아갔다. 장은 부하들을 보내 이 김수산을 내쫒고 그의 나와바리를 접수했다. 부하들은 더욱 늘어났고 세력 또한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시였다.

1901년 섣달, 그믐날 야밤에 김수산은 다짜고짜 장작림을 습격했다. 느닷없는 일격을 당한 장은 허둥치둥 딸과 부인을 데리고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피신을 했고, 현재 요녕성 태안현 소속인 팔각대(八角臺)까지 피신했다. 얼마나 급박했던지, 부인 조씨는 도망치는 마차 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다름 아닌 장학량이다.

본래 장작림은 팔각대를 지나 요남의 녹림 풍덕린(馮德麟)을 찾아가볼까, 하는 요량이었다. 그러나 팔각대는 상점이 50개나 있는 큰 마을이었고, 장작림 식구와 딸려온 40여명의 일행은 팔각대의 보호를 받으며 머무르게 되었다. 장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아 그 평판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팔각대 상회 회장인 장자운(張紫云)은 명성 높은 장작림을 한번 보고 싶어하다가 드디어 실물을 보았다.

"사람이 북방인이지만 인상이 남방인 얼굴이고, 이목구비도 수려하구만. 행동에도 절도가 있고 말하는것도 속되지가 않고. 명불허전일세. 이곳에 머물게 하게."

당시 팔각대 대단의 두목으로 장경혜(張景惠) 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장은 제법 명성이 있음에도 굴러 들어온 신세가 두번째 자리를 달게 받아들였다. 이 장경혜는 훗날 장작림의 측근으로 맹활약하게 된다. 지방 유지들도 이름 높은 장작림이 팔각대를 지켜준다는것에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많은 고생을 했던 장작림이지만 여러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점점 성장하며 생활에 활로가 보였고, 이제 뜻을 펼칠 마음을 크게 먹었던 것이다.

3. 출세 가도

3.1. 공직자 전환

팔각대의 대단에서 시간을 보내던 장작림은 무장 조직에 대한 경영과 세력 확대에 주력했고, 그곳의 상인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신임을 얻고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1902년 쯤이 되자, 동북 지역은 점점 혼란을 벗어나 치안 문제에서는 비교적 안전해졌다. 그렇다면 대단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장의 조직도 해산 위기에 몰렸다.

장을 팔각대 마을에 받아들인 상회 회장 장자운은 이 무장 조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만약 그대로 해산한다면, 혹시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지방에 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장작림과 우정을 쌓은 일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이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했다. 장자운을 비롯한 상인들은 신민부(新民府) 지부인 증온(增蘊)을 찾아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작림을 칭찬했다.

증온 지부는 장작림을 만났다. 장은 이때 본능적으로 이것이 대단한 기회임을 깨달았다. 어차피 민간 조직으로 남아봐야 한계가 있는데, 정부 편입이 된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장은 증온에게 제자 신분으로 머리를 숙여 절을 했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증온은 이야기를 나누어보다가, 장이 인상도 좋고 태도도 온화하고 점잖은 편이라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아 그의 조직을 받을 생각을 했다.

운도 따라주었다. 성경(심양) 장군 증기(增琪)는 이때 '사사로운 단을 공적인 단으로 바꾸어' 마적 등 도적들을 선량한 백성으로 만들자는 방침을 조정에 건의했다. 그런 형편이라 장작림은 바로 비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제 밑에는 1개 대대 병력이 있습니다!"

장은 증온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했던 처지라, 비준을 얻자마자 팔각대로 달려와 있는대로 말을 사고 단원을 늘리고, 근처의 마적 집단에게 연락하여 자기네 패거리에 오라고 권했다. 이렇게 해서 485명이 모였고, 기병 3소대와 보병 2소대를 책임진 장작림은 조직 두목에서 정식 관군이 되었다.

