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정주영

last modified: 2015-11-07 21:41:47 by Contributors


1915.11.25 ~ 2001.03.21


새벽에 걸어서 출근하는 정주영 가족. 왼쪽부터 2남 정몽구, 6남 정몽준, 정주영, 3남 몽근, 5남 정몽헌 재벌집 일가족들이 저렇게 폼이 안나 저렇게 입으면 대부분 폼나지 않을텐데

한국의 기업인이자 경제인 그리고 현대그룹의 명예회장.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현대가(家) 특유의 기업문화 때문에 회장이라는 별칭이 있다.

Contents

1. 소개
2. 한국 경제 성장의 전설
2.1. 이명박에 대한 정주영의 인터뷰
3. 말년의 행보
4. 경제 및 경영에는 성공했지만 정치, 사회, 가족 문제에는 실패했다
5. 탄생 100주년
6. 뒷이야기
7. 인간성 및 일화
8. 명언
9. 가계도

1. 소개

한국 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상징 중 한 명이다. 1998년에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사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1]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씨 사이에서 6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후에 슬하 자녀는 8남 1녀로 전형적인 아들부자 집안이다.[2]

그의 호는 고향 이름을 딴 '아산(峨山)'.[3]

송전소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4],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5]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매도하여 3년뒤 쌀가게'경일상회'를 차렸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6]

2. 한국 경제 성장의 전설

6.25 전쟁 시기에 피난하여 부산에서 건설회사를 시작했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미군 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게 되었다.

점점 사업규모를 확장하여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다. 특히 한국의 건설업계 역사에서 이 사람의 행보는 그야말로 신화적이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명령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 한다. 아래의 일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임에 견디다 못해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인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모래밭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지폐 한 장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이 배를 만들 때 세계 최초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나라입니다"라는 말을 해 신용을 얻어 차관으로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은 한국 정부가 국가 보증을 서주었기 때문에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자서전을 보면 저 일화만 들어서 말한 게 아니라 서류도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 당시 '판매처를 확실히 해야 돈을 빌려주겠다'는 영국 측의 입장 때문에 계약이 막판에 허무하게 가라앉을 뻔 했다. 정주영은 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와 독대하여 수주를 따냄으로써 계약을 살려내었다. 가격을 매우 싸게 쳐줬다 하더라도 "우리 배를 사겠다고 서명해주면 그 계약서를 들고가 은행에서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겠다."는 말도 안되는 일을 실현해냈다. 당시 상황을 보지 않고서는 리바노스가 왜 배를 구입해줬는지 알 수가 없다.

울산에 조선소를 지을 때 울산 특유의 뻘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되자 큰 폐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공사를 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 되었을때나 홍수시 긴급 제방을 만들때 등으로 응용되었다.

알파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엔진인 알파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오일쇼크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 현대건설이 있었다. 다른나라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되는 40만, 30만을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들을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 중동머니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큰 공사였다. 정주영 회장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되었다. 일이 잘못되었으면 현대가 파산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낸 일들이 많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당초 경쟁 도시는 일본나고야로서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홍보를 했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측이 당황했다고 한다.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당선 이전)의 자서전에서 정주영은 사업가 시절에 정치인들이 기업가들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기업가를 무시한다며 깊이 상심했으며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 이러한 인식을 바꿔보겠다고 말한다. 참고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은 걸프전 발발로 인한 이라크 건설공사 수금 미수로 물러나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얻은 인기를 발판삼아 정주영이 미워하던 민자당에 입당, 같은 14대 총선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2.1. 이명박에 대한 정주영의 인터뷰

정주영은 이명박에 대해 시사저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사실 사람은 그렇다. 기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으면 재능이란 것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내가 서울대학 출신의 많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야망의 세월> 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씨가 소양강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대통령 앞에 가서 으르렁으르렁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소양강 댐만들 때 이명박씨는 간부도 아니었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설계에서부터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출신들이 했다. 모두 이씨의 (회사)선배 들이다.
현대건설이 65년에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들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칼을 든 폭도들이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으나 이명박씨 혼자 끝까지 금고를 지킨 무용담이 있는데 이씨는 사실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 중의 한명일 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생긴지가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현대건설 초반기에 맡았던 공사에 그 분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드라마상으로는 조선소 건설이나 자동차 등등 다 그 분이 한 것처럼 나오니까 사내에 보이지 않는 위화감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밑의 직원이 매스컴에 나오면 그걸 좋게 보지만 같은 동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때 저 밑에서 서류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다 한 걸로 나오고, 그건 좋은데 중동건설도 다 자기가 한 것처럼 나오니, 그 때 이명박씨는 참가할 자격도 못 됐다. 서울대 (회사)선배들이 다 한 건데 서로 말은 못해도 회사 내에서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그 분이 떠날 분위기를 자초한 거다.

