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의 등장인물 조조가 아닌 항목을 찾으신다면 조조/동음이의어, 죠죠의 기묘한 모험는 항목 참조.
Contents
위의 역대 왕사 | ||||||
위 건국 | ← | 태조 무황제 조조 | → | 1대 세조 문황제 조비[1] |
1. 개요 ¶
2. 이름과 칭호 ¶
- 조조 맹덕 : 일본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한국도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 조조 : 이 본명은 대개 적이 부른다. 그 일례가 조조놈.
- 조맹덕 : 가장 흔히 불리우는 이름이다.
- 조교위 : 조조가 초기에 교위 직책에 있었기에 이 호칭으로 불리웠다.
- 조승상 : 승상이 된 이후의 호칭이다.
- 위왕 : 216년 위왕이 된 이후의 호칭이다.
- 태조 무덕황제 : 시호.
3. 생애 ¶
3.1. 청년 시절 ¶
3.2. 영제 사후 ¶
3.3. 반동탁연합 ¶
3.4. 연주목 시절 ¶
3.5. 장막과의 대결 ¶
3.6. 천자 옹립 ¶
3.7. 원술,유표와의 대결 ¶
3.8. 여포와의 대결 ¶
3.9. 원소와의 대결 ¶
- 조조의 호사 중 하나인 서타가 조조의 암살을 시도하나 허저에 의해 좌절된다. - 허저전

3.10. 하북 평정 ¶
3.11. 적벽의 대전 ¶
3.12. 마초와의 대결 ¶
3.13. 유수의 싸움 ¶
3.14. 장로 공격 ¶
3.15. 한중 공방전 ¶
덧붙이자면, 조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문무백관의 절반 이상(수정바람)을 숙청한다. "불을 끈 자는 붉은 깃발 아래로, 집에 있었던 자는 하얀 깃발 아래로 가라."라고 한 뒤, 붉은 깃발 아래에 있던 사람을 모조리 참살하라고 시킨 것(연의 한정인지 수정바람). 이후 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진짜 정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3.16. 번성 공방전 ¶
4.1. 군사적 능력 ¶
4.1.1. 병법 ¶
- 무제기 배송지주 위서 -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 무제기 -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 무제기 -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공이 이 말에 따랐다.
- 무제기 -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4.1.2. 친정중시 ¶
4.1.3. 친족중시 ¶
4.1.4. 과감성 ¶
4.2.1. 둔전제 ¶
4.2.2. 호조법 ¶
- 상위 항목: 중국사/세금 제도
4.2.3. 구현령과 한계 ¶
4.2.4. 원호법 ¶
4.2.5. 그 외 ¶
- 개인적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젊은 시절 십상시 장양의 집에 난입해 칼부림을 마구 벌였는데 검술 솜씨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절륜하여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반동탁 연맹에 참가했을 때 병사들이 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머물던 장막을 불태우자 조조는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던가 하는 기록이 위서에 남아있다. 그 외에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남피에서 사냥할 때 꿩을 63마리나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전쟁터에서 오래 굴렀지만 무예에는 소질이 적었던 유비와는 제법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조조, 유비 둘 다 수레에 탄 채로 다른 보호장치 없이 사자 같은 맹수를 사냥하는 일을 즐기던
전사 일족손가에 비하면 살짝 딸리긴 한다(…).
-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거나 병치레를 한 기록이 없다.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그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고 의학수준도 매우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조조는 고대인으로서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위무제 주석 손자병법 등을 볼 때 잘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오만하고 자뻑기질이 있었던 듯하다(…). 손자병법 주석 중에 "병사가 10배가 있어야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건 적군의 능력이 나와 비슷할 때 얘기다. 나는 두 배의 병사만 가지고 하비성에 틀어박힌 여포를 잡았다"라고 적어놓았다(…). 동작대 건설 때에도 자신이 열심히 한 덕분에 천하가 안정되었다고 자랑한 바 있다.
- 문화적으로 참으로 다양한 취미와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여자와 노래, 시 읆기를 좋아하는 문화인답게 술도 좋아했는지 술의 레시피를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이것이 구온춘주. 후일까지 황실에 진상하는 명품이 됐다.
-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쓰던 갈관(葛冠)이라는 모자 대신에 백갑이라는 모자를 만들어 위진 시대에 백갑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외모가 뛰어났다는 기록은 미화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찾아내 마구 부풀리는 왕조의 개창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없으나, 붉은 옷으로도 유명하다. 즉 당대의 패셔니스타.
