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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 하지

johnhodg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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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사령관 시절의 하지 장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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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육군대장 시절의 하지 장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2]
일제 이후 굴러들어온 웬수
미군출신 혐한초딩
하지정맥류와는 관계 없다!

Contents

1. 개요
2. 행적
3. 평가

1. 개요

John Reed Hodge
1893년 6월 12일 ~ 1963년 11월 12일

미국의 군인. 일리노이 주 골콘다(Golconda) 출신. 미 육군 제24군단장 시절 1945년~1948년 미군정 사령관을 겸하였다.

한국 근현대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만 일반인들은 그게 누군가요? 할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소수이며 미국에서도 자료가 희박한 인물.

2. 행적

태평양 전쟁 때 필리핀의 레이테 섬 지상전과 오키나와 전투[3] 에서 대활약하면서 일개 대령(1941년)에서 중장(1945년 7월)까지 5년도 안 걸려 진급할 정도로[4]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어 뼛속까지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지 장군의 이미지는 대개 한국에서의 군정통치를 했던 인물로 기억되나, 다른 이미지가 있다면 한국에 오기 전 오키나와에서 군단을 지휘할 때만 해도 하지는 태평양 전구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떨치던 인물로 전구의 최고 책임자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5]을 제외한 그 아래의 야전지휘관 레벨(군단장급 이상 레벨)에선 크게 알아줬던 지휘관이었다. 한국통치로 인한 세간의 평가와는 별도로 하지는 이미 미군 내부에서 인정받고 능력있었던 군인이었던 것이다. 보병장교임에도 육군 항공기 승무원 자격 휘장을 취득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여러모로 검증된 인물이다. 하지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중장으로 진급한 것과 1952년에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결코 운이 아닌 것이다.

하지는 전쟁이 한창인 1942년 6월,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전쟁성(육군성과 국방성의 전신)에서 근무하다 하와이에 주둔한 25보병사단의 No.2로 지내며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얼마 안 가 하지는 소장(Major General)으로 진급했으며 아메리칼 사단의 사단장을 맡아 44년 3월까지 지낸다.

이후 하지는 43년 남태평양해역군의 카트휠 작전의 일환이었던 뉴조지아 섬 지상전과 부겐빌 섬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전역에 참가했다. 1944년 4월 하지는 하와이에서 신설된 육군 24군단장으로 임명되어 하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1948년 8월까지 군단장으로 지내게 된다.

44년 10월 하지는 24군단을 지휘하여 레이테 섬에 상륙해서 12월 말까지 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24군단은 섬에서 몇달간 재정비를 하고 오키나와 침공작전의 지상병력으로 전용되어 45년 4월 상륙했다. 24군단은 오키나와에서 많은 손실이 있었지만 결국엔 섬을 점령했고 하지는 공로를 인정받아 8월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군정 종료후 미 본토로 귀국[6]
, 포트 브래그의 5군단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초기시점에서 본토의 3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52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지상군사령관[7]을 지내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전역했다. 이렇게 해서 하지는 한국에 다시 오지 않고 미 본토에서 근무하다 전역했다.[8]

3. 평가

일명 태평양의 패튼. 그런데 그런 능력과는 별개로, 하지는 한반도 입성 당시 한반도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그레고리 핸더슨에 따르면 "하지는 단지 수송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약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선택된 사상 초유의 인물(...)" 에라이 미친 놈들아 다만 단순히 수송문제나 미국의 무지로 하지가 임명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게[9] 원래 남한 군정 사령관 내정자는 조지프 스틸웰 대장이었지만[10][11] 장제스와의 불화 때문에 불발, 이후 임명된 위드마이어의 경우는 이전 근무지인 중국에서의 국공 대립 중재등의 일때문에 임명이 철회되었었다. 한마디로 하지가 임명된건 불가항력적인 불운이라고 볼수 밖에 없는 일[12]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한반도 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데다, 당시 한반도 정치세력 중 가장 미국과 코드가 맞는 세력이 한민당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한민당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여운형에게 "쪽바리(Jap)로부터 을 얼마나 받아먹었지?"라고 질문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전형적인 아메리카 군인인데다 정치감각도 없는 편이어서 당장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영향력이 엄연히 건재한 판에 조선 내부의 좌파 활동(특히 공산당 쪽)에 제재를 가하여 소련과 국내 좌파 세력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나마 친미계열 세력하고라도 관계가 공고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좌우 성향의 문제를 떠나서 정치수완이 없다보니,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한 동시에 영향력도 좌익 인사들을 견제할 정도로 강력했기에 이용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었던 이승만, 김구는 또 독선적이라고 꺼려했고, 여기에 반탁운동을 계기로 더 사이가 안 좋아졌다[13]. 정치인들이 테러당할 때마다 김구를 테러의 배후로 보아 더욱 떨떠름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국내질서를 수습할 수 있었던 영향력있는 집단, 어쩌면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을 미국을 대표하는 인사의 행적으로 보기에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어쨌든 국내 정치세력들에게 좌우를 막론하고 이렇게 어그로를 주고받았던 덕인지 하지는 해방정국을 끝내 주도하게 된 이승만에게 특히 매우 감정이 안 좋았다. 하지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승만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고 싶다"고 적어놓기도 했다. 또한 방한한 미 육군성 차관 드레이퍼 앞에서 "이승만은 스스로를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단독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으로,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독재정권"이라고 이승만을 신랄하게 까댔다.

