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주막

last modified: 2015-02-19 17:40:28 by Contributors

酒幕

jumak22.jpg
[JPG image (395.4 KB)]
IMG_4627_1_1.jpg
[JPG image (313.49 KB)]
민속화에 그려진 주막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삼강주막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은 궂은비 내리는 그 밤이 애절하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생긴 술집여관 시설.

Contents

1. 주막의 역사
2. 주막의 모습들
3. 기타
4. 사극에서

1. 주막의 역사

주막이 언제부터 있었는가에 대한 설은 분분하고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주막이 아니라 술집(주점)의 형태로 성종대에 개경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하고 숙종때 민간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1]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또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관리들이 이런 주점에서 기생들이랑 술 마시고 뻗은 얘기가 종종 실록에 등장한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복합시설로서 주막의 형태는 임진왜란 후 등 관설 (院)의 기능이 쇠퇴하고 참마다 참점(站店)을 설치하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등장하는데, 이 시절의 주막은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던 듯 1604년에 편찬된 갑진만록(甲辰漫錄)을 보면 영남이나 삼남대로변에 있는 주막에도 술과 말을 먹이기 위한 풀 그리고 땔나무밖에 없어서 여행객들은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두세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싣고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인조 무렵부터 대동법이 시행되고 상품경제가 발달하여 화폐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본격적인 주막의 형태가 된 것으로 본다. 이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을 주모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이 건국될 당시 까지만 해도 존재한 업종이였으나,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현 씨가 2005년에 별세함에 따라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주막 가옥은 2005년 12월 경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해체 후 복원이 이뤄졌으나, 그 때문에 옛날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게 됐다).

주막이 점차 사라지던 시기는 구한말에서 일제초기 부터인데, 이때 신작로가 뚫히고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면서 많은 주막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세태 변화에 빠른 주모들은 도로 공사를 하러 나온 측량사나 자동차 운전기사들에게 돈을 찔러주거나 술을 먹여음주운전!!! 꼬드겨서 자기네 주막에 사람들이 들러갈 수 있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휴게소가 된 셈. 실제 고속도로나 국도에 있는 휴게소의 상당수가 옛날 주막 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름은 변경되고 술은 안 팔지만, 행객들이 쉬다가거나 눈을 붙이는 용도는 그대로인 셈이다.

2. 주막의 모습들

큰 지역 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지역까지 주막이 존재하였으며, 굳이 마을이 아니여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마다 주막이 존재했다. 음식점과 술집, 여관 등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당하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주다 보니, 해당 지역 주민들의 신분을 뛰어넘은 교류의 장소이자, 지나가던 나그네들에게도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등,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시설 중 하나였다. 또한 마을에 주막이 단 한곳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의 주모는 가히 마을주민들의 대모로 통하기도 했다.

어떠한 마을에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거나, 무언가 중요한 행사가 벌어질 때는 주막을 잡기위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사람들을 상대로 숙박을 제공해주는 여관같은 시설이 당시엔 주막이나 객주말곤 없었다. 자리가 없어서 합숙을 하기도 했고, 합숙으로도 안돼서 마구간에서 자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진다. 구한말에 실제 이런 주막시설을 이용해 본 영국여성 이사벨라 비숍은 '좁은 방에 몇명이 들어사며 자는데 벌레가 들끓고 방은 화상 입을 정도로 뜨거웠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시절 주막은 온돌을 좀 쎄게 틀었을수도 있고, 아니면 이런 시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외국인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주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박만 하면 1냥, 삼시세끼 다 챙겨먹고 사소한 팁까지 챙겨주면 2~3냥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여관임에도 소란은 별로 없어서 가끔식 약주먹고 소란을 잠깐 부리는 아저씨들이나 조랑말이 지들끼리 싸우는 정도가 다 였던듯.[2] 북부지방에선 쌀밥대신 기장이 나왔다고 한다.