하지만 전장에서는 미친짓
- 박물지에 따르면 한말에 금석金石 음악이 실전되었으나, 한중에서 두기(杜夔)라는 인물을 얻어, 헌현종경(軒懸鐘磬)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법을 다시 보급했다고 한다.
4.3. 문학 ¶
4.4. 도교 ¶
5. 외양 ¶
6. 성격 ¶
조조는 자신이 죽을 당시에 시녀들로 하여금 재봉하며 스스로 먹고살라고 했다. 당시에 왕이 죽으면 시녀들에게 자구책을 마련해 주기는커녕 쫓아내기만 해도 양반이고, 심지어는 왕이랑 같이 묻어버리는 극단적인 일도 존재했다.(…) 훗날 명에서도 황제가 죽고 나자 조선 출신의 여인에게 순장을 요구했고, 그래서 그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7. 여자 관계 ¶
8. 조조의 무덤 ¶
글줄 깨나 하는 자들아, 가볍게 무덤 속의 사람을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
연암 박지원의 저서 "구외이문(口外異聞)"이런 기록이 있다.
황제가 군졸 수만 명을 풀어 그 냇물 옆을 파서 물을 돌리고 살펴보니, 물 속에는 수많은 쇠뇌에 살이 메워져 있고 그 밑에는 무덤이 있었다.
드디어 발굴하여 한 관(棺)을 얻었는데,
은해(銀海)와 금부(金鳧) 등의 부장품(副葬品)도 있거니와
황제의 면류관(冕旒冠)과 옷차림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曹操)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묘(關廟, 관우묘) 소열(昭烈, 유비)의 소상(塑像) 앞에 나아가 그 시신을 꿇리고 목을 잘랐었다."
8.1. 발굴 내용 ¶
2. 유물의 연대가 후한~북위 시대라는 점
3. 고분의 위치가 문헌과 일치함
4. 조조의 유언대로 부장품이 대체로 소박하다는 점
어떤 사람은 "보물 몇백 개가 발견되었으니 장례를 소박하게 하라는 유언은 구라아님?"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보물 몇백 개'라는 표현은 한국의 언론이 과장한 것으로, 정확히는 '유물 200여 점'이다. 착한 위키니트라면 '보물 몇백 개' 같은 과장된 표현에 속지말자(…).
5.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 주인의 연령이 60대 전후로, 사망 당시 조조의 나이(66세)와 거의 일치한다
6. 결정적으로, 무덤에서
8.2. 의문점 ¶
그런데 이미
72개 가짜 무덤설은 후대의 창작임이 명백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도굴을 막겠다고 가짜 무덤을 72개나 짓는다는 건 무척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8.3. 진행 상황 ¶
9. 연의와 그 이후 창작물에서의 평가 ¶
嶪中柯
城則鄴城水彰水,定有異人從此起。 업중가
그곳의 성은 업성(鄴城) 그곳의 물은 창수(彰水), |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라고 조조를 극찬하고 있다. 소설 연의에서는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연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대체로 악역으로 묘사된다고 해도 멋없게 묘사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10. 정사의 평가 ¶
"임기응변과 적을 헤아린 기모(奇謀)는 일개 장수로의 지혜로는 남음이 있었지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재주에는 모자랐구나!" -당태종 이세민. 고구려 원정 직전 업성에서 조조에게 제를 올리며.[106]
11. 그 외 ¶
- [1] 막 후계자가 됐을 무렵에는 황제가 아니라 위왕. 조비가 위왕에 오른 후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했다가,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 [2] 위무제(魏武帝)
- [3] 치세엔 훌륭한 신하, 난세엔 간악한 영웅(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 정사 삼국지 무제기의 기록. 후한서에서의 기록은 청평의 간적, 난세의 영웅(평화로운 시기엔 간사한 도적, 난세엔 영웅 君清平之奸賊亂世之英雄). 당시는 과거제 같은게 없고 이런 주변 평가 같은걸로 관직에 오르던 시절이라, 평가를 받는게 매우 중요했다 한다. 그런데 조조가 성질이 더럽고 난폭하다는 소문이 있어 허소가 평해주기를 주저해서 조조가 조르고 졸라 이 평을 받았다고 한다.
- [4] 여담으로 이 말은 "치세의 등신 난세의 간첩"이라는 말로 자주 패러디 된다(...)