3.2. 러일전쟁

그야말로 녹림 생활을 하다가 신민부라는 국가 기관에 들어온 장작림은 생소한 생활환경에서도, 그의 가장 큰 장기인 처세술을 발휘하며 금세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지부 증온이 이 기관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알게 모르게 뇌물을 찔러주는 한편, 항상 예의를 차리면서도 무엇을 시키면 군말없이 수행했고 복종했다. 또한 상인들을 잘 다루는 편이었고 실무에 밝았으며 부하 관리에도 재능을 보였다. 이에 지부는 그를 믿음직한 참모로 여겼다.

또한 신민부 순경국장 왕봉정(王奉廷)을 교묘하게 따돌려, 신민부의 군사 실권을 장악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이렇게 조직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던 그에게 러일전쟁이라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청 정부는 요하 서쪽을 중립 지구로, 동쪽을 전쟁 지구로 선포했지만 전쟁이 벌어진 마당에 그런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러시아 군대나 일본 군대나 포악하기는 서로 쌍벽을 이루었고, 치안이 불안해지자 잠잠하던 마적떼도 다시 벌떼같이 일어나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은 치안 유지에 대한 노력보다는, 과연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할까 고민해보았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군이 꽤 유리해보였기에, 그는 러시아군에 접촉해서 무기를 타내고 돈까지 얻어내고는 러시아군을 위해 공권력을 함부로 사용해 자기 휘하의 부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일본쪽으로 판세가 기울었다.

장은 삽시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 당할 뻔하기까지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해 이번에는 일본쪽에 붙어 그쪽의 지원을 받고 싸우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게 되자, 이쪽 저쪽으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은 장의 부대는 3개 부대가 더 늘어났다. 그러는 사이에 출세까지 해서 신임 성경 장군 조이손(趙爾巽)은 장에게 3개 부대를 5개 부대로 편성토록 했다.

3.3. 두립삼 토벌

"
장작림과 조이손

밑에 부하들도 어느정도 되겠다, 장은 지방 마적들을 다시 열심히 소탕하고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름을 날리던 마적 전옥본(田玉本)은 세력이 1,000명을 훌쩍 넘는 대마적이었는데, 장작림의 부대에 피격되어서 사망했다. 마적 소탕을 하면서 공을 세우고, 마적 무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인심도 살 수 있으니 이 마적 사냥이란것은 실로 남는 장사였다.

다만 두립삼(杜立三)이라는 대마적은 장작림 조차도 손을 대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요중현(遼中縣)에 세력을 두고 있는 두립삼은 자칭 마상황제로 불리면서 관군조차 그를 피해다닐 정도였고, 백성들은 두립삼을 보면 "두 대인" 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조이손은 공을 세우기 위해 몇번 부하들을 보내 두립삼을 잡도록 했으나 번번히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1907년이 되자 이 지역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서세창(徐世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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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창의 모습

이 사람은 훗날 중화민국 총통까지 하는 인물로, 전형적인 원세개 라인이다. 그는 헤이룽장 성, 지린 성, 랴오닝 성 3개 성을 관할하는 총독에 임명되었고, 두립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똑똑하다고 소문난 지현 은홍수(殷鴻壽)을 신민부에 보냈다. 신민부에 도착한 은홍수는 장작림의 협조 아래 두립삼을 잡을 계책을 꾸몄다.

두립삼은 말을 타는 재주가 남달랐고, 말 위에서 쌍권총을 쏘는데 솜씨가 백발 백중이었다. 본거지의 성곽은 견고했고 따르는 무리들은 흉악한데다 검문 초소도 많아 함부로 공격하단 큰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장은 계책을 내어, 사람을 시켜 두립삼에게 축하 서신을 보냈다. 두립삼이 봉천성의 높은 자리를 맡게 되었으니, 어서 신민부로 와서 서세창 총독에게 감사를 드리라는것이다.