하지만 처음 이승만을 불렀을 때는 굉장히 공손한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정해구의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에 따르면
"하지 장군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는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옆걸음질로 들어오면서 'Please, this way(이쪽으로 오시지오)'라고 세 번인가 되풀이해서 안내말을 하면서 백발이 성성한 이 박사를 인도해요. 미군 헌병들이 이 박사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속에서 회의실에 들어온 이 박사가 곧 붉은 가죽에 앉았는데도 하지는 앉지도 않고 거의 부동자세로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하지 중장을 쳐다보면서 'General, Please sit down(장군, 앉으시지요)' 하고 말하니까 그제서야 이박사와 나란히 앉습니다."

하지는 한반도 진입 때 인공에서 보낸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여운형의 비서 조한용, 미국 브라운 대학 출신 백상규가 찾아왔을 때는 개무시했고 언론들의 환영식도 다 씹었다. 이 때문에 하지를 더욱 비판하기도 하는데, 하해방정국 당시의 이승만이 어떤 존재였던가를 생각해보면 이게 그렇게까지 욕먹을 일인가는 모를 일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승만은 당시 좌우를 막론하고 최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들 정도로 영향력을 키울줄 알았던 정치 지도자였던 것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야 이승만의 입지라는 것이, 여운형의 동생이나 비서가 문제가 아니라 여운형 본인이 온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중요하지않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승만은 하지가 모시던 상관인 맥아더보다 5살이나 위인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이 그 나이가 다 되도록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면[14],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또한 다대하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테고, 하지는 앞에서 보았다시피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니 일단은 쓸모있어보이는 쪽을 먼저 선택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군정에 임하면서 하지가 한 말인즉슨, 하나같이 "나는 정치를 모른다"는 자아비판과도 같았다.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고양이와 같은 민족 "
"왜놈들을 다루는 것은 쉬운 문제다. 한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하고 매맞았다고 떠들어대지만 증거가 거의없다.이들보다 더한 '멍텅구리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한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강간하고, 강탈하고, 살인을 했다. 그들은 사람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
"주민의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의미없이 인민이 희생되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
"앞으로 몇 달 동안의 당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세계의 민주국가들과 그들의 대표자인 나에게 당신들의 민족으로서의 도량과 능력, 독립국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인들을 비롯, 제국주의 시대 서구인들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심심하면 하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병크(..)[15]

잘라 말하자면, 정치를 모르는 군인에게 정치를 맡긴 인사의 가장 나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때 480당이 난립하네 운운하는 말까지 나왔던 혼미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그나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외국 군대의 수장급 인사가 하는 짓마다 저런 지경이었으니 혼란이 더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또는 그렇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한반도 문제에 있어 영향력이 가장 컸던 미국 군인 세 사람, 즉 맥아더, 하지(군사령관), 러치(군정장관)를 가리켜 이런 드립도 유행했을 정도라고 한다.

맥아더 : 한국 문제는 되는 대로 막하자[16]
러치 : 그렇지, 그렇지.
하지 : 되는 대로 하지.


매일신문에 연재된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서울로 온 렌티 시티코프와 레베데프와 의논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LIFE 잡지에서 풀어놓은 사진 중에 비망록에서 말한 5월 21일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들도 보인다.