2011년 위키리크스이명박이 처음 현대그룹에 입사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당시 이명박 사원에 대한 편지를 보내 "(위험한 인물이니)잘 지켜보라" 라고 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이를 "잘 봐줘라"라고 오인해 이명박이 현대그룹 내에서 승승장구 했다는 문서를 폭로.[7][8] 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라고 TV 간담회에서 대답. 진실은 저 너머에

3. 말년의 행보

1987년, 명예회장으로 은퇴한 정주영은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부터 갑자기 역대 정권에 바친 비자금을 공개하면서 슬슬 레임덕 증상을 보이며 숨가빠하는 노태우 정권을 곤경에 빠뜨리더니만,[9] 마침내 통일국민당을 조직,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노력 끝에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얻는 의미있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 임직원와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하여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다른 재벌들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켯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마침내 제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금전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며 낙선하였다. 개표 직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인데 득표수가 400만(정확히는 388만 정도)이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10][11] 안습. 정주영 회장은 현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을 찍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만 설득하면 실제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특히,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우리가 남이가' 발언으로 인해 14대 대선이 유례없는 지역감정 싸움이 되어 타격을 많이 입었다. '주영 찍으면 (표가 갈려서) 대중된다'는 교묘한 흑색선전에도 시달렸다. 특히, 당시 노태우 정권은 총선 당시 보여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경계하여,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현대그룹 직원들의 부정선거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하고, 비자금을 까발리는 등 현대그룹을 압박하여 정주영 선거운동 조직의 손발을 잘랐다. 울산 같은 대표적 현대 도시에서 현대 임직원 수보다 적은 표가 나오자 정 회장이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컴퓨터 선거 조작이라는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증거가 불확실하여 DJ(더구나 당시엔 정계 은퇴를 선언했었다.)도 동참하지 않았다.

14대 대선이 끝난 뒤 선거운동을 도왔던 아들 고 정몽헌, 몽준 회장과 함께 비자금 사건 때문에 수사를 받으며 모진 고초를 겪고 난 후 정치에 손을 떼었다. 대선 출마 이후로 대북사업으로 다시 활력을 얻기까지 현대그룹은 침체기에 빠져 안타까움을 샀다.[12]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북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13], 이후 여러번 더 방북하며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켜 11월 18일 첫 출항하였다. 2000년 5월 건강을 이유로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편안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는 자녀가 많다. 순서대로 정몽필(전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사장, 1936-1982), 정몽구(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근(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몽우(전 현대알루미늄 사장, 1945-1990), 정몽헌(전 현대그룹 회장, 1948-2003), 정몽준(현대중공업 대주주, 전 FIFA 부회장, 전 한나라당 대표), 정몽윤(현대해상화재 고문), 정몽일(현대기업금융 회장)등 8남 1녀(정경희). 바로 이 장성한 자녀들이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현대판 왕자의 난이라 부른다.뉴스에도 나오고 한동안 시중의 화제거리를 독점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불화를 해소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죽기 직전에는 "3부자 동반퇴진"을 통해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하였으나 그 직후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현대가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기타 그룹으로 삼분되었다. 이는 세 아들 편에 각각 줄을 섰던 여러 가신들의 농간이 크게 작용하였다. 차남이자 현대자동차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몽구는 이를 증오하여 선대의 가신을 모두 가차없이 쳐냈고, 상당기간 동안 어떤 가신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일명 무원칙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매년 그를 기리며, 그의 기일에 현대중공업/현대학원에서는 추모식을 한다. 현대자동차의 시행여부 추가바람.

4. 경제 및 경영에는 성공했지만 정치, 사회, 가족 문제에는 실패했다

단점이 있다면 경제 및 경영에는 최대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경제 이외의 문제 특히 정치, 사회 그리고 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경제 및 경영처럼 성공적인 사례를 쓰지 못하였다는 트라우마가 있다.

