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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

last modified: 2015-04-03 02:17:02 by Contributors


朝鮮通信使
Joseon Telecom

조선통신사는 사실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日本王国使(일본왕국사)의 日本과 맞추기 위해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라고 칭했을 뿐, 정확한 명칭은 그냥 '通信使(통신사)'다.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에서 일본 에도 막부로 파견한 대규모 외교사절단.

Contents

1. 개요
2. 영향
3. 규모
4. 역대 조선 통신사

1. 개요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왕래했다가 왜란 직후 당연히 일본과의 외교를 단절했다.

그러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해 오자 포로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사절들을 파견한다. 당시엔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강성해지다 보니 조선으로서는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몰아낸 도쿠가와가 어떤 놈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일본 측에서는 새로 집권한 도쿠가와가 기존의 도요토미 파벌을 비롯한 다른 적들을 제압할 겸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 후 1811년을 마지막으로 12번의 통신사 파견이 있었다. 보통은 새로운 쇼군의 취임 기념차 일본의 초청으로 사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가게 되었다.

통신사의 여정을 담은 기행가사동장유가가 있다.

2. 영향


조선 통신사의 방문은 한양 → 에도까지 대략 6개월에서 1년 가량 걸렸는데, 조선 통신사가 지나갈 때마다 일본이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다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다고 한다. 대신에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제발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당첨(?)된 사람의 일가족은 당연히 눈물바다.

통신사의 서예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다는 말도 있고,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조선 사신들이 오히려 중국 사신들보다도 극진한 대접을 받자 [1] 이에 반발하는 '국학파'라는 세력이 생겨날 정도였으며, 일본 사람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극성팬마냥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막부의 국정책 때문에 오히려 이전의 전국시대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제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일본 사람들은 조선->일본에서의 파견은 있었으나 일본->조선으로의 파견이 없었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도 조선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는 했다. 대신 한양에 입성하지는 못하고 동래, 즉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역까지만 왔다갔다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사신의 한양 입성을 허용했으나[2][3], 사신들이 왕래했던 길이 그대로 침공로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안보 차원에서 왜인들이 동래 왜관을 벗어나는 것을 엄금했다. 수도까지 접대하는 사신과 대강 사신관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사절의 차이는 나름 있는 것이다.[4] 애초에 일본과의 관계는 이었지 사대가 아니었다. 차라리 깔보면 깔봤지….

다만 그러다보니 횟수에서는 확연히 조선이 밀려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지식이 늘 한박자 늦는 엇박자를 치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

조선의 국왕 이순(조선 숙종)[5]은 일본국 대군[6] 전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10년 사이에 방문이 뜸하였습니다.
요즘 듣건대, 전하가 새로 서통을 이어받아 해내를 편안하게 다독거린다 하니,
이웃 나라의 의리로 보아 기쁨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상례에 따라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경하를 드리고 화목을 닦노니,[7]
예는 그런 것 이지만 양국의 교린의 기쁨이야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애오라지 정성을 표합니다.
바라건대, 전대의 공렬을 더욱 넓혀 길이 홍복을 누리소서.
이만 줄입니다.
기해년(1719) 4월 모일. [8]
숙종 → 도쿠가와 요시무네

일본국 원길종은 공경히 조선 국왕 전하에게 회답합니다.
세 사신이 멀리 와서 방문함이 은근하여 옥체가 가승하심을 잘 알게 되니 만복이 함께합니다.
바야흐로 아름다운 상서에 응하여 활법을 베풀어
짐짓 옛 전례를 준수하여 새 경사를 닦습니다.
폐백 물건은 품목이 많으니, 어떻게 보답하오리까?
이는 실로 두 나라가 길이 우호하는 정의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또한 예의가 더욱 깊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 물품을 통신사에게 부치오니,
정성스런 마음을 갖기는 피차가 다 마찬가지옵니다.
이만 줄입니다.
교호 4년(1719) 10월 11일 원길종源吉宗 돈수 운운.[9]
도쿠가와 요시무네 → 숙종

이와 같이 1719년 사행때 조선 숙종일본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간에 오간 국서를 봐도 두 나라의 대등성과 조선 통신사의 목적과 역할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이게 정말 따로 항목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만약 개화기 이후까지 이런 통신사로 평화롭게 너도나도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었다면, 우리나라와 일본은 지금까지도 사이가 좋은 이웃나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현재 국민 대부분이 반일감정이 있거나 분명한 이유 때문에 일본을 좋아하는 것 뿐이라고 획을 긋는 현재는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못내 아쉬운 부분.