두립삼은 이 편지를 보고 생각한 끝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모친과 형제들이 신민부에 가면 크게 당한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계책이 실패했지만 장은 또 다른 계책을 내었다. 두반림(杜泮林)을 이용하는 것이다. 두반림은 두립삼의 양아버지로 지역 유지였고 두립삼이 어르신으로 모시며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일전부터 두반림과 왕래가 있던 장은 직접 두반림을 모시고 오고, 은홍수는 두반림을 성대하게 대접해서 지금 하는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반림은 장의 말에 따라 두립삼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유협의 일이야 평생 할 일이 아니니 이 조상의 이름을 빛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두립삼은 머뭇거리다가 존경하는 어르신의 말이라 13명의 부하만 이끌고 출발했다. 1907년 6월 6일이었다.

움직이기 편한 차림으로 온 두립삼은 은홍수를 만나, 벽을 등지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든지 쌍권총을 꺼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곧 이야기가 끝나 은홍수는 소리를 쳤다.

"손님 가신다!"

두립삼은 방문 앞에서 몸을 굽히고 인사를 했다. 바로 그 짦은 순간, 장작림의 부하 탕옥상 등이 비호 같이 달려들어 두립삼을 꺼꾸러뜨렸다. 자랑인 쌍권총은 금세 빼앗겼고 그는 결박을 당했다.

"시간 끌어 좋을 것 없소! 어서 처리해버립시다."

장작림은 그날 밤에 바로 두립삼을 총살시켜버렸다. 그 순간, 장작림의 부하 장경혜는 부대를 이끌고 두립삼의 본거지를 습격했다. 두목을 잃은 마적단은 오합지졸이라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조직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총독 서세창은 매우 기뻐서 장에게 5,000량의 은을 내림과 동시에 봉천성 순방영 전로 통령으로 발령했다. 이제 장작림은 5개 대대의 마보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동북 지역에서 장은 강력한 무장 조직이 되었다.

마적 소탕에서 보인 능력으로 1908년 장작림은 요서 북부의 몽고 마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몽고 마적들의 뒤에는 제정 러시아가 있었다. 건조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고 여름에는 꿀벌만한 모기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이 일은 매우 어려웠지만, 장작림은 또 다시 특유의 적응력을 보이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형에 능숙하고 주민들의 사정에 능한 몽고 마적은 어려운 상대였다.

1909년 고전하는 장에게 서세창은 병력을 더 지원해주었고, 이제 장은 3,500명을 거느린 동북 만주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서세창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장은 졸병보다 더 고생하며 솔선수범을 했고, 온갖 고생 끝에 유명한 몽고 대마적들을 죽이거나 러시아 지역으로 쫓아내었다.

이렇게 순조로운 관리 인생을 보내던 장에게 기회가 연달아서 찾아오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이었다.

3.4. 신해혁명


혁명은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머나먼 봉천성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혁명 단원 장용(張榕) 등은 신군부의 남천위(藍天尉) 등과 연락을 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남천위의 신군 제2여단은 봉천성 북대영에 주둔하였고, 성 내에 있는 유일한 주둔군이었음으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경험이 부족해서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1911년 5월, 조이손은 동삼성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해외 시찰을 하다가 혁명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재빨리 귀국해서 대책을 짜내느라 고심했다. 논의를 하던 중 순방영 통령 오준승(吳俊陞)을 불러들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은 구군이라 혁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안심할 만했고, 또 오준승 등은 조이손의 옛 부하였다. 조이손은 즉시 오준승을 성 내로 불러들여 수비를 견고하게 하려고 노렸다.