정치의 경우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한민국 경제 대통령이라는 가치와 명분을 내걸면서 같은 선거에 나서게 된 김영삼, 김대중 양김과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지만 끝내 승리자는 김영삼에게 돌아갔다는 점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원조적으로 정치에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다면 정주영은 경제에 경험은 많으나 정치에는 초보격인지라 20대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오랜 경험을 쌓아왔던 양김씨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사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하겠지만 상세히는 엄격히 다른 분야이기 떄문에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묶어서 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게다가 정주영 같이 경제 및 경영에서 건너왔다가 뒤늦게 정치에 입문한 경우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외길을 걸어왔다는 양김에 비하면 경제라는 집을 나와서 정치라는 낯선 외지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되었다가 실패한 꼴이 되었다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경제에는 대성공가라는 정주영도 양김이 버티고 있는 정치에는 경제만큼이나 성공적인 사례를 그리지 못했다.

게다가 90년대 정치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라는 3김 시대의 확고함이 드러워진 시기였고 그 당시 정치하면 이들 3김의 영향도 있기 때문에 이들 이외에 아무리 정치인이 있다고 해도 이들 3김을 넘는 경우는 드물거나 없는 편이었다, 그런만큼 그 당시까지 3김의 영향력이 국내 정치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였다. 이런 3김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인 출신이었다가 뒤늦게 정치에 뛰어든 정주영도 3김이 버티고 있었던 그 당시 정치에는 끼일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다른 면에서는 김영삼의 영남과 김대중의 호남 텃세가 강원도 출신인 정주영을 외면했다는 분석도 있겠지만 국회의사당 문턱에도 들어가봤던 적도 없었고 경제에만 치중한 양반이 과연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가라거나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실 수나 있을런지 모르겠다는 대다수 국민들의 우려 때문에 정주영의 정치 성공을 허락하지 않은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초년기부터 국회에서 활동했다가 대통령으로 성장한 입장이라 정치에 폭넓은 경험이 있겠지만 정주영은 국회 문턱도 가보지 않고 경제에만 치중해오다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니 국민들의 시선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는 평도 있다. 한편으로는 재벌 정치를 하는게 아니냐는 우려 때문에 정주영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풍문도 있다.

또한 당시 통일국민당이 정주영의 모체인 현대의 뒷지원을 받고 있는게 아니냐는 논란도 일어나게 되어서 정치를 하는 와중에도 현대로부터 뒷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풍문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 대통령 후보로 있었던 김영삼은 통일국민당이야말로 현대당(現代黨)으로 불려도 시원찮다라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현대그룹은 당시 정주영 회장 동생인 정세영 회장까지 나서서 현대는 국민당에게 어떠한 뒷지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고 노태우 정부가 특정기업을 탄압하고 죽이려 든다며 반발하였고 국민당 역시 현대로부터 어떠한 뒷지원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검찰의 확인결과 결국 현대목재가 국민당에 지원금을 대주었던 것이 확인되면서 국민당과 현대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 정주영은 김영삼이야말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들로부터 뒷지원을 받으며 선거를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사회의 경우에는 특히 대다수 서민층으로부터도 재벌이라는 그림자 때문에 이들로부터는 재벌 가문의 사람, 부자라는 이유에다가 반(反)재벌, 반기업 정서가 강했던 민중들 사이를 정주영이 너무 이해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였다. 어린시절부터 가난하게 살아왔다고 한다지만 어차피 그 시대 기준으로는 여타 재벌들처럼 서민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재벌로 밖에 보이지 않는 입장에서는 정주영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국내 재벌들하면 사회 공헌에도 소극적이고 오직 자기들 이익에만 챙기려는 그런 성향이 있다는 감정이 많은 편이었고 특히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주영과 현대에 대한 민심은 싸늘해졌던 편이 되었고 결국에는 밥그릇 싸움에 정주영이 제대로 제지하지 못하였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겠다.

이 왕자의 난이 민심에까지 알려지게 되면서 정주영과 현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당연히 곱지 않아보였고 일부에서는 가족들 밥그릇 싸움에 정주영은 뭐하고 있나, 아비가 저 꼴이니 자식놈들도 똑같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 어디 가겠느냐는 등 사회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제일 문제되는 것이 가족 문제였는데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주영의 자식들 사이에서도 후계 구도를 놓고 갈등과 분쟁을 벌이게 되었지만 경제 천하를 이끌었던 정주영도 유독 이 자식들 문제만큼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버지라고 한다지만 가족들을 신경쓰기보다는 경제와 경영에만 치중하다보니 정작 자식들 문제는 뒷전으로 밀린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고 이러한 정주영의 실패는 현대그룹을 소(小)그룹으로 전락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신 차남인 정몽구가 회장으로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은 의외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하였다.

