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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철

last modified: 2015-04-09 04:21:22 by Contributors

199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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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진출 직전인 1999년의 모습.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시절의 모습.

이제는 해설자!! 넥타이가 주황색인건 덤

한화 이글스 영구결번
No.23

이름 정민철(鄭珉哲)
생년월일 1972년 3월 2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전광역시[1]
출신학교 신흥초-충남중-대전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2년 빙그레 이글스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1992~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2000~2001)
한화 이글스(2002~2009)

빙그레/한화 이글스 등번호 55번
김태민 정민철(1992~1999) 조규수(2000~2001)
한화 이글스 등번호 55번
조규수(2000~2001) 정민철(2002~2004) 윤규진(2005~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23번
엔젤 페냐(2004) 정민철(2005~2009) 영구결번[2]

역대기록
기록 기록내용
연속 시즌 두자리 승수 8시즌
(1992~1999 시즌)

Contents

1. 개요
2. 투구 스타일
3. 데뷔와 전성기
3.1. 1992년
3.2. 1993년
3.3. 1994년
3.4. 1995년
3.5. 1996년
3.6. 1997년
3.7. 1998년
3.8. 1999년
4. 일본 진출과 몰락
4.1. 진출 이전의 분위기
4.2. 일본 진출 첫 해, 2000년
4.3. 일본 진출 두 번째 해, 2001년
4.4. 일본 시절 총평
5. 선수 시절 후반부
5.1. 2002년
5.2. 2003년
5.3. 2004년
5.4. 2005년
5.5. 2006년
5.6. 부활, 2007년
5.7. 2008년
6. 은퇴, 2009년
7. 평가
8. 떡밥들
8.1. 비인기 팀 소속이라 관심을 못 받았다? 저평가 됐었다?
8.2. 90년대 최고 투수 문제
9. 코치로서의 모습
9.1. 지도자 생활 초기
9.2. 혹평과 함께 2군으로
9.3. 2013 시즌, 1년만에 다시 1군으로
9.4. 2014 시즌
10. 해설자로서의 변신
11. 기타
12.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90년대 최고의 선발투수
이글스의 영원한 에이스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투수코치, 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등번호는 55→23번.

통산 다승 2위(161승)를 비롯하여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승 이상, 평균자책점 2.80, 연당 평균 투구 이닝 188이닝, "퍼펙트 게임에 가장 근접했던 투수" 등의 기록을 가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이다. 반면 단 한 번도 다승왕을 기록하지 못하는 등 은근히 비운의 투수이기도 하다.

1990년대 전체에서 보았을 때, 선발 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 완투 1위(59), 완봉승 1위(19)이며, 정민철이 데뷔한 1992년도부터 1999년까지 다승, 탈삼진, 이닝, 방어율, WHIP, 완투, 완봉승 모두 정민철이 1위이다.# 실제로 어느 분이 1990년대 선발 투수들을 분석한 결과 정민철이 1위로 나왔다.# 이런 엄청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비인기팀이라는 이유로 정민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정민철의 대단함은 최근에 와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꼴통쇼라는 정민철이 참여한 강연회가 있다. 정민철의 인생관과 유년시절 그리고 깨진 퍼펙트게임 에피소드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

2. 투구 스타일

전성기 시절 주무기는 빠른 공. 최고 시속은 150 가량으로 알려졌으나, 최고 구속은 149Km 정도였으며 실제 경기에서 찍히는 최고 구속은 145~8km 정도였다. 때문에 전성기 당시 강속구 투수라고 불리긴 했으나 “리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라는 식의 수식어는 따라 붙지는 않았다. 사실 정민철의 강점은 구속보다도 구위 자체. 테일링이 좋은, 소위 말해서 공 끝이 좋은 타입. 즉, 원조 돌직구. 동시대 선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구위로 평가 받는다. 특히 역대급 우타 장타자인 박경완과 역대급 우타 교타자인 이종범이 본인이 경험한 최고의 공으로 정민철의 공을 꼽았고, 전성기 정민철의 볼끝은 임창용과 오승환보다 더 좋다고 평가하였다. 슬라이더와 커브, 포크볼 등크볼 등 변화구의 레퍼토리 자체는 다양했으나 어디까지나 빠른 공을 뒷받침하는 수준이었을 뿐 특별히 주무기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제구력도 뛰어났으며칠 때면 쳐보라고 가운데로 팡팡 꽂아 넣는데 볼넷이 나올 리가 없다. 스태미너도 좋아서 완투를 밥 먹듯이 한 전형적인 우완 정통파 파이어볼러 이닝이터 선발투수.

다만 2000년대 이후로 직구 구속과 구위가 급격히 떨어진 탓에 커브와 커맨드(제구력) 위주의 기교파 투수로 폼을 바꿔야 했다.

3. 데뷔와 전성기

대전 출신으로, 일본 진출 시절을 제외하고 출생부터 은퇴까지의 선수생활을 모두 대전에서 보낸 대전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1992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고졸지명으로 대전을 연고로 하는 한화 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였다. 150Km/h대 초반의 빠른 직구를 주무기로 선발 투수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데뷔 첫해부터 바로 선발진에 투입되어 데뷔 첫 해 14승, 이듬해 1993년엔 13승을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92년부터 97년까지 56완투를 기록했는데, 90년대 활약한 투수 중에 이 기록을 넘어서는 투수는 아무도 없다.

정민철의 전성기 당시 팬들은, 정민철이 늘 실제 성적에 비해 언론의 관심을 덜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인데, 무엇보다도 팀 성적이 시궁창이었다(..). 게다가 묘하게도 매년 승수가 13승 아니면 14승으로 딱 고정되어버린 탓에 다승왕과 거리가 멀어, 투수의 승수를 최우선으로 따졌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약간 푸대접 받았던 것도 한 이유. 또 아래에서 내내 언급되겠지만, 기묘하게도 거의 매년 정민철보다 겉보기 성적이 더 나은 투수가 갑툭튀한다거나 이슈가 될만한 투수가 튀어나왔다. 덕분에 결국 MVP는 커녕 골든글러브조차 한번도 못 타봤다.

3.1. 1992년

사실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일단 동기들이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등으로 고교 시절부터 이름값이 화려했으며, 정민철은 최고구속이 아직 138km/h 정도밖에 나오지 않던 완성되지 않은 투수였기 때문. 하지만 당시 정민철을 보았던 사람들은 볼끝이 좋아 대형투수의 자질이 엿보였다고 한다. 김영덕 감독이 '박찬호와 정민철은 꼭 잡아달라'라고 했다는 소문도 있고. 어쨌거나 1992년에 정민철은 본인의 발로 빙그레를 찾아가 입단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프로에 직행하기보다 일단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다소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런 선택을 하게된 것은, 중학교 때 키가 자라지 않아서 1년 유급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때 정민철이 프로에 바로 입단한 것은 신의 한수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조성민, 박찬호처럼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은 그렇다쳐도, 92학번엔 박재홍, 차명주, 전병호 등 경쟁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들과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했다면 네임벨류에서 밀린 정민철이 어떤 식으로 프로에서의 첫 커리어를 시작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데뷔 첫해, 정민철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팀내에서도 드래프트 1순위 신인인 지연규가 훨씬 조명받던 시기라 해외 전지훈련에서도 제외됐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지연규가 아마 시절 때의 무리와 스프링캠프 시절의 과도한 구위 끌어올리기 때문에 나락에 떨어져 정민철이 개막전 엔트리에 들게 되었다. 개막전에 만루홈런을 맞기도 했지만 이후 불펜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해태전에서의 호투를 바탕으로 선발진에 합류했다.

평균자책 2.48, 195 2/3이닝, 14승4패 7세이브, 10완투로 신인투수로서는 역대급 기록을 남겼으나 하필이면 같은 해 염종석이 있었다.
염종석은 평균자책 2.33로 시즌 1위를 차지했으며 17승9패 6세이브, 13완투를 기록해서 정민철보다 앞선 성적을 기록한데다가, 데뷔 첫 승부터 9승까지의 승리가 완투승이라는 것도 이슈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도 둘의 명암이 엇갈린 탓에[3] 결국 신인왕과 골든글러브가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정민철의 콩라인 전설이 시작된다.그리고 한국 야구에 고졸신인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3.2. 1993년

프로 2년차 때 군복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위병이 된 관계로 18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한다.[4] 그런데 18 경기 중에 10경기를 완투한다. 그 백정의 이름은 김영덕이다.[5] 그런데 이 18 경기 중에 13승을 찍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적어도 93년의 정민철은 불운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력=성적이었던 셈. 한편 방어율은 2.24였으나, 하필 93년은 프로야구 역대 최강의 투고타저 시즌에 꼽히는 해로[6] 5위에 그쳤다. 중무리들이 득실거리던 시기였고 정민철 본인도 이닝수가 적어서 비교하기가 애매한 편. 사실 선발투수만 따지더라도 당시 커리어하이였던 조계현 덕분에 2위.

3.3. 1994년

커리어하이 시즌.또한 아름다운 콩라인이 된 시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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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율 2.15, 탈삼진 196, 이닝수 218로 세 부문 1위를 찍었다. 덧붙여서 경기당 평균 투구수는 124.5개(..).그런데 문제는 승수가 적다는 것. 이 탁월한 성적으로 10패를 찍었다. 게다가 당시는 투수의 승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던 시대. 14승 밖에 못했다고 투수 트리플 크라운으로 쳐주질 않았다(..).

결국 이 놈의 승수가 모자란 덕분에 투수 골든글러브정명원에게 돌아갔다. 이때 정명원의 성적은 방어율 1.36, 40세이브. 뛰어난 성적이지만, 정민철은 선발투수이고 정명원은 마무리투수이기 때문에 21세기였다면 문제가 되었을 법하다. [7] 정명원의 소속팀은 태평양 돌핀스로 당시 한화 이글스보다 더한 비인기 팀(..)이라 팀빨에 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명원이 골든 글러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명원이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40세이브를 기록했으며 이 사실이 시즌 내내 이슈가 되었기 때문.

3.4. 1995년

1995년은 방어율 3.21에 13승을 기록했다. 우수한 성적이지만 정민철치곤 좋은 성적이 아니다(..). 사실 손가락부상이 있었던 탓에 달랑(?) 162 이닝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3.5. 1996년

1996년, 방어율 3.03에 13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12패도 기록했다. 219 2/3 이닝으로 그해 최다 이닝을 기록했다. 우수한 성적이지만, 같은 팀의 구대성이 미쳐 날뛴데다가[8] 선발투수 중엔 정민태가 이 해 각성했고, 주형광이 다승1위[9], 탈삼진1위를 기록했으며 선발투수로서 종합적인 면으론 조계현이 압도적이었다.

3.6. 1997년

커리어하이 시즌2.

208 2/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2.46을 기록. 그런데 14승 11패를 기록했다. 한화는 그때도 화나[10]

타이틀 복도 없었다. 1위를 기록한 부문은 160삼진의 탈삼진 1위 달랑 하나 뿐이며, MVP는커녕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조차 이대진에게 밀렸다.

21세기 이후의 관점 + 정민철 빠심으로 볼 때 97년 골든글러브 수상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일단 이 해 방어율과 다승 1위는 김현욱이 차지했는데, 문제는 이 성적이 김성근에 의해 만들어진 성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구원투수로서 올린 성적이라는 것도 문제였다.[11] . 바로 이 때문에 김현욱을 뽑기가 애매하다고 생각한 기레기들이 대안을 찾아나섰는데.. 그들이 선택한 것이 정민철도 아닌 이대진이었다. 97년 당시 선발투수로서 이대진의 성적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정민철에 비해 확실히 못하다. 게다가 정민철은 아래에서 언급될 노히트노런까지 기록했다.

문제는 패전 횟수가 많았다는 것

므르브에서조차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방어율 2.27에 13승 12패(..)로 사이영 상을 수상한 게 겨우 2010년의 일이다. 그런데 97년도 한국프로야구였으니.. 당시에 투수 스탯으로 다승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게다가 팀 성적도 영향이 있었다. 정민철의 소속팀 한화 이글스는 8개 팀 중 7위를 기록한데 반해(..), 방어율 2.46로 11패 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깐. 이대진의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는 정규시즌 1위에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기 때문. 한마디로 우승팀 버프도 작용한 셈.[12]

한편, 이 해 정민철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기록 하나를 남겼다. 1997년 5월 23일 바로 OB 베어스를 상대로 현재까지 퍼펙트 게임에 가장 가까운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13]. 불행히도 이 경기는 남아있는 영상자료가 없다.

한편, 일부 팬들은 바로 이 시즌부터 정민철의 구위가 하락할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보이지 않는 위험 하지만 딱히 로테이션을 거르는 일은 없었다.

3.7. 1998년

정민철이 본격적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한시즌.

