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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1883년 6월 5일1946년 4월 21일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린 모두 죽는다.[1][2]

이자 생활자들을 안락사시켜야 한다.

사실상 거시경제학의 창시자

Contents

1. 개요
2.
3. 평가
4. 여담


1. 개요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경제학자라는 문구로 충분하다. 거시경제학의 시조격으로 이 사람이 없었으면 현대 자본주의는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의 야망을 무너트린 사람. 죽은 지 70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그는 경제학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살아남는 한, 아니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케인스의 이름은 계속해서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1883년에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놀랍게도 카를 마르크스가 죽었던 해에 태어났다. 교체선수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였고 어머니는 시의원이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시장까지 지낸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귀족계층에서 태어난 셈. 이후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난다.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귀족 자제들이 다닌다는 이튼 스쿨을 졸업했다.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게 된다.

190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경제학을 배운 뒤[3] 1905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합격한다. 약 2년간 인도 사무부(India Office)에서 근무한 다음에 1909년부터 모교였던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 강사로 일하게 된다. 1911년 당시 영국의 최대 경제단체였던 왕립경제학회의 공식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불과 28살 때의 일이었다. 1914년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재무성의 근무위촉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베르사유 조약에도 개입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대(對)독일 압박에 불만을 표시한 걸로 전해진다.

1920~1930년대에 걸쳐 케인스는 잇따라 확률론(1921), 화폐개혁론(1923) 등을 발간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켜 나간다. 1936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점에 그는 자신의 대표 저작이자 이후 세상을 바꾼 책인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펴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영국 재무성에서 일했으며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본래 가상의 국제 공용통화인 방코르(Bankor)를 사용하여 그것을 기축통화로 삼는 새로운 국제통화체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진 것. 그는 2차대전 종전 이후인 1946년 4월 21일 사망했다.

3. 평가

자본주의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시장이 가격 등을 통해 자동으로 수요와 공급이 조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세계 대공황이 그 경우에 들어맞음을 주장했다. 그는 물가나 임금 등의 명목변수의 경직성, 시장에 부정적인 전망이 팽배해 금융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현상[4] 등을 대공황의 요인으로 꼽았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그는 정부 재정의 확대를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까지 세계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던 세이의 법칙을 정면으로 반박한 행동이었고 또 이것이 맞아떨어졌... 던가?[5]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세이의 법칙 자체는 문제가 많이 제기된 이론이었다. 오히려 당대의 경제학자들은 수요와 공급의 차이가 단기적으로는 분명 존재하지만,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저절로 사라진다고 보았다. 호경기와 불경기, 노동 부족과 실업이 일시적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일정한 균형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이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케인스의 반박이 바로 유명한 장기는 현재 사안에 대해 잘못된 안내를 해준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The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이다. 세이의 법칙에 의하건, 단기적인 경기변동을 인정하건간에 경제학 이론의 결론은 외부에서 손을 대지 말고 경제가 안정될 때까지 시장의 자율적 회복력을 믿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같았다. 하지만 경제학의 장기 개념은 사람의 일생정도는 찜쪄먹을 정도로 길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공황이 닥친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을 사람 다 죽고 나서 새로 경제구조를 이끌어내어도 장기적 균형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조악하게 비유하면, 인구수는 사회의 생산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전염병이 생기거나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어도, 혹은 우연히 대풍작이 들어서 인구가 상승하여도 그게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전쟁과 전염병, 풍작 이전의 수준으로 결국은 돌아가게 된다. 이게 장기적 균형이라면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사람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 생산량에 따른 인구 균형에 큰 효과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시스템을 망치기 때문에 치료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라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의 처방을 간단히 말하면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면 정부가 개입해 수요를 창출시켜 해결하라는 것. 케인스는 "빈 병을 땅에다 파묻고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 빈 병을 파내라"행보관라는 말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말하자면 정부가 뻘짓을 해서라도 수요를 창출해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6]빈 병을 땅에다 파묻을 때도 사람을 고용하면 더 좋다

