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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제

last modified: 2015-04-05 15:46:14 by Contributors

명의 역대 황제
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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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무종(武宗)
시호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
(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
연호 정덕(正德)
주(朱)
후조(厚照)
생몰기간 1491년 ~ 1521년 6월 20일(31세)
재위기간 1505년 6월 19일 ~ 1521년 6월 20일(15년 305일)

Contents

1. 개요
2. 인생을 건 아바타 놀이
3. 유언
4. 트리비아와 기행
5. 평가
5.1. 정말 암군인가?
6. 기타

1. 개요

명나라 11대 황제이자 홍치제의 장남.

별로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는 황제로 막장 치세의 시범타를 때린 인물이다. 어릴 때만 해도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불교에 대해 잘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황제가 된 후엔 방탕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환관 유근(劉瑾)을 너무나 총애했고, 결국 유근은 권신이 되었다. 재위 초반에 일어났던 유육유칠의 난도 유근의 부하가 유근을 믿고 가혹하게 농민들을 쥐어짜다 일어난 결과였는데, 이후 유근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못되먹은 짓을 자행하다가 아예 간이 부었는지 반역까지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형에 처해졌다.

여자들을 모아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얼마나 방탕했으면 고작 30살에 죽었을지 생각해보자. 사망할 당시 아들도 형제도 없어서[1][2] 황위는 사촌동생인 가정제에게 넘어간다. 최후도 참 안습해서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한다.

2. 인생을 건 아바타 놀이

한동안 사파리 놀이에 심취하여 그렇게 보내다가 싫증이 난 그는 이후 그 유명한 아바타 놀이(정확히 말하면 혼자놀기)를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수(朱壽)'라는 제2의 이름을 붙인 다음 스스로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내린 것이다. 무종은 군대를 끌고 갈때면 주수의 이름으로 출정하였으며, 대장군인 본인이 황제인 본인에게 글을 올리기도 하고 상찬을 하기도 하는 등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종은 위무대장군이란 거창한 작위를 자신에게 내렸고, 진국공에 봉하였다. 1519년에는 주수를 태사에 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키기조차 하였다. 흠좀무.

법률적으로는 '무종 정덕제 주후조'이자 '위무대장군 진국공 주수'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으나 둘 다 정덕제였다.

다음은 황제 주후조가 대장군 주수에게 대린 조문이다.

"총독 군무 위무 대장군 총병관 주수는 몸소 육사를 이끌고 변경을 조용케 하였으므로 특별히 진국공에 봉하고 매해 쌀 5000섬을 녹봉으로 주도록 한다."
1517년 경 총애하는 신하 강빈과 함께 궁을 빠져나가 주수의 관청으로 되어있는 선부로 향했다. 그곳의 악공이 뛰어나단 얘기를 듣고 갔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신하들 몰래 가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를 안 대신들이 서둘러 쫓아가 환궁을 간하였으나, 무종은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열받은 궁궐 관리들과 신하들이 몰려와 다소 강한 어조로 임금이 궁궐에 머물러 황제의 위엄을 지키라고 간청했지만, 무종은 150여명의 관리들에게 태형 30대를 내리고 그대로 자기 갈 길을 갔다. 노쇠한 신하들 중 십수명이 곤장을 맞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남색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그가 자신의 영지를 선부로 정한 것은 그 까닭이 있다. 선부는 몽골이 중국으로 쳐들어오기 위한 첫번째 루트였던 셈. 즉 자신을 최전방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몽골에서 쳐들어왔을 때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전투의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양쪽의 군대는 수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부족해 진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한 기록에서는 승리라고도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패배라고도 한다.[3] 아주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거나 운빨이 기가 막히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해석은 알아서.

이후 이미 진압이 끝난 친척 영왕의 반란을 자신이 직접 잡았다고 하기 위해서 "풀어줬다 잡는" 개그쇼를 벌이는데,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반란 진압을 위해 난징까지 내려왔다가 중간중간 머무르는 곳에서 낚시와 뱃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북경에 돌아오는 중 한 호수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3. 유언

유언만큼은 옳은 소리였는데 "지금까지 짐이 한 짓들은 전부 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짐의 행동을 보고 근신하며 이후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라는 내용이었다. 루이 14세 필의 참회의 말씀. 참고로 그가 죽은 곳은 자금성 바깥 북해공원 근처에 마련한 저택이다. 그는 유목민스러운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하며,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자금성 바깥에서 살았다.

4. 트리비아와 기행

등불 & 불꽃 놀이 매니아기도 했다. 1514년 정월 축제를 위해 쌓아 놓은 화약이 폭발해 건청궁[4]이 홀라당 다 타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멋진 불꽃이로고."라고 말했다. [5]

진정한 중국판 네로라고 할 수 있겠다(사실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 네로가 보이는 광기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더욱…). '홀라당 다 타버린 건청궁을 세운다고 전국에서 백만냥을 걷어 들인 것은 기본이었다.[6]

유목민족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자금성에 살기 보다는 표방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식 텐트를 치고 살았고 평소에도 이민족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라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산스크리트어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서역 인물들과 자주 접견을 하며 교류를 추진했던 것도 명나라 황제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좀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황제라고 평할 수도 있다.

