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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

Contents

1. 고대 형벌 중 하나
1.1. 상세
1.2. 유사품과의 차이
1.3. 위력
1.4. 여담
2. 중국 후한의 문학가, 발명가
3. 후한오두미도의 교주
4. 수나라의 인물

1. 고대 형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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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청나라

오형(五刑), 즉 ---- 중 두 번째로,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십자 형틀에 묶어놓은 후에 나무로 만든 곤장으로 볼기를 냅다 때리는 형벌. 스팽킹...따위완 수준이 다르다. 스팽킹 중에도 비슷한게 있긴 있다. 패들이라고 하는 널찍한 나무판을 이용하는 것으로 패들링(Paddling)이라고 부른다. 노를 젓는다는 뜻이 있으므로 스팽킹 사진이 보고 싶으면 세이프서치를 해제하고 검색하던지 Paddled라고 검색해야 된다.

1.1. 상세

삼국사기에 '장 일백대를 쳤다'는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유서깊은 형벌로, 중국에서 율령체제를 도입하면서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사용된 의 형법전인 '대명률'에 따르면 큰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죄의 무거움에 따라 60대부터 100대까지 5등급으로 나눠서 쳤다.

그리고 가장 비슷한 형벌인 태형이 비교적 작은 막대기로 10대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장형은 그 윗등급에 매도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당연히 1대의 위력이 천지차이다. 도형이나 유형에도 병과되어 본 형을 집행하기 전에 장형을 집행했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속전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오승포 (승은 베의 굵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5승이면 중등품의 베였다)를 각각 18필, 21필, 24필, 27필, 30필을 냈으며, 점차 속전의 양이 줄어들어 영조 때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면포 1필 7자, 1필 14자, 1필 21자, 1필 28자, 2필 또는 돈으로 4냥 2전, 4냥 9전, 5냥 6전, 6냥 3전, 7냥을 내게 하여 그 양을 줄였다.

또한 조선시대에서 태형은 최대 120대까지 때리게 되는데 절대로 한꺼번에 다 때리는 게 아니라 한 번에 30대까지만 때리고 이틀 간격으로 나눠서 때린다. 왜냐하면 30대만 맞아도 죽어나가기 때문에...

이렇게 데미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때리다가 몇 대 때렸는지 까먹어서 더 많이 때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 대요!" "두 대요!" 외치면서 때리거나, 활줄에 산가지를 매달아 한 대 때릴 때마다 옆에서 하나씩 셈한다거나.

1.2. 유사품과의 차이

참고로 곤(棍)과 장(杖)은 전혀 다른 형벌인데 그것을 굳이 붙여서 곤장이라 하는 것은 고증의 오류다. 장은 그 크기도 곤에 비할 바가 없이 작으므로 장을 친다는 것은 몇 대 맞고 정신차리고 새사람이 되어라. 라는 의미지만 곤을 친다는 것은 너 오늘 빠따 쳐맞고 죽어봐라!!!가 된다. 실제로 곤의 위력은 사람의 뼈를 조각나게 해서 죽게 할 수준으로 매우 강한 몽둥이다.

그래서 있다면 장형과 곤장은 다른 형벌이다. 그렇지만 곤장을 치면 이 항목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지 장은 태와 형태는 같으나 그보다 좀 더 굵은 형태의 둥근 몽둥이라면 곤장은 배를 저을 때 사용하는 노처럼 넙대대한 형태의 형구다. 곤에는 다섯종류가 있는데 작은 것을 소곤이라고 하며 그 다음 중(中)곤, 대곤, 중(重)곤, 가장 큰 것을 치도곤이라고 하며 치도곤의 경우 길이 5자 7치(173cm), 너비 5치 3푼(16cm), 두께 4푼으로 웬만한 성인 남성만한 큰 물건이다. 사극에서 몽둥이가 곤장 형태로 등장하는 건 고증오류. 곤장이 장형보다도 훨씬 고통이 심했으며 그래서 도적을 토벌할 때나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 등 중한 처벌이 필요한 곳에서만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게 하였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이걸 안 지켜서 문제였지만. 지방수령이 똘끼로 가득찬 인물이면 아무 때에나 치도곤으로 때렸다고 한다. 위키러들은 꼭 알아놓자. 곤장은 어디 선생님 빠따와는 수준이 다르다.