그 전까지 경제학계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를 인용해 '보이지 않는 손'이 장기적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었기에 케인스의 이론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이야 '경제가 나쁘다, 불황이다'라고 하면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 해야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1920년대의 경제학자들에게 이런 생각은 금기와도 같았다. 케인스 평생의 맞수로 알려진 예언가 리드리히 하이에크[7]같은 학자들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터이니 힘든 시간이지만 버텨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업자가 길거리에 나앉고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에 이런 주장은 경제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과 정치인에게 헛소리 그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케인즈의 이론은 인간이 그저 시장에 지배받는 동물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일종의 빛과도 같았다고 당대의 젊은이들은 받아들였다.[8][9]

게다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시행한 뉴딜 정책이 케인스의 이론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것을 증명했고[10] 이후 1970년대 오일 쇼크가 일어날 때까지 케인스의 이론은 세계 각국 경제정책의 기본 지침이 된다.

당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케인스의 주장을 극히 이단적인 생각으로 치부하며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주장이 자유주의적 토양의 미국을 망친다는 것이다. 케인즈를 비판한 이들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는 '통화론자'나 '새고전학파'[11] 등의 원류이다.

케인즈 이후 그의 후학들은 여러 분파로 갈렸다. 케인즈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하다시피 한 후학들이 만들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등을 중심으로 모인 스트케인즈[12], 그리고 케인즈보다 약간 뒷 세대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케인즈 경제학과 종래의 신고전파 경제학을 결합하여 당대의 주류로 자리잡은 네오케인지언[13], 그리고 네오케인지언이 경제학의 발전 과정에서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이 새케인즈 학파다.

19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케인스의 이론이 흔들리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통화주의 및 새고전주의[14] 경제학. 새고전주의 학파가 케인스 학파에게 있어 강력한 도전자이기는 했지만, 사실 1960년대 중반 이래 케인스 경제학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류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학계도 그렇고 미국의 관료들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케인지언이 주류다. 단지 언론은 그들의 무지와 선입견으로 글을 썼을 뿐이다.[15][16]

1930년대 거시경제학의 탄생 이래 케인스 경제학이 다소나마 타격을 입은 것은 70~80년대의 합리적 기대혁명 때가 유일하다시피 하며, 그나마도 통화주의와 그 후학인 전기 새고전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은 큰 틀에서는 단기적으로는 총공급곡선은 우상향하므로 정부 개입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소용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다만, 단장기 기간이나 효과를 보이는 정책 등의 기술적, 세부적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시경제학에서 케인스 이론이 주류가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거노믹스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경제정책적 캐치프레이즈의 부침과 경제학계의 우위를 혼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윗문단에서 언급되었듯이 기본적으로 그는 자유주의자였고 그가 말한 이론에서 약간 사회주의(?) 삘이 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임을 기억해야 하며, 그는 그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많이 언급하였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그의 사상의 핵심은 복지의 추구와 후생의 최적화가 아니라 사회적 후생의 극대화이다. 케인스 본인은 좌파적 '평등' 개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목적은 오로지 유효수요를 끌어올림으로서 경기를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온 복지 개념은 유효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고, 유효수요를 위해서는 정부가 가계를 지원하든 기업을 지원하든 상관 없었다. 따라서 케인스주의가 사회주의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그의 저서의 내용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17][18], 그 부분에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가 철학적 사상을 토대로 확고한 경제적 신념이 있는 학자라기보다는 체제에서 좋은 삶을 누리는 엘리트로서 체제 유지를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논리를 전개하는 (중국 전국시대상앙처럼) 지배층의 수호자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예로서 세간에 알려진 뉴딜 정책의 정책적 기초가 되었다는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사실 뉴딜이 시행된 이후인 1936년에 발간되었다(루스벨트는 뉴딜을 후보 시절인 당시, 즉 최소 1932년부터 주장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다시 말해 애초에 그 책이 케인스 자신이 보기에 체제 유지를 위해 적절한 행위를 하는 걸로 보이는 루스벨트의 뉴딜의 이론적인 정당화를 위해 저술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인데, 일반이론이 1936년에 출간되었다고 해서 불과 4년 전에는 그 구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의 논법은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물론, 케인즈의 저서인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뉴딜정책 뒤에 나온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당시 경제학에서 불던 사상인 '정부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사람들(윗 글 쓴 사람 포함)이 생각하는 것처럼 뉴딜정책의 성과에 대한건 말이 많은데, 실제로 뉴딜정책은 수치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 모르는 것이 이 뉴딜정책은 결코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공화당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오늘날 아는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이전 글에서는 케인즈의 주장이 독일의 경제장관 샤흐트 등에 영향을 주어 독일의 정부팽창,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발전의 효과를 낳았으며 그것이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샤흐트는 군비지출에 따른 정부팽창에 반대했다. 그리고 1936년부터 히틀러나 독일 경제를 본격적으로 군사화하던 4개년 계획의 책임자인 괴링 등과 갈등을 벌였으며, 결국 1937년에 잘렸다.[19] 그러나 독일의 정부 팽창은 케인즈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기보다 이탈리아나 일본처럼 그저 통제를 좋아하고 정치적, 군사적 시각에서 경제를 바라본 것에 불과했다. 아우토반[20]이 대표적이다. 정부 팽창의 결과 독일 재정은 바닥이 났으며, 이는 나치 정부의 전쟁 동기가 되기도 했다.[21][22]