이 왕자의 난은 결국 현대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 등이 계열분리 및 독립을 선언하면서 어느 정도 끝나게 되었지만 정주영이 작고한 이후에도 현대자동차의 정몽구와 현대건설의 정몽헌간의 형제 갈등이 번지게 되었고 정몽헌 사후에는 정주영의 다섯째 며느리이자 정몽헌의 부인이기도 한 현정은 현대엘레베이터 회장이 정몽구 회장과 갈등을 빚게 되어가면서 이 점에서도 정주영은 결국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가족들을 달래는 문제는 실패했다는 단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에 2001년 정주영 영결식 때 조문을 왔던 전직 대통령 전두환은 경제에 신경을 쓰셨다는 분이 뭐하러 정치에까지 뛰어드셔서 헛고생하셨는지 모르겠다, 정치에 무리하게 끼어드셔서 속병을 앓으셔서 가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전두환은 신군부 시절부터 정주영을 모질게 압박했던 적이 있었는데 정주영이 전경련 회장을 지낼 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한 적이 있어서 정주영과 그 사이에 악연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5. 탄생 100주년

2015년을 맞아 세상에 태어난지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1915년에 태어났으니만큼 2015년은 정주영이 세상에 태어난지 정확히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

사실 정주영은 1999년 운명하기 2년 전에 외신과의 인터뷰를 가졌을 때 자신은 120세까지는 살 것이다라고 하였고 죽을 때까지도 일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의 바램과는 달리 정주영 본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고 120세까지 살겠다는 그의 바램과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만약 지금 살아있었다면 100세 생일도 맞이했을 것이고 그의 바램처럼 20년까지 더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6. 뒷이야기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광수의 소설 '흙'[14]을 보고 자신도 변호사가 되어 억울함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법고시에 두번 떨어졌다고 한다.

어릴 때 가출을 4번이나 했는데, 첫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근처의 고원이란 곳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었다. 두번째 가출목표지는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번째 가출때는 소판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부기학원에 등록했으나 또다시 끌려왔다. 네번째 가출때는 소학교 친구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끌려왔다.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된다.

매우 검소한 삶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양말기워서 신고 다니는 부자가 바로 정주영이다. 배우 최불암도 그의 자택에 초청받아 갔을 때 욕실 타일이 낡아서 깨져 있는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그가 이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될 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직금을 지급받았다. 그룹전체로도, 단독법인으로도. 2000년 현대그룹회장직을 퇴임하며 지급받은것인데, 현대건설을 비롯하여 현대자동차, 대상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그룹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이 지급되어 총액 1위를 기록하였으며, 그 중 현대건설이 지급한 액수가 157억으로 역시 단독법인 퇴직금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ㅎㄷㄷ.

현대건설의 경우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창립연도인 47년부터 대표이사 재직한것을 근거로, 퇴임 직전 3개월 평균 월급여에 연간 상여금을 12로 나눈 금액을 더한뒤 총 근속 연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계산하고, 대표이사의 경우 근속연수에 4배를 곱해준다. 따라서 정주영 회장이 지난 47년 5월 창립때부터 53년간 대표이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평균월급(상여금포함) 7천 4백만원에 가산근속연수 212년(53x4)을 곱한 157억원의 퇴직금을 지급받았다.

사실, 재벌총수들은 퇴직금의 지급을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저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퇴직금의 지급은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자금사정에 부담이 되기때문에... 더군다나 이 퇴직금은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여억원을 지원받은 현대건설의 입장에선 더더욱 부담되는 일이었고, 현대건설에선 내심 퇴직금 수령을 SKIP해 주시길 바랬으나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이 퇴직금은 이후 왕자의 난 당시 현대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있던 MH를 지원하기위해 기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자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주식의 매입에 사용되었으나,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모두 처분한 후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쓰여졌고, 회사채와 기타지분을 매각한 자금이 출자전환과 유상증자에 투입되어 현대건설 주식으로 바뀌어 졌다. 이 주식은 정주영 회장의 사망 당시 현대건설에 증여되었고, 감자되었다. 결국 돌고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선 출마를 겸해서 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도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 회장의 대선 출마는 완전 실패였다며 그의 자서전 제목을 따 '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PR을 겸해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무료 배포되기도 했다. 당시 뉴스에 나왔을 정도.

