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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last modified: 2015-06-27 15:58:25 by Contributors

만악의 근원
관혼상제
관례혼례상례제례(제사)



祭祀

대체로 알려진 매뉴얼은 이렇지만 집안, 지역마다 제각기 특색이 있어서 다양한 조합이 존재한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 등은 따로 올리기도 한다. 아주 싫어하던 음식이 있으면 빼기도 하고.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남의 집 제사에 놔라, 놔라 한다"이다.[1]각 가정마다 제례의식엔 사소하거나 또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아는 척하는 걸 까는 데에서 비롯된 말. 거기에다, 후술하겠지만 사실 제사 관련 상차림은 원래는 딱 이거다 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목차

1. 개요
2. 차례와 제사
3. 한국의 제사
4. 의의
5. 단점
6. 음복
7. 가문별, 지역별 특색
8. 제사와 관련된 단어
9. 상차림 논쟁
10. 불교
11. 천주교
12. 기타 얘기거리

1. 개요

국어사전에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나온다.

제사의 동기는 테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 있다. 자연재해, 질병, 맹수들의 공격 같은 인간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늘이나 땅, 강이나 바다, 오래된 나무, 높은 산, 조상등에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하여 지내는 종교 의식은 '제사(祭祀)'로 통칭할 수 있다.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제사'라고 하면 유교의식에 기반을 둔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왕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3]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4]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딸은 받지 못한다)이 나누는 전통이 199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

이런 제도는 복잡하게 변천하여 가정마다 연간 제사 횟수가 48회 이상이나 되기도 하였다. 원래는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위인을 많이 배출한 명문 양반 가문일수록 불천위라 하여 영구히 제사를 모시는 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제례의 실용성 등에 대한 문제는 옛 유학자나 예문가들 사이에서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 차례와 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며 #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 따라서 설날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차례도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므로 설날이나 추석에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3. 한국의 제사

  • 삼국시대 이전 : 신명에 의한 복을 받고자 자연숭배로서의 제사의식이 행해짐.
  • 삼국시대 : 자연신에 대한 제사가 자기 가문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로 발전하였다. 일반 민중보다 왕가에서 먼저 행해짐.
  • 고려 말 :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 조선시대 초기: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 16세기 중반 :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4. 의의

영적인 관점에서 제사는 '조상신을 모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절한 절차로 제사를 지내면 조상의 영이 들어와서 제사밥에서 일종의 '원기'를 흡수하여 파워를 얻는다. 그 힘으로 강력해진 조상신은 자손들을 가호해준다는 이론이 깔려 있다. 물론, 이런 이유를 진지하게 믿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드물지만.(…)

제사는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가진다. 특히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초래되는 단절과 공동체 의식의 결핍을 보완하여 현대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 사방으로 나뉘어 살아가는 현대 가족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가족애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리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것이지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 한국과 유교의 전통적인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5. 단점

제사는 례허식으로 지적되어 과도한 낭비 등을 가져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5] 그래서 1969년에 가정의례준칙 및 가정의례법이 제정되어 제사에서 4대 이상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적어지고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점차 국한되었다. 1999년 8월 31일에는 건전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었다. 다만 제사 자체가 일종의 종교 의식이며 가정 내의 일인데 국가에서 법률로 제단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생각해보면 국민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한 행위이다. 사실 이 가정의례법은 "결혼식"도 심하게 규제했다.

현실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서도 의례를 크게 간소화해서 치르는 경우가 많다. 조상들의 제사일을 아예 한 날짜에 몰아서 제사를 지내거나 제사상 진설을 FM대로가 아니라 많이 간소화해서 지내기도 한다. 아무튼, 제사 간소화는 집안마다 가족마다 방법이 다 다르다.