3. 규모

근데 사실 초기의 (그리고 오늘날 와서 강조되는 문물교류의) 통신사와 달리 최후의 통신사는 훨씬 규모가 축소되었다.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실권자인 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에서 열리던 통신사를 쓰시마로 옮기기를 희망했고(1794),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와서야 승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통신사는 없었다(여담으로 바로 그 해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이에나리 자체가 재임기간이 길어 헌종 때인 1837년에야 죽었으므로 양국이 딱히 통신사를 보낼 이유도 없었고.

여하간, 전성기 때는 이 조선 통신사가 양국의 자존심 대결의 성격도 띄고 있었던 탓에 투입된 예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 조선에서는 경상도 지방의 예산을 몽땅 투입해야 했고, 일본에서도 조선 통신사 접대비용 예산문제로 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돈 잡아먹는 과시용 쇼 일설에 따르면 일본 당시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다고 하며(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 통신사를 맞이하는 장소를 에도에서 쓰시마로 옮기자 한 것도 교통비와 기타 등등의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얼핏보면 별 의미없는 뻘짓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온 이유는 양국이 전부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먼저 가장 가까운 나라와 교린을 맺는 것이 국제관계의 도리라는 점도 있었고, 서로 교린관계를 나누면서 혹시 모를 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덜자는 점도 있었으며, 실제로 왜구 토벌을 같이 하기도 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이라는 정치적인 성과와 더불어, 공공연하게 막부의 권력이 중국에도 알려질 수 있게 되니 중국과의 교섭에도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었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백성들에게 조선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조선을 종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양 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였고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는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라고 속여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교린을 통해 변경이 편해질 수 있고, 일본의 지형과 풍속 등을 살펴 유사시에 제압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수 있고, 대마도 등지에서 활개치는 왜구들의 폐해를 줄일 수 있고 궁극적으론 자신들의 '예'로 일본을 교화시킬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통신사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 간 자들이 남긴 기행 기록 가운데는 일본의 먼 미래 정세, 특히 덴노의 조정이 있는 교토의 경우 덴노의 조정과 관백(쇼군)의 막부를 각각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라 인식했으며[10] 정통성을 갖춘 진정한 군주인 덴노가 무사들을 뒤에 거느린 힘 있는 권신(權臣)에 불과한 쇼군의 힘 앞에 눌려 실권을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하던 교토 지식인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는 점이다. 성대중이나 남옥, 조명채, 원중거 등 실제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조선 통신사 수행원들은 그 주고 받은 이야기를 기행문에 적고 한결같이 "지금의 막부가 언젠가 힘이 쇠약해지고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무리들이 움직일 때가 오면 분명 덴노를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고 판단했고, 그 예상은 백여 년 뒤에 그대로 적중했다. 아울러 원중거는 이런 상황이 되면 조선에도 자칫 피해가 올 수 있을 거라며 미리 대비를 해 둬야 한다고 말했지만, 현실에서의 결과는...(#)