일단 팔꿈치 부상으로 6월과 7월을 통째로 날려 보냈는데, 이렇게 장기간 로테이션에서 빠진 것은 이때가 선수생활 처음이었다. 그동안의 혹사를 아는 많은 팬들은 정민철도 '여기까지인가?' 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는데, 복귀하자마자 1피안타 1실점 호투를 기록한다.[14]

하지만 정민철의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일단, 이전까지 밥 먹듯이 하던 완투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 해 유일한 완투가 1경기밖에 없었다. 물론 감독이 들에서 이희수로 바뀌며 관리받기 시작한 이유도 있긴 하지만, 복귀 이후 구속 감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한편 구단 측은 성적부진과 부상으로 로테이션을 걸렀다는 핑계로 다음해 연봉을 동결했다.

3.8. 1999년

방어율 3.75, 18승8패. 정민철이 15승+를 기록한 시즌은 99년이 유일하다.

문제는, 누가 봐도 정민철은 예전의 정민철이 아니었다는 것. 방어율은 3.75로 이전의 정민철 성적을 감안해보면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인 관계로[15] 시즌 6위로 무난한 기록. 201 2/3이닝으로 이닝이팅 능력도 건재했다.[16]

이정도면 예년에 비해 다소 부진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평범한 팬들조차 구속이 떨어진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민철 본인의 증언이나 200 이닝을 찍은 것을 볼 때, 그동안의 혹사로 인한 데드암이 의심되었던 상황이었지만 당시는 혹사 문제에 둔감했던 시절인데다가, 정민철의 나이도 겨우 만 27세였다. 특별히 통증이 있다거나 수술을 필요로 하지도 않아서, 본인 스스로는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 시점에서 되돌아 본다면, 이 때 정민철의 상황은 딱 프로토타입 윤석민(..).[17]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야구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봤다는 것.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손톱이 갈라지는 바람에 두 번 등판해서 두 번 다 영 재미를 못 보긴 했다만.

어쨌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정민철은 FA가 되어 일본진출을 선언한다.

4. 일본 진출과 몰락

4.1. 진출 이전의 분위기

사실 98년 시즌 이후 시점에서 정민철은 이미 구단 승인 하에 해외진출이 가능하다는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당시 관련 자격 조건은, 해외 진출 가능: 7시즌, FA취득: 10시즌이었다. 대졸선수가 대부분인 당시 여건상 해외진출이나 FA나 다 늙은 뒤에나 가능한(..) 극악한 조건이지만, 정민철은 당시에 유일무이한 고졸 출신 해외 진출 대상자였다. 참고로 류현진 이전에 30세 미만의 나이로 해외진출한 선수는 정민철 단 한사람뿐이다.

사실 제도 시행 이전부터 정민철의 존재는 일본 구단들에 민철사마 하앍하앍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중반 무렵 스프링캠프에서 한화의 연습경기 상대였던 한 일본 팀 감독이 "정민철 같은 투수를 가진 한화 감독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정민철 본인의 경우, 이미 해외진출 의사를 명확히 밝힌 상태였다. 해외진출 자격을 처음으로 갖춘 98년에는 일단 한화 구단이 “팀 우승은 한번 하고 가야지”라는 핑계로 불허했으나,영원히 해외 가지 말라는 의미 99년은 시즌 시작 전부터 사실상 해외진출을 약속한다. 이는 다음해인 2000 시즌 종료 이후 정민철이 FA 자격을 취득하기 때문. 그러니까 1년 먼저 해외 진출하면 거액의 이적료를 받지만, FA되면 그런 거 없다는 것. 따라서 99년 시즌 시작 전부터 정민철과 구단 사이에 해외진출이 약속된 상황이었다. 마침 99년에 어떻게저떻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나 구단이나 해피하고 쿨하게 해외진출이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이전부터 한국 선수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오릭스는 99년 10월 14일 최초로 정민철, 구대성, 정민태의 신분조회를 공식 요청, 선빵을 날렸다.[18] 하지만, 10월 말 경 거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신분조회를 요청하고 나선다. 일본에서 가장 명문으로 알려졌고 자본력이 앞서는 요미우리가 표면에 등장하자 오릭스는 그야말로 데꿀멍에 닥치고 버로우(...). 결국 정민철 영입에 나서는 일본 팀은 사실상 여미우리가 유일무이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11월 19일에 MLB사무국에서도 크보에 공식적으로 정민철의 신분조회를 요청하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시스템 상 어느 팀에서 요청한 것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후보는 세 팀. 정민철에게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시애틀 매리너스, 한국 선수라면 닥치는대로 찜부터 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 한일 슈퍼게임에 스카우터를 파견한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력한 후보. 하지만, 나중의 전적을 볼 때 십중팔구 컵스였던 것으로 보인다.[19] 훗날 류현진도 못 먹은 컵스는 백년백년하고 웁니다.

따라서 분위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vs 메이저리그가 되었는데, 이게 2010년대라면 팬들이 “아니 왜 메이쟈 안 가고 일본 감???”이라며 난리법석을 부렸겠지만, 때는 서기 2000년. 메이쟈에서 평범한 선발 중 일인이 될 바에는 일본에서 에이스 노릇하는 게 더 명예롭다고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여론은 일본 진출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메이저리그의 영입 의사는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적극적이었다. 시애틀은 이미 2년 전부터 정민철을 지켜봤다고 수줍게 고백알려졌으며, 컵스 또한 일단 한번 와보시라고(...) 비행기 티켓을 보낼 정도였다. 선수 본인은 끝까지 요미우리 vs 므르브를 놓고 갈등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컵스를 상대로 트라이아웃 참여 의사까지 밝힌 상태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076&aid=0001997681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요미우리였다. 계약금 1억엔, 연봉 5천만엔, 이적료 2억5천만엔.[20] 위 링크에서 본인이 언급했듯이 아무래도 므르브에서 평범한 투수가 되는 것보단 일본에서 에이스가 되는 것이 더 가능성도 높고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듯하다.[21]

그런데 98, 99시즌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정민철의 구위가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의구심은 존재했다. 부정적인 것은 아예 보도 자체를 하지 않았던 당시 언론 관행상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화팬들은 이 문제로 근심걱정초조불안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왠만한 야구 관계자들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던 상태.[22]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팔꿈치 통증’이라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는 이상, 몸만 멀쩡해지면 구위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존재했다.

4.2. 일본 진출 첫 해, 2000년

정민철은 데뷔 경기에서 7이닝 1실점을 기록했으며, 두 번째 경기에서도 완봉승을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했...

...을 리가 있나.

다음은 당시 타임라인이다.

  • 3월 31일 시즌 개막. 하지만 정민철은 2군으로 출발
  • 5월 13일 개막 이후 43일 만에 1군 등록
  • 5월 19일 야쿠르트 스왈로즈 상대로 승리 투수가 됨. 7이닝 1실점 4피안타 1피홈런 1볼넷 7삼진.
  • 5월 20일 2군행(..) 단, 이미 다음 등판일은 6월 2일로 정해진 상태였다.
  • 6월 1일 예정돼 있던 다음날 1군행이 취소됨. 우천취소로 로테이션이 밀리면서 6선발이 필요없어졌기 때문.[23]
  • 6월 13일 24일만에 1군 승격
  • 6월 1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상대로 완봉승을 거둠. 7피안타 1볼넷 6삼진.
  • 6월 23일 요코하마 상대로 선발 출장했으나 1과 2/3이닝동안 난타당하고 강판됨. 6피안타 1피홈런 2탈삼진 4실점.
  • 6월 30일 히로시마 카프 상대로 선발 출장했으나 역시 난타당해 1이닝(...) 만에 강판됨. 4피안타 2피홈런 1볼넷 1탈삼진 5실점.
  • 7월 1일 1군 등록 말소.
  • 7월 26일 미야타 투수총괄코치, 정민철에게 2군에서 한 경기 더 투입된 뒤 1군 복귀시킬 것이라고 통보. 한편 이 시점에서 정민철의 2군 성적은 5승3패 방어율 2.21(2군 이스턴리그 방어율 1위)
  • 8월 3일 2군 등판. 5이닝 3피안타 1볼넷 9탈삼진 2실점
  • 8월 10일 정민철 대신 조성민이 1군에 등록됨. 나가시마 시게오감독이 미야타 코치를 상콤하게 무시하고 결정한 것. [24]
  • 8월 22일 요미우리, 현대 유니콘스정민태 이적 교섭 시작
  • 8월 23일 정민철, 2군에서 분노의 호투(..) 7이닝 3피안타 7탈삼진 1실점.
  • 10월 28일 시즌 종료로 귀국(..)

정리하자면 이렇다.

개막 이후 2군에서 썩음 -> 5월 중순에서야 1군 등판, 호투함 -> 로테이션 문제로 2군행 -> 한달 만에 1군 올라와 완봉함 -> 다음 두 경기 시원하게 말아먹음 -> 2군으로 간 뒤 다시는 못 올라옴. 2군에서 분노의 호투함.

정민철이 일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엇갈린다.

정민철 팬들이 아직까지 꼴미우리를 증오하는 이유.

무엇보다도 요미우리는 처음부터 정민철을 땜질용 선발로 써먹을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요미우리가 정민철을 영입할 이유 자체가 의문투성였는데 정민철의 영입 시점에서 당시 요미우리의 외국인 투수 슬롯은 과포화상태였고, 그중 한 자리는 그 유명한 발비노 갈베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은 자리는 단 하나 뿐이었다. 문제는 이 한 자리를 놓고 세 명의 투수가 경쟁을 해야 했던 것. 그나마 그 자리도 애초에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럴 메이라는 선수였는데, 98년과 99년에 한신 타이거즈에서 어느 정도 실적을 올린 선수로, 99년 말에 계약금 +연봉 1억 5천만엔의 거액으로 정민철보다 앞서 계약한 상태였던 것이다.위키피디아 일본의 메이 항목

심지어 남은 경쟁자는 조성민으로 한국인이었다. 그러니까 요미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은 선발 자리를 놓고 한국인 두 명을 경쟁하게끔 한 것인데, 실제로 정민철에게 주어진 기회 자체가 달랑 4경기에 불과하며, 앞선 두 경기는 누가 봐도 완벽한 호투였다.뒤의 두 경기는 누가 봐도 말아먹긴 했지만 2군 성적도 매우 좋았다.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기회를 안 준 요미우리의 행보를 볼 때 처음부터 정민철의 영입은 보험용 6선발 내지 로또였고, 정민철이 아무리 호투했어도 기존 투수진이 건재하다면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외국인 투수 중 한명인 갈베스는 6경기 만에 2군으로 쫓겨나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25] 정민철이 1군에 간신히 올라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는데, 몇 경기 기회도 안 주고 5선발체제로 전환해 아예 외국인 투수 한 자리 없이 시즌을 보내기로 결정해버린다(..).

이때 당시 요미우리가 정민철과 한국 언론에게 댄 핑계가 그 유명한 “로테이션 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선발 로테이션이 꼬였다고 용병 투수를 한 달씩 2군에 보내는 팀이 과연 어딨을까? 덧붙여서 일본 역시 1군 말소 기간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0일이다. 로테이션이 꼬였다고 2군 보내면 기본적으로 10일은 썩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민철 본인을 비롯, 한국에서 이 얘기를 납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요미우리는 자기들이 쓰지도 않을 이웃나라의 에이스 투수를 다른 팀보다 앞서는 현금동원력을 이용해 영입한 뒤, 성적과 상관없이 2군에서 썩게 했다는 것. 게다가 처음부터 정민철과 함께 정민태도 영입하려고 했으며 실제로 00 시즌 종료 후에 정민태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외국인 투수 자리는 두 자리다. 한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었고 남은 한 자리를 한국인 투수 세 명이 경쟁해야 한다. 이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요미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거다. 다른 팀에서 터질 거라면 자기들이 잡아놓고 구석에 처박아 놓겠다는 심보 요미우리가 이따위 돈질삽질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만.

현지 팬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구글에 鄭ミン哲[26]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한 블로그에 따르면,
はっきり言って、投球内容はまったく記憶にないが、この頃の巨人は無駄に韓国人投手があふれていたので、在籍してた事だけはよく覚えている。
資料によると、2年間のレンタル移籍だったとのこと。本人が希望したらしいが、巨人というチームが悪かった。
メイやガルベス、マルティネスなど外国人選手がたくさんいた時期。
完封した翌日に外国人枠の関係で二軍落ちした事もあった。
韓国では実績を残してた投手らしいが、こういうのを飼い殺しというのか。
솔직히 말해서 투구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이 당시 거인은 쓸데없이 한국인 투수가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만은 잘 기억한다. 자료에 따르면 2년 임대 이적이었다는 것. 본인이 희망한 것 같지만,[27] 거인이라는 팀이 좋지 않았다.(뉘앙스 상 요미우리의 대우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정민철이 팀을 잘못 골랐다는 뜻)
메이, 갈베스, 마르티네즈 등 외국인 선수들이 많이 있었던 시기였다. 완봉한 다음날 외국인 할당량 문제로 2군으로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실적을 남기고 있었던 투수인 것 같지만, 이런 걸 바로 기르면서 죽이기飼い殺し[28]라고 하는 것이려나.

