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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last modified: 2015-03-21 17:04:17 by Contributors

Contents

1. 야구선수
2. 후한 말의 장수
3. 중화민국 시기의 군벌
4. 영화 감독
4.1. 작품 목록


1. 야구선수

2. 후한 말의 장수

張勳
(? ~ ?)

표기는 위의 인물과 동일. 군벌인 원술의 부하. 직책은 대장군... 이긴 한데 헌제가 직접 관직을 내린 후한의 대장군이 아니라 원술이 칭제를 한 이후 원술의 휘하에서 대장군이였다. 정확히는 후한의 대장군이 아닌 중의 대장군.

193년, 원술은 양주자사 진온을 죽이고 진우를 쫓아내어 양주로 거점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장훈은 이때 교유와 함께 대장군에 임명된 것으로 보이며, 197년에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였다.

손책이 잠시 원술의 부하로 있을 때 손책의 훌륭한 인품에 감명을 받아 나이가 어린 손책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황제를 참칭한 원술은 곧 장훈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후 장훈과 교유를 보내 서주의 여포를 공격하였으나, 진규의 이간책으로 우군인 한섬과 양봉의 배신하는바람에 퇴각하였다. 이때 교유는 여포에게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나 원술에게 돌아갔다.

같은 해 9월, 장훈은 진국(陳國) 정벌에 참여하여 진왕(陳王) 유총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몸소 침공에 나섰고, 원술은 교유와 이풍·양강·악취를 남겨두고 자신은 회남으로 달아났다. 교유 등은 조조의 군세와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고, 장훈만 살아남아 원술에게 돌아갔다.

199년 6월, 원술이 죽었다. 장훈은 손책에게 의탁하기 위해 장사 양홍과 함께 무리를 이끌었으나, 원술의 옛 부하인 여강태수 유훈의 공격을 받아 생포당하였다.

장훈.jpg
[JPG image (22.49 KB)]
삼국지 12 일러스트
삼국전투기에서는 이름 때문에 1번 항목의 장훈으로 등장했다(복장은 도에이 플라이어즈 유니폼). 원술 옆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부하. 원술의 휘하로는 기령이 주역인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1].
삼국지 시리즈에는 원술의 부장들과 비슷한 능력치를 가진 것으로 나온다. 즉, 안 좋다.

삼국지 3에서는 대장군이라는 것을 반영해서인지 장군은 될 수 있는 능력치를 갖고 있다. 육지69 수지70 무력70 지력65 정치54 매력73에 야망6 운6 냉정7 용맹9인데 명명만은 제일 높은 대장군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장군이 될 수 있다는 그거 하나만 의의를 둘 뿐 능력치 자체가 매우 구리다. 특히 육전지휘가 저러니 육지에서 공동작전도 안된다. 참고로 원술의 세력에서 장군이 되는건 원술 본인과 기령, 장훈. 이렇게 셋뿐이다. 그런데 장훈의 능력치는 장군만 될 수 있는 수준이므로 전투에는 완전히 쓸모가 없기 때문에 후방지역의 위임방지용 태수로밖에 쓸모가 없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2/71/46/42. 분전, 제사, 누선을 가지고 있다. 성능은 원술군 장수 치고는 괜찮은 정도.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2/67/41/40/42에 특기는 반목, 기염 2개 뿐.

진 연희무쌍에서도 원술 진영의 유일한 레귤러로 등장하였는데, 마찬가지로 원술의 휘하로는 기령이 주역인 것에 비하면 드문 사례.

3. 중화민국 시기의 군벌

우연하게도 1, 2, 3의 이름은 한자로 모두 '張勳'이다. 그리고 칭제 사태와 연결되었다는점도 나름 비슷하다. 신해혁명 이후까지 생존한 인물이기 때문에 보통 '장쉰'으로 불리며 생몰년은 1854~1923.

농민 출신으로 머슴살이를 하다가 1879년에 청군에 입대, 청불전쟁과 청일전쟁, 의화단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 때 위안스카이의 심복이 되어 청군의 수뇌부까지 등극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수비하다 혁명군에게 패배,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위안스카이가 총통에 취임하자 그는 자기 휘하의 부대이름을 무위전군(武衛前軍)이라고 개칭하고, 청나라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을 표방하였다.[2]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다 실패 한 후 사망하자 중화민국 정부 내에서는 내부분열이 일어났는데, 당시 총통이던 여원홍(리위안홍/黎元洪)은 장훈을 북경으로 불러들여 이를 중재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장훈은 자신의 3천 병력을 이용해 1917년 6월 30일 저녁 자금성에 들어가 성인이 된 푸이의 복위와 청조의 부활을 선포했다. 장훈은 스스로 의정대신과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 올라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청조 부활의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쑨원은 상하이에서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각 성의 국민당원에게 역도들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청조 부활에 반대한 총리 단기서 단기서(돤치루이/段祺瑞)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7월 3일 톈진에서 군대를 동원해 장훈의 군대를 격파하고 베이징에 입성, 푸이가 다시 퇴위하고[3] 장훈은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도피하면서 왕정복고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918년에 사면을 받았으나. 군직 복귀는 거절하였고 1923년 70세로 사망. 푸이는 그에게 '충무'란 시호를 내려주었고[4] 직접 조문하기도 하였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테니스 치다 난데없이 자금성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처리되지만 실상 배경은 장훈이 주도한 복벽운동의 후폭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에도 등장하는 푸이의 가정교사 레지날드 존스턴의 저서인 <자금성의 황혼>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4. 영화 감독

서울대 미대 출신. 김기덕 감독의 제자로 그의 회사에서 화는 영화다를 감독하며 데뷔하였다.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리랑에서 영화는 영화다 촬영을 기점으로 결별한 장 감독에 대해 '배신자'라고 강하게 디스했다. 영화가 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주목할만한 시선상'을 받아 화제가 되자, 이후 장 감독 본인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에 대해 밝히겠다고 했다.

2012년에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자 배신의 아이콘 장훈 감독도 재조명되어 신나게 까였다.

고지전의 흥행실패가 큰 타격이었는지 2011년 이후 극장에 걸린 영화가 없다...

4.1.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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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원래라면 기령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하지만 기령은 이전에 여포랑 싸울 때 작가가 그냥 죽여버렸다. 단 이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데, 정사에서 기령의 기록은 여포와의 관계 부분에서 사라져서 원술이 망하는 시점에서(도 등장하는 장훈과 달리) 아무런 기록도 없다. 정사의 기록이나 연의를 보아도 원술이 죽는 시점에서 그 마지막을 수습한 것은 장훈(과 양홍)이 맞다.
  • [2] 청에 대한 충성의 증거로 장훈 휘하의 병사들은 만주식 변발을 유지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장훈 부대를 '변자군(辫子軍)'이라 불렀다.
  • [3] 일본 때문에 두번째 퇴위를 당한 푸이는 아이러니하게도 10여 년 후 일본의 지원을 업고 만주국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 [4] 제갈량이나 이순신의 시호에 적용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무관급에서는 거의 최상급 수준의 시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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