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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last modified: 2015-03-29 15:21:45 by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시대의 정치가, 문인
1.1. 개요
1.2. 파란만장한 일생
1.3. 인간성
1.4. 평가
1.4.1. 민간의 평가
1.4.2. 알콜중독
1.4.3. 문학적 평가
1.5. 대중매체에서의 정철
2. 가수
3. 학원인
4. 전직 만화가, 범죄자
4.1. 소개
4.2. 활동
4.3. 작가 노동착취, 성추행 논란

1. 조선시대의 정치가, 문인

1.1. 개요

鄭澈
수험생들에게는 천하의 개쌍놈[1]
아부도 맛깔나게 하면 예술이 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분
문과생들의 철천지 원수 이과생도 싫어한다

조선시대 중기의 정치가(1536(중종 30)~1593(선조 26)). 호는 송강(松江).리버 송이 아니다 요즘에야 문인으로 더 자주 언급되지만 선조 중기 당시엔 정적에게 일절 자비가 없는 권력자로 더 유명했다. 지금은 수험생들에게 자비가 없지

가사 작품 3개인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현존 중인 당대의 흔치 않은 언문 고전문학 작품에 속한다. 근데 이 유명한 작품 대부분이 어떻게 해야 더 맛깔나게 아부를 할 수 있는지 번민한 흔적이 역력하다.아첨계의 레전드

1.2. 파란만장한 일생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누나인종의 후궁이었을 정도로 권력과 친밀한 집안이었다.[2] 그러나 아버지 대부터 가문이 기운 후 그의 벼슬살이는 선조와 파벌들의 당쟁에 휘말려 계속해서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보여 결국 권력을 잡고 정적들에게 피의 숙청을 실시한다.

그에 대해 동정의 여지는 없는 것이 백성의 삶을 돌본다거나 정치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다고 보긴 어려운, 목민관으로서는 0점에 가까운 가렴주구형 탐관오리였다. 자신의 본분은 뒷전이고 (관동별곡에 써있듯) 온종일 경치 좋은 장소를 찾아 여흥을 즐기는 것에 탐닉했다고 한다. 그러다 인생이 좀 풀려서 우의정에 이르렀을 때는 서인의 영수(우두머리)로써 철저히 동인을 탄압하며 권세를 휘둘렀는데 이는 호남을 타겟으로 역모 기도화한 정여립의 난에서 수사책임자로 활약한 것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정철은 동인계의 인물들에겐 천하의 개쌍놈 급의 악독한 인간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동인의 주요인물로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붙잡혀 죽은 전라남도 함평 출신의 동인측 인사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발의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 이라 외칠 정도. 지금도 함평 등지에 가면 이발의 기일에 이 주문(?)을 들어볼 수 있다[3]. 현실에서 맛볼 수 있는 코즈믹 호러의 일부분

당시 일으킨 기축옥사에 의해 정여립은 물론 그와 관계한 호남의 유지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동인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흔히 유력인사만 천명이 죽었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정여립 시체를 보고 눈물 흘렸다고 억울하게 죽은 김빙이나 가기생보고 울었다고 죽은 조대수, 정여립이 죄 있다는 놈들이 바로 역적이다 라고 주장했다가 박살난 정언신까지 합쳐봐야 열명 안팎이다. 이는 어린이와 노인을 고문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깼을 정도의 기축옥사 가혹함과 조선 시대 특유의 과장법과 야사가 혼합된 결과. 호남의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이발 형제들은 곤장을 맞다 참혹하게 죽었고 그의 어린 아들과 80이 넘은 노모 윤씨도 곤장을 맞다 죽었다. 이발과 친분이 두텁던 진주의 선비 최영경도 정여립의 두령(!)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쓰고 희생당했다. 정승까지 하고 있던 정언신은 사건 직후 이게 다 이이의 제자들 때문이다! 라고 정여립을 옹호하다가 정여립의 역모가 기정사실화되자 버로우했고 정여립과 편지를 19장이나 주고받은 사실이 들켜 작살났다.[4]