4. 여담

특이하게 생긴 모습 때문인지 별명이 '오리 주둥이'였다.

수학을 잘 하는데 본인은 수학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에 속했다고 한다. 또한 경제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수식에 빠져 산다고 맹공을 펼친 바 있다. 또한 거의 모든 걸 병적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유년기에는 계단의 숫자를 센다거나, 먹은 음식의 개수를 새는 것은 물론, 20대 몇 년 동안에는 미트스핀을 한 횟수를 모두 기록해뒀다. 몰라 뭐야 이 아저씨 무서워

공무원 시험 결과 가장 점수가 낮게 나온 과목이 수학과 경제학이었다고 한다.[23] 본인도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시험관보다 내가 경제학을 잘 아는게 분명하다'라고 편지에 썼을 정도.

성적인 성향이 양성애자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라는 책에서는 케인스가 대학 재학 중 몸 담았던 비밀 클럽의 회원들의 대부분이 양성애자였다고 한다. 이 비밀 클럽의 한 회원은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해당 군 법원에서 "당신의 여동생나치 독일군인에게 강간당하고 있다면 어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 사람은 잠시 생각하고는 "여동생과 군인 사이에 제 엉덩이를 밀어 넣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어떤 의미에선 진정 평화주의자?

또한 그는 인생의 승리자이기도 한데, 연하의 발레리나[24]와 우리나라 나이로 43살에 결혼을 하기도 했다.