암군중 하나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다른 3명의 황제들과는 달리 심각한 폭군이나 암군 정도는 아니다. 그저 너무나도 놀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고 만일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람이 황제였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중국 드라마에서는 조금 반영되었다. 협녀유룡이 대표적으로, 이 작품에서 그는 유근과 태후에게 정치를 맡겨두고 마구 놀다가 미복잠행을 나온 후에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되어 태후와 유근을 축출하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유근은 축출되어 능지처참 되지만 이것은 환관 내부의 알력 때문이었다. 이것 말고도 그가 긍정적이나 유쾌한 인물로 묘사 된 경우는 무척이나 많다. 물론, 드라마는 실제 역사와 무척 다르다는 건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5. 평가

5.1. 정말 암군인가?


정덕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 황제가 어디있겠냐마는. 한족이 기록한 사료 중심으로 접근하는 전통적인 역사 연구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구방법론이 개발되면서 정덕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먼저 그가 비록 제멋대로 행동하고 환관을 중용하기는 했지만 결코 어리석은 황제는 아니었다. 좋은 황제의 첫번째 조건은 좋은 신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덕제 시기에 재상을 지냈던 인물이 이동양, 양정화 등이다. 모두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정덕제는 이 사람들이 하는 조언을 (놀지 말라는 조언은 빼고) 대부분 받아들였다. 또한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해서 신하를 처형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고 쓴소리를 한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았다. 때문에 신하들과 갈등은 있었지만 정덕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그 다음 황제인 가정제나 만력제 시절과 같은 황제와 신하 사이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덕제가 놀러다니기는 했지만, 그가 황제로서 해야 할 일에 게을리 했다는 뜻은 아니다. 궁 안에 붙어있지 않았을 뿐. 신하들의 보고는 꼬박꼬박 처리하고 국가의 중요 정책은 자신이 직접 결정했다. (다만 황제가 주관해야 하는 의례행사는 자주 빠지고 대신 친척을 보냈다.) 게다가 정덕제는 바깥에 싸돌아다니기는 했어도 상주문은 꼬박꼬박 받아서 일은 했다. 영왕의 반란을 풀어줬다 잡는 개그쇼라고 욕을 먹는 남순시기에도 수보를 데리고 내려가서 꾸준히 정사에 관한 논의를 계속했다. 물론 북경으로 돌아가자는 요구만큼은 씹었지만 그리고 선부로 이동해서 돌아다닐 때도 신하들은 절대 자기가 사는 선부로 오지 못하게 했지만 무조건 상주문은 크고 작건 전부 보내라고 했던 것. 뒤에 나오는 만력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환관에게 휘둘렸던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황제와는 다르게 권력은 끝까지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세를 떨치던 환관도 황제의 말 한마디에 두동강. 유근이 죽은 다음에 실세를 장악한 환관은 유근의 최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멋대로 설치지 못하고 조금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유근의 전횡은 세금제도의 개혁을 위해 환관을 이용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환관을 내세워 악명은 고스란히 환관이 받게 하고 황제는 실속을 챙긴 다음 나중에 환관을 처형함으로써 명분까지 챙겼다는 것이다.

武종이란 이름을 받았던 것처럼 군사적인 면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다. 문신들뿐만 아니라 무관을 총애했고 자주 변방을 순찰하는걸 좋아했다. 병사들에 대한 포상도 자주하고 군대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데도 관심을 쏟았다. 또 자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건 명나라에서 홍무제와 영락제를 제외하면 정덕제밖에 없다. 황제가 직접 전투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하들이 얼마나 기절초풍했을지를 생각하면.

참고로, 이게 그의 공적은 아니지만, 정덕제 시기부터 명나라의 상업이 급속히 성장하였고 명학이 등장하는 등 사상과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6. 기타

무종 정덕제의 재위 기간은 대략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전반기와 겹친다.

마법사 무림에 가다에서는 무림 후반에 등장했다. 다만 최후는 반란군에 의해 참수당했다고.

중국계 프랑스 작가 다이 시지에는 정덕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자의 공중곡예를 썼다. 섹스의 지속시간을 두고 황제가 코뿔소와 배틀을 벌이는 므흣하고 황당무계한 소설.

여담이지만 그의 치세에 유럽에서는 세계사의 변화가 시작된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챠오 윤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여기서도 놀기 좋아했던 황제로 언급되는건 여전하며 자신이 총애하는 첩(챠오윤을 포함해)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많은 외국인들도 만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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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후궁 마씨와의 사이에 연가공주 등 1녀만 두었다. 철종하고 비슷하다.
  • [2] 남동생으로 울도왕 주후위(朱厚煒)이 있긴 했으나 일찍 죽었다.
  • [3] 패배라고 보는 기록에서는 변방 수비군 50여 명이 죽고 몽골인은 16명 정도가 죽었다고 적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승리를 선전하고 패배는 감추었을 테니까 패배가 사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 것에 긍정적인 선례가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문인 관료들에 의해 부정적인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한 예인 정화의 원정에 관한 기록이 삭제된 것을 봐도 당시 관료들이 이런 문제에 얼마나 극도로 예민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알아서 판단할 것.
  • [4] 자금성에서 황제의 침궁 역할을 하는 곳. 대부분의 황제들은 여기에서 일을 처리했다.
  • [5] 다만 신하들에게 불을 끄라고 명령한 뒤 나중에 한 말이었다.
  • [6] 출처; 샹관핑, 《중국사 열전 황제편》,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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