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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

last modified: 2015-04-10 14:51:16 by Contributors

張獻忠
(1606~1647)

Contents

1. 개요
1.1. 엽기적 살인마라는 누명을 쓰다
1.2. 오명을 벗기다
1.3. 영향

1. 개요

중국 말기의 민란 지도자로 이자성의 세력과 쌍벽을 이뤘다. 1644년 쓰촨(사천)을 근거지로 대서(大西)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지만 1646년 청의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중국 역사상 엽기적인 살인마로 기록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모두 나라의 입장에 쓰여있기 때문에 엽기적인 살인마라는 것은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약 400년간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에 대해 예전에 묘사된 것을 보면 살인은 밥벅고 대변누는 것과 같은 일상이며 전쟁이나 당쟁, 혹은 불가피한 정치적인 살인이 아닌 오로지 살인을 즐기기 위한 살인마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

1.1. 엽기적 살인마라는 누명을 쓰다

장헌충은 역사의 평가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야사가 아니라 정사를 비롯한 서책들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명나라 역사를 기록한 <명사 장헌충 전>, 심순위의 <촉난서략>, 구약직의 <촉란>, 팽군사의 <촉벽>, 양산송의 <고야호천록> 등은 한결같이 그의 변태적인 살인행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천에 사람이 없어서 호남, 호북, 광동, 광서 사람들을 이주시켜 사천 땅을 채웠다"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장헌충이 사천 사람의 씨를 말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이 역사책의 기록을 보면 과연 모골이 송연해질 만 하다.

  1. 초살 - 대서국의 황제가 된 장헌충은 이자성이 청나라에 의해 쫓겨나자 이제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사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자 했다. 그는 병사들을 사방으로 보내 보이는대로 죽이게 하고 수족 2백개를 가져오면 파총(하위장교)를 제수했다. 어떤 병사는 단 하루만에 수백명을 죽여 단숨에 병졸에서 도독(대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6만명을 넘는다. 선비,승려,도사,의사 30만명을 죽였다.

  2. 천살 - 대서국의 관리는 처음에 9백명이던 것이 장헌충이 죽을 때 25명 밖에 남지 않았다. 조회를 할 때 사나운 개를 풀어 개가 냄새를 맡은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끌어내 죽였다.

  3. 사천 지역에 과거를 실시해 모인 유생들을 문에다 4척(1미터24센티)의 줄을 걸쳐 그 줄에 걸리는 자는 모조리 죽이니 멋모르고 과거장에 온 어린 아이 2명을 빼고 모두 죽였다. 한번은 과거에 장원을 한 사람과 술자리를 했는데 뛰어난 용모와 기상, 학식을 보고 반한 나머지 '그대같은 사람들은 우리하고 어떻게 다른지 보고 싶다'며 배를 갈라 들여다 보았다.

  4. 취수환연 - 친구를 너무도 좋아한 장헌충은 친구가 찾아오면 밤새 술을 마시며 놀고는 다음날 금은보화를 잔뜩 주어 보냈다. 그리고 미리 부하를 매복시켜 친구를 죽이고 목만 보관하였는데 나중에 전쟁터에서 친구들의 목을 죽 늘어놓고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마셨다.

  5. 장헌충은 술에 취해있으면 온순하지만 술에서 깨면 하루라도 눈앞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지 않으면 기분이 언짢아 졌다. 하루는 '이제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단 말인가'라고 절규하고 부인,애첩들,자식까지 모조리 죽였다.

  6. 군대를 귀찮게 여겨 5백명만 남기고 다 죽이고자 하여 밀고를 하게 해서 조그마한 잘못만 있으면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위군 75만, 영병 23만명이 죽었다.

