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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의 변

last modified: 2015-01-07 23:18:4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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靖難之役
Jingnan Campaign

을축일, 금천문(金川門)에 이르러, 곡왕(谷王) 혜(橞),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왕을 받아들이니, 도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 날, 왕이 여러 장수들를 나누고 명하여 도성 및 황성을 지키도록 하고, 돌아와 용강(龍江)에 주둔하면서, 영을 내면 군민을 안무했다. 크게 수색하여 제태, 황자징, 방효유 등 50여인을 붙잡고, 그 성명을 방에 걸어 간신(奸臣)이라 하였다.─ 명사(明史) 성조본기(成祖本紀)

정난의변
날짜
1398년 8월 6일 ~ 1402년 7월 13일
장소
중국 화북(華北), 화동(華東)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정난군 황제군
지휘관 주체


고성
정화
장옥

주고치
고후
광효
주윤문
병문
경륭



하복

휘조
병력 수만
경병문 : 30만
(실제 지휘 13만)
이경륭 : 50만
성용 : 부정확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남경 함락, 정난군의 승리, 영락제 즉위
기타
건문제의 실종

Contents

1. 개요
2. 발단
2.1. 주원장의 사망과 건문제의 즉위
2.2. 학자들의 시대
2.3. 탄압
3. 거병
4. 전개
4.1. 승승장구 하는 정난군
4.1.1. 정난군 VS 경병문
4.1.2. 정난군 VS 이경륭
4.1.2.1. 정촌패 싸움
4.1.2.2. 백구하 전투
4.2. 황제군의 반격
4.2.1. 제남 공성전
4.2.2. 동창 전투
4.2.3. 협하 전투
4.3. 최악의 형세
4.4. 역사에 길이남을 한방 러쉬
5. 결말
6. 평가
7. 영향
8. 조선의 반응

1. 개요

1398년 8월 6일부터, 1402년 7월 13일에 이르는 시간 동안 중국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규모의 내전(內戰). 훗날의 영락제(永樂帝)인 연왕(燕王) (朱棣)와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건문제(建文帝)가 이때 대결하였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남경(南京)을 함락시킨 주체가 되었다.

(明) 제국이 개국한지 30여년 정도가 흐른 뒤에 벌어진 전쟁으로, 제후(諸侯)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중앙과 이에 반발하는 지방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전한(西汉) 시대 벌어진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과 대단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에서 승리자였던 쪽은 당시 중앙의 입장이었던 한경제(漢景帝) 였음에 비하여, 정난의 변 당시 승리자는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吳王) 유비(劉濞) 같은 포지션이었던 연왕 주체였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황제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2. 발단

2.1. 주원장의 사망과 건문제의 즉위

(ɔ) User Hardouin on en.wikipedia from
(明)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한때는 유민, 거지, 고아의 신세였던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은, 자흥(郭子興)의 수하가 된 후 뛰어난 능력을 살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하고 그 세력을 이어받은 주원장은 자신의 근거지를 장강 이남으로 옮겨 현 남경인 집경(集慶)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일약 강력한 군웅으로 떠오르는데 성공했다.

그 후 최대의 적인 우량(陳友諒)을 파양호 대전(鄱陽湖大戰)에서 대패시켰고, 휘하의 명장 서달(徐達)등이 활약하여 사성(張士誠)을 격파함으로서 전중국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서달과 상우춘(常遇春)이 북벌하여 원나라의 남은 잔당을 중국 내에서 깡그리 일소함으로서, 유일무이한 전중국 통일제국으로서 명나라의 판도를 확실하게 굳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주원장은 1380년 호유용(胡惟庸) 일파를 소탕한 일을 시작으로, 1393년 옥의 옥(玉─獄) 사건 때 수많은 공신을 학살함으로서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려고 하였다. 당시 주원장은 26명의 황자(皇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실인 황후(馬皇后) 출신의 자식은 모두 5명이었다. 황태자는 장남이었던 문태자(懿文太子) 주표(朱標) 였지만, 1392년 주표는 주원장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장남이 죽고 난 후 다른 황자들 중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단연 연왕 주체였다. 당시 주원장은 황자들에게 각각 수천명에서 수만명의 병력을 주고 각지의 왕으로 봉해 명제국의 울타리, 즉 번병(藩屛)으로 삼고 있었는데, 명나라에 있어 저주스러운 상대인 몽골은 아직 막북(漠北)에 건재한 상태였고, 주체가 다스리는 지역인 연나라 지역은 바로 그 몽골을 막는 가장 앞선의 울타리나 다름 없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주체에 대한 평가나 대우나 어찌했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황태자가 죽은 후, 새로운 황태자를 책봉하는데 있어 연왕 주체의 이름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학사 삼오(劉三吾)는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잇는 게 맞다."며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홍무제는 주체를 태자로 삼는 일을 그만두었다.[1]

결국 새로 황태자가 되고, 이후 황제가 된 인물은 주원장의 손자였던 주윤문(建文帝), 곧 건문제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2. 학자들의 시대

건문제(建文帝)
선대 황제인 홍무제의 성향이 밑바닥부터 시작해 모든 당대 영웅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성향이었다고 한다면, 반면에 건문제는 아버지인 의문태자를 닮아 학문을 좋아하고 대단히 효성이 지극할 정도로 선한 성격이었다.[2] 건국 30년간 끝없이 이어진 전쟁과 신하들에게 대단히 엄격한 홍무제의 치세를 겪은 학자들은, 건문제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학자들은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그와 보조를 같이 하며, 향후 건문제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齊泰)와 자징(黃子澄)이 있었다.

제태는 홍무 17년 응천부 향시(鄉試)에서 첫번째로 천거된 이후에 예부와 병부 2부의 주사(主事), 그리고 좌시랑(左侍郎)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상당히 능력이 있었는지, 그 깐깐한 홍무제도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정도. 건문제는 황태손 시절부터 제태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황자징의 경우, 홍무 18년 회시에서 1등을 했던 그는 일찍부터 건문제에게 제후국들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혜제(惠帝=견문제)가 황태손이었을 때, 일찍이 동각문(東角門)에 앉아 황자징에게 이르길

"여러 왕들이 (나의) 존속(尊屬)인데다 중무장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법을 많이 저지르니, 어찌해야 하는가?"

라 하니, 대답하길

"여러 왕들의 호위병들은 고작 스스로 지키기에만 족할 뿐이며, 만일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육사(六師=중앙군)에 임하신다면 누가 능히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한의 오초칠국은 강하지 않았던게 아니지만, 끝내는 패망하여 멸망했습니다. 대소(大小)와 강약(強弱)의 세력이 같지 않으니, 순역(順逆)의 이치도 서로 다를 것입니다."라 했다. 황태손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명사(明史) 황자징(黃子澄)전


자연스레 건문제가 황위에 등극하고 나자, 이러한 학자들은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며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태는 지금의 장관격인 상서(尙書)로 승격되었고, 황자징은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국정을 담당해다. 또한, 원나라 시대의 뛰어난 문학가인 (吳萊)의 제자로,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였던 송겸(宋濂)의 문하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효유(方孝孺)를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삼았다.

