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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last modified: 2015-03-29 21:43:33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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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대한민국의 역대 헌정체제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

Contents

1. 개요
2. 시대적 특징
3. 제5공화국과 관련된 항목
4. 제5공화국 헌법
5. 주요인물


1. 개요


경제적으로는 3저호황과 더불어 사상 최고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던 황금기였으나 정치적•사회적으론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최후의)[1] 군사독재정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12.12 군사반란5.17 쿠데타로 인한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1981년 3월)부터 노태우 대통령 취임(1988년 2월)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 사실 제11대 대통령. 즉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은건 제4공화국 헌법 하에서고 (재임 1980년 9월 1일 ~ 1981년 3월 2일) 이른바 체육관 선거 시즌 투로 뽑힌 12대 대통령이 제5공화국의 시작이다. 물론 체육관 선거 시즌 원과 시즌 투의 대통령 가카는 동일인물이다.

1981년 3월 3일 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약 7년에 못미친 독재로 가득 찬 대한민국 헌정사상 희대의 흑역사. 과거 독재정권들이 그냥 커피였다면, 제5공은 TOP급으로 독재 잔기술의 엑기스로 가득 차있다. 10월 유신을 능가하는 스팩타클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독재 시즌. 공화국 이전에 나라다운 나라도 아닌 상태인 시대였다. 2014년 기준 휴전선 이남에 존재했던 마지막 독재정치로 비민주 체제였다.

평화의 댐코렁탕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의 온갖 막장 행태를 부리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고삐 풀렸던 독재 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이 열리는 국가의 불과 몇 년 전 모습이었다

2. 시대적 특징


이 정부의 모토이자 캐치 프레이즈는 선진조국창조 와 정의사회구현

"선진조국창조" 의 경우, 이 시절 만들어진 공익광고를 보면 '선진조국'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30여년 뒤 북쪽에서도 비슷한 슬로건이 생겨난다

"정의사회구현" 의 경우는 각급 경찰서 현판 바로 밑에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달린 것은 물론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버젓히 걸려있었다. 심지어는 당시 국민학교 외벽에도 떡하니 걸려있던 문구. 메간테 뭔가 이 정부의 태생을 따져보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다. [2] 그리고 여당의 이름은 민주 정의이었다.[3][4]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민정당의 후보 선출 행사에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情)을 주는 당" 이라고 말하다가 장렬한 자폭크리를 맞았다.[5] 이 발언이 터저나왔던 장소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 및 차기대선후보 경선이라 쓰고 왕위계승식이라 읽는다이 열리던 장충체육관이었으며, 그날은 1987년 6월 10일이다.역사는 돌고 돈다

강력한 억압 정책 덕분에 물가가 안정되고, 안정된 참모진 기용과 정권후기의 3저호황 덕분에 경제와 중산층은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전 도시미관이라는 명분하에 서울의 많은 판자집이 철거되기도 하였다.

미국과의 관계는 로널드 레이건 등과의 관계는 끈끈했으나, 계속 비판이 많이 일었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서는 김대중이 귀국할 때 그를 걱정해 따라온 미국 정치인사[6]들과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몸싸움마저 있었다. 미국정계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전해에 비슷한 경로로 귀국했던 필리핀 정객 아키노가 귀국하려다가 공항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언짢아 했을 뿐만 아니라, 안 그래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비난을 퍼붓던 시기였다.[7] 오죽 했으면 요한 바오로 2세 방한시 제일 먼저 갔던 곳이 광주였을까. [8]

4. 제5공화국 헌법


제5공화국 헌법은 1980년 10월 27일,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다음으로 가장 짧은 체제. 원래는 6년 단임이었지만 샤를 드 골이나 프랑스의 예를 본 전두환이 7년 단임으로 변환시킨 것이라고 한다. 여하간, 단임이란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 그리고 어쨌든, 약속은 지켜졌다. 하지만 사실은 내각제로 바꿔서 수상도 해볼까 고려했고, 후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 막후 실세, 사실상의 대통령 노릇을 하려고 했지만 후임인 친구가 가만 두지 않았고 뒤통수를 쳤다. 결국 전두환은 의장에서도 물러나고 감옥에 가지 않는 선에서 백담사로 가기로 타협한다. 하지만 김영삼이 당선되자 얄짤 없이 친구와 손에 손잡고 함께 감옥행.