또한, 제사상에 올라갈 제사음식을 차리는 데에는 여자들을 갈아넣어서 만든다. 미혼 여성들의 혼인기피자 0순위가 '종갓집 맏아들'이란 농담은 현대에 생겨난 말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조금만 규모있는 종갓집에서는 거의 한 달에 1~2회 꼴로 제사를 지내기 일쑤이다.[6] 추석이나 설날 한 번 차례 준비하는데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생각해 보면 그저 끔찍할 정도다. 특히나 대부분의 집들은 남자가 도와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여자들이 직접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다. 명절 때마다 남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자들만 부엌에서 일을 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그리고 제사는 여자가 자신의 원래 집안이 아닌, 남자 집안의 온갖 제사음식을 몽땅 해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제사라는 시스템 자체가 며느리로 들아온 여성에게는 사실 이익이 될게 없는 일감 투성이다. 생각해보자, 여자는 자기랑은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남편집안의 조상님을 위해 종일 음식을 만들고 상을 정리하고 나중에는 그걸 또 치워야만 한다.[7] 이게 얼마나 불평등한 일인지 우리나라 어머님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명절날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께 언제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음식이나 먹고 놀기보다는 밑재료 준비나 설거지라도 거들도록 하자.

그러나, "집안일 분담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자기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 집안 만의 행사", "이득이 될 게 없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제사를 지낼 유교적 가족 개념 자체[8]를 부정하는 것이며,[9] 이는 곧 "제사를 지낼 이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아예 제사에 참가하지 않거나 지내지 않으면 그건 시가(媤家)에 대한 예의가 아니면 곧 며느리로서의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여자라고 시가에서 욕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10] 당장에 결혼한 여성들은 이런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대다수의 남성들이 막연히 쉽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결혼은 여성들에게 시가의 압박이 크다. 애초에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사고에 심하게 물들어버린 한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단지 문화적 관점에서만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여자에게만 남편 집안의 일을 강요하는 것은 남녀평등이라는 인류 공통의 가치에 어긋나므로 문화상대주의로 봐줄 수 없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고는 타파해야 마땅하며, 아울러 유교적 제사 방식도 사실상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닌 중국에서 들어온 것(정확히는 '주자가례' 등)이 기반이 되었다. 전통이란 것도 시대에 맞게 변해 나가는 것이니만큼 현대에 맞는 방식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때문에, 요즘은 손이 많이 가는 제사 메뉴 일부, 혹은 전부를 택배로 배달을 받아 제삿상을 차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나이든 시부모님 등 어른들은 이를 탐탁치 않게 보기에, 대놓고 혼을 내는 경우도 있다. 자기도 개고생했는데 며느리만 편한 게 탐탁하지 않으신 거지 또한, 제삿상의 가짓수도 많이 줄어드는 추세다. 무엇보다 음식을 차렸으면 이를 섭취를 하던가 나눠서 집에 가져가던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가족들이 사정으로 인해 모이질 못하면 바로 음식물 쓰레기화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한 번거로움 때문에, 굳이 개신교인이나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명절때마다 늘어나는 인천공항 이용객 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해가 지날수록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실 이미 유교적 의미보다는 전통문화로 자리잡은 만큼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6.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음식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젯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같은 메뉴라도 평소 먹는 것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재료고르기와 다듬기, 조리에 있어서 워낙 공을 들인 음식이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인 제주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미성년자인 아이들이 합법적/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엄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에도 미성년자가 술을 못 마시게 한다. 물론, 첫 술은 이렇게 적당히 긴장 타면서 주도를 배우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기 때문이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사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7. 가문별, 지역별 특색

