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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 플리트

last modified: 2015-04-05 16:02:36 by Contributors


James Alward Van Fleet(1892 ~ 1992)[1]. 미국 육군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최종계급은 대장. 국내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과 코리아 소사이어티 활동으로 유명하다.

뉴저지 출신으로 1915년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나중에 미 육군 원수 계급을 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와 동기였다. 미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당시 미군은 1차대전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원정군의 장교로 파견되었으며 보병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전간기 동안에는 특별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2차대전에 미 육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전선에 투입되면서 제4보병사단의 8보병연대장으로 참전하여 노르망디의 유타 해안에 상륙했다.전선에서 나름대로 전공을 세웠는데 동기에 비하면 진급이 늦었다. 밴플리트가 보병연대장에 임명된것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기 몇달전이었던 1941년 중반이었는데 연대장직책(+대령계급)을 1944년 7월까지 지낸다. 이유는 하필 미군 내에서 알콜중독자로 악명이 자자한 사람과 이름이 같았다(…). 그 때문에 종종 그 알콜중독자로 오인당해 진급대상자 명단에서 누락되거나 명단에 올라도 진급이 거부되거나 심사에서 탈락하기 일쑤였다. 굉장히 억울하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그저 안습.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가 이미 41년 시점에서 준장계급을 달았던 것을 감안할 때 이러한 오해의 해프닝이 밴플리트 장군의 군 경력에 치명적 타격을 준 것은 확실했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연대장 보직을 조금하다가 명예제대를 했을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한후 아이젠하워나 브래들리와 같은 일부 동기들은 3성,4성장군으로 진급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몇년 후배였던 인물들이 먼저 장성으로 진급한 사례가 수두룩했으며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사단의 동료 연대장중 한명은 그가 임관한지 10년후에 임관한 후배였다. [2]

나중에 조지 마셜 장군이 이 실수를 알게 되었고 이후 정상적으로 진급하기 시작하여 44년 8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않아서 제90보병사단장으로 부임한다. 벌지 전투 후반에 그는 후방부대의 군단장[3]으로 잠시 있었으며 전쟁 말기에는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3군에 소속된 군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국내에 발간된 전쟁사 서적에 보면 패튼과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마주보며 웃음짓고 있는데, 소장 계급장을 단 밴플리트가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얼마나 불편했을까

이후 소련과 이념 대립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많은 유럽 우방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는데, 국무성 장관 마셜의 추천으로 중장 승진과 함께 그리스의 미국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원래 참모를 역임한 경험도 없고 정치쪽 경험이 전무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리스 왕실과 국무성 장관 마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자신의 경험을 모두 쏟아부어 효과적으로 그리스 내전을 종식시키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당시 그리스군 상태가 막장이어서 초반에 고생을 좀 했다. 게다가 여러가지 변수로 실패한 작전도 그리스군의 무능함을 탓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중에 안 좋은 평을 듣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그리스군 총사령관이던 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원수와 상당히 돈독한 사이였는데, 파파고스 원수는 영어를 몰랐고, 밴플리트 장군은 그리스어를 몰랐음에도 서로의 눈빛과 몸짓, 짧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밴플리트 장군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로 오해를 했다고 한다(…).

이후 미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미 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부임한 직후 한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한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플리트 장군도 나름 골치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다는 점이었다.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러시아 영토는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 실제 공산군의 모든 전투력은 여기서 나오고 있었으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참…. 실제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밴 플리트 장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전후 밴플리트 장군은 미국 최초의 한국 관련 비영리 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증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미국과 한국 사이의 관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제임스 A. 밴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래저래 한국과 인연이 많다.

또한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1951년 5월 공세로 대표되는 중공군의 6차 공세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소위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었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8인치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

이 강력한 화력으로 인하여 중공군의 5월 공세는 좌절되었고 중공군의 소위 인해전술역시 격퇴당했다. 물론 그이후 고지전이 엄청난 포격을 가하는 대규모 포격전으로 바뀐것도 이때 밴 플리트 장군의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할수 있겠다.


James Alward “Jimmy” Van Fleet, Jr(1925 ~ 1952)

한편 밴플리트 장군의 외아들인 제임스 A. 밴플리트 주니어는 공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기도 했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B-26기를 조종하여 북한군의 야간 철도 보급을 공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추락하여 유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례는 전선의 최고 사령관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편애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내는 솔선수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고, 미국이 왜 세계최고 킹왕짱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당시 주적의 총수라고 할 수 있는 모택동의 아들도 한국전에서 전사했기에 묘한 공통점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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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향년 100세.
  • [2] 밴플리트 장군의 자서전 중
  • [3] 제23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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