- [5] 실제로 백괴사전에는 조조 항목이 '쬬'로 등록되어있다('쬬'의 정가운데 부분을 세로로 자르면 '조조'가 된다). 그 외에 영어표기를 카카오(CaCao)로 표기하는등 해당 항목을 보면 백괴사전이 그렇듯이 완전 판타지를 써놨다(...). 보러가기
- [6] 재미있게도 홍길동전의 판본 중에서는 "천하가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천하를 저버리지 않겠다" 라는 명대사가 있다.
- [7] 그러나 샤먼대 이중톈 교수에 의하면 그 말에서 '천하'대신 '다른 사람'이 원문이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 임의로 넣었다고.
- [8] 삼국지 관련 2차 창작 매체에서 '환관이지만 공정한 사람' 같은 식으로 대충 서술하는데, 실은 엄청난 거물이었다.
거기말고해당 항목 참조. - [9] 위에서 언급했듯이 환제를 옹립해준 대가로 환제는 조등을 비롯한 내시들에게 양자를 들일 수 있는 엄청난, 흠좀무할 수준의 큰 상을 내렸다. 원래 환관은 양자 갖는 거 아니다.
- [10] 여담으로, 여기선 조등과 장양이 제법 대등하게 나오지만, 정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역이 아니라고 해도 장양은 조등에게 고개 빳빳이 들 처지가 아니었다. 조등의 실제 위세를 실었다간, 조조의 이미지가 '실력으로 올라간 개혁군주'가 아닌 전혀 다른 게 되어버리는 것을 직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타 연의 관련 2차 창작물에서도 많이 보인다.)
- [11] 노비, 즉 '천첩'이었다. 전근대 시절에는 같은 첩이라도 신분이 어엿한 가문 출신의 '양첩'과 미천한 출신인 '천첩' 및 그 소생 사이에는 많은 차별을 두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 [12]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내세우며 통금시간 이후에 지나가려 하자 "이곳은 천자가 계신 도성의 관문이고 사사로이 열어주었다간 도적들도 쉽게 드나든다"며 기어이 곤장을 때렸다.
- [13] 수도를 지키는 오교위의 하나로 관품 자체는 지방의 듣보잡 교위보다는 넘사벽으로 높지만 태수에 비하면 살짝 떨어진다. 동탁전에 따르면 동탁은 수도에서 실병력을 거느리는 교위의 임명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조조를 꽤 믿을만한 인물로 여기며 좋게 평가했다는 얘기.
- [14]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연합군이 산조와 하내에 따로 모인 정황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원소는 동탁을 두려워해 싸우지 못했다는 식으로 나온 뒤 조조가 전투를 촉구하는 일장연설을 해서 연합군이 모두 산조에 모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이때 원소는 산조에 있지도 않았다(...) '위태조 폐하 빼고는 모두 겁쟁이였다'는 식으로 막 띄워주려다 보니까 생긴 오류(...) 물론 하내에 집결한 연합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전혀 언급이 없으며, 원소와 한복의 불화는 후한서에서 언급된다.
- [15] 연주자사 유대가 동군태수 교모를 죽이고 개인적으로 임명한 인물이다.
- [16] 흑산적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고 연주에 거점을 만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 [17] 동군 무양현 사람으로 유대를 섬겼다는 서술은 없고 처음부터 조조를 따랐다. 조조가 동군태수로 임명되면서 기용한 것으로 보인다.
- [18] 유대의 부하로 보긴 어려운 것이 관품상으로는 자사와 태수가 동렬이고, 더군다나 제북국은 연주가 아니라 청주 소속이기에 유대의 지시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유대가 연주자사로 임명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북상이 되었으니 실력자 유대가 개인적으로 포신을 임명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유대에게 간언했던 것은 황건적 토벌을 둔 협력체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 물론 포신이 황건적에게 패하고 임지에서 쫓겨나 유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
- [19] 진수는 조조가 유대의 후임으로 추대된 합법적인 연주목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유대는 연주목이 아닌 연주자사였고 관직의 사적인 양도,증여는 당연히 불법이다. 조조가 연주를 무력점거하자 그 배후에 있던 원소가 조조를 연주목이라고 인정해준 것이고, 조조는 중앙정부에서 유대의 후임으로 파견한 연주자사 금상을 공격해 쫓아냈다(...) 후한서 원소전과 배송지주로 달린 삼보결록에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 [20] 유대가 연주자사였지만 연주 전역을 다스렸다고 보긴 어렵고, 실제로는 각 군국의 태수들마다 비슷비슷한 지분을 가졌다고 봄이 옳다. 하지만 조조는 동군태수로서의 지분에 더해 원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유대의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황건적 잔당들의 항복을 받으면서 상당한 이르는 인력을 얻었기에, 왠만한 태수 레벨을 초월하게 된다.
