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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의 변

last modified: 2015-01-24 12:42:28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전개
2.1. 발단
2.2. 전개
2.3. 절정
3. 여담
4. 휘종과 흠종이 정말 금나라에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았나?

1. 개요

1126년 북송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이 함락하고 휘종흠종포로로 잡힌 사건. 당시 북송의 연호가 정강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 왕조의 2대 굴욕사건으로 분류하며 영가의 난을 포함하면 3대 굴욕사건으로 친다.

2. 전개

2.1. 발단

1115년 여진족완안아골타가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 당시 국가 막장 테크를 탔던 거란의 요나라를 쥐어패기 시작하자,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에게 바치던 공물을 금에게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했다. 물론 금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이를 수락했다.

당시 휘종은 여진을 써 거란을 제압하고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이이제이책을 생각했고, 애초에 문치위주의 통치방침과 방랍의 난을 진압하면서 너무 많은 군사력을 날려먹었던 까닭에 협공을 제의하며 금의 군사력에 편승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실력적인 면에서도 송군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어 송이 담당한 구역의 전선에서도 전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습에 후퇴하는 참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북송의 태도에 열이 뻗친 금에서 사신을 보내 노발대발하자 공물을 더 바치는 조건을 제시하여 일단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1125년 요는 금과 북송의 협공으로 박살났다.

2.2. 전개

문제는 요가 멸망하자 북송이 입을 싹 닦아버렸다. 바친다는 공물은 바치지도 않고 아예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을 폈다. 이를 응징하러 금은 군대를 출동시켰으며 북송의 수도 변경(개봉)을 둘러쌌다. 이 때 도교에 심취한 휘종이 곽경이라는 사기꾼 도사에게 낚여 육갑신병을 만들어 막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개발살... 그리고 이 곽경은 수호지의 후속작 후수호지에 등장해 양산박 산적들에게 죽는다. 이렇게 정신승리해봐야 현실은 시궁창..

상황이 이렇자 원인제공자였던 휘종은 잽싸게 장남 흠종에게 양위하고 "아들, 똑똑한 네가 잘 해결하렴"이라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얼떨결에 제위를 물려받자 흠종은 영토 할양,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맺어 일단 금나라는 철수. 흠종은 이러한 사태의 주범들인 간신들(동관, 양사성, 채경, 채유 등)을 유배, 처형한다.

2.3. 절정

그러나 현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입만 산 주전파 대신들의 파토 및 이에 더해서 흠종이 주전론에 OK!를 불러버렸다. 끝내 열이 오를대로 오른 금은 "야 이 더러운 송나라놈들아!"라면서 다시 군대를 보내 변경을 포위했으며 1126년 11월 함락시켰다. 그리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북송의 황족 및 관료 3천명을 포로로, 또 대량의 서적, 보화, 재물, 보물, 그림 등을 가지고 갔다.

다행히 수도 변경에 없었던 흠종의 동생이 임안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나라가 공중분해되는 꼴을 겪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나왔다라 본다.

3. 여담

한편 금태종은 붙잡아온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덕을 망친 자),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덕을 따블로 망쳤다)란 작위를 내려 조롱했다. 공과 후는 작위로 보자면 왕보다도 아래이니, 황제의 지위도 부정하는 것 또는 강등한 것이다. 황제라는 작자가 판단 하나 그르쳐서 받는 엄청난 굴욕.(흠종의 경우는 억울한 데가 있지만) 또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하여 붙잡힌 인원들은 금의 영토에서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국성, 즉 현재의 회령 중 회령청년역 근방에 단체로 모여서 귀양살이를 했다. 오국성에서 남송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 구사일생으로 일부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금나라 땅에서 생을 마쳤다. 여담으로 탈출한 사람 가운데 남송의 재상에 오른 진회악명으로유명하다.

뒷날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고 아버지 휘종의 유해 등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환했다. 현재 회령 고령진역 인근 주요 지역에 황제총이 두 곳이나 있는 등 상당수의 무덤이 남아있는데, 모두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한 황족들의 무덤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황제총 두 곳은 오국성에서 죽은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다. 휘종은 원래 여기 묻혔다가 강화 뒤에 고종에게 유해가 돌아와 남송의 영우릉에 묻혔다. 그러나 채 200년도 안 지나 나라 때 영우릉이 라마승이자 강남석교총통 련진가도굴했으니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흠종의 무덤은 정확히는 회령은 아니고, 두만강 건너 만주 지역에 있다.

흠종은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계승원칙으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있다는 까닭에 아예 송환조차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흠종같이 불행한 사례가 대다수였고, 선택받은 소수만 유해의 일부가 귀향에 성공했으니 매우 안습하다. 특히 황족 여자들이면 거의 대부분 금나라 황제, 황족, 고관대작, 장군들의 첩을 했다. 거기다 그 남편이 죽으면 다른 사람(남편의 형제, 친척 등)에게 가기도 했으며, 더 최악이면 세의원(기방)으로 넘어가 기생이나 창녀도 했다. 고종의 다섯 딸 모두 금나라에 끌려가다가 죽은 때가 아니면 모두 세의원에 갔다.