더 웃긴건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나서 정철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에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김윤제[5]의 도움으로 공부도 하고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면서 출생은 서울 태생이지만 사실상 호남 출신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정여립의 난을 다루면서 자신의 사적인 원한[6]까지 더해져 전례에 없이 가혹하게 관계된 인사들을 처벌[7]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았기에 엮어넣기는 쉬웠고[8] 심지어 전라도 유생 정암수를 사주해 이산해마저 엮어넣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게 결코 그냥 가볍게 넘길만한 사실이 아닌 것이 이 사건과 연루되어 까딱하면 이순신[9]을 비롯해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인물들까지 줄줄이 엮여 처형될 뻔했다. 만약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면 조선의 앞날은... 임진왜란을 버틸 수 없어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정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체제비판적 성향인 호남의 유력인사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고 조작하여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닌가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조 동인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당시 정철이 전라도로 사람을 보내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냈다는 식의 명백한 기록 또한 남아있다. 하지만 정철의 혁혁한 기여 덕에(?) 전라도에는 '반역향' 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는 건 완벽한 오해로 정여립 사건으로 몰살당한 건 이발을 위시한 호남 동인 강경 인사들 뿐 사건을 부추기고 확대시킨 것 역시 같은 호남의 선비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호남엔 동인 세력의 씨가 말렸고 이후로 호남에는 서인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서인의 기호지방(경기, 충청) 양반만큼은 아니지만 호남의 서인 양반들도 서인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 득세한다. 임란 이후 호남 서인 계열에서 최명길, 김자점, 최석정 등이 영의정에 오른 것이 이를 증명한다. 기축옥사 이후에 전북 지역 서인이 득세 하고 광주, 전남 양반이 씨가 말랐다는 소리도 있는데 그건 잘못된 시각이다. 애초에 정여립 사건은 전주에서 일어난 사건인데다 조선 후기 위세가 대단했던 광산 김씨의 광산은 현재 광주광역시를 나타내는 지명이며 반남 박씨의 반남은 전라남도 나주시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또한 피해지는 진주의 최영경을 비롯, 경상도의 동인 선비들에게도 퍼져서 많은 경상도 선비들 역시 경을 쳤다.

후술하듯이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착오를 하고 만다. 후사 논의를 조심스러워하는 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송강연보의 기록).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자신의 밥그릇 위기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이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이 도중에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이산해는 아예 나서질 않고 류성룡은 나섰어도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정철만 홀로 후계 책봉의 정당성을 열을 내며 주장했던 것이다. 탱커

정여립 모함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은 정철에게 카운터로 '임해군 목숨이 오락가락' 드립을 날린다. 물론 이전의 정여립 모반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단 애초에 정계의 밉상인 정철을 탄핵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 세자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 세력을 손보기 위해서 모르는 척 받아들인다. 이것 역시 정여립 모반사건 때와 완전히 동일한 수순.

정철을 밟아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서 정여립의 부하 길삼봉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철을 비난했다. 선조는 이 구실로 정철을 지근지근 밟아버렸는데 실록에는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이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10]. 또한 윤근수는 삭탈관직, 양천경, 양천회 등 최영경 등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웃긴 것은 양천회, 양천경 등의 무고를 보고 선조는 처음엔 이런 상소를 이렇게 늦게 올리다니! 라고 한탄할 정도로 띄워줬다는 것이다. 정철이 얼마나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으면 이런 선조의 후장을 끝까지 핥았을까. 선조도 최후의 양심인진 몰라도 역모 조작자로 몰릴 수도 있는 정철에게 추가적인 죄를 내리진 않았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 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여자와 아이를 법에 따라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개발살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고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11] 후일 정철을 팽해버린 과정을 볼때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당시 동인이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갈등하던 것은 이산해의 강경파이자 광해군의 지지기반인 북인, 류성룡의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는데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 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던 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을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기 위한 결정들에 의해 복직되었지만 임진왜란 중 선조를 수발하는 과정에서도 니나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막장짓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또 미움을 샀다(...) 결국 얼마 안 가 과거 탄압했던 동인 세력에 의해 파직당한 후 낙향하여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죽었다.