그리고 곤장하고 비슷하고 생겼는데 규격은 곤장보다 조금 작은 신장이라는 물건이 있었는데 이건 형벌용이 아니라 고문용이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 처소의 나인들이 작서 사건 때문에 체포되어, 처음에 좋게 물어봤을 때 자백을 안 해서 바로 형틀에 묶여 곤장으로 정해진 대수 없이 무한정 얻어 맞아 엉덩이가 완전히 터지고 찢어져서 치마가 피로 적셔져 물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용된 게 신장이다. 당연히 위력은 장보다 강하다. 사극에서 넙적대한 형구로 엉덩이를 맞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게 된 것은 이것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태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장을 쓰고, 장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신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니... 근데 신장은 보통 중국에선 볼기를 치는게 맞으나 조선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신장으로 정강이를 치게 되어 있었다. 형벌용이 아니라 심문중에 집행하는 고문이었기에 죄인을 엎어놓은 상태에서는 증언을 듣기 힘들었기에 죄인을 의자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진술과 고문을 함께 시행하는데 편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1차에 30대까지만 치고 한 번 고문을 하면 3일 내에 다시 시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역모 사건의 경우 무한정 집행이 가능했다. 다만 고문을 할때에는 심문 담당 관원이 멋대로 하지 못하고 항상 왕에게 보고해서 허락받아야 했다. 이런 정강이 치기는 본래 볼기를 치게 되어 있는 태형과 장형을 대체하는 형벌로도 사용되어 여성 같이 볼기를 치기 곤란한 이들에게 집행하기도 해 춘향전의 춘향도 이런식으로 처벌당하는것으로 묘사되었다. 타격을 당하는 곳이 소위 말하는 조인트이니 아픈 정도를 생각하면 차라리 체면 다 내팽개치고 볼기를 맞는게 나을듯 매를 칠때는 사극에서 묘사되는것과는 달리 타격 부위를 벗겨 놓고 치는게 원칙이라 신장을 칠때는 종아리를 걷어놓고 치게 되어 있었는데 볼기를 칠때와는 달리 여성의 종아리를 걷어놓고 때리는데 대해서는 별다른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1.3. 위력

초반에는 을 쳤다고 하는데,등짝을 보자 이것을 맞은 사람이 얼마 안 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등의 경우에는 신체의 중요기관이 근처에 있는데다가 척추가 지나가니 매맞다가 죽거나 반신불수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엉덩이를 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바꿔도 위력이 막강하다. 가상 매체에서야 개나 소나 맞는 가장 흔한 형벌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아픔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람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사… 살려 으악!! 주…줍쇼 끄악!!"라면서 하나같이 GG를 쳤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매가 심하게 아프고, 가장 낮은 60대만 맞아도 초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으며 곤장 100대 수준까지 되면 인생퇴갤까지 이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형같은 것을 집행하지 못할 때, 대신 합법적으로 사람을 저세상에 보내버릴 필요가 있을 경우 가장 빠르고 확실한 형벌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말엔 정몽주정도전 등 역성 혁명파를 숙청하기 위해, 유배된 정도전 등을 장형으로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태종)의 정몽주 살해로 실패하고, 훗날 조선이 건국된 뒤 정도전이 똑같은 방법으로 정몽주 일파의 인물들을 죽여 보복하였다.

곤장을 맞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쇼크사에 가깝고, 곤장을 맞은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는 대부분 근육 파괴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곤장을 맞아 광범위하게 근육세포가 파괴되면서 세포 내의 미오글로빈이 콩팥에 과다하게 축적되어 급성 신부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사고 등으로 무거운 물체에 깔린 사람의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다. 급성 신부전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곤장을 맞은 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곤장을 맞다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였기에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었을 때 보통 '장독(杖毒)이 올라 죽었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장독을 치료할 요법으로 푸세식 변소에서 삭히고 삭힌 똥물을 생으로 먹인다고 한다. 독은 독으로 해소시켜야 한다나?

1.4. 여담

장형이 직접 맞기에는 너무 엄청난 위력을 가지다보니 조선시대에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흥보가흥부 또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가 이마저도 일감을 빼앗겨 실패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다. 보통 높으신 분들이 곤장을 맞게 되면 품삯을 받아서 대신 매를 맞고, 그런만큼 번 돈으로 고기를 사먹으며 몸을 추스린 후 회복되면 다시 매를 맞는 걸 반복...

야사에 따르면 이런 개인사업을 하면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신나게 맞고 돈을 많이 번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힘들어서 그만 해야겠어"라고 하는 걸 아내가 "한번만 더 맞고 와요"라고 졸라댔다. 결국 남편은 관아로 가서 곤장을 한 번 더 맞다가 그대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하며, 그 후 아내는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다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장영실세종대왕이 탈 가마 제작을 감독했다가 그게 부서져서 책임을 지고 장형 80대에 처해진 후 파면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은 알 수 없는 인생의 뒤안길로…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 장형 100대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사극에서 이를 연기할 때는 그나마 살살 때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아프기 때문에 맞는 부분에 책같은 걸 덧대서 충격을 줄인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아프다.

또한 사극에서는 수위 문제상 보통 옷을 입히고 그 위에 때리지만 실제로는 엉덩이 맨살이 보이게 벗긴 다음 내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속옷 한 장 빼고 모두 벗긴후에 물을 끼얹고 쳤다. 그래도 다 비친다 이를 가르켜 물볼기라 한다.[1] 말이 좋아 속옷이지 T 팬티에 가까웠기 때문에 까고 맞는것과 다를게 없었다. 매체에서 고증이 제대로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역모 등 정치적인 문제나 불륜을 저지른 여성의 경우 얄짤없이 맨엉덩이를 내놓고 맞아야 했다.