대통령 선출 방식은 간선제[11], 국회의원 선거 방식은 전국 92개의 중대선거구 지역구에서 최다와 차다 득표자를 뽑고(184명), 지역구에서 받은 의석에 비례해서 비례대표인 전국구를 92명 뽑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역구 제1당이 비례대표의 2/3인 61석을 먹는다. 즉 여당이 무조건 전 지역구에서 2등안에 들어 지역구 절반은 거의 먹고 들어간다 + 여당이 지역구에서 1등이 되지 않을리가 없으니, 61석을 먹는다 = 여당이 5/9인 153석, 즉 150석 언저리는 먹고 들어가므로 여당은 결코 과반(총 의석 276석 중 138석)을 놓칠 수 없다. 이를 두고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 초대 대표위원 이재형(야당에서 변절해 5공에 참여했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다)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다 합쳐 봤자 55%밖에 안 되는데 무슨 비민주적이라는 거냐."라고 발언했다;;

야당 돌풍이 불은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신한민주당이 출현하여 67석[12]을 얻었다. 민한당이 35석역구 26 + 전국구 9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 다음, 민한당 의원들이 총선 이후 대거 신민당으로 이적해 103석의 단일야당이 탄생했는데도 여당은 148석 [13]이었다. 득표율은 신한 29.3% + 민한19.7% = 49.0% > 여당의 35.2% 였다. 이 사실만 해도 얼마나 선거제도가 왜곡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야당은 관제 야당이었다. 3김으로 대표되는 유력 야당 정치인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1985년에야 해금되었다. 구 신민당 계열의 민주한국당(2중대), 구 민주공화당 계열의 한국국민당(3소대), 그 외 정치사회당, 민권당, 농민당, 민족당, 거기에 주사회당(사회민주당) 등의 진보 정당까지 만들었다. 정당놀이 참고로 2중대, 3소대라는 조롱에서 민주정의당은 1대대였다. 진정한 야당이 생긴 것은 1985년 1월 신민당이 창당되면서 부터라 할 수 있다.

야당 내부 파벌 간 갈등 부추기기나 공작 수준에 그쳤던 박정희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으니, 집권세력의 야당 만들기는 가히 북한에 비견할만 했다. 북한이나 중국도 명목상의 어용야당은 있다. 심지어 19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제1야당 민주한국당 후보로 공천된 사례도 있다. 당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정당의 공천작업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14] 한마디로 여/야 모두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자세한건 민주한국당 참조. 이것이 어원이 되어서 현재에서도 특정 단체/집단/커뮤니티의 멀티라는 의미를 비꼴때도 이 2중대라는 용어가 가끔 쓰인다. [15]

당시 민한당 총재였던 유치송의 회상을 인용하자면,

창당 후 야당총재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조찬을 한 적이 있다. 전씨 앞에서는 야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화 중에 야당총재와라는 말을 무심코 썼더니 전씨가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2.3 당이지요."라고 정색을 했다. 전씨의 이 말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고, 또 그러는 야당총재도 없었다. 이 정도면 영락없는 김일성 워너비

여야라는 표현은 국론분열을 부추긴다며 나라일을 사이좋게 함께 논의하는 친구 정당이라고 "우(友)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쯤되면 뭐 간판만 다르지 저 윗쪽 동네랑 크게 다를 게 없는 수준이다. 흠좀무...[16]