1.3. 인간성

기록에 따르면 한마디로 막장. 매우 아집이 강하고 속이 좁아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이렇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그에게도 온건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인배가 더러 있는데 하나는 율곡 이이[12][13][14] 하나는 서애 류성룡. 특히 류성룡은 당파가 남인이었는데도 정철과 무난한 관계였으니 류성룡이야말로 진정한 대인배일지도[15]. 그 외에 노선이 일치하여 친밀했던 인물로는 같이 서인을 이끌어갔으며 정철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욕을 먹은 성혼도 존재한다[16].

한때 정철의 부관이자 지금은 의병장으로 유명한 중봉 조헌 역시 특기할 만한데 조헌은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정철이 자신의 상관으로 부임하자 사퇴를 청원했으나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 며 조헌의 스승인 이이를 통해 극구 말린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이후 둘은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가 되는데 그 이유는 조헌 또한 기축옥사 당시 앞장서서 정여립의 측근들과 동인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격파였기 때문. 이렇게나 정치적 노선이 비슷한데 으르렁댔다니 이건 아무래도 일종의 동족혐오인 듯 싶다.

참고로 선조실록에서는 그를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이 쓰여질 당시는 정철이 이미 몰락한 시점임을 염두해야겠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그토록 감언이설을 바친 결과가 이 모양임을 생각하면 안습하기도 하다. 스탈린의 개 예조프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하지만 선조실록은 철저하게 동인, 그것도 강경파인 북인의 시각에서 쓰여졌으며 심지어 평생 동서인의 화합에 힘썼던 율곡 이이마저도 매우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정철에 대한 (서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17].

(전략)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중략)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중략)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 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까는 건 마찬가진데?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마리의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 한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친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까댔다. 사실 정철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동인을 조진 것은 선조라는게 함정

1.4. 평가

서인의 당수를 지내며 정여립 일파와 정적인 동인에 대해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탄압과 견제를 가하고 이후 서인의 분열에도 한몫을 한 사람, 정치적인 업적 따위가 있기는 커녕 오히려 탐관오리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또한 성격이 극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알콜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가 틈만 나면 탄핵당한 이유는 정적의 모함 이상으로 그가 민심을 못 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국왕인 선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아첨으로 가득찬, 맨정신으로는 차마 읽기 힘든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사를 다수 남겼는데, 우리 역사에 남아있는 문학 자표가 희소하고, 아첨을 처바르는 과정에서 유치한 문학적 수사를 과도하게 사용하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문학적으로 평가를 받아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즉 가사, 아니 권력에 대한 불타는 의지가 없었다면 그냥 듣보잡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정철이 막장 수준의 간신이라는 것에 대한 반론도 있다. 명종 21년(1566)의 기록을보면 종친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려하였지만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당하게 된 적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병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 적 또한 있기때문이다. http://tropical55.blog.me/220044204903 (참고) 또한 서인 쪽의 변호에 따르면 정철이 자기 관리를 못해 망가진 것은 사실이나 간적이라 할 정도로 무슨 세도를 부릴 위상은 아니었다고 한다.[18]

정철에 대한 옹호론은 대게 서인측에서 나온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말까지 서인계열이 계속 집권하여 대한민국 건국 초까지 서인계열이 역사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4.1. 민간의 평가

