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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last modified: 2015-02-28 04:39:59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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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동(영동/영서) 해서 관서 관북

全羅道 / Jeolla Province

Jeolla-Do(honam)_map.PNG
[PNG 그림 (2.2 KB)]



목차

1. 개요
2. 행정구역으로서의 전라도

1. 개요

고려 시대부터 한반도 서남부의 행정구역으로 통칭되어 온 지명. 전라(全羅) 또는 호남(湖南)이라고도 한다.

조선 8도상 전라도를 현재의 행정구역에 대응시켜 보면 전라남도·전라북도·광주광역시·제주특별자치도가 해당되고, 또 1895년 이전의 구획을 기준으로 하면 거기에 충청남도 금산군[2]까지 해당된다. 현대에는 '전라도'라는 말이 행정구역적 개념보다는 조선 8도에 따른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지리개념에 가까운데, 이런 의미로 쓸 때는 대개 제주특별자치도와 금산군을 제외하는 경우가 99%이다. 즉 현행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전라북도·광주광역시만 전라도 또는 호남이라고 부른다는 것.

어원은 고려 시대 성종이 설치한 12목 중 전주목과 나주목에서 유래하며 현재의 전라도 형태로 묶은 것은 고려시대 현종 때의 일이다. 참고로 당시 지정된 도(道) 단위 행정명 중 현재까지 명칭이 유지중인 지역은 이 곳과 경상도 단 둘 뿐이다. 다만 일시적으로 영조 시대 반역으로 전광도(全光道)라는 명칭으로 바뀐 적은 있었다.#[3]

고대에는 이 지방에 군장국가 단계이던 마한의 여러 소국들이 난립했으나, 북방의 목지국[4]의 강력한 영향력에 눌려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국가는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결국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온 백제에 의해 모두 점령당하여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 위에 올랐다.

통일신라 시대에 9주 5소경 체제에서는 지금의 전북에 해당하는 '전주(중심은 완산주)'와 전남에 해당하는 '무주(무진주)'[5]로 남북이 분리되어 있었다.[6] 이후 견훤후백제의 영토를 거쳐 그 때만은 수도권 고려 성종 때까지도 여전히 중국의 지명을 딴 남도양도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현종이 고려를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전라도로 퓨전 통합시켜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범위가 조금씩 바뀌었는데, 탐라라고 불리운 제주도의 경우 고려 시대까지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고 간섭기엔 라총관부로 별도 유지되었으며 그 이전의 역사를 보아도 딱히 전라도와 연관성은 없지만, 조선 태종 무렵부터 몇백년간은 전라도와 묶이게 되었다. 이후 제주도는 해방 직후인 1946년 다시 제주도(道)로 독립한다.

조선 말 대한제국 초기 고종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전라북도전라남도로 분리되었고 1963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는 전라북도 금산군 전체와 현 논산시 남부 지역 일부가 충청남도 금산군 및 논산군으로 편입되어 충청도로 넘어갔다.[7]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에서 보듯, 전남도청은 원래 광주에 있었다. 그러나 1986년광주광역시가 독립하여 현재의 1광역시 2도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남도청은 2005년 무안군에 이전했다.)

여담으로 유명한 바둑기사가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정웅창(전남 보성), 조남철(전북 부안), 조훈현(전남 목포), 이세돌(전남 신안), 김인(전남 강진), 이창호(전북 전주) 등..

2. 행정구역으로서의 전라도

현 전라도는 전라남도전라북도, 광주광역시를 아울러 호남 혹은 호남권으로 표현한다. 이 말의 어원에는 한반도 최초의 인공 저수지라 불리는 김제 벽골제의 남쪽이라는 설,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湖江)의 남쪽이라는 설, 심지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중국정호 남쪽 지방과 같이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가 주업인 유사한 곳'이라 하여 전라도 지방을 호남 지방이라 칭했다는 설 등이 있다. 지리 행정적 역사는 전라도를 참고하자.