- [21] 원소와 마찬가지로 공손찬도 연주에 자사를 파견하고 있었으나 세력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명.
- [22] 공손찬이 사적으로 임명한 유비,선경과 달리 도겸은 정식 서주목으로 독자적인 기반을 꽤 다진 상태라 공손찬과는 전략적인 제휴관계에 가깝다.
- [23] 원술은 원소를 최대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유표는 원소와 제휴하고 있었고, 조조 또한 원소의 종속적인 위치에 속해 있었다.
- [24] 원술 입장에서는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이는 원술 항목을 참조할 것.
- [25] 동탁의 난을 만나서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가 많은 사람이 서주 땅에 의지하였는데, 조조가 부임하여 남녀 수십만 명을 사수에서 파묻어 죽이니 물이 흐르지 않았다. 조조가 담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자 마침내 떠났으며, 여, 수능, 하구를 공격하여 빼앗고 모두 도륙하였는데, 닭과 개 역시 다 없애니 텅 빈 읍에는 다니는 사람이 다시없게 되었다. - 자치통감
- [26]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취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 후한서
- [27] 흔히 여포와 조조와의 싸움으로 알려졌으나 실질적인 수장은 장막으로 여포는 장안에서 지낸 높은 관직, 장막에게 오기 전 원소 휘하에서 군공을 쌓으며 널리 알려진 무용 등을 고려해 장막이 월급사장으로 고용한 것에 가깝고, 장막은 연주를 점거한 뒤에는 여포에게 약간의 지분을 주며 떼어낼 생각이었다. 주가 조조를 배신하고 일제히 여포로 돌아선 것도 장막의 인망이 그 당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고, 기록상 이때부터 벌써 여포가 주체로 묘사되는 것은 여포가 '장막에게 옹립된' 연주목인 이상 수장 중심으로 서술되는 기전체의 특성으로 봐야 할 것. 전쟁이 진행되면서 야전지휘관으로 비중이 높은 여포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 [28] 물론 장홍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연주 전국이 모두 조조의 영향력에 닿고 있었다고 보긴 어려울 듯.
- [29]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 [30]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 무렵의 기록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지만, 집해에 주석으로 인용된 사승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하다가 패하고 원소에게 항복을 구걸하자 원소가 불쌍히 여겨며 5천의 병사를 지원해줘서 조조가 연주를 취했다고 한다. 장막이 궐기한 동기로는 하나같이 원소와의 대립 때문이라 언급되고 있으니, 원소로서도 이를 무시하긴 어려웠을 것.
- [31] 진수는 원소가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했고, 조조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욱이 제지하자 정욱의 말을 따랐다고 적고 있으며, 집해에서는 원소와 조조가 연합관계라는 것은 이미 너무나 새삼스러운 일이라 원소가 조조를 업으로 소환해 직속 부하로 삼으려 한 것을 진수나 위나라 사람들이 흑역사로 간주해 숨긴 것으로 보는 쪽이 유력하다.
- [32] 조조가 원술을 격파하면서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진 반면, 원소는 조조를 지원해 원술의 북상 야욕을 저지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딱 원술이 격파될때쯤 흑산적의 기습을 받아 근거지인 업이 함락되었고 이를 틈탄 공손찬의 재침공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겪었다.
- [33] 마침 도겸이 병으로 죽으면서 유비에게 서주목의 지위를 양도한 상태였다.
- [34] 원소는 명예직으로 올려버리고 자신이 실세임을 천명한 것이다.
