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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last modified: 2015-03-24 03:24:12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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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소개
2. 연예계 경력
2.1.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2.2. 결혼과 전성기
2.3.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2.4. 타고난 사고뭉치
3. 음악적 평가
3.1. 가창력에 관하여
3.2. 음악성에 관하여
3.3. 그 밖에

1. 소개


조영남 호적에 1944년 4월 2일생이면 또는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 에서 아버지 조승초씨와 어머니 김정신씨 사이에서 8남 1녀 중 7째로 출생했다. 위로는 전부 형들이고 바로 아래로는 남동생이 하나와 맨밑에 여동생이 있는 전형적인 아들고추부자 집안이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대표적으로 김종필(7남 중 다섯째) 전 국회의원, 정주영전 현대그룹 회장(6남2녀 중 장남, 슬하 8남1녀), 안성기(본인은 3형제중 둘째이지만 큰집은 5형제이고 사촌과 조카 자녀들 포함 거의 대부분 아들이다. 해당항목 맨 밑에 참조) 등이 있다.

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킨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 그런데 사실 조영남이 최초는 아니다. 가요계에서 최초로 성악을 접목시킨 사람은 1940~50년대에 활동했던 현인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 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이 곡을 조영남은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가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보통 가수들이 죽으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자신이 죽으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화개장터' 일 텐데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보니... "구경 한번 와보세요!" (...)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 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 이야기다. 당시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씨가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 는데 사실 '모란동백' 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 한 것. 그런데 놀러와에서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치고 있다. 근데 꼭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 으로 들리기는 했다. 이번엔 최진사댁 셋째 딸인가

2. 연예계 경력

2.1.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1945년 4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행렬에 섞여 충청남도로 이주했다.

서울대학교의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연좌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라 북한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한양대학교의 성악과에 몸을 담았다가 교수의 추천으로 서울대 음대로 이적에 성공,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양쪽의 음대를 오고가며 성악을 배우게 된다.

두 개의 학교를 번갈아가며 다닌 데다가 교수의 추천은 있었으나 장학금이나 학비 감면은 고려되지 않았다.

결국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25세에 '딜라일라' 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 이후 TV가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젊은 층은 '화개장터'밖에 모르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어쨌거나 유명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2.2. 결혼과 전성기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영화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이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복귀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집에 소홀해졌고 부인과의 성격 문제도 거론되어 이혼을 하게 된다.

윤여정과의 이혼에 대해서 스스로 많은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나 대체적인 판단으로는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많다. 사실 이유의 대부분은 결혼 생활 중의 조영남의 지나친 바람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윤여정씨의 태도는 어떤 억울함이나 조심스러움을 넘어 이 일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관련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영남의 이름 석 자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강호동도 어쩔 줄 몰라하며 진행했다. 이에 관해서는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 이라며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혼 후에도 연기 활동을 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분들이 있지만 이때만 해도 거의 매장 상태, 필로폰이나 최음제 복용 후 연기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윤여정은 조영남과 이혼 후 말 그대로 매장될 위기였지만 김수현과 개인적 친분으로 밑바닥부터 생활연기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니 조영남 운운하는 건 트라우마인 셈.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는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현재 진행 중.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 운운하고 있지만. 결국 한국 역사상 흔치 않은 공개적인 카사노바쓰레기다.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0년대 중반에는 MBC 표준FM 16~18시 슬롯 <최유라, 조영남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발탁이 되어 라디오로도 발을 넓혔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화개장터' 는 자기 스스로도 쪽팔려서 안 부르는 편. 결국 데뷔곡인 '딜라일라' 를 우려먹고 있다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 중 손꼽히는 부자이며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이상, 실거래가는 백억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확대한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2의 명작 스캔들이란 프로그램에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하고 있다.

2.3.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실향민이자 이혼남이라 자신을 속박할 것은 없다는 말을 하며 격식 없는 방송을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인 <조영남쇼>에선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격식이 없다기 보단 안하무인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란 악평을 듣기도 한다.

2011년 9월 21일 방영된 빅 브라더스에서 게스트로 소녀시대가 나왔는데 멤버들을 포옹하는 과정에서 유독 태연만 강하게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는 논란이 퍼지기도 했다. 소덕들 분노 타오르는 소리 들린다. 나이차가 3배(조영남 1945년생, 태연 1989년생)나 나는 후배 여가수를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비판과 오히려 나이 차이가 손녀뻘 정도 되는 만큼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 엇갈렸다. 다만 프로그램 자체가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주목도가 높지 못했는지 이후 별다른 해명이나 추가 논란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2014년 4월 연예가중계 촬영차 리포터자격으로 집에 찾아온 레인보우의 멤버 김지숙에게 결혼하자라는 개드립을 작렬하여 또 많은 비난을 받았다.뒤늦게 지숙의 나이를 알고 했던 말을 취소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나이만이 문제가 아닐텐데당시 촬영분을 보면 결혼 얘기에 표정이 굳으면서 슬슬 피하는 김지숙을 볼 수 있다.한달후 풀하우스에 출연하여 해명을 했지만 돌아온건 그게 그거라는 핀잔 뿐....

