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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last modified: 2015-02-02 22:21:47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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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Ford
1894-1973

“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데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데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당신이 지지하는 것도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 매카시즘에 반대하며 감독협회에서 한 연설 이 사람 페르소나는 매카시즘 엄청 좋아했는데

Contents

1. 인물 소개
2. 영화 외
3. 연출작 일람


1. 인물 소개

영화 감독들이 존경하는 감독으로서 결코 빠지지 않는 거장 중의 거장.

미국에서 활동했던 영화 감독. 서부극의 신이라 불리며 서부극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만들었던 미국 영화계 만신전에 오른 인물이다.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오손 웰즈, 마르 베르만 등이 그를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 후대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등 헐리우드 상업영화 거장들은 물론 페드로 코스타, 홍상수, 아오야마 신지, 다르덴 형제 등과 같은 유럽, 아시아권의 작가주의적 성향을 띄는 감독들 역시 그를 존경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존 포드는 1894년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형을 따라 영화일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잭 포드라는 예명으로 배우로 영화에 나오기도 했었다. 1917년 무성영화 시절부터 연출을 시작해 토키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14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끼진 영향이 워낙 지대해서 존 포드의 서부극 -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활극 - 세르조 레오네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이어지는 계보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 등 위대한 배우들을 발굴하거나 진가를 조명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존 웨인 같은 경우 존 포드 영화에 단역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훗날 서부극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부극의 대표적인 명소인 모뉴먼트 밸리 역시 그가 '발견'했다. 1939년작인 《마차》에 처음 등장한 이후 그가 촬영장소로 재차 활용하며, 관객들이 서부극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로 만들어냈다.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다 감독상(4회) 수상자이다.[1] 재밌는 것은 그를 지칭하는 '서부극의 대가'라는 닉네임과 달리 수상작 모두 비서부극이라는 사실이다. 1936년 《밀고자》, 1941년 《분노의 포도》, 1942년 《의 계곡은 푸르렀다》,[2] 1953년 《 없는 사나이》.

이 외에도 그는 《역마차》, 《양은 밝게 빛난다》, 《야의 결투》, 《색자》, 《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역마차》와 《수색자》는 최고의 서부극을 넘어, 최고의 영화로도 종종 거론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2004년 5월 dvd21에 기고한 '영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장 뤽 고다르' 도입부 에서 존 포드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고다르에게서 시작한 사람이다. 이 말은 비유법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고다르보다 존 포드를 먼저 보았다. 《역마차》와 《황야의 결투》, 혹은 《기병대》 삼부작, 물론 《수색자》 그리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 1960년대의 웨스턴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작정 영화를 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프랑스 문 화원에서 처음으로 고다르 영화를 보았다. 처음 만난 고다르 영화는 《기관총 부대》다(사실 그때 나는 고다르라는 이름을 알고만 있었다). 그래서 고다르에서 거꾸로 존 포드에게로 돌아오는 여정 길을 택했다. 물론 고다르보다 영화적으로 존 포드가 훨씬 위대하다. 그건 안토니오니나 베르히만, 펠리니보다 장 르느와르가 훨씬 위대한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건 단지 존 포드와 장 르느와르가 그들보다 시간적으로 더 앞섰기 때문이 아니다. 존 포드와 장 르느와르는 영화에서 두 개의 이름이다(혹시 존 포드의 자리에 알프레드 히치콕을 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이름은 그 누구도 안 된다). 아무도 이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들을 넘어설 때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브레송과 오즈, 로셀리니, 그리고 부뉴엘 정도가 그 두 사람(혹은 세 사람)의 이름의 비슷한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안 되겠다. 그들의 영화는 매 번의 쇼트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총체적 사유를 던진다. 혹은 샷을 연결하여 신을 만들 때 그 자체로 항상 완전하다. 그건 더 나은 그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시간에 대한 주름은 더할 나위 없이 깊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국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 특유의 만연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존 포드 감독에 대한 다른 영화비평가들의 입장도 수식어구만 다를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허문영 평론가가 2014년부터 KMDB에서 존 포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허문영 평론가는 서부극 감독이라는 존 포드의 닉네임이 주는 오해들을 면밀히 접근한다. 이를 통해 존 포드의 서부극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존 포드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영화학자들사이에서 여전히 진행중이다. 대표적인 존 포드 연구자로는 미국의 저명한 영화학자 태그 갤러거, 일본의 영화 평론가이자 문학 비평가인 하스미 시게히코가 있다. 태그 갤러거는 2014년 내한하여 서울 아트시네마,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존 포드 탄생 120주년 특별전에서 강연 및 토론에 참가한바 있다. 물론 영화사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탐구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존 포드 연구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젊었을 적 와이어트 어프를 만나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1973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 영화 외