이 정보는 다름 아닌 장작림이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된다. 그는 이미 벌써 조이손의 옆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았고, 봉천성의 강무학당(講武學堂)에 장경혜, 탕옥린, 장작상 자신의 측근들을 보내 교육을 시키면서 동정을 살피라고 명령을 내린 뒤였다. 장작림은 이 소식을 듣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7개 부대를 모두 모아 말을 타고 봉천을 향해 쉬지도 않고 달렸다. 오는 도중 오준승이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오? 아무튼 반갑소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장작림은 오준승이 사정을 파악하기 전에 봉천성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즉시 총독 조이손을 만나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시국이 위급해서 혹시 총독께서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나, 하고 급하게 부대를 인솔해서 왔습니다. 총독께서 명령도 안내리셨는데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 것에 대해서는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저희 부대를 거두어주신다면 이 장작림이는 한 목숨 바쳐 총독 각하를 보호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실상 급히 군사가 필요하고, 또 때마침 장작림이 왔기 때문에 조이손은 기뻤다. 거기다 장작림이 저런 식으로 나오자 감격하여 흔쾌히 허락하였고 부대 이탈에 대한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상을 주었다.


장작림은 수도 방위를 맡는 명령 이외에 중로 순방영 통령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장은 이제 15개의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며, 봉천 성내에 있는 군부대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3.5. 혁명 당원 장용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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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


장작림이라는 군사력을 가지게 된 총독, 조이손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신군부 장령 등을 압박해서 보경안민(保境安民)이라는 주장을 제기,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 주장은 혁명에 반대하고 계속해서 황제 체제를 유지하다는 전형적인 보황(保皇) 노선이다. 그리고 장작림이 그 앞잡이로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미 전국이 혁명의 기운으로 불타오르는데, 저런 짓을 한다고 해서 혁명의 기세를 막기는 힘들었다. 봉천의 혁명당원들은 시내에 모여 무창봉기(武昌蜂起)에 어떤 방식으로 호응할까 논의를 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기로 하고, 남천위, 오경렴 등의 혁명당 수령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동북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오경렴은 봉천성 자의국 의장 명의로 성내 각계 인사들에게 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혁명파가 세운 계획은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봉천성 보안회를 조직한 뒤, 청나라 조정에서 임명한 총독 조이손을 내쫒고 혁명파 신군부 남천위를 관외 도독으로 추천, 오경렴을 봉천성 민정장(民政長)으로 추대하여 독립을 선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북의 군대를 이끌고 관외로 진입, 혁명을 돕자는 계획이었다.

뭔가 굉장히 허술하고, 고생은 덜하면서도 요행수를 바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 당시 경험 없는 미숙한 혁명당원들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앞서 말한 오경렴은 봉천교육회 회장, 봉천 자의국 의원등을 지냈으며 곧 자의국 의장까지 되었다. 그래서 이런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 그는 진보적 사상을 갖추고 있었고,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1911년 12월 12일 보안회의를 소집했다. 참여한 사람은 각계 인사 200여 명이었다. 물론 조이손도 장작림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조이손이 아무 생각 없이 나간 것은 아니다. 그는 장작림에게 명령해서 회의장 주변에 총을 든 요원들을 쫙 깔아놨다. 압력을 주는 것이다. 물론 장작림 본인도 권총을 소집하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얼굴이 살기등등했다고 한다. 당연히 회의장은 회의는 커녕 살벌한 모습에 그야말로 일촉즉발,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젊은 혁명당원들은 겁을 먹기는 커녕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청조에서 독립해서, 자치 기구를 세우고 독립합시다!"

조이손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당신들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기에 왔는데, 뭐? 자치? 독립?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건가!"

"독립을 선포하시오!"

사방에서 혁명당원들이 조이손에게 독립을 요구하던 바로 이때, 조이손을 수행하던 장작림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튀어나왔다. 그는 권총을 들고 탁자를 총으로 탕탕 내려치며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나 장작림은 군인이다! 오로지 총독 각하를 보호할 뿐이다, 이 말이다!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비록 어제의 동지라고 해도 이 총으로 처리 할 수밖에 없지!"

동시에 회의장 주변에 있던 장작림의 부하들이 모두 권총을 빼들었다. 이런 마당에 회의가 지속될 리가 없었다. 혁명당원들은 겁을 내긴 커녕 분기탱천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회의장은 보황파 세력 밖에는 남지 않았다. 회의 안건도 자연히 조이손의 뜻대로 되어 국민 보안공회가 만들어졌는데, 말이 보안공회지 보황 단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조이손은 실권을 그대로 지켰다. 혁명파가 보황파에 제대로 얻어 맞은 사건이었다.