언젠가는 전 부인이었던 윤여정을 기회가 되면 만나겠다는 속없는발언을 했는데 아무래도 자서전과 공연 흥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보여 세간에 빈축을 더하고 있다.

2007년 7월엔 당시 축구 국가대표 친선경기 중 한 경기였던 우즈벡전에서 애국가자신의 스타일로 불렀었다(...)

2.4. 타고난 사고뭉치

1970년대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신고산 타령' 을 불렀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서울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났을 무렵 자신의 공연에서 신고산 타령을 개사해서 "신고산이 우르르르르르~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라고 즉석 개사해 불렀는데 기관에서 이를 문제삼아 곤경을 치렀다. 그나마 이것도, 법조계 쪽에 아는 인사가 있어서 무마된 것이다. 군입대 하는 것으로 하고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육군본부에서 복무. 이때가 또 골때리는 것이 장군들이 잘 봐줘서 매우 편하게 군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 참모총장인 서종철 장군( 출신의 가수 겸 연기자 서지영의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고... 훈련소에서도 훈련소 대대장이 서울대 동기여서 매우 편하게 지냈고 그를 보려고 간부 및 여군들이 행정반을 너무 기웃거려 임무 수행이 안되니 아예 일과시간 전체를 합창실에서 혼자 지내게 했다.

와중 육군본부를 1년에 한 번씩 방문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왔을 때 무대에 불려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대통령이 좋아하는 '황성옛터' 를 부르라고 지시를 받고 올라갔다가 긴장한 나머지 가사를 까먹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가사를 떠올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박대통령이 웃으며 그 노래는 됐다는 신호를 하자 그만했다. 실수를 만회해보겠다고 즉석곡을 불렀는데 이 노래가 하필 '각설이 타령(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DJ변 공연 끝내고 다음날 기상나팔과 함께 달려온 헌병차량에 실려가서 군당국의 신문을 받는 처지가 된다. 신문관은 "왜 대통령의 애창곡을 부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무슨 의미냐" 고 추궁했다고(대통령이 육본에 1년에 한 번씩 오기 때문에 대통령을 각설이에 빗댄 것 아니냐는 말) 하지만 군법무관으로 있던 조영남의 친구들이 "걔는 평소 아무 생각이 없는 애에요. 의식화된 놈이 아니라구요. 그냥 재미있게 해보려다 실수한 겁니다" 라고 높으신 분들께 변호해준 덕분에 풀려났다고 한다.

또 한번은 청와대에 공연하러 갔는데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순간 윗옷 안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 사실은 연주를 위해 하모니카를 꺼낸 것이었지만 워낙 악기 자체가 금속인 데다 권총과 크기도 얼추 비슷하니 순간적으로 경호원들이 총을 뽑으려 드는 엄청난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하모니카를 꺼내 미친 듯이 불었다고 한다(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밝힘).

그리고 2003년 국방부에서 진중문고로 명사들의 군생활 경험담을 모은 것을 책으로 내놨는데 노무현, 이인제, 손학규 등 정치인들과 이상용, 전영록 등 연예계의 거장들 및 기타 학자 및 교수들이 무지무지하게 빡신 곳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들, 교훈들을 푸는 판국에 혼자서 나 인맥빨로 매우 꿀 빨았다! 라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실었다.

서울특별시 한남동에 있던 단국대학교경기도 용인시 죽전으로 이전한 직후 단국대 이전 기념 열린음악회에 출연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영남이 선곡한 곡이 하필이면 도시여 안녕(...) DJ변 확인사살 이것은 도시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열린음악회 선곡표, 당시 영상. 청와대에서도 어그로를 끈 양반인데 까짓 거 대학교 따위야

이혼을 한 뒤로는 정기적으로 보수진영 쪽의 언론사들에 칼럼을 쓰고 있다. 평소에는 소탈한 내용의 칼럼을 적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사고를 쳐주어 미운털이 박혔다. 그러다가 음반 유통의 마진을 가수들에게 더 주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직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야스쿠니 신사가 하도 유명해서 관광 코스로 관광을 간 것인데 음반 유통 쪽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오랜 기간 동안 해온 체험 삶의 현장 MC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몇 년 뒤 대뜸 일본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 요구를 이제 그만두자는 내용의 책을 쓴다. 제목도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친일선언>... 이쯤 되면 극우일빠 인증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 언론의 거센 탄압과 관심을 받았는데 이것을 기회삼아 자신이 관광삼아 야스쿠니 신사에 다녀왔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2ch 혐한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하라는 비웃음적인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데... 사실 위에서 언급된 '친일선언' 이란 책은 그 자극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단순한 일본 찬양만을 담은 내용은 아니다. 한국인이라도 납득할 만한 일본의 장점은 물론 단점도 잘 짚어놓은 편이라 친일보다는 지일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는데 자극적인 제목 탓에 비난부터 받은 것. 물론 이렇다고 해서 사과 요구를 그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목을 저렇게 선정한 것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일 확률이 높다. 후일 조영남은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쓰면서 '진짜 맞아죽을 뻔한'이라고 서문에 적기도 했다.