건문제 시기의 정치를 주도하게 된 학자들은 당시의 정치 현상을 분석하여, 지금 제국의 형세가 과거 전한 초기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한 경제 시절, 각지에 봉해졌던 황족들이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해는데, 당대 명나라 역시 각지에 황족, 즉 건문제에게는 숙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왕으로 봉해져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번왕(藩王)들의 세력 약화. 이것이 바로 건문제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앞서 말한 학자들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정책의 가장 큰 시발점은 건문제 본인이라기보다, 그 주변 학자들로 봐도 될 것이다.

2.3. 탄압

(ɔ) 孔繼堯 from
자징(黃子澄)
건문제는 즉위하서 황자징에게 "경은 과거 동각문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라고 했고 황자징은 "감히 잊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번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삭번정책(削藩政策)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황자징과 제태의 의견이 엇갈렸다.

제태는 기왕 삭번정책을 하려면 당대 최강 번왕인 연나라의 주체부터 건드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황자징은 우선 다른 번왕들부터 제압해야 낫다고 주장했다.

결국 황자징의 의견대로 다른 제후들부터 공격하기로 했는데 첫 번째 목표는 주왕(周王) 주숙(朱鏞)이었다. 주숙이 주체의 모제(母弟)인 만큼 일단 공격하면 주체를 옥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이 전개되는 시간 순서를 보면, 1398년 5월에 홍무제 주원장이 죽었고 6월에 황자징과 제태가 등용되었으며 주왕 주숙은 8월에 변을 당한다. 엄청난 일사천리인데 이는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삭번정책을 시행하는 자들이 계획했기 때문이리라.

조국공(曹國公) 경륭(李景隆)이 국경 경비라는 명목으로 병사를 이끌고 개봉부(開封府)로 갑자기 나타나더니 왕궁을 포위한 채 불문곡직하고 주왕을 체포했다.

그리고 주왕 세력을 체포해 심문하는 와중에 일이 커지면서 다른 왕부들에까지 미친다. 주왕 주숙과 민왕 주편(朱楩)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대왕 주계(朱桂)는 대동(大同)에 유폐됐으며 제왕 주부(朱榑)는 감금되었다. 상왕 주백(朱柏)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절망하여 분신 자살했다.

이때 연왕 주체는 황제에게 주왕 주숙의 죄를 해명하는 글을 대신 작성해 보냈다. 그리고 스스로 미친 척하면서 칭병불출했는데 성격이 어질었던 건문제는 그 글을 읽고서 마음이 흔들려 "그냥 다 그만두자." 라고 지시했다.

황자징과 제태는 서로 이야기했지만 "이제 와서 멈추기는 늦었다."고 결론내리고서 연왕이 칭병불출하는 사이에 습격하라고 건문제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건문제는 "짐이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여러 왕을 연이어 축출했는데 또 연을 삭탈하면, 짐이 천하에 무어라 해명하겠소?" 라는 이유로 머뭇거렸다. 황자징이 '선수필승'의 이야기를 꺼내자 건문제는 "연왕은 용병술에 능한데 어떻게 금방 제압하는가?"라고 핑계를 대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건문제의 우유부단한 태도와 별개로, 황자징은 도독 송충(宋忠)에게 명령해 연변(緣邊)에 주둔한 관군을 징발해 개평(開平)에 주둔케 하고 연부(燕府)를 호위하는 군사 중 정예로 예속된 충성스러운 군사를 선발해 휘하에 두게 하며 연왕의 호위군인 호기지위(胡騎指揮) 관동(關童)을 수도로 소환해 주체 세력을 점차 약하게 하였고 북평(北平) 영청(永清)의 좌위·우위 군관을 징발해 창덕(彰德)과 순덕(順德)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며 도독 서개(徐凱)는 임청(臨清)에서 군대를 조련하고 경환(耿瓛)은 산해관(山海關)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면서 주체 세력권인 북평을 감시하였다.

3. 거병

이렇게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질 무렵, 연왕 주체는 수도에 머무는 자신의 세 아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주원장이 죽을 무렵, 주체도 수도로 오려고 했었지만, 성가신 일하지 말고 본인들 일이나 잘 해라 라는 주원장의 유조 때문에 그냥 봉국에 머물면서 자신의 아들만을 보냈다.

이에 제태는 세 사람을 인질로 잡아두어야 한다고 권했지만, 황자징은 적을 방심하게 하려면 이들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일은 그렇게 되었는데 황자징이 이때 주체의 아들들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미래의 홍희제(洪熙帝) 주고치(朱高熾)는 없었으리라.

당시 북평에서는 조정에서 파견한 도지휘사(都指揮使) 사귀(謝貴)와 포정사(布政使) 장병(張昺)이 머물렀다. 광효(姚廣孝)가 이를 계획하고서 7월, 주체는 그 사람들을 갑자기 공격해서 모두 죽이고 황제 옆의 간신인 제태와 황자징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거병했다.

연왕의 반란군은 정난군(靖難軍)으로 불리웠는데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뜻였다. 주체는 정난군을 일으키면서 조정에 상소하는 형식으로서 격문을 발표했는데 격문에는 홍무제가 남긴 조훈이 인용되었다.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안에 간악한 자가 있다면, 친왕은 곧 병사를 훈련시켜 명을 기다려라. 천자는 제왕에게 밀조하여 진병(鎮兵)을 통솔해 이를 쳐라."

정난군이 군사행동을 시작하자 제태는 연나라를 속적(屬籍)에서 삭제하고 그 죄상을 천하에 공표해서 토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모두 "이건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제태는 "이길 수 있다" 고 주장해 조정에서도 연왕을 상대하기로 결국 결정하였다.

4. 전개

4.1. 승승장구 하는 정난군

4.1.1. 정난군 VS 경병문

처음 기세를 타고 일어난 정난군은 파죽지세였다. 통주(通州), 준화(遵化), 밀운(密雲)은 정난군에게 즉시 항복했고 북평으로 향하던 송충은 회래(懷來)로 물러났지만 정난군은 거용관(居庸關)을 함락하고 회래까지 즉시 함락해 송충을 포살했다.

이때 황제군은 제태나 황자징이나 학자일 뿐 장수는 아니라서 주체를 상대할 만한 뛰어난 장수가 없어서 문제였다. 개국공신 대부분은 늙어 죽거나 주원장에게 숙청당해 유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장흥후(長興侯) 경병문(耿炳文)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이견(李堅), 도독 영충(甯忠)을 좌/우부장군으로 임명하고는 참장(參將) (盛庸)와 함께 주체를 상대하려는 북벌군을 편성하였다.

경병문을 말하자면 당시 나이가 60세가 넘었던 노장으로서 주원장 시대부터 활약하던 장수 중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통솔하던 병력은 30만이나 되는 대군이었지만, 아직 13만 명밖에 먼저 도착하지 않았을 무렵, 정난군의 장수 장옥이 적을 염탐하고 기습전을 권했다.

“군대에 기율이 없고 그 윗사람들에게는 패할 기운이 있으니 의당 급히 쳐야 합니다.”

