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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동맹

last modified: 2014-04-18 03:01:24 by Contributors


1944년 건국동맹 결성 당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건물. 이 건물이 건국동맹을 결성했던 곳이다. 지금도 그 건물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1944년 8월 10일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광복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조동호,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등이 조직했다.

사실 '건국동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름이고, 당시 조직이름은 없었다. 이는 뒷날 광복직후 발족한 건국준비위원회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단체를 명명하기 위해 이름이 붙은 것이지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는 이름이 있으면 임원 한 명이라도 체포되었을 시에 죄다 까발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원칙은 삼불(三不)이었는데, 즉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不名)였다.


건국동맹 활동한 사람들 경력은 대부분 화려하다. 구한말기 의병장(유인석)의 문하생 제자로 지낸사람(김진우)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했던 경력이 있는사람(이유필), 비타협 민족주의자(명도석), 조선일보동아일보 둘다 근무한 경력있는 언론인(이여성,조동호), 체육인 출신(이상백), 모스크바 공산대학 수료한 엘리트 공산주의자 출신, 독일공산당 활동경력 있는 인물(이강국), 신간회 좌익계열에서 활동했던 인물(박정희 前대통령의 형 박상희, 태성) 등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어울러져서 활동했다.[1]

참가 인물들이 조직적인 훈련이나 활동을 벌인 사람들도 아니었고, 이념적으로 단결, 통일되지도 않았다. 건국동맹은 이론적으로 탁월한 정치노선, 조직노선이나 세련된 활동전술을 구사하지는 못했고, 개인적 연락활동에 치중하는 수공업적 조직화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가장 열성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조차 경성콤그룹(1939년~1941년 활동한 단체) 검거 이후 와해되어 일제강점기 말기 조직적 실체가 거의 전무하던 시대적 조건에서 건국동맹 조직은 194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중요한 성과로 독립운동의 맥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일체의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고, 산하에 노동자, 농민, 청년뿐만 아닌 학병, 징용거부자 등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운영했다.[2] 또한 공장, 학교, 회사에 세포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1944년 10월에는 경기도 양평군 중심으로 건국동맹 산하조직 농민동맹을 결성했다. 농민동맹은 김용기장로하고 여운형 등 13인이 발기한 단체인데, 이 단체는 학병, 징용, 징병 해당 청년 수십 명을 용문산, 봉산 일대에 피신시켰고[3] 공출반대 운동을 벌였다. 공출반대를 벌인 방식은 쌀 공출 자체를 막고자 논농사를 짓지않고, 공출을 하지 않는 고구마, 감자 등 밭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대체했다.

건국동맹 조직구성에는 내무, 외무, 재무의 3부서와 도별 책임위원을 두었으며, 최고책임자인 여운형만이 전체 활동상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항일군사행동을 준비하기 위해 해외 무장독립세력과도 연계를 주력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김무정 지휘)과 연계를 맺고 연락을 수시로 하면서 구체적으로 군사작전 논의를 마련하기도 했다.(주로 북만주,베이징,옌안 등지에 연락원을 파견하고 서로 접선하기도 했다.)[4] 한편,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5]

1945년 8월 초, 부민관 폭탄의거[6]의 여파로 건국동맹 주요간부인 조동호, 이걸소, 이석구 등 간부들 및 회원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광복을 맞아 출옥했고, 건국동맹은 건준의 모체가 되었다.

건국동맹은 일제말기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7] 결성 직후부터 건국동맹은 중앙조직, 지방조직을 꾸렸을 뿐만 아니라 각 계급, 계층을 망라하기 위한 조직적 준비사업을 초보적인 단계에서나마 광범하게 진행시켰다. 광복 직전까지 조직은 급속히 확대되었지만, 강력한 조직역량을 갖추지 못한점이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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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라지만, 대개 사회주의자들이 주류였다. 사실,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가들 상당수는 사회주의계열 인물들이 주류였다.
  • [2] 대표적인 학병기피자로 준수(뒷날,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가 있다. 하준수는 학병거부, 기피하여 덕유산에 은신하면서 1945년 3월경에 징용거부자 73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했다. '보광당'은 일제의 후방교란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주재소 습격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다 광복을 맞았는데, 하준수는 광복 이후 자신이 '건국동맹과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관련 증언에 따르면 하준수가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을 당시 자신의 자서전, 이력서에다가 '건국동맹원'이었음을 기술할 정도였다고 한다.
  • [3] 대표적인 인물이 염윤구와 이혁기. 이들은 학병거부자로 경성제대 학생들(염윤구는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이었다. 이들은 광복이후 국군준비대 간부로 활동한다.
  • [4] 그밖에 충칭에 있던 한국광복군과도 연락을 맺고자 여러번 접촉 시도도 했었는데, 당시 중일전쟁 전선이 격화되어 도저히 충칭까지 갈 형편이 못되었다고 한다.
  • [5] 구체적인 원인을 들자면 무기획득 실패때문이다. 무기획득을 위해서 여운형은 경기도 주안 조병창에서 근무하고 있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을 시도했는데, 여기서 연락담당은 손기정이 맡았다. 손기정에 의하면 결국 채병덕은 여운형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경기도 주안의 조병창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기획득을 위한 공작을 시도햇던 곳으로, 이미 1944년 말에 무기 밀반출 사건이 여러번 발생했었다.
  • [6] 1945년 7월 말, 민관에서 박춘금이 주도한 '대의당' 결성대회가 있었는데, 이 대회장에서 문기 등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한 명이 즉사하고 수십 명이 다친 사건. 이 당시 엄청난 사건이었다.
  • [7] 1941년 경성콤그룹의 와해(정확히 말하면 일제경찰의 '체포령'으로 인한 와해)로 국내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거의 전무했었고, 일제말기에는 독립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국내에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준 역할을 한게 건국동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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