그 밖에도 자신이 쓴 '예수의 샅바를 잡다' 는 일어판으로 수출도 되었다. 제목 보면 예수 까는 것같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이 외에도 자신의 바람기에 대한 비난을 남성들에 대한 풍자로 흘려버리거나 미네르바에 대한 비난 등으로 유명한 이른바 한 건 터뜨리곤 자기 기준 없이 "남이 까니까 나도 깐다" 라는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체크한 뒤에 시간을 들여 반박 자료를 모아 터뜨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신동아에 실렸던 인터뷰 중에 입양한 딸의 가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다 큰 자기딸 가슴을 보겠다고 사정을 하는것도 이상하다 증~ 말 예뻐. 환상적이라구.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 참 여자들은 이상해. 한참 예쁠 땐 절대 안 보여주다 늙어서는 언제 그랬나 싶게 간수들을 안 하잖아. 이거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 아냐" 라고. 참고로 이 기사가 실렸을 때 입양한 딸은 15살인가 11살이었다. 무슨 목적의 입양이냐 이 인터뷰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2011년 3월 22일 KBS 희망음악회에서 일본도호쿠 대지진 피해민들을 위한 성금 모금을 진행하는데 조영남이 여기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불러 비판을 받기도했다. 워낙 교과서를 통해 익숙한 시이다 보니 정작 작품 자체보다는 원작자의 사망 상황이 더 유명해서 그렇지만 서시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영남이 굳이 이 시를 노래로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일본 혐한들의 병크와 관련한 갖은 자료와 정보가 이미 국내 인터넷에 축적될 대로 축적돼온 상태였기 때문에 조영남 본인 자체도 이미 어그로 만땅인 상태에서 제대로 터졌던 것이다.

그 전에 놀러와에서 윤형주가 서시를 부르지 말라고 조영남에게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이걸로 윤형주가 조영남을 싫어하네 어쩌네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40년을 같이 지낸 형에게 자기 가족 간의 일화를 이야기 한 것 뿐이다. 정말 문제가 된다 여겼다면 법적으로든 본인 선에서든 해결 못할 이유가 없다. 조영남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서시를 노래로 만들기 전에 미리 윤형주에게 양해를 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3. 음악적 평가

3.1. 가창력에 관하여

아주 뛰어난 목소리를 가졌다. 지금 나이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 박자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고난 게 워낙 좋은 것. 성악의 노장들 중에는 이보다 더한 사람도 많다지만 조영남이 그렇게 관리했을 리는 없으니(...) 더군다나 음악적 감각이 좋지 않다면 매우 힘든 즉석에서의 편곡, 애드립에도 능하고 이는 성악 공부로 인해 코드 진행, 멜로디와 화성에 대한 이해가 좋은 편이라는 증거다. 방송에서 그가 노래부르면서 엇박이나 음을 바꾸는 기교를 부릴 때 자세히 들어보면 완전히 벗어날 듯하면서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실제로 가창력이 뛰어나가도 알려진 많은 가수들이 콘서트 같은 공연에서 기교를 부리다가 조절을 못해서 아예 음정이나 리듬이 빗나가 버리는 사례도 많은데 조영남은 그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시대를 감안했을 때의 이야기.

사석에서 당대의 유명 가수들(특히 트로트 쪽)을 씹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데 가창력에 한해서는 그럴 만하다는 게 중평이다. 특히 스탠더드 팝 시절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손꼽혔고 현미, 조영남은 당시 미군들에게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 로 선호받던 가수였다. 그의 대표곡 '딜라일라' 등의 번안곡에서도 원곡의 맛을 가장 잘 살렸다. 한국의 셰... 셱스 밤?! 톰 존스라고 불렸고 그에 손색이 없는 수준. 지금도 조영남과 비슷한 나이거나 조영남보다 윗세대인 어르신들은 젊은 시절 조영남을 팝과 클래식에 뛰어났던 가수쪽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스탠더드 팝의 시대는 끝났고 성악 특유의 톤을 진정성이 없다거나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므로 그런 점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3.2. 음악성에 관하여

작곡 능력은 평범한 편이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을 바랠 수밖에 없는 것.

3.3. 그 밖에

이경규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는데 마라톤 대회에 나가 그 자신은 죽어라 달렸는데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리고 그 혼자만 죽어라 달리고 말았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조영남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힘내라 조영남~!' 이런 격려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놀구 있네', '너 속았어~'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다(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조영남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열 터져서 이경규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며 열 터지는 마무리를 지었다.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 및 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다.

2014년에 당시 26년만에 신곡 통일바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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