  •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남아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11]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
  •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빵[12], 양애[13], 빙떡 등. 갱도 생선국[14]으로 올린다(주로 생선미역국). 지역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 경북 지방의 경우도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지방에서 보기 힘든 돔배기 같은 음식이 제사에 올라온다. 제사 음식들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도 삶아서 올라온다.
  • 안동제사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제사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제사밥이 아니구나(헛제사밥)[15]"라고 하였다고 한다.
  • 신숙주의 본관인 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 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나 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중종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절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에서 사망한 단종(조선)태백산 산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개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 특히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많다. 또한 노론 출신 문중에서는 처음부터 딸과 집안 며느리 또한 제사에 직접 참여시키는 경우가 많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해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8. 제사와 관련된 단어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방식을 쉽게 외우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80~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참고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 어동육서(魚東肉西) :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 두동미서(頭東尾西) :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가게 놓는다.[16]
  •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 조율이시(棗栗梨枾) : 왼쪽부터 대추,밤,배, 감 순서로 놓는다. 다만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놓는 조율시이(棗栗枾梨)도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집안마다 다르다. 고로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자.
  • 좌포우혜(左脯右醯) :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다.
  • 반서갱동(飯西羹東) : 반(밥)은 서쪽에, 갱(국)은 동쪽에 차린다.
  •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것은 동쪽에,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
  • 건좌습우(乾左濕右) : 건한 음식은 왼쪽에 습한 음식은 오른쪽에 놓는다.
  • 적전중앙(炙奠中央) : 적과 전은 중앙에 위치한다.
  • 접동잔서(接東盞西) :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 남좌여우(男左女右) : 남자는 제사상의 왼쪽에서 여자는 오른쪽에서 절을 한다.[17]

9. 상차림 논쟁

보통 제사상 하면 떠올리는 상차림 대신 바나나, 피자 등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18] 이에 대해서 밤, 대추, 곶감, 약과 등과 같은 전통 상차림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라면 올려도 상관 없다는 두가지 의견이 충돌되고 있다. 허나, 애초에 우리가 전통 상차림이라 부르는 형식도 1969년 3월 1일 공포된 가정의례준칙[19]과 80~90년대 언론 등에서 몇몇 가문의 제사상 차림을 종합하여 상차림은 이런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널리 퍼뜨린 표준 형식일 뿐, 한국의 전통 상차림이라 보긴 힘들다.

10. 불교

고려시대에는 절에 맡겨서 제사를 대행하였던 모양.

일본에서는 사후 일정기간(대략 수십년) 동안 불교식으로 조상의 성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연다. 이를 법사(法事), 법요(法要)라고 한다. 여담으로 일본인에게 조상 제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법사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다. 공연히 자세히 설명하려고 '제사(祭祀)'라고 써버리면 마츠리(祭)로 착각할 수도 있다.(…)

11. 천주교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민속적 관습일 뿐 가톨릭의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발언한 뒤 천주교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제사가 허용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때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중요 원인이 될 정도의 문제였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제사를 금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국시인 유교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물론 천주교 박해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황사영 백서 사건 등등으로 (모든 천주교인들이 황사영 같은 과격파인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나라를 들어엎을 가능성이 있는 집단임이 드러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천주교의 교리가 유교의 가르침과 심각하게 충돌한다는 점도 '윤지충 신주단지 소각 사건'[20] 등으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학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고 반박한다. 물론 이 의견은 깨끗하게 묵살당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통해 허용된 천주교의 제사는 전통적인 제사 형식과 약간 차이가 있다. 우선 지방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21], 지방을 쓰더라도 지방에 신위神位란 말을 쓰지 않고 그냥 위位 혹은 존위尊位라고 쓴다. 그리고 제문을 올리는 등 조상"신"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제례의식들은 죽은 이를 위해 바치는 기도(연도, 위령기도)로 대신한다. 물론 집안에 따라, 특히 다종교 가정(?)인 경우 다양한 차이가 있기도 하다. 어쨌건 핵심은 천주교에서 인정하는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에 대한 추모와 평안을 비는 기도'라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공자도 제사의 의의는 돌아가신 조상에게 예를 갖추고 살아있는 친족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예식이라고 정의했다. 공자의 어록이나, 그 이후 발간된 그 어느 유교 경전을 봐도 제사가 조상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상 귀신과 소통하는 행사라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22] 즉, 유교식 제사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형식으로 된 의례를 삭제해도, 유교 관점에서도 문제가 없다는 말.)[23]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간혹 이 선을 넘는 경우도 있는 법이기 때문에 천주교식 제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천주교식 제사지내는 법