태조 왕건훈요 10조에서 언급한 '차현()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이 오랫동안 이 지역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이를 두고 지역감정과 결부시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나, 실제로는 후백제에서 끝까지 저항한 잔존 세력만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 후백제의 주요 세력이자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가 투항한 후 백제 멸망 후에 고려에서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또한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한 신숭겸, 6대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한 지몽전라도 출신이다. 애초에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이란 지역이 어디인지 상당히 애매하다. 통일 과정에서 있던 청주, 공주의 반란, 통일 후 있었던 천안 부근의 목천 오성 반란 등을 근거로 차현 이남에서 금강 북쪽에 이르는 지역(대략 현재의 충청남도 중부 지역)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간혹 한 글자가 같은 기호(畿湖) 혹은 호서(湖西) 지방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기호 지방은 경기도충청도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며, 조선 중기 경기도와 충청도의 유림을 중심으로 했던 '기호 학파'에 대해서도 호남은 간접적 영향을 받은 입장일 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호남이라는 표현이 언급된 초기 문헌은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이 저술한 지리서 리지다.

이와 관련된 떡밥으로, 택리지는 이 지역의 인심에 대해 "오로지 세도와 재리(財利)에 따른다.(專趨勢利)"고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충청도(기호) 지방 이야기다. (참고로 이중환이 바로 호서 출신이다.) 절대 호남 사람들의 인심에 대한 문구가 아니다. 이중환은 호남만은 실제로 답사하지 않았으므로 애초에 호남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도 않다.[8] 다만 서문 격에 각 지방 인심을 평하면서 "전라도는 오직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에 쉽게 움직인다."라고 기술하였는데, 택리지가 경상도평안도를 빼고는 전반적으로 인심을 후하게 서술한 편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중환은 충청 출신이다.) 그리고 택리지의 인물평은 애초에 보편화 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개인의 성향이 크게 녹아들어있다.

조선시대엔 경상도, 충청도와 함께 '하삼도(下三道)', '삼남(三南)'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척제(瘠齊) 이서구(李書九, 1754~1825)[9]가 지었다는 단가 "호남가"를 보면, 조선 시대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이 나와 있다.[10] 아래 시를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고을 이름을 의역하여 나름대로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咸平(함평) 天地(천지) 늙은 몸이 光州(광주) 故鄕(고향)을 보랴 하고,
濟州(제주)[11] 漁船(어선) 빌려타고 海南(해남)으로 건너갈 제,
興陽(흥양)에 돋은 해는 寶城(보성)에 비쳐 있고,
高山(고산)에 아침 안개 靈巖(영암)을 둘러 있다.

泰仁(태인)하신 우리 聖君(성군) 藝樂(예악)을 長興(장흥)하니,
三台六卿(삼태육경)은 順天心(순천심)이요, 方伯守令(방백수령)은 鎭安民(진안민)이라.

高敞城(고창성) 높이 앉아 羅州(나주) 風景(풍경)을 바라보니,
萬丈(만장) 雲峰(운봉) 높이 솟아 層層(층층)한 益山(익산)이요,
百里(백리) 潭陽(담양)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萬頃(만경)인데,
龍潭(용담)에 맑은 물은 이 아니 龍安處(용안처)[12]이며,
陵州(능주)의 붉은 꽃은 골골마다 錦山(금산)[13]이라.

南原(남원)에 봄이 들어 各色花草(각색화초) 茂長(무장)하니,
나무 나무 任實(임실)이요, 가지 가지 玉果(옥과)로다.

風俗(풍속)은 和順(화순)이요, 人心(인심)은 咸悅(함열)인데,
異草(이초)는 茂朱(무주)하고, 瑞氣(서기)는 靈光(영광)이라.

昌平(창평)한 좋은 세상 務安(무안)을 일삼으니,
士農工商(사농공상) 樂安(낙안)이요, 父子兄弟(부자형제) 同福(동복)이라.

康津(강진)의 商賈船(상가선)은 珍島(진도)로 건너갈 제,
金溝(금구)의 금을 일어 싸 놓으니 金堤(김제)로다.