고로 이제 여유가 생겼다는 속마음 - [35] 이렇게 받게 된 원소의 권위가 그야말로 ㅎㄷㄷ한데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기주목+유,병,청주 도독으로 여기에 지절을 더하였기에 관할 구역내 민간인과 2천석 이하의 관리를 법에 따라 처결할 수 있으며, 부월의 특진을 받아 자의적인 사법적 재량권을 행사해도 면책받는다. 호분의 특진을 받았으니 자체적으로 군을 편성할 수 있으며, 궁시를 받았으니 역적으로 간주된 인물을 토벌할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자기 관할구역 내에서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 [36] 엄연히 말하자면 조조는 장막을 변호했지만, 조조의 세력이 장막의 세력을 능가하다 못해 흡수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둘의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진궁과 상의해서 여포를 불러 조조의 뒷통수를 쳤다 - [37] 전풍의 진언은 천자를 옹립하고 있는 조조와 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을 둘로 늘리자는 얘기다. 명분,실리 양쪽에서 모험을 벌이자는 얘기니 당연히 쉽지 않았을 것. 더욱이 북쪽에서 공손찬을 몰아붙이고 있던 국의
쿠키가 크게 패한 것이 이 무렵임을 감안하면 악수에 가깝다. - [38] 주위에 적이 많았고 유협의 정통성을 옹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원술의 입지상 적대세력인 조조가 조정을 장악하자 자신의 지지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대외적 입지는 포기한 채 나름의 내부 결속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 [39] 처음엔 원술도 여포를 후대했지만 여포가 방약무인으로 날뛰며 원술의 영내에서 노략질을 일삼다가 쫓겨난 것이라 원술에게도 타당한 이유는 있다.
- [40] 이렇게 유비가 싸우지 않고 달아난 것은 성급한 판단일지 모른다. 원소는 유비가 서주를 버린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안량, 곽도를 보내 연주지역의 동군을 공격하였고, 자신은 황하를 건너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여양으로 왔기 때문이다.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떠났을 때는 12월이었고, 조조가 유비를 공격했을 때는 1월이었다. 원소와 조조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는 2월이었으므로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한 달 조금 되는 기간만 버텼어도 조조는 원소에게 배후를 급습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이는 원소에게만 좋은 결과일 뿐, 유비는 원소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조조와 대치하다 몸을 뺄 기회를 잃고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굳이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다.
- [41] "지금 (아군 측) 병사가 적어 (원소 측을) 대적할 수 없으니|- 무제기, 순유의 발언.
- [42] 무제기의 서술은 2월에 백마가 포위된 사실을 서술한 이후 4월로 갑자기 널뛰기한다. 다른 어떤 기전에도 2월과 4월 사이의 백마포위망을 다룬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 [43] 무제기 -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매우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 [44] 후에 우금전 등에서 연진이 원소의 별영이 있는 것으로 기술됨.
- [45] 김원중 번역을 따름. 다른 중국어 전문가의 상이한 해석이 있다면 추가바람. 중국 저자가 쓴 "삼국지 교양강의"에서도 조조군이 "패배"했다고 분명히 나온다.
- [46] 악질적으로 조조가 원소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강조하면서 원소의 우수성을 강조하는데 애초에 원소가 동원가능한 병력 자체가 조조보다 훨씬 많았다. 합전을 했다는 것도 서구식으로 회전을 벌인 것인지 지속적인 교전 끝에 전선이 밀린 건지도 알 수 없다. 일단 조조가 관도까지 밀린 것은 확실하다.
- [47] 이것이 원소와 조조의 병력이 대등하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밀도에 관계없이 병력을 진영을 세우면 되는 거니까..
- [48] 다만 배송지는 자신의 주에서 이 만 명의 숫자의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조조군이 농성하면서 군량을 습격하는 별동대를 돌리고 또한 8만 명을 생포하여 매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이 축소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열의 두셋의 부상병이라는 비율은 전투의 패배와 같은 큰 타격을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 [49] 연의에서는 순욱이 조조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전략) 원소군 측에서도 큰 사건(=군량 수송)이 벌어지리라 예상합니다."라면서 복선을 뿌렸다. 여담이지만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서신은 허유가 갖고 있다가 조조에게 투항할 때 보여준다.
- [50] 허유가 조조에게 절을 올리자 조조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친구 사이에 그런 예의를 보이다니 자네답지 않네."라고 하는 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51]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부풀려서 허유와 조조가 아웅다웅(…)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량 얼마나 있어?" "1년." "장난하냐?" "사실 반 년 있어." "나 안 믿지?" "…3달." "아, 끝까지 거짓말하네. 나 빈정 상해서 그냥 갈래." "사실은 1달 있어." 이런 식(…).
- [52] 항목 참고, 조만전은 편찬자의 주관과 불확실한 정보가 많이 섞인 것으로 논란이 많은 사료이다.
- [53] 원소전 -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공이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다시 따르지 않았다.
- [54]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부각시켜서, 곽도가 팀킬을 자행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즉 장합&고람이 돌아와서 자신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추궁할까봐 오히려 원소에게 장합&고람이 배신자라고 거짓 밀고하는 장면을 넣었다.