거기에 경제학자들 중에도 거의 얼마 없는 주식투자에 크게 성공한 인물로 유명하다.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120%의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25] 주식투자에 어떻게 성공했냐는 질문에 그가 "중간의 중간을 택하세요."라고 답한 것도 나름대로 유명. 현대의 주식투자가들에게 유명한 그의 투자이론은 1936년 발간된 출간된 그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2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주식투자는 미인선발대회와 같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투표로 미인을 뽑는 미인선발대회에서 선발되는 미인은 투표자 자신이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이라는 것이다.[26] 그래서 대체로 투표자의 평균 선호에 가장 가까운 여인이 미인으로 최종 선발되게 된다. 결국 이는 투자자 개인이 생각하기에 이익을 낼 것 같은 종목이 아니라 시장 주도주나 인기주에 투자하라는 말과 같다. 여담으로 이 미인 선발대회의 비유는 2013년 수능특강 영어B에 지문으로 제시되었다.[27]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주장을 으로 요약한 동영상도 존재한다. 보기 보기2 참고로 해당 동영상의 각본은 조지 메이슨 대학의 러셀 로버츠(Russell Roberts) 교수가 집필했는데 이 교수는 친하이에크 성향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케인즈의 주장이 하이에크에 반박받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케인스는 경제학자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아이작 뉴턴 재조명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경매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미출간 저작을 구매하여 읽을 정도로 뉴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검토한 끝에 케인스는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술사[28],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이라는 말로 뉴턴을 평가했다. 그리고 20세기에 재평가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연금술사, 신비주의자로서의 뉴턴의 이미지는 바로 케인스가 구축해놓은 것이다. 이 때문인지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에서는 경제학자라는 이야기는 일절 없이 '전기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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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케인즈의 정책이 너무 단기 위주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경기는 저절로 안정된다고 비웃는 경제학자들에게 장기적으로 보면 어차피 다 죽는다고 날린 돌직구. 마냥 손 떼고 구경하는 것이 경제학자가 할 일은 아니라는 소리이다.
  • [2] 이 외에 이 사람이 한 말이 궁금하면, #1, #2를 참고할 것.
  • [3] 하지만 케인스는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케인즈는 수학 전공이었으며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다만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원 경제학 수업을 청강한 적은 있다고 한다.
  • [4] 이를 후세에서 발전시킨 것이 금융가속도 효과다.
  • [5] 뉴딜정책같은 것의 경제적 효과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2차대전은 어찌보면 뉴딜정책이 애교로 보일 정부재정의 확대라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총생산은 분명 당시 기준으로 유례없이 증가하긴 했다.
  • [6] 그리고 그 행위가 되도록이면, 민간에 쓸모없는 행위(그러니까 민간이 투자할 시장은 남기고, 정부의 돈지랄은 그 촉진제 정도)라면 더 좋다고까지 덧붙인 바 있다고 한다.
  • [7] 오스트리안 학파 겸 시카고 학파(본인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시장론자, 자유주의자. 중앙정부의 계획된 경제개발에 비판적이였다. 개인적으로는 케인스와 친했으나 케인스식 경제정책들은 결국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것이며 중앙은행들은 실업율을 낮추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찍어낼 것이고, 결국 남는건 빚 밖에 없을 것라고 신랄하게 깠다. 그리고 21세기 그의 말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다 맞은 건 아니지만.
  • [8] 케인스의 반세기 정도 전에 활약했던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영원하지 않고, 노예제나 봉건제와 같이 역사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케인스의 이론이 없었으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강력한 체계로 거듭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 [9] 고전적 이론에 의하면 시장 시스템을 유지할 경우 경기는 아무리 불경기를 맞이하더라도 가만히 내버려만 두면, 결국 자체적인 회복력으로 원형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사회 구조나 체제에도 적용되는데, 문제는 다시 회복되어서 살아나기도 전에 바닥을 찍거나 찍어가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참다못한 사람들이 체제나 시장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이걸 노동자들이 하면 그게 바로 마르크스식의 공산주의 혁명이 된다. 이럼 장기적으로 회복할 자본주의 시장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체제나 시스템 등은 이렇게 무너진다.
  • [10] 일반적으로는 루스벨트가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뉴딜을 추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루스벨트의 정책과 케인스의 이론이 비슷했던 것이다. 루즈벨트가 케인스의 이론을 참고하긴 했지만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그것. 더군다나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은 단기적 경제처방인 반면에 루스벨트의 뉴딜은 경제처방이라기보다는 정치에 가깝다. 뉴딜의 광대한 범위 안에 케인스 이론의 일부가 들어간 셈.