정치꾼으로서의 악명은 민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원도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들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 갔더니 주민들이 바위를 섬기니까 바위를 쪼개버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는데 왠지 강원도 관찰사 시절 강원도 백성들한테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철 같은 놈 은 한동안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하긴 유람이나 다니고(관동별곡에 잘 드러나 있다) 입으로만 "백성을 잘 다스리겠다" 라며 왕에게 립서비스나 일삼는 자가 뭐가 예뻐서 좋은 평을 해주겠는가.
다른 평가도 있기는 한데, 일설로는 선조가 왜란발발 후 몽진을 갈때 길가의 백성이 "정철 정승을 불러 쓰시오소서." 해서 정철을 복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도망가는 왕이 꼴보기 싫어 엿 좀 먹어보라는 백성의 따뜻한 마음

1.4.2. 알콜중독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주당으로 폭음에 따른 주사를 부려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한다. 작품 중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라는 장진주사[19] 있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왕인 선조가 정철의 주색에 감탄(?)해 하사한 술잔 역시 지금까지 남아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조가 '그대가 술을 좋아하나 너무 과함이 걱정되니 앞으로 이 잔으로 하루에 한 번만 마시라=술 좀 작작 먹어라 라는 의미로 하사한 은잔을 이 작자가 한 방울이라도 더 먹겠다는 집념으로 망치로 두드려 펴서 사발로 만들어 마셨다나(...) 이 때문에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 나온 손순효의 일화와 혼동하는 이들도 많다(손순효도 애주가라서 이 짓을 했지만 그는 그나마 일은 잘 했다). 아무튼 정철과 친분이 있던 류성룡조차도 정철의 술버릇에 대해 "정송강은 술에 취해있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고 깠을 정도. 오늘날 기준으로 봐선 빼도박도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준의 알콜 중독 환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1592년 7월 25일자 선조실록 기록이다.

밤 이경에 급보가 평양으로부터 왔다. 임금께서 여러 대신을 빈청으로 불러서 회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정철은 술에 취하여 오지 않았다.

기록의 날짜를 보자. 그렇다. 1592년 7월 25일로 임진왜란 와중이다! 게다가 의주까지 몽진을 온 상태로 조승훈의 명군이 평양성에서 패전했다는 급보가 왔는데도 저러고 있었다.

1.4.3. 문학적 평가

후세에 남긴 대표작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있으며 하나같이 제 잘난 맛, 즉 자뻑과 아첨과 아부의 극의에 달한 작품들이다. 얼핏 보면 사모하는 님 따위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어 마치 그리운 연인을 묘사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국어시간에 졸지 않은 학생들이면 다들 알다시피 이게 전부 당시 선조에 대한 묘사다[20]. 그렇다고 선조가 이런 아첨에 어울릴 정도로 선군이었느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인 게 문제(...)[21] 선조는 고사하고 세종대왕께서 들어도 쑥쓰러워할 손발이 오글거리는 아부의 향연을 보노라면 가히 이광수의 친일 문학을 연상할 수 있을 지경이다. 국어 시간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주제를 '충신(...)연주지사' 라 소개하기도 하는데 만약 당신이 정철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아는 학생이라면 속으로 실컷 비웃어주자. 내가 충신이라니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는 거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당연히 앞뒤의 아귀가 들어맞지 않고 논리가 희박한 글이란 것이다. 거기다가 관동별곡에선 자기가 신이라는 드립까지 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와갤러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선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수많은 게이스러운 시조를 남긴 통에 정철은 시대를 앞선 와갤러로까지 보인다. 송강님 디씨하세여? 이것들을 윗동네의 군가를 찬양하는 북한의 각종 선전문구들로동신문로 바꾼다면 윗동네를 찬양하는 글로 둔갑할 수 있다! 훗날 이 노래가 교과서에 실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주제는 임금에 대한 충정 더이상의 북괴드립은 이 위키에 코렁탕을 쏟아부을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 유자들이 임금에 대해서 포장할 때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온갖 미사여구를 다 수식하는 것은 감안해야 하며 사실 정사나 야사에서 욕을 많이 먹고 안 좋은 평가가 많은 것은 정철에게 피해를 입은 북인들의 분노가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봐도 정철이 지나칠 정도로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고 편견이 심한 주정뱅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지만(...). 이거 편견을 제거한 시각이 맞는 건가.