노조를 무척 싫어하여 노조 만들면 죄다 빨갱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이는 그가 사망당시 몇몇 신문(한국일보 및 서울신문같은 중도적 신문 포함)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참고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도 노조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삼성그룹이나 계열사에는 별개의 노동조합이 없다. [15]

비밀도 아니지만 이 사람이 젊었을 시절에 모종의 거래로 만났던 여배우들에게서 나온 사생아들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있기는 분명히 있었고 여배우들이 돈으로 매수를 당해서 만났다는 설이 있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알려져있었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는데...이들은 정주영 사망 이후 일주일도 안되어서 모친(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친자확인 소송을 냈고 DNA 검사와 상속절차 및 기타 잡다한 과정을 밟고 유산을 싹 챙겨 돌아갔다.
중견배우 김 모 탤런트로 딸의 친자확인소송을 했다는 이야기가 7-80대 나이드신 분들의 증언이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와 최불암의 열혈팬이어서 드라마에 농부역으로 출연할뻔 한적도 있다. 또 최불암을 정치계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또한 최불암은 훗날 동사의 드라마 영웅시대 에서 정주영 회장역을 맡게된다. 자세한 내용은 최불암 항목 참조.

용자와 같이 기업을 일으키고 시련을 버텨내고 성공했으며 멋지게 세상을 살다가 간 대인배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보기 민망한 주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독재시절, 한국의 열악한 경제환경 등이 그에게 약간의 변명이 될 지도 모르겠다.

1999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0살까지는 살고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인간의 수명이 평균 100세를 넘긴다는 점과 국내 일부 지방이나 시골마을에서 장수노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84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이 때까지만 해도 건강이 어느 정도 양호한 편이었고 120살까지 살게 되면 고향인 통천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의 만찬 이후 극도로 건강이 나빠지고 쇠약해져서 병원으로 통원치료까지 한 적도 있었다가 2001년 3월 향년 86세를 일기로 작고함으로서 끝내 120살까지의 장수는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남북통일도 이루지 못해서 고향에서의 여생까지도 물건너갔다.

여담으로 이런 농담이 있는데 정주영이 모르는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며, 둘째는 자기 자식 숫자가 얼마인지 모른다고.[16]

영화 국제시장에서 젊은 시절의 정주영이 나오는데, 구두닦이를 하는 어린시절의 주인공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단다'를 말하며 조선소 이야기를 한다. 이때 주인공의 친구가 '왜? 자동차도 국산으로 만든다고 카제?'라고 하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내인 故 변중석 여사는 조용한 내조로 유명하다. 며느리들에게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고 가르친다고 알려져 있다.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의 말씀을 잘 따라하고 있기 때문인지 현대家의 안주인들은 현정은 회장을 제외하면 일반인에게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심지어 노현정아나운서는 결혼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보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7. 인간성 및 일화

  • 어린시절 부터 성격이 무척 급했다.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교할때 신발을 신는 시간이 아까워 발에 걸친채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삯이 없었다. 망설였지만 배가 있는데 타지 않는 것이 바보같아 돈도 없이 타버렸다. 목적지에 다다라 돈이 없는 것을 안 사공에게 따귀를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배짱이 커졌다고 말했다.

  • 농부가 되기싫어 집을 뛰쳐나온 그를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결국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귀향하기 전, 서울구경이나 하자며 창경원을 갔다. 입장료가 아까웠던 그의 아버지는 "나는 시골에서 호랑이 많이 봤어. 너 혼자 다녀와" 이랬다고. 심통이 난 정주영은 "그럼 나도 안가요.". 결국 부자(父子)는 함께 첨이자 마지막으로 동물원 구경을 했다.
  • 쌀가게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하였다. 합숙소에서 인부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데 빈대가 들끓었다. 빈대를 피하고자 긴 탁자를 가져다 놓고 그위에서 잠을 자는데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피를 빨았다. 그래서 이번엔 냄비에 물을 떠다 탁자 다리를 담그고 잠을 청했다. 그랬더니 빈대는 포기하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점프하는 수법으로 피를 빨려고 들었다. 빈대에게서 끈기를 배웠다.

  • 아직 해방되기 전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 였다. 한 직공의 사소한 실수로 불이 붙어 공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정주영은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공장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정주영은 탄식했지만 곧 맘을 가다듬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까짓거 낡아서 헐어버릴려고 했어. 철거비 굳은 셈이지. 자 기운차리고 그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벌이자고"