5. 주요인물


  • 전두환 중정부장, 민정당 총재, 대통령
  • 노태우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 민정당 대선후보
  • 정호용 특전사령관, 3군사령관, 육참차장, 육참총장,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 유학성 3군사령관, 중정부장, 안기부장
  • 황영시 육참차장, 3군사령관, 육참총장, 감사원장
  • 차규헌 육사교장, 육참차장, 2군사령관, 교통부 장관
  • 박희도 특전사령관, 3군사령관, 육참총장
  • 세창 육참차장, 3군사령관, 합참의장
  • 기오 교육사령관, 총무처 차관, 총무처 장관
  • 노신영 외무부 장관, 안기부장, 국무총리
  • 장세동 대통령 경호실장, 안기부장
  • 무혁 국세청장, 안기부장
  • 박세직 수경사령관, 안기부 제2차장, 총무처 장관, 체육부 장관
  • 안현태 대통령 경호실 차장, 대통령 경호실장
  • 화평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 청와대 정무수석
  • 삼수 청와대 사정수석
  • 문도 중정부 비서실장, 문공부 차관, 청와대 정무수석, 통일원 장관
  • 이학봉 청와대 민정수석, 안기부 2차장
  • 정달 민정당 사무총장
  • 익현 민정당 사무총장, 민정당 대표
  • 춘구 내무부 차관, 민정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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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제6공화국의 첫 정부인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 이후 직선제를 통해 출범한 정부이긴 했지만, 여전히 신군부(하나회) 출신들이 정(政)·관(官)·군(軍) 실세 라인에 포진해 있었기에 진정한 민주정부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노태우가 퇴임하고 김영삼이 취임한 1993년을 실질적인 군사정권의 종식으로 보기도 한다.
  • [2] 정의사회구현에 앞장선다고 '사회정화위원회'라는 행정부서를 전국 읍면동 단위까지 만들었다. 주로 각종 관변캠페인에 앞장서고 각 지역유지들 한자리용 + 삼청교육대 잡아들이기 용.
  • [3] 이후 여러 차례의 개편을 통해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현재의 새누리당이 된다.
  • [4] 그러나 정작 민자당 이후에는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하나회 출신들을 통수를 거하게 치면서 숙청을 했기 때문.
  • [5] 그리고 그 당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을 주는 당이라고 말했다. 그전에는 "일요일밤의 대행진"(요일 일요일밤에의 전신)을 진행하면서 현재 유재석이나 강호동급의 코미디언이었으나, 이런 멘트를 한 것이 알려져 전 국민의 공분을 샀으며, 그 이후 그는 거의 연예계 생명이 끝났다고 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결국 그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SBS 개국 때 옮겨갔다. 그러나 당시 SBS로 옮겨간 원로급 코미디언이 다 그렇듯이 폐기처분된다.
  • [6] 위키피디아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항목을 보면 전혀 다른 정당의 인물들이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
  • [7] 중국도 천안문 사태때문에 국제사회의 온갖 비난과 제제를 받아야만 했다.
  • [8] 당시 교황은 광주공항에 내린 후 도청 부근을 둘러보고 집회 장소인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는데, 이 세장소는 동서 기준 공항이 최서단, 무등경기장이 중간, 도청이 최동단이다. 일부러 도청을 들렀다는 소리.
  • [9] 기본 골자는 1980년에 나왔다.
  • [10] 제3공화국 초기(1963년)에 결성되었다.
  • [11] 개선(?) 된 게 있다면, 이번엔 선거인단에 야당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53.1%, 친여무소속 31.8% 입후보한 데 비해, 제1야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12.5%만이 입후보해서 선거인단 선거 자체가 형식적인 절차였다. 전두환은 90.2%의 득표율로 당선. 백사십프로가 아닌게 어디야
  • [12] 신민당 지역구 50 + 전국구 17
  • [13] 지역구 87 + 전국구 61
  • [14] 창당은 여당은 보안사, 야당은 안기부/ 여하간 해당 후보는 걱정할 거 없다. 2등까진 다 붙으니까...
  • [15] 대표적인건 김용갑 의원이 2000년에 사용한 사용한 "조선로동당 2중대"로서 북한 의 멀티, 친북파라는 표현이다. 웃기는건 김 의원 개인은 5공의 핵심인사로서, 이 표현을 다시띄운 대표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 [16] 북한에도 조선노동당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칭 사민주의 정당인 조선사회민주당자칭 천도교 민족정당인 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 두 정당은 조선로동당의 동맹이라 하여 역시 우(友)당으로 부른다. 물론 전부 어용으로, 세 정당이 연대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라는 연합제를 만든 뒤 북한의 국회최고인민회의의 유일한 정당으로 군림한다. 이런 우당들은 주로 비공산권 국가와의 교류창구로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이 교류가 제법 활발한 편이었다. 관련영상1관련영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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