農事(농사)하는 沃溝百姓(옥구백성) 臨陂城(임피성)을 둘러 있고,
井邑(정읍)의 井田(정전)법은 納稅人心(납세인심) 淳昌(순창)하고,
古阜(고부) 春陽(춘양)[14] 楊柳色(양류색)은 光陽春風(광양춘풍) 새로워라.

谷城(곡성)에 묻힌 선비 求禮(구례)도 하거니와,
興德(흥덕)하기를 나날이 時習(시습)하니, 扶安齊家(부안제가) 이 아닌가.

우리 湖南(호남) 좋은 法聖(법성) 全州百姓(전주백성)을 거느리고[15],
長城(장성)을 널리 싸고 長水(장수)로 돌렸는데,
礪山(여산)돌 칼을 갈아 南平樓(남평루)에 꽂아 놓으니,
어느 外方之國(외방지국)이 輕擧(경거)할 뜻을 둘까 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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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지도는 조선 8도를 기준으로 한 전라도를 표시했기 때문에 현재의 제주특별자치도까지 포함해서 색칠하였다. 하지만 현대에 통용되는 전라도 또는 호남은 제주특별자치도를 배제하는 게 일반적이다.
  • [2] 1895년까지 전라도 소속이었다.
  • [3] 조선시대에 특정 고을에서 역모가 있으면 그 고을의 등급을 낮추었는데, 도명의 유래가 된 고을에서 반역이 일어나면 도의 명칭에서 빼버렸다. 강원도는 원주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춘천을 따서 강춘도로 바뀐 적이 있으며, 충청도는 광해군 때 청주 충주순으로 나란히(..)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충홍도에서 공홍도로 바뀌었다 나중에 인조반정 후 충청도로 복귀한 일이 있다
  • [4] 현재의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천안시, 전라북도 익산시 근방으로 추정된다.
  • [5] 전북 무주군이 아닌 지금의 광주광역시이다. 문무왕 때 백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무진주라고 했다가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으로 고친 것. 흔히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하고 완산주를 도읍 삼았다"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틀린 거지만 삼국사기 기록에도 무진주라고 나오는 걸 보면 이명으로 즐겨 썼거나 회복 시킨 듯.
  • [6] 한편 섬진강 일대 일부는 진주를 중심으로 한 (청주)에 속했다. 옛 가야의 영역.
  • [7] 뭐 충청지방은 1914년 평택을 떼어줬지만 말이다.
  • [8] 이중환이 평생 호남 땅을 밟지 않은 이유로서, 그가 병조정랑에 재직하던 시기 김일경을 위시한 광산 김씨 일족의 무고를 받고 목호룡 사건에 연루되어 온갖 형을 받았으며, 삭탈관직은 물론 유배생활을 겪었던 일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데 이중환은 사실 신임사옥에서 이중 크리티컬을 당한 쪽인지라 소론파인 김일경에게 원한이 있다고 보긴 좀 그렇다.
  • [9] 1793(정조 17)년과 1820(순조 20)년 두 차례 전라 감사를 역임한 바 있는데, 전라도 곳곳에는 이서구와 관련된 민간 전승이 다수 남아 있다.
  • [10] 물론 여기에는 진산(珍山), 돌산(突山) 등 누락된 고을도 있으며, 현재는 전라도에서 분리된 제주도충청남도로 편입된 금산군도 포함되어 있다.
  • [11] 해방 이후 1946년 제주도(현 제주특별자치도)로 분리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 [12] 문자 그대로 '이 편안히 쉬는 곳'으로도 읽힐 수 있다.
  • [13] 1963년 충청남도로 편입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에는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
  • [14] 능주목(현 화순군 일부)의 석전면, 개천면이 단양면, 부춘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춘양면으로 통합되었다. 한줄에 세 고을이 들어가는 유일한 경우인데, 당시 군이나 현도 아니었을 뿐더러(춘양면을 이루는 면들은 과거 능주목에 속해 있던 면들이었다.), 지명이 아닌 단순히 '봄볕'을 의미하는 가능성도 있어 볼드체를 뺐다.
  • [15] 여기에서는 '모든 고을의 백성을 거느린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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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2-28 04: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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