아무튼 이광수, 서정주 등의 예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됨됨이라든가 정치적 성향은 가히 막장급이지만 그 문학적 기교에 있어서만은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당대 작품 중 달리 비교될 만한 작품들이 현존해 있지 않은 까닭에 가사 문학 방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이름을 기억해둬야 할 인물. 물론 그 알맹이는 전술했다시피 못난 왕 후장 미친 듯이 핥아주는 후로게이 가식으로 점철된 데꿀멍 투고글일 뿐이고 어디까지나 기교 면에서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뭐 그냥 눈 질끈 감고 왕 대신 어떤 초월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오버해석하면 그리 못 읽어줄 내용도 아니다. 물론 동아시아 세계관에 그런 초월자 개념이 있었는지를 따지면 지는 거다. 천자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당시 천자는......

예시로 다음은 사미인곡의 일부이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골수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名醫)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힌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다시 말하지만 이거 왕한테 쓴 시다. 그냥 시만 보면 진짜 게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22]

일각에서는 이러한 문학적 기교마저 곡학아세의 전형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삶을 훑어보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친일파들과 너무나 싱크로가 잘 맞는다고.

그러나 정철이 원칙에 충실하고 고집이 세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신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명종 21년(1566)에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려하였지만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당하게 된적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병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 적 또한 있다. http://tropical55.blog.me/220044204903 (참고)

아마 고등학생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정철을 떠올릴 때 국사 과목에 묘사되는 선조서인을 대표한 권력 투쟁의 화신이라는 기억보다는 국어 과목을 통해 수능에서 외계어에 가까운 문장으로 한층 더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악독한 이미지로 각인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다행히(?) 이과생은 2014학년도 이후에는 그런 거 없다. 원문에 있는 고어를 그대로 출제하는 문과의 국어B형과 달리 이과생이 보는 국어A형에서는 모조리 현대어로 번역이 되어 나오기 때문. 따라서 외계어를 읽고 내용을 유추하는 불편함은 사라졌으나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찾고 정서와 태도를 찾아야 하는 문제가 늘어났다(...) 하지만 2014년 수능완성 국어 A형에서도 정철의 시가 고어체로 나온다!!! 꿈도 희망도 없어 진짜 고어물 이건 정철의 시가 중학교 교과서와 고1 교과서에도 나오기 때문인데, 책 만드는 인간들이 '니들 어차피 중학교 고등학교 공통과정으로 다 배웠잖아? 그러니까 A형도 고어체로 내도 문제 없지?' 라고 생각하고 책을 만들었다 카더라.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근데 그건 B형이잖아.

학교대사전에서는 수험생을 괴롭히는 사천왕으로 꼽기도 했다. 그가 쓴 시가의 극악한 난이도와 오글거림으로 인해 문이과 상관없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존재. 실제 7차 교육과정[23] 시절 고1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관동별곡' 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며 개정 8차 교육과정 고 1 국어 교과서에서도 16종 중 8종에 관동별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니 교육과정이 개편되어도 고교생들은 정철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만난 진옥이라는 기생과 나눈 화답시조가 있다. 꽤나 로맨틱하면서도 야한 시조다. 살송곳살풀무라니 무슨 마약하셨길래 이런 시를 쓰셨어요? 두번째 항목.

1.5. 대중매체에서의 정철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선동혁이 열연하고 있다.

2. 가수

2003년도에 '비가 와' 라는 노래로 데뷔한 발라드 가수. 본명은 최정철. 1984년 3월 2일생. 1980년대 히트 여가수인 나미의 아들이라는 게 후에 밝혀져서 화제.