  • 정민철의 추락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며 요미우리의 행보도 합리적인 것이었다는 주장

하지만 정민철의 등판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 던진 두 경기에서 이닝, 실점, 탈삼진, 볼넷 등 외견상의 수치는 흠 잡을 데가 없으나, 구속 하락이 완연했다. 첫 경기의 최고 구속은 141km/h, 평균 구속은 137km/h이었고, 두 번째 경기에선 아예 140km/h을 넘긴 공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기본적인 구속이 나오지 않으면, 몇 경기 지나지 않아 다른 팀들의 분석을 통해 호구 잡힐 것이 뻔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2군에서 잘 던졌다지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1군은 1군, 2군은 2군. 이게 한국이었다고 가정해보자. 150km/h를 던질 수 있는 파이어볼러라고 알려진 외국인 투수를 영입했는데 140킬로를 던지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다? 5월도 되기 전에 팬들이 스카우터 해고를 주장했을 것이다(...).

애초에 요미우리가 정민철의 계약에 앞서 따로 대럴 메이와 계약한 것도, 정민철의 구속 저하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정민철의 구속 저하 사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던 상태인데, 상기한 대로 정민철이 요미우리에 입단하기 1년 전인 1999년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을 보면 유별날 정도로 정민철의 구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구속은 안 나왔지만 잘 던졌다”는 식으로. 요미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계약 전에 설마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입을 결정한 것은 "전성기 정민철"이라는 카드가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고, 몸에 특별히 큰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구속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일단 영입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는 2000년 내내 정민철의 구속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민철이 잘 던질 때도 못 던질 때도 패스트볼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었고, 2군에 있을 땐 '성적은 필요없고 구속은 올라왔는가?'라는 식. 하지만 끝끝내 정민철은 전성기 시절의 구속을 회복하지 못했다.

로테이션 문제도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갈베스가 빠져서 한 자리가 났다고 해도 여전히 남은 5선발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일본의 6선발은 곧 한국의 5선발과 마찬가지. 즉, 일본이라 해도 일년 내내 6명의 선발을 돌리는 팀은 없다.애초에 정민철 정도의 투수가 6선발 놓고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는 건 제쳐두기로 하자. 남은 다섯 명 중 한 명을 빼면 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 당시 요미우리의 선발 다섯 명은, 구와타 마스미[29], 우에하라 고지, 쿠도 키미야스, 다카하시 히사노리[30], 대럴 메이 였다.
그러니까 레전드만 세 명에, 초특급 신인에, 이미 일본에서 실적을 올린 외국인 투수 까지 있었다는 것. 게다가 시즌 최후반에는 사이토 마사키가 복귀해서 6선발 자리를 메꾼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와무라 상만 3번을 차지한 요미우리의 준 레전드이다. 즉, 시험삼아 올리고 싶어도 자리 자체가 없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도 구단 내에서 정민철을 써보자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투수코치였던 미야타 유키노리와 수석코치 가토리 유시타카는 1군에 자리가 빌 때마다 정민철의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31] 하지만 정작 감독인 나가시마가 구속이 안 오르는 정민철을 탐탁치 않아 했다고..[32][33]

4.3. 일본 진출 두 번째 해, 2001년

시즌 시작 전부터 거하게 꼬이면서 시작했다. 이전 해인 2000년 8월 정민철이 2군에서 식빵을 씹고 있을 때 요미우리는 현대와 정민태 이적을 두고 협상을 시작했으며, 11월에 영입에 성공한다. 이적료 5억엔, 계약금 1억 엔, 연봉 1억 엔.[34] 당시 정민철 팬들이 정민태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35] 하지만 정민태도 억울한 것이, FA 계약이 아니라 이적이었다. 즉, 정민태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현대 유니콘스와 요미우리가 정한 일이라는 것. 정민태를 욕하지 말고 현대를 욕하자. 현대는 명성에 걸맞게 이적료로 5억엔이나 챙겨먹었다. [36]

2월에는 퇴출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기사 덧붙여서 이 해는 조성민이 부상당한지 3년이 지난 시점. 이미 지난해 복귀 등판이 10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조성민 역시 본격적으로 1군행을 노리고 있었고, 외국인 투수 대럴 메이가 건재한 상황에서 남은 1군 외국인 투수 자리는 단 한자리 뿐이었는데 그 한자리를 놓고 한국인 투수 세 명이 경쟁해야 하는 사태가 된 것(..).[37]다시 한번 말하지만 돈대꼴미우리를 욕하면 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민철은 00년 여름 이후 요미우리에게 기회를 못 받았다.” 고 알고 있지만, 사실 의외로 01년에 제법 기회를 받았다. 일단 시즌 개막은커녕 스프링캠프에서조차 1군에서 행방불명 상태.[38]하지만 개막 얼마 뒤에 시범 경기 중 발목 부상 당한 정민태를 제치고 1군 승격. 4월 26일에 01시즌 첫 등판이 있었고, 이후 로테이션 일정을 따라 선발로 네 번, 불펜으로 네번 등판했다. 그러니까 00년과 달리,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제대로 로테이션에 포함된 기간이 있었던 것. [39]

  • 4월 26일 한신 타이거즈 상대로 7과 1/3이닝 3실점. 승패는 기록하지 못했으며, 6피안타 6볼넷 4탈삼진. 실점 중에 1점은 폭투였고, 2점은 분식회계를 당했다(..). 사실 내용 자체는 썩 좋지 않았지만 나가시마는 웬일로 정민철을 계속해서 로테이션에 포함시킬 것이라 천명했고, 실제로 그 말을 지켰다.

  • 5월 3일 주니치 드래곤즈 상대로 무사사구 완투승. 7피안타 1피홈런 7탈삼진 1실점. “오늘의 히어로”로 선정되었다. 투구수 133개와 7피안타, 최고구속 142가 마음에 걸리긴 하다만

  • 5월 9일 히로시마 카프 상대로 6이닝 4실점.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다. 실점을 떠나서 내용이 꽤 안 좋았다. 6피안타 6볼넷(..) 1피홈런 5탈삼진. 심지어 6회말에는 2사 만루에서 밀어내기(..)로 실점. 최고 구속은 143 킬로.

  • 5월 16일 한신 타이거즈 상대로 4와 2/3이닝 5실점(4자책) 패전.

다음날부터 패전처리(..) 불펜으로 추락했으며. 한 달 남짓 불펜 투수로서 13과 2/3이닝 10실점, 방어율 6.58(..)을 기록했다.

  • 6월 21일 1군 말소. 이후 정민철은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의욕상실 + 부담감 + 훈련부족 탓인지 00년보다 확실히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볼넷이 크게 늘었다. 당연하지만 볼넷 증가는 투구 밸런스가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첫번째 증상이다. 사실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계약해지니 한국복귀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할 마음이 있었을리가 없다.

역시나 정민철이 2군에 내려가자마자 곧장 한국복귀설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7월에는 2군 경기에 몇차례 등판했으며, 00년과 마찬가지로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8월부터는 2군에서도 행방불명. 8월 후반에 1군행이 암시 되었으나 그게 전부였다.이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저 상황에서도 정민철을 챙겨준 미야타는... 일본에 있던 내내 정민철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남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0]


10월이 되고 시즌이 끝나자 정민철은 바로 한국에 복귀했다.

4.4. 일본 시절 총평

先発だと鄭ミン哲ってのもおったけど空気やった
선발이라면 정민철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공기였어.

2014년, 한 2ch유저(..)의 코멘트.

간단히 말해 무지와 안이함이 불러온 결과. 당시 정민철의 몸 상태는 2014년 윤석민과 매우 흡사하다. 구속은 떨어졌지만 "부상당했다"라고 볼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 본인이나 영입한 요미우리나 설마설마 했던 것. 사실 정민철은 130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나 완봉을 한 경기도 있었고, 2군에서도 꾸준히 성적을 냈다. 즉, 구속 저하는 있었지만 부상이 있어 못 던질 상태도 아니었고, 커맨드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얘기. 따라서 1군에서 꾸준히 기용했다면, 특급이나 1급은 아닐지라도 5~6선발로 로테이션 한 축은 그럭저럭 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에 정민철이 팀에 불만을 품었던 것도,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00년 2군 경기 중엔 144km/h를 기록한 경기도 있었다. 구속 저하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고 컨디셔닝에 주력했다면, 가능성은 낮지만 어느 정도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1, 2군을 오락가락하는 통에 컨디셔닝은 개뿔, 의욕상실에 부담감에 부상까지 발생하는 등 삼중고를 겪어야 했으니..

문제는 그 많고 많은 팀 중에 하필 요미우리였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요미우리는 일본 최고 명문구단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지원돈지랄을 아끼지 않는 팀이고, 소위 말해 순혈이 아닌 선수에게는 굉장히 냉정한 팀이다. 거기다 정민철은 자기도 모른 사이에 구단 내부의 순혈 vs 비순혈 파벌 싸움에 휘말려들기까지 했다. 정민철 본인이 훗날 “너무 아무 것도 모르고 갔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이런 사정에 완전히 무지했다.

결국 정민철이나 요미우리나 최악의 결과가 되어버렸다.

5. 선수 시절 후반부

5.1. 2002년

요미우리와 계속하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짐에 따라 한화가 정민철 복귀에 대해 협상에 나선다. 이때 정민철의 신분이 FA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됐는데, 이 과정에서 정민철 측은 메이저리그에 가겠다고 을러대기도 했지만 당연히 므르브는 이 시점에서 정민철에게 1밀리의 관심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결국 고향팀에 애정이 큰 정민철이 양보해서 FA 신분이 아님을 인정하고 계약서에 사인했다.한화팬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이범호 욕을 하자.

이때 연봉은 4억원. 당시 시점에서 최고 연봉이다. 일본 진출 직전인 1999년 연봉이 1억 500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인상률.[41] 하지만, 뒤늦게 계약한 이종범이 3월에 4억 3천, 이상훈이 4월에 4억 7천을 기록하면서 눈깜짝할 사이에 콩라인의 자리로 추락(..).

사실 이 당시 팬들 사이에서조차 "정민철의 상태를 고려하면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말이 흘러나왔다만 ,실제로는 한화가 싸게 잡은 것이다. 왜냐면, 계약금 없는 순수 연봉 4억원이기 때문. 정민철이 만약 FA였다면, 못해도 총액 20억 수준의 계약은 가능했을 상황. 특히 02년은 FA는 투수 중에 씨가 마른 해로, 최고 대어가 99~01 3시즌 동안 185와 2/3이닝 밖에 못 던진 염종석이었을 정도. 덧붙여서 염종석은 4년 총액 14억에 계약했다. 결론은, 정민철이 FA를 포기하는 댓가로 한화가 인심을 쓴 것.

하지만 정민철은 망했다. 설마 이 정도까지 망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망했다.

26경기 138이닝, 방어율 5.35, 7승 13패.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2000년대의 팬들이 기억하는 육수 흘리는 아저씨(..)가 바로 이 시즌부터이다. 덧붙여 이 해에 같은 팀의 송진우옹이 220이닝을 던지며 2.99 방어율을 찍은 탓에 비참함은 두 배였다. 정민철의 상태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팬들조차 설마 이 정도 성적은 찍을 줄 몰랐다. 당시 골수팬들이 시즌 전에 예상한 성적은 , 흥하면 99년 정도일 것이요, 못해도 4점대 초중반 정도. 정민철의 구속이 추락한 것은 이제 더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구위와 커맨드는 여전히 수준급이라고 봤으며 실제로 99년에도 어느 정도 성적을 보여줬기 때문. 하지만 시범경기부터 신나게 털리며 심상찮은 모습을 보이더니, 첫 경기에서 1이닝만에 4실점 강판, 두 번째 경기에서 2이닝 7실점. 결국 한달간 2군행 신세.

다만, 정민철이 이 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다. 2군에서 복귀한 후에는 그럭저럭. 한 경기 말아먹고 한 경기 잘 던지고를 반복했다. 심지어 완봉 직전까지 간 경기까지 있었을 정도. 대체적으로 이 시기 주변의 평가는, 요미우리 시절 후반부에 불안정한 처지 때문에 운동을 게을리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로 시즌을 출발했고, 일본 진출 실패의 경험으로 의욕을 잃은데다가, 초반에 운 나쁘게 크게 실점하는 경기 탓으로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들었다는 것.한 마디로 일본 시절 두번 째 해에 의욕 잃고 놀아서 급격히 아저씨가 됐다는 얘기.

5.2. 2003년

26경기 11승 10패. 방어율 4.00, 139와 2/3이닝, 132탈삼진
알고 보면 나쁘지 않았던 성적.

일단 연봉은 1억원이 깎여 3억에 계약했다.이로써 복귀할 때 다년 계약이 아니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아니면 옵션을 못 채웠다거나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방어율 4.00이 썩 좋아보이지 않다만, 이 해는 모든 크보 투수들의 성적이 고만고만했던 시절이다. 방어율 1위가 3.01의 셰인 바워스로 역대 유일무이한 3점대 리그 방어율 1위를 기록한 시즌.