다음날, 그러니까 1911년 12월 13일. 조이손은 남천위 협통(協統 : 여단장)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했는데, 어제의 회의에서 혁명파가 혁명 사상을 가진 ─ 그리고 쑨원의 동맹회 회원이기도 한 ─ 남천위를 관외 도독으로 밀려고 했다가 조이손에게 저지 당했는데, 언제 또 다른 수작을 부릴지 모르므로 군사 실력을 모두 빼앗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에게 전보를 쳤다. 전보는 북경을 향했고, 대상자는 원세개였다.

원세개

"섭여청(攝汝淸)에게 동북 2혼성군의 협통 직을 잠시 겸직하게 하여 봉천에 주둔시키고 치안을 담당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전보의 내용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모든 군사적 실권을 섭여청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그럼 섭여청은 어떤 사람이고, 하면 전형적인 구식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조이손의 충식한 수하였다. 원세개가 이를 승낙하면서 조이손은 혁명파 남천위의 권한을 모두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그를 불러서 점잖게 말했다.

"남천위 협통이 뜻이 크고 식견이 높은 분이라는 것이야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번에 동남의 각 성을 돌아보시도록 하고, 우리의 실정을 널리 알리고 여론을 청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출발하는 봉천 보안공회가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취지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때문에 협통의 자리는 잠시 맡겨 두고 서둘러 출발 하도록 하시고 수시로 보고를 해 주십시오."

실로 교활한 계략이었다. 조이손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천위를 치울 수 있었는데, 정작 외부에서 보면 (산해)관외에 있는 사람을 관내로 보내는 것이니, 남천위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외, 그러니까 봉천성의 혁명파들은 자신들의 혁명 지도자를 손도 못 쓰고 잃게 되었다. 장작림이 모시는 인물은 그만큼이나 교활했다. 이렇게 충돌하는 과정에서 장작림은 남천위의 무장을 직접 해제시키려고 하는 등 은근히 협박을 가했다.

남천위를 처리했으니, 다음은 장용 차례였다. 장용은 북경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 봉천으로 들어와, 관동 자위 독립군을 조직하고 비밀리 간행물을 발간하여 혁명을 고취시켰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그 유명한 혁명가 (黃興)과 함께 혁명 활동을 했다. 1910년에 귀국한 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봉천에서도 혁명을 준비하며 조직을 만들고, 군민을 포섭했는데 그 숫자가 1만이 넘어 기세가 대단했다. 그들의 목적은 무장봉기였다.

하지만 이 모든 움직임은 조이손에게 포착되었다. 원금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용은 그에게 할 말 못할 말을 다 했으나 기실 원금개는 조이손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이런 식으로 장용을 감시했던 것이다. 또한 장작림을 보내 장용과 친구를 먹게 했다. 이제 거사 계획을 알았으니 선수를 칠 차례였다.

1912년 1월 23일. 원금개는 장작림과 장용을 불러 조촐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서글서글한 장용은 무서운 음모를 깨닫지 못했고, 한참 식사를 하던 중에 원금개는 문득 장작림에게 말했다.

"먼저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이것이 계획을 실행하자는 신호로, 장은 먼저 일어나 부하들을 불러 준비를 시켰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장용은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반항도 못 해보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혁명가의 당시 나이는 고작 28세밖에 안되었던 것. 괴한들이 장작림의 부하인 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장용이 죽고 난 후 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장작림은 패거리를 이끌고 장용의 집을 수색하는 한편, 장용의 조수와 혁명당원 등 100여 명을 처형했다. 성내는 공포에 떨었고, 조이손은 "통령의 직분을 지키고 악질분자를 처단하여 민심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대의 행위는 표창을 받을 만하다." 하고 회신을 했다. 장은 그 대가로 사단장급의 자리에 오르지만, 아직 사단장은 아니었다.