이에 주체는 호타하(滹沱河) 북측에서 기습공격했다. 이는 대성공으로 끝나 3만 명이나 되는 황제군을 참살했고 경병문은 진정(真定)에서 수비에 전념했다. 정난군은 이틀간 공성전을 벌였지만 황제군을 격퇴할 수 없자 일단 물러났다.

패배했는데도 황자징은 "어차피 전쟁하면 이기고 지는 거야 항상 있는 일" 이라면서 조국공 이경륭 파견을 주청하였다.[3] 이때 제태는 이경륭은 도저히 안 된다면서 극렬하게 말렸지만, 황자징이 밀어붙인 끝에 이경륭이 새로운 정로대장군이 되어 결국 파견되었다.

4.1.2. 정난군 VS 이경륭

4.1.2.1. 정촌패 싸움

당시 이경륭이 황제에 받은 병력은 무려 50만 명에 달했다. 모두 연왕은 이제 박살나리라고 간주했지만, 주체는 되려 이 소식을 듣고 "저 놈들이 나를 도와주는구나. 이경륭 그놈이 무슨 재주가 있단 말인가?" 하고 껄껄 웃어버렸다(……).

이경륭이 북진할 때 요동에 있던 장수인 오고, 경환, 양문은 요동병을 이끌고 영평(永平)을 포위하고자 진군하였다. 양방으로 적을 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주체는 "어차피 이경륭 저 놈은 겁 많아서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는 장옥 등과 함께 오고를 먼저 공격해 쫓아버렸다.

이때 이경륭은 부대를 이끌고 북평을 포위했으나 연왕의 아들 주고치는 굳게 버티고 수비하면서 적을 막아내었고 11월경 주체는 이경륭과 다시 싸우고자 돌아왔다. 이때 적과 싸우려면 백하(白河)를 건너야만 했었는데 백하가 흘러넘쳐서 도저히 건널 형편이 아니었다. 주체도 막막한 심정으로 하늘에 기도했는데 천만다행이게도 도착했을 무렵에는 강이 얼어 있어 군대가 건너서 넘어갈 수 있었다.

이를 본 이경륭은 도독 진휘(陳暉)를 정란군의 후방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주체는 군대를 나눠 이를 격파했다. 도망치던 진휘의 군대가 백하를 건널 무렵 정난군이 지날 때는 멀쩡하던 얼음이 갑자기 깨져서 수많은 병사가 그대로 익사했다.

이후 주체는 정촌패(鄭村壩)에서 황제군과 직접 교전했다. 주체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적의 7영을 개발살 내자, 여러 장수가 즉시 재공격해 이경륭은 형편없이 박살났다. 이경륭은 우선 물러나고 산둥성 덕주(德州) 방면에서 군대를 조련했고 익춘에야말로 제대로 싸우겠다는 태세를 보였다.

4.1.2.2. 백구하 전투

이에 대해, 주체는 오히려 대동(大同)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동을 공격하면 이경륭은 대동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할텐데, 대동의 춥고 한랭한 기후에 남방군은 적응을 못할테니 쉽게 이길 수 있다는게 주체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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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 1400년 당시의 전황

대동의 위치는 지도의 맨 왼쪽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1398년 12월 경 정난군은 광창(廣昌)을 함락시켰고, 다음 해(1399년)가 되자마자 울주(蔚州)를 함락시켰으며, 2월 경에는 대동에까지 이르렀다. 이경륭은 뒤늦게 구원하기 위해 쫒아왔지만, 정난군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새빠지게 고생해서 쫒아온 이경륭의 부대는 적군은 보지도 못했고, 오히려 얼어죽고 굶어죽은 병사들만 가득했다.

이경륭은 정난군을 격파하기 위해서 곽영(郭英), 오걸(吳傑), 평안(平安) 등과 함께 백구하(白沟河)에서 만나기로 모의하였다. 그런데 주체는 이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장옥의 제안 때문이었다.

“병사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청컨대 먼저 백구하에 의거하여, 편안히 함으로써 피로한 자들을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앞서 이동한 정난군은 먼저 백구하 측면에서 평안의 부대와 만났고, 주체가 직접 백여기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하였다.

이윽고 이경륭의 부대가 도착하여 양군은 서로 격돌하였으나 이때의 싸움에선 그다지 정난군이 유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밤이 되어 양군은 서로 물러나게 된다.[4]

며칠이 지난 후 양군은 다시 격돌하였다. 이때 이경륭은 부대를 수십리에 걸쳐 진을 치고, 정난군의 후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주체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적군의 장수인 구능(瞿能)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때, 정난군의 장수 중에 한명인 (丘福)은 적의 중군을 공격중이었지만, 적의 수비가 완강해서 돌파할 수가 없었고, 이에 주체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경륭이 정난군의 후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정난군은 포위되는 형세가 되었다. 양군은 한동안 치열하게 교전하였고, 화살도 비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형세가 안 좋은 쪽은 정난군이었다. 주체는 직접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화살을 쏘다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웠다. 하지만 곧 칼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체는 갑자기 근처에 있던 제방 위로 올라가더니, 느닷없이 채찍을 휘두르며 원군이 오는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이경륭은 이 때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서 머뭇거렸다. 이렇게 잠깐 시간을 번 사이에 진짜로 주체의 차남인 주고후(朱高煦)가 구원병을 이끌고 나타나서 포위를 풀어버리게 된다.[5]

간신히 한숨을 돌린 순간도 잠시, 정난군에 주고후가 구원하러 온 것처럼, 황제군 역시 또다른 부대가 도착해서 위세가 어마어마해졌다. 대부분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새로 나타난 적의 구원병이 절망해서 데꿀멍 하고 있을때, 오직 한 사람, 연왕 주체만이 분연히 소리쳤다.

"내가 전진하지 못해도, 적도 퇴각하지 못한다. 오직 전투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일갈한 주체는 부대를 이끌고 적의 배후로 나와 공격하였는데, 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이경륭의 군기까지 부러질 정도였다. 희대의 찬스를 놓치지 않은 주체는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적을 공격했고, 순식간에 전세는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정난군은 바람 같은 기세로 이경륭의 부대를 학살하였다.

기적같은 전투 끝에 이경륭의 부대는 수만명이나 죽었고, 또 10만 명이 물에 빠져서 죽었다. 이경륭은 황제로부터 받은 새서(璽書)와 부월(斧鉞)까지 모두 잃어버린 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덕주로 도망치고 말았다.

4.2. 황제군의 반격

4.2.1. 제남 공성전

대명호철공사(大明湖铁公祠)
덕주로 달아난 이경륭이었지만, 정난군은 5월 경에 덕주까지 함락했고, 군수물자를 백 만이 넘게 거둬들었다. 여기서도 패배한 이경륭은 급기야 제남(濟南)까지 달아났다. 정난군은 이를 추격했는데, 만일 제남까지 함락되면 대번에 산동성(山東省)까지 장악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여기서 정난군은 쉽지 않은 전투를 치뤘다.