- [55] 이것은 원술 밑에 있었던 양봉과 한섬이 여포에게 항복하기 위해 아군을 공격하여 확실한 의사표시를 보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장합과 고람이 이끄는 병력은 조조군의 본대를 공격하기 위해 차출된 것이므로 주력에 가까운 병력이 분명이고 이러한 병력을 조조가 의심없이 자신의 진영 내로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따라서 장합과 고람은 원소 측 진영을 불태움으로써 분명히 조조 측에게 붙었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56] 창정의 전투에 대해 무제기에서는 揚兵河上, 擊紹倉亭軍라 적고 있고 이는 '황하 이북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에서 원소군을 격파했다'고 해석되는데 당시 창정은 연주에 있었고 훗날 황하의 대범람으로 물길이 바뀌어 하북에 속했다. 당시 사서상에 하상이란 표현이 몇 번 등장하는데 아마 지명으로 쓰였던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 [57]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에 좌죄되지 않기를 빌었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나는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전(國典-나라의 전범)이 아니다.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실리(失利)한 자는 관작(官爵)이 면탈될 것이다.
- [58] 연의에서는 이 장면을 대부분의 모사가 반대했지만, 곽가가 계책을 내자 조조가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원담 정벌 후 유성을 정벌할 때(장수 이름 추가바람&수정바람) 곽가가 죽기 때문에 없는 공을 넣어준 듯.
- [59] 즉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이자 호시탐탐 기주를 노리는 적세력의 힘을 빌려 자신의 동생을 도모하겠다는 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이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원담이 조조에게 파견한 신비도 이를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조조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붙는다.
- [60] 후에 조조는 포로가 된 심배에게 "그때는 어찌 그리도 많은 노를 준비하셨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심배는 "다만 그 수가 부족하였음이 원통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 [61] 심배는 끝까지 버티고자 하였지만, 원상의 원군이 괴멸된 상태에서 업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이 공성전에서 조조는 하비에서 여포를 공략했을 때처럼 주위의 강물을 성에 흘려보내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이렇게 조조가 공성전 때 강물을 이용하는 것은 위의 두 번의 공성전 이외에도 유표에게 쫓겨난 원술이 예주로 침입했을 때 그를 상대로 한 적이 있었다.
- [62] 앞에서 말한 대로, 연의에서는 이 부분 역시 곽가가 죽기 전에 냈던 계책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묘사했다.
- [63] 물론 유비군의 매복에 고생하는 연의에서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과는 다르다.
- [64] 삼국지연의에서는 누규가 와서 얼음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도 이때가 8월이었음을 근거로 들며 이를 부정했다.
- [65] 배송지의 주에서 복황후가 벽사이에 숨어있었고 화흠이 벽을 부수고 끌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연의에선 이것을 각색하여 화흠이 손수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끄집어낸 것으로 묘사하여 위의 악역포스를 강화한다.
- [66] 두 번(동귀비와 동승, 복황후와 복완)씩이나 황후와 국구(황제의 장인)가 일을 꾸미자 자신이 직접 국구가 되어 그런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평가된다.
- [67] 한수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 때부터 집요하게 조정에 반발하였다. 조조를 상대로도 계속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였는데 마침내 이때 죽은 것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한다.
- [68] 합비는 손권 입장에서 엄청난 요충지였다. 수춘성 바로 코앞에 위치한 합비는 장강을 끼고 있는데 이곳은 건업과 유수구, 여강 일대를 한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손권이 합비를 점령한다면 이곳만 틀어막고 있어도 이들 지역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즉 입구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이것은 유비 입장에서 한중과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띄고 있었다. 따라서 손권은 이 합비를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들이나 계속 실패하였고 동오가 멸망할때까지 합비를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 [69] 조조와 유비는 각각 한중과 촉을 거의 동시에 점령하였다. 역시 둘의 인연은 보통이 아닌 듯.