한편, 상황을 본 장작림은 자기가 더 출세를 하려면 원세개에게 붙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보황이니 혁명이니 하는 이념 따위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원세개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만 연구했다. 이를테면, 처음에 원세개가 청조를 지켜려고 생각했을 즈음에 장작림은 33명의 장령들과 의견을 모아 "결사적으로 황실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연서를 보냈다. 진충보국하겠다는 말이다.

흥미를 느낀 원세개는 장작림과 몇 번 사람을 보내 연락을 하면서, 현재의 황제인 선통제가 물러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라는 식으로 넌지시 운을 떼었다. 그리고 선통제가 물러나면 장작림이 동삼성 독판(督辦)이라는 높은 자리에 임명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장은 매우 크게 기뻐하면서 삽시간에 태도를 돌변하여 보황론을 팽개치고 공화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이 장작림이라는 사람의 이념이다.

장은 다시 두 번이나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내 공화제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원세개가 임시 대총통이 되자 누구보다 빨리 아부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러한 행동은 원세개에게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으며 떡고물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마침내 원세개의 "성은"으로 장작림이 맡고 있던 부대가 육군 제27사단이 되었다. 장작람이 드디어 사단장이 된 것. 그의 나이 38세였고, 포병대, 공병대, 수송 대대 등 뛰어난 장비도 얻어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그리고 그 부하들로 장작상, 탕옥린, 장경혜 등이 기용되어 이 27사단은 사실상 장작림의 사병 집단이 되었다. [3]승승장구하던 장작림은 결정적인 눈도장을 찍기 위해 결정을 내렸다. 원세개를 알현하려고 한 것. 당시 원세개를 알현하려고 했던 장작림은 노회한 원세개에게 자신이 야망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베이징의 유명한 술집에서 수하들과 기생을 끼고 잔뜩 놀고 마신 뒤에 원세개를 알현했고 원세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는 일부러 촌놈 연기를 해 자신을 철저히 무식한 변방의 촌놈 군벌이지만 충성심은 가득하다는 것을 원세개에게 전달했고 그의 연기에 속은 원세개는 그를 격려하고 앞으로 자기를 따르면 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 뒤 동북으로 돌아온 장작림은 동북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장석란을 완전히 또 가지고 놀며, 심지어 자신의 상관이었던 조이손까지 눈치를 보게 하고 동북의 군사대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집어 넣었다. 그 뒤 원세개는 늙은 장석란 대신 단지귀라는 사람을 파견하지만 역시 장작림은 원세개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단지귀에게는 껌뻑 죽는 시늉을 하며 떠받들었고, 원세개가 이후 노골적으로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자 장작림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주제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물론 이건 말만 투표였고, 실상은 투표장 주변에 군인들이 쫙 깔려 있었다. 결과는? 100% 군주제 찬성. 장작림은 그 결과를 원세개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두 눈뜨고 보기 힘든 발언까지 한다.
어서 빨리 제제(帝制)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작림은 죽고 싶을 뿐입니다!
결국 원세개는 이후 황제가 되었으나, 그후 엄청난 중국인의 저항을 받았으니 운남성에서 채악의 호국군이 들고 일어났고 전국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황제 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전중국을 흔들었다.다급해진 원세개는 장작림에게 중국 내륙의 호남성 출병을 요구하면서 이후 잘되면 공후백작의 벼슬을 주겠다고 급전을 날렸지만 그러나 장작림은 이미 원세개가 끝장났다는것을 깨달고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꾸어 봉천은 봉천 사람이 다스릴 뿐이다.황제가 다 무어냐!라며 말하며 단지귀를 내쫓고 동북을 장악한다. [4]