하지만 2002년과 마찬가지로 기복이 좀 심했고, 이로 인해 이닝을 많이 먹지 못했다.두 자리 패전을 기록한 거야 늘 있었던 일이고. 게다가 이 해 정민철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에서 복귀한 이름 한 글자 다른 투수가 방어율 3.31에 17승을 찍으며 상대적으로 묻히기도 했고(..).[42]

이렇게 정민철이 부활의 기미를 보이자 구단은 연봉을 다시 5천만 원 올려주었다. 정민철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이 해 10월 선수 인생 처음으로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43]


5.3. 2004년

다시 망함
54이닝, 방어율 7.67(..), 0승6패. 커리어로우 시즌.

은퇴해인 2009년을 제외하면 1승도 못 거둔 해는 이 해가 유일하다. 09년과 일본시절을 제외하면 이닝 수도 가장 낮다. 02년과 03년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지만 04년은 두 말 할 것 없이 시즌 내내 못했다. 원인은 팔꿈치 수술 실패. 뼛조각 제거 수술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고 재활 기간도 짧지만, 투구 매커니즘이 망가져 버렸다. 재발에 대한 불안감 탓인지 폼이 무너져 팔꿈치 다른 부위에 통증이 발생한 것.

5.4. 2005년

일단 연봉이 1억원 삭감되면서 시즌이 시작됐다. 각종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소위 말하는 제구력 투수로 변신을 꾀했다. 빠른 공보다 커브를 위주의 커맨드를 앞서는 스타일로 바꾼 것.

이 변화로 전반기에는 제법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6월 말까지는 부활, 에이스의 복귀라는 소리까지 들렸었다! 이때까지는 방어율이 3점대 중후반에 7승으로 다승1위를 노렸었다!세상에 정민철이 다승 1위라니!!그런데 6월 29일 경기에서 갑작스러운 팔꿈치 통증으로 1이닝 만에 강판된다. 그리고 7월부터 슬금슬금 성적이 내려갔다. 선발 로테이션은 어떻게 지켰다만 이닝이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초반에 와장창 무너지는 경기가 많았다.

결국 최종 성적은 방어율4.82, 9승 3패, 115와 2/3이닝.

이때 당한 팔꿈치 부상이 남은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 14년 만에 마침내 인대가 손상된 것. 검사 결과 대부분의 의료진은 수술을 권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으나 만 33세의 나이로 수술을 받는 것도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 결국 재활을 선택한다.

5.5. 2006년

방어율 3.93, 7승13패, 130과 2/3이닝, 142탈삼진.
나쁘지 않은 성적2. 7승 13패는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하자. 정민철 야구 인생에서 저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팔꿈치 상태가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스타일 변화는 여전히 좋은 성과를 낳았다. 전성기 시절 성적을 감안한다면 씁쓸하긴 하다만 오랜만에 팀도 한국시리즈에 올랐는데, 플레이오프에서도 짭짤한 활약을 해줬다. 어찌 보면 99년 우승 당시보다 이때가 더 나은 활약이었다. 하지만 이 해는 바로 C컵 좌완이 데뷔한 해. 게다가 리그 방어율이 3.58로, 1994년 이후 가장 낮은 방어율을 기록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한마디로 류현진한테 하악거리느라 정민철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는 것.

체고의포수 신경현에게 2루 도루저지 송구에 등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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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부활, 2007년

부활한 에이스
26경기, 방어율 2.90, 12승 5패, 155와 1/3이닝, 66탈삼진.

06시즌 종료 뒤 FA자격을 취득했으나 잔류 의사를 밝히고 신청을 포기했다. 구단은 프랜차이즈 스타임을 대우해서 2년 총액 9억에 계약했다. 사실상 선수 인생 첫 FA.[44]

97년 이후 10년 만에 방어율 2점대를 기록했다. 내용상으로도 썩 좋았던 편. 무엇보다도 이닝을 많이 먹은 덕분에 한화 마운드 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사사구 숫자와 피홈런 숫자도 작았다. 다만 삼진이 적고 피안타가 많은 것이 아쉬운 점. 방어율에 비해 FIP이 높지만 잊기로 하자.

덕분에 시즌 초반 부상으로 전력 이탈된 문동환의 빈 자리가 훌륭하게 메워졌다. 때문에 언론이나 팬들 모두가 에이스 부왘부활을 외쳤으며 일구상 재기 선수상을 차지했다. 올드팬들은 류현진과 원투 펀치를 형성한 정민철을 보며 “신구에이스 동시에 활약한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카더라. 한편, 정민철의 부활로 김인식은 또 한차례 재활공장장 이미지를 덧붙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원할 것 같던 송진우 옹께서 드디어 미끄러진 탓에 류현진-송진우-정민철 트리오가 동시에 활약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다는 것...아쉽다면 마구마구같은 거에서 보기로 하자. 이 해 프로 통산 최연소 150승을 달성했다.

5.7. 2008년

다시 미끄러졌다...
방어율5.23, 6승 10패.

부진의 이유는 딱 봐도 나이 탓. 정민철의 나이도 어언 37세. 몸이 특별하게 아픈 부분은 없었고, 최고 구속도 똥볼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긴 했으나... 체력이 예년보다 못했고, 요 몇 년간 쏠쏠했던 커브의 구위도 떨어져 버렸던 것. 특히 여름이 찾아온 후반기에 체력문제로 크게 고생한 듯하다. 일단 얼굴부터가 보름달이 돼버렸다. 후반기 방어율이 8점대를 찍었다.

덕분에 이닝 소화에서 문제가 있었다. 25경기 127과 1/3이닝. 평균 5이닝을 간신히 채웠으며 후반기에는 5회도 못 채우고 강판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감독인 김인식은 7월 말에 정민철이 모처럼 호투하여 승리투수가 되자 "정민철이 아슬아슬한 마구를 던져서 한 점밖에 주지 않았다"는 승리 인터뷰를 한다. 결과로는 호투지만 사실은 정민철의 상태가 아슬아슬하다는 뉘앙스.
한편 LG의 김재박 감독은 한화의 성적부진에 대해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송진우나 정민철이 부진하다고는 하지만 원래 4,5점 정도는 주지 않았나?"라고 입을 놀렸다언급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18&article_id=0002016461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게 정민철의 07년 방어율은 2.90, 06년 방어율으로 3.93이다. 원래 4,5점 씩 줬다면 저 성적이 나올 수가 없다.김재박이 2010년 이후 백수 신세인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08년 한화 투수진은 그야말로 처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사실 정민철은 팀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해낸 투수였다(!) 류현진이 165 2/3이닝을 던져서 어느 정도 일정을 소화했을 뿐, 2위인 송진우는 132 2/3이닝을 던져서 정민철과 엇비슷했던 수준. 나머지 선발? 누가 던졌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미미한 수준(..). 이 해 선발진이 이닝을 먹지 못하자 한화의 불펜 혹사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으며, 훗날까지도 한화 팬들이 김인식을 욕하는 이유가 되었다. 한편, 이 해 160승 고지를 돌파했다.

6. 은퇴, 2009년


은퇴 직전 살이 가장 불었을 때의 모습

두 번째 FA를 맞이했지만 예상대로 신청하지 않고 2억1천에 도장을 찍었다.오프시즌에 체력적인 문제를 보강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떨어진 구위를 되살리기 위해 릴리스포인트를 앞으로 당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1~2군을 왔다갔다하면서 위기에 상당히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 6월 6일 VS SK전에서 3회초에 실책성 3루타를 맞은 후 계속 안타를 맞아 결국 6점을 내주고 강판 당하는 등 2009년들어서는 잘 막더라도 위기에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신인이라면 이게 경험으로 커버가 될 수 있지만, 정민철이 1972년생이고 고참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아예 약점으로 잡혀버렸다. 거기다가 살도 예전보다 더 많이 쪄서 전성기 시절 미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지못미.

전후사정을 볼때 이미 시즌 전부터 구단쪽에서 은퇴시킬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은 한화의 몰락이 세살 꼬마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진 해. 구단 안팎으로 리빌딩 요구에 대한 목소리가 거세던 때이다. 실제로 송진우, 문동환, 최상덕 등이 이 해에 한꺼번에 강제은퇴했다. 이런 상황은 정민철 본인도 감지하고 있었을터, 구단이 간을 보자 플레잉 코치 자리를 제의하자 큰 갈등없이 받아들이고 보직을 이동, 사실상의 은퇴 수순을 밟았다. 결국 송진우의 대기록을 제대로 쫓지도 못한 채 2009 시즌 후반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2009년 9월 12일, 은퇴식을 가졌다. 하지만 은퇴 경기는 후배 양성을 위해 자진해서 거절했다. 은퇴 경기를 위해 1군에 등록될 경우, 후배 선수 중 한 명이 자신을 대신해서 10일간 1군 엔트리에서 빠져야 되기 때문. 항상 순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정민철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은퇴식이 있는 2009년 9월 12일에는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인 대전 구장은 무료 입장을 시행하였으며 'ACE 23'이라고 새겨진 수건을 입장객 전원에게 증정하였다. 이날 히어로즈 VS 한화 이글스의 경기는 김혁민의 막장투구로 히어로즈가 9점을 먼저 올리면서 패배로 끝을 내는가 싶었지만 4회말 분노의 3홈런으로 한화가 스코어 9:7까지 따라잡으며 분전, 5회 말 클리닝 타임에 시행된 정민철의 은퇴식 이후에는 한 점도 내주지 않고 9회말 이범호의 1타점 적시타 후 이도형이 또다시 끝내기 3점홈런을 날리며 9:11로 승리하였다. 이날 한화는 무려 9점 차이를 뒤집는[45] 저력을 보여주며 정민철의 은퇴식에 승리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암콩콩코믹스에도 나와있다. 중간부분부터 보면 된다.

은퇴와 동시에 구단은 그의 등번호 23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 다만, 이 영구결번과 관련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아래의 기타사항을 참조

18년 간 수고하셨습니다.

7. 평가

  • 통산 방어율 3.51 순위 불명(1000이닝 기준으로 20위 이하)[46]
  • 161승 역대 2위, 우완 1위
  • 2394 2/3이닝 역대 2위, 우완 1위
  • 1661 탈삼진 역대 4위(우완 투수 중 3위)[47]
  • 60완투 역대 11위
  • 20완봉승 역대 2위[48]
  • 128패 역대 4위, 우완 3위

다음은 일본 진출 이전의 정민철을 메이저 진출 이전의 류현진과 비교한 표이다.
선수 활약한 시즌 경기수 이닝 완투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정민철 8 시즌 219
(시즌 평균 27.4)
1503
(1G당 평균 6.8이닝)
109
(시즌 평균 13.6)
62
(시즌 평균 7.8)
10 59
(시즌 평균 7.4)
2.80 1223
(9이닝 당 평균 7.3)
442
(9이닝 당 평균 2.6)
1189
(9이닝 당 평균 7.1)
류현진 7 시즌 190
(시즌 평균 27.1)
1269
(1G당 평균 6.7이닝)
98
(시즌 평균 14)
52
(시즌 평균 7.4)
1 27
(시즌 평균 3.9)
2.80 1081
(9이닝 당 평균 7.7)
383
(9이닝 당 평균 2.7)
1238
(9이닝 당 평균 8.8)
흔 한 도 플 갱 어 들 의 성 적 표.xls

피안타, 피볼넷, 자책, 심지어 평균 승-패까지 클래식 비율면에서 완전히 판박이 수준. 방어율 2점대 투수가 매년 7패, 8패 하게 만드는 한화 클래스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단, 9이닝당 탈삼진 수에서 류현진이 앞서며 완투 횟수는 정민철이 앞선다. 또한, 정민철은 데뷔 첫 해 불펜 투수로 출발했으며 매 시즌 3~4회 가량 불펜 등판이 있었다. 즉 선발등판만 고려했을 경우, 정민철의 선발 1G당 평균 이닝은 7이닝을 넘을 듯하다. 조정 방어율이나 FIP 등은 잊기로 하자. 2014년 시점에 그런 게 알고 싶다면 본인이 일일이 직접 계산해야 된다(..).

7시즌 이상 평균 방어율 2.80을 찍은 에이스들이 13~4승에 7~8패(..)를 찍은 것에서 알 수 있겠지만, 당시 정민철 등판 경기의 모습은 류현진 경기와 분위기가 매우 흡사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팬이 전성기 당시 정민철 등판 경기가 어떤 식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아주 간단하다. 류현진이 쌔빠지게 고생했던 경기들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의 투구 스타일은 차이가 있다. 류현진이 완급조절과 체인지업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면, 정민철은 강력한 직구 구위로 강행 돌파했던 타입. 최고 구속이 150을 못 넘겼다는 것만 빼면 야구 만화 주인공같은 스타일이었다는 것.