여담이지만 천주교의 공식 미사통상문에서는 미사를 '제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씀전례 후 이어지는 성찬전례의 시작이 '봉헌(헌금)'인데, 이 헌금을 마치고 이어지는 '예물준비기도'에서 신자들이 다음과 같은 합송을 한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후략)" 왜냐하면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구약시대에 사제들이 양으로 속죄제사를 바치던게 주님의 피와 살로 대체된 하나의 희생제사로 보기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성체는 제삿밥과, 성혈은 음복주와 어느정도 통하는 면은 있다. 게다가 트리엔트 미사는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집전하니 정말로 동양식 제사가 연상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24]

요즘에는 명절에 제사를 지내거나 지내지 않거나 상관없이,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 위령미사는 다른말로 연미사나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고 부르며,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이다. 조상 제사를 드리더라도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어서 교회는 이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원하는 날로 부터 20일 이전(또는 수일 전)에 본당 사무실에 비치된 예물봉투를 사용하여, 미사의 종류와 지향(고인의 이름 혹은 목적), 일시 등을 조정 기록한다. 예물 액수의 규정은 없으나, 차례 때의 제물 값을 고려할 때 성의껏 드려야 한다. 비신자를 위해서도 연미사를 봉헌할 수 있지만, 사제가 그 이름을 공지할 수 없다. 수원교구 최윤환 몬시뇰은 "미사 때 지향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개방돼 있다"면서도 "다만 비신자를 위한 연미사를 공식화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12. 기타 얘기거리

  •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씩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현대에는 부활하여[25]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 하다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항목 참조.

  •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한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 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반려 생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때 진지하게 지낸다.

  • 약간의 변형을 통해 인정하고 있는 가톨릭에 비해서, 대부분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제사, 구체적으로는 제삿상에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죄악시하고 있다. 특히 부부간에 종교가 다를 때 가정불화의 주된 요인이 되는데, 이로 인한 혼인이 파탄난 경우에는 재판상 이혼사유가 된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권장하고 있는데,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 교리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위령기도)를 인정하지 아니하므로, 조상에 대한 추도의식 또한 상당히 제한적이다.

  •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지만, 결국 없애지 못한 것이 바로 제사라고 한다.# 여기다 남북은 제사 예법도 다르다.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다. #
  • 무슬림은 샤하다[26]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천주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양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병사들은 명절 안 그립겠냐? 지휘(자)관이 모범 안 보일 거야? 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뤄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사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활주로 위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사들을 분류하여서, 각자 종교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이 안되는 병사는 안해도 된다.