- [70] 조조는 적벽 이후 비교적 군사행동에 소극적이었다. 손권을 상대로 직접 군을 이끌고 세 차례나 공격했으나 적벽과 같은 대규모 군사행동이 아니었고 국지적인 싸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또한, 훗날 사마씨가 촉과 오를 멸망 시켰을 때처럼 대규모의 총력전을 통해 정벌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조가 소극적으로 변한 것은 아마 그의 나이가 이미 고령이었는데다(적벽 싸움 전, 야밤에 잔치를 벌일 때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기도 했다.) 유비나 손권의 세력이 강성하여 총력전을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고, 또 이러한 적대 세력들의 존재가 조씨의 입지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 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71] 한편으로는 지형적 요인을 드는 견해도 있다. 비록 1차 방어선을 뚫었다 해도 진령산맥의 오지 익주나 장강과 당시에는 습지 투성인 강남을 완전히 평정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보급로도 안정치 않으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 [72] 상은 왕의 재상이었다. 조조가 과거 제남왕의 상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것과 같은 직위이다. 물론 조조는 겉으로는 위왕이나 실제로는 최고 권력자였으므로 종요는 실질적으로 이인자의 직책에 있었던 것이었다.
- [73] 소설가 이문열은 이들의 반란의 동기로 조조가 위왕이 되면서 업무를 그곳에서 보게 되자 허도에서는 정치에서 소외된 관료들만 남게 되었고 이들의 불만이 이 원인이 되었다고 추측한다. 대조적으로 연의에서는 이들의 동기를 순수한 한나라 황실의 애국충정 때문으로 묘사한다.
- [74] 연의에서는 유명한 점술가 관로가 조조에게 이 일을 예견해 주자 미리 대비하였고, 그 덕분에 경기와 위황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었다고 한다.
- [75] 가령 이들은 헌제의 조칙으로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면 조조의 세력이 상당히 와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황제 아래의 이인자였으나, 실제로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제한의 힘을 휘두르는 권신이라 해석할 수 있는 면이 다분했기에, 당대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정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 [76] 당시 조인과 우금 군의 궤멸로 조조의 영토는 관우군에 잠시나마 노출된다. 조조가 천도를 논의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는데 연의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무서워하여 천도하고자 한 것으로 나오나 이때 조조는 장안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본부는 업에 있었으므로 관우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조조가 천도를 논의한 것은 헌제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여부였다. 위의 주석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직 한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이나 조조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이 많았다면 헌제가 유비에게 넘어가는 순간 조조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 [77] 죽기 불과 3개월 전이었는데도 조조는 군을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 [78] 위빠들이 흔히 주장하는 조조는 능력있는 사람만 우대했다는 의견에 대한 위까들이 반박 사례로 들먹이는 것이 인격자이지만 장수로서, 특히 대장군으로서 능력이 한참 미달인 하후돈을 사실상 낙하산 인사로 기용한 것에 대해 꼬집는 주장.
- [79] 六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킨다
- [80] 중앙 정부가 부패하지 않는 한은 더 이상의 수취는 없다는 뜻이다. 어떤 훌륭한 제도라도 운용이 방만하다면 결론은 국민에게 피해가 온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대 K 교수는 '사실 둔전제만으로도 제대로 운용된다면 고대 토지제로는 완성된 제도'라고 하였다.
- [81] 《위략》에 의하면, 조비의 정책 중 하나가 병사들을 결혼시켜주는 것이었는데 두기는 과부만 모아서 보내느라고 일 처리가 늦었는데 조엄은 유부녀를 강제로 보냈다. 조비가 두기에게 왜 이렇게 일을 못하냐고 빈정대니 두기가 이에 대해 말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고 한다.
- [82] 국경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 [83] 五言詩, XXXXX XXXXX 식으로 끊는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
- [84]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
- [85]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평가기준은 당나라 때 등장한 표현이다. 신체, 언행, 글씨, 판단력 모두를 총괄하는 기준이므로 외모중시하고는 상관없다. 身이라는 게 단순히 핸섬한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굴 형태는 못 생겨도 품격이 나타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 [86]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도 조조의 이런 행동만큼은 감동했는지, 형양 전투의 장면을 넣었다.
- [87] 학살은 피가 난무하는 중국사 기준으로 볼 때 굳이 조조만 욕을 먹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백성에 대한 약탈과 처형, 학살하지 않고 민심을 사려고 노력한 유비가 정말 특별한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물이 막힐 정도로 백성을 죽여댄 서주대학살은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비판의 여지가 분명하다. 사실 아버지가 죽기 전에도 학살을 일으켰음을 감안하면 동정론도 힘을 잃는다.
- [88] 사마소가 제갈탄의 난을 평정한 후에 동오의 지원군을 포로로 삼았을 때 여러 신하가 오 병사들을 갱살을 할 것을 건의한 것을 들어 당대에 갱살이 별로 심한 일이 아니었다고 규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오류. 당장 사마의가 공손연 세력을 학살한 일이나, 이보다 더 이전 시대인 춘추전국시대 백기의 일화만 들어도 이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잘못'으로 받아들여졌음은 분명히 증명할 수 있다.