4. 역대 조선 통신사

순서 연도 정사 부사 종사관 총인원 목적 및 특징
초대 1607년(=선조 40=게이쵸(慶長) 12) 여우길(呂祐吉) 경섬(慶暹) 정호관(丁好寬) 467명 국교 회복
2대 1617년(=광해군 9=겐나(元和) 3) 오윤겸(吳允謙) 박재(朴梓) 이경직(李景稷) 428명 사카 전투 직후
3대 1624년=(인조 2=칸에이(寬永) 1) 정구립(鄭口岦) 강홍중(姜弘重) 신계영(辛啓榮) 300명[11] 도쿠가와 이에미츠 취임
4대 1636년(=인조 14=칸에이 13) 임광(任絖) 김세렴(金世濂) 황호(黃帍) 475명 병자호란
5대 1643년(=인조 21=칸에이 20) 윤순지(尹順之) 조경(趙絅) 신유(申濡) 462명 도쿠가와 이에츠나 탄생
6대 1655년(=효종 6=메이레키(明曆) 1) 조형(趙珩) 유창(兪瑒) 남용익(南龍翼) 488명 이에츠나 취임
7대 1682년(=숙종 8=텐나(天和) 2) 윤지완(尹趾完) 이언강(李彦綱) 박경준(朴慶俊) 475명 도쿠가와 츠나요시 취임
8대 1711년(=숙종 37=토쿠(正德) 1) 태억(趙泰億) 임수간(任守幹) 이방언(李邦彦) 500명[12] 도쿠가와 이에노부 취임
9대 1719년(=숙종 45=교호(亨保) 4) 치중(洪致中) 황선(黃璿) 이명언(李明彦) 479명[13] 도쿠가와 요시무네 취임[14]
10대 1748년(=영조 24=칸엔(寬延) 1)[15] 계희(洪啓禧) 남태기(南泰耆) 조명채(曺命采) 475명 쿠가와 이에시게 취임
11대 1763년(=영조 39=메이와(明和) 1) 조엄(趙曮)[16] 이인배(李仁培) 김상익(金相翊) 472명[17] 도쿠가와 이에하루 취임
12대 1811년(=순조 11=분카(文化) 8) 이교(金履喬) 이면구(李勉求) 없음 336명 도쿠가와 이에나리 취임.
대마도에서 이루어짐.
마지막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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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어느 정도라면 천황 즉위식 현재 돈으로 계산하면 230억 정도 였는데 쇼군이 조선 통신사가 도착할 때 사용한 비용이 670억에 가까운 돈을 썼다 ㅎㄷㄷ
  • [2] 동평관이라 하여 일본 사신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 [3] 물론 무로마치 시대에도 시대 사이인 전국시대에는 전혀 일본 쪽에서 사신이 파견되지 않았다.
  • [4] 당장 일본이 배울 대 네덜란드인들을 어떻게 대접했던가.. 이런 후한 대접은 특히 1682년 도쿠가와 츠나요시때 절정을 이루었다. 항목 참조.
  • [5] 실록 원문에는 성휘(姓諱)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임금의 성과 이름을 신하가 감히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신 성과 이름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 [6] 조선에서는 무로마치 막부 때에는 쇼군을 일본국 국왕이라고 불렀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쇼군 위에 덴노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어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국왕 대신 대군(트랜스포트 타이쿤에서 말하는 그 '타이쿤'의 어원이다)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 [7] 그렇다고 조선이 일본 따까리 역할을 했다고 섣불리 넘겨짚진 말자. 이건 명분일 뿐 실제로는 일본 내부를 정탐하거나 왜란 때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수색하는 일 등을 했다.
  • [8] 다음해인 경자년 6월 숙종은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했다.
  • [9] 1716년 쇼군에 올랐다. 당시 36세. 원길종이라 쓴 까닭은 조선이 모든 일본 쇼군의 성을 미나모토씨로 알았고, 도쿠가와 역시 미나모토의 후손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라씨의 후손을 자처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평수길平秀吉이라고 불렀다.
  • [10] 대놓고 막부, 도쿠가와 쇼군들을 왕망이나 조조로 비유하기도 했고, 덴노와 구게 앞에서 존왕론을 강의하거나 토막(討幕, 막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막부에 적발되어 처헝되는 사건도 있었다.
  • [11] 역대 최소 인원
  • [12] 역대 최대 규모
  • [13] 유록을 쓴 유한(申維翰)이 따라감
  • [14] 이에 따라 단임한 쿠가와 이에츠구는 제외되었다.
  • [15] 사실 조선 통신사의 방문 때의 연호는 칸엔 이전에 엔쿄(延享) 5년이었는데, 모모조노 덴노의 즉위로 개원한 것이다. 원래 덴노는 즉위 직후인 4월 25일 개원을 시도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제사와 통신사 등의 이유로 7월 12일로 개원을 미뤄야했다.
  • [16] 고구마를 들여온 그 사람이다.
  • [17] 일본 본토에 간 마지막 통신사. 서기관으로 따라간 인겸이라는 사람이 쓴 기행문 형식의 시인 '동장유가' 라는 작품이 전해지는데,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나 언어영역 등에서 가끔 소재로 쓸 때가 있다. 또한 통신사 서열 3위 서장관이던 '청성잡기'의 저자 대중이 쓴 기행문 '일본록'이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을 읽어 보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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