4. 천하를 노리다

4.1. 군벌의 중심세력이 되다

1918년 9월 7일 대총통 서세창은 장작림을 동3성 순열사에 임명하였다. 장작림은 자신의 부하인 손열신(孫烈臣)과 사돈 포귀경(鮑貴卿)을 각각 흑룡강성 독군과 길림성 독군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세력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나날이 뻗어나갔다. 실패라곤 없었다. 장작림의 봉천파는 북경 정부의 양대 세력인 단기서의 안휘파와 조곤의 직예파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직환전쟁에서 직예파의 편을 들어 승리하자 그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기회를 보아 직예파를 몰아내고 중원에 자신의 깃발을 꼽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4.2. 제 1차 봉직전쟁 그리고 패배

이런 장쭤린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직예파의 오패부였다. 오패부는 1874년 산동성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은 그는 22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료 대신 군인의 길을 선택한 그는 북양군벌의 양성소라 할 수 있는 보정육군속성학당에 들어갔다. 1907년 장춘에 주둔한 북양군 제3진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의 지휘관이 조곤이었다. 조곤은 유능하고 야심이 넘치며 명석한 엘리트인 오패부를 당장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직예파의 에이스가 되고 직환전쟁에서 단기서를 꺾은 그는 장쭤린을 언젠가 반드시 꺾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그것은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양자간의 전쟁의 빌미는 내각구성에서 터졌는데 직환전쟁이후 내각은 근운붕이라는 사람이 맡고 있었으나 이 사람은 당시 재정난을 도무지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근운붕은 국내 자본가들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해외로부터의 차관 획득에도 실패했다. 이로 인해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군대도 몇달씩 월급이 체불되어 아우성이었다. 북경정부는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근운붕은 직예파와 봉천파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었다. 직예파는 그가 봉천파에게 특혜를 준다고 생각했고 장작림은 장작림대로 근운붕은 직예파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였다. 1921년 12월 18일 부로 결국 근운붕은 해임되고 그 자리에 장작림은 양사이라는 사람을 서세창에게 건의를 해 양사이 내각을 구성하지만 오패부는 그가 원세개 내각에 있었을 당시 친일매국적인 활동을 했다고 선전해 대국민적 분노를 일으켜 그를 자진사퇴시키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각을 구성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장작림은 광동정부의 손문과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킨다.
제 1차 봉직전쟁은 1922년 4월26일부터 5월5일까지 벌어졌는데 이 싸움에서 12만명의 봉군은 3만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2만5천명이 투항했으며 5만명 이상이 싸우지 않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장작림은 크게 지고 후퇴하고 만다. 그 이유는 오패부는 청나라 시절부터 군대에 있었고 직환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이 많았지만 장작림을 포함해 대부분의 봉천군은 만주에서 마적질이나 소규모 전투를 해 이런 대규모 전투경험이 없었다. [5] 또한 전투기와 직예파가 운용하는 발해함대로 장작림보다 화력이 더 우월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장작림으로써는 다행스러웠던 것이 장작림의 뒷배경이었던 일본이 오패부가 산해관을 넘어 장작림을 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통첩을 날렸고 그 덕분에 장작림은 오패부와 강화를 맺고 중원의 모든 기반을 잃는 대신 자신의 원래 기반인 동북3성으로 돌아가 봉천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동북3성에 대한 근대화와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4.3. 와신상담 끝에 정점에 서다