사조영웅전에서 구처기곽정양강의 이름을 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
양강은 치욕이라 생각 안하는건 안자랑

수호전에서는 수호후전에서 나온다.[1]

4. 휘종과 흠종이 정말 금나라에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았나?

금나라로 끌려온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관헌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양지에서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비참하게 살았고 휘종의 황후가 병에 걸려서 휘종이 의원을 보내달라고 애걸했는데 금나라 병졸들이 무시하는 바람에 황후가 죽어 아무곳에 대충 시신을 매장 했다거나 썩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던가, 심지어 흠종이 해릉왕의 화살 과녁이 되어 죽었다는 흠좀무한 내용들이다.[2] 중국 사극 충악비에서는 이 이야기를 충실히 반영하는것을 넘어 희종과 흠종, 그 외 종친들이 돼지 우리에 갖혀 썩은 음식을 먹는걸로 묘사 된다. 무슨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보는것 같다.

하지만 휘종과 흠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은 남신기문록(南燼紀聞錄)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내용인데 이 책이 위작이자 야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책의 내용대로 금나라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기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히려 두 황제를 따라 금나라로 간 채경의 아들 채조가 기록한 북수행록(北狩行錄)과 신음어(呻吟語)등 다른 서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달리 휘종과 흠종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첫번째 학대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완안아골타의 차남 완안종망[3]은 오히려 휘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대접을 했다. 휘종이 금나라에 도착할때 금나라로부터 비단과 생견을 하사받았으며 금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폐서인 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베이징 근처인 연산부에서 머무를때 상당히 편하게 머물렀다고 한다. 후에 남송에서 북진 움직임을 보이자 휘종 일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때부터 휘종 자신이 직접 초가집 지붕을 잇고 농사에도 참여하는등 이전보다 궁핍하게 산건 사실이나 역시 학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온 하인에게 "도 초가집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호기롭게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런 빈궁한 생활[4]도 희종의 딸과 며느리들이 금나라 종실의 처가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것들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주겠다는 칙조[5]를 내리며 끝나게 된다. 거기에다 휘종은 금나라에 가서도 아들과 딸을 또 낳는다..[6] 다만 저 칙조를 받은 그 해에 휘종의 아들 중 한명인 조악(趙咢)이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금태종에게 무고 했다가 휘종의 부마와 함께 맞아 죽었다.[7]

다만 휘종등이 금나라로 부터 어느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비단 이런 기록들 뿐 아니라 금사(金史)에는 흠종이 죽자 장례를 치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등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쏜 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는등의 후일담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크다. 황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사람이 평민으로 강등되어 농사 짓고 살게 된 점은 휘종이나 흠종 자신에게 있어 매우 고되고 비참한 일이었겠지만 금나라측에서 의도적으로 학대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한족 지식인들의 과장이라는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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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재미있는 것은 전호편의 전호의 부하인 이 병주 옆에 있는 금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고 말하자. 변상우린 반란군이지만 그렇다고 금나라에게 투항해서 힘을 얻는것이 큰 파멸을 일으켰니다!라고 말했다. 정작 반란군도 이런 짓을 안하는데 이걸 한 북송조정은 답이 없는 인물들이란 것을 알수가 있다.그리고 변상은 작가가 미리 알았다고 해서 구멸한테 죽는다.
  • [2] 바리에이션으로 요나라천조제 역시 해릉왕 앞에 끌려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다는데 그럴리가 있나... 천조제가 죽을 당시 해릉왕은 7살 이었다.
  • [3] 여진명 '알리불'
  • [4] 송나라 사람들이 받았다는 논밭이 45경이라고 하는데 1경이 3000평 정도 되는것을 보면 야사에서 말한것 처럼 썩은 음식을 먹고 지냈을 리가 없다.
  • [5] "예전에 의 여자 여섯 명을 종실의 부인으로 취했으니 너의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인척에게는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 말년을 의식이 풍족한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주겠다. 그대의 딸과 며느리가 궁걸 침소에서 시봉을 든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조심하고 경계하여 잘못됨이 없어 은혜를 베풀어 돌보아 주고 있다. 이렇게 정숙한 자세는 본래 그대가 키워 준것이므로 비단 10단을 내려 천자의 은총을 보여 주겠다." - 신음어(呻吟語) -
  • [6] 청나라때 '만주 8성'으로 불렸던 이이근각라(伊爾根覺羅)씨는 자신들을 휘종과 흠종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 [7] 역시 금나라에 의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해진 천조제의 노비들이 천조제를 무고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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