  • 다승
    통산 다승에서 송진우 다음으로 가장 많은 승수를 기록했다[49]. 개인 통산 다승은 송진우에 이어 역대 2위지만, 오른손 투수로는 역대 1위다. 선발승만 따지자면 정민철이야말로 부동의 1위다. 통산 393경기에 등판한 가운데 선발 등판이 무려 370경기나 됐다. 이에 반해 송진우는 672경기에 등판했지만, 이 가운데 선발등판은 377번이었다. 송진우가 팀 사정에 따라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승리를 따냈다면, 정민철은 선발로만 승수를 챙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2년의 일본진출이 아니었다면 더 높은 누적 기록을 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정민철의 전성기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당시 팬들에게 “정민철이 통산 다승 2위할꺼임.”이라고 말해준다면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위의 표에서 보시다시피 C컵 좌완만큼이나 승수쌓기에서 불운을 맛봤기 때문.

  • 다패
    통산 다패에서도 역시나 순위권이다. 어차피 전성기 시절 방어율 2점대로 10패, 13패하면서 예고된 비극(..).류현진도 크보에 남았으면 다패 순위에 이름을 올렸을 게 뻔하다. 참고로 다패 1위는 당연히 송 회장님이며, 2위는 김원형, 3위는 염종석이다.

  • 통산 방어율
    방어율은 순위 밖(..)이지만, 다들 알다시피 선수생활 후반부에 오랜 기간에 걸쳐 방어율을 깎아먹었기 때문. 그래도 정신승리 해보자면, 첫째, 통산 방어율 20걸 중엔 구원투수가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선발-구원 오락가락하며 1000이닝을 빠듯이 넘긴 선수들이 많은 편. 둘째, 80년대 투수들의 경우 당시 투고타저 성향이 컸고, 셋째, 80년대는 전체 경기수가 적어 연투에 대한 부담감이 덜했다는 점. 넷째, 리그 선수층이 얇아 선수 간 실력차가 컸으며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2천년대 이전 세대 선수들은 전성기가 지나면 오래 끌 것 없이 곧바로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 통산 방어율에서 손해를 덜 보게 되는데, 불행히도 정민철은 위에서 언급한 사항 중 해당되는 것이 없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활약 + 커리어 전반적으로 선발 투수로 등판”의 기준을 적용하면, 방어율 20위 이내에 해당되는 선수는 류현진, 윤석민, 다니엘 리오스, 조계현 단 네 명 뿐이다. 게다가 류와 윤은 2014년 현재 현역 선수이고, 리오스는 약물(..)과 짧은 커리어 덕분에 통산 방어율에 이득을 보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이닝
    최다이닝 2위는 두 말하면 잔소리.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꾸역꾸역 뛰었으니 당연히 달성한 것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실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정민철은 200이닝 이상 시즌을 4회 기록했는데, 4회 이상 기록한 선수는 최동원, 윤학길, 정민태, 다니엘 리오스, 정민철 5명 뿐이며, 90년대 이후로 기간을 한정하면 정민태, 리오스, 정민철 단 세 명 뿐이다.[50]

  • 완투 및 완봉
    다음으로, 정민철의 기록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완투이다.

    완투 순위는 11위로 10위권 내의 인물들이 워낙 화려해서[51] 정민철의 기록이 묻히는 감이 없진 않지만, 정민철의 시대는 이미 투수 로테이션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잡혀 가던 시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투수들의 완투가 이전 세대보다 확실히 줄어들었다.

    문제는 정민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

    데뷔 초창기는 아직 완투가 투수분업화에 대한 개념이 미미했던 시절인데다가 감독이 김영덕이었으니 그렇다쳐도, 대부분의 팀들이 완투 횟수를 줄여나가던 90년대 중반에 걸린 감독이 하필이면 강병철이었다. 강병철은 최동원염종석을 아작낸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꽤 오랜 기간 감독으로 재임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강병철 시절에 정민철과 구대성에게 가해진 혹사는 굉장한 수준이며, 이들보다 못하지만 한용덕송진우의 혹사도 심한 편이었고,한놈만 패지 않고 두루두루 조진다! 투수 운용방식은 한 세대 이전의 구닥다리 스타일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90년대 중반 이후에도 두 자리 숫자 완투를 밥 먹듯이 시킨 감독은 강병철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응룡은 2군이 없고 막장 프런트 덕분에 선수단이 소수정예로 운용됐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쉴드가 어느정도 쳐진다. 2군이 생기는 94년 이후 완투 숫자가 반이하로 떨어지는게 그 증거.김인식, 김성근도 유명하다지만 이 두사람은 그래도 혹사에 완급조절(..)이라도 있었다. 1년 혹사하면 다음해 다른 투수로 갈아탄다던가

    특히 정민철의 완투 기록이 집중된 92년부터 97년까지 6시즌 동안의 평균 완투 횟수는 무려 9.3. 90년대 투수 중에 5시즌 연속 두 자릿 수 완투 가까이 기록한 투수는 정민철 뿐이다. [52]

    다행히 98년 중반 강병철이 경질되는데, 덕분에 일본 진출 이전 두 해인 98년과 99년에는 년 당 1~2회로 완투 숫자가 크게 줄었다.[53]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당시 정민철이 동시대 일반적인 수준 정도만 관리 받았어도 서른 이전에 데드암이 찾아오는 비극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한편, 정민철의 완투 횟수 바로 아래 기록은 김상진의 50회. 완투 한정 통산 레전드 기록은 정민철을 기준으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셈.

    실력에 비해 패전 수가 많다는 점에서 불운하긴 했으나, 완봉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 일단 정민철은 역대 완봉 2위이다. 게다가 정민철은 60완투 중 20완봉승을 거둬 완투 횟수 중 완봉승의 비율이 딱 33.33%였는데, 정민철보다 완투 횟수가 많은 투수 중에서 30% 이상인 투수는 선동열 단 한 사람뿐이다.[54] 완투 1위 윤학길은 100완투 중 20완봉으로 20%이며, 2위 최동원은 81완투 중 15완봉으로 19%로 크라이 크라이(…). 즉, 완봉에 국한할 경우 수치상으로나 순도면에서나 KBO역사를 통털어 정민철을 앞서는 선수는 선동열 단 한명 뿐이라는 것.정신승리 원칙에 따르면, 선동열에 이은 2위는 사실상 1위이다.

    완투승은 49완투승으로 역대 6위. 완봉 문제와 마찬가지로 완투승 역시 불운한 편은 아니었다. 통산 완투가 60회인데 이중에 49번 승리투수가 되었기 때문에 완투승/완투 비율은 81%로 높은 수치이다. 정민철보다 완투가 많거나 비슷한 투수들은 대체로 완투승/완투 비율이 60% 후반에서 70% 중반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 참고로 이 분야 불운갑은 최동원으로 완투승/완투 비율이 64%밖에 되지 않는다(..). 강병철이 얼마나 쓸데없이 최동원에게 완투를 시켰는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55]

  • 제구력
    선수시절 후반부에 제구력 위주의 투수가 되었다는 얘기로 인해, 전성기 시절에는 제구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정민철은 선수 시절 내내 볼넷 허용이 매우 적은 선수였다. 전성기 시절 bb/9(9이닝 당 볼넷)은 겨우 2.6.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수치는 크보 시절 류현진(bb/9 2.7개)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 참고로, "제구력 좋은 투수"라면 반드시 언급되는 송진우의 99년 bb/9은 3.0개, 02년 bb/9은 2.66개이다. 이 정도 수준의 bb/9을 정민철은 8년 동안 기록했다. 오히려 선수시절 후반부인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bb/9이 3.09로 전성기 때보다 높다. 물론 이것도 우수한 수준이긴 하지만.

이러한 모순이 존재 하는 것은, 그만큼 전성기 시절 정민철의 패스트볼 구위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딱히 코너워크에 신경 쓰지 않아도 헛스윙이나 빗맞은 타구를 유도하기가 쉬웠으며, 정민철 본인도 이런 점을 굉장히 잘 이용해 빠른 카운트에서 볼넷 허용 없이 타자와 승부를 낼 수 있었다.

즉 정민철은,"볼넷을 내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아라"라는 야구 격언에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이상적인 투수였던 것. 이런 성향이 어느 정도였냐면, 훗날 인터뷰에서 "(90년대 중반에는) 신인급 타자가 내 공을 방망이로 스쳐서 파울이 되면 분해서 잠이 잘 안 오던 시절이었다"고 얘기했을 정도.[56]
한편 구속과 구위가 떨어진 2000년대에는, 이런 투구 성향을 유지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제구에 신경썼으나 아무래도 패스트볼이 망가졌다보니 전성기 때만큼의 bb/9은 기록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통산 기록은 정민철의 제구력이 매우 빼어났다는 것을 입증한다. 정민철은 통산 748개의 사사구를 기록했으며 이것은 크보 역대 9위의 기록. 정민철이 역대 최다이닝 2위인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볼넷 수치가 낮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통산 bb/9은 2.81이며, 2000이닝 이상 투구한 다섯 명[57] 중 가장 낮은 수치이다.

결론적으로,
  • 전성기 시절 정민철은 기본적으로 7이닝 이상을 가정하고 등판했다.
  • 강력한 패스트볼 구위를 바탕으로 쉽게 탈삼진을 잡았으며 볼넷을 최소한도로 허용했기 때문에 많은 이닝을 먹는 것이 가능했다.[58]
  • 확실하게 승리 투수가 되기 위해선 완투를 해야 했으며, 다행히 완투를 하면 그래도 승리 투수가 된 경우가 많았다.
  • 하지만 완투를 못하면 승리 투수가 되기는커녕 패전투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59] 타자들은 1점도 못 냈으며 분식회계도 심심찮게 일어났다.[60]

류현진 베타 버전. 20년 전부터 눈에 익은 한화의 일상.

선수 시절 후반부는 배영수를 떠올리면 된다. 틈틈이 희망고문 시즌이 있었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배영수의 커리어가 무너진 것은 팔꿈치 인대 손상이고, 정민철의 커리어가 무너진 것은 데드암으로 인한 구속 저하라는 점. 게다가 배영수는 팔꿈치 수술 이후에는 볼이 똥이 됐을 뿐꾸준하게 로테이션을 지킨 반면, 정민철은 오히려 뒤늦게 팔꿈치에 본격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기복이 심해졌다. [61]

사실 04년에 터진 팔꿈치 폭탄이 너무 컸다. 부상 전후 성적을 따져봤을 때 04년과 05년을 부상으로 날려버린 것이 통산 방어율을 똥으로 만들어버리는데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 03년과 06년 성적이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리그 평균은 된다고 말할 수준이었고, 심지어 07년에는 뛰어난 성적을 찍었기 때문.

8. 떡밥들

8.1. 비인기 팀 소속이라 관심을 못 받았다? 저평가 됐었다?

2000년대 이후 정민철을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만년 떡밥.

일단 정민철 본인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데뷔 때부터 당시 귀했던 여고생 팬이 존재했으며, 매일 수십 통의 팬레터가 날아 들어왔다. 뺀질 맞은 세련된 외모에 입담까지 갖춘 만 스무 살 에이스 투수. 2000년대 이후에 데뷔했으면, 매일같이 기자들이 인터뷰를 따기 위해 기다렸을 것이다.[62]

문제는 시대 정황이 꼬였다는 점. 정민철 직전에는 에이스라면 방어율 1점대에 매년 15완투는 기본이요, 한번쯤은 0점대 방어율도 찍어줘야 제 맛인 시대였다. 이 시대를 겪은 90년대 초반 일반대중들에게 90년대 초반 정민철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못해 보였고, 이로 인해 초창기에는 소위 “기사가 안 팔렸다.”

정민철이 승수를 많이 챙기지 못했던 점도 비극의 원인. 당시의 보도 관행은 승리투수에게 철저하게 맞춰져 있었다. 7이닝 1실점, 8이닝 2실점은... 그저 기사 말미에 “잘 던졌으나 아쉽게도” 한 줄 설명, 끝. 동시대의 에이스 정민태나 조계현은, 승리투수가 되어 스포츠지 1면 사진을 채웠으니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인터넷이 없어 팩스로 원고를 보내던 시절이다. 해태 타이거즈처럼 매년 우승권이 아닌 지방 팀 경기의 경우, 취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팀 전담 기자는 커녕 지방경기는 서울에서 경기 결과만 팩스로 받아 기사로 싣는 경우가 태반. 차라리 서울 팀 소속이었다면 오고가며 기자들과 접촉하여 흥미 위주 기사라도 따내었을텐데.. 누구는 시합 전날 짬뽕을 먹었네, 시즌 끝나고 낚시를 갔네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가 보도되는데 왜 우리 민철 오빠는 기사가 안나온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언론 보도에서 90년대 초반에는 “선동열 다음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90년대 후반부에는 “리그 최고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러니까 저평가는 아니었던 셈.