90년대에 KBS-1에서 방영한 광복이후 한국사 다큐멘터리에서도 한국을 무시하던 하지라고 엄청 깠다. 한국에 대하여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않고 그저 무시하던 사람이었기에 미군정이 한국사에서 전혀 도움이 안되던 원인이라고 내레이션으로 덤덤하게 하지에 대하여 소개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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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진에 보이는 군복에 부착된 하트모양의 부대마크는 제30기계화보병사단미 육군 제24군단의 마크이다.
  • [2] 개드립같지만, 사실 십수년전에 MBC의 다큐멘터리 "한국의 대통령들"에서 제일 먼저 다룬 인물이 다름아닌 존 하지다.
  • [3] 오키나와 전투의 지상병력으로 육군 4개사단과 해병 2개사단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미 육군 제10군의 사령관 버크너 중장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여기서 육군 사단들로 구성된 육군 군단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하지 장군이다. 하지 장군이 태평양전쟁에서 명성을 얻게된건 그가 군단장으로 임명되면서 쌓게된 것이다.
  • [4] 미군의 경우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소규모의 상비군 전통(?)탓에 전쟁시엔 군의 규모를 폭발적으로 늘리지만 전후엔 최소한으로 매우 감축시킨다. 1차대전 종전후 전간기 기간에 미군은 심각한 인사적체로 2차대전에서 큰 활약을 떨쳤던 많은 인물들은 당시에 한 계급의 근속을 최대 10년이 넘게 있었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군의 규모가 유례없이 폭발적으로 늘려지자 평시에 복무했던 장병들은 전시 육군 징집군 체제- : Army of the United states(~베트남 전까지 이어진다..)의 기간요원으로 급속 진급하였다.
  • [5] 니미츠는 태평양 중부해역군 사령관, 맥아더는 태평양 서남해역군 사령관이었다.
  • [6] 여러 기록들을 봤을때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실행된 미군의 군축에서 잔류를 희망한 많은 장교와 장성들, 특히 전시의 공적으로 평시계급에서 2-3단계 상승했던 인물들의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1-3단계의 강등을 겪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장급 이상의 장성들의 사례는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준장은 대령으로 복원된 케이스가 여럿있으며 영관 장교가 위관급(대위, 중위)으로 복원된 사례도 많다. 다만.. 해외에 주둔한 점령군에서 근무한 인원들은 종전후 일정기간? 동안은 전시계급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본토 근무로 전환될때 그 계급에 상당기간 근속기간이 있을때 평시계급으로 인정된 사례도 꽤 있다.. 하지 장군의 경우 전쟁 막바지에 중장으로 진급했지만 점령군 근무로 근속기간을 채워서 강등되진 않았던 것 같다..
  • [7] 2차대전의 미군에 대해서 좀 아는 위키러들이라면 레슬리 맥네어가 누군지 아실 것이다. 그가 맡았던 자리다. 하지는 자신의 마지막 군생활을 이 보직으로 마쳤다. 한국전쟁기간에 미국은 본토의 네바다 주에서 핵실험(미 육군)을 많이 했었는데 그것을 촬영한 필름에는 하지의 시찰과 그의 평가가 담겨있다. 한국을 떠난 이후의 하지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구글이나 유튜브를 정밀하게(?) 검색해볼 것.
  • [8] 책으로 나와있는 이승만의 전쟁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터진후 남한으로 전개한 미군은 당시 본토에서 근무하던 하지를 한국으로 오게 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지휘경험과 수년간 한국을 군정통치한 경험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극렬한 반대로 하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
  • [9] 정구 교수 같은 경우는 한반도의 민중을 탄압하고 미국 지배하에 두려고 하는 미국의 계획적인 음모라고 하는데 이 분의 경우는 반미 성향이 강한지라 이를 감안하는게 좋을 것이다.
  • [10] 2차대전 당시 중국/버마/인도 전역 미군 사령관이었고 장제스의 군사고문이었다. 장제스와의 불화로 인해서 불명예 해임되어 종전시 오키나와 주둔군으로 있었는데, 아시아에 대해서 적어도 하지보다는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다
  • [11] 여담으로 기존의 제10군 사령관이었던 버크너장군이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전선시찰 도중 전사하고 그 후임으로 온게 바로 스틸웰 육군대장이었다. 그리고 스틸웰 장군이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후 10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맡았던 자리가 바로 레슬리 맥네어 장군의 직책였던 육군 지상군 사령관이었다.
  • [12] 조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고 아시아의 정치세력에 대해서 밝았던 스틸웰이 조선군정 사령관으로 가는 것은 if 떡밥이긴 하지만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장제스와 그 세력을 누구보다도 혐오했던 스틸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기도 어려웠고 하지가 이승만을 혐오한 바로 그 이유로 스틸웰이 장제스를 혐오한 것을 보면 다른 말이 필요한지?
  • [13] 특히 이승만이 미국 방문중에 하지를 하도 지독하게 공격해댄 때문에 1947년 2월 미국으로 잠시 돌아갔을 때 고위층에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고 변론을 해야할 정도였다고(…).
  • [14] 아무리 씹혔다고 해도 1900년대 초부터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독립 운운하는 외교관 노릇을 했을 정도다.
  • [15] 이에 서울타임즈는 차라리 미개한 어느 르네오 섬 추장의 통치를 받는 게 더 낫겠다며 하지를 깠고 미국 관영 소식통마저 한인과 대항하여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 효과를 가진 것 같았다.고 했다(...)
  • [16] 맥아더를 일본에서 맛카사(マッカサ)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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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6 16: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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