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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고든 바이런

last modified: 2015-03-19 21:08:55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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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제6대 바이런 남작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생몰연도 1788 - 1824.
아버지 존 바이런은 잘 생긴 귀족이었지만 성격이 망나니라서, 방탕한 생활로 많은 빚을 지고 1791년 객사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가 그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데려가,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살았다. 안짱다리에 선천적으로 오른발을 절었다고 하는데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은 콤플렉스를 갖고 자랐으며, 유모 메이 그레이가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는데 그녀의 금욕적인 태도에 짜증을 냈다고 한다.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어려서부터 잘했던 문학과 사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탕한 일면을 닮았는지 1학기를 술로 지새다가 큰 빚을 졌고, 이 빚을 갚기 위해 시집 <게으른 나날>을 발표했다.술빚 갚으려고 쓴 게 영문학 고전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문학 잡지 <에딘버러 리뷰>에서 이 작품을 대차게 깠고, 이에 대해 열받은 바이런은 유동닉익명으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라는 책을 써서 <에딘버러 리뷰>를 키배깠다.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1812년에 방직공의 임금인상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여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시기 많은 문학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는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으나 얼굴이 워낙 우월하다 보니 크게 문제는 안 된 모양이며, 사교계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고 바이런이 지나가면 온동네 여자들이 창문 열고 구경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러한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부친으로부터의 유전인지 아내 안네 이사벨라와 별거하면서도 여러 여인들과 만나 사귀었는데, 그 여성편력이 현대에 보기에도 매우 만만치 않다. 인처, 과부, 얀데레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리스로 가는 도중에 어느 유부녀를 하룻밤 NTR했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걸려서 결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인생이 미연시 그 밖에도 내키는 대로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귀족이자 상원의원이면서도 하층민 여성과 관계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결국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오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으로 추방당하듯이 영국을 떠났지만, 이 때부터가 그의 본격적인 여성편력의 시작이었다.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를 전전하면서 별의별 여성들과 관계했는데[1], 문헌에 따르면 당시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 최대 약 2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명문대 엘리트+고위 정치인+유명한 시인이라는 엄청난 스펙에다 잘생기기까지 한 인간이 낭만시로 단련된(...)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면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않기가 힘들다.

그와 사귄 가장 유명한 여인은 레이디 캐롤라인 램으로, 당시 영국 수상인 윌리엄 램 경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정치에 신경쓰느라[2] 그녀에게 소홀한 틈에, 그녀는 젊은 낭만파 시인에게 빠졌다.
하지만 상원의원이던 바이런에게는 그녀와의 스캔들이 상당한 타격[3]이었던지라 슬슬 그는 캐롤라인을 피하기 시작했는데, 캐롤라인은 그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편지 세례는 물론 그가 가는 파티마다 모두 참석해 친밀한 모습을 과시하는 등 스캔들에 더욱 불을 붙여버렸다. 이후 바이런이 계속 그녀를 피하자, 집에 없는 사이 그의 집에 몰래 침입해 그가 아끼는 책에 "Remember me!"라고 휘갈긴 글씨를 남긴다. 이제 공포까지 느끼게 된 바이런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피하다가 어느 파티에서 딱 마주쳤는데, 캐롤라인은 말다툼 끝에 열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렸다. 이런 그녀에게 질려버린 바이런은 이별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녀는 평생 이 편지를 간직했다고 하며 바이런을 모델로 한 소설 <글래나번>을 쓰기도 했다. 반면 바이런은 방탕했던 여태까지의 자신을 반성하고 이후 여성편력을 자제하게 되었다.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투르크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며, 이듬해 열병에 걸린 후 현지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병이 더 심해져 결국 사망하였다. 사망 후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으나 사원에서 거부했고, 때문에 할 수 없이 바이런 집안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런이 영국 낭만시에 끼친 영향이 워낙 지대했기에, 1969년 바이런의 시가 조각된 기념비가 사원 내에 건립되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그를 투르크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케임브리지 3학년 때 신학 시험에서의 일화이다. 학기말고사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이 상징하는 종교적,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이에 그는 아래의 한 문장만을 적었고, 이 시험을 최고점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그 주인을 뵙고 얼굴을 붉히다."[4]

단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바이런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에 살았던 Richard Crashaw라는 영국 시인의 Epigrammatum Sacrorum Liber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 중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이라는 구절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 일화는 외국에서는 바이런이 아닌 이름 모를 학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것들로 미루어 볼 때 바이런의 저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일화는 1812년,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 1, 2권을 발간했는데, 이 두 권이 당시 영국 사교계에 일약 반향을 일으키면서 바이런이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술에 취해 비몽사몽한 바이런에게 편집장과 발행인이 달려와 그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을 알렸다. 차근차근 말을 듣던 바이런이 던진 한 마디,

"I a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시구나 저작 속에서 명언도 많이 남겼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고난은 진리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남자의 사랑은 인생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여자의 사랑은 삶 그 자체이다.

바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말라.
부를 얻는 것에 절망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이다.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처녀를 로버트 사우디의 잔 다르크와 비교하며 평하면서) 잔 다르크는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다.(...)[5]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이름높은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의 아버지였으며, 그녀의 어머니가 바이런의 방탕한 성격때문에 문학공부를 철저하게 방해한 결과 희대의 공순이가 되었다. (위대한 문인 아버지 - 뛰어난 과학자 딸.. 이라는 점에서 피천득 - 피서영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6]가 떠오르기도 하나 이쪽은 너무나 사이좋은 부녀간이었다는게 차이점)
그런데 그런 그녀도 결국 말년에는 도박에 빠져 비참하게 사망했으니 피는 못속이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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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심지어 스폰서였던 메리 셸리의 이복 여동생 클레어몬트와도 관계를 맺어 딸을 얻으면서 사이가 복잡해졌다. 참고로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한 인물.
  • [2] 윌리엄 램은 막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 강화에 힘썼고 이후 대영제국의 토대를 닦는 상당한 명재상으로 꼽힌다.
  • [3] 그 이전에도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오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으로 욕을 무더기로 얻어먹었다. 아 그래서 요스가노소라의 부제에...
  • [4] 번역에 따라,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라 표기하는 텍스트도 있다.
  • [5] 잔 다르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에서도 18세기 이후로는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을 비롯해서 잔 다르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났다.
  • [6] 이론물리학계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많은 논문 인용수를 가지고 있다. 인용수 1위는 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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