현재는 본명인 최정철으로 활동 중.


3. 학원인

전 영어강사, 현 정철어학원 대표.


4. 전직 만화가, 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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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단체는 특정 사건과 연루된 혐의로 활동하던 분야에서 공식적으로 제명 내지 퇴출되었습니다. 사건 전에 있었던 공식적인 성과는 본 인물/단체를 서술하거나 평가하는 데 효력이 없으며, 하위 문서를 포함한 그 어떠한 내용도 이를 옹호할 목적으로 작성되지 않았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단순히 웃음거리로 넘길 문제가 아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내용도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본 틀은 현업자 협회 등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제명이 통보된 인물/단체에게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명 여부가 불분명한 인물·단체라면 반드시 위키워크샵에서의 토론을 거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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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개

1973년 7월 12일생. 대한민국의 전직 만화가이자 현재 범죄자. 대표 작품으로는 본초비담이 있었다. 원래는 지면연재를 주축으로 삼던 호빠[24] 만화가였으나 2009년 현산 아라리를 시작으로 웹툰에서도 활동을 시작했었다.[25]

만화가 시절 본인이 만화가라는 사실에 대한 책임의식이 상당히 강한 듯했다. 만화가의 권익보장과 관련해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에서 MC의 만화가 무시 발언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사과를 받아낸 적이 있었으며 아청법 반대운동에도 참여했었다. ~~출처: 네이버 캐스트

하지만 후술할 문하생 강제추행으로 징역형을 받은 뒤 네이버 캐스트 인터뷰가 삭제됐고, 아청법을 논리적으로 반대한 만화가였기에 아청법 찬성자들한테 좋은 구실을 준것 아니냐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팀킬

4.2. 활동

어떠한 경우에도 연재가 펑크나지 않도록 아예 5주치 콘티를 미리 짰었다. 하지만 아청법 병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다 세이브 원고를 다 쓰는 바람에 지금은 주단위 작업으로 바꿨다면서 여유만 생긴다면 다시 월단위 작업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혔었다. 이 외에도 댓글로 고증 관련 지적글이 올라오면 보는 대로 바로 수정했었다.

만화가를 위한 저작권 지침서라는 학습만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어떤 웹툰갤러가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자비로 마련한 양장본이 전원 창고 신세가 될 뻔하기도 했었다. 자세한 건 네이버 웹툰/사건사고 항목 참고.

4.3. 작가 노동착취, 성추행 논란

2014년 3월 25일, 갑자기 본초비담이 예고 없이 휴재가 되더니 장기 휴재 처리가 됐다. 그 무렵 "작가가 여제자를 성추행하고 노예계약까지 해서 노동력 착취행위를 했다" 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주장을 내용을 보면...기강을 잡는다며 사생활을 침해·간섭하고 성행위에 대해 묻고 아내와의 성행위를 설명하거나 남자 성기 사진을 보여줬으며 벌이라는 이유로 맨손으로 엉덩이를 체벌했다고 한다. 잠자는 문하생의 성기를 30cm 자로 쿡쿡 찌르고, 문하생의 엉덩이가 크다고 말하거나 가슴을 찌르기도 했다. 또 한 달 임금 10만원, 그 이하를 주며 한 달에 150장을 그리게 했다. 한 달 임금 10만원을 일당으로 환산해 보면 대충 3,200원 남짓 된다(100000 × 12 ÷ 365 ≒ 3288). 참고로 2014년 기준 최저 시급이 5,210원이다. 일당이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게 말이 되는가? 하루에 30분씩만 일을 시켰나?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투잡도 못 뛰게 했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어길 시엔 체벌을 빌미로 폭력, 성희롱을 했다. 퀄리티의 비밀

이 사실이 알려졌을 당시, 웹툰 댓글란과 작가의 개인 블로그가 폭탄을 맞았다. 전의 허위 예약구매 사건에서 법적 대응을 적극적으로 펼친 것에 반해 이와 관련된 성추행 관련 루머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증거로 그가 운영하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에서조차 이와 관련된 해명은 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아무런 해명이 올라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본초비담의 일부 팬이나 네이버 웹툰 이용자들은 '이 사람이 진짜 성추행범이 아닌가' 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게다가 노동착취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웹툰계의 팝픽 사건이라는 오명까지 쓸 판.