하지만 제반 여건이 개선된 9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취재 운이 없었다. 선동열 일본 진출에, 박찬호에, 이승엽까지 50홈런을 때려내던 시절이라 초점이 이들에게 맞춰졌던 것. 즉, 분명 리그 최고 투수로 언급은 되는데, 정작 신문기사의 양은 적었다는 것.

결국 이런 요소들이 휘리릭짬뽕되어 일본 진출 이전까지 정민철 관련 언론의 보도내용은 매우 부실해서, 객관적인 경기 결과 외의 내용은 거의 보도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에 한이 맺힌 한화팬들이 정민철에 대해 지금까지 “비인기 팀이라 저평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8.2. 90년대 최고 투수 문제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긴 하겠지만, 2000년대 이후 이 문제를 얘기할 때 대부분 90년대 최고 선발 투수는 정민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처음에 이 문제에 민감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한화 팬들. 바로 위 대목에서 언급한대로 한화팬들은 정민철이 전성기 당시 저평가 당했다고 인식했었으며, 여기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이 떡밥을 꺼내들었고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63]

그런데 한화 팬 여부를 떠나서 이 문제는 많은 야구팬들에게 흥밋거리가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후보군 중에서 누구 한명 확실히 빼어나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 끗 차이로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 그 증거로 80년대 최고 투수 떡밥은 별로 흥하지 않는다. 선발은 최동원, 종합은 선동열. 끗.

특히 야갤 대표 떡밥 중 하나가 정민철 vs 정민태이다. 둘 다 요미우리에 진출했고, 1992년 데뷔, 이름마저 비슷해서 종종 비교가 되긴 한다. 그러나 둘의 행보는 많이 다른데 정민철은 데뷔하자마자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수위 투수로 자리잡았고 정민태는 팀이 현대로 바뀌면서 빛을 보기 시작한다. 정민철은 특별한 커리어하이 시즌 없이 제2의 전성기를 맞는 등 선수생활 내내 꾸준히 성적을 냈으나 정민태는 17-20-18-17승의 4년의 화려한 전성기의 임팩트가 강했다.그리고 거짓말처럼 폭망 정민철은 팀이 암흑기에 비인기팀이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았으며 정민태는 투수왕국 현대의 에이스로 승승장구하며 상대적으로 팀지원이 좋았다. 정민태는 많은 개인 수상을 했으나 정민철은 개인수상이 거의 없다는 것 등등. 90년대 후반 이후 정민철팬들은 정민태가 정민철보다 자주 언론에 등장한다는 것에 열폭했다.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논하는 사람들은 정민태보다 조계현의 이름을 더 많이 언급한다는 것이 함정.

원래 야구 스탯 비교질은 본인 스스로 해야 재미지기 때문에(..) 이 항목에서 구체적으로 비교하지는 않겠지만 대체적인 여론을 종합해보면,

  • 90년대 종합적인 면에서 정민철이 최고라는 견해가 절대다수이다.
  • 조계현은 관점에 따라 정민철보다 더 뛰어났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계현 > 정민철이라는 견해는 적은 편이다. 대체로 조계현 2인자 설이 대부분이다.
  • 정민태라는 견해는 조계현보다도 더 적은 편. 누적 스탯과 전성기 기간이 두 사람보다 약간 짧기 때문인 듯한데, 정민태 옹호자들은 그의 전성기가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기간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극소수이지만 이강철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다. 단, 1인자가 아니라 2인자 내지 3인자라는 것.
  • 역시 극소수이지만 세이버매트리션 관점과 잠실구장 효과를 강조하는 사람 중엔 김상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1인자라기보다 숨은 2인자라는 것.

즉 떡밥은 매우 흥하는데, 결론은 거의 정민철로 통일되다시피 한 이상한 떡밥. 정민철이 전성기 때 저평가 받았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9. 코치로서의 모습

칰무원의 마지막 피스

9.1. 지도자 생활 초기

은퇴 이후 2010년 한대화 감독 체제에서 바로 코치진으로 이동햇으며 코치로써 한화 마운드를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한 명 잘하면 다음 날 바로 털리는 선발진…. 물론 루헨진은 제외 믿고 싶어도 믿기지가 않는 상당히 씁쓸한 계투진….

2010년 당시엔 불펜코치인데다가 별다른 언급도 없어서 그냥 평범한 투코로 1년을 보냈으나, 특이한 투구폼으로 10여 년간 코치들에게 투구폼을 변경해야 한다는 강요와 투구폼을 변경하면 오는 어깨의 통증 때문에 투구폼을 바꿔야하나하는 고뇌와 자괴감에 빠져있던 박정진에게 네가 정말 던지고 싶은 투구폼으로 던져라라는 조언과 신뢰를 보내줘서 2010년 그의 각성을 이끌어내 한화 이글스불펜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2011년 1군 서브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한용덕 코치와 함께 장민제, 안승민을 성장시키고 양훈을 부활시켰다!
2011년 5월 2군으로 내려간 한용덕 코치 대신 1군 메인코치(?)가 되었다.

한화 투수들에게 자신이 현역시절 즐겨 던졌던 슬로커브[64]를 전수시켰으며 실제로 2010시즌에 유원상이 슬로커브를 장착하면서 꽤나 재미를 봤다. 그래봤자 5승. 지못미….

2011년 시즌이 지나가면서, 투수 교체가 서툰 한대화 감독을 대신해 투수교체 전권을 잡았다.[65]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람돌이, 정간신(…). 선발 투수를 한계 투구수까지 던지게 하면서 최대한 긴 이닝을 먹게 했다. 이런 방향성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투수가 양훈. 조금 투구수를 많이 가져가게 하면서 완봉승을 하게 된 뒤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10이닝 연장전에서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사 2루의 위기를 처하게 되었음에도 한대화 감독을 설득해 양훈 스스로 이닝을 끝내게 하였고, 이후 양훈은 기복이 심했지만 퐁당퐁당 2경기에 한 경기꼴로 류현진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주게 되었다.

다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어지간한 상황은 선발 투수에게 맡긴 탓에 투수교체가 계속 한 타이밍씩 늦어져 결국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날려먹은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민철의 투수 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팬들도 다수. 그래도 이때까지는 박정진, 양훈, 김혁민,[66] 안승민을 키워낸 명코치라고 찬양받았다. 그러나 결국...

9.2. 혹평과 함께 2군으로

2012년 들어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교체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줄줄이 말아먹으며 돌민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선수시절 그를 사랑하던 팬들도 한대화와 세트로 물러나기를 바라는게 현실이 되었다.

2012년 5월이 되자 2년동안 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던졌던 박정진을 5월 25일에 2군 가기 전까지 21경기 중 14경기에 올리는 백정질을 하였다. 박정진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콜업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때마다 두들겨 맞으며 몸과 멘탈이 함께 붕괴되었고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012년 6월 7일 류현진 선발 경기에서는 7: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불펜 정민혁이 흔들려 연속 안타를 맞았는데도 바꾸지 않고 기어이 무사 만루를 만들어 3점을 내주고 볼넷머신으로 전락한 바티스타를 9회에 올려 결국 경기를 내지고 에이스의 승리까지 날려먹는 최악의 투수교체를 보여주었다.

2012년의 정민철의 투수 기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원칙이라 할 수 있으며, 필승조 역할을 하는 선수를 대패하는 경기에 무조건 연투시켜 정작 이기고 있는 경기에 내보낼 필승조가 없거나 지친 상태로 내보내게 하여 망친 사례가 끝도 없다.

또한 김인식 감독 밑에서 배웠는지 불펜투수를 무조건 혹사시키는 것에 재미를 들려 박정진, 정민혁, 안승민, 마일영한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쓸만한 불펜들이 모두 맛이 갔다.

결국 2012년 7월 6일 자로 2군으로 내려가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은 이는 다름아닌 송회장님. 그리고 송회장님도 마찬가지로 말아드셨다

9.3. 2013 시즌, 1년만에 다시 1군으로

전반적으로 투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실전에서 굴리는 데에는 서투른 듯. 그러니까 투수코치판 박종훈 2013년 조지훈, 송창현, 이태양 등의 신인투수들이 2군을 다녀온 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육성능력을 다시금 주목받았다.

2013 시즌 전반기가 종료된 7월 18일 자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 팀의 전면 리빌딩, 그리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과 2군 코치간의 보직이 맞바뀐 것. 이로서 1년 전 보직을 맞바꿨던 송진우 코치와 다시 한 번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

9.4. 2014 시즌

1군 투수코치직을 맡게 되긴 했지만 경기 중 잠깐잠깐 보여지는 덕아웃 광경으로는 실제 실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5이닝 63구밖에 안 던진 앤드류 앨버스를 강판시킨 경기만 봐도 그런데 정민철은 퀵후크를 좋아하는 투수코치가 아니다. 선발투수를 조금이라도 더 믿고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는 스타일.그러다가 털리고 나서야 바꿔줘서 문제지만 팬들은 투수 교체는 김응용 감독이 실질적으로 다 하고 있으며 정민철은 불펜에 전화거는 셔틀에 불과하다고 대체로 생각하고 있다.

5월 8일에는 선발투수 송창현이 7이닝 2실점 호투를 이어가고 있던 터라 8회에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감독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던 송창현을 돌려보내고 어깨를 툭툭 쳐 주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를 탔다. 이로써 투수교체에 관해 투수 코치가 전혀 권한이 없음을 인증했다. 사실상 투수교체에 있어 전권을 쥔 한대화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기에 현재 본인에게 향하는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는 셈.

그리고 밑에 나오는, 그의 선수시절 등번호인 55번을 달 정도로 그를 존경하는 이태양윤규진. 속칭 "정민철 키즈"가 이번 시즌 각성해 각자 팀의 에이스와 마무리로 자리잡음에 따라. 정민철의 대한 평가와 기대치가 올라갔다. 송창현유창식의 볼질까지 잡는 데 성공한다면 투수코치로의 역량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즌이 흘러감에 따라 정민철 역시 팬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한화의 투수진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리그 최악인 관계로 투수코치인 정민철이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투수교체 절대 만능론(..)을 펼치는 대다수의 팬들은 2014년도의 투수교체의 책임자가 정민철이라는 논리로 극렬비판하고 있는 상황.

그나마 일부 코어팬들에게선 "그래도 엉망징찬 수준의 한화 코치진 중에서 정민철만은 그럭저럭 쓸만하지는 않냐?"라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그래도 성실함과 선수들과의 인간 관계, 선수 관리 측면에서 정민철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프런트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신생 김성근 체제 출범 하에서 수많은 칡무원 코치들이 옷을 벗게 된 와중에도 이상군, 장종훈과 함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레전드 출신 코치가 되었고, 29일 마무리 훈련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10월 30일 결국 자진사퇴하였다. 팀에서 물러나 좀 더 경험을 쌓을 계획이라고. 정민철의 코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절친한 박찬호가 직접 해외에 자리를 알아봐주고 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는 등 해외연수를 가능성이 타진되었으나.....

11월 6일 MBC SPORTS+ 해설위원 확정. 같은 팀 주루코치였던 이종범 코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솔직담백한 인터뷰로 코치에서의 실패와는 별개로 훈훈한 반응을 얻고 있다.

10. 해설자로서의 변신

2014시즌 종료 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영입되면서 해설자로서 변신하게 된다.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성공 가능성을 높게 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전부터 선수 출신 가운데 외모와 언변이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탓에, 꽤 오래전부터 방송계나 팬들로부터 해설가로 전향해도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왔었기 때문.하지만 이분을 보면 무조건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정민철이 코치직에서 물러나자 방송 3사 모두에게서 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2015년 3월 7일 한밭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LG 트윈스의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이종범과 함께 해설위원 데뷔를 했다.
3월 28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한화 이글스의 개막전에서 첫 중계를 맡았다.
대체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 젊은 선수 출신 해설자 중에서는 박재홍 위원의 뒤를 이어 성공적으로 자리잡을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친정팀이었던 한화는 12회말 서건창에게 끝내기를 얻어맞고 5:4로 패배를 당했다

11. 기타

  • 한화 구단이 영구결번한 번호는 23번. 문제는, 정민철이 전성기 동안 달았고 가장 오랜 기간 달았던 번호는 55번이라는 점이다. 23번의 경우, 2004년 부진한 성적 탓에 다음해인 2005년 기분 전환으로 바꾼 번호. 원래 번호인 55번은 후배 윤규진이 물어받았다가 윤규진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2012년에는 신인 이태양이 이 번호를 달았다.

    때문에 정작 23번을 달고 제대로 활약한 건 2007년밖에 없으며 55번을 달던 전성기 시절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정작 전성기 시절 포함, 선수생활 내내 달다시피했던 55번이 아닌 23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으니.. 그래서 정민철의 영구결번은 논란이 많은 편.