관직을 가진 높으신 분들은 지방으로 출장나가는 관리들은 보통 그 지역의 동헌 같은 관청이나 파말마를 관리하는 역같은데서 숙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3] 하지만 사적인 일로 지방에 내려갈 경우에는 주막이 없으면 민가에서 하룻밤을 청하는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4] 다만 높으신 분들이 투숙객들이 맥스 상태인 주막으로 뜨면 다른 투숙객들이 골치아파졌는데, 으레 높으신 분들독방을 원했기 때문. 이럴때는 신분이나 돈의 힘을 이용하여 투숙객들을 내 쫓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분을 내세워 독방을 원했던 높으신 분들이 큰코를 다친 사례도 많이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에 교리직이였던 어떤 양반 나으리가 첫 지방출장에서 신분을 내세워 한 방의 모든 투숙객을 쫓아냈다. 그런데 그 투숙객 틈에 신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묵고계시던 판서 나으리[5]가 끼어있었다. 아버지 산소에 제사를 드리러 가던 도중 우연스럽게 주막에 묵게 된 것. 판서는 그 자리에서 교리를 꾸짖고, 후일 이 사실을 임금께 고해 파직시켰다. 매우 훈훈한 이야기.

3. 기타

왜 조선의 숙박업이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 서양과 비교하면 초라한 편인 주막 정도만 발달했는가는 여러가지 설이 있겠지만 어느정도는 양반들에게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고 양반들이 숙박업을 탄압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조선시대 양반의 가계부를 보면 전체 수입의 1/3 정도를 접빈에 썼다고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봉 1억인 사람이 3,000만원을 손님에게 썼다는 이야기. 마디로 그 동네 유력한 양반집은 일종의 호텔(?)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

도데체 뭔 손님들에게 그렇게 돈을 썼었냐 하면, 친분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바로 길가는 나그네들. 옛날 야사나 동화, 사극을 보면 나그네들이 그 고을의 좀 살만한 집 문앞에 가서 하룻밤만 신세지고 싶다고 하면 그 집주인이 성격이 고약하거나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재워주고 식사도 주고, 노잣돈까지 쥐어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이는 실제로도 어느정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혼축객이라는 사자성어까지 있어서 밤늦게 재워달라는 나그네를 그냥 쫓아보내는 건 패륜으로 봤을 정도라니. 월남 이상재 선생도 젊을적에는 양반집의 식객으로 있었고 전봉준 같은 경우 흥선 대원군의 집에 눌러앉아 식객 노릇을 하기도 했다. 양반들이 얼마나 이를 중요시했는지는 지금도 양반 종가집에 남아 있는 말인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

양반들이 이렇게 손님을 대접하는데 열심이었던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관대함과 깍듯한 손님 접대를 보여줘서 인심을 얻고 자신은 양반이라 베풂을 실천한다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또 교통, 통신이 좋지 않아서 타지의 정보 모으기 힘들던 시기에 이야기를 하며 양질의 정보도 얻어낼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재산을 불리거나 손실을 최소화 하는데 이용했다. 대표적인게 경주 최부자 문중이다. 숙박비를 안 받으면서 번듯한 방에 재워주고, 운 좋으면 식사도 공짜에 노잣돈도 주는 호텔(?)들이 고을에 널려 있는데 숙박업이 기를 펴긴 어려웠을거란 얘기.

4. 사극에서

조선 후기를 다루는 사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삼국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조차도 등장하는 단골요소. 물론 고증은 이렇게 되면 안드로메다가 되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민적인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던지 계획을 꾸민다던지 하는 시츄에시션을 넣기엔 이보다 적절한 장소가 없기에 넣는듯, 고증에 무지한것도 있겠지만...

사극은 아니지만 부여-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바람의 나라에도 주막이 등장하며, 동동주와 막걸리를 판다(...).판타지니까 관대하게 넘어가자

의외로 주막 간 방대한 조직망이 있었던 모양이다.링크
----
  • [1] 고려가요 쌍화점에도 술파는 집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 [2] 물론 큰 싸움이 없었던건 아니라 가끔 양반님네를 수종하던 노비들이나 머슴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상전인 양반님네들이 뒷수습하느냐 쩔쩔매는 일도 있었다고(...).
  • [3] 물론 산길 등 관아가 가깝지 않은 경우 주막에서 묶었다.
  • [4] 물론 조용히 다닐경우 한정. 어느정도 권력이 있으신 자리에 계시는 높으신분들 중 행차를 거하게 하시는 분들이라면 행차소리를 듣고 지역유지들이나 지방관이 알아서 마중을 나와준다. 이런경우는 잠자리는 기본 제공이고, 권력의 정도에 따라 술자리에 기녀에 거마비까지 두둑히 찔러주는 경우도 있었다.
  • [5] 정승 바로 밑인데다가 이호예병형공 딱 6명밖에 없는 장관급 고위공무원.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2-19 17:40:28
Processing time 0.1225 sec