산동참정(山東參政) (鐵鉉)은 과거 홍무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했던 일 때문에 황제에게 칭찬을 받은적이 있던 인물이었다. 당초에 이경륭이 북벌할 때 후방에서 물자를 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경륭이 백구하에서 캐관광을 당하고 덕주까지 함락되자 그 기세를 보고 지린 수많은 성들이 정난군에게 항복했다. 이경륭이 도주하기 전부터 제남에 있던 철현은 울면서 성용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울것을 다짐했다.

이경륭은 일단 제남 앞에서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여기서도 정난군에게 박살이 나고 더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건문제는 연이어 패배한 이경륭을 소환했지만, 사면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처음 이경륭을 추천한 황자징은 울면서 이경륭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건문제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황자징은 가슴을 치면서 소리쳤다.

"대사(大事)가 이미 떠나갔으니, 이경륭을 천거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은 만번 죽어도 속죄하지 못하겠다!"

이경륭을 수차례 대패시킨 정난군은 기세등등해져서 제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먼저 정난군은 물길을 막아 성에 수공(水攻)을 퍼붓고 포위망을 길게 유지하고 밤낮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철현은 계책을 내어 적의 공성 장비를 불태워버렸고, 적이 당황하는 틈에 기습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면서도 1천여명의 병사를 따로 뽑아 일부러 성을 들어바치는 모양새의 거짓항복을 하는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주체는 '야, 깝깝했는데 일이 간단하게 되려나 보다.' 하고 입성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주체가 성에 들어오는 틈을 타 철판(鐵板)을 떨어뜨려 공격하고, 따로 다리를 끊어버리는 무서운 계책이었다. 하지만 약간 타이밍이 어긋나 주체가 입성하기도 전에 철판이 끊어져버렸고, 놀란 주체는 곧바로 말을 돌려 달아났다. 워낙 급박한 사이라 아직 다리도 끊어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어그로가 있는대로 오른 주체는 온갖 계책을 다 짜내어 제남성을 공격했지만, 뭔 수를 써도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장장 3개월 동안 기약 없는 공성전이 벌어질때, 황제군의 20만 대군이 후방인 덕주를 공격해서 수복하였다. 이렇게 되면 보급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고, 결국 주체도 그 점을 두려워해 군사를 뒤로 물리고 만다.[6]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이경륭의 대패로 인해 잔뜩 쫄아있던 건문제는 요시 그란도시즌을 외치며 철현에게 금패(金幣)를 하사하고 칭찬했으며, 철현이 입조하자 연회를 베풀면서 그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었다. 철현은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가 되었다가 이후에는 병부상서로까지 승진하였다.

또한 철현과 함께 공을 세운 성용 역시 역성후(歷城侯)에 봉해졌고, 연나라를 때려부수라는 의미의 평연장군(平燕將軍)에 임명했다.

4.2.2. 동창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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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 1401년 당시의 전황

당시 황제군은 딩저우(定州)에는 오걸과 평안이, 덕주에는 성용이, 창저우(滄州)에는 서개(徐凱)가 각각 주둔하며 서로 기각지세의 형세를 이루어 정난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정난군은 그 압박을 분쇄하기 위해서 우선 겨울이 되자 창저우의 서개부터 격파하고 사로 잡은뒤,[7] 군수물자를 잔뜩 챙기고 제녕(濟寧)으로 이동하였다. 덕주에 주둔하던 성용은 적을 막기 위해서 동창(東昌)[8]으로 나아갔다.

성용은 동창의 성을 부대의 뒤로 하여 진을 쳤고, 이에 주체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황제군의 좌익을 쳤다. 그러나 성용은 부대를 정돈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후 주체가 부대의 중앙을 치자, 이때는 고의로 진은 열어 정난군을 깊숙히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이윽고 충분히 정난군이 황제군의 중앙으로 파고들자, 성용은 역으로 재차 공격에 나섰다. 너무 깊숙히 들어온 탓에 여러 겹의 포위망에 둘러 쌓인 주체는 위기에 빠졌으나, 때마침 수하 장수인 주능(朱能)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는 성공하였다. 주체는 우선 급한대로 관도(館陶)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적의 공세가 워낙 강하여 정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주체가 아끼던 백전노장 장옥(張玉) 마저 전사해버리고 만다. 혼란스러운 전황 속에 주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 홀로 분전하다 결국 창에 찔려 죽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정난군을 대파한 성용은 오걸과 평안에게 연락하여 정난군의 퇴로를 막게 하였고, 정난군은 다음 해(1401년) 정월이 돼서야 심주(深州)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퇴각할 수 있었다. 북평으로 귀환하자 주체 휘하의 많은 장수들이 스스로 죄를 청할 만큼 대패를 당했던 일이지만, 주체가 가장 슬퍼한 부분은 장옥이 전사한 일이었다.

“승부에 이기고 지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고, 헤아리기 쉽지 않으나, 장옥을 잃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간난한 때에, 나의 좋은 보신을 잃었도다.”

그러고는 그 강철의 사나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멈추지를 못했다. 다른 장수들도 모두 따라 울면서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는데, 이후 주체의 수하 중에 담연이나 왕진 등이 전사할 때도 주체가 아까워 했지만, 이때만큼 슬퍼한 적은 없었다.

이 동창 전투의 패배로 정난군은 정예병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성용군의 위세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건문제는 기뻐하며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철현과 성용에게 연달아서 큰 낭패를 본 정난군은 다시는 산동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4.2.3. 협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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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2월 - 1401년 10월 당시의 전황

비록 큰 패배를 당하긴 했었지만, 주체의 입장에서는 전황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었다. 3월 무렵 정난군은 다시 남하를 시도하여 보정(保定)에 이르렀다. 이에 성용은 협하(夾河)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정난군의 장수들이 경기병을 이끌고 조심스레 성용의 군단을 공격해서 약탈하였고, 이에 성용은 1천여명의 병사들을 보내 적을 추격했는데 정난군이 화살을 쏘아대자 잠시 물러났다. 하지만 진정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성용의 군대는 방패의 열을 맞춰 정난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주체는 보병으로 우선 적을 막게 하고 기병이 그 틈을 타서 돌입하게 했는데, 성용은 오히려 신들린 용병술을 보이며 힘써 싸워 정난군의 장수 담연(譚淵)을 참살하였다.

하지만 정난군의 주능(朱能), 장무(張武)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주체가 경기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성용군 내에서도 장득(莊得), 조기장(皂旗張) 등이 전사하였다. 이날의 승부로 전투가 결정되진 않았지만, 성용의 부대가 조금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날 밤, 주체는 10여명 정도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성용의 군영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런데, 눈치를 채고 보니 이미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주체가 사로잡히거나 죽었다면,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정난군은 그대로 무너졌을 테고, 역사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주체는 조심스레 말을 이끌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진을 돌파했다. 다른 장수들은 화살 한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주체를 보내주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당시 건문제가 내린 조서 때문이었다. 조서에서 건문제는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책임을 지게 하지 마라." 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다른 장수들도 감히 천자의 조서를 거스를 수 없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군은 적의 수괴를 포위하고도 화살 한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오르자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였다. 진(辰) 시[9]에서부터 미(未) 시[10]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양군은, 너무 지쳐서 잠시 자리에 앉아서 쉬고 이윽고 다시 일어나 싸움을 재개 하였다.