    다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이 프런트의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윤규진에게 번호를 물려준 것이 정민철 본인의 의사였기 때문. 윤규진은 정민철의 초-중-고 직속 후배로 어렸을 때부터 민철빠 55번을 달았다고 한다. 은퇴 당시 프런트에서 영구 결번으로 55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지만, 그 경우 후배가 사용 중인 번호를 뺐는 셈이 되기때문에 정민철 스스로 포기, 결국 23번을 선택했다. 그리고 윤규진은 매년 번호값 못한다고 욕을 먹다가, 이태양에게 번호를 넘겨버렸다.애초에 윤규진 네녀석이 번호 안 가져갔으면 됐던 거잖아!! 그리고 2014년 윤규진이 다시 55번의 번호를 가져왔다. 이에 마찬가지로 민철빠인 이태양은 55를 거꾸로 한 22번으로 번호를 변경 코치님 번호가지고 무슨짓이야

  • 손가락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 때부터 화제가 되었을 정도. 특히 선동열이 "내 손가락이 정민철만큼 길었으면 슬라이더를 더 잘 던질 수 있었을텐데.."라며 부러워한 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 이때문에 손가락이 길어서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변화구를 잘 던질 수 있을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선수생활 내내 들어야 했다. 물론 크다고 다 정력이 좋은 게 아니듯 손가락이 길다고 변화구를 잘 던질 것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야구계 일각에 존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편견. 정민철 본인은 코치 시절에 이런 견해를 밝혔다.기사

  • 선수생활 동안 맞은 홈런 중 본인에게나 당시 팬들에게나 가장 임팩트가 컸던 홈런은, 96년 8월 23일 이종범에게 맞은 홈런. 9회초 2사 만루 4대1로 앞서던 중 맞은 역전 만루 홈런이었기 때문. 이날 정민철은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혼자서 2병이나 깠다고(..).기사

    한편 이 홈런이 나온 경기가 바로 이종범이 9회말에 포수마스크를 쓴 경기이다. 즉, 9회초에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9회말에 포수로 섰다는 것. 사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만든 최고 원흉은 다름아닌 감독 강병철이다. 애초에 정민철은 이 경기 선발이 아니었다. 송진우가 8회까지 1실점으로 던지고, 9회에 힘이 다해 연속해서 주자를 내보내자 정민철을 구원등판시켰던 것. 구원등판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이 경기에 패한 후 강병철의 인터뷰가 그야말로 걸작. "정민철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알아서 거를 줄 알았다"라나 뭐라나... 정민철은 통산 bb/9가 2.81에 불과할 정도로 볼넷을 꺼리는 타입으로 유명했으며, 96년은 패스트볼 구위가 하늘을 찌르는 전성기 때였다. 그런 정민철이, 아무리 상대가 이종범이라도 밀어내기를 감수하며 2사 만루에서 유인구로 승부한다?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정말로 강병철이 2사 만루에서 이종범을 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명확하게 사인을 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경기 끝난 후에 선수탓으로 돌리며 입을 털어서는 안 되었던 일. 사실 강병철이나 정민철이나 설마 만루홈런 맞을 줄은 몰랐을 게다.그렇다해도 강병철은 그런 식으로 선수탓으로 돌리면 안됐거고.

  • 서울 삼성 썬더스이상민 감독과는 대전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홍대부고 재학중이던 이상민이 매년 대전고로 전지훈련을 오게 되면서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 응답하라 1994에서 봉이의 모델이 된 선수들 중 하나가 정민철이라고 한다.

  • 선굵고 조각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모난 데 없는 순한 성격에 특유의 눈웃음과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선남형 미남인데다 대전 최고의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에 연고지에서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은퇴 직전인 2009년에 살이 엄청 불어버렸지만 코치 선임 이후 마음고생 때문인지 다시 살이 빠져 예전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 지역의(정민철-대전, 김원형-전주) 프랜차이즈에 커브가 주무기[67]인 미남 투수라는 점에서 김원형과 비견되는 경우도 꽤나 있었다.

  • 선동렬의 후계자라는 별명답게 선동렬이 아끼는 선수였다. 정민철이 결혼을 전후로 해서 체격이 불자(솔직히 배가 나오기 시작) 타팀선배인 선동렬이 따로 불러 몸관리 안하나고 타박을 주었다.[68]

  • 박경완이 평생에 잡아본 최고의 직구로 꼽았다.기사 선동렬의 직구가 돌덩어리를 잡는 느낌이라면 정민철의 직구는 공을 잡아도 그 안으로 파고드는 독수리 같다고.... 역시 이글스의 상징다운 독수리 직구. 사실 박경완의 발언이 2000년대 후반의 팬들에게 유독 널리 알려졌을 뿐, 애초에 정민철은 90년대 초중반부터 계속해서 이런 식의 평가를 받아왔다.

    이종범 역시 최고 직구로 정민철의 공을 뽑으며, 오승환, 임창용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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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구마구2014의 정민철(가명:윤지현) 레전드카드는 유니폼은 빙그레인데 한화 소속 선수로 적용되는(...) 오류가 있었으나 2014년 4월 20일 현재는 제대로 한화 유니폼 착용 상태.

  •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송진우에 따르면,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웃긴 사람이 바로 정민철이라고. 안타깝게도 팬들이 이런 정민철의 면모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2008년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한 것이 거의 유일무이한 예능출연. 이때, 프로선수가 던진 몸에 맞는 공이 얼마나 아프냐는 질문에 김태균이 "민철이형 공은 맞아도 안아프다" 라는 말을 하자 정민철은 "태균이는 살이 쪄서 공에 맞아도 괜찮다" 라고 받아쳤다(...).## 은퇴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은 정민철의 성격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도자로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 실력과 외모, 인성을 겸비하고도 이래저래 팀이 암흑기를 거친 데다 비인기팀이었고, 정민철 자신이 임팩트 있는 시즌이 없어서 생각보다 유명하지 않은 투수라 마구마구에서도 상대적으로 쓰는 사람이 적다. 거기에 특이구종도 없다. 마구마구는 구대성, 정민철 등 비인기팀인 한화 투수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하는 듯.

  • 2000년대 중반, 1972년생이라 다른 팀 가면 최고참 급이지만 소속팀이 노인정한화 이글스라서(…) 커피 심부름을 했던 사진도 있다. 흠좀무. 물론 기자들 앞에서 장난 삼아 한 것.류현진한테 시켰으면 되니까. 리그 최고 에이스들이 커피 나르게 만드는 한화의 클래스

  • 리그 구조상 프랜차이즈가 많은 한국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은 한화 이글스지만, 대전광역시만으로 따졌을 때 한화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 사람.[69] 그런 걸 떠나서 2014년까지 평생 동안 대전을 벗어나 살아본 것은 단 2년뿐이다.대전성애자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느라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코치 연수한다고 1, 2년 외국에서 생활한 적도 없다.

  • 국가대표와 별로 인연이 없었다.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전무. 처음으로 프로가 아시안 게임 등에 출전하게 된 것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인데 이때는 엔트리가 100% 미필자로만 채워졌었고, 2000 시드니 올림픽은 일본 진출 첫해라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2007년 추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 전부. 다만 시드니 올림픽의 경우, 올림픽 예선전인 1999 서울 아시아 선수권 대표로 출전했었다. 또한 한일 슈퍼게임에도 1995년과 1999년 2회에 걸쳐 출전하여 호투했다.

  • 상복하고도 담을 쌓았다. 신인시절 염종석에게 신인상에서 밀린 것은 유명하지만, 그 이후로도 골든글러브 수상을 한 적이 없다. 두 자리 숫자 패전 때문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기 때문.

  • 팬서비스와 관련해서 역대 최고의 수준이다. 신인 시절부터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며, 늘 친절하고 웃는 낯으로 대했다고 한다. 그밖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훈훈한 일화들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