  • 경부고속국도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박대통령과 독대하던 때였다. 당시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느라 너무나도 피곤했던 정주영은 대통령이 말하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화들짝 깨어나 대통령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너무나도 부끄럽고 두려웠다. 하지만 박정희는 정주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사장. 내가 미안하구료". 그 이후, 자신도 현장을 둘러보다가 졸고 있는 직원을 보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오일쇼크로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무렵 중동으로부터 수주가 왔는데 굳이 거기까지 돈을 벌려는 사업자를 찾을수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정주영은 바로 중동으로 출국하여 현지를 살펴본후 이렇게 보고 했다. "각하, 절호의 기회입니다. 중동은 1년내내 비가 오지 않아, 쉬는 날이 없어 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낮에는 더우니 자고 밤에 공사하면 되고, 벽돌을 만들려면 모래가 필요한데 지천에 널린게 모래이며, 유조선을 동원하여 갈때는 식수를 싣고 가고, 돌아올땐 석유를 싣고 오면 됩니다"

  • 모 계열사를 방문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였다. 발표자가 1시간 분량을 준비해 긴장타고 있는데 정주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10분만에 끝내". 발표자는 패닉에 빠져 어쩔줄을 몰랐고, 그걸 지켜보던 정주영은 바로 일어나 나가버렸다. 결국 발표자 및 부서의 책임자들은 모두 회사에서 짤렸다.

  • 정주영과 관련된 책은 수도 없이 많아서 대충 인터넷 서점에서 뒤져도 부지기수로 나온다. 이 중 만화가 이현세의 기획으로 정주영의 전기가 만화로 제작되었다. 1992년 선거용으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만화판을 이현세 프로덕션에서 만들어 무료배포를 했던 적이 있는데, 이후 1998년에 정주영 자신이 선거용이 아닌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새로 펴내자 그 내용을 기존 만화판에 증보하여 새로 펴낸 것. 정주영이 일궈낸 성과들과 정주영의 인생을 대충이나마 알고 싶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현세 사단답게 세세한 자료조사와 세밀한 작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현세 항목을 보고 이 문단을 본다면 눈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고증이 뭐?! 왕회장의 힘은 위대하다

8. 명언

정주영은 많은 명언들도 유명하다. [17]

1. 스스로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나쁜 운이란 없다.

2.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18] .

3. 무슨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외에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4. 머리는 쓰라고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19].

5.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6.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다.

7.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 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것은 없다.

8.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9.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보기나 했어?"[20]

10. 우리가 뒤떨어져 있는 분야라고 해서 주저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고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패배주의이다.

11.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 있다.

12.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그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13.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14. 건설업은 즉각적인 결정이 중요하다.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무리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나는 결정에 주저하지 않는다.

15.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하는 한 내 권한을 양보도 안하는 대신 다른 이에게 책임 전가도 안한다.

16. 농업은 세계의 산업 형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든 절대로 소홀히 해서도, 포기해서도 안되는 우리 인간의 필수 자산이다.

17. 우리가 먹는 식량만큼은 어쨌든 우리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18.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호화장엄한 사치의 극을 이루었으니 혁명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이 자초한 것이었다.

19.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갖추고 누리며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얼마나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

20. 위대한 사회는 평등의식 위에 세워진다.

21. 10배로 일하는 사람이 10배는 피곤해야 맞는 이치인데, 피곤해하고 권태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하는 이들인 것을 보면, 인간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2. 자기 자신이 열심히 절약하고 모으면 우선 큰 부자는 못 되어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다.

23. 돈만을 목적으로 한 고리대금이라든지, 은행 이자만 타 먹으면서 재산을 불린다든지 하는 것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악성 자본주의이다.

24. 지식은 쟁탈해서 분배할 수 없다. 하지만 재물은 쟁탈할 수 있다.

25. 운이란 때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좋은 때 나쁜 때는 있다. 그러나 좋은 때라고 해서 손 놓고 놀아도 마당으로 호박이 혼자 굴러들어와 주는 것은 아니며, 나쁜 때라고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니다.

26.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때도 놓치지 않고 잘 잡아 쓰며, 나쁜 때는 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해 수습하면서 비켜가기 때문에 나쁜 운이 크게 작용을 못한다. 반대로 게으르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때가 와도 손이 늦어 붙잡지 못해 좋은 때를 나쁜 때로 만들고 나쁜 때는 운 탓만 하며 좌절 속에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항상 불운의 연속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27. 나는 젊을 때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그 날 할 일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에 마음이 설레어 늦도록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 날이 왔을 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즐겁고 힘차게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28. 지나치게 현명한 부인은 오히려 피곤할 수도 있다[21].

29.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다.

30. 여유가 없으면 창의가 죽는다. 나는 경험으로 그걸 체득한 사람이다.

31. 폭 넓은 인간 교류는 나에게 유머를 잃지 않게 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고,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공감대를 확대시키고, 그들의 정서를 흡수함으로써 사람이 빠지기 쉬운 사고의 경직을 방지해 준다.