이때 정난군은 동북쪽에 있고 성용의 부대는 서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2차전이 재개될 무렵, 갑자기 동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성용의 부대는 바람을 곧바로 맞으며 싸우는 형세가 되었고, 기세를 탄 정난군은 좌우 측면에서 마구 공격을 가해 성용의 군단을 대패시켰다.

성용은 간신히 덕주로 몸을 피했고, 위세가 등등했던 황제군의 사기도 상당히 꺾이고 말았다. 게다가, 정난군의 장수 이원(李遠)이 패현(沛縣)에서 군량과 배를 불태워 식량도 부족하게 되었다.

4.3. 최악의 형세

협하에서 승리를 했지만 전투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돌린 틈을 타 7월부터 9월 경에는 평안이 주체의 본거지인 북평을 향해 뒤치기를 시도하였고, 10월에는 황제군의 방소(房昭) 등이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여 일 만 여명을 참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직접 말을 타고 화살과 돌의 위협을 무릎쓰면서 지휘하였고, 대승을 여러번 거두었다. 하지만 죽을 뻔한 적도 여러번이었는데, 3년을 그렇게 미친듯이 싸워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북평, 보정, 영평 3부(府) 뿐 이었던 것이다.

애시당초 아무리 주체가 천재적인 지휘 능력을 보여주고 용맹무쌍하게 싸운다고 하더라도, 이 당시 건문제의 세력은 그야말로 전 중국 그 자체였다. 게다가 실제 중국을 지탱하는 강남 지방의 경제력이 황제군에게는 고스란히 있었고, 정난군이 30만, 50만의 적들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황제군은 타격을 금세 회복하고 말았다.

결국 주체도 성질이 나서 "이러다가 언제 전쟁이 끝나겠나? 차라리 한번 제대로 결전해 보는게 낫다!" 라고 소리치기도.

결국 다음해(1402년) 음력 4월에 정난군은 또다시 대패를 하고 말았다. 이 싸움이 있기 한 달 전에 정난군은 평안의 4만 부대를 격파하고 철현의 부대를 물리쳤지만, 평안은 언제 그런 패배를 당했냐는 듯이 하복(何福)과 함께 소하(小河)[11]에서 정난군을 개발살 내었다. 이 싸움에서 정난군의 장수 진문(陳文)이 사망하고 만다.

심지어 이 싸움에서 주체는 평안이 직접 찌른 창에 맞을 뻔 하기도 했으며, 주위의 기병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정도로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게다가, 제미산(齊眉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개국공신 서달의 아들인 위국공(魏國公) 휘조(徐輝祖)가 이끄는 황제군은 정난군을 격파하고 장수 이빈(李斌)을 참살하였다.

음력 4월이면 한참 더울 때다. 특히, 북방 사람들은 남방의 습기에는 더 어려워 했는데, 전황조차 이렇게 절망적으로 흐르자 많은 장수들이 우선 북방으로 돌아가 다시 시기를 엿보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때, 정난군에서 가장 용맹하던 장수인 은 칼을 어루만지면서 소리쳤다.

"“한고조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졌는데, 끝내 천하를 가졌소. 우리는 거사을 일으키고 연이어 이길 수 있었소. 약간 불리한다고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엔 남을 섬길 것이오!”

그러자 주체도 주능의 말에 동조하며 "가려면 니들은 가라!"라고 일갈했고, 다른 장수들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한 상황은 어두워 보였는데……


4.4. 역사에 길이남을 한방 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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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군의 남진 루트

당시 정난군 내에서 실제로 북으로 귀환하자는 이야기가 나온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보았듯이 주체 본인의 의지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명나라 조정에 전해진 정보에는 정난군이 북으로 되돌아갔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졌다. 건문제는 이 잘못된 정보를 믿고 서휘조의 군단을 회군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남아있는 하복이나 평안의 부대는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최후의 기회를 잡은 정난군은 영벽(靈璧) 주둔하고 있는 하복의 군단을 격파하고, 평안을 비롯한 37명의 지휘관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전황의 거대한 흐름은 갑작스레 변하고 말았다.

정난군이 대패한지 불과 한달 뒤인 5월, 급하게 구원하러 오는 요동의 군대를 격파한 정난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남진하였다. 이에 성용은 황급히 전함을 이끌고 회수 남안을 장악하여 정난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정난군의 장수 주능과 구복이 몰래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성용의 후방을 공격하여 그 부대를 격파하였다. 그 후에 철현의 부대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정난군의 남진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한번 기세를 잡은 틈에 그대로 밀고 나가 끝을 봐야 했는데, 회수 남안을 장악한 시점부터 다음 목표를 어디로 할지에 대해, 봉양(鳳陽)으로 가자는 의견과 회안(淮安)으로 가자는 의견이 둘 다 나왔지만, 주체는 "봉양의 수비는 완벽하고, 회안은 쌓아놓은 양식이 많으니까 둘 다 힘들다. 차라리 양주(揚州)로 가자." 는 계획을 세웠다.

결정이 내린 후에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 이루어져, 바로 그 달에 정난군은 양주를 함락시켰다. 왕례(王禮) 등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항복해버린 탓이었다. 성용은 어떻게든 군사를 모아 육합(六合)에서 싸웠지만,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 시점에 이르자 경악한 건문제는 황급하게 천하에 조서를 내려 자신을 도우라고 지시하였고, 주체의 사촌 누나인 경성군주(慶成郡主)를 보내 "땅을 나누자." 는 제안을 했지만, 이게 시간을 끄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는 주체는 듣지 않고 계속해서 진격하였다.

6월,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용은 포자구(浦子口)라는 곳에서 정난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도독첨사였던 진선(陳瑄)이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정난군에 투항해버렸고, 성용은 필사적으로 고깃배까지 모아 고자하(高資港)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윽고 진강의 수비대장이었던 동준(童俊) 역시 정난군에 항복하였고, 마침내 남경에 이른 정난군은 금천문(金川門)을 공격하였다. 이때 서휘조의 동생인 좌도독 서증수(徐增壽)가 내응하려고 했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는데, 수도의 도독까지 항복하려고 했으니 건문제는 이미 버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곡왕 주혜와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정난군을 맞이하였고, 남경은 함락되었다. 그 모습을 본 건문제는 스스로 황궁에 불을 질렀다.

전쟁은 종결되었다. 천하의 주인은 이제 연왕이 되었다.

5. 결말

(ɔ) 清朝 任有容 from
효유(方孝孺)

연왕 주체는 뭇 신하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영락제였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신을 압박하던 황자징과 제태부터 잡아들였다.

제태는 당시에 정난군의 기세를 두려워한 건문제 때문에 해임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남경으로 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난군이 승리하자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결국 잡혀서 죽었다. 제태의 종형제는 모두 죽었고, 숙부들은 변경으로 귀양을 갔으며, 제태의 아들은 6살이라 죽음은 면하고 공신들에게 지급되었다가, 홍희제 시절에 사면되었다.

황자징 역시 그 무렵 제태처럼 해임된 처지였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라는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중에, 정난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여기저기를 떠돌며 다시 군사를 일으켜려다가 잡히고 말았다.