위에 인용된 맥카시즘에 대한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성향은 보수주의이지만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다만 '할 말은 하는 버릇'이 위와 같이 진지한 발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를 인터뷰하는 기자들에게 무안을 주는 것과 재밌는 농담을 던지는 것 사이의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어떻게 헐리우드에 입성하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에 "기차타고 왔지"라고 대답하는 식.


3. 연출작 일람

  • 1917년 토네이도
  • 1917년 샤이엔의 친구
  • 1917년 스트레이트 슈팅
  • 1917년 영혼의 목자
  • 1917년 버킹 브로드웨이
  • 1924년 철마
  • 1926년 세 악당
  • 1928년 네 아들
  • 1931년 애로우 스미스
  • 1933년 순례여행
  • 1934년 세계는 전진한다
  • 1934년 프리스트 판사
  • 1935년 밀고자
  • 1935년 항간의 화제
  • 1935년 굽이도는 증기선
  • 1936년 샤크섬의 죄수
  • 1937년 허리케인
  • 1939년 마차
  • 1939년 젊은 날의 링컨
  • 1939년 모호크족의 북소리
  • 1940년 머나먼 항해 (a.k.a 롱 보이지 홈)
  • 1940년 분노의 포도
  • 1941년 토바코 로드
  • 1941년 의 계곡은 푸르렀다
  • 1942년 미드웨이 해전
  • 1943년 12월 7일
  • 1945년 그들은 희생양이다 (a.k.a 데이 웨어 익스펜데이블)
  • 1946년 야의 결투
  • 1947년 도망자
  • 1948년 아파치 요새
  • 1948년 3인의 대부
  • 1949년 황색리본
  • 1950년 웨건 마스터
  • 1950년 리오 그란데
  • 1951년 여기는 한국!
  • 1952년 없는 사나이 (a.k.a 아일랜드의 연풍, 조용한 사나이)
  • 1952년 영광의 대가
  • 1953년 양은 밝게 빛난다
  • 1955년 미스터 로버츠
  • 1955년 롱 그레이 라인 (한국제명: 웨스트 포인트)
  • 1956년 색자
  • 1957년 라이징 오브 더 문
  • 1958년 마지막 함성
  • 1958년 기디언 경감
  • 1959년 기병대
  • 1960년 러틀리지 상사
  • 1961년 투 로드 투게더
  • 1962년 서부개척사 ('The Civil War' 편)
  • 1962년 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 1963년 도노반의 산호초
  • 1964년 샤이안족의 최후
  • 1966년 일곱 여인들

'대표적인 작품들만' 리스트로 정리한 것이다. 무성영화의 전성기부터 시작해서 컬러영화가 일반화될때까지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그의 커리어가 곧 영화사다. IMDB닷컴에 정리된 필모그래피에 의하면 단편을 포함해 약 140여편에 이르는 작품을 연출했다. 동시대 활약했던 감독으로서 100여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작품성과 명성을 유지한 감독으로는 울 월쉬(1887~1980)정도만이 유일하다. 알프레드 히치콕, 워드 혹스, 리엄 와일러와 같은 감독들도 총 연출편수가 70여편 이하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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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 다음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으로 3회 수상했다.
  • [2] 이 작품은 작품상까지 받았는데, 당시 경쟁 상대가 그 유명한 오손 웰즈 감독의 《시민 케인》이었다. 덕분에 아카데미의 실수로 종종 언급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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