32. 한마음 한뜻으로 이룬 번영을 공평하게 나누어 누리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가장 적은 세계의 모범국가가 될 수는 없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원래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총명하고 지혜롭고 나누어 먹기 좋아하는 정 많고 사랑 많은 사람들이니까 [22]


9. 가계도

  • 父정봉식[23], 母한성실
    • 1남 정주영, 妻 변중석[24]
      • 1남 정몽필 인천제철[25] 회장, 妻 이양자
        • 1녀 정은희 夫 주현 현대BHL대표
        • 2녀 정유희 夫 김지용 태아산업 부사장(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장남)
      • 2남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妻 이정화
        • 1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 夫 선두훈 대전 선병원 이사장
        • 2녀 정명이, 夫 정태영 현대캐피탈,카드 사장
        • 3녀 정윤이, 夫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
        • 1남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妻 정지선 삼표그룹회장 딸
          • 1녀 정진희
          • 1남 정창철
      •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妻 우경숙 前현대그룹 고문 딸
        • 1남 정지선[26] 현대백화점 회장, 妻 황서림 前법무부장관 딸
        • 2남 정교선 현대홈쇼핑 사장, 妻 허승원 대원강업 회장 딸
      • 1녀 정경희
      • 4남 정몽우[27] 현대알루미늄 회장, 妻 이행자 미스코리아출신
        • 1남 정일선 현대BNG스틸 대표, 妻 구은희 LS전선 명예회장 손녀
        • 2남 정문선 현대BNG스틸 상무, 妻 김선희 김앤장 대표변호사 딸
        • 3남 정대선 현대BNG스틸 이사, 妻 노현정 前 KBS 아나운서
          • 1남 정창건
      • 5남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妻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1녀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 夫 신두식
        • 2녀 정영이
        • 1남 정영선
      • 6남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 겸 국회의원, 妻 김영명 김동조 前 외무부장관 딸
        • 1남 정기선
        • 1녀 정남이
        • 2녀 정선이
        • 2남 정예선
      • 7남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妻 김혜영 부국석면 회장 딸
        • 1녀 정정이
        • 1남 정경선
      • 8남 정몽일 현대기업금융회장, 妻 권준희
    • 2남 정인영 한라 명예회장
      • 1남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 2남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
        • 1녀 정지연
    • 3남 정순영 성우 명예회장
      • 1남 정몽선 현대시멘트 회장
        • 1녀 정재은
        • 1남 정형선
        • 2녀 정예린
      • 2남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 3남 정몽훈 성우전자 회장
      • 4남 정몽용 성우오토모터브 부회장
    • 1녀 정희영, 夫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
      • 1남 김윤수 한국프랜지 회장
      • 2남 김근수 후성 회장
    • 4남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 5남 정신영
      • 1남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
    • 6남 정상영 KCC 명예회장
      • 1남 정몽진 KCC 회장
        • 1남 정명선
      • 2남 정몽익 KCC 부사장
        • 1남 정제선
      • 3남 정몽열 KCC건설 사장