장작림을 꺾은 오패부는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미국의 타임지에서는 오패부를 중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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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승리한 직예군 내부에서는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직예파의 리더인 조곤과 오패부 그리고 풍옥상이었다. 조곤은 오패부가 자신을 점점 무시하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져 둘의 관계는 상당히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또한 다른 직예파의 군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동료인 오패부가 자신의 위에 서 있는것을 아니꼽게 여겼으며 그 중에서 풍옥상이 가장 심했다. 풍옥상 역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봉직전쟁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지만 오패부는 그러한 그를 견제하려 했고 결국 풍옥상은 하남 독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북경의 육군 검열사라는 명예직으로 옮기게 된다. 결국 1924년 9월 봉계군벌과 환계군벌 그리고 광동정부의 손문이 반 직계군벌 삼각동맹을 결성하고 10월에 다시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장작림이 제 2차 직봉전쟁을 일으키자 오패부는 풍옥상에게 장작림을 막으라고 하지만 풍옥상은 오히려 산해관 근처에서 말머리를 돌려 오패부를 공격하는 북경정변(北京政變)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제 2차 직봉전쟁은 장작림의 승리로 끝난다.북경을 장악한 풍옥상을 내쫓은 장작림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하고. 노영상, 장종창이 선봉으로 10만의 병력으로 산동성을 장악하고 이어 상해와 남경, 안휘성까지 장악하게된다. 이 때가 바로 장작림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겠다. .[6]

4.4. 장제스의 북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다

그러나 산동성을 쳤던 장종창은 무능과 탐욕으로 인해 산동성에서 손전방에 의해 쫓겨나고 또한 장작림의 참모장이었던 곽송령은 그가 일본에게 매국적인 밀약을 약속한다 하여 장작림에게 반란을 일으킨다.(1개월만에 진압) 거기다 쫓겨난 풍옥상은 다시 군대를 몰아 장작림을 치려고 했는데 이에 장작림은 오패부와 손을 잡고 풍옥상을 내쫓는다.적의 적은 나의 동지
오패부가 더이상 장작림에게 덤빌 힘이 없는 이상 장작림은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가 군대를 몰고 올 때까지만...
1926년 10월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던 장제스군이 풍옥상, 이종인, 당생지, 염석산 등과 손을 잡고 북벌을 일으키자 장작림은 오패부와 손전방과 손을 잡고 장제스군에 맞섰지만 패배하고 장작림은 북경을 버리고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권토중래를 노리지만 만주를 먹으려는 관동군은 장작림이 탄 기차를 폭파시켜 장작림을 죽이고 만다.[7]

그의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반일감정이 강했고 아버지 죽인 놈들인데 당연하지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장제스가 되고 만다. 역시 역삼각머리의 누군가가 올때까지만


5. 여담

상당히 호탕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폭탄을 던진 사람을 용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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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금의 요녕성
  • [2] 글방
  • [3]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새개가 손만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옛 친구였던 장석란(張錫欒)을 1914년까지 봉천 장군 겸 진안 상장군의 자리에 올려 봉천, 길림, 흑룡강 모든 군무를 장석란이 총괄하도록 해 견제장치를 만들었지만 장작림의 권모술수와 패기가 상상 이상이라, 장작림은 오히려 자신의 상관인 장석란을 동북에서 압도하게 되었다. 당시 장석란은 나이가 무려 74세나 되는지라 젊은 장작림의 패기를 당해내기 힘들었다.
  • [4] 여기서 장작림이 영악한 것이 혹시 모를 원세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기가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고 자신과 함께한 인물인 풍덕린이란 인물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단지귀를 내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귀는 배후에 장작림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원세개에게 풍덕린에 대한 얘기만 했다.
  • [5] 다만 장학량의 제3혼성여단과 곽송령의 제8혼성여단은 일본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받은 봉군 최정예 부대였으며 곽송령(郭松齡)은 북경 육군대학 출신으로 봉군 지휘관 중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하였다. 제1차 봉직전투가 끝난 뒤에도 이들 부대는 거의 온전하게 돌아왔다.
  • [6] 참고로 우리가 한국사 시간에 한번 배웠을 미쓰야 협정은 이 다음해인 1925년에 맺어진다.
  • [7] 사실 일본 요시자와 공사가 장작림에게 매국적 협약을 승인한다면 북벌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제의하지만 장작림은 일언지하에 거부하는데, 더이상 일본의 요구를 듣는 것은 설령 북벌군을 격퇴해도 결국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에 불과했고 이미 장제스에게 굴복하는 댓가로 동3성의 통치만은 인정받기로 밀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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