원한이 쌓였는지 영락제는 직접 황자징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황자징은 굴복하지 않고 항변하였다. 황자징은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에 처해졌고, 족인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인척들은 변경의 수자리로 귀양을 떠났다. 유일하게 아들 한명만이 이름을 전경(田徑)이라 바꾸고 살아남았는데, 훗날에 사면령을 받았다.

문제는 황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였다.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는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끊어질 것이다." 라면서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고, 영락제 역시 방효유를 등용하려고 하면서, 천하에 내리는 조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울면서 거부했고, 영락제는 "선생께서는 자해하지 마시오, 나는 주공을 본받아 성왕(成王)을 보좌하고자 할 뿐이오." 라고 하면서 방효유를 설득했지만, 방효유는 되려 이렇게 물었다.

"성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락제는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섭정한 이야기처럼, 자신도 천하를 훔치려는게 아니라 주공단처럼 군주를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겠다고 한 소리지만, 방효유는 "그럼 그 성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대답한 것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저기서 말하는 성황은 바로 건문제.

이 물음에 영락제도 당황해서 "불에 타서 죽었다." 고 대답했고,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자손을 세우지 않는 것인가?" 하고 묻자 황제는 "장성한 사람이 군주에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하지만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동생을 세우지 않는가?" 라고 묻자, 영락제도 "이건 내 집안 일이다!" 라고 성질을 내며 붓과 종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방효유는 "난 못한다." 라며 그것들을 내던져 버렸고, 결국 빡친 영락제는 방효유를 잡아다 책형으로 죽여버렸다. 죽기 직전에 방효유는 최후의 절명시를 남겼다.

"하늘이 난리를 내렸도다! 누가 그 이유를 아는가, 간신이 계책을 얻어 나라를 도모하고 꾀를 쓴다. 충신은 발분(發憤)하여 피눈물이 흘러 내리는데, 이렇게 임금이 죽었으니, 문득 어디서 구하겠는가. 오오, 슬프도다! 거의 내 허물이 아니겠는가!"

이때, 방효유가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燕賊簒位)' 는 글을 써 영락제를 대단히 노하게 만들어, 가족과 친척을 포함한 구족에 친구나 스승, 제자를 포함해 십족이 몰살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단히 유명한데, 명사 방효유전에서는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제남에서 정난군을 저지했던 철현은 심문장에 끌려오자, 되려 심문장을 등지고 앉아 버렸고, 재주를 아까워한 영락제가 "다시 생각해 보라." 고 부탁했지만 결국 말을 듣지 않아 책형을 당해 죽어버렸다. 죽었을 때의 나이가 고작 37세였다.

수차례 정난군을 격파했던 성용은 남경이 함락되자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탄핵을 받자 자살해버렸다.

이문충의 아들인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정난군에 항복했었지만 명나라 건국에 있어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최고 공신인 서달의 아들, 서휘조는 영락제가 직접 설득했음에도 불구,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락제는 화가 나서 그를 투옥시켰는데, 옥중에서 공술서를 쓸 때 서휘조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아버지에게 개국의 공이 있으니, 공신의 자손은 죽음을 면한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이자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인 탁오(李卓吾)는, 이 문장에는 동정을 구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고, 영락제를 추대하는 말도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영락제는 서휘조를 죽이지 않았는데, 서휘조가 영락제의 아내인 서 씨의 동생이라는 점도 작용 했을을 것이다. 서휘조는 사형은 면하고 가택연금되어 작위를 박탈당한 뒤[12] 몇년뒤에 죽는다.[13]

가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건문제의 최후였다. 불타버린 성 내에서 효민양황후 마씨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황제의 시신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타버렸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유해라도 남는 법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때문에 혹자는 건문제가 지하 땅굴로 도망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통제 시절에는 스스로 건문제라고 주장하는 괴인들도 나타났었다.

참고로 건문제와 효민양황후 마씨 사이에서는 2남이 있었다. 당시 6살이던 장남 화간태자 주문규(朱文奎)는 건문제와 함께 실종되었고[14] 1살이던 차남 윤회왕 주문규(朱文圭)는 목숨은 건졌으나, 이 후 56년 동안 유폐되었다[15] 그는 1457년 그의 오촌 조카 천순제에 의해 풀려났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유폐되어 평생을 유폐당해서 그런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된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6. 평가

(ɔ) Unknown from
영락제(明成祖)

정난군은 개전했을 당시는 물론, 개전한지 3년이 지난 시점에도 세력이 협소했으며, 이에 비해 황제군은 전중국을 아우르는 엄청난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양 쪽의 세력으로 따지자면 서로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정난군이었다.

이에 대해 능력이 뛰어난 개국 공신들을 숙청한 주원장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정난의 변 당시 황제군에게도 철현이나 성용처럼 능력있는 장수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건문제에게 있었다. 지극히 우유부단한 건문제 때문에 황제군은 여러차례 승리의 기회를 놓쳤다. 경병문의 경우 대패를 하긴 했지만, 수비를 하며 적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조급한 건문제 때문에 교체가 되었고, 경병문 대신 부임한 이경륭은 싸우기만 하면 패배하는 희대의 졸장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으로서는 착하다고 해도, 군대를 통솔하는 총지휘관으로서는 쓸데없을 정도로 인정이 많았던 점도 문제. 전투 한두번 패배했다고 장수들을 싹 죽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싸우기만 하면 박살이 난 이경륭을 죽여 처벌하자는 황자징의 제안도 무시했다. 결국 이경륭은 막판에 성문을 열면서 건문제의 은혜에 완전히 엿을 먹이고 만다.

게다가, 삭번 정책을 취하며 주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지만, 정작 숨통을 끊어야 할 상황에서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 '숙부를 죽이게 하지 말아라.' 라는 조서를 내려, 주체를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친 일화는 차라리 개그에 가깝다. 막판에 서휘조를 귀환시킨 일에 대해서도, 만약 숨통을 끊을 생각이 있었다면 정난군이 귀환했다는 보고가 오더라도 오히려 공세로 나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건문제는 정난군이 북평으로 돌아갔다고 하자 마치 다행이라는듯 서휘조를 귀환시켰다.

비록 건문제의 이런 병크가 없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승리하기 힘들었을 테지만, 주체의 경우 정난의 변 내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압도적인 세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전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체 본인의 군사적 능력이 가장 큰 이유였다. 만일 그런 점이 없었다면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경병문이나 이경륭에게 대패했을 테고, 건문제가 말아먹는 기회조차 받아먹지 못했을 것이다.

정난의 변 당시, 주체가 보인 가장 큰 장점은 한두번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부분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 카리스마로 부대를 이끌고 유지하며 버티는 점이었다. 직접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주체로 인해 정난군은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이탈하는 사람 조차 없을 정도로 똘똘 뭉칠 수 있었다. 한번 기회를 포착하자 그대로 물고 늘어지며 적을 핀치에 몰아넣던 점 역시 칭찬할만 한 점.

7. 영향

정화(鄭和)

정난의 변 승리 이후,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명나라의 정책 역시 급변하게 되었다.