12.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2 빙그레 이글스 33 195⅔
(5위)
14 4 7 - 0.778
(3위)
2.48
(2위)
141 15 71 145
(2위)
61 54 1.068
1993 18 148⅓ 13 3 1 - 0.813
(1위)
2.24
(5위)
117 10 46 110 40 37 1.058
1994 한화 이글스 28 218
(1위)
14 10 0 - 0.583 2.15
(1위)
156 6 63 196
(1위)
59 52 0.972
1995 22 162⅔ 13 7 0 - 0.650 3.21 152 12 50 127 65 58 1.180
1996 32 219⅔
(1위)
13 12 1 - 0.520 3.03 173 16 57 203
(2위)
81 74 1.006
1997 31 208⅔
(2위)
14
(3위)
11 0 - 0.560 2.46
(4위)
172 11 49 160
(1위)
69 57 1.040
1998 23 148⅓ 10 7 0 - 0.588 3.16 133 12 37 97 55 52 1.133
1999 32 201⅔
(2위)
18
(2위)
8 1 - 0.692 3.75 179 22 69 151
(5위)
92 84 1.17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요미우리 자이언츠 4 18⅔ 2 0 0 - 1.000 4.82 21 4 4 16 10 10 1.286
2001 8 40⅔ 1 2 0 - 0.333 4.65 43 8 18 28 22 21 1.4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2 한화 이글스 26 138 7 13 0 0 0.350 5.35 144 19 48 116 83 82 1.326
2003 26 139⅔ 11 10 0 0 0.524 4.00 132 18 55 73 65 62 1.310
2004 13 54 0 6 0 0 0.000 7.67 76 11 21 22 50 46 1.741
2005 25 115⅔ 9 3 0 0 0.750 4.82 124 14 32 56 70 62 1.297
2006 25 130⅔ 7 13 0 0 0.350 3.93 142 18 47 62 68 57 1.408
2007 26 155⅓ 12
(5위)
5 0 0 0.706
(4위)
2.90
(3위)
155 11 40 66 58 50 1.204
2008 25 127⅓ 6 10 0 0 0.375 5.23 144 13 45 56 78 74 1.445
2009 8 31 0 6 0 0 0.000 9.87 54 7 18 21 36 34 2.323
KBO 통산(16시즌) 393 2394⅔
(2위)
161
(2위)
128 10 0 0.557 3.51 2194 215 748 1661
(4위)
1030 935 1.190
NPB 통산(2시즌) 12 59⅓ 3 2 0 - 0.600 4.70 64 12 22 44 32 31 1.399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92년 10완투
(5위)
3완봉
(1위)
1993년 10완투
(4위)
0완봉
1994년 9완투
(3위)
4완봉
(2위)
1995년 8완투
(5위)
2완봉
(6위)
1996년 9완투
(3위)
4완봉
(1위)
1997년 10완투
(1위)
4완봉
(1위)
1998년 2완투
(6위)
0완봉
1999년 2완투
(6위)
1완봉
(2위)
2000년 1완투 1완봉
2001년 1완투 0완봉
2007년 1완투
(5위)
1완봉
(2위)
KBO 통산 60완투 20완봉
(2위)
NPB 통산 2완투 1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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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네이버 프로필에서 한때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잘못 기입된 적이 있었다. 정민철 본인은 좀 어이없어했다고. 그 뒤로는 대전광역시 출신으로 제대로 나온다.
  • [2] 이 영구결번은 논란이 좀 있다. 자세한 건 밑의 내용을 참조.
  • [3] 4차전에서 정민철은 패전 투수, 염종석은 승리 투수.
  • [4] 당시 병역법상 방위병은 일과 이후 프로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이종범 역시 같은 케이스로 일치감치 군 문제를 방위병 + 반토막 출장으로 해결한다.
  • [5] 구원등판 경기가 한번 있었기 때문에 선발 17경기 중 10번을 완투한 것이다. 미쳤어. 다들 미쳤어.
  • [6] 선동열이 전설의 방어율 0.78을 찍었던 게 바로 이 93년이다. 2위는 OB 베어스의 김경원이 기록한 1.11
  • [7] 참고로 정명원은 50게임 105이닝을 등판했는데, 21세기 기준으로는 혹사이긴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순수한 마무리 투수 수준(..)의 등판. 즉, 218 이닝, 9완투를 한 정민철에 비하면 팀 공헌도가..
  • [8] 방어율, 다승, 구원, 승률 1위를 싹쓸이 하며 최초의 30-30을 기록한 박재홍을 누르고 MVP가 된 그 해이다.
  • [9] 18승으로 구대성과 동률
  • [10] 지금까지 정민철의 기록을 훑어본 위키러라면 깨달았겠지만, 데뷔 이후 매년 승수가 13 아니면 14로 고정되어 있었고, 두 자리 숫자 패전을 기록한 게 벌써 세 시즌 째이다(..). 게다가 2000년대 이전 야구계는 투수 스탯 중에서 승수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정민철이 성적만큼 대접을 못 받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때문.
  • [11] 마무리도 아닌 구원투수로서 최초이자 최후가 될 게 확실한의 20승 투수이다. 이 성적이 정말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김현욱이 선발투수로서 출장했을 때 이 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을지는 확실히 장담할 수 없는 노릇. 게다가 이 무렵에는 박찬호의 활약 덕분으로 팬들과 언론들이 메이저리그를 접하면서, 과연 투수의 성적 중에 승수가 최우선인가? 선발투수와 구원투수가 같은 가치를 지니는가? 등의 의문을 본격적으로 가지기 시작한 때였으며, 한국야구에서도 투수 분업화가 어느 정도 정착한 시기였다. 게다가 김성근이 밉기도 하고
  • [12] 선동열이 일본 진출하면서 언론에서 주구장창 이대진을 후계자로 밀어붙인 점도 있고.. 한편 정민철과 더불어 90년대 투톱 선발 중 한명이었던 조계현도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타지 못한 상태였는데, 하필 이 해부터 쇠퇴가 시작돼서(..) 골든글러브 후보로 언급조차 안 되고 콩라인전설의 마지막을 찍어야했다.
  • [13] 8회 1사에서 포수 강인권의 포일 뒤 낫아웃 출루 허용으로 (타자는 심정수) 퍼펙트 달성에 실패했다. 그 다음 날 스포츠 신문 1면에는 "아, 퍼펙트..."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 경기가 끝난 뒤 정민철의 인터뷰가 유명한데, "퍼펙트 게임을 놓쳐서 아쉽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정민철은 "강인권 선수의 리드가 좋아 노히트노런을 달성할 수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오오 대인배
  • [14] 7월 24일 LG 트윈스 상대로 8회 1사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다가 김동수에게 솔로 홈런을 얻어맞고 피안타 + 실점을 기록한 것. 그리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노 디시전이 되었다.
  • [15] 리그 방어율 4.98로 2014년 이전까지 최고 기록.2014년에 깨질 것 같다는 게 함정이지만.
  • [16] 다만 정민태가 230이닝이라는 미친 기록을 작성하며 최다이닝 타이틀을 따내진 못했다. 뭐 어차피 99년은 정민태가 투수 각 부문에서 미쳐 날뛴 해이긴 하다. 리그 방어율이 4.98인 해에 2.54를 찍었으니
  • [17] 에이스 투수 > 혹사 > 부상 > 회복 > 그런데 왠지 구속이 5킬로 떨어짐 + 하필이면 해외진출 직전
  • [18] 참고로 오릭스는 저 찜했던 세 명 중 기어이 구대성을 가져가는데 성공했다. 근성갑
  • [19] 정민태와 고등학생이었던 권윤민도 동시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는데, 이중 권윤민은 며칠 뒤 컵스와 계약했기 때문. 물론 여러팀에서 동시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만..
  • [20] 다만 확실히 공개된 액수가 아니라 추정보도된 액수이다. 연봉의 경우 8천만엔이라는 설도 있다.
  • [21] 일본위키에 따르면 정민철이 당시 일본의 인기 걸그룹 SPEED의 팬이었다는 제보가 있었다. 설마... 이게 일본행에 영향을 미친 건?(...)
  • [22] 98년 하반기부터 정민철 경기를 중계할 때마다 해설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구속하락'을 언급하다가, '하지만 여전히 공끝은 좋음’, ‘정민철 정도면 베테랑이니까’ 라는 식으로 멘트를 마무리하던 상태였다.
  • [23] 일본야구는 6선발제이다. 물론 일본의 6선발 = 한국의 5선발 취급
  • [24] 한편 조성민은 이틀 뒤 인 13일에 선발등판해서 부상 이후 2년 2개월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5이닝 6피안타 3실점 1자책.) 이후 18일에 구원 등판한 것이 조성민의 그 해 마지막 1군 등판이었다.
  • [25] 명목상 이유는 6경기 등판 6패에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어율은 3.26으로 준수했었는데 갈베스는 이전부터 고약한 성질머리로 유명했고(..) 매년 태업 의혹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2군행에 불만을 품고 구단과 갈등을 빚어 다시는 1군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26] 일본은 珉(민)자를 쓰지 않는다.
  • [27] 이 부분은 이 사람의 오해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요미우리 쪽이 먼저 영입의사를 밝혔다.
  • [28] 쓸모도 없는 가축을 죽을 때까지 키운다(..)라는 뜻으로, 무쓸모한 사원을 한직에 앉혀두고 썩힐 때 하는 말이다(..).
  • [29] 그 유명한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유명한 동창(..).
  • [30] 우에하라에 이어 2년 연속 터진 특급 신인 투수였다.
  • [31] 다만 가토리는 정민철 다음으로 입단한 정민태는 굉장히 싫어했다. 01년 당시 대놓고 언론에 언급되었을 정도이며, 정민태도 훗날 인터뷰에서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 [32] 당시 요미우리 내의 복잡한 역학 관계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가시마는 자기팀 선수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미야타의 경우 니혼햄, 세이부, 주니치 투수 코치를 거치면서 코치로서 굉장히 유능하다고 평가받으며 99년에 요미우리 1,2군 총괄 투수코치가 되었다. 요미우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팬이라면 짐작하겠지만, 요미우리 순혈 vs 외부영입 실력파의 상황이었다는 것. 실제로 나가시마는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사람은 밖에서 들어왔으니까"라고 말하기도. 덧붙여 훗날 정민철의 코칭 스타일도 미야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035117
  • [33] 또한 나가시마는 베테랑이나 연차가 앞서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챙기는 성향이 있었다. 당시에도 '정민철보단 갈베스에게 기회를 주자.' -> '갈베스를 퇴출해야 된다고? 그럼 다음 기회는 당연히 먼저 고생한 조성민에게 줘야지.'라는 식.
  • [34] 정민철의 금액과 마찬가지로 추정액이다. 이적료의 경우 알려진대로라면 역대 최고액이지만, 워낙 당시에 자존심 문제로 부풀린 액수를 언론에 흘린 경우가 많아서(…). 여하간 계약금 제외 정민철의 2배 금액이다.
  • [35] 사실 당시 정민철 팬들은 이전부터 정민태를 그리 곱게 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정민태가 빼어난 성적을 올리면서 정민철이 묻힌 감이 없지 않은데다가 하필이면 이름도 비슷했기 때문. 여자야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정민철 얘기를 하면 “현대 선수?”라고 반문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전해진다(..). 마침 정민태 이미지도 돈민태라 가난한 구단의 팬들은 욕하기 딱 안성맞춤이었고.
  • [36] 2001년 현대는 정민태의 이적료로 팀을 운영하였다. 현대는 2001년부터 왕자의 난으로 그룹이 뿔뿔히 흩어진 상황에 현대 구단을 소유하던 하이닉스가 돈을 한 푼도 안 주기 시작했다.
  • [37] 경쟁해야 될 처지임에도 선수들 간 사이는 화목했다. 정민철과 조성민은 함께 동계훈련을 했다.기사.
  • [38] 당시 정민철 왜 안 올리냐고 묻는 한국 기자들에게, 투수 코치가 '130 킬로도 못 넘기는데 어떻게 올리냐'고 한숨쉬었다고(..).
  • [39] 다만, 땜질용 6선발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지만.
  • [40] 물론 비순혈 외부영입파인 미야타도 자기 모가지가 걸려있는 상황이었긴 하다(..).
  • [41] 1999년에는 특급 선수들의 연봉이 1억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지만, 2000년부터 FA시행 + 삼성과 현대의 자존심 싸움까지 겹쳐 최고 연봉이 1년 단위로 1억 씩(..) 오르던 시절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최고 연봉이 3억, 4억으로 껑충 뛰는 것에 대해 언론에서 제법 비판이 많았다.
  • [42] 사실은 정민태 역시 망가진 상태에서 회광반조를 보였던 것이다. 바로 다음해인 04년부터 정민태 역시 정민철과 마찬가지로 못난 성적(..)을 찍어댔다.
  • [43] 송진우도 이때 같은 병원에서 같은 수술을 받았다.
  • [44] 한화는 베테랑에게 쏠쏠하게 대우해줬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정민철과 관련해서는 남는 장사를 했다. 일단 일본 진출 당시 이적료만 2억5천만 엔을 받아먹었고, 복귀 당시 정민철의 신분이 FA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봉 4억으로 싸게 잡을 수 있었다.
  • [45] 이 기록은 2003년 5월 27일 현대 유니콘스가 처음 기록한, KBO 최다점수차 역전승 타이기록이다. 그리고 이는 508대첩때 SK가 두산을상대로 10점차 역전승을 거두며 갱신.
  • [46] KBO의 기록제공이 워낙 썩은 탓에 2014년 시점으로 확인이 어렵다.역대 투수들 기록을 일일이 검색해보면(..)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 [47] 1위는 당연히 송진우, 역대 2위이자 우완 1위는 선동열...이 아니라(!) 1749개의 이강철. 선동열은 역대 3위이자 우완 2위이다.
  • [48] 1위는 송진우가 아니라 선동열이며 윤학길과 공동 2위이다.
  • [49] 그러나 통산 승리 1위인 송진우가 계속 승수를 쌓아갔고 정민철은 송진우와 같은 해에 보다 일찍 은퇴를 선언했다. 송진우가 예전에 "내 다승 기록에 가장 먼저 도달할 선수는 정민철이다"라고 한 말과는 달리 결국은 통산 2위에 그치고 만 것이다.
  • [50] 다만 윤학길은 200+이닝 시즌 중 3회를 90년대 이후에 기록했다.
  • [51] 일단 100완투 윤학길이 압도적이다. 2위 최동원(81완투)과 3위 장호연(79완투)도 타의 추종을 불허. 4위인 선동열(68완투)부터는 한 등위마다 1~2개 씩 차이나면서 다닥다닥 붙어있다.
  • [52] 송진우, 이강철, 조계현등은 단일시즌으로 따지면 정민철을 앞서고 이들도 장기간에 걸쳐 혹사 당했지만, 혹사의 꾸준함(..)에 있어선 정민철이 우위에 있다. 정민태도 만만찮다지만, 이들에 비하면 한발짝 뒤에 처져있고..
  • [53] 다만 투수 분업화가 이뤄져서 완투 숫자만 줄었을 뿐, 전체적인 혹사는 이때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장 99년에 200이닝을 넘겼다.
  • [54] 68완투 29완봉으로 무려 43%이다.
  • [55] 한편, 완투머신 윤학길은 75%으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고 이상군한용덕은 각각 69%, 68%으로 낮은 편이었으며, 송진우는 75%였다. 장명부는 61%로 가장 낮았다.장명부는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무조건 본인이 안 내려가고 버텼으니 뭐.
  • [56] 같은 인터뷰에 따르면, “95년에 대구 경기였는데 신인 왼손타자가 대타로 나오더라. ‘애송이 쯤이야’ 했는데 계속 내 공을 파울로 쳐내더라. 7구째인가 8구째까지 끈질기게 버티더니 결국 내 공을 쳐서 빗맞은 안타로 만들었다. 허 참. 그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저 녀석 꽤 괜찮은 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신인타자가 이승엽이었다고 한다.
  • [57] 송진우, 정민철, 이강철, 김원형,한용덕
  • [58] 2014년 시점으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이닝당 투구수가 역대 최소 수준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 [59] 대표적인 게 94년 방어율 2.15로 10패, 97년 방어율 2.46으로 14패...
  • [60] 몇몇 정민철빠들은, 96년 구대성의 18승 중에는 정민철 경기 분식회계승도 제법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 [61] 정민철 본인은 각종 인터뷰 등에서, 2004년 이전까지 “투수라면 누구라도 있을 법한 수준의 통증”이 있었을 뿐 특별한 부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혀왔다.
  • [62] 실제로 2천 년대에 성적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팀원 중 기자들이 가장 멘트를 많이 따낸 선수가 정민철이다.
  • [63] 참고로, 같은 이치로 2000년대 최고 선발 떡밥도 흥한다. 유력 후보인 손민한에게도 저평가 내지 불운 타이틀이 붙어있기 때문.
  • [64] 현역시절 정민철의 커브는 백팔번뇌 커브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를 던진 후 낙차폭이 큰 100km/h대의 슬로커브를 던져서 타자들을 많이 고뇌시켰다(…). 이 슬로커브 말고도 12시에서 6시로 낙차 크게 떨어지는 파워커브도 보유했다.
  • [65] 표면상으로는 한대화 감독이 하지만 투수 교체 타이밍 정민철 코치에게 물어보고 그의 의견을 거의 따랐다.
  • [66] 김혁민은 2군에서 갑자기 달라져서 돌아와서 당시 2군 코치였던 송진우의 공이라는 말이 많았다.
  • [67] 전성기 정민철의 커브는 주무기였던 돌같은 직구를 받혀주기 위한 부무기였고 전성기 김원형의 커브는 희대의 마구인 주무기였던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 [68]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볼때 선동렬은 팀을 가리지 않고 좋은 투수가 나오면 애착을 갖는듯하다. 인터뷰를 봐도 자기와 같은 케이스인 직구-슬라이더를 잘쓰는 김광현, 심지어 같은팀 후배겸 제자인 윤석민보다 타팀 에이스 류현진을 더 아끼는 발언이 있다. (체형을 보면 류현진이 더 가깝긴 하다.)
  • [69] 한화의 레전드 중 대전 출생은 정민철과 강석천, 구대성 세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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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9 04: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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