  •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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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례로 위의 그림에는 대추, 밤, 배, 감의 순서(조율이시, 棗栗梨枾)로 놓여있으나 대추, 밤, 감, 배의 순서(조율시이, 棗栗枾梨)로 놓는 가정도 상당히 많다. 따라서 감과 배의 경우 그 순서가 자신이 알고있던 것과 틀릴 경우 그냥 그러려니 하자. 이거 꼬투리 잡으면 진짜 속담대로 된다
  • [2]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비는 의식이 아니라, 왕권유지를 위하여 왕가와 민가를 구분짓고, 왕실은 대개 조상에게 왕실을 위하여 복락을 빌었고 양반들은 또한 각각 나누어져 각각의 조상에게 각자를 위하여 복락을 빌었다.
  • [3]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4] 당연하지만 제사의 주체도 결격사항이 없으면 무조건 장남이 된다.
  • [5] 빚내서 제사를 지내고 그 빚을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다.
  • [6] 이는 과장이다. 사실 제사를 매달 지낼 정도로 유별난 집안은 거의 없다. 어지간한 집안이라도 3대조~5대조 정도 밖에 안 지내므로 결국 1년에 많아봤자 3번~5번 밖에 안 된다. 10여번씩 제사를 지내려면 공신급 공적을 세워서 천위가 수두룩한 집안인 경우일텐데, 이렇게 위인을 잔뜩 배출한 집안은 대한민국 전체에도 몇개 안 된다.
  • [7] 본래 제사는 신분이나 지체가 높은 사대부층이 지내는 것이고 제사음식을 차리는 일을 해주는 하인이나 머슴이 있었다. 이젠 전국민이 너도나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다 보니 며느리들이 집안의 고급일꾼이 되었다.
  • [8] 유교적 가족 개념에서 적어도 며느리를 완전히 타인으로 보지는 않는다.일꾼으로 볼 뿐
  • [9] 사실 유교적 가족 개념이 해체된 이 시대에 굳이 며느리를 부려먹는 데만 유교적 가족 개념을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 [10] 사실 원래 며느리들은 직접 일하는 게 아니라 곳간 열쇠를 쥐고 하인들을 부리는 역할이었다. 그게 안되는 집안은 간소하게 제삿상을 차렸고. 제삿상은 풍성하게 차리고 싶고 원 풍습대로 사람을 고용해서 할 능력은 안되니 며느리에게만 일 시키면서 그걸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며 욕하는 것도 전통을 편한 대로만 해석하는 것.
  • [11] 그러나 제사는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는게 보편적이다.
  • [12] 본래 제주도는 토질의 특성상 벼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쌀밥이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밀이나 보리를 쪄서 반죽해 쌀밥 대신 올렸는데, 현대에는 이것이 빵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육지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빵이 잘 팔리는 데 비해 제주도에서는 설날, 추석에 빵이 더 잘 팔린다.
  • [13] 양하(襄荷). 양앳간이라고도 부른다. 꽃부분(정확히는 꽃대)을 따다 무쳐서 나물로 제사상에 올린다. 향이 강하고 다른 나물과 비교하는게 무안할 정도로 질기고 아삭한 말 그대로 독특한 식감이다보니 호불호가 극도로 갈린다. 생강맛 반창고 혹은 면붕대
  • [14] 제주도에서 생선이라 함은 옥돔을 지칭한다. 물고기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 [15] 제사를 지내면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가 음식에도 배어야 한는데 그게 없으므로 진짜 제사를 지낸 음식이 아니라는 것.
  • [16] 이때 생선의 배가 신위를 바라보게 놓는다.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이 먹기 편하니...
  • [17] 철저하게 유교성을 띤 집안은 아예 여자한테 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역시 집안 차이. 유교성이 아니라 제실에 다 못들어가서(...) 여성이 제사에 참석 못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 [18] 반대로 고인이 생전에 아주 싫어했던 음식은 빼는 경우가 있다.
  • [19] 가정의례준칙 자체의 동기는 나쁘지 않다. 당시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등장한 신흥 부유층들이 전통의례를 집안의 경제력 과시 목적으로 지나치게 화려하고 형식만 강조하는 풍조가 퍼지자 사회 전체적으로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도를 넘어서는 의례가 퍼지려고 하여 이를 근절하려고 만든 것이다. 실제로 나라에서 통제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삼년상을 유지하는 종중도 볼 수 있었다.
  • [20] 윤지충 바오로와 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결국 거열형으로 순교하고 만다. 그들이 순교한 터에는 전동성당이 세워졌으며, 그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을 참조.
  • [21] 이 경우 그냥 영정 사진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 [22] 유교의 제례 형식 그 어디에서도 이나 강령술 등 초자연적인 개념이 일체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는 실증적으로도 증명된다.
  • [23] 흔히 동양식 제사를 유교가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공자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던 짓이다. 유교는 단지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자신들의 학풍에 제사를 흡수한 것 뿐이다. 즉 조상신을 모시자고 유교에서 만든 의식이 절대로 아니다.
  • [24] 여담으로 예수가 파스카 축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한 것은, 우리로 치면 명절날 차례상에서 제삿밥과 음복주를 들고 몸과 피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자리에 있던 매우 친숙한 음식들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슷한 것일 뿐이니,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는 말자.
  • [25] 지금은 당연히 노비나 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
  • [26]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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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6-27 15: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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