민속촌이나 관아 건물등의 문화재에는 방문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형틀과 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형틀이 십자가와 비슷해 보여서 그런지...
콘장은 이러케 해야 하는 컵네카? (...) 이보시오! 이보시오! 포졸양반!!!
가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이 형틀에 엎드리지 않고 바로 누워서 매를 맞는 시늉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때리는 시늉만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선 끔찍(?)해 보일 수 밖에 없다. 엎드릴 때 엉덩이를 때릴 곤장이 바로 누웠을 때 어디를 때릴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곤장의 받침을 지우면?

2. 중국 후한의 문학가, 발명가

張衡
(78 ~ 139)

하남 남양의 서악 출신으로 자는 평자(平子).

혼천의로 유명해 흔히 발명가로만 알려진 천문학자 겸 문학가로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집안이 몰락해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학교를 다녔으며, 열심히 배우면서 재능도 뛰어나 성적이 훌륭했고 16, 7세에 낙양에서 유학하면서 학문을 닦다가 30세를 넘어서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아 낭중이 되었고 대표작으로 반고의 양도부를 모방한 양경부로 불리는 동경부, 서경부 등을 남겼다.

태사령이 되면서 영헌 등을 저술하거나 수력으로 움직이는 혼천의, 지진을 측정하는 지동의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에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던 시기로 장형은 질시를 받아 수도에서 쫓겨나 하간상이 되었다.

138년에 낙양으로 돌아와 상서를 역임하다가 139년에 병으로 사망한다.

3. 후한오두미도의 교주

張衡

생몰년도 미상[2]

후한 말의 인물.

패국 풍인 사람으로 자는 영진(靈眞). 오두미도의 제2대 교주.

아버지 장릉이 죽자 이를 계승해 도술을 받들어 행했으며, 장형은 양평화에서 대낮에 승천했다. 이후 장로가 계승했고 사후에는 오두미도의 삼장이라 불린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장로가 자신을 계사(系師)라 자칭할 때 장로의 조부인 장릉을 천사(天師)로 칭해진 것과 동시에 장형도 사사(嗣師)라 칭해졌다.

경정문장구명의 제8 신선 조목에 따르면 장형은 북방귀제로 봉해졌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노식이 176년 9월에 유비, 공손찬을 불러놓고 천하의 일에 대해 근심할 때 한중 지방에는 장릉, 장형 부자로 이어지는 오두미도라는 것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식으로 언급되며, 장로에 대해 소개할 때 장형에 대해서는 장릉이 죽은 뒤에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백성들 중에 자신의 도를 배우려는 이가 있으면 쌀 닷말을 거두고 받아들여 세상 사람들이 그의 무리를 쌀도둑이라 불렀다고 했다.

4. 수나라의 인물

張衡
(? ~ 612)

수나라의 인물. 자는 건평(建平).

하내군 사람으로 양주 총관의 사마를 지내다가 600년 3월에 행군총관이 되어 보병, 기병 5만을 이끌고 이영림의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 수양제가 태자 시절에 그를 가까이 하고 일을 맡기자 수양제를 위해 적통을 빼앗는 책략을 꾀했으며, 602년에 태자좌서자를 지냈다.

604년에는 수문제가 병이 들자 장형은 침전에서 병시중을 들면서 후궁들을 모조리 내보내어 별실에 가도록 하면서 수문제를 눌러 죽였으며, 수양제 즉위 이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607년에 수양제가 공(장형)의 주택을 지날 것이니 짐을 위해 주인 노릇을 해달라고 하자 먼저 달려가서 하내에 도착해 소고기, 술 등을 준비했으며, 수양제는 장형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머물고 연회를 베풀었다.

장형이 음식을 다시 헌상했고 수양제는 공경들에게 하사해주도록 하는 것으로 생색을 냈으며, 이는 위사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610년에는 수양제의 명으로 분양궁을 만들기 위한 도면을 갖추어 이를 상주하게 했지만 장형은 백성들의 노역을 조금씩 억제하라고 줄여달라는 간언을 했는데, 이로 인해 수양제의 마음이 심히 편안하지 못했다.

장형은 헌사(형벌과 옥을 담당하는 관청)의 일을 맡는 사람으로서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했다고 해서 유림태수로 쫓겨났으며, 장형은 누번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수양제는 장형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은 것을 싫어했는데, 이로 인해 장형은 다시 유림으로 쫓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형은 강도궁을 짓는 일을 담독하게 되었으며, 장형은 양현감에게 설도형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양현감이 수양제에게 상주했다. 또한 왕세충이 장형이 궁궐을 짓는 도구를 줄이고 있다고 상주하면서 장형은 가둬졌다가 석방되면서 3월에 평민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수양제는 장형이 하는 행위를 엿보게 했는데, 612년에 장형의 첩이 장형이 원망하면서 조정의 정사를 비방했다고 하자 조서를 내려 자살하게 했다. 이로 인해 장형은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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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화 방자전에서 묘사된 적이 있다. 다만 입을것 다 입은 상태에서 물을 끼얹었기에 고증상으로는 오류이다.
  • [2] 도홍경의 진고 4권에는 몰년이 177년 2월 27일, 태평광기에는 몰년이 179년 1월 23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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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19 00: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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