결국 2014년 12월 17일, 재판 결과 강제추행이 인정되어 작가에게 징역 8개월과 법정구속이 선고되었다. 링크.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화와 작가 인터뷰 등이 내려갔다.

그 외 판결문 관련.

제자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정 아무개 작가의 형사 선고 공판이 12월 17일 인천지방법원 제14형사부 제322호에서 열렸습니다.

앞서 11월 24일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징역 3년에 전자발찌 5년을 구형했는데요. 재판 결과는 14시 50분 경 징역 8개월에 성범죄 예방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로 나왔습니다. 정 아무개 작가는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한편 재판정에는 일부 만화가들이 참석하여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는데요. 그 가운데 일부는 한국만화가협회 이사라고 합니다. 한국만화가협회 사무국은 이와 관련해 "탄원서는 이사회 결의 사항이 아니다" "우리의 공식 입장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사전에 이야기된 바가 전혀 없음을 밝혔습니다. 이에 한 만화가는 "개인 친분 차원에서 한 것 같은데, 이 사건 관련해서 끝장토론도 하고 중재도 하려 했던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라며 실망감을 드러냈습니다.


죄질이 나쁨에도 불구 전혀 죄를 인정하거나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고. 보통 반성한다고 포장해주기 마련인데 어느 정도였길래 변호사가 불쌍 하지만 가정의 화목 아내와 딸이 있다 과 재발 가능성이 낮은 점을 미뤄 징역 8월형만 선고되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18일에 항소를 넣었다. 정말 반성 안 하나 보다...