- [89] 어이없는건 이때 조조는 설마 걔들이 다 도망갈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면서 오히려 크게 웃었다(...)
- [90] 양수의 경우 후계자 결정 문제에 연루되어 있었고 공융은 사사건건 대놓고 태클건 걸 감안하긴 해야 한다.
- [91] 예형과 허유도 그 태도를 감안해야 하며, 허유를 죽인 것은 허저였다.
- [92] 물론 이후 허저에 대한 조치로 봐서 조조도 허유를 고깝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누규의 경우에는 취중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 물론 술에 깬 다음 날에 크게 후회하며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점에서 우번을 귀양보낸 손권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 [93]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 번은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 [94] 이후 조조가 정씨의 집에 몇 차례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정씨는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훗날, 조조가 죽기 전에 자신이 생애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이 정씨의 일이라며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 말한다.
- [95] 다만 이 부분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듯 싶다. 관우까들이 관우를 까는 것에 악용할 때도 있다.
- [96] '두 다리(橋)'를 이어 놓았다는 구절을 동남(오나라)에서 이교(二喬)를 데려와서 같이 즐긴다는 구절로 바꿔서 읊었다. 자기 마누라 내주고 항복해야 된다고 알아들은 주유가 빡치게 하려고 왜곡한 것. 참고로 동작대부는 적벽대전 이후에 쓰여졌다.
- [97] 조충과 조우, 조간은 다른 네 명과는 이복형제이므로 나이 관계가 확실치 않다. 다만 조충이 조간보다 약 20년 정도 연배가 위이고, 조우와 조비의 아들 조예의 나이가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간이 조예보다도 어렸다는 기록에 따르면 위와 같은 순이 합당해보인다.
- [98] 내용 출처 : http://blog.naver.com/donmany0203/30173438900
- [99] 솔직히 이걸 조조묘라고 발표했던 일단의 학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고 이 학자들마저 고고학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고 한다.
- [100] 조조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던 여공과 시녀들에게 제사 지내는 도구를 나눠준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건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단 "내가 죽어도 계속 제사 지내줘"라고 <strong>종신노동</strong>(…)을 시키는 의미가 다분하다.
- [101] 평화에서 굴욕 장면이던 옷 주는 장면조차 연의에선 조조가 넓은 도량으로 이해해주는 것으로 바뀐다.
- [102] 다만 이건 정사에는 없는 일.
- [103] 사실 연의 이전엔 선한 면은 아예 없다시피할 정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면만 부각되고 없던 악행도 새로 만든 데 비해, 비교적 연의는 실존한 악행 대부분에 가상의 악행은 얼마 없고, 여기에 선한 모습을 추가했다. 사실상 연의가 조조복권의 시발점이라 봐도 좋을 정도.
- [104] 배한성, 배칠수의 만화열전에서는 삼국지연의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초반부의 주인공은 조조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을 정도.
- [105] 연의에서 아주 초창기인 황건적 토벌 당시 조조가 "붉은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표현하긴 했다.
- [106] 과시할만도 한게 당태종 역시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친 사실상의 창업군주였다.
- [107] 한편에선 서주대학살은 조조가 직접적으로 시켰다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또한 조조가 청주의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병사들이 상당 부분 많았다는 점을 드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최종 책임자는 조조다.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나 스탈린도 학살 책임이 꽤 줄어들 거다. 조숭을 죽인 직접적인 책임이 도겸이 아닌 황건적 출신들이라 해도 결국 책임을 지는 건 도겸이듯, 청주 일대에서 편입된 병사들이 다수라 해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조조다. 더군다나 서주 대학살 이전에도 학살이 저질러진 바가 있다.
- [108] 훗날 남조 유송의 폭군 유자업은 조조를 본받길 좋아했는데 그 중에 본받은게 바로 도굴이었다(…).
- [109] 허도에서 도망친 뒤 서주에서 유비 격파, 이후 여남에 있는 유비를 원소와 대치 중에도 불구하고 내려와 직접 격파했다. 그런데 유비도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둘의 마지막 전면전인 한중 공방전에서 판정승을 거둬 조조에게 대패를 안겨줬다.
- [110] 새롭게 조조를 논한다고 했지만 사용된 단어는 주로 간사하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많다.
- [111] 캐스팅도 끝나고 인터뷰도 했으나 이후 관운장과 겹치면서 감독이 엎어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