  7. 하루는 여자의 전족을 잘라 산을 만들어 놓고 가장 총애하는 후궁을 데리고 갔는데 산의 꼭대기를 장식할 예쁜 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데리고간 후궁의 발을 잘라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8. 하루는 성도성 주민을 다 죽이겠다고 생각하고는 적이 처들어왔다고 혼란상황을 조성해 성문을 빠져나가는 사람을 죽이니 40만명이 죽었다. 성도에는 20호만 있었고 밥짓는 연기가 올라가지 않았다.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대낮에도 시내를 돌아다녔다.

  9. 청군이 쳐들어오자 방어전을 해야 하지만 이미 아까 언급한 막장상황때문에 군대와 장비,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군은 공성전을 위해 명나라에서 제조한 막대한 수의 화포를 장비한 상태였으므로 장기간 농성도 어려웠다. 그러자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포탄을 빗나가게 할 저주를 한답시고 성 내 여자들을 죽인 후 시체를 발가벗겨서 성벽에 단체로 걸어놓기 였다. 당연히 이런 행위는 전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시체썩는 냄새로 인해 방어군이 성벽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므로 오히려 성 함락이 빨라졌다.

실제로 이러한 말들은 지금까지 모두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장헌충에게는 오랜 동안 희대의 살인마라는 오명이 씌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외에도 장헌충이 사람을 죽이고 글을 지어 새겼다는 비석, 일명 '칠살비'에 대한 설화도 있는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生萬物以養人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人無一德以報天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殺殺殺殺殺殺殺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살살 좀 하지 그랬어

1.2. 오명을 벗기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중국 역사학계에서 장헌충에 대한 이러한 오명을 벗겼다고 한다.

우선 역사서에 기록된 글들이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도 당시 실정과 맞지 않을 뿐더러 (일부에서는 6억을 죽였다고 되어 있기도 하다) 더더군다나 농민 반란세력을 폄훼하기 위한 청조정, 농민 반란군에 가족을 잃은 학자,관리들의 기록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1. 장헌충의 모토는 바로 '탐관은 죽일 뿐, 순민(順民)은 건드리지 않는다' 였다고 한다. 장헌충은 황족,귀족,호족 세력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는 중경,상양,성도를 함락하면서 양왕 주익명, 촉왕 주지주를 비롯한 황족들은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성도를 점령한 후에는 사천의 호족들을 소집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렸다고 한다. 호족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등 어려웠던 과거의 원혼이 살아있었으리라.

2. 하지만 그는 백성들에게는 매우 관대했다. 대서국을 세운 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다. 특히 3년 동안 전량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사천을 근거로 힘을 키우기 위해 주력했다. 관청이나 지방호족들이 빼앗은 땅은 모두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장헌충이 죽자 사천의 주민들은 장헌충의 소상을 세운다. 청나라 조정이 이를 무너뜨리자 주민들은 계속해서 다시 세웠다. 21개 주현이 스스로 장헌충에게 귀순했다.

3. 장헌충은 인재를 중시했다. 2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를 계속해서 실시했고, 학당을 건립해 자주 시찰했다. 과거 합격자들은 주현의 책임자나 보좌진으로 썼다. 명나라 관리라 해도 탐관은 죽이되 순관이나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중용했다.

4. 장헌충이 죽자 그의 군대는 사천 주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16년 동안이나 청나라와 싸웠다. 역사책대로 거의 백만가까운 군대를 죽였다거나 사천 주민들을 도륙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 추가 자료 : #

또한 위의 '칠살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실제로 사천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문제의 세번째 줄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鬼神明明 自思自量 (산타 할아버지신령은 다 알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보고 반성 좀 해라)

1.3. 영향

학살을 장헌충이 주도했건, 청군의 학살이 일어났건, 사천성이 입은 인적 피해는 막심했다. 사천성의 인구는 거의 궤멸당하다 시피 하였고, 청나라는 황무지가 된 사천에 북경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대신 북경에는 청나라의 팔기군과 그 자제가 입주하였다.) 이 때문에 사천 방언은 관화와 큰 차이가 없다. 일설에는 이 무렵의 학살로 고대 사천인은 멸족했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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