----
  • [1] 그러나 금강산 관광은 2008년 5월에 터진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인해 중단 되었다.
  • [2]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대표적으로 김종필(7남 중 다섯째) 전 국회의원, 조영남(8남 1녀 중 일곱째 밑 밀이 여동생), 안성기(본인은 3형제 중에 둘째지만 큰집은 아들만 다섯에 그의 사촌과 조카들까지 거의 대부분 아들...) 등이 있다.
  • [3] 충청남도 아산시(牙山)가 아니다. 다만 현재 아산시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긴 하다. 현대그룹이 운영하는 병원인 '아산병원'도 정주영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
  • [4] 부친이 소를 판 돈인 50원. 후에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소 한마리에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를 올려보냈다.
  • [5] 그 시대의 부잣집 자제들 중에는 시대적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사냥여행, 도박, 주색으로 소일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부 사냥꾼들은 윈체스터 라이플로 무장했는데, 이 윈체스터가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값비싼 소총이었다. 혹은 김용환처럼 위장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청년 정주영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이 복흥상회 외아들이 어느 부류를 택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 [6]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그 후원인은 사람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고 했다.이 말에 후원인이 돈을 선뜻 다시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 [7] 만약 이게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진심을 헤아렸기라도 한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 [8]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는데, 당시 새파란 신입사원에 불과했을 이명박의 가능성을 무소불위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어떻게 알아보고 친히 편지까지 보내 경고했을까? 이 일화가 사실이라는 가정을 하고 보면, 이명박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고려대에서의 반대 시위를 주도해 투옥된 적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것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9]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당시 가족들 재산을 포함하여 전 재산이 5억 2천이라 하였는데 정주영 회장은 매년 100억을 갖다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문민정부 시절 들어낸 결과 그가 받은 비자금은 스스로 고백한 액수만 해도 5천억이었다. 에라이...
  • [10] 참고로 당시 김영삼이 받은 표가 천만이 조금 안되었으며, 제대로 된 여론조사가 없었던 마지막 선거였던 관계로 정주영의 낮은 득표율은 어렴풋이 예측만 되었을 뿐 직접적 수치로 드러나지 않았다. 13대 총선에서 김대중이 "4자 필승론" 같은 아이디어를 내세운것도 과학적 여론조사가 제대로 없어서였다. 여론조사는 사회전반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둔 의미있는 표본추출과 세련된 조사기법 등 상당한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 [11] 사실 당원이 1200만에 이르기는 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억지로 불려놓은 숫자인지라 이들이 표를 제대로 줄 리는 만무했다.
  • [12] 이 무렵 현대그룹이 겪은 정치 보복 일부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2년간 현대의 돈줄을 묶어놨다. 오직 미국계 시티은행만이 현대에 대출을 계속해주어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둘째, 5년마다 1번씩 받는게 관행인 세무조사를 '대선 1년 전'인 1991년 말(1300억원 추징. 노한 왕회장이 "그 돈 뜯기느니 출마 한 번 하겠다"라 했다고 함)에 이어 2연타로 먹였다. 2번째 조사때는 현대 직원들이 "더 보여줄거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할만큼 탈탈 털렸다는 후문.. 이런 조치들은 정권 내에서도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나왔다고는 하나, 당시 지지율 94%라는 기적을 이뤄내며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문민정부의 기세였던지라 브레이크는 없었다. 하지만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업은 2류 . . .정치는 4류발언으로 사이익을 얻게 된다("베이징 발언"). 세무조사에 대출제한으로 어려운 와중에도 삼성그룹을 제치고 재계 정상자리를 탈환한 것. 그리고 문민정부의 보복에 격분한 왕회장은 DJ를 후원하기 시작한다.YS는 IMF가 터지면서 사실상 매장당했다...
  • [13] 일례로 프랑스의 철학자 기 소르망은 이 소떼 방북 이벤트를 "20세기 최후의 위예술"이라며 감탄
  • [14] 이외에도 펄벅의 '대지', 심훈의 '상록수'등을 좋아했다고 함.
  • [15] 그러나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에 비정규직 노조가 생겼고, 2014년 6월에는 단체협약까지 체결되었다.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는 건 사측이 노조를 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한 것으로, 사실상 무노조경영 76년 만에 삼성이 노동조합을 인정한 첫 사례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삼성전자서비스 항목 참조.
  • [16] 원 출처는 1997년에 방영했던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의 정주영 인터뷰 내용이다. 원래의 방송에서는 정주영이 자기 재산 액수를 굳이 세어보지 않으며, 아들들이 많아서 자(아들과 손자)이 몇명인지 모른다는 뉘앙스의 인터뷰였는데, 이게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농담조로 바뀐거.
  • [17] 정주영은 많은 명언을 갖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성실과 도전을 강조하고 있다.
  • [18] 카르타고의 한니발도 이와 비슷한 명언을 한 일이 있다. 라틴어의 'Aut Viam Inveniam Aut Faciam'이 바로 한니발이 한 말인데 로마를 침공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했을 때, 한니발이 했던 말이다.
  • [19] 당장 대도무문을 부르짖는 어떤 정치인의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라는 말과 대조된다.
  • [20] 정주영을 설명하는 말로서 유명한 말이다.
  • [21] 실제로도 부인이었던 변중석 여사는 학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 [22] 2007년 세계은행 기준 한국의 지니 계수는 28위로 프랑스나 벨기에보다 소득격차가 작은 나라이다.
  • [23] 평범한 농사꾼이었으며 정주영의 할아버지는 서당의 훈장이었다.
  • [24]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공부시키는 것 조차도 어려운 면이 있고 대표 선수가 있으나, 현대가는 가정형편이 좋으며 잘 살아서 정주영의 아들, 손자, 손녀의 학벌은 준수한 것이 특징이다.
  • [25] 현재의 현대제철
  • [26] 30대그룹 총수中 최연소
  • [27] 동생들보다 경영능력이 낮아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11-07 21:41:47
Processing time 0.4437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