한편 탄원서를 제출한 만화가들 중 일부가 한국만화가협회 이사라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자, 한국만화가협회에서는 2014년 12월 19일 공식 입장 표명을 올렸다. 말을 빙 돌려서 하는 것 같지만, 작가들의 경조사나 협회 관련 뉴스만 올라오는 공지 게시판에 "협회의 공식 입장입니다" 하면서 이런 글이 올라온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협회 임원진 및 협회원 명단에서 정 작가가 아예 제명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3월 항소심에서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되어 풀려났다.2015년 3월 8일 연합뉴스 '가슴 찌르고 엉덩이 때리고…제자 성추행 만화가 집유' 역시 피해자 편은 들어 주지 않는다.
1심 재판부는 "성년 여성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거나 엉덩이를 때리는 행위 등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고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정씨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문하생인 피해자를 반복적으로 추행하고 폭행해 죄질이 불량하다"면서도 "피해의 정도가 비교적 중하지 않고, 초범인 점 등을 고려하면 원심의 형이 너무 무겁다"며 집행유예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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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으로 국어에 헬게이트를 여셨다.
  • [2] 정철의 누나는 불타는 세자궁에서 인종을 구해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 [3] 실제로 이 소리를 들어보면 외친다기보다는 고기를 다지면서 중얼대는 식이다. "정철정철정철정철..." 대충 이런 식. 여기다 특유의 전라도 억양까지 가미되어 실제 발음은 "증철증철증철..." or "증철이 조사라(전남 방언 '조수다(다지다)' 의 명령형. 즉, '다져라') 증철이 조사라..." 혹은 성을 떼고 "철철철철..." 이라고 한다는 일화도 있다.
  • [4] 그나마 유배로 감형됐다.
  • [5] 충장공 김덕령의 작은 할아버지.
  • [6] 정개청을 역모에 엮은 이유는 정여립의 집터를 봐줬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철이 젊었을 적에 훈계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은 정철처럼 술마시고 노는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건 정개청의 제자들의 주장이고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이에 정철이 그를 비루한 인물이란 이유로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한것이다.
  • [7] 역모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예가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단순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1,000여 명 이상을 희생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8] 선조가 이 점을 고려해서 정철에게 사건 처리를 맡겼다는 시각도 있다.
  • [9] 이순신은 류성룡과는 지기이기 때문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당파는 커녕 중앙 정쟁과는 관계없는 무관에 기축옥사 당시는 임란대비를 위해 초고속 승진을 하던 시기라 숙청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 [10] 이때 같이 까인 인물이 정철과 함께 당시 서인을 이끌었던 성혼이었다. 때문에 간혼독철이라고 같이 붙어서 표현된다.
  • [11] 하지만 후일 동인계열에선 정철이 어차피 선조가 최영경 죽일 것을 알고 일부러 멋부린 것이라고 폄하했다.(...)
  • [12] 정철도 이이에 대해서는 고마워했는지 이이가 죽자 "나하고 친해봐야 좋은 거 없었을 텐데 율곡 그 친구는 30년간 관대히 대해주었다. 내 안 좋은 성격 때문에 골치 꽤 앓았으니 절교할 만도 했을 텐데..." 라고 추모하기도 했다. 지 성격 쓰레기인 건 알고 있었나보다
  • [13] 사실 이이는 정철을 지조 있는 선비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정철이 선조를 빨고 이이가 정철을 빨고 선조가 이이를 빨고 우로보로스?
  • [14] 사실 율곡이 정철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게 그당시 고독했던 율곡의 가치를 인정해주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서인 계열에 속한 백인걸, 박순, 성혼, 정철 정도였다.
  • [15] 아무리 남인이 온건파라지만 정철이 남북을 망라한 범동인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인식됐는지 생각해보면 2차 대전 이후 대독일 온건파가 히틀러와 무난하게 지낸 격이랄까... 남인 내부에서도 정철과 관계를 끊지 않는 류성룡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 [16] '재 너머 성권농 집에 술익었다는 말 어제 듣고' 로 시작하는 정철의 시조에 등장하는 성권농이 바로 당시 권농관의 직책에 있었던 성혼이다.
  • [17]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찬해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건 대표적인 오해이다. 애시당초 선조실록 자체가 권신 이이첨의 주도로 편찬되어 북인 쪽 인물만 극찬하고 (죽어서 서인의 영수가 된) 율곡 이이와 (남인이었던) 서애 유성룡을 소인배로 묘사하는 등 대단히 편파적이다. 오히려 서인 주도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동인 인물들에 대해도 비교적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8] 당시에는 이산해, 류성룡 등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보기에도 정철은 그냥 선조에게 놀아난 수준으로 밖에 안 보이고.
  • [19] 문학적으론 평가를 받는다. 물론 니나노 타령이긴 한데 문학이 니나노 타령이면 안 될 이유도 없다. 정치가 정철과 연관시키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니나노 예술과 정치를 양립시킨 인물도 있으니.
  • [20] 근데 대부분 국어 시간엔 그 정철이 찬양하는 '왕' 이 대체 누구인지는 안 알려준다는 것이 문제다 어느 정도 의식 있는 선생님이라면 말해준다. 설령 설명해주지 않는다 해도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 시가를 모두 공부하면 이 작자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 [21] 일단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병크를 저질렀는지 생각해 보자.
  • [22]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이 고평가했던 작품이다.
  • [23] 학교대사전은 6차에서 7차로 교육과정이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에 쓰여졌다.
  • [24] 말 그대로 호랑이빠다. 호스티스 바 같은 게 아니다.
  • [25] 이 외에 '꿈, 날개를 달다' 라는 웹툰에서 직접 스토리나 그림에 참여하진 않았으나 기획과 프로듀싱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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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9 15: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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