우선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것이 가장 큰 원인. 이유야 당연히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또한,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다만, 이후에 탄 칸 등이 세력을 떨칠 때는 명나라는 유목민의 공격에 수도가 바로 노출되는 문제점을 보이고 만다.

또한 학자 출신의 측근들을 지니고 있던 건문제에 비하여, 무인들을 측근으로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 본인 자체가 천상 무인이었던[16] 영락제가 즉위하게 되면서, 명나라는 중화 제국의 기풍이었던 주원장의 시대와는 달리 적극적인 세계 제국의 형세를 취하였다.

영락제는 직접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홍무제나 건문제라면 하지 않았을 막북으로의 원정을 여러번 감행했고, 정화의 대함대는 유럽에서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퍼져나가기 백여년 전,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비록 이후부터는 다시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비록 단발성의 이벤트에 가깝다고 해도 그 위상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을 보자면, 환관들을 철저하게 억제한 주원장의 기조는 건문제 시절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영락제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게 되면서 뿌리 채 흔들리게 되었다. 정변으로 즉위한 탓에 사대부들과 척을 진 영락제는 환관들에게 큰 권한을 주면서 많은 의존을 했고, 이 때문에 명나라는 이후 악랄한 환관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또한, 학자들 출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건문제가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대외원정에 매달리지 않았을 점을 고려하면, 영락제 시절보다 명나라는 국가재정에 드는 부담 등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정화의 함대는 선덕제 시절에도 떠난 적이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실제로 몽골 원정등은 엄청난 물자 소비에 비해 실질적인 이득이 적었다.

이 문제는 영락제 본인의 군사적인 능력을 떠난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는데, 타타르의 룩타이(Aruqtai)나 오이라트흐무드(Mahmud)같은 적들은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오면 그냥 도망쳐버렸다. 근거지를 여러 군데 가지고 있는 유목민족들은 아무리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그냥 도망쳐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결국 영락제는 대군을 이끌고 초원으로 진격했다가, 적을 쫓아버린 후 보급이 떨어지면 귀환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로 인해 단기간의 평화는 얻을 수 있었어도, 최종적인 승리는 요원한 일이었다. 중화제국이 유목민족의 위협을 완전히 뿌리채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된 시기는 영락제의 시기에서도 수백년은 뒤인 건륭제의 시대나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17]

어찌되었건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자리를 맞바꿈으로서, 명이라는 초거대제국의 미래 역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때, 정난의 변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일대 대사건임은 분명하다.

8. 조선의 반응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은 상대적으로 인접한 북평의 정변을 요동의 도주자들으로 알게 되었고, 연왕이 이길 것으로 보고 중립적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정변으로 조선 조정의 정통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다. 시기적으로 정종 1년 ~ 태종 2년 이었던만큼 사신 교환은 빈번했으며, 육로를 통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신이 내전에 의해서 오고가지 못하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왕의 정변에 대한 첫 기사는 정종 1년(1399년) 음력 3월 1일 기사에서 처음 나타난다. 정변이 일어난지 반 년만의 일이었다.

군인 한 사람이 요동(遼東)에서 도망쳐 왔는데, 본국 사람이었다. 녕위(東寧衛)에 소속된 사람인데, 요동의 역사가 번다하므로 도망쳐 돌아온 것이었다. 말하기를, “ 연왕(燕王)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제)에게 제사지내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경사(京師, 난징)에 갔는데, 새 황제(皇帝)가 단기(單騎)로 성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연왕(燕王)이 곧 돌아와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 곁의 악한 사람을 모조리 추방하겠다고 위명(爲名, 명령)하고 있습니다.”하였다.

다음 해(1400년) 음력 5월 17일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촬요(撮要)》에서 삼국지조비손권의 거짓 항복을 받으려 하자 유엽이 훼이크라며 말리던 부분을 논하다가 현실정치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전백영이 말하기를,“지금 연왕(燕王)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이 어지러워졌는데, 설혹 정료위(定遼衛, 요동 지역)가 우리에게 항복하기를 구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하시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히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다. 그러나, 받지 않는 것이 가장 낫다.”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위주(魏主, 조비)의 잘못은 오직 유엽의 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거짓 항복하는 것을 허락한 데에 있었을 뿐입니다. 정료위(定遼衛)의 항복을 받는 것은 크게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연왕(燕王)이 난(亂)을 평정하고 천하를 차지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문죄(問罪)할 것이니, 그때에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성상의 말씀이 심히 의리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이를 보아 당시 조선에서는 연왕이 우세하다고 전황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음력 9월 19일 이런 기사가 이어진다.
정료위(定遼衛) 사람 12명이 도망하여 왔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였다.“왕실(王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연왕(燕王)이 승승 장구(乘勝長驅)합니다.”

다음 해(1401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도 8월 12일 흥미로운 기사가 있는데, 건문제에게 일부러 나쁜 군마를 조송한 관료를 보호했다는 내용이다.

사윤(司尹) 공부(孔俯)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았다. 처음에 (공)부가 진헌마(進獻馬)를 의주(義州)에서 점검(點檢)하는데, 풍해도(豊海道, 황해도) 사람이 나쁜 말(駑馬)로 좋은 말을 바꾸려고 하였다. 부가 남는 값(餘價)을 이롭게 여기어 이를 허락하였었다. 황제가 연왕(燕王)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싸우던 군사들이 쫓겨 달아났는데, 보병이 앞서고 기병이 뒤떨어졌으니, 헌마(憲馬)가 용렬하고 나빴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지휘(指揮)에게 명하여 나쁜 말 60여 필을 골라 돌려보내었는데, 모두 부가 바꾼 것들이었다. 헌사(憲司)에서 부의 반인(伴人)을 가두고, 아전(吏)을 보내어 부의 집을 지키고 그 죄를 묻고자 하니, 임금이 부의 죄를 벗기려고 서장관을 삼아서 보내었다.

그 해 12월 9일, 6월 25일 보냈던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서(李舒)[18]·총제(摠制) 안원(安瑗) 등이 명나라 서울(남경)에서 돌아왔다. 건문제 조정은 태종 1년 6월 12일 태종의 조선 국왕직을 승인(고명, 인장)했으며, 이에 조선 조정은 한 발 더 나아가 빠른 시일 내에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명나라의 예제(禮制)를 예부(禮部)에 청하였더니, ‘중국의 예제는 번국(藩國)에서 행할 수 없다.’ 하였고, 면복(冕服)을 청하였더니, ‘주문(奏聞)하면 만들어 보내겠다.’ 하였고, 관제를 고치기를 청하였더니, ‘주문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황제가 친히 군사를 점검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연왕(燕王)을 치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전황이 연왕에게 유리하다는 대목이 없는 유일한 부분이란 점에서 이 기사는 의미가 있다. (면복은 태종 2년 2월 2일 내려온다.)

다음해(1402년) 3월 6일, 정삭 하례(새해 인사)로 9월 28일에 보냈던 하성절사(賀聖節使)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돌아왔다.
“연병(燕兵)의 기세(氣勢)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帝兵, 제병)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4월 10일, 즉위 축하 사절로 1년 간을 머무른 사신 축맹헌과 사은사 노숭이 길이 막혀 요동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5월 20일 다시 떠났다[19]. 한편 6월 1일에는 중국의 정변에 따라 서북면(평안도)에 5개 성을 쌓는 것을 논의했다.