  • [11] 시카고 학파는 말 그대로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한 경제학자들의 그룹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 시카고 대학이나 미네소타같은 미국 중부에서 거시경제학을 파면서 본격적으로 시장친화의 아이디어를 퍼뜨린 집단이 50, 60년대에는 통화론자, 그 이후에는 새고전학파다.
  • [12] 사실 포스트케인즈도 세 부류가 있는데, 민스키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 PK,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영국 PK(소위 스라피언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타에 해당하는 부류다. 칼도어 등이 이런 기타 부류에 해당한다.
  • [13] 이들은 그냥 신고전파로 분류된다.
  • [14]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혹은 신고전학파는 'Neo'classical School로서 케인즈의 스승인 마셜이 창시하다시피 했고, 새고전학파는 New Classical School로서 본문의 설명처럼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시카고 대학 중심의 거시경제학파를 말한다.
  • [15]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은 안그래도 심각한 미국의 무역 적자에 불안감을 가진 달러 보유국들이 달러를 다른 통화로 바꾸려 들면서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에 맞춰서 석유값까지 폭등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달러로 살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들며, 이는 원자재 가격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공급은 감소하게 되며, 수요는 석유값 폭등 등을 이유로 동반하락한다. 거기에 어설프게 케인즈의 이론을 써먹는답시고 돈을 들이부은 미국 정부의 삽질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이러한 관점에서 봐야지 무조건 정부의 개입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오히려 정부가 케인즈의 이론을 따랐다면 다른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
  • [16] 새고전학파는 합리적 기대 이론의 전기 새고전학파와 실물경기변동이론의 후기 새고전학파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새고전학파의 출현을 논하려면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50년대 들어 시카고학파 중 통화주의 학파가 출현해서 재정정책 대신 통화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했고(다만, 이들이 제시한 것은 준칙 위주의 보수적인 정책 운용이었다.), 케인즈학파가 결국에는 이에 수긍하면서 대신 재량적 통화정책을 제시했다. 이러자 70~80년대 들어 합리적 기대를 배경으로 한 루카스의 이론이 시카고 대학에서 발흥하면서 재량적 통화정책은 결국 물가만 올릴 뿐이며, 애초에 민간은 과거 변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이를 적응적 기대라고 한다.) 온갖 잡다한 변수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 변수를 추론해서 정책을 설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루카스 비판이 나왔다. 이 결과 케인즈 이론은 맨큐가 다시 꺼내기 전에는 당분간 무덤에 들어가야 했다.
  • [17]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일단 엄청난 수제자를 거느린 당대 학계의 거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가 발안했다고 알려진 이론들이 그의 제자들과의 세미나를 거쳐 정리된 의견들을 자기 논문에 반영해서 그렇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러한 만화공장 비슷한 방식이 논문에 사용되는 건 현대에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듯하다...... 뭐 심지어는 근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과정에서 도용까지 해도 찍소리 못 하는 판이니......
  • [18] 케인스는 이에 대해 이미 생전에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저는 문제가 바뀌면 해답도 바꿉니다. 귀하는 다르신가요?"
  • [19] 실제적인 영향력은 1936년 괴링에 의해 많이 빼앗겼다.
  • [20] 나름 건설경기 부흥으로 경제에 기여하겠지 생각하고 추진한 사업이지만, 도로를 오늘날의 4대강사업마냥 관광 목적도 쓸데없이 고려한다던가, 독일인들이 건설 노동자 취업을 꺼린 탓에 의외로 고용효과도 신통치 않았다.
  • [21] 바닥이었던 독일 은행 현금 잔고를 안슐루스로 얻은 오스트리아 은행 잔고로 채운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 [22] 실제 히틀러나 괴링 등은 돈이 부족하다면 전쟁으로 삥뜯으면 된다는 식의 발언을 전쟁 전에 한 바 있다.
  • [23] 케인스는 수학과 졸업이고 앨프리드 마셜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 [24] 리디아 로포코바, 러시아에서 망명한 무용수였다. 그녀는 케인스가 죽고 나서 재혼을 하지 않고 30년 넘게 더 살았다.
  • [25]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주식투자에 성공하지 못한다. 케인스가 금융투자에서 성공한 데는 그의 독특한 금전적 후각짐승의 본능 등등도 있었지만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부자 아빠 존 네빌 케인스 박사이다.
  • [26] 다른 투표자들도 동시에 그러한 기준으로 투표를 한다면 이것은 아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투표자들이 그 자신외의 또다른 투표자들이 미인이라 생각할 여인으로 예측되는 여인을 찍어야 한다. 그리하여 Everything depends on everything else.
  • [27] 관련된 뒷얘기로, 사실 케인즈의 주식 투자 성공 비결은 미인 대회 이론 woki:"그런 거 없다" 그런거없고 발레리나 출신 아내가 찝어주는 종목을 그냥 투자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이 소문은 주식 투자를 위한 각종 분석 및 연구가 별로 소용없다는 주장의 예시로 자주 쓰인다.
  • [28] 과학사나 수학사 관련 서적에서 뉴턴을 종종 이렇게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바로 케인스의 영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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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3 23: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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