결국 그해 9월 28일, 3달 열흘 전 정변이 연왕의 승리로 끝났음이 보고되었다.

통사(通事) 강방우(康邦祐)가 요동으로부터 평양에 이르렀는데,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방우(邦祐)의 말을 비보(飛報)하기를, “6월 13일에 연왕(燕王)이 전승(戰勝)하여, 건문 황제(建文皇帝)가 봉천전(奉天殿)에 불을 지르게 하고, 자기는 대궐 가운데서 목 매달아 죽었으며, 후비(后妃)·궁녀(宮女) 40인이 스스로 죽었고, 이달 17일에 연왕이 황제의 위(位)에 올랐는데, 도찰원 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兪士吉)과 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왕태(汪泰)와 내사(內史) 온전(溫全)·양영(楊寧) 등을 보내어, 이들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이미 금월 16일에 강을 건너왔고, 역사(力士) 두 사람과 본국 환자(宦者) 세 사람이 따라옵니다.”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박석명(朴錫命)에게 말하기를,“꿈에 중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내가 사람을 시켜 성지(聖旨)를 전사(傳寫)하게 하여 보았으니, 중원(中原)에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들어맞았다.

당시 요동은 동녕위 천호 임팔라실리가 만 여명을 일으켜 배반을 하는 등(1402년 4월 5일 기사),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임팔라실리는 조선에 건너와 살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했으며, 이들은 4월 중순경 받아들여져 4224명이 전국에 분산 배치되었으나, 논의 끝에 결국 그 해 말 압송되었다(12월 23일 기사).

한편 정변이 끝난 후(1403년 1월 13일 기사), 영락제는 요동 천호 왕득명을 조선에 보내 동녕위의 이탈자들을 보고 돌아오라는 칙을 내린다.

“황제는 동녕위(東寧衛)의 도망해 흩어진 관원(官員)과 군민(軍民) 등에게 칙유(勅諭)한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동녕위를 개설(開設)하여 호생(好生)의 덕(德)으로 편안하게 길렀으나 너희들이 매양 늦게 왔고, 건문(建文) 연간에 너희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으나 매양 임의로 흩어져 달아나매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은 천하가 태평하여졌고, 내가 태조 황제의 법도를 좇아서 너희들을 편안하게 기르니, 모두 돌아와서 동녕위 안에 거주하여, 벼슬하던 사람은 벼슬하고, 군인노릇 하던 사람은 군인노릇 하고, 백성은 백성노릇 하여, 사냥하고 농사지어 생업에 종사하되 편할 대로 하고, 두려워하고 놀래고 의심하지 말라. 만일 끝내 고집하고 흩어져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으면, 오랜 뒤에 뉘우쳐도 때는 늦을 것이다. 그러므로 칙유(勅諭)한다.”

이때 태종은 "이것은 우리 나라에 이르는 글(조서)이 아니고, 또 칙유(勅諭)는 개독(開讀, 꺼내어 직접 읽는)하는 예(禮)가 없다." 라면서 4배는 하고 고두는 하지 않았다. 개겼네 또 사례는 면복을 벗고나서 했다. 왕득명 등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후 동녕위의 군사들, 즉 만산군(漫散軍)은 차츰 돌아오게 되는데, 1403년 3월 기사에 따르면 그 인구가 군민 1만 3641명에 남녀가속 1만 920명에 달했으며, 1405년 3월 기사에서도 아직 5천명 가까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다. 다만 이들은 중국인이 아니고, 대부분이 고려 혹은 여진 출신이었다(태종 6년 5월 23일 기사). 태종 8년까지도 여전히 천여명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사로 보아, 조선은 속속 이들을 송환했지만 돌아가지 않는 이들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원정을 즐기는 영락제 시대에 들면서 조공 품목이 더 늘어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댓가도 있었으니, 영락제는 다음해(태종 3년, 1403년) 바로 조선 옥새와 곤룡포를 내려주는 등 조선 조정의 정통성을 완전하게 인정했다[20]. 흥미롭게도 삶의 궤도가 비슷했던 태종 이방원과 영락제는 같은 해에 죽었다. (1422년, 태종은 음력 6월, 영락제는 음력 8월, 세종대왕의 치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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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아무래도 주체는 후에 영락제가 되다 보니, 사료를 남기는 입장이라 위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의심이 있다. 또, 아예 영락제가 사실은 마황후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보인다.
  • [2] 아버지인 의문태자가 병에 걸렸을때는, 자신의 몸이 허약해질 정도로 아버지를 돌보느라 주원장이 걱정한 일도 있었다.
  • [3] 이경륭의 아버지는 명나라 개국공신인 문충이다.
  • [4] 이때 주체는 잠깐 길을 잃기도 했으나, 직접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강의 흐름 등을 살펴보면서 길을 찾았다.
  • [5] 여담으로 이 주고후는 나중에 조카인 선덕제에게 살해당했다.
  • [6] 명사 철현전에서는 20만군이 덕주를 함락하자 주체가 두려워서 물러났다고 나오는데, 명사 성용전에서는 철현과 성용이 그냥 공격해서 주체의 포위를 풀어버리고 기세를 타고 덕주까지 함락했다고 나온다.
  • [7] 이때 항복한 병사 3천여명을 그냥 묻어버렸다.
  • [8] 현재 중국 산동성 요성(聊城)이다.
  • [9] 오전 일곱 시부터 아홉 시
  • [10] 오후 한 시부터 세 시
  • [11] 안휘성 영벽현.
  • [12] 그러나 영락제의 장인이자 개국공신인 서달의 제사는 계속 지내야 했으므로 서휘조의 아들에게 작위는 계속 이어진다.
  • [13] 아이러니하게도 서휘조의 동생인 서증수(徐增壽)는 위에서 나온 것처럼 영락제에게 내응하려고 했다가 발각된 뒤에 모반 음모를 자백하라는 건문제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사형에 처해진다. 형제의 서로 다른 운명이 참 얄궃다.
  • [14] 건문제처럼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 마황후처럼 불에 타서 죽어 시체가 완전히 불에 탔거나 건문제가 데리고 탈출했다는 설도 있다.
  • [15] 영락제 입장에서는 정통성을 위해서였다.
  • [16] 북정록(北征錄)이라는 책에서는 영락제의 이런 언급이 나온다. "학자들은 종이에 있는 것만 볼 줄 안다. 이것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
  • [17] 그래도 피터 퍼듀 같은 사람들은, 영락제는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공세지향적인 황제였고, 이후 명나라 군주들은 유목세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 그럴 의지도 없는 작자들이었다고 그럭저럭 편을 들어주었다.
  • [18] 보낼 때의 관직은 문하우정승, 즉 고려시대의 관직이 남아 있었다.
  • [19] 후에 사재소감 임군례가 베이징을 방문해 축맹헌을 만나고 왔다는 기사(1411년 6월)에 따르면 이들은 정부가 바뀌었으나 숙청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20] 거꾸로 